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은
왜 더 많은
여성을
필요로 하는가
임소연
숙명여대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29.3%, 20.0%, 10.0%, 6.6%.
이 숫자들은 모두 과학기술 분야의 여성과 연관되어 있다. 각각의 숫자 그리고 이 숫자들의 나열은 무엇을 의미할까? 맨 앞부터 시작해서 순서대로 이 네 개의 숫자는 각각 국내 자연공학계열 입학생 중 여성 비율, 과학기술 연구 개발인력 중 여성 비율, 과학기술 연구개발인력 관리자 중 여성 비율, 그리고 10억 원 이상 연구과제책임자 중 여성 비율을 나타낸다. 1) 모두 2018년의 통계이다.
   이 숫자들은 과학기술 분야의 여성에 대한 중요한 세 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첫째, 과학기술 연구개발인력이 되기 위해서 최소한 학사 학위 이상이 필요하다는 전제하에 29.3이라는 숫자는 애초에 과학기술 분야의 진로를 꿈꾸는 여성들이 전체의 3분의 1도 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둘째, 과학기술 연구개발인력으로 진로를 쌓아가는 과정에서 29.3이 20으로, 20이 다시 10으로 떨어지는 것은 이미 과학기술 분야에 들어온 여성들조차 유지되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수도관 틈새로 물이 새어나가듯이 여성 인력이 경로를 이탈하여 빠져나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대규모 연구과제를 책임지는 관리자급 연구자 중 여성의 비율을 나타내는 숫자 6.6은 과학기술 분야의 여성이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기 힘든 구조 즉 ‘유리천장’의 존재를 암시한다. 결국 여성 과학자와 엔지니어가 이렇게 적은 이유는 대학과 기업, 국공립 연구 기관 등 과학기술계 전반에 만연한 성차별적 구조 탓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숫자들은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이를테면, 여성이 남성에 비해서 과학기술 연구자나 관리자로서의 자질과 능력이 부족해서 나온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해석이다. 적성에 맞지 않아 대학 진학 시 이공계 전공을 선택하지 않는 것이며 전공을 살려 취업을 했다고 해도 중간에 스스로 그만두는 것이 아닐까? 애초에 여성 인재의 풀(pool) 자체가 넓지 않으니 위로 올라갈수록 숫자가 적어지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게다가 승진이나 대형 과제 수주 등에서 여성 비율이 극도로 적어지는 것은 공식적인 평가 절차에 따른 결과일 뿐이다. 요즘 세상에 누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할까? 게다가 논문이나 특허 등 실적이 중요한 과학기술 분야에서라면 더더욱 여성이기 때문에 교수가 되지 못하거나 연구비를 못 받는 일은 벌어질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보면 과학기술 분야가 성차별적이라는 앞선 해석은 현실 왜곡에 가깝다. 여성들이 이공계 전공을 선택하고 실력을 기르면 다 해결될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왜 굳이 과학기술 연구개발인력 중 여성 비율이 높아야 하는 것인지, 즉 여성 과학기술인을 위한 정책이나 기관이 존재하는 이유부터가 의아해진다.

그림 1. 한눈에 보는 2018년도 여성과학기술인력 현황

출처: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 (2019). <2009-2018 젠더기반 과학기술인력 현황>


   동일한 숫자에 대한 상반된 두 해석, 그 간극이 이 글의 출발점이다. 이 간극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고 드러내며 두 입장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 이 글의 목표이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정책과 교육에 대하여 2)
과학기술 분야의 소수자 여성에 대한 지원은 정책과 교육의 영역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실행되어 왔다. 우리나라의 여성 과학기술인 정책은 2002년 <여성과학기술 육성 및 지원을 위한 법률> 제정으로 시작하여 2004년부터 5년마다 수립되는 <여성과학기술인 육성 및 지원 기본계획>(이하 <기본계획>)을 중심으로 펼쳐져 왔다. 작년부터 제4차 <기본계획>이 시행 중이며 지금까지 각 기본계획에서 추구했던 목표는 아래와 같다.

