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
추함,
버림받음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노애경
고려대학교 영어교육과 교수.
버리는 사회
넘치는 소비 생활에 치여 이젠 버리는 미니멀리즘이 해법이 된 시대이다. 비효율적이고 걸리적거리는 것들은 정리 대상이다. 유행 변화가 속도전이다 보니 물건을 버리는 주기도 점점 더 짧아졌다. 물건만 버리는 건 아니고 데리고 살던 강아지도 종종 갖다 버린다. 옷이야 가전이야 똑같은 모양을 하고 공장에서 몇 천, 몇 만 개가 만들어지는 대체 가능한 것들이지만 숟가락 모양 갈색점이 콧등에 흩뿌려진 그 버려진 강아지는 대체가 안 된다. 생명 피라미드 최상단에 위치한 사람의 삶도 ‘쓰고 버려지는’ 대체 가능한 물건의 주기와 닮은 꼴일 때가 있다. 정규직 전환 시점이 도래하자 “오렌지 껍질처럼” 1) 쓰고 버려진 비정규직 얘기는 낯설지가 않다. 물건을 버릴 땐 자연 훼손이 걱정이지만 사람을 버리는 건 영혼 훼손이 걸린 문제이다. 인간을 물건처럼 취급해 ‘비인간’으로 강등시켜 버린다.
   산 존재가 땅으로 꺼지거나 하늘로 솟구치지 않는 이상 ‘버린’ 쪽이 있으면 ‘받아들이는’ 쪽이 있어야 하는 게 이치고, 세상은 그래서 둘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쪽으로 나름 진보를 해왔다. 2020년 여름 New York Times와 BBC가 조명한 카라 보스(Kara Bos)는 한쪽에서 버려졌지만 지구 다른 쪽에서 받아들여져 살아남은 입양아이다. 1983년 괴산에서 강미숙이라는 이름의 두 살 미아로 발견돼 이듬해 미국 미시건의 한 가정에 입양된 그녀는 자신이 입양되던 해에만 7900여 명에 달하던 한국 발 해외 입양아 중 하나였다. 결혼 후 네덜란드에 정착해서 낳은 아이가 자신이 길에 버려졌던 나이인 두 살이 되자 “이 정도 나이의 아이를 버린다는(abandon) 게 무얼 의미하는지를 뼈저리게 깨닫고” 불현듯 그녀는 생모가 고통스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알고 싶어졌다. 어머니와 “관계(relationship)” 맺고 “유대(bond)”를 갖고 싶었던 그녀는 여러 노력 끝에 자신의 유전자 정보를 온라인 족보 플랫폼에 등록해 매칭되는 이를 찾았는데 다름 아닌 영국 수학 중인 친부의 손자였다. 그러나 85세 아버지와의 서울 만남을 이복 자매들은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2019년에 한국 입양사에 전례가 없는 유전자 검사와 친자 확인 소송을 통해 친부의 주소를 손에 쥐게 됐지만, 첫 대면한 아버지는 어머니의 생사는 고사하고 “손을 휘저으며 [그녀를] 내쫓았고(waved her away)” 이복자매들은 그녀가 가택 침입을 한 것이며 한 가족이 될 수 없다고 못박았다. 2)
   인터뷰에서 눈물을 보이던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그 존재를 부정한 아버지와 그의 현재 가족이 “인간적이지 않았으며(can’t be human)” 거부와 상처만 남겨준 한국 사회를 향한 마음을 닫겠다고 말했다.


엄마를 찾는 딸일 뿐인데 그런 나에게 그들은 인간적이지 않았다. 내가 가진 인간으로서 기본 권리보다 더 중요한 건 그들이 직면하게 될 창피와 수치심이었다. 이해하기 어려웠고 그 모든 부당함에 울분이 일었다. 한국이라는 나라, 사회, 한국과 함께 한 내 정체성까지 받아들이려고 마음을 열었지만 그걸 이제 닫으려 한다. 셀 수 없이 거부당하고 상처받았다. 이젠 집으로 가고 싶고, 내 집은 가족이 있는 암스테르담이다. 3)

   보스의 예는 자신의 뿌리 찾기 노력이 좌절로 끝나는 적지 않은 입양아들의 경험을 대변한다. 버려지고 존재를 부정당한 그녀가 생부에게 붙인 “인간적이지 않았다”는 수식어는 자기로부터 갈라져 나온 ‘생물학적 인간’을 ‘사회적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 범주에서 삭제시켜 ‘인간이되 비인간(human nonperson)’으로 강등시켜 버린 부성을 일컫는다. 두 번을 거듭 버려진 자식의 가치는 인간이 아니라 버려도 되는 ‘물건’에 수렴한다. 버려진 자의 입장에서 뒤집어 말하면, “인간적” 이란 자신을 버려도 되는 물건이 아니라 받아들여질 인간으로 취급해 주는 것, 즉 자식으로, 가족/사회의 성원으로 인정해주는 것이다.
