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산실,
실리콘밸리의 기업 사례들로 살펴보는
다양성의 6하 원칙
박은연
Una Mesa Association 위원.
“I am so ashamed that my kid is the only mono-lingual!” 번역하면 “우리 아이 한나라 말 밖에 못해서 정말 창피해요!” 정도일까요? 실리콘밸리에 10년째 살고 있는 필자의 늦둥이 아이가 다니던 스페인어 유아원에서 부모들을 초대하여 가족의 날을 하는데, 한 백인 미국인 엄마가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다른 손을 휘휘 저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더랬습니다. ‘한나라 말쟁이(mono-lingual)’라는 단어를 처음 듣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이런 단어는 Vocabulary 88,000에는 물론이고 영어 사전에 찾아봐도 나오지 않는 단어이니까요. 이 말은 들은 필자의 첫 반응도 “그런 단어가 있기는 한가요? 이 동네에서니까 생겨날 수 있는 단어인 것 같아요!” 하고 함께 웃었지만, 그 유아원에 있는 20여 명의 아이들 중 오로지 그 아이 하나만이 그 엄마 말처럼 ‘영어밖에’ 못하는 아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그런 부모의 반응이 충분히 이해가 갔습니다. 국어 시간에 배웠던 민간 어원설처럼 이렇게 새로운 단어가 실리콘밸리 민간에서 생겨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우리 아이만 해도 누가 “너는 몇 나라말을 하니?”하고 물어보면, 자랑스럽게 손가락 네 개를 척 올립니다. 대개는 어른들이 오오~하고 감탄해주면서 어느 나라말이냐고 추가로 물어보면, 뿌듯한 얼굴로 “스페인어, 영어, 한국어와 일본어요.”라고 답합니다. 우리 부부는 옆에서 키득키득 웃지요. 스페인어를 실제로 영어보다 더 잘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한국어도 꽤 알아듣고, 몇 마디 안되긴 하지만 자기가 꼭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엄마한테 “뭐뭐뭐 부타케요!” 하면 통할 확률이 매우 높은 걸 알아 한국말을 시도하죠. 발음이 좀 어중간하긴 하지만 그럭저럭 알아들을 만하고요. 다만 자랑스러운 네 번째 언어, 일본어는 갓난아기 때부터 아빠가 불러준 일본어 자장가 가사를 아는 것이 다라는 것이 재미있는 점입니다. 가사가 무슨 뜻인지 아는 것 같지도 않고요. 그러나 어린 마음에도 동네 분위기가 여러 나라말을 하는 것이 큰 자랑거리인 것을 느끼는 탓에 이 아이의 답은 항상 “네 개요!”입니다. 교육, 산업, 먹거리 할 것 없이 혁신으로 유명한 실리콘밸리에서 왜 이렇게 여러 나라말을 하는 것이 어린아이에게도 자랑거리이고 듣는 어른들도 감탄스러워할 일이 될까요? 이는 다양한 언어를 하는 것이 다양한 사고와 문화를 이해하는 능력을 대변하기 때문입니다. 다양성을 갖추지 못하면 ‘한나라 말쟁이’가 되어 부끄러운 일이 되는 것이고요.
   이 글에서는 스타트업의 산실로 혁신의 상징이자 4차 산업혁명의 중심지 이기도 한 실리콘밸리에서 기업들의 사례를 통해 아래와 같은 다양성의 면모들을 6하 원칙에 따라 살펴보려 합니다.

  • [Why] 다양성이 왜 실리콘밸리 기업에서 중요시되는가?
  • [What & Who] 실리콘밸리 기업에서 이야기하는 다양성이란 무엇인가? 누가 이끄나?
  • [Which] 2020년 실리콘밸리의 다양성 논의에서 초유의 관심사는?
  • [Where] 미국 실리콘밸리와 한국 성수밸리 비교: 다양성을 저해하는 구조적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 [How & When] 그렇다면, 다양성 증진을 위한 열쇠, 해결책은?
[Why]
왜 실리콘밸리 기업에서 다양성이 중요시되는가?

