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詩)에서 만나는 생물다양성과 동물권
이 혜 원
고려대 문화창의학부 미디어문예창작전공 교수
생물다양성, 동물권, 그리고 문학
요즘 많이 사용하는 다양성 개념 중에 ‘생물다양성’이 있다. 생물다양성(biodiversity)은 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이 ‘생물학적 다양성(biological diversity)’을 축약하여 쓰기 시작하면서 널리 퍼지게 된 말이다. 생물다양성이라 하면 대개 생물종의 다양성을 떠올리게 되지만, 더 넓게는 생물체 내부의 유전적 다양성과 생물과 무생물이 상호작용하면서 이루는 생태계의 다양성까지 포괄한다.
  생물다양성이 중요해지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다양한 생물들이 계속 줄어들게 되면서 그 위험성을 경고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생명 유지와 번성을 위해 자연을 이용하는 것은 인류가 오랫동안 이어온 활동이지만, 이용을 넘어 남용에 가까운 착취가 빈번해지면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70억 명이 넘는 사피엔스가 살고 있다. 이 모든 사람을 한데 모아 거대한 저울 위에 세운다면 그 무게는 약 3억 톤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축화한 모든 농장 동물 암소, 돼지, 양, 닭 을 더욱 거대한 저울 위에 세운다면 그 무게는 약 7억 톤에 달할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현재 살아 있는 대형 야생동물 호저에서 펭귄, 코끼리에서 고래에 이르는 의 무게를 모두 합쳐도 1억 톤에 못 미친다.” 1) 고 할 정도로 지구는 인간과 식용동물에 잠식된 상태이고 생물다양성은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생물학자들은 현재와 같은 환경파괴가 계속될 경우 2030년 경에는 현존하는 동식물의 2퍼센트가 절멸하고 이번 세기 말에는 절반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한다.
  생물다양성이 파괴된 지구는 다른 생명체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심각한 재앙이 될 수밖에 없다. 생물다양성이 훼손되면 공기와 물의 정화 작용이 약화되고, 코로나19 같은 바이러스나 농업 해충의 발생을 억제하는 생물 방어막의 기능도 떨어진다. 질소와 인 등 무기원소가 정상적으로 순환하면서 자연스럽게 쓰레기를 분해하고 토양의 독성을 없애던 역할이 줄어들 뿐 아니라 기후를 안정화하고 태양의 해로운 자외선을 막아주던 역할도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또한 많은 의약품이나 다양한 산업의 재료로 쓰이던 풍부한 자원으로서의 미래 가치도 보장할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심신을 안정시키는 기반이자 다양한 문화 창조의 원천으로 작용하던 자연의 아름다움을 상실하게 된다. 이처럼 생물다양성의 상실은 그 원인 제공자인 인간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이 될 것이다.
  따라서 생물다양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자각하고 그것이 훼손되었을 때의 심각한 결과를 예측하고 대비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인류를 위협하는 가장 큰 문제로 생물다양성을 지적하는 과학자 집단의 인식과 달리 보통 사람들에게 그것은 직접 와닿지 않는다. 차라리 해마다 체감할 수 있는 기후변화는 점차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에 비해, 그로 인해 벌어질 생물다양성의 격감이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는 그만큼 관심을 끌지 못한다. 생물다양성의 위기를 먼 곳 불구경하듯 바라보지 않고 생존의 문제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감성과 윤리에 호소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결코 생물다양성의 위기 상황에서 바깥에 놓인 예외자가 아니라 관계의 사슬 속에 있으며, 원인 제공자이자 해결의 주체로서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문학이나 철학 등의 다양한 인문학적 접근이 요청된다.
  이 글에서는 한국시에 나타나는 생물다양성에 대한 인식을 특히 동물권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려 한다. 동물은 생물다양성의 일부일 뿐이지만 인간과 비교적 유사하고 긴밀하게 관련되기 때문에 생물다양성의 문제를 좀 더 직접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한다. 동물권은 생물다양성과 직결되는 문제이며 생명윤리의 핵심을 내포하고 있어서 생물다양성의 위기와 대책을 모색하는 데 있어 각별한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하다.
  생물다양성과 관련하여 동물권이 주목되기 시작한 것은 최근 들어 빈번해지는 전염병의 확산과 무관하지 않다. 갈수록 대량화되고 비자연적으로 변하고 있는 공장식 축산으로 전염병에 취약해진 동물들이 쉽게 감염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량 살상이 거듭되면서 사람들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게 된 것이다. 전염병의 확산을 막는다는 이유로 행해지는 끔찍한 살상의 장면들은 본능적인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며 생명 경시 풍조에 대한 우려를 낳았다. 또한 최근 과학계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연구 결과 인간과 동물의 차별을 뒷받침하던 전통적인 주장들이 반박되고 동물권을 옹호할 만한 이론적 근거가 확립되고 있다. 이의 연장 선상에서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종의 이익을 옹호하면서 다른 종의 이익을 배척하는 ‘종차별주의(speciesism)’에 대한 비판이 강화되고 있는 변화도 눈여겨볼 만하다.
  ‘종차별주의’에 대한 비판이 일고 ‘동물권’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기까지 인류는 뿌리 깊은 차별의 역사를 이어왔다. 같은 인간종 안에서도 성별, 인종별, 계급별, 연령별로 행해진 갖가지 차별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1792년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가 여성의 권리 옹호를 주장했을 때 토머스 테일러(Thomas Taylor)는 “여성의 평등에 대한 주장이 건전하다면 그와 같은 논증이 개나 고양이, 또는 말에게 적용되어서는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추론은 이러한 ‘짐승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짐승들에게 권리가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따라서 짐승들에게 권리가 있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추론은 건전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2) 남성에 대한 여성의 평등을 인정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동물의 평등을 인정하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현대사회에서는 펼쳐지고 있다. 동물에게도 생명, 자유, 행복추구권이 보장되고 인간과 동물을 평등한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동물권’의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1975년 『동물해방』이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동물권 개념에 불을 지폈던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사람들에 대한 문제가 동물들에 대한 문제보다 언제나 우선되어야 한다는 믿음은 아프리카계 노예들의 이익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데 반대한 백인 노예소유주들의 편견보다 더 나은 근거를 갖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3) 동물들에게 행해지는 차별이나 학대는 흑인 노예에게 가해졌던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생명에 대한 존중과 평등권에 대한 인정이 없다면 그 누구도 자신보다 힘센 존재의 위압에서 벗어날 수 없다. 동물권에 대한 논의는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던 갖가지 차별을 줄이고자 노력해온 윤리적 선택과 연결되어 있다. 이는 약자에 대한 강자의 지배보다 차이를 인정하고 공존하려는 노력이 인류 전체의 발전에 유리하다는 다양성 가치의 발견과도 관련된다.
  문학은 사회적 제도와 규율의 바깥에서 좀 더 폭넓고 자유로운 시선으로 생물다양성이나 동물권의 문제를 조명해왔다. 생물다양성이나 동물권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기 훨씬 전부터 문학은 이미 그런 문제의식을 내포하고 있었다. 문학에서 자연이나 동물은 친근한 삶의 바탕이자 역동적인 묘사의 대상으로서 등장해왔다. 문학적 상상력은 인간의 시선을 넘어 자연이나 동물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문학은 어떤 선언적 윤리보다 더 절실하게 왜 우리가 다양성의 가치를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지, 왜 타자의 고통에 무감할 수 없는지를 말한다.
동물 학대와 육식에 던지는 질문
한국시에 나타나는 생물다양성과 동물권에 대한 인식을 살피기 위해, 먼저 그것이 훼손된 현실에 대한 비판이 예리하게 드러나는 시들을 보도록 한다. 문제에 대한 자각이 선행되어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험실과 동물원에서 벌어지는 동물 학대나 대량 사육과 살상 등이 자주 거론되는 문제이다.