“인간적이지 않은” 아버지
버려진 후 생부를 찾았지만 사회적 존재로서 가치를 부정당한 보스는 구체적 상황 차이는 있지만 소설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 1818)의 구도를 떠올리게 하는 측면이 있다. 소설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생명이 주어진 괴물(“Monster”)은 이름 없이 버려진 후 자신의 창조자 프랑켄슈타인(Victor Frankenstein)을 찾아가지만 역시 자기 존재의 가치를 부정당한다. 괴물을 좇다 조난당한 프랑켄슈타인이 북극 탐험가 월튼(Walton)에 의해 구조되면서 시작되는 소설은 그의 성장과정, 그리고 인조 인간을 만든 후 맞게 된 파멸의 인생 역정을 듣게 된 월튼이 자신의 누이에게 다시 편지로 써서 전달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한 과학자의 인간을 본뜬 생명 창조에 대한 열망이 가공할 힘과 흉측한 신체를 가진 괴물을 낳고 이로 인해 그의 가계가 송두리째 파멸로 치닫게 되는 줄거리를 담은 공상과학소설의 효시가 된 작품이다. 낭만주의 시인 셸리(Percy Bysshe Shelley)의 배우자로 알려진 메리 셸리(Mary Shelley)가 18살이던 1816년에 착수해 2년 후 익명으로 출간하였으며, 이젠 하나의 문화적 아이콘이 된 배우 카를로프(Boris Karloff)가 1931년 열연한 영화의 스틸 컷 4) 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소설의 표면적 메시지는 과학 발전과 새로운 영토/식민지 탐색 등으로 대변되는 계몽주의적 인간 이성과 문명 확장에 대한 회의를 담고 있다. 북극으로 향하는 배를 진두지휘하며 새 대륙 탐험을 통해 인류에 공헌하겠다는 꿈에 부푼 탐험가 월튼에게 자신의 패배한 삶을 전하던 프랑켄슈타인은 경고한다. “나를 보고 배우시오. 내 조언을 들으라는 게 아니라 나를 반면교사로 삼으란 뜻이오. 지식의 추구가 얼마나 위험한 건지, 자연을 넘어서려고 하는 이보다 자기가 살던 곳이 세계의 전부려니 여기고 사는 이가 얼마나 더 행복 한지를 말이오”(53). 5)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금기에 도전한 지식 추구가 아니라 생명을 존중하지 않은 윤리가 그의 삶을 파괴한 진짜 동인임을 그가 모른다는 게 더 문제이다. 생명윤리(bioethics)가 지금처럼 제도화되지 않은 근대 유럽임을 감안하더라도, 자신이 창조한 생명을 “기형”이고 “추해서” “물체/물건”처럼 5) 버린 뒤 돌봄의 책임을 방기한 프랑켄슈타인의 행위는 “인간적이지 않은” 아버지의 그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은 따라서 버려진 괴물의 복수에 앞서 버린 ‘인간’의 ‘괴물성’을 문제 삼아야 하는 작품이다. 프랑켄슈타인이 “인간적이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생명/자식의 ‘사회적 존재’로서 무가치를 한낱 ‘시각’으로 판단해 버린 그 생명윤리에 있다. 비유하자면 그는 흉측하게 생긴 기형 자식을 차마 봐줄 수가 없어 버리고 도망친 아버지이다. 훗날 재회한 그에게 괴물이 문제 삼는 건 바로 이 부분이다. “나의 창조자, 당신은 날 혐오하고 경멸하지, 우리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풀어질 끈(ties)으로 당신에게 연결된 생명을 말이오. 당신은 날 죽이려 하오. 어찌 감히 이렇게 생명을 가지고 장난을 하시오? 나한테 의무를 다 하시오. 그럼 나도 당신과 나머지 인간들에게 내 의무를 다 할 테니까”(99).
실험실에서 빚은 자식
프랑켄슈타인이 월튼에게 털어놓은 괴물을 창조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기질적으로 부나 지위보다 지식에 목말랐던 그는 “자연 세계의 비밀을 알고자 하는 열망”(37)을 안고 고향 제네바로부터 바바리아 지방의 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생명 비법”(40)을 찾아내 “인류가 가보지 못한 길을 개척하고 알지 못했던 힘의 역학을 발견할 것이며, 마침내 세상을 향해 생명 창조의 심오한 수수께끼를 풀겠다”(48)고 다짐한 그는 대학에서 근대 화학, 생리학, 해부학 등의 섭렵 과정을 거치며 “8피트에 달하는 거구”(54) 7) 의 인간을 창조하는 실험에 몰입한다. 이 인조인간을 창조하기까지 2년여에 걸친 과학 실험 과정은 다소 엉성하게 서술된다. 낭만주의 작가의 ‘상상력’ 8) 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건 과학적 개연성의 여부가 아니라, 묘지, 납골당, 해부실과 도축장을 떠돌며 사체의 뼈와 살과 장기를 수집해 잠을 설쳐가며 실험실에서 그것들을 조합한 한 과학자의 광기에 가까운 집념,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낸 공포스러운 창조물이다. 이 공포는 비 내리는 초겨울 밤, 기괴한 외모의 인조인간이 탄생하는 순간 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발작적으로 손발을 휘저으며 “광채 없이 누런 눈(dull yellow eye)”을 뜨던 “창조물(creature)”의 탄생 순간을 묘사하던 프랑켄슈타인은 회한에 잠긴다.

그 엄청난 파국을 맞은 내 감정을 어찌 묘사할 수 있을까, 아니, 온갖 고생과 정성을 쏟아 만든 그 처참한 놈(the wretch)을 어찌 묘사할까? 손발의 비율은 맞았소. 그런데 외모도 아름답게 만들려고 조합을 해 뒀단 말이지. 아름답게! 신이여! 근육과 혈맥을 겨우 가린 누런 피부에 번쩍대는 검은 머리, 허연 이빨, 이 모든 걸 배경 삼아 흉측히 자리 잡은 칙칙한 흰색의, 안골과는 그 색 구분도 안 되던 눈물범벅의 눈, 주름으로 뒤덮인 얼굴과 검은 입술....죽은 몸에 생명을 불어넣겠다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거의 이 년을 바쳤소. 휴식도 건강도 안중에 없었지....모든 게 끝났는데, 꿈꾸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가슴엔 숨 막히는 공포와 혐오만이 들어찼소. (57)

   환멸감에 몸서리치다 잠시 잠든 프랑켄슈타인은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 거리며 자신을 붙들려고 하는 “처참한 모습의 괴물(the miserable monster)”에 잠을 깨 혼비백산 도망쳐 버린다. “괴물”이 탄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아버지”가 “자식”에 대해 품을 법한 기대에 부풀어 있던 터였다. “새로 창조된 생명체는 창조주이며 원천인 나에게 감사할 것이며 그가 지니고 태어날 훌륭하고 흡족한 본성은 다 내게 빚진 것이다. 세상 그 어떤 아버지(father)보다도 새로 태어날 자식(child)의 고마움을 받을 자격이 내게 있다”(54). 창조물이 한순간에 “자식”에서 버림받아 마땅한 “괴물”로 역전한 결정적인 단 하나의 이유는 “추한” 외모이다. “꿈꾸던 아름다움” 대신 “공포와 혐오”를 주는 “괴물”의 생김새를 회상하던 프랑켄슈타인은 아버지로서, 창조자로서 책임을 내팽개치고 도망친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산 인간이라면 그 얼굴이 주는 공포를 참아내지 못할 게요. 차라리 환생한 미라가 처참한 몰골의 놈보단 덜 끔찍하게 추할 거요. 작업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그놈을 바라본 적이 있지. 그때도 추하긴 했지만, 나중에 근육과 관절을 움직일 수 있게 됐을 땐 단테도 상상해내지 못 할 물체(a thing)가 되었소”(58).