‘기생충’, 디즈니, 그리고 실리콘밸리의 공통점은?

2020년 2월, 아직 코로나바이러스가 미국과 캘리포니아에 본격 상륙하기 전, 실리콘밸리에 사는 한국인인 필자가 가는 곳마다 화두가 된 것은 ‘기생충’의 오스카 수상 소식이었습니다. 실리콘밸리 한복판인 팔로알토(Palo Alto) 중심가의 극장에서는 ‘기생충’이 상영되고 있었고요. 이 ‘기생충’과 세계 최대의 콘텐츠 산업 기업인 디즈니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처럼 한 사람이 아카데미 식장에서 한꺼번에 오스카 네 개를 거머쥔 것이 이전에도 딱 한 번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60년도 더 전인 1954년의 수상자 월트 디즈니(Walt Disney)입니다. 즉, 영화사의 혁신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것입니다.
   창립 96년 차인 디즈니사는 곧 백 년 기업이 될 참인 지금도 포츈(Fortune) 500대 기업 목록에 52위로 이름을 올리고 있을뿐더러, 전 세계에 걸쳐 이십만 명의 구성원을 가진 거대 조직임에도 2018년에는 패스트컴퍼니(Fast Company)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오스카 4개 동시 수상이라는 공통점도 재미있지만, 정말 흥미로운 것은 무엇이 디즈니와 같은 오래된 대기업을 지속적으로 혁신하게 하는가와 무엇이 기생충의 수상을 가능하게 했는가 하는 것, 즉 그들 사이에 공통된 혁신의 원동력이 무엇이냐는 것이겠지요. 이는 또한 실리콘밸리가 수십 년 간 세계적인 혁신의 산실로 자리를 굳히게 된 비결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기생충과 디즈니 그리고 실리콘밸리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지속적 혁신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 답은 뜻밖에 디즈니 만화영화에 나오는 공주 군단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뜬금없이 웬 디즈니 만화영화를?”이라고 묻는다면, 여기에 미국 기업의 인사뿐만 아니라 경영 전반에서 요즘 주목받는 ‘다양성, 포용성, 형평성(Diversity, Inclusion & Equity)’의 발전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으며, 이것이 바로 디즈니와 실리콘밸리의 지속적 혁신 비결이자 기생충이 각광받은 이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또한 “우리 아이는 한나라 말쟁이라 부끄러워요.”라고 실리콘밸리의 부모가 이야기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려대학교 다양성위원회 역시 이 다양성, 포용성, 형평성의 3단계 모델을 사용하고 있어 익숙하신 개념이겠지만, 디즈니의 예에 비추어 한번 살펴보지요.

디즈니 공주 군단으로 본 다양성, 포용성, 형평성,
그리고 디즈니의 생존과 혁신 전략

우선 다양성입니다. <그림 1>을 보면 지난 몇 년 간 부쩍 다양한 인종적 배경을 가진 ‘공주’들이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림을 보면 ‘백인/유럽 계열’ 공주가 64%를 차지하고 백인 외 모든 인종을 의미하는 POC(People of Color), 즉 ‘유색인’ 공주는 35%입니다. 최근의 다양성 확보 노력이 역력하지만, 디즈니가 전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전 세계 인구의 인종 분포를 대표성 있게 맞추기에는 아직 갈 길이 한참 멀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특히, 전 세계 인구 중 아시아인이 통틀어 54%에 달하는 것에 비하여 아시아계 공주는 아직까지 오로지 ‘뮬란(Mulan)’의 주인공뿐이어서 대표성이 심히 떨어지는 것이 눈에 띕니다.