•제1차 기본계획(2004-2008) “여성과학기술인과 함께 하는 조화로운 과학기술 중심사회 구현”
•제2차 기본계획(2009-2013) “여성과학기술인이 선도하는 창의적 과학기술사회 구현”
•제3차 기본계획(2014-2018) “양성이 함께 이끄는 과학기술과 창조경제”
•제4차 기본계획(2019-2023) “여성과학기술인의 잠재가치가 발현되는 사회”


   제3차 <기본계획>에서 ‘양성’이 언급되기는 했으나 이 기본계획에서 주로 대상으로 삼는 것은 여성 과학기술인이다. 여성 과학기술인의 숫자를 늘려서 성비 불균형 문제를 해소하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여성 과학기술인의 유입을 늘리고 경력 이탈을 막기 위한 사업이 많이 수행되어 왔다. 예를 들어 여학생 멘토링, 일-가정 양립 및 경력단절 예방을 위한 직장 보육시설 확대, 복귀자나 재취업자를 위한 지원 사업 등이 눈에 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2000년에 10%대였던 과학기술 연구개발인력 중 여성 비율이 2018년에는 20%로 2배가 되었다. 이 속도대로라면 언젠가는 여성 비율도 50%가 넘고, 더 시간이 지나면 결국 10억 원 이상의 연구비를 따는 남녀 비율도 비슷해질까?
   실제로 과학기술 분야 성비 불균형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 이라고 보는 이들이 없지 않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며 미래도 현재보다 나아질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일리가 있다. 단,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과거의 10%가 현재의 20%가 되기까지 5년에 한 번씩 새로 목표를 세우고 여러 사업을 추진해 온 정책적 노력이 있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여학생의 진로 지도 및 역량 강화를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마련하며, 직장에 보육시설을 확충하거나 남성에게도 육아휴직을 적극 권장하고, 출산과 육아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이라 할지라도 언제든 다시 취업할 수 있게 도와주는 정책만으로 충분한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적 노력이 불필요하다거나 그 노력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여성 과학기술인 육성 및 지원 정책이 양적인 성장에 성과를 내온 만큼 이제 질적인 도약을 고민해 보면 어떨까 싶은 것이다.
   여성 과학기술인을 대상으로 한 지금까지의 지원 사업에서 핵심은 ‘여성’이었다. 여성은 사회 및 과학기술계의 성차별적인 구조 탓에 남성에 비해 불리한 위치에 처해 있고, 분야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소수자로 존재해 왔다는 것이 여성 과학기술인을 지원하는 정책의 존재 이유였다. 사실상 여성에 대한 결핍 모델에 근거한 것이다. 이 결핍 모델은 과학기술 분야 여성의 소수자성을 개인의 선호와 능력 중심의 평가에 따른 자연스러운 귀결로 보는 이들이 수긍할 만한 것이기도 했다. 결국 여성들이 구조적인 차별을 받는다고 보는 입장이든 여성들이 이공계 진로를 선택하지 않는 것뿐이라고 보는 입장이든, 남성에 비해서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 소수자 여성들을 따로 교육하고 지원하는 사업에 반대할 명분은 거의 없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결핍 모델에 근거한 여성 대상 사업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여학생 공학교육 선도대학 사업을 분석한 한경희 등에 따르면, 3) 여학생 만을 대상으로 한 사업은 여학생 집단을 부각시킴으로써 남녀 학생 모두에게 저항감을 불러일으키는 역효과를 가진다. 남학생은 여학생에게만 주는 특혜로보고 역차별이라며 문제 삼고, 여학생의 경우 여성을 특별한 배려가 필요한 열등한 존재로 바라본다는 생각에 참여를 꺼린다는 것이다.
   비슷한 고민이 이공계 교육에서도 시작되었다. 이공계 대학의 성인지 교육은 수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소수인 여학생들의 특성을 반영함으로써 대학교육에서 성평등을 실현하려는 목적을 갖는다. 이공계 전공은 과학적 추상성과 엄격한 논리, 수학적 사고 등에 가치를 두기 때문에 유연한 사고나 주변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는 비인간적 학문으로 알려져 왔다. 이공계 문화는 관계보다는 지식이나 논리 등을 우위에 두는 남성적 속성을 갖는다고 인식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공계 교수들은 여학생들을 과도하게 보호하고 배려하거나 남학생에 비해서 기대치를 낮추는 방식으로 여학생과 상호작용해 왔다. 4) 여학생들이 자신의 능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과학기술학도로서 정체성을 갖는 것이 어려운 현실이다.