   프랑켄슈타인이 느낀 공포와 실망은 창조물이 추하다는(“hideous”; “ugly”) 데 있지만 후에 괴물이 드러내는 “초인적 속도(superhuman speed)(98)나 물리적 힘, 버려진 후 프랑스인 오두막에 기생해 살며 그들 언어를 “두 달 만에”(118) 깨우치고 역사서를 섭렵하는 지능은 인간으로부터 기능적으로 진화한 19세기형 ‘터미네이터’를 연상시킨다. 엄밀히 말해 여기서 과학자인 그가 실험의 성패를 기능이 아닌 보기 좋은 미관으로 판단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예컨대 신화 속 ‘예술가’ 피그말리온이 자신이 창조한 여자를 관능적 아름다움의 잣대로 평가한 건 ‘나름’ 설득력이 있지만 ‘과학자’ 프랑켄슈타인이 창조물의 가치를 자신이 “꿈꾸던 아름다움” 여부로 판단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이 의아한 설정은 그러나 한 가지 의미심장한 문명 비판의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인류가 가보지 못한 길을 개척하고 알지 못했던 힘의 역학을 발견할 것이며, 마침내 세상을 향해 생명 창조의 심오한 수수께끼를 풀겠다”던 과학자 프랑켄슈타인. 그의 다짐은 무지를 깨고 자연을 정복하겠다는 계몽주의자의 낙관이다. 그러나 인류를 무지와 편견에서 해방시켜 문명을 추동하리라 믿었던 계몽주의 이성은 프랑켄슈타인의 순전히 ‘눈’의 감각에만 기댄 외모 편견에서 퇴행을 드러낸다. 여기서 소설은 인류가 판단 이성의 측면에서 진정 진보한 것인가를 묻는다.
   흔히 상해나 화재, 혹은 태생에 의해 외모 기형을 가진 이들에 대한 비이성적인 혐오를 ‘테라토포비아(teratophobia)’라고 부른다. 『프랑켄슈타인』은 결국 한 ‘이성적’ 과학자의 시각에만 의존한 외모 판단, 다시 말해 ‘비이성적’ 테라토포비아로 말미암아 버려진 기형의 자식이 ‘복수혈전’을 벌이는 스토리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이성의 창으로 기능하는 과학자의 눈은 과대평가된 나머지 대상의 외면 너머를 보지 못 하는 장애를 갖는다. 거기에 더해 그는 기형적 외면을 도덕적 해악과 동일시하는 우를 범한다. 그는 창조물의 기형적 외모를 지칭하는 “괴물”을 도덕적 판단이 개입된 단어인 “악마”의 다양한 변이형(daemon, 76; fiend, 92; devil, 99)으로 빈번히 교체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동생 윌리엄의 갑작스런 죽음을 전해 듣고 제네바의 본가로 향하던 프랑켄슈타인이 폭풍우 속에서 버린 지 2년 만에 괴물과 첫 조우를 할 때 그는 즉각적으로 괴물의 “기형”을 포착해내고 “악마”와 동일시한다. “번갯불이 뭔가를 비춰 보였는데 그 형상을 바로 알아보았지. 엄청난 키며, 인간에게 발견하기 어려운 흉측한 그 기형(deformity)의 생김새며, 내가 탄생시킨 그 저주받을 놈, 더러운 악마라는 걸 바로 알아봤소”(76). 이 첫 재회에서 괴물은 말 한마디 없이 순식간에 사라졌을 뿐인데도 프랑켄슈타인의 시각은 즉각적으로 그의 “기형”을 포착해내고 “악마”와 동일시하며 곧바로 동생의 살해자가 그일 거라 “확신한다”(76). 나중에 괴물이 실제 살해자로 드러나긴 하나, 더 중요한 건 외모의 흉측함을 곧 범죄의 사인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소중한 모든 걸 파괴할 거라고 믿는 프랑켄슈타인의 조건 없는 공포이다.