그림 1. 디즈니 공주 군단의 인종 다양성 vs. 전 세계 인종 분포 1)


   기생충이 오스카를 수상했을 때, 실리콘밸리 주변에서 다양성에 관심이 있는 인사 계통의 사람들이라면 본인이 백인이더라도 한국인인 필자보다도 더 열광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는데, 이것이 그 이유 중 하나라고 봅니다. 이렇게 숫자상으로 비주류 집단의 구성원들이 조직에서 어느 정도를 차지하는가의 문제가 ‘다양성(diversity)’입니다. 고려대학교 2019년 <다양성 보고서>를 보면, 교수진에서 여성의 비율이 16.1%라는 부분이 다양성을 보여주는 한 지표가 되겠지요.
   다양성의 다음 단계인 ‘포용성(inclusion)’은 비주류 집단의 양적 비중뿐만 아니라 그들이 얼마만큼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다시 디즈니 공주 군단으로 돌아가서, 1937년 백설공주(Snow White and the Seven Dwarfs)부터 2016년 모아나(Moana)까지 80년 간 공주의 역할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를 비추어 보면 그 시대 여성에 대한 사회의 포용성 수준이 보입니다. 1937년 최초의 디즈니 공주인 백설공주는 백인이었고 그의 역할은 일곱 남자를 위해 집을 청소하고 밥을 짓는 것이었으며 그의 최대의 성취는 백마를 탄 왕자에 의해 구출된 것입니다. 이런 양태는 1992년 알라딘에 등장하는 최초의 유색인 공주, 자스민공주(Princess Jasmine)까지 반세기 넘게 지속됩니다. 그러다가 1995년의 ‘포카혼타스(Pocahontas)’에 다다르면, (여러 가지 역사적, 문화적 왜곡에도 불구하고) 그 주인공이자 유색인인 포카혼타스는 ‘구출 받는 공주’를 넘어 자신만의 세계와 역할을 가진 여성으로 그려집니다. 이를 통해 포카혼타스를 본 아이들이 사회에 나갔을 때 일터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포용성이 확장될 수 있는 초석을 깔고 있습니다. 이후 1998년 작품에서는 병사가 된 아시아인 뮬란, 2009년작 ‘공주와 개구리(The Princess and the Frog)’에서는 자신의 사업을 운영하는 흑인 소녀 티아나(Tiana), 2012년에는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즐기며 구출 받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엄마를 구출하는 메리다(Merida) 공주로 이어집니다. 2016년에 이르면 유색인이면서 본인이 세상을 구하고 진취적 부족장이 되는 모아나가 등장하게 되고, 동시에 팔십 년 만에 최초로 아무런 로맨스가 필요하지 않은 디즈니 공주로 등극합니다. 그 후 2018년 ‘주먹왕 랄프 2: 인터넷 속으로(Ralph Breaks the Internet)’에서는 디즈니의 공주들이 총출동하여 이전 디즈니 영화에서 얼마나 성별 포용성이 부족했는지를 스스로 풍자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면서 포용성 측면에서 성숙해진 모습을 보입니다.
   이와 같이 다양성과 포용성을 강조하는 디즈니의 행보는 우연한 것이나 윤리적인 동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지극히 경영 전략적인 움직임이라는 것을 2019년 디즈니의 <다양성과 포용성 결의 보고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구성원의 72%와 이사회의 67%가 여성이거나 유색인이며 소수성애자들이 일하기 가장 좋은 기업 명단에 지난 10년 동안 이름을 올린 것 등을 자랑스럽게 보고하면서, 이러한 노력이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인사 및 경영상의 신념에 근거하고 있다고 명시합니다.

  • “포용성이 시장 적합성을 위한 열쇠이다.”
  • “모든 직급의 구성원들이 우리 고객들의 삶의 경험을 반영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더 좋은 회사가 된다.”
  • “모든 사람들의 아이디어와 결정이 소중히 여겨지고 격려를 받을 때 우리 회사가 번성한다.”