   여학생과 남학생에게 공히 평등한 교육을 제공하고, 그들의 공평한 학습 및 사회진출을 위하여 교수들은 여학생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성인지적 교육은 주로 남학생과는 다른 여학생의 특성을 이해하고 그에 맞는 교수법을 개발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과거의 이공계 교육이 남녀의 실질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여학생과 남학생을 똑같이 대함으로써 결국 남학생 위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면, 최근까지 주로 실행된 성인지적 교육은 남녀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를 배려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성평등을 지향한다고 해서 여학생과 남학생을 구분 없이 똑같이 대하고 모든 학생들에게 똑같은 기회를 제공하라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맞지만, 이미 다르게 자라온 남녀 학생의 현실과는 맞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여성은 협동적 과정을 중요시하고 자기 확신보다는 외부의 인정에 의존하며 암시적 의사소통과 맥락적, 직관적 사고를 하는 반면, 남성은 경쟁적 결과를 중요시하고 자기 홍보에 적극적이며 직접적 의사소통과 분석적, 논리적 사고를 한다. 이러한 차이가 존재하는 현실에서 여성과 남성을 동일하게 대한다는 것은 사실상 여성을 배제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남녀 차이가 실재함을 인정하고 그중 문화적으로 소수자에 해당하는 여학생을 배려하는 교수법을 개발하고 실천하자는 것이 바로 기존 성인지적 교육의 주된 내용이다. 이러한 성인지적 교육에서는 주로 수업을 운영하는 방식이나 교수가 학생을 대하는 태도 등을 통해서 남녀 차이가 배려되고 여학생들의 결핍이 해소될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남녀를 구분하는 표현이나 여성을 차별하는 농담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거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 여학생이 지나치게 자신을 탓하거나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능력을 발휘하게끔 도와주는 한편 눈물을 보일 경우 단호하게 지도하는 것 등이 구체적인 사례이다.
   물론 이러한 방식의 성인지적 교육은 나름의 교육적 성과를 거두었다. 남녀 사이의 현실적인 차이를 애써 외면하면서 명목상의 평등을 추구하기보다, 그 현실을 인정하고 기존 교육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관점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남녀 차이에 기반한 성인지 교수법은 젠더정체성을 고착시키고 개별 학생의 차이 및 다양성을 간과하는 한계를 가진다. 여성 과학자가 특유의 모성과 섬세함으로 과학을 더 잘할 수 있다는 주장이 여성성을 여전히 모성이나 섬세함 등으로 전형화하는 문제점을 갖는 것처럼, 여학생의 소극적인 태도나 낮은 자신감 등에 주목하는 교육은 여성이 남성에 비해 결핍되거나 열등한 존재임을 당연시할 위험성을 내포한다.
   그렇다면 특혜도, 특별한 배려도 아닌 방식으로 여성 과학기술인을 육성하고 성장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남학생과 여학생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그 차이를 젠더정체성으로 본질화하지 않는 새로운 성인지적 교육을 할 수는 없을까?
문제가 여성이 아니라면?
여성 결핍 모델을 전제로 하는 여성 대상 정책이나 남녀 차이를 배려하는 교육은 그 성과만큼 한계도 분명하다. 과학기술 분야 여성의 문제를 ‘여성’에 집중하여 해결하려는 정책과 교육은 결핍 모델과 성차 본질주의에 대한 저항에서부터 역차별 논란까지 여러 문제점을 드러내 왔다. 그렇다면 과학기술 분야 여성의 문제에 어떻게 다르게 접근할 수 있을까? 도대체 이것이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면 무엇이 문제일까? 과학기술 분야 여성의 문제가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면 남은 것은 ‘과학기술’의 문제이다. 고쳐야 할 것, 바꾸어야 할 대상이 여성이 아니라 과학기술이라면?
   “실력만 있으면 된다. 누가 남녀를 따지나.” 과학기술 분야 여성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이런 반응에 자주 맞닥뜨린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겐 29.3%, 20.0%, 10.0%, 6.6%처럼 위로 올라갈수록 뚝뚝 떨어지는 숫자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실력에 따른 결과일 뿐이니 받아들이든지, 실력을 더 쌓아서 숫자를 바꾸면 될 일이다. 그런데 과학기술인은 정말 능력과 실력으로만 평가받을까?