임시로 설치해놓았던 가을이
철거되고 있었다 부도 맞고 쓰러진
토종닭 연구소 입구
널브러져 버려진 닭 한 마리
나사처럼 꽉 조여 있던 검은 눈빛은
벌써 풀려
땅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 장경린, 「토종닭 연구소」 부분


  이 시에서는 실험에 쓰인 동물이 버려진 황량한 현장을 묘사하고 있다. ‘토종닭 연구소’에서 토종닭을 보존하기는커녕 해체하고 유기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다. 부도로 황급하게 문을 닫은 연구소의 열악한 사정과 수습되지도 못한 채 버려진 실험용 닭의 모습은 이 땅의 곳곳에서 얼마나 마구잡이로 동물실험이 행해지고 있는지를 암시한다. 생생하게 살아있던 토종닭의 “검은 눈빛”은 힘없이 풀려 스러져버렸다. “널브러져 버려진” 닭의 상태는 이 실험이 얼마나 잔혹하고 가차 없이 행해졌을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동물실험은 과학이라는 미명 하에 빈번하게 이루어지며, 이 과정에서 동물들은 철저히 도구화되고 사용가치가 없어지면 즉시 폐기된다. 그동안 동물실험에 따르는 양심의 가책이나 윤리적 부담을 덜어준 논리는 동물의 신체를 일종의 기계장치로 간주했던 데카르트(Rene Descartes)의 관점이다. 데카르트는 인식의 대상인 동물은 그 주체인 인간과는 전혀 다른 존재이므로 기계장치처럼 다룰 수 있다는 차별적 관점을 대표한다.
  오늘날 이를 반박할 수 있는 지식은 급속히 확대되는 추세이다. 동물에게도 의식이 있다는 사실은 영장류뿐 아니라 코끼리, 돌고래, 개, 고양이, 돼지 등의 포유류, 심지어 새와 물고기에게까지 적용되고 있다. 데카르트는 의식할 수 있는 주체로서 성인-남성-주류-정상인만을 상정했다. 이 기준에 의하면 동물뿐 아니라 비주류에 속하는 사람들이나 아이, 여성도 의식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없다. 철저히 배타적이고 위계적인 가치관이다. 피터 싱어는 데카르트식의 차별적 기준을 비판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불편한 논리를 제시한다.