   억울하게 도덕적 악함과 동일시되고 있는 기형은 낭만주의 시대의 장애 분류에 따르면 도덕성은 고사하고 기능적 장애와도 거리가 있는 ‘외모’ 장애였다. 18세기에 지금 흔히 쓰이는 용어 ‘장애(disability)’를 대신한 건 ‘기형(deformity)’, ‘결함(defect)’ 같은 용어였는데, ‘결함’은 18세기 사전의 거장 존슨(Samuel Johnson)에 따르면 어떤 신체 부분이 없거나 결핍된 것을 이르는 기능 장애를, ‘기형’은 “주근깨, 천연두 자국, 외눈, 치아 없음, 난쟁이, 팔다리 상실”처럼 “눈에 잘 보이는 태생적이거나 후천적인 손상”을 묘사한 단어로서 사람의 “기능(function) 문제를 가리킨 건 아니고 대개는 미관적(aesthetic) 측면에서 이해되었으며” 정도가 심한 기형을 가진 이들을 가리켜 흔히 “괴물”이라는 단어가 통용되었다(Joshua 47-48). 따라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에게 따라다니는 묘사어로서 “기형”은 “아름다움의 반대”(Joshua 55) 개념이다. 9)
   프랑켄슈타인이 실험실에서 만든 “자식”을 뒤돌아보지 않고 버린 이유는 자신이 “꿈꾸던 아름다움”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태어난 그의 기형, 다시 말해 외모 때문이다. 이 이성적 과학자는 창조물의 기형적 추함(“괴물”)을 도덕적 해악(“악마”)과 동일시하는 비이성적인 편견을 통해 자신의 외모 중심 판단을 합리화한다. 프랑켄슈타인과의 재회에서, 그간 인간 사회로부터 겪은 박대와 소외를 쏟아내던 괴물이 그를 “적”으로 정하고 소통하지 않으려는 창조자/아버지에게 끊임없이 경청해 주기를 호소하는 부분은 자신의 기형적 외모와 내면의 도덕성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들의 시각적 편견이 자신이 원래 가졌던 선한 의도를 볼 수도 없고 또 봐주지도 않더라는 것이다. “내가 어떤 애원을 해도 자비와 동정심을 간청하는 당신의 창조물을 호의적인 눈(favorable eye)으로 돌아봐 줄 순 없는 것이오? 기억하시오 프랑켄슈타인, 사랑과 인간성(humanity)으로 찬 영혼을 가진 나는 원래 정이 있는 존재였소. 하지만 난 처절하게 혼자가 아니오? 나의 창조자인 당신이 나를 혐오 하는데 나한테 빚도 없는 당신의 동료 인간들에게 내가 무엇을 바라겠소? 박대와 증오밖에는.”(100) 괴물이 결국 창조자인 프랑켄슈타인을 찾아 나선 길에 마주친 그의 동생 윌리엄을 충동적으로 살해한 주된 이유도 도저히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단단한 문화적 편견의 두께 때문이다. “이 어린 생명은 편견도 없고 기형에 대한 공포심을 빨아들이기엔 아직 얼마 살지도 않았다. 그러니 붙잡아 내 동무로 교육시키면 사방이 인간인 이 땅에서 내가 그리 고독해 하지 않아도 될 것”(142)이라고 가늠한 괴물이 윌리엄을 끌어당기자 아이는 “내 형상을 보자마자 손으로 자기 눈을 가리며 소리를 지르고” 기형적 외모에 대한 편견을 날 것 상태의 아이 화법으로 내뱉는다. “괴물! 못생긴 놈! 날 잡아먹으려고, 날 짓이겨버리려고 그러는 거 다 알아—넌 아이 잡아먹는 괴물이잖아(Monster! ugly wretch! you wish to eat me, and tear me to pieces—You are an ogre)(142).
   윌리엄에서 프랑켄슈타인까지 노소를 구분 않는 테라토포비아는 소설의 배경인 근대 이전부터 역사적으로 존재하던 것이다. 르네상스 수필가 몽테뉴(1533-1592)는 거리에서 앵벌이에 동원된 14 개월 된 두 개의 몸통을 가진 아기를 마주친 경험을 소재로 “괴물로 태어난 아이”(1580)를 썼다. 10) “우리가 괴물 취급하는 이들이 실은 조물주가 창조한 수많은 형상들 중 하나일 뿐 신은 정작 이들을 괴물로 보지 않는다”는 요지의 글이다. “일반적인 모습과 다른 걸 우리는 자연을 거스르는 것으로 취급하지만 자연에 거스르는 그 무엇이란 애초에 없는 것”이며, 이는 차별하는 어리석음에 대항해 가져야 할 “보편적이고 자연스런 사고”라고 몽테뉴는 결론 짓는다. 기형아는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신과 자연 앞에서 동등한 “창조주에게는 하나의 고유한 생명체”일 뿐이다. 몽테뉴가 말한 창조물의 외형에 대한 창조주의 수평적 관점을 프랑켄슈타인은 완전히 결여하고 있다. 창조자로서, 아버지로서 그는 ‘다름’의 평등성이 아니라 ‘틀림’의 위계성으로 자식의 외모를 평가하고 유기했기 때문이다.
버려진 자식의 삶
버려진 괴물의 삶은 어땠을까? 괴물도 자신이 기형이라는 걸, 다르다는 걸 자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버려진 후 그의 여정을 읽어 내려가는 독자는 감정을 느끼고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그가 우리 인간과 다름없음을 자각하게 된다. 프랑켄슈타인의 실험실을 벗어나 정처 없이 떠돌던 그는 오두막에 사는 드 레이시(De Lacey)라는 성을 가진 프랑스인 가족의 별채 헛간에 숨어 살며 인간 사회를 관찰하고, 상냥하고 고결한 생활태도를 가진 그들에게 받아들여지기를 꿈꾸기 시작한다. “그들이 불행할 때 나도 낙담했고, 그들이 기뻐할 때 그 기쁨에 공감했다”(112)고 하는 그는 한 터키인 상인의 탈출을 도와준 대가로 사회에서 추방당한 그들의 처지에 대해 알게 된다. 그들의 가난함의 원인을 알게 된 그는 “깊게 공감하며”(110) 훔쳐 먹기를 그만두고 몰래 나무 땔감을 마련해 그 불행을 덜어주려 애쓴다. “내가 얹혀살던 이들의 오두막이 내가 인간 본성을 관찰하고 알게 된 유일한 배움터”(129)였다고 회상한 그는 드레이시 가의 젊은 청년과 아가씨가 앞을 보지 못 하는 “아버지라 불리는 이름의 노인”(112)과 맺은 상냥한 가족관계를 보게 되며, 이들과 비교해 흉측하게 생긴 자신의 기형적 외모에 대한 자의식도 갖게 된다. “오두막 사람들의 품위, 아름다움, 섬세한 얼굴로 완성된 외모(forms)를 우러러보다 웅덩이에 비춰진 내 모습을 보곤 경악했다...실제로 내가 괴물이란 확신이 들자 나는 쓰라린 낙담과 굴욕으로 가득 찼다”(114). 11) 드 레이시 가족으로부터의 도움을 되갚지 않고 그들을 추방자 신세로 만들어버린 터키인 아버지를 배신하고 도망쳐 온, 이 가족의 큰 아들 필릭스(Felix)와 결혼하고자 하는 사피(Safie)라는 이름의 이방인 여성도 등장하는데, 그녀가 유럽의 언어와 역사를 학습할 때 괴물도 곁에 숨어서 귀동냥을 통해 학습한다. 훗날 대면하게 될 드 레이시 가족이 “내 외모의 기형을 넘어설 수 있게”(114) 의사소통 준비가 필요하다고 여긴 괴물은 사피보다 훨씬 빠르고 완벽하게 언어를 깨쳐 역사서와 문학을 훔쳐 읽는 경지에 이른다. 그러나 “아는 게 늘어날수록 오로지 내가 얼마나 비참한 추방자(wretched outcast)인지만 더 확인할 뿐이었다”(131).