   1960년대 미국의 과학사회학자 로버트 머튼(Robert Merton)은 과학자사회가 ‘공유주의(communism)’, ‘보편주의(universalism)’, ‘무사공평주의(disinterestedness)’, ‘제도적 회의주의(organized skepticism)’라는 네 가지 규범을 갖는다고 말했다. 5) 공유주의는 과학의 성과를 개인이 사유화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 사회 전체의 것으로 공유한다는 의미이고, 보편주의는 과학 활동이 성별, 인종, 계급, 사상, 명성 등 개별 과학자의 특수한 요소가 아니라 과학적 사실만을 대상으로 비인격적으로 평가된다는 의미이다. 무사공평주의는 과학 연구가 특정한 이해관계나 사리사욕을 얻기 위해 수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제도적 회의주의는 최종적으로 사실로 받아들여지기 전까지 판단을 보류한 채 엄밀한 기준에 따라 철저한 검증을 거쳐야 함을 뜻한다.
   이후 머튼이 제시한 과학자 사회의 규범 네 가지는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비판을 받았다. 예를 들어, 영국의 과학사회학자 마이크 멀케이(Michael Mulkay)는 이 규범들을 실제 과학 활동이 작동하는 모습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과학자들 스스로가 만들고 믿는 이데올로기라고 보았다. 6) 학자들의 비판을 더 예로 들 것도 없이,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과학기술 분야를 잠깐만 떠올려 보면 이 네 가지 규범에 대한 반례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이제 과학적 성과는 특허로 사유화되고 과학자의 명성은 과학적 사실 평가에 영향을 준다. 기업의 이해관계에 맞는 결론으로 연구 결과를 조작해서 법정에 서는 과학자도 있고, 재연할 수 없는 실험이 동료 심사(peer review)를 통과하여 논문으로 실리는 경우도 많다. 머튼의 규범이 과학자 사회에서 갖는 의미가 여전히 큰 것과는 별개로 이 규범들은 사실상 잘 지켜지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보편주의 규범에 입각하여 성별이 과학 활동의 평가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과학기술의 문제를 파헤쳐 보기로 하자. 특히 과학자 사회의 보편주의를 염두에 두고 말이다.
   과학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보편과는 거리가 멀었다. 역사적으로 과학은 유럽 백인 남성의 발명품이었다. 사실 근대 과학 이전에 자연을 탐구했던 철학자들, 즉 자연철학자들부터 이미 남성이었지만 말이다. 실험이 지식 생산에서 중요하다는 것이 근대과학의 가장 큰 특징이자 과학을 자연철학과 구분 짓는 핵심이었다. 자연철학이 인간의 이성적 사유로 자연과 만물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활동이었다면, 현대 과학기술의 기원인 근대 과학은 자연에 개입하고 자연을 인위적으로 조작해서 사실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실험’이라고 불리는 방법론이었다. 우리에게는 “아는 것이 힘이다(Knowledge is power).”라는 격언으로 잘 알려진 영국 정치인이자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실험을 근대 과학의 새로운 방법론으로 만든 인물이다. 근대 과학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만하다.
   베이컨이 쓴 글 중에 출판이 되지 않아 잘 알려지지 않은 에세이가 있는데, 그 제목이 “시간의 남성적 탄생(Masculine Birth of Time)”이다. 이 글에서 베이컨은 과학을 인간 이성과 자연과의 신성한 결혼으로 묘사했고 실험을 자연에 대한 심문에 비유했다. 자연은 고대 문명기부터 여성으로 상상되었으나, 그때의 여성은 인간이 통제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독자적인 힘을 지닌 여신으로 형상화되었다.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 신화에서 아이시스(Isis)는 나일강 그 자체이자 나일강을 지배하는 자연법칙이기도 했다. 그러나 근대과학의 탄생과 함께 자연은 실험을 통해서 조작이 가능한 대상이 되었으며, 과학을 통해서 수줍게 혹은 에로틱하게 자신의 속살을 드러내 보이는 여성으로 대상화되었다. 17세기에 쓰인 천문학 책에서 요하네스 헤벨리우스(Johannes Hevelius)는 여신과 선배 천문학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천문학 발견을 제단에 바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그러나 18세기에 쓰인 화학책에서 여신은 높은 제단에서 내려와 상체를 드러낸 채 의자에 앉아 수줍은 듯 손가락으로 옆에 놓인 화학자의 초상화를 가리킨다. 천문학자와 화학자는 모두 변함없이 남성이지만, 한 세기를 지나며 자연은 과학자들을 거느린 위풍당당한 여신에서 과학자가 베일을 걷어 진리를 발견해 주기만을 기다리는 여인이 되어있다. 물론 지금은 어떤 과학책에서도 자연을 여성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19세기 이후 과학책과 저널에서 자연은 철저하게 물질로만 등장한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사실은 과학자의 이미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남성이라는 점이다.
