아마도 종교적 다양성에 관한 올바른 자세를 취하기 위해서는, 세계의 다양한 종교들을 “나의 혹은 우리의 종교가 아닌 종교
(not my or our religion)”나 혹은 ‘다른 종교
(other religions)’로 삼기보다는, 이웃 종교
(neighboring religions)로 삼고 인정하여 받아들이는 것이 첫걸음이어야 할 것 같다. 이것은 물론 그 이웃 종교들에 관한 최소한의 아량
(雅量)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렇지만 진정한 아량을 보이는 것이 겉으로 쉬운 것 같이 보이면서도, 사실상 지극히 어렵다. 왜냐하면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 끊임없이 종교적 우열을 가리려고 일어나는 자신의 마음을 제어하기가 수월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영국의 지배 아래에 있던 인도를 해방시키는 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마하트마 간디
(Mahatma Gandhi, 1869-1948)의 경우, 이웃 종교들에 있어서 한량없는 아량을 보이는 사람이 되기 위해 지독한 극기고행의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결국은 무슬림의 정치적 세력을 대표하는 무하마드 알리 진나
(Muhammad Ali Jinnah, 1876-1948)가 통일된 인도에서 힌두인들과 같이 살기를 꺼렸기 때문에, 간디가 꿈을 꾸던 대인도가 둘로 갈라져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핵무기를 휘두르면서 서로 적대시하는 파키스탄과 인도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안타깝지만 종교적 다양성에 있어서 대체적으로 종교인들의 원판이 충분히 너그럽지 못하다.
흔히 “우리나라는 다르다. 그러한 문제가 없다. 우리는 종교적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한반도에서는 종교 간 알력으로 인해서 큰 갈등이 생기거나 내전이 일어난 적이 없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이 내포하는 이상주의적인 역사관은 어느 정도까지만 현실을 반영해 줄 뿐이다. 실제로 한반도의 역사를 조금만 더 심도 있게 살펴보면, 싫겠지만 이와 같은 역사관을 반박할 수 있는 수많은 사건과 경우가 눈에 두드러지게 보인다.
뻔한 예로서 조선시대 내내 철저하게 실시한 억불숭유 정책이나, 19세기 가톨릭에 대한 끔찍한 일련의 박해를 들 수 있다. 또한 북한의 주체 사상과 그에 해당하는 극단적 공산주의가, 어떤 면에서 지극히 배타적이며 폐쇄적인 종교처럼 기능
(機能)하고 있다고 간주한다면, 해방 후에 터진 6·25의 골육상쟁이 종교와 전혀 무관한 사건이었다고는 주장하기가 어려워진다. 6·25이후의 예로서 소위 왜색불교를 나라에서 정화하기 위한 운동이라는 명분으로, 감리교 소속 이승만
(1875-1965)의 정권 하에서 벌어지기 시작하여 60년대 후반기까지 꾸준히 이어진 대처승들과 비구들의 치열한 권력 다툼도 들 수 있다.
현대 한국에 있어서는, 장로교 소망교회 소속인 이명박 대통령과 대한불교조계종 사이에 템플스테이
(temple stay) 프로그램 관련 정부 지원 예산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사건을 기억하기만 해도, 개신교와 불교와의 관계를 늘 알력이 없는, 아량이 가득한 것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예외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볼 때 한국 개신교의 다양한 종파들과 가톨릭이 서유럽에서처럼 교회 일치 운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교회 일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문화가 약하기 때문에, 개신교 신도와 가톨릭 신자가 서로 사랑해도 결혼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다. 결국은 크게 볼 때에 둘 다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결혼하기 위해서 둘 중 한 사람은 자신의 종파를 포기하고 상대편의 종파로 개종해야만 하는 경우들이 많다. 만일 불교 신도가 가톨릭 신자나 개신교 신자와 결혼하려고 한다면 더욱더 힘들어 질 수 있다.
필자는 서강대학교 종교학과에서 가르치면서 때때로 학과의 대학원에 입학 시험을 치르러 오신 목사님들을 위해서 면접을 진행해야 했다. 그들에게 종교학을 공부하려고 하는 동기와 목적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몇 분이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설교할 때마다 스스로 믿지도 못하는 것들을 가르쳐야 한다. 거짓말 속에서 사는 것 같아서, 너무 힘들다. 더 이상 저 자신을 속이고 싶지 않다. 다양한 종교들에 열려 있지 못하는 개신교 신학 말고도, 우리나라의 종교에 관해서도 배우고 싶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이런 저의 입장을 못마땅해 하기 때문에 제가 이 면접 시험을 보러 여기에 온 것을 알면, 즉시 저를 내보낼 것이다.”