“나는 도대체 누구였던가? 나를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나는 알 길이 없었소. 하나 확실히 안 건 내겐 돈도, 친구도, 소유한 재산도 없다는 것. 게다가 흉측하게 기형이고 혐오스런 모습을 하고 있었소. 사람하고는 그 특성에서 달랐소. 그들보다 민첩하고 질이 떨어지는 음식을 먹고도 더 잘 견디고, 극한의 추위나 더위에도 몸을 덜 상하고 키는 훨씬 컸지. 주변을 돌아보니, 나 같은 이는 보지도 듣지도 못 했소. 그럼 난 괴물, 지상에서 지워버려야 할 오점이었던가, 모든 인간이 나를 보고 도망치거나 내쳤으니 말이오?” (120)

   “돈도, 친구도, 재산도 없는...기형이고 혐오스런 모습”을 한 괴물은 드 레이시 “가족을 관찰할수록 그들의 보호와 친절을 받아보고 싶단 열망이 간절해졌다.” “그들의 애정이 담긴 다정한 눈길(sweet looks)을 받아보는 게 내가 꿈꿀 수 있는 최대치”라 여기게 된 그는 “그들이 경멸과 공포로 그 눈길을 차마 거둘 거라곤 생각지도 않았다. 문 앞에 구걸 온 이도 그냥 돌려보내는 법이 없는 이들이었으니.” 괴물의 받아들여지고 싶은 희망이 커질수록 앞으로 맞닥뜨릴 실망의 진폭은 커져간다. “내가 원한 건 사실 음식이나 거처보다 더 귀한 친절과 동정이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그걸 원할 자격이 없다곤 믿고 싶지 않았다”(132).
   자신을 쳐다본 이들마다 그 기괴한 흉측함 때문에 공포심을 가진다는 걸 아는 그는 어느 날 드 레이시 젊은이들이 외출한 틈을 타 숨어 있던 헛간 밖으로 나와 그들의 장님 아버지와 몰래 배워온 언어로 “목소리” 소통을 시도해 보기로 결심한다. 오두막의 문을 두드리고 장님인 노인을 마주한 그는 “내가 정말 사랑하고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었으면 하는 몇 친구들에게 지금 보호를 청하려 하며” “거기서 실패하면 세상에서 영원히 추방자(outcast) 신세”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노인은 “자기 이익에 의해 편견을 갖지 않은 인간의 마음은 형제애와 자비로 가득 차 있는” 법이라며 “선하고 우호적인 친구들이라면 절망하지 말라”(134)고 위로해 준다. 노인에게 털어놓는 괴물의 고뇌는 친절한 “그들의 눈을 치명적 편견이 가려” 그의 모습에서 “감정을 가진 친절한 이를 봐야 하는데 오직 징그러운 괴물만을 본다”(134)는 것이다. 자신이 추방자로서 불행을 겪은 바 있는 장님 아버지는 프랑켄슈타인이 주지 않았던 위로와 공감을 괴물에게 선사한다. “동정심”에서 우러나오는 장님 아버지의 “인간성(humanity)(135)에 괴물은 곧 있을 그의 자녀들과의 만남이 성공할 것 같은 기대에 부풀면서도 동시에 자신에 관한 구체적 진실을 밝혀야만 하는 무게에 짓눌려 울기 시작한다. 노인의 손을 붙잡고 바로 그의 “가족이 내가 찾던 친구들이니, 고난에 처한 나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괴물이 진심을 털어놓는 순간 자녀들과 사피가 들이닥치고 그 순간을 프랑켄슈타인에게 묘사하던 괴물은 탄식한다. “나를 쳐다보던 그들의 공포와 경악을 어찌 묘사하리오?”(135) 큰 아들에 의해 노인으로부터 분리돼 내동댕이쳐진 괴물은 몽둥이질을 저항 없이 받아 내다가 결국 도망쳐 나오기에 이른다.
   고대했던 드 레이시 가족과의 만남이 실패한 후 괴물은 “자신이 인간과 화합하는 걸 막는 극복 불가능한 장벽은 인간의 감각(the human senses are insurmountable barriers to our union)(145)이라고 결론짓는다. “내 외모의 기형을 넘어설 수 있게끔”(114) 인간과의 소통에 필요한 언어를 그렇게나 열의를 가지고 독학했지만 제대로 된 소통의 기회는 시각의 장벽 앞에서 막혀 버렸다. 다정하고 선량해 보이던 드 레이시 가족이 종국에 시각에 의한 판단만으로 그를 내친 것을 탄식하고 있지만, 이 결론이 일차적으로 소환하는 인물은 괴물을 두고 “얼굴의 추함이 인간이 눈으로 쳐다보지도 못 할 정도로 끔찍하다(its unearthly ugliness rendered it almost too horrible for human eyes)(99)고 한 그를 창조한 아버지이며, 결국 그의 ‘눈’이 가장 문제다.
