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역할 모델로서의 교수자
내가 신임 교원으로 임용된 당시에는 신임 교원의 교수역량 증진을 위해 마이크로티칭을 한 번씩 받도록 학교에서 의무화했다. 마이크로티칭이란, 내가 실제로 수업하는 장면을 15~20분 정도 촬영한 후, 그것을 교육 전문가와 함께 보면서 나의 교수 스타일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비슷한 경력을 가진 다른 교수들과 함께 이 활동을 진행했는데, 서로의 교수 스타일에 대해 피드백도 해주는 등 큰 도움이 되었던 세션이었다. 자신이 가르치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낯간지러운 일이 또 있으랴. 부끄러움과 민망함을 무릅쓰며 내 모습을 시청한 후 피드백을 받았다. 그중 기억에 남는 피드백이 바로 내가 학생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있다는 말이었다. 어리둥절하여 그게 무슨 말인지 되물었다. 말인즉슨, 내가 학생 전체를 대상으로 질문을 한 후, 학생이 손을 들고 답변을 할 때 굉장히 적극적으로 그 답변을 들으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학생이 뒤에 앉아 있으면 뒤쪽으로 걸어가기도 하고, 잘 들리지 않을 때는 다시 말해달라고도 하고, 답변하는 학생과 눈을 잘 마주친다는 것이었다. 사실 상담을 배웠던 나에게 이러한 기술(skill)을 사용하는 것은 전혀 새로울 것은 없다. 사람과 이야기할 때 눈을 맞추며 열심히 듣고 필요한 경우 재질문 하는 것은 상담에서 기초적으로 배우는 것들이다. 원래부터 나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상대방과 눈을 마주치려고 하고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많이 하는 편이다. 그런데 그것이 롤 모델이 된다니 그건 무슨 뜻인가 싶었다. 전문가의 설명은 이러하였다. 학생들은 ‘영향력이 있는 존재
(교수자)’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만으로도 ‘저 학생이 중요한 말을 하는 건가? 왜 교수가 저쪽으로 이동하지?’하며 다른 학생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학생 자신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수업 안에서 다른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그러한 행동을 모방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아, 저 교수는 학생의 말을 들으려고 하는구나’라는 느낌을 주어서, 학생들은 자신이 존중받고 있고 자기 생각이 중요할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되고 학습 동기가 강화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내용을 책에서 읽었더라면 ‘당연하지!’라고 생각하고 넘어갔을 텐데, 내가 한 행동을 직접 관찰하면서 피드백을 받으니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하였다
(물론, 위의 예시는 다행히도 긍정적인 사례였지만, 그 외에 내가 했던 다른 행동들을 돌이켜보니 바람직하지 않은 언행들도 많았다). 내가 교수자로서 교실 안에서 하는 말 하나, 행동 하나가 학생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다는 것을 크게 깨달았던 기회였다. 그때부터 작은 행동 하나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매우 힘들기도 하다!). 수업에 일부러 미리 가서 준비를 한다든지
(내 수업은 주로 사범대 학생들이기에 미래 교사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나의 말투나 톤 같은 것까지도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학습자들은 학습 장면에서 무엇을 배울까? 일차적으로는 다양한 지식
(knowledge)과 기술을 습득한다. 예를 들어, 통계 수업에서는 통계와 관련된 지식
(예: 평균의 개념, 정규분포에 대한 이해 등)과 통계를 사용하는 기술
(예: 통계 소프트웨어를 활용하여 평균값 구하기, 엑셀 시트에 데이터 정리하는 방법 등)을 배운다. 내가 주로 가르치는 상담 관련 과목에서도 상담
(counseling)과 관련한 다양한 이론도 배우고 해당 이론이 현장에서는 어떻게 활용되는지에 대해서도 배운다. 대부분의 교과목은 교과 지식을 가르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지만, 학습자들이 그것만 배우는 것은 아니다. 학습자들은 학습 장면에서 자기가 문제를 만들어 스스로 해결해 나가면서 자기주도성이나 자기관리 능력도 배운다. 또래들과 협업하면서 협력하는 방법,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 등 대인관계 기술도 배운다. 즉 교과 지식 그 자체는 아니지만, 살아가면서 필요한 중요한 역량도 개발하게 된다. 이렇듯 학습 장면에서 지식과 기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학업에 임하는 자세 등 생애 관련 기술도 배우게 되는데, 이러한 요소는 교수자가 수업 설계 시 의도적으로 통합시켜 낼 수 있다. 예를 들어, 협업 능력이 중요한 역량이라고 판단되면 협업하는 형식의 과제를 부여한다든지, 교수자의 개념 설명 이후 해당 내용을 또래에게 설명해 보게 하는 활동을 넣는다는지 하는 식으로 세밀하게 수업 안에 녹여낼 수 있다.
하지만 교수자가 간과하기 쉬운 부분은 바로 교수자가 의도적으로 설계해 넣지 않은 부분이다. 학습자는 교수자가 설계한 수업 안에서 다양한 지식과 기술, 태도, 역량 등을 개발하기도 하지만, 교수자를 통해서도 배운다. 반두라
(Bandura)와 동료들은 유명한 보보인형 실험
(Bobo doll experiment)을 통해 인간이 관찰과 모델링을 통해 학습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3)
보보인형 실험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이렇다. 우선 이 실험은 어린 아동을 대상으로 진행하였다. 어른
(연구원)이 보보인형
(일종의 큰 오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툭 치면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난다)을 망치로 때리는 것을 관찰하게 한 후 보보인형을 주면 아이들도 똑같이 망치로 때리면서 논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어른의 성별이 아동 본인의 성별과 같을 때 모방효과가 더 크게 나타났다. 이 실험을 통해 인간은 자신과 유사한 타인의 말이나 행동을 자연스럽게 학습하고 그 경향성은 그 타인과 나의 관계가 긴밀할수록 더 강해진다는 것이 밝혀졌다.
