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디즈니, 그리고 실리콘밸리의 공통점은?
2020년 2월, 아직 코로나바이러스가 미국과 캘리포니아에 본격 상륙하기 전, 실리콘밸리에 사는 한국인인 필자가 가는 곳마다 화두가 된 것은 ‘기생충’의 오스카 수상 소식이었습니다. 실리콘밸리 한복판인 팔로알토(Palo Alto) 중심가의 극장에서는 ‘기생충’이 상영되고 있었고요. 이 ‘기생충’과 세계 최대의 콘텐츠 산업 기업인 디즈니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처럼 한 사람이 아카데미 식장에서 한꺼번에 오스카 네 개를 거머쥔 것이 이전에도 딱 한 번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60년도 더 전인 1954년의 수상자 월트 디즈니(Walt Disney)입니다. 즉, 영화사의 혁신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것입니다.
창립 96년 차인 디즈니사는 곧 백 년 기업이 될 참인 지금도 포츈(Fortune) 500대 기업 목록에 52위로 이름을 올리고 있을뿐더러, 전 세계에 걸쳐 이십만 명의 구성원을 가진 거대 조직임에도 2018년에는 패스트컴퍼니(Fast Company)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오스카 4개 동시 수상이라는 공통점도 재미있지만, 정말 흥미로운 것은 무엇이 디즈니와 같은 오래된 대기업을 지속적으로 혁신하게 하는가와 무엇이 기생충의 수상을 가능하게 했는가 하는 것, 즉 그들 사이에 공통된 혁신의 원동력이 무엇이냐는 것이겠지요. 이는 또한 실리콘밸리가 수십 년 간 세계적인 혁신의 산실로 자리를 굳히게 된 비결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기생충과 디즈니 그리고 실리콘밸리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지속적 혁신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 답은 뜻밖에 디즈니 만화영화에 나오는 공주 군단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뜬금없이 웬 디즈니 만화영화를?”이라고 묻는다면, 여기에 미국 기업의 인사뿐만 아니라 경영 전반에서 요즘 주목받는 ‘다양성, 포용성, 형평성(Diversity, Inclusion & Equity)’의 발전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으며, 이것이 바로 디즈니와 실리콘밸리의 지속적 혁신 비결이자 기생충이 각광받은 이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또한 “우리 아이는 한나라 말쟁이라 부끄러워요.”라고 실리콘밸리의 부모가 이야기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려대학교 다양성위원회 역시 이 다양성, 포용성, 형평성의 3단계 모델을 사용하고 있어 익숙하신 개념이겠지만, 디즈니의 예에 비추어 한번 살펴보지요.
디즈니 공주 군단으로 본 다양성, 포용성, 형평성,
그리고 디즈니의 생존과 혁신 전략
우선 다양성입니다. <그림 1>을 보면 지난 몇 년 간 부쩍 다양한 인종적 배경을 가진 ‘공주’들이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림을 보면 ‘백인/유럽 계열’ 공주가 64%를 차지하고 백인 외 모든 인종을 의미하는 POC(People of Color), 즉 ‘유색인’ 공주는 35%입니다. 최근의 다양성 확보 노력이 역력하지만, 디즈니가 전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전 세계 인구의 인종 분포를 대표성 있게 맞추기에는 아직 갈 길이 한참 멀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특히, 전 세계 인구 중 아시아인이 통틀어 54%에 달하는 것에 비하여 아시아계 공주는 아직까지 오로지 ‘뮬란(Mulan)’의 주인공뿐이어서 대표성이 심히 떨어지는 것이 눈에 띕니다.
그림 1. 디즈니 공주 군단의 인종 다양성 vs. 전 세계 인종 분포
1)
기생충이 오스카를 수상했을 때, 실리콘밸리 주변에서 다양성에 관심이 있는 인사 계통의 사람들이라면 본인이 백인이더라도 한국인인 필자보다도 더 열광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는데, 이것이 그 이유 중 하나라고 봅니다. 이렇게 숫자상으로 비주류 집단의 구성원들이 조직에서 어느 정도를 차지하는가의 문제가 ‘다양성(diversity)’입니다. 고려대학교 2019년 <다양성 보고서>를 보면, 교수진에서 여성의 비율이 16.1%라는 부분이 다양성을 보여주는 한 지표가 되겠지요.