시각에 의한 외모결정주의
고대 영웅 오이디푸스가 후세에 전한 뼈아픈 충고는 ‘보이는 것만 보지 말라’는 것이다. 테베 시의 구원자라는 자아도취에 젖어 자신이 저지른 부친 살해와 근친상간의 중죄를 보지(foresee) 못 한 오이디푸스에게 눈먼 예언자 타이레시아스는 눈이 일으키는 장애를 역설한다. “그대가 나의 눈먼 것까지 조롱하시니 말씀드립니다만 그대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197). 12) 보이는 것에 근거한 판단의 오만함은 영웅의 몰락으로 이어진다. 눈이 문제가 되는 다른 듯 낯익은 패턴을 우리는 시각 판단의 함정에 빠진 계몽주의 영웅 프랑켄슈타인과 그 외 등장인물들에게서 본다. 눈먼 예언자는 눈먼 가부장 노인으로 교체되고 그와 사는 볼 줄 아는 자녀들은 괴물의 외면 너머를 보지 못 한다. 볼 수 없는 노인만이 소설을 통틀어 괴물의 보이지 않는 내면을 ‘볼’ 가능성이 가장 많은 인물이다. 괴물이 유일하게 연민과 공감의 소통을 기대할 수 있었던 상대는 결국 이 맹인 아버지이며 이 소통은 또한 소설에서 유일하게 장애를 가진 이들의 소통이기도 하다. 장애학(disability studies)에서 쟁점화하는 ‘정상(normalcy)’이 문제인 건 이런 이유에서이다. 눈 너머로 소통할 수 있는 두 장애인과 눈을 가졌기 때문에 보지 못 하는 자녀들. 덧붙여, 보지 못 할뿐더러 보지 않으려는 아버지 프랑켄슈타인. 인간 신체의 정상성을 어떤 기준에서 판별해야 할지 소설은 묻는다. 이 문제에 관한 극작가 소포클레스의 해답은 오이디푸스로 하여금 자신의 눈을 찌르게 하는 것이었다.
   괴물을 향한 자녀들의 폐쇄성과 대조되는 눈먼 아버지의 열린 태도는 가족 공동체 속으로 타자를 받아들이는 데 작용하는 최초 결정 인자가 눈에 의한 외모 판단임을 보여준다. “얼굴의 추함이 인간의 눈으로 쳐다보지도 못 할 정도로 끔찍한” 괴물에게 정상의 시각을 가진 아버지 프랑켄슈타인은 빗장을 걸어 잠갔다.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던 어머니와 나를 쳐다보던 아버지의 인자한 미소”, 그리고 “그들이 내게 부모로서 의무를 다한 만큼 내 운명의 행복 혹은 불행으로의 향배는 그들 손에 달려 있었다”고 프랑켄슈타인은 어린 시절 자기 부모와의 관계를 선장 월튼에게 회고한 바 있다. “자신들이 낳은 존재를 위해 해줘야 할 게 뭔지를 깊이 의식”하고 있던 그의 부모로부터 “참을성과 베풂과 자기 절제의 교훈”을 배웠다던 프랑켄슈타인(33-34). 그러나 실험실에서 만든 자식의 “추함”을 참지 못 해 부성을 져버린 프랑켄슈타인. 이 양극 간의 괴리를 설명하려면 자신의 부모로부터 프랑켄슈타인이 보고 배운 것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 볼 필요가 있다. 아이를 ‘버린’ 프랑켄슈타인과 반대로 아이들을 ‘받아들인’ 그의 부모가 ‘눈’의 판단으로 입양을 결정했다는 것이 여기선 관건이다.
   괴물과 마찬가지로 “돈도, 친구도, 재산도 없던” 프랑켄슈타인의 어머니 캐롤라인(Caroline) 과 동생 엘리자베스(Elizabeth)는 지역에서 대대로 정치적 권위를 가져온 프랑켄슈타인 가에 입양되었다. 몰락한 상인이던 친구가고아이며 무일푼으로 남긴 딸 캐롤라인을 입적시킨 프랑켄슈타인의 아버지는 2년 후 그녀를 아내로 받아들이며 “마치 정원사가 ‘아름다운/하얀 이국식물(a fair exotic, 필자에 의한 강조)’에게 하듯 그녀의 안식처가 되어주려 애썼다”(33)고 프랑켄슈타인은 회고한다. 프랑켄슈타인을 낳은 후엔 자신의 고아 경험에 비춰 고통받는 이들의 구호 천사 역할을 천명으로 여긴 캐롤라인은 남편과 합심해 가난한 이들의 오두막을 종종 방문했고, 이탈리아 꼬모 호수 근처의 가난한 농가에서 동생이자 훗날 그의 신부가 될, 역시 고아인 엘리자베스를 입양하기에 이른다. 농가에 다섯 굶주린 아이가 있었음에도 오직 “이 사랑스런 소녀에게 어머니는 놀람과 감탄의 ‘시선’을 고정시켰으며(my mother fixed eyes of wonder and admiration on this lovely girl)(필자에 의한 강조, 34-35), 어머니가 받았을 시각적 인상을 프랑켄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유독 한 여자아이의 혈통이 달라 보였소. 검은 눈의 억센 떠돌이 거지들로 보이는 다른 넷과 달리 이 아이는 여린 데다 희고 아름다웠소(very fair). 머리칼은 밝게 빛나는 황금빛(the bright living gold)이었으며 옷은 누추해도 그 후광이 남달랐지. 선명하고 풍성한 눈썹, 티 없이 파란 눈에 감수성과 다정함을 웅변하는 듯한 얼굴형과 입술은 누구라도 바라보면 천상이 내려 보낸 특별한 종족(a distinct species)임을 알 수 있었소. (34)

   농가 여주인은 사실 이 아이가 밀라노 귀족의 딸로 독일인 모친이 산고로 죽고 가세가 기울어 이집 저집을 떠돌며 돌봄을 받는 신세가 되었음을 알려 준다.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특별한 종족”인 뼛속까지 유럽 백인인 소녀를 부부는 빅터에게 동생으로 “선물”하고 그런 그녀를 그는 “보호하고 사랑하고 아껴줘야 할 내 것(mine to protect, love, and cherish)”으로 받아들였다고 회상한다(35-36). “참을성과 베풂과 자기 절제의 교훈”을 가르쳐준 부모였지만, “아름다운/백인의(fair)” 외모를 “내 것”이 되는 배타적 선별 기준으로 세움으로써 장차 아들이 “누런 피부,” “검은 머리,” “검은 입술” “허연 이빨”을 가진, 아시아와 아프리카 인종을 섞은 듯한 자신의 실험실 자식을 향해 드러내는 극단적 공포와 혐오의 밑 작업을 해 두었다고 볼 수 있다. 한층 더 나아가 아버지-캐롤라인(양녀/아내), 프랑켄슈타인-엘리자베스(동생/아내)로 이어지는 근친결혼은 외모에 관한 그러한 배타적 동질화를 공고히 하는 상징적 장치이기도 하다.