그 목사님들이 마음속으로 깊이 느낀 바 대로, 어느 종교든지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이 되지 않는 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여 서서히 화석화되며, 맨 마지막에 가서 자기 타당성을 잃어버리게 되어 역사에서 사라질 수 있다. 소위 해석학적 순환
(hermeneutical circle)이 세 가지 요소인 전통, 맥락, 해석으로 그 끊임없는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준다. 즉 어느 종교의 신도들이라도 자기가 의지하고 신봉하는 종교적 전통의 경전들
(traditional texts or scriptures)을, 주어진 새로운 역사적 맥락
(context) 안에서 알맞게 해석
(interpretation)해야 한다. 바꿔 말해서 어느 종교든지 자기의 전통
(tradition)에 충실하면서도 변형
(transformation)할 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말하기는 용이하지만, 이 과정은 사실상 연역적이고 귀납적인 사고를 동시에 동원하는 변증법으로서, 어떻게 자기 종교의 최고 이상
(마루)을 실제적으로 현실 안에서 구현할 것인지에 관하여, 끊임없는 고민을 요구하는 줄타기와 같다. 우리 지구촌의 현황에서 어느 종교나 생존권을 유지하려면 이웃 종교들과 최소한의 교류를 할 줄을 알아야 한다. 다종교 문화권인 한국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그런데 국내외에서 모든 종교들이 예외 없이 상당한 폐쇄성과 배타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거나 들릴 수 있는 면이 없지 않아 있다. 그 예로서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그리고 불교의 순서대로 각각을 잘 대표해 주는 인용문들을 보자.
“우리는 안다. 어느 날 모든 세계의 민족들이 영원한 평화의 축제를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에서 평화를 이룰 것이고, 예루살렘에서 같이 기도할 것임을. 그리고 세계적인 형제애(형제의 연대), 세계의 통일과 인류 통일은 거기서 이뤄질 것이다.”
“이스라엘 건국 70주년, 그리고 이스라엘을 건국하기 위한 벨푸[Balfour, 1848~1930] 선언 100주년.”
<The Messenger: The Magazine of the Liberal Israelite Union of France>, 2017년 12월호 특집 기사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
(하나님, 하느님)께로 갈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4:6
“알라 밖에는 신이 없다. 마호메트 만이 유일한 알라의 예언자이다
(La ilaha illa Allah Muhammed asul Allah).”
하루에 다섯 번 하는 기도를 시작할 때 전 세계 모든 무슬림들이 외우는 내용
“하늘 위와 하늘 아래서 오직 나만이 높도다. 세계가 모두 괴로움이므로, 내가 장차 편안하게 하리라(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동국역경원에서 번역한 「보살강신품(菩薩降身品)」 중에서
이 모든 인용문의 공통점은 각각 자기 종교의 ‘마루’를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극도로 절대화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여러 원인 중 아마도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인류의 종교적 다양성을 감당하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역시 그 다양성을 받아들인다면, 자신의 삶에 의미와 존재 이유를 부여해주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종교가, 상대적인 것으로 변해서, 그 가치가 떨어질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구촌에서 더불어 함께 사는데 지나치게 절대화된 ‘마루’가 너무 많고 다양해서, 그들 사이에서 인류의 평화를 위협하거나 부수어 버리는 위험한 경쟁 및 대립관계가 계속 일어나고 있음을 경시할 수 없다.
한편 인류의 종교사를 인문학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에, 이렇듯이 절대화된 종교들의 모든 ‘마루’들은 예외 없이 전부 다 상대적일 뿐이다. 물론 이것은 종교학자의 소위 객관적인 입장과 종교인의 소위 주관적인 입장이 정반대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객관성과 주관성이 대립하는 문제로만 바라볼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인문학의 주관성과 종교 체험의 객관성을 각각 과소평가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러다가는 “종교인의 체험이야말로, 객관성이 완전히 결여된 순수한 주관주의다.”라는 엉뚱한 결말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는 종교인의 고유한 체험이 가지는 상대성과 절대성을, 혹은 주관성과 객관성을 동시에 살릴 수 있을까?