   즉, 다양성과 포용성은 디즈니의 주요 비즈니스 전략으로, 한편으로는 미래 시장을 분석하고 고객의 구성과 맞는 ‘대표성’을 확보하여 자칫 시장 사정에 맞지 않는 오판을 할 소지를 없애려는 기업 생존을 위한 전략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 요소들이 조직에서 혁신을 이끌어낸다는 것이 지난 수년간 많은 연구를 통해 입증되고 있는바, 이에 근거해 지속적 혁신을 담보하려는 기업 성공을 위한 전략이기도 합니다.
   기생충이 조명하는 것은 다양성과 포용성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형평성(equity)’입니다. 형평성의 부족을 조명한다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이 되겠지요. 그것도 디즈니 만화영화에서는 아직까지 다루지 않는 다양성의 축, 계층 간의 형평성과 그것이 부족할 때 조직이 치를 수 있는 대가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달까요. 그런데 실리콘밸리에서 지난 몇 년 간 가장 큰 이슈로 대두되는 하나가 바로 이 형평성의 부족이며, 인종과 성별 측면에서 특히 두드러져 <브로토피아(Brotopia)>와 같은 책들이 연달아 출판되고 있습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다양성, 포용성, 형평성은 지속적 혁신을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므로, 이것이 실리콘밸리 혁신의 신화가 꺾이게 되는 원흉이 될 수 있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
[What & Who]
실리콘밸리 기업에서 이야기하는 다양성이란 무엇인가?
누가 이끄나?
왜 실리콘밸리 기업에서 다양성이 중요시되는가에 대한 답을 요약하자면, 다양성이 글로벌 시장에 맞추어 조직이 생존하고 지속적 혁신으로 성장하기 위한 경영 전략에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실리콘밸리의 인사와 경영에서 이야기하는 다양성은 무엇일까요? 다양성에는 무수한 축들이 있으며, 이 중 캘리포니아주의 법으로 차별에서 보호받으며 실리콘밸리 인사와 경영에서 주로 다루는 요소만 해도 인종, 성별, 성지향성, 혼인 상태, 연령, 장애 여부, 출신 국가, 종교 등이 있습니다. 가히 ‘다양성의 다양한 축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중 한국의 상황에도 쉬이 적용될 수 있는 두 축, 성별과 연령과 관련하여 어떻게 실리콘밸리 기업에서 다양성을 증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지요.

성 다양성을 지지한다! 세계 1위의 설문조사기업 서베이몽키(SurveyMonkey)

1999년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으로 시작된 서베이몽키를 필자는 대학원 시절 논문을 쓰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설문 조사를 하면서 처음 접했습니다. 세계 1위의 설문조사 플랫폼 기업인만큼 사용해보신 분들도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서베이몽키의 전 CEO였던 데이브 골드버그(Dave Goldberg)는 셰릴 샌드버그(Sheryl Sandberg)의 남편으로 다양한 인재를 포용하는 탁월한 리더로 유명하기도 했는데, 47세의 나이로 급사한 것이 몇 년 전 크게 뉴스가 됐었지요. 본인도 대기업의 사장이었는데 누구누구의 남편이라 여전히 더 자주 이야기되는 것도 이채롭고, 이 역시 다양성과 연관되는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2016년 그가 사망하는 자리에도 함께 있었을 만큼 절친한 친구이며 당시 고프로(GoPro)의 수석 부사장(SVP, Senior Vice President)이었던 잰더 루리(Zander Lurie)가 “친구의 비전을 살리기 위해”라는 뜻을 밝히면서 본인으로서는 처음인 CEO 자리를 맡았습니다. 그 후 3년간 포츈 500대 기업의 98%(즉 하나를 제외한 499개 기업)를 포함해 전 세계의 수많은 설문 조사를 지원하는 플랫폼으로 성장하며, 창립 20년 만인 2018년에는 주식시장에 상장 되기에 이릅니다.