   아이를 버리거나 받아들이는 데 있어 프랑켄슈타인과 그의 부모가 기준으로 삼은 외모 특징들을 유추하다 보면 그들의 시각 중심 판단이 인종에 대한 차별과 중첩되는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예외적인 경우가 드 레이시큰 아들의 아랍인 연인 사피로서, “아름답고 흰(fair)” 캐롤라인이나 엘리자베스와 대조를 이룬 “새카만 머리”에 “검은 눈”을 한 이 이방인은 인종적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인 드 레이시 가족에 거리낌 없이 융화된다. “아시아로 되돌아간다는 생각만 떠올려도 몸서리를 치고”(124) 터키인인 아버지의 돈을 훔쳐 가난한 “기독교인과 결혼하려는 목적”(124)으로 도망친 “기독교인 아랍(Christian Arab)(123)인 그녀는 괴물과 평행을 이루며 유럽 언어와 문화를 배우는 이방인이었으면서도 그와 비교해 우호적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 괴물이 당하는 배제의 원인을 가리켜줄 수 있는 인물이다. 사피의 유럽 사회로 동화하고자 하는 의지에 역시 동 사회로 동화되고 싶은 괴물의 의지가 못 미치는 것도 아니요, 그녀의 언어 습득력과 역사 이해력에 괴물이 뒤처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더 빨리”(118) 거의 완벽에 가깝게 터득하는 쪽은 괴물이다. 같은 “검은 머리”를 하고도 그녀를 기형의 괴물보다 우위에 놓는 건 결국 “놀랍도록 흰 안색”과 “천사 같은 아름다움과 표정을 가진 얼굴”(116), 즉 시각을 만족시키는 외모 조건이다. 탁월한 신체 기능과 지능을 갖추고도 “눈으로 쳐다보지도 못 할 정도로 끔찍한” 괴물의 기형적 외모는 내쳐지는 충분조건이 되는 것이다.
“비참하고 버려진 자, 나는 기형의 실패작”
드 레이시의 오두막을 벗어난 후 오갈 곳이 사라진 홀로 남은 괴물은 공동체의 일부가 되려던 선한 의도가 파괴적 분노로 바뀌었음을 느낀다. “세상 모두가 나만 빼고 편안하고 즐거워 보였소. 무시무시한 악마라도 된 양, 내 속엔 지옥이 들끓었지. 어느 누구도 날 동정해주는 이 없으니 보이는 나무들일랑 다 쪼개버리고 주변을 닥치는 대로 해치고 부숴서 그 잔해를 음미하고 싶었소”(136). “증오와 멸시의 대상인 내가 어떤 나라를 간들 끔찍한 건 마찬가지일 것”(139)이라 결론 내린 그는 프랑켄슈타인의 실험실에서 갖고 나온 메모에 적힌 정보를 토대로 제네바의 “내 아버지, 내 창조자”(139)의 행방을 찾기로 결심한다. “나를 세상에 낳은 그에게만큼은” “연민과 보상”, 그리고 “공정함(justice)(139)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고 믿은 그는 프랑켄슈타인과 다시 만난 자리에서 “내가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동정심(sympathies)을 교환할 수 있는”(168) “나처럼 똑같이 흉측한 여자 괴물”(145)을 만들어 달라고 간청한다. “동반자(companion)”를 만들어 주면 인간사회를 떠나 남아메리카로 이주해 살 것이고, 그렇게 “동정심”의 맛을 보게 된다면 “악한 격정”은 사라질 것이라고 그는 호소한다(147).
   괴물이 생명으로서 가진 성적, 감정적, 공동체적 욕구의 합체인 여자 괴물을 프랑켄슈타인은 만들어줄 의사가 없다. 창조물을 유기한 이후 그의 정신을 지배하는 건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의 창조자”로서 “후회와 죄의식”(90-92), 그리고 창조물이 자신의 사랑하는 이들을 해치러 올 것이라는 “공포”이지, 그의 처지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괴물의 하소연에 미미한 동정심이 일다가도 “움직이고 말하는 그 더러운 몸통을 보면 마음속은 구역질이 나고 그의 감정은 공포감과 증오심으로 바뀐다”(147). 결국 동정심이 아니라 괴물이 갈구하는 행복을 “뺏을 권리가 없다고 느끼고”(147), “요청을 들어주는 게 그와 인간사회 모두에게 공정한 것”(148)이라는 이성적 판단 아래 그는 동반자를 만들어 주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이 약속마저도 지연 시키다 종국엔 두 괴물의 번식 결과로 나타날지도 모를 “악마 종족(race of devils)(165)이 인류를 위협할까 두려워 여자 괴물을 “박살 내고”(166), 이로써 북극 언저리에서 그가 죽어야만 끝나는 괴물의 복수와 추격전이 벌어진다.