대저 여러 종교가 으뜸으로 삼는 원칙이나 궁극적 목적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종교적 다원주의
(多元主義)라고 하면, 종교인들, 그중에서도 특히 불자들에게 거부반응을 강하게 일으킬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이 종교적 다원주의란 한덩어리로 된 개념
(monolithic concept)이 아님을 모른다. 사실 종교적 다원주의는 다원적 다원주의, 포괄적 다원주의, 일원적 다원주의 등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셋을 설명하기 위해서 종교생활을 높은 산에 올라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다원적 다원주의에 따르면 인류의 종교의 수가 많고 다양한 것만큼 산들도 많다. 그런데 그 산들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에, 그 산들을 올라가고 있는 등산객들이 서로를 만날 가능성이 전혀 없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인류의 종교들이 너무 많고 다양하기 때문에, 공통분모를 찾아내서 진정한 대화를 나누기가 영원토록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환언하자면 종교 간의 유사성을 못 보고 극단적으로 차이성만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포괄적 다원주의에 따르면, 산은 하나밖에 없지만 인류의 종교들은 각각 그 산의 꼭대기로 올라가는 다양하고 고유한 오솔길들과 같다. 그런데 산의 꼭대기는 다름아닌 자신이 신봉하는 종교의 ‘마루’와 같다. 결과적으로 아량이 있어서 이웃 종교들을 어느 정도까지만 인정해주고 난 다음에, 마지막에 가서 ‘포괄’하는 즉 자기 수하에 집어넣는 입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집
(我執)을 일으키는 “우리 종교는 최고다.” 라는 아상
(我相)을 벗어나지 못한다.
일원적 다원주의는 인류의 종교들이 각각 그 산의 꼭대기로 올라가는 다양한 오솔길과 같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꼭대기에 아무 ‘마루’도 세우려고 하지 않는다. 왜 그러냐 하면, 그 꼭대기는 아무도, 아무 종교도 영원토록 언어화하거나 차지할 수 없는 오묘한 언어도단의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많은 오솔길들 중 어떤 것도 산의 마루와 동일시할 수 없다고 해서, 그 오솔길들이 산꼭대기를 향해 있는 한, 그 산꼭대기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바꿔 말해서, 산길과 산꼭대기와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역설적으로나마 고수하며 강조하는 입장이다.
오로지 이 입장만이 종교적 체험의 절대성과 상대성의 양극단을 피할 수 있게 해 준다. 동시에 그 체험의 주관성과 객관성을 유지함으로써 모두 살려준다. 바꾸어 말하자면, 자신이 올라가는 오솔길은 수많은 산길들 가운데서 하나일 뿐임을 확실히 알면서도, 자신이 충실히 따라가는 오솔길로서는 둘도 없는 고유한 산길로 삼는 것이다. 다른 비유로 설명하자면, 자신의 모국어는 다른 언어로 도저히 대체할 수 없을 정도로 고유하면서도, 관심만 있으면 배울 수도 있는 인류의 수많은 언어들 가운데서 하나일 뿐이다.
오로지 일원적 다원주의만이 진리에 관한 대화적 접근 방식, 즉 더불어 함께 오묘한 ‘마루’를 향해서 진리를 끊임없이 찾아내려고 하는 종교적 생활 방식을 허락한다. 자신이 이웃 종교가 다니는 산길에 대해 얼마든지 관심을 가질 수 있듯이, 이웃 종교 역시 자신이 다니는 산길에 관한 관심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 모든 오솔길들이 언어화 할 수 없는 꼭대기를 향해 있기 때문에, 그 산길들이 “다 완전히 다르다”라고 하기보다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오솔길들이 전부 다 둘도 없는 고유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지나친 상대주의를 대표하는 “이 산길이나 저 산길이나 다 똑같다”는 주장을 함부로 할 수 없다.
“이웃 종교와의 대화”란 19세기에 막스 뮐러와 함께 나타난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고대에서 인도를 무력으로 통일시키고 난 다음에 아쇼카 대왕
(Aśoka, 기원전 304 ~ 232)이 백성을 위해서 나라 도처에 세운 돌기둥이나 큰 바위에 새기게 한 칙령의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 칙령에서 아쇼카는 백성들에게 다른 종교의 가르침에도 귀를 기울일 것을 권고하고 있다. 아쇼카는 이렇게 함으로써 각각의 신조들이 세부적으로는 다르다 하더라도 중요한 점에서는 일치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보게 되는 효과를 가져오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의 관심이 모든 종교의 본질적인 것이자 일치점들에 쏠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아쇼카는 사람들이 다른 집단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많은 것을 배우고 박식하게 되며, 만족스런 방식으로 자신의 종교 체계를 발전시켜 나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다른 신조들에 관한 지식을 갖게 되면 다른 신조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게 될 것이며, 다양한 신조들 속에서 일치의 느낌을 증진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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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종교학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칙령의 내용으로 미루어서 일원적 다원주의자로 여길 수 있는 아쇼카 대왕은, 백성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살기를 원한다면, 종교 간 대화를 통해서 종교 간 알력과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도록 노력해야만 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