그림 2. 서베이몽키의 젠더 관련 조사 문항 2)


   서베이몽키의 설문 중 ‘성별’과 관련된 부분을 보면 깜짝 놀랄 만큼 자세하게 성 선택지를 제공하고 있어(<그림 2> 참조), 거대 설문조사 회사가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고객들이 성과 성정체성에 대해 제대로 된 응답을 할 수 있도록 네 가지 관련 문항 및 선택지에 대해 안내 지침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또한 혁신적인 성장을 가능하게 한 잰더 루리의 리더십과 인사 정책 역시 성 스펙트럼을 포함한 다양성과 포용성을 핵심적인 요소로 삼고 있음을 여러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그가 합류한지 3년 만에 서베이몽키 전체 구성원 중 여성의 비율이 45%가 됐으며, 리더십과 테크니컬 부문에서도 각각 32%, 30%를 달성하여 성별 다양성이 부족한 실리콘밸리 IT 기업들의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디자인 사고 컨설팅 기업 아이데오와 91세 여성 디자이너

실리콘밸리의 중심가인 팔로알토에 본사를 두고 디자인 사고 혹은 디자인 씽킹(Design Thinking)이라고 번역되기도 하는 방법론을 기업 경영의 주류로 대두시킨 주역인 아이데오(IDEO)사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아이데오의 사례는 여러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이야기를 듣는 다양성과 나와 다른 관점을 이해하고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포함시키는 포용성이 조직의 혁신에 얼마나 결정적인 요소인지를 생생히 보여줍니다. 아이데오의 창업자와 두 스타트업이 연합하여 학계에서 디자인 사고의 본산으로 이야기되는 스탠포드대학(Stanford University)의 D스쿨(Design School)을 설립한 것도 널리 알려진 일이지요. 아이데오는 1991년 설립 이래로 전 세계의 크고 작은 기업은 물론이고 여러 나라의 정부 정책에도 혁신 컨설팅을 해왔으며, 본인들은 물론이고 이들의 컨설팅을 받은 고객사들이 ‘혁신적 기업’ 리스트에 오르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애플의 첫 번째 마우스도 아이데오의 디자인으로 탄생한 작품인데, 이들의 디자인 사고 비결 중 하나가 바로 고객이든 구성원이든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포용하여 문제 해결에 이르는 디자인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접근을 내부적으로도 철저히 실천하여, 2013년에는 90세의 여성을 고령자층을 위한 디자인 전문가로 고용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바바라 베스킨드(Barbara Beskind)라는 디자이너는 미 육군과 개인 컨설턴트 작업 치료사로 활동해왔을뿐더러 은퇴 후에는 가족사 등의 책을 써서 출판한 작가이기도 하니 본인 스스로 다양한 능력을 갖춘 인재이기는 합니다만, 90세의 여성이 창업 사장에게 컴퓨터도 아닌 타이프로 친 편지 한 장을 보내왔다고 그 다양성을 높이 사 당장 채용할 기업이 과연 몇 개나 될까요? 조직으로서도, 리더로서도 대담하게 연령 다양성을 포용하는 결정이었습니다. 그녀는 최근까지 고령층 고객을 대상으로 한 아이데오 프로젝트에 본인의 경험과 공감을 십분 활용한 디자인 사고로 수많은 성과물을 냈다고 합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지 않습니까? 역시 이렇게 깜짝 놀랄 만한 다양성의 포용이 깜짝 놀랄 혁신적 성과로 이어지는 것이겠지요.
   두 실리콘밸리 기업 사례에서 또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은 이런 다양성의 포용을 이끄는 조직의 리더들 본인은 주류인 대기업에서도 가장 주류인 백인 남성들이었다는 점입니다. 혹여 “나는 주류인데, 내가 우리 조직의 다양성 증진에 무슨 기여를 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면, 서베이몽키와 아이데오 CEO의 사례에서 본인이 소수자가 아니더라도 각 다양성 축의 소수자들에게 강력한 연대자(allyship)가 됨으로써 얼마나 큰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보고 답을 찾을 수 있겠습니다.
[Which]
실리콘밸리 다양성 논의 초유의 관심사 ‘상호교차성’