다양성의 다음 단계인 ‘포용성(inclusion)’은 비주류 집단의 양적 비중뿐만 아니라 그들이 얼마만큼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다시 디즈니 공주 군단으로 돌아가서, 1937년 백설공주(Snow White and the Seven Dwarfs)부터 2016년 모아나(Moana)까지 80년 간 공주의 역할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를 비추어 보면 그 시대 여성에 대한 사회의 포용성 수준이 보입니다. 1937년 최초의 디즈니 공주인 백설공주는 백인이었고 그의 역할은 일곱 남자를 위해 집을 청소하고 밥을 짓는 것이었으며 그의 최대의 성취는 백마를 탄 왕자에 의해 구출된 것입니다. 이런 양태는 1992년 알라딘에 등장하는 최초의 유색인 공주, 자스민공주(Princess Jasmine)까지 반세기 넘게 지속됩니다. 그러다가 1995년의 ‘포카혼타스(Pocahontas)’에 다다르면, (여러 가지 역사적, 문화적 왜곡에도 불구하고) 그 주인공이자 유색인인 포카혼타스는 ‘구출 받는 공주’를 넘어 자신만의 세계와 역할을 가진 여성으로 그려집니다. 이를 통해 포카혼타스를 본 아이들이 사회에 나갔을 때 일터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포용성이 확장될 수 있는 초석을 깔고 있습니다. 이후 1998년 작품에서는 병사가 된 아시아인 뮬란, 2009년작 ‘공주와 개구리(The Princess and the Frog)’에서는 자신의 사업을 운영하는 흑인 소녀 티아나(Tiana), 2012년에는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즐기며 구출 받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엄마를 구출하는 메리다(Merida) 공주로 이어집니다. 2016년에 이르면 유색인이면서 본인이 세상을 구하고 진취적 부족장이 되는 모아나가 등장하게 되고, 동시에 팔십 년 만에 최초로 아무런 로맨스가 필요하지 않은 디즈니 공주로 등극합니다. 그 후 2018년 ‘주먹왕 랄프 2: 인터넷 속으로(Ralph Breaks the Internet)’에서는 디즈니의 공주들이 총출동하여 이전 디즈니 영화에서 얼마나 성별 포용성이 부족했는지를 스스로 풍자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면서 포용성 측면에서 성숙해진 모습을 보입니다.
이와 같이 다양성과 포용성을 강조하는 디즈니의 행보는 우연한 것이나 윤리적인 동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지극히 경영 전략적인 움직임이라는 것을 2019년 디즈니의 <다양성과 포용성 결의 보고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구성원의 72%와 이사회의 67%가 여성이거나 유색인이며 소수성애자들이 일하기 가장 좋은 기업 명단에 지난 10년 동안 이름을 올린 것 등을 자랑스럽게 보고하면서, 이러한 노력이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인사 및 경영상의 신념에 근거하고 있다고 명시합니다.
- “포용성이 시장 적합성을 위한 열쇠이다.”
- “모든 직급의 구성원들이 우리 고객들의 삶의 경험을 반영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더 좋은 회사가 된다.”
- “모든 사람들의 아이디어와 결정이 소중히 여겨지고 격려를 받을 때 우리 회사가 번성한다.”
즉, 다양성과 포용성은 디즈니의 주요 비즈니스 전략으로, 한편으로는 미래 시장을 분석하고 고객의 구성과 맞는 ‘대표성’을 확보하여 자칫 시장 사정에 맞지 않는 오판을 할 소지를 없애려는 기업 생존을 위한 전략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 요소들이 조직에서 혁신을 이끌어낸다는 것이 지난 수년간 많은 연구를 통해 입증되고 있는바, 이에 근거해 지속적 혁신을 담보하려는 기업 성공을 위한 전략이기도 합니다.
기생충이 조명하는 것은 다양성과 포용성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형평성(equity)’입니다. 형평성의 부족을 조명한다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이 되겠지요. 그것도 디즈니 만화영화에서는 아직까지 다루지 않는 다양성의 축, 계층 간의 형평성과 그것이 부족할 때 조직이 치를 수 있는 대가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달까요. 그런데 실리콘밸리에서 지난 몇 년 간 가장 큰 이슈로 대두되는 하나가 바로 이 형평성의 부족이며, 인종과 성별 측면에서 특히 두드러져 <브로토피아(Brotopia)>와 같은 책들이 연달아 출판되고 있습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다양성, 포용성, 형평성은 지속적 혁신을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므로, 이것이 실리콘밸리 혁신의 신화가 꺾이게 되는 원흉이 될 수 있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