   1966년에서 1977년 사이 미국의 초등학생들이 그린 과학자 그림 5,000여 점 중 여성 과학자는 단 28점에 불과했다. 전체 과학자 중 무려 99.4%가 남성이었던 셈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야 여성 과학자 그림의 비율이 대략 20% 대가 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과학자를 그릴 때 여성을 그리는 비율은 여학생에서 훨씬 높게 나타났다는 점과 어린이들이 커갈수록 과학자를 남성으로 상상하는 비중이 높아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2016년의 한 조사에서는 여자아이들 그림의 58%가 여성 과학자를 주인공으로 삼은 것으로 나타났다. 2018년 조사에 따르면, 6살 아이들이 여성 과학자를 그린 비율은 절반 정도였으나 16살 청소년의 경우 해당 비율이 20%에 불과했다. 7)
   그저 지나간 역사일 뿐이라거나 아이들의 무지에서 비롯한 상상일 뿐이라고 넘길 수 있을까? 여성 과학자의 대명사 마리 퀴리(Marie Curie)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1903년 노벨상 후보에서 제외될 뻔한 것은 어떤가? 1962년 노벨상을 받은 DNA 이중나선 구조 발견의 역사에서 정작 이중나선 구조를 보여주는 엑스레이 회절 사진을 찍은 여성 과학자 로잘린드 프랭클린(Rosalind E. Franklin)이 한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불과 몇 년 전 한국을 방문했던 영국의 남성 노벨상 수상자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여성은 실험실에서 연애를 하거나 울기나 할 뿐이라며 자신의 실험실에서는 남성을 선호한다고 밝혔다가 물의를 빚은 사례도 있다. 여성을 역사에서 지우고 현장에서 배제해 온 과학기술 분야의 관행과 문화 속에서, 과연 여학생들은 자유롭게 이공계 전공을 택하고 사회에 나와 남성과 동등한 평가와 대우를 받는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임신, 출산, 육아 등의 장애물을 넘는다고 해도 말이다.)
   전국 160개 고등학교를 대상으로 대입에서 전공을 선택한 고3 학생들을 조사한 결과를 통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짐작해 보자. 8) 이과에서 이공계, 이과에서 비이공계, 문과에서 이공계를 지원한 세 집단을 비교해 본 결과의 성별 차이는 놀라웠다. 이과에서 이공계로 진학한 학생들 가운데 남녀의 비율은 일정했다. 이과에서 비이공계로 진학한 학생들 중에서는 여학생 비율이 20% 정도 더 높았고 문과에서 이공계로 진학한 학생들 중에서는 남학생 비율이 20% 정도 더 높았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통계와 함께 언급했던 여성 누수 현상은 대학 진학 이전에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 더욱 의미 있는 발견은 이러한 교차지원의 동기가 과학 점수보다는 진로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비이공계로 전환한 이과 여학생과 이공계로 전환한 문과 남학생의 선택에 현재의 과학점수보다 미래의 진로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이 분야가 여성보다는 남성에게 친화적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이제 과학기술을 이야기하자!
그런데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과학기술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지금부터 시작이다. 과학기술 분야의 여성이 소수자라면 주류는 남성이다. 비단 한국 과학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거의 전 세계적으로 예외 없이 남성들이 주도해 온 지금까지의 과학기술은 과연 어떤 모습인가? 아니 사실상 서구 백인 남성에 의해서 주도되고 그들을 추격하는 각 나라의 남성에 의해서 추진되어 온 과학기술의 발전은 어떤 지점에 도달해 있는가? 굳이 생태여성주의의 논의를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과학기술로 만들어 온 인류 역사가 처한 위기를 목도하고 있다. 전쟁과 핵무기, 쓰레기와 미세먼지, 플라스틱 문제를 거쳐 이제 기후위기와 코비드19까지 인류의 안녕과 존재를 위협하는 많은 문제들이 사실상 과학기술의 문제이자 과학기술이 변화시킨 자연과 사회의 문제이다. 과학기술에 대한 이러한 문제의식은 이미 1980년대 페미니스트 과학학(feminist science studies)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제기된 바 있다.