서베이몽키와 아이데오의 사례를 통해, 수많은 다양성의 축이 존재하며 그 안에서 내가 소수자이든 주류이든 누구라도 다양성의 확장을 위해 기여할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다양성을 증진하고자 하는 조직이 그 많은 다양성의 축들을 모두 다 한꺼번에 공략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시간과 자원이 제한되어 있지요. 따라서 다양성의 다양한 축들 중 어느 것이 중요한가 또는 어디에 집중할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2020년 지금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다양성의 축은 무엇일까요?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이 한창이니 인종일까요? 스타트업 창업과 투자에서 여성의 비율이 극히 낮다고 하니 성 다양성일까요? 최근 미국에서는 처음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다양성/포용성 축제(DI Fest)’에 참석하여 구글, 유수 대학교, 미연방정부까지 여러 조직들의 다양성 리더들의 발표를 듣고 논의를 해본 결과, 그중 어느 것도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지금 실리콘 밸리의 최첨단 다양성 논의가 가장 집중되고 있는 부분은 바로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입니다.
   ‘상호교차성’이라는 용어는 UCLA와 콜럼비아(Columbia) 법대의 겸임교수인 킴벌리 윌리엄즈 크렌셔(Kimberlé Williams Crenshaw) 교수가 1980년대 말에 처음 제안한 것으로, 한 사회학 이론서에서는 “계급, 인종/민족, 젠더, 장애, 섹슈얼리티 등을 포함한 사회 불평등의 요소들을 상호교차시킴으로써 단차원적 개념화에 비해 보다 복합적인 차별의 유형을 산출하는 것”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3) 예를 들어, 크랜셔 교수의 경우 본인은 여성이자 흑인으로 주류 대학의 법학과 교수입니다. 그녀가 여성으로서 받는 차별과 흑인으로서 받는 차별을 따로따로 취급하여 단순하게 더하는 것만으로는 이 두 소수성 간의 복합적이고 상호교차적인 작용을 무시하게 되어 그 차별의 경험과 구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려대 다양성보고서>에 나타난 축들에 의거해 나름대로 교수진에 반영해 본다면, 비고려대 출신 외국인 여성 교수의 경험이 상호교차성의 좋은 예라고 하겠습니다. 실리콘밸리 기업에서는 최근 인사총괄 또는 다양성-포용성 총괄의 자리에 상호교차성을 체험하고 이해하여 조직을 이끌 수 있는 리더를 찾는 노력이 늘어나면서, 요즘 주변에 여성/소수성이면서 유색 인종인 인사총괄(CHRO, Chief Human Resource Office)을 임명하는 사례가 부쩍 많이 보입니다
[Where]
실리콘밸리와 성수밸리 비교로 본 상호교차성:
다양성을 저해하는 구조적 원인은 어디에?
한국에서 상호교차성으로 최근 가장 많이 주목받고 있는 예라고 하면, 단연 여성이자 부모인 워킹맘, 혹은 더 넓게 보아 경력단절 여성을 들 수 있겠습니다. 올해 마침 필자는 한국적 맥락의 상호교차성 대표 격인 경력단절 여성에 대하여 한국과 실리콘밸리 간 비교연구를 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사회적 스타트업이 집결된 성수밸리에 소재하며 사회적기업을 지원하는 조직인 루트 임팩트에서 주최한 연구로, 한국 고학력 경력단절 여성들에 대한 심층 인터뷰를 실시했습니다. 요인분석(factor analysis)과 유사하게 주관적 경험을 통계적으로 분류하는 Q-방법론(Q-methodology)을 적용하여 일터에서 다양성의 증진, 특히 이 상호교차성에 해당하는 집단이 일터에서 포용되는 것을 저해하는 구조적 원인은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보았습니다.
   인터뷰 대상이 된 한국 고학력 여성들은 학력, 연령, 평균 자녀 수, 생활수준 등의 개인적 지표에서는 매우 유사했지만, 경력 단절을 경험하면서 아이를 낳을 것인가, 경력을 중단할 것인가, 경력을 재개할 것인가와 같은 주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에는 확연히 다른 동기와 수요(needs)를 가진 네 집단으로 구분됐으며 집단 사이에 유의미한 일/생활 경험 및 성과의 차이도 보였습니다. 집단 간 개인 지표가 유사하므로 이렇게 다른 선택 행동과 결과가 개인적 성향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님은 확연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다른 선택 행동을 하게 된 진정한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를 심층 분석한 결과, 이들이 속한 규범적 환경과 연결망 환경이라는 두 가지 구조적, 환경적 요인이 한국 고학력 경력 보유 여성의 다양한 요구 및 동기 형성에 기본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실리콘밸리와 성수밸리에 주재하는 한국 여성들을 비교하면서 특히 흥미로웠던 점은 해당 여성들이 연령대(30~40대), 학력(대졸), 혼인 상태 및 경력단절 기간 등에서 비슷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차이를 명확히 보였다는 것입니다.

