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에서 강남이 한족 문화에 본격적으로 편입되는 것은 삼국시대 오나라부터이다. 조조의 위나라는 265년 제5대 조환이 사마염에게 양위하면서 진晉으로 대체된다. 그리고 280년에는 오吳가 진에 의해 평정되면서 삼국시대는 종언을 고한다.
그러나 291년 번왕들에 의한 ‘팔왕의 난’이 촉발되고, 이 과정에서 북방의 흉노족에 의해 영가 연간
(307∼312)에 ‘영가의 난’이 발발한다. 결국 제4대 민제愍帝가 사로잡히면서 316년 진나라는 멸망한다.
서진의 멸망 과정에서 사마예가 강남의 건업 즉 남경에 수도를 세우고 317년에 수립하는 왕조가 동진이다. 이로 인해 중국사는 강북의 선비·흉노·갈·저·강의 5호에 의한 16국과, 강남의 오→동진→송→제→양→진으로 계승되는 6조에 따른 남북조시대가 전개된다.
위·진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은 현학玄學 즉 신도가新道家이다. 위·진에서 현학이 주가된 것과 달리, 6조에서는 위진시대에 시작된 청담淸談이 유행하는 모습을 보인다. 즉 ‘위진현학’과 ‘육조청담’인 것이다.
청담은 위·진 교체기에 죽림칠현에 의해 확립된다. 사마씨의 전횡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던 당시의 정치적인 현실 속에서, 지식인들이 현학의 본체론에 입각한 탈속의 자연주의를 표방했기 때문이다. 즉 청담에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따른 지식인의 고뇌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청담의 관점과 사유방식은 동진 시기에 더욱 유행한다.
청담의 특징은 자연과 탈속인데, 이는 강북을오이민족에게 빼앗긴 이주한 귀족들의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방어기제의 필연성 속에서 작용하기 용이했다. 즉 현실부정이라는 위진 교체기의 문제의식이, 남조에서는 오랑캐로 천시하던 이민족에 의해 더욱 선명해지며 청담 유행의 한 배경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부정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곧 자신의 부정으로까지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로 인해 청담의 주체는 현실에 염오染汚되지 않는 청정성을 지향하는데, 이는 청담에 주관주의와 정감주의적인 요소가 강하게 깃드는 배경이 된다.
청담의 상징 인물로 가장 선명한 것은 앞서 언급한 죽림칠현이다. 그러나 청담을 모은 문헌인 『세설신어』의 편집자는 남조인 송宋의 유의경이며, 이의 주석註釋은 양梁의 유준이다. 즉 이는 남조의 청담 유행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세설신어』를 보면, 죽림칠현 중 한 사람인 유령劉怜이 방에서 나체로 사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유령을 찾아온 사람들이 이와 같은 행태를 비판하자, 유령은 “나는 천지를 집으로 삼고 방을 잠방이
(속옷)로 삼는다. 제군들은 어찌하여 내 잠방이 속에 들어와 있단 말인가?”라는 말로 응수한다.
2)
이는 유교에서 강조하는 예 관점과는 완전히 다른 개인적인 주관에 입각한 탈속적이고 자유로운 면모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세설신어』에는 개인의 감정존중을 넘어서 감정 그대로를 긍정하는 모습도 다수 확인된다. 이는 죽림칠현 중 한 사람인 왕융王戎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왕융이 어린 아들인 만자萬子를 잃었다. 친구 산간山簡이 그를 위로하러 갔다. 왕융은 너무도 슬퍼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산간이 말했다. “어린애는 품에 안을 정도로 작은데, 어찌 이 지경에 이른단 말인가?” 왕융이 답했다. “성인聖人은 정情을 잊어버린다. 또 최하의 사람들은 정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모든 정이 우리에게 모여 있지 않은가!” 산간도 이 말에 감복하여 다시금 그를 위해 슬피 울었다.
3)
인용문에서 확인되는 감정에 대한 긍정은, 본체론을 바탕으로 현상마저도 본체 안으로 끌어들여 승화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측면이다. 이와는 조금 다르지만, 감정에 대한 긍정 인식은 현학의 시원자로도 평가받는 왕필로까지 소급된다. 『삼국지』 권28에는 왕필과 하안의 5정五情에 대한 논의가 수록되어 있는데, 중국철학의 감정 인식에 있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안은 『장자』의 관점에 입각하여 성인은 희·노·애·락이 없다고 하였는데, 그 이론이 심히 정밀하여 종회鍾會 등이 이를 따랐다. 그러나 왕필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성인이 사람들보다 빼어난 것은 신명神明이요, 같은 점은 5정五情이라고 보았다. 신명이 무성하므로 충화沖和를 체득하여 무無와 통한다. 그러나 오정은 보통 사람과 같기 때문에 기쁨과 슬픔 없이 사물에 감응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성인의 정은 사물에 감응은 하지만 사물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제 그 얽매임이 없다하여 다시금 사물에 감응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잘못됨이 많다.
4)
인용문을 보면 하안이 성인무정론聖人無情論을 주장한 것과 달리, 왕필은 오욕이 존재하지만 여기에 얽매이지 않는 성인유정무애론聖人有情無礙論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배휘裴徽가 왕필에게 ‘공자는 무를 말하지 않았는데, 노자는 무를 강조한 이유를 묻는 것’ 속에서도 살펴진다. 이때 왕필은 “성인
(공자)은 무를 체득했으며, 무란 가르칠 수 없는 것이므로 유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노자와 장자는 유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므로 항상 자신들의 부족한 점을 가르친 것이다.”고 답한다.
5)
현학의 특징 중 하나는 노자와 장자를 주로 다루면서도,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공자를 더욱 높게 평가한다는 점이다. 이는 강북문화의 틀 속에서 강남문화를 수용한 영향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왕필의 논의보다 왕융의 감정에 대한 인식은 보다 진일보한 동시에 보편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즉 왕필이 성인을 중심으로 오정의 기본을 긍정하고 있다면, 왕융은 보통 사람의 입장에서 감정의 발로 일체를 긍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즉 ‘하안 → 왕필 → 왕융’의 변화가 읽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마침내 왕장사王長史의 “나는 마침내 정情 때문에 죽어야 하는가!”라는 단계로까지 발전한다.
6)
이렇게 본체론에 입각해서 감정을 긍정하는 중국철학적 흐름은 후일 남종선에 의한 ‘일상의 긍정’으로까지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