   샌드라 하딩(Sandra G. Harding)9) 과학과 여성의 문제를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과학의 문제로 볼 것을 제안한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자이다. 지금까지 과학 지식의 생산에서 여성이 소외되고 주변화된 경험이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성뿐만 아니라 인종, 계급, 문화 등의 차이를 가진 다양한 집단의 입장 역시 반영되지 않았다. 삶이 앎과 분리될 수 없다면, 우리가 무엇을 아는가는 우리가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달려있다. 또한 모든 인간의 사고는 특정한 역사와 문화의 영향을 받기에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대부분이 (서구 백인 이성애자 비장애인) 남성으로 구성된 과학자 사회가 내세우는 보편주의는 결코 보편이라 불릴 수 없는 것이다. 이 허약한 객관성을 강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여성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배제되었던 이들의 삶에 기반한 '앎'이다. 하딩의 논의를 확장해 보면 과학자 사회의 다양성이 높아질수록 과학이 ‘강한 객관성(strong objectivity)’에 근접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비슷한 시기 “사이보그 선언문”을 쓴 것으로 잘 알려진 페미니스트 과학학자 도나 해러웨이(Donna J. Haraway) 역시 과학 지식의 객관성에 문제를 제기한다. 10) 해러웨이는 과학의 객관성이 어디에도 위치 지워지지 않는 신의 시선을 전제로 하고 있는 허구라고 말한다. 신이 아닌 이상 그 누구도 어떤 대상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재현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지식은 ‘상황지워진 지식(situated knowledge)’이며,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경험도 인식론적 특권을 가질 수 없다. 객관성은 상황지워진 지식이 갖는 부분성의 연결을 통해서 추구될 수 있을 뿐이다. 하딩과 해러웨이의 논의를 종합한다면, 과학의 객관성은 그 무엇보다 지식의 부분성, 즉 주류 과학의 객관성 뒤에 숨겨진 남성 중심성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1980년대 페미니스트 과학학 연구자들의 목소리가 과학기술 연구개발의 현장에 도달하기까지는 20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은 과학의 남성중심성이 여성의 건강에 실질적인 위해를 가할 수 있음을 보여준 일련의 사건들이었다. 1997년부터 2000년 사이에 미국 FDA는 이미 판매 승인된 의약품 10종을 회수했다. 치명적인 부작용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중 8종은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큰 부작용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 약품들이 개발되는 과정에서 주로 수컷 동물과 남성 피험자 등을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진행했기 때문이었다. 더 조사를 해보니, 세포생리학 학회지에 실린 논문 중 75%가 세포의 성별을 표기하지 않았고 표기한 경우 남성이 20%인 반면 여성은 5%에 불과했다. 네이처 등에 실린 논문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실험에 사용된 동물 중 5분의 1만이 암컷이었으며 심혈관 질환 관련 임상시험의 피험자 중 여성은 31%에 그쳤다. 심혈관 질환의 경우 환자와 사망자 수에서 여성의 비율이 남성보다 높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약한 객관성이라는 인식론적 문제가 어떤 물질적인 효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분명히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극히 일부의 의약품에서 벌어진 일이라 할지라도 남성의 몸을 표준으로 하는 연구 관행 상, 혹은 수컷 동물만 사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에 큰 고민 없이 수행한 연구들이 초래한 결과 앞에서, 이제는 과학기술의 객관성을 ‘제도적으로 회의’해 봐야 하지 않을까?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것이 젠더혁신(gendered innovation)이라는 프로젝트이다. 2009년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의 페미니스트 과학사학자 론다 쉬빈저(Londa Schiebinger)는 연구개발 초반부터 성·젠더 분석을 도입하여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것을 제안하는 젠더혁신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쉬빈저는 연구개발 과정에 내재된 성과 젠더에 대한 편견을 제거함으로써 과학, 의학, 공학 분야에서 더 우수한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보았다. 초기 비용이나 시간이 많이 들어 일견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FDA 의약품 승인 철회 사건처럼 문제가 생긴 이후에 처리하는 사회적 비용을 생각하면 오히려 효율성을 높이는 절차일 수 있다. 