반두라의 이론에 따르면 학습자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어떤 누구라도 관찰하면서도 배우게 된다. 특히나 교수자는 학습자 입장에서는 영향력이 큰 존재다. 대부분의 학습자에게 교수자는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 또는 수업을 관장하는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영향력을 가진다. 모든 학생이 그렇지는 않을 수 있지만, 많은 경우 학생들은 교수자와 좋은 관계를 갖고 싶어 한다. 그렇기에, 학습자들도 알게 모르게 교수자의 행동을 관찰하면서 그것을 모방하게 되고 바람직한 행동에 대한 기준점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그러니 교수자로서 바람직한 행동과 올바른 말을 사용한다면 그 자체로도 학습자들에게는 좋은 학습경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② 교과서, 책, 예시 등에 나오는 등장인물
내 눈앞에 보이는 인물만이 역할 모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도 충분히 영향을 가질 수 있다. Diversitas 2호에도 소개된 바 있는 Lessons in Herstory라는 앱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미국 역사책에 등장하는 여성이 11%밖에 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 하에 만들어진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이다. 해당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한 휴대전화기를 역사책에 등장하는 남성 인물 가까이 가져가면 동시대에 활약했던 여성 인물들을 보여주는 앱이다. 교육계에는 이와 비슷한 문제의식이 이전부터 존재했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대체로 남성이면 여학생의 학습 동기나 진로 동기가 저하 될 수 있다는 비판 때문이다. 특히 STEM
(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and Math의 줄임말로, 쉽게 말하면 이공계 학문 영역을 포괄하여 칭하는 용어) 분야에서는 이 점이 많이 논의되고 연구되어 왔다.
4)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도 한 번 떠올려보라. 중고등학교 과학 시간에 이름을 들어본 과학자 중에 여성은 몇 명이었는지. 요즘의 학생들은 좀 다를 수도 있지만, 나와 비슷한 시기에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이라면 주로 마리 퀴리
(Marie Curie) 정도를 떠올리거나 좀 더 최근의 과학자로 제인 구달
(Valerie Jane Goodall) 정도를 떠올릴 정도로 과학자 중 여성 모델을 찾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학창 시절에 본 과학 교과서에는 주로 남성 과학자들이 많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진행된 연구 중에도 교과서에 등장하는 인물을 분석한 사례들이 있다. 교과서 삽화에 등장하는 사람의 성별뿐만 아니라 그림 안에 나타난 역할 등을 분석하기도 하는데, 과학, 수학 교과서에는 남성 인물이 여성보다 많이 등장하는 편이다.
5)
도덕이나 국어 교과서에도 대체로 남성이 여성보다 많이 등장하는데, 남성들은 야외활동을 더 많이 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반면 여성들은 가정 활동을 표현하는 경우에 더 많이 등장한다고 한다.
6)
최근에는 다문화 가정의 증가로 다문화주의 관점에서 삽화를 분석하는 연구도 생겨났는데, 다문화 배경을 가진 인물이나 장애인의 등장 빈도가 현저히 낮음을 보여주고 있다.
7)
교과서의 삽화가 학생의 인생과 인과적인 관계를 가진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겠지만, 반두라의 설명을 빌리면 어느 정도의 영향력은 있을 수 있다. 자기와 비슷한 특성을 지닌 유명 인물이 교과서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면, 학생으로서는 ‘내가 과연 가능할까’라는 의심을 품게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희망적인 사실은 이러한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교과서는 꾸준히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속도는 느릴지언정 말이다.
위의 사례는 주로 초중등 교과과정 중심으로 진행된 연구이지만, 대학 교육에도 적용될 수 있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인물, 수업 시간에 활용하는 시청각 자료에 등장하는 인물이 어떤 사람들로 이루어졌는지를 비판적으로 점검해보면 깜짝 놀랄 수도 있다. 나는 강의하는 과목의 성격상 슬라이드에 인물 삽화를 종종 사용하는 편인데, 나조차도 백인 사진을 많이 사용하고 있음에 깜짝 놀랐었다. 가족과 관련한 내용을 다룰 때도 전통적인 가족 개념을 보여주는 그림이 대다수였다
(남녀 성인 부모에 자녀가 한두 명인 가족). 하지만 요즘에는 가족 형태도 다양해지고 있어서
(예: 한부모 가족, 조손 가족 등), 자칫 그러한 삽화로 인해 누군가의 가족은 ‘정상적 가족’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달하지는 않을지 생각해보게 된다. 진로상담 과목을 가르칠 때는 상담 사례에 등장하는 인물의 배경에도 신경이 쓰인다. 혹여나 특정 성별이나 배경을 가진 사람들만 진로 문제를 가진 것처럼 비치지는 않을지 걱정된다. 수업 시간이나 시험 문제에 등장하는 사람의 이름도 한국인 이름뿐 아니라
(예: 김 박사), 다양한 외국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최대한 모델을 다양화하려고 한다
(예: 곤잘레스 박사, 왕 박사 등). 그런 과정에서 다양한 문화권의 인물에 대한 학생들의 수용도도 자연스레 높아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