  • 실리콘밸리에 거주하는 경우는 ‘남성도 여성도 일할 수 있고, 전업주부도 충분히 가치 있다’라고 요약될 수 있는 유연한 평등주의(flexible egalitarianism)의 규범적 환경 4) 과 여성의 사회적 연결망이 상대적으로 풍부한 환경에 힘입어, 네 집단 중 가장 워라밸(work-life balance)이 좋고 삶의 만족도와 가계 수입도 높았으며 다양성과 포용성 경험도 상대적으로 높았습니다. 반면,
  • 한국에 거주하는 경우는 ‘여성도 일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양육은 엄마 몫이다’로 대변되는 일지향적 보수주의(pro-work conservatism)라는 규범적 환경과 여성의 사회적 연결망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구조 아래에서 독박 육아, 시간 빈곤에 시달리며 네 집단 중 눈에 띄게 삶의 만족도가 낮았으며, 다양성 관점에서 포용되지 못하고 차별을 경험하는 소수자의 전형적인 양상이 55%로 가장 많이 나타났습니다.
   달리 말하면, 실리콘밸리에서 상호교차성이라는 까다로운 부분에서도 다양성과 포용성을 추구할 수 있게 도와주는 구조적 요인은 ‘형평성을 지향하는 규범적 환경’과 ‘소수자들도 풍부한 연결망(또는 네트워크)을 접할 수 있는 환경’, 이 두 가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되겠지요.
[How & When]
다양성 증진을 위한 조직의 열쇠를 코로나바이러스가 쥐고 왔다?!
지금까지 실리콘밸리의 여러 기업들의 예를 종합해 보면, 다양성은 글로벌 시대, 혁신과 조직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고, 여러 다양성의 축이 존재하며 소수자이든 주류이든 누구나 그 증진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가 있되, 최근 가장 주목받고 있는 부분은 여러 다양성의 축이 함께 작용하는 상호교차성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에 더해 한국과 실리콘밸리의 상호교차성 사례를 비교한 연구에서 근본적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본 결과, 규범적 환경과 연결망이라는 두 구조적 요인으로 나타났습니다. 요는 이 두 구조적 요인, 환경을 바꿔 줄 수 있다면 다양성 증진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조직에서 어떻게 이런 근본적인 환경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요?
   2020년 조사에 따르면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과 기업들에서 다양성을 증진하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하는 프로그램은 ‘유연근무(flexible work environment)’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5) 전반적인 다양성 증진을 위해서 유연근무를 사용하는 경우는 조사대상 기업 중 58%였고, 리더십에서 성별 다양성을 증진하기 위해 유연근무를 사용하는 경우는 무려 67%로 단연 1위였습니다. 6) 위에서 언급한 루트임팩트의 연구에서도 마찬가지로, 한국에 주재하든 실리콘밸리에 주재하든 경력단절 여성들이 가장 원하고 중요하다고 밝힌 정책 역시 단연 ‘조직에서의 유연근무 정착’으로 나타났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싫든 좋든 거의 전 세계에 걸쳐 조직들이 유연근무 중 특히 재택근무를 경험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어찌 보면 유연근무라는 다양성의 열쇠를 코로나바이러스가 쥐고 온 듯도 한 모양새입니다. 너무 큰 어려움을 겪은지라 그 와중에 한 가닥이나마 얻은 것을 찾아보려는, 조금은 억지스러운 필자의 희망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조직에서 다양성 증진의 열쇠인 유연근무가 대대적인 사회 실험의 기회를 맞은 것 만은 확실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 기간, 실리콘밸리 5대 IT 기업의 유연근무 사례