기존 연구 분야에 성·젠더 분석을 접목하게 되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고 새로운 연구 질문을 개발할 수 있게 되며 새로운 연구영역을 발굴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성·젠더 분석은 창의력을 일깨워준다. 젠더혁신은 미국과 유럽의 과학기술 학계에 신속하게 영향력을 발휘했다. 2011년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젠더를 통한 혁신’이라는 전문가 집단을 만들었고, 2012년 미국국립과학재단(National Science Foundation)도 젠더혁신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젠더혁신에서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발표한 20여 개의 사례들 중 공학 분야의 사례 두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11) 첫 번째 사례는 기계번역 분야이다. 기계번역은 글로벌화되는 세계에서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현재 시중에 나온 번역기의 오역률은 아직 높은 편이지만 기계번역의 정확도는 날이 갈수록 점진적으로 개선되고 있다. 기존 기계번역 시스템의 오역은 비점진적인 해결법을 필요로 하는 기초적인 기술의 문제에서 비롯되는데, 이런 기술적 문제 중 하나는 젠더와 연관이 있다. 구글 번역기와 같은 첨단 기계 번역기는 원문에서 단어가 쓰인 맥락과는 무관하게 대부분 he나 him과 같은 남성 대명사로 번역하는 오류를 보였다. 이것은 젠더 편견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기계 번역기의 정확도 및 신뢰도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기존 번역기는 원본에서 언급된 사람의 젠더를 구별하지 않은 채, 여러 이중 언어 텍스트 중 원본과 가장 가까운 의미를 가진 번역어 구절을 모두 찾는다. 그 중에서 사용 빈도수 등 다양한 요소를 바탕으로 번역본 구절 하나를 찾아 원본에 대응(matching)시키는 방법으로 번역을 한다. 따라서 인터넷에서 많이 사용되는 남성 대명사로 번역을 하게 되는 것이다. 기존 번역기를 개발하는 데 사용된 텍스트 자료에 남성 대명사가 남용되어 있기에, 번역기가 번역한 내용에도 남성 대명사가 많은 것이다.
   2012년 7월 젠더혁신 프로젝트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워크숍을 개최했다. 기존 텍스트 자료에서 남성 대명사와 여성 대명사의 비율을 맞춘다고 해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번역기가 젠더를 구별하지 않고 무작위로 젠더와 대명사를 대응시켜 원문에 있는 사람의 젠더와 다른 대명사를 사용해 번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문에서 언급된 사람의 젠더를 구분할 수 있는 알고리즘을 개발해, 이 알고리즘으로 젠더를 파악한 후 번역본이 생산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알고리즘의 개발을 통해 자동적으로 남성 대명사로 번역하는 현상을 피할 수 있으며 번역 자체의 질도 높일 수 있다.
   젠더혁신의 두 번째 사례는 비디오 게임 분야이다. 지난 50년 동안 비디오게임 개발자, 프로그래머 및 게임 이용자는 대부분 남성이었다. 최근 들어 여성들도 활발하게 비디오 게임을 이용하지만, 아직까지도 비디오 게임은 남성적이라는 고정관념은 팽배하다. 하지만 비디오 게임은 개인의 행동, 사회적 가치, 젠더 규범 등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강렬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고 게임 이용자와 상호작용 관계를 갖기 때문에, 비디오 게임에 대한 팽배한 고정관념은 우려의 대상이 된다. 게임 디자이너는 지금까지 대략 둘로 구분되는 전략을 써서 여자 어린이들을 위한 게임을 만들어 왔다. 하나는 남녀 불문하고 모두를 위한 게임을 개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게임들은 대부분 자동적으로 비디오 게임 시장의 주요 소비층인 남자 어린이를 대상으로 디자인된다. 이 전략은 남성 위주로 개발된 게임을 이용하기 위해 여자 어린이에게 필요한 능력을 개발하도록 장려한다. 다른 하나는 여자 어린이를 대상으로 게임을 개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드레스를 입은 공주가 등장하거나 핑크색 계열로 꾸며진 게임을 개발하는 식이다. 이 전략은 젠더에 대한 고정관념과 젠더 본질주의적인 사상을 강화시키며, 남녀의 젠더 차이를 더 부각시킬 수 있다.
   젠더혁신 프로젝트에서 제시하는 방법은 이 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제 3의 전략이다. 전형적인 젠더 규범을 전제하지 않고 어떤 젠더에 속하든 흥미를 가질 수 있는 게임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 전략을 사용한 게임 디자이너들은 시중에 나와 있는 비디오 게임 여러 종을 분석하여 어떤 유형의 게임을 남녀 아이들이 모두 좋아하는지 찾아냈다. 흥미로운 사실은 성별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는 게임에 비해서 비해서 남녀 어린이가 모두 선호하는 게임이 게임 시장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다는 점이다. 이로써 젠더혁신을 통한 기술은 젠더편견을 전제하지도 강화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가장 잘 팔리는 기술이 될 수 있음이 입증된 셈이다.