   배타적 동질성을 지켜내겠다는 프랑켄슈타인의 원칙은 그를 몰락으로 끌고 가는 치명적 요인이다. 자신의 세계로 진입할지도 모르는 “악마” 같은 이질적 종족을 차단하겠다는 보수성을 그는 인류 공공을 위한 선이라고 믿는다. 사회 동질성 해체의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친구, 동생, 아버지, 아내를 차례로 잃으며 복수를 당한 그가 괴물을 향한 역복수를 다짐할 때, 그는 불행의 원인이 자신의 배제 행위에 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일어난 불행들의 기억이 나를 짓누르면서 나는 그 불행들의 원인—내가 만든 괴물, 내가 세상 밖으로 내보내는 바람에 결국 나를 파멸시키고 만 그 끔찍한 악마—에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소”(198). 자신이 당한 불행한 결과만 보일 뿐 반성적 자의식이 없는 그에겐 그 모든 불행의 원인은 지식의 추구와 괴물의 출현이지 자신의 배제적 생명윤리는 아닌 것이다. 반대로 소설 대단원에서 결국 죽어버린 아버지 앞에 홀연히 등장한 괴물은 선장 월튼에게 그 불행의 원인은 인간 사회의 배제와 차별임을 뼈아프게 지적한다. “내 죄들을 떠올려보니 내가 한때는 아름다움과 선량함이라는 숭고한 이상으로 가득 찼던 이였던 게 믿기 어렵소...내가 그의 희망을 파괴했지만...나도 사랑과 인류애를 그리 갈망했는데 거절당했소. 여기엔 불의(injustice)가 없소? 온 인류가 내게 죄를 지었는데, 나만 범죄자로 여겨져야 하는 것이오?....비참하고 버려진 자인 나는 기형의 실패작(abortion), 멸시해도, 걷어차도, 짓밟아도 괜찮은. 이 불의를 떠올리면 내 피가 끓소”(221-222). 자기반성 없이 생명을 버리고 배제시킨 아버지를 사멸시키는 것이 셸리의 시적 정의라면, 아직 죽지 않은 기형의 자식은 그녀가 우리 의식 속에 의도적으로 살려 둔 배제적 생명윤리의 희생양이다.
끝내며—“인간적”인 거두기와 포용
우리의 생득적 인간성은 자식을 보호하는가 하면 물어 죽이거나 버리기도 하는 동물적 습성을 포괄한다. 그러나 카라 보스는 사회적 포용 시스템의 진화와 더불어 인간으로부터 기대하게 된 ‘이성적 인간성’을 아버지로부터 기대하였다. 입양이라는 현대적 포용 시스템을 경험한 이로서 그 경험치가 반영된 인간성의 기대를 아버지에게 걸었다고 볼 수 있다. 피가 섞이지도 않은 다른 피부색, 다른 외모의 아이를 받아들인 바다 건너 사회 시스템을 거쳐 겨우 ‘사회적 인간’으로 살아남아 돌아온 그녀는 피가 섞인, 같은 피부색의, 비슷한 외모의 자기 아이를 져버린 생부를 그 포용 시스템의 관점으로부터 “인간적이지 않다”고 평가했다. 생부와 이 사회적 포용 시스템의 극명하게 비교되는 자기 자식 ‘버리기’와 눈코입도 다르게 생긴 남의 자식 ‘거두기’는 포용 시스템의 단단한 구축만이 생명을 저버리는 개인들을 보완할 생명윤리의 최후 방어막임을 보여 준다. “기형”임에도, 혹은 광의적 의미에서 다르게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는 포용이 없다면, 기형이 아닌데도, 닮았는데도 내쳐진 아이가 갈 곳은 없는 것이다. ‘내침’의 조건이 반드시 다른 피부색, 다른 외모이진않다. 모습이 같아도 낳고 버린다. 오직 분명한 건 모습이 달라도 다른 쪽에선 거두는 ‘이성적 노력’의 필요이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이 “아름다움의 정치는 환대의 정치다. 이방인에 대한 적대성은 증오이며 추하다”고 한 데는 프랑켄슈타인을 통해 엿본 것과 같은 배타적인 동질화 충동이 이성이 동반되지 않는 자기 복제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성은 동질화하는 힘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이방인에 대한 적대성은...보편적 이성의 결여를, 사회가 여전히 화해되지 않는 상태에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다. 한 사회의 문명화 정도를 보여주는 척도는 바로 이 사회의 환대, 나아가 친절함이다”(32-33). 13) 앞서 보스의 예를 들어 제기한 ‘이성적 인간성’은 다름에 대해, 이방인에 대해 이런 친절과 화해와 환대를 보여주려는 이성적 노력이다. 계몽주의 이성의 활동을 통해 인류 문명의 찬란한 진보를 꿈꾼 과학자 프랑켄슈타인이 완벽한 이성주의자이자 문명 진보의 진정한 보루가 되지 못 한 건 자기 복제를 맴도는 타자 배척의 늪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동질화의 충동을 보완할 타자에 대한 ‘역지사지’의 공감/감정이 빠져버린 이 이성주의자의 말로는 죽음이며, 아직 죽지 않은 그가 버린 기형의 자식만이 북극 어딘가를 떠돌며 우리의 ‘거두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생산하지 않은 것들도 감싸 안는 환대야말로 이성적 인간성의 최고 상태, 카라 보스가 지구상에 아직도 살아 숨 쉴 수 있는 이유이다. 반대로 자신이 생산한 것도 감싸 안지 않은 버리기와 배척은 소설 속 괴물이 지구상에서 오갈 데가 없는 이유, 폭력화되는 이유이다. 남아메리카로 멀찍이 떨어져 사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은, 지구에서의 존립 자체를 거부당한 코너에 몰린 존재에게 남은 단 하나의 선택이 죽기 살기의 저항과 복수 말고 뭐가 더 있겠는가? 버려진 아이가 다시 사회로 수용되지 못할 때 저지르는 범법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수용에 실패한 사회 시스템의 문제임을 괴물은 환기시킨다. “내 악행은 원치도 않은 진절머리 나는 고독의 자식들이니 날 동등한 취급을 해주는 공동체를 만들어 살아간다면 내 선함도 자라날 거요” (147). 소설은 사회의 안전망 바깥에 버려진 생명을 거두지 않을 때 일어나는 폭력의 역습과 악순환을 지목함으로써 사회에서 밀려나고 낙오된 버려진 아이들에게 왜 돌봄과 포용이 필요한지를 역설한다. 인류가 현대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힘들게 제도화하려고 하는 공생은, 포용은, 결국 우리 모두가 살아남는 길이다. 보스와 괴물이라는 두 고아가 그 증표이다.
목차
혁신의 산실, 실리콘밸리의 기업 사례들로 살펴보는 다양성의 6하 원칙
기형, 추함, 버림받음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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