실리콘밸리의 기업들은 캘리포니아주의 COVID-19 대응책인 재택령 발동으로 인해 3월부터 전폭적인 재택근무 또는 원격근무를 도입해 운영 중입니다. 이 중에서도 ICT의 대표 주자로 꼽히는 5대 기업, FAANG–페이스북(Facebook), 아마존(Amazon), 애플(Apple), 넷플릭스(Netflix), 구글(Google)에서 2020년 봄부터 가을까지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재택근무라는 공간적 유연근무제를 얼마나 어떻게 도입하고 있는지 사례를 살펴보고, 향후에 다양성과 포용성에 미칠 영향을 생각해보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표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FAANG 기업들은 대개 봄에 시작한 유연근무제를 적극적으로 확장하거나 장기화하고 있습니다. 기업의 상황에 따라 적용을 하는 정도에 차이가 다소 있고, 넷플릭스의 경우와 같이 리더십이 아주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스타트업 통계와 뉴스로 유명한 엔젤리스트(Angel List)에서 넷플릭스 CEO의 유연근무 축소 의지 발언 직후 넷플릭스 직원들이 엔젤리스트 웹사이트에서 다른 직장으로 옮기려 스타트업 채용을 알아보는 횟수가 급증했다는 기사를 내보낸 것입니다. 특정 집단, 특히 소수자들의 이직 의사가 더 많이 늘어났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가까운 미래에 넷플릭스의 다양성 지표가 하락할 것인지 그 귀추가 주목됩니다.

표 1. 페이스북, 아마존, 애플, 넷플릭스, 구글의 2020년 유연근무제 도입 현황 7)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끝난 이후에 이 기간 동안에 도입된 유연근무제를 확장할 것인지, 유지할 것인지, 축소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 역시 다양성과 포용성에 미치는 함의가 큰데, 이 점에 대해 글로벌 기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와 한국 기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큰 차이가 나타났습니다. 글로벌 기업의 75%가 현재까지 도입된 유연근무를 더욱 확장할 계획이라고 응답한 반면, 8) 한국 기업의 경우 이 방면에서 상당히 앞서가는 사회적 스타트업들에서도 불과 25%만이 유연근무를 코로나바이러스 기간보다 더 확장할 계획이라고 응답했습니다. 9) 이 또한 향후 조직의 다양성과 포용성, 그리고 그에 따른 지속적 혁신과 글로벌 시장 경쟁력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은 말할 나위 없겠지요.
   무릇 다양성 증진과 그를 토대로 글로벌 시장에서의 혁신과 지속성을 추구하는 조직이라면, 기업이든 교육기관이든 위드코로나(With-Corona) 시기를 유연근무제를 확장하고 상호교차성에 주목하면서 소수자와 주류 집단이 함께 포용성과 형평성까지 공략할 수 있는 전략적 기회로 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실리콘밸리 기업 사례들이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고려대학교의 다양성 증진 노력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우리나라 아이도 어른도 ‘한나라 말쟁이’는 한 사람도 없게 되는 다양성 풍만한 교육을 기대해봅니다.
목차
혁신의 산실, 실리콘밸리의 기업 사례들로 살펴보는 다양성의 6하 원칙
기형, 추함, 버림받음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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