여성 과학기술인이 더 많아져야 하는 과학기술적 이유
이 글은 여성 과학기술인을 키우는 데에 특별한 지원을 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과 개별 남녀의 선호와 능력에 따라 과학기술인이 되는 과정에서 생긴 성비 불균형이 왜 문제가 되는지 의아한 이들을 모두 설득하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시작되었다. 일단 이 두 입장 모두 여성을 문제 삼는 한 최소한 과학기술 분야에서 여성이 남성에 비하여 열등한 위치에 있음을 전제로 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물론 여성 결핍 모델에 대해 전자는 구조적 불평등의 결과로 바라보며 정책과 교육으로 개선되어야 한다고 보는 반면, 후자는 성비 불균형의 원인이자 인위적인 개입이 필요하지 않은 문제로 여긴다는 차이점은 존재한다. 특히 후자의 입장을 가진 사람들에게 왜 여성 과학자와 엔지니어가 적은 것이 문제가 되는지 설득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이 차이점은 여전히 중요하다.
   이에 대한 답으로, 이 글은 과학자와 엔지니어의 대부분이 남성이라는 사실이 과학 연구와 기술 개발에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였다. 젠더혁신이라는 프로젝트는 과학자와 엔지니어에게 남성 중심의 연구개발 관행에서 벗어나 의식적으로 생물학적, 사회문화적 성의 차이를 고려할 것을 요구한다. 이쯤 되면 또 다른 의문이 생길 것이다. 그렇다면 젠더혁신은 과학자와 엔지니어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상관없는 것 아닐까? 맞다. 바로 그 점에서 이 프로젝트는 남녀 차이에 대한 본질주의적 전제에서 자유로 울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젠더혁신은 주체로서, 대상으로서 오랫동안 과학 기술에서 배제되어 온 여성에게 훨씬 더 매력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선행 연구들이 이미 보여준 바, 남학생이 과학기술 그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반면 여학생들은 사회적으로 유용하고 사람과 관련된 일로서 과학기술에 융합적으로 접근하는 것에 관심이 높다고 한다. 12) 실제로 과학기술의 객관성을 의심하고 개선하려는 이들은 공교롭게도 여성이 대부분이다! 하딩과 해러웨이, 그리고 쉬빈저를 포함하여 과학기술의 남성중심성을 문제 삼고 대안적인 과학기술을 고민해 온 대부분의 학자들이 여성이다. 2015년 얼굴인식 인공지능이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인공지능의 젠더 및 인종 편견을 연구하기 시작한 연구자 역시 흑인 여성이다. 앎과 삶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일까? 이쯤 되면 성인지 역량이 연구방법론의 필수 요소인 젠더혁신과 같은 프로젝트에서 여성 과학자와 엔지니어가 더 뛰어난 능력을 보일 것이라는 예측도 해 볼 수 있다. 젠더혁신과 같은 대안적 연구개발 프로젝트가 일상화되면, 여성 과학기술인의 경쟁력과 혁신의 원천은 소통 능력이나 감수성이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삶에 근거한 성인지 역량이 될 것이다. 유색 인종 여성, 비서구권 여성, 장애를 가진 여성, 노동자 계급 출신 여성등 여성 안의 교차성, 그리고 여성과 남성 범주를 아우르는 차이와 다양성까지 더해질 때 과학기술은 그제서야 생동감 있는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 이다.
   젠더혁신이란 결국 과학기술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프로젝트이다. 과학기술은 서구 백인 비장애인 남성을 중심으로 발전할 때보다 비서구 유색 인종 장애인 여성까지 포용할 때, 더 보편적이고 더 효과적이며 더 시장성이 높다. 그러한 방향으로 과학기술을 혁신할 수 있는 이들은 곧 다양한 차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 자신들이다. 다양성이 혁신의 원천인 셈이다. 그런 과학기술에 다양한 차이를 가진 여성들이 흥미를 느끼지 않을 리 없다. 과학기술 연구개발에서 다양한 차이가 반영될수록 더 많은 여학생이 과학기술 분야에 들어오고 더 많은 여성이 과학자와 엔지니어로 활약하며 더 많은 여성 연구자들이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과학기술 분야 리더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과학기술 분야 여성의 이야기는 과학기술의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이자 과학기술 혁신에 대한 이야기이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더 많은 여성들이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이제 여성이 아니라 과학기술을 바꾸자! 더 많은 여성 과학기술인이 편견과 차별 없이 그들의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과학기술이 혁신과 다양성으로 나아가는 가장 확실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목차
과학기술은 왜 더 많은 여성을 필요로 하는가
다양성이 존중되는 학습 장면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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