만약 실험이 어쨌든 행하여져야만 한다면, 정상적인 성인보다는 동물을 이용해야 할 종족주의적이지 않은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바로 이와 같은 논변이 정상적인 성인보다는 심각한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나 어린이들, 아마도 고아들을 실험에 사용할 이유를 보여준다는 점에 주목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어린이나 심각한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또한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4)


  의식할 수 있는 존재인가, 아닌가를 기준으로 실험 대상을 삼는다면 갓난아기나 심각한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실험을 허용하지 못할 근거는 없다. 인간과는 다른 종이라는 이유로 동물실험을 인정하는 것도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사고일 뿐이다. 종족주의를 넘어서 생명 존중의 가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동물도 의식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외면하지 말고 동물이 겪을 수 있는 아픔과 고통을 없애거나 줄여나가야 할 것이다.
  육식은 동물권과 인간의 이익이 가장 첨예하게 부딪히는 문제이다. 인간의 풍부한 육식을 위해 고도로 기계화되고 있는 공장식 축산은 동물권이 대두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하나의 생명이 아닌 고기로서 생산되고 자연적 수명보다 턱없이 짧은 생을 살다 무참하게 도축되는 동물들의 이야기가 대중매체를 통해 알려지면서 육식과 사육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안쪽에 불을 켜놓으면 바깥이 안 보이는 양계장
무사안일을 쪼아먹다 보면 저절로 살이 찌고
폐계로서의 운명을 따르는 것도 진정한 승리의 쟁취라고
벼슬 높은 우리의 지도자는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주인 영감은 안락한 노후를 위해 닭을 팔고
아들은 술값을 위해 영감의 주머니를 털지요
강한 놈이 살아남는 법이니까
오늘 포박되지 않으면 오늘 또 모이를 먹을 수 있지요
네모난 철망 속에서 우리는 아무 근심도 하지 않아요
취침시간엔 긴 나팔들이 우리를 안고 젖을 먹여요
잠을 자야 하니까요, 꿈을 깨면 우리가 닭대가리란 게 보이니까요
꿈에선 하늘을 나는 꽁지가 화려한 새이지만
감옥을 뛰어넘을 만한 절망도 우리에겐 없어요
날아야 할 이유도 없고, 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 최금진, 「닭」 부분


  먼 훗날 인류세(anthropocene)의 지층을 파보면 무수히 많은 닭뼈가 발견될 것이라고 할 정도로 닭은 인류의 주된 육식 재료로 쓰이고 있다. 시장에 내다 팔 더 많은 닭을 생산하기 위해 닭장은 점점 더 좁아지고 마침내 날개도 펴지 못할 정도로 좁은 공간에 갇힌 채 평생을 지내다 고기가 되는 것이 대다수 닭들이 겪는 생이다. 이 시에서는 공장식 축사에서 고깃덩어리로 키워지는 닭이 화자로 등장하여 동물권이 박탈된 축산 현장의 실상을 한결 생생하게 증언한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밤낮없이 환하게 불을 켜놓은 양계장은 자연과 단절된 채 고립된 공간이다. 좁은 닭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직 먹고 또 먹으며 살찌는 것이다. 그렇게 먹는 일만을 반복하다 포박되는 날에는 바로 고기가 되는 것이 이들에게 허락된 삶의 방식이다. 폐계가 될 정도로 오래 살아남는 것이 “진정한 승리의 쟁취”라는 자조에서 동물권과 거리가 먼 공장식 사육의 실태를 엿볼 수 있다. 이곳에서 사육되는 닭들은 주인 영감의 안락한 노후와 그 아들의 술값을 위해 가차 없이 희생된다. 인간에게 최대의 이윤을 안겨주기 위한 공장식 사육은 닭들의 생리와 무관하게 고기로서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효율적인 장치이다. 꿈에서나 날 수 있을 뿐 현실에서는 “날아야 할 이유도 없고, 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패배의식이 이들을 지배한다. 오직 고기가 되기 위해 살아야 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이들은 생명의 존엄성을 잃고 퇴화한다. 이 시에서 묘사된 것처럼 동물로서의 기본적인 생리마저 억압하는 현대식 축산의 문제를 비판하며 동물복지를 고려하자는 움직임이 있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비좁은 닭 사육장(출처: pixabay)


  풍부하게 사육되어 잘 손질된 채 다만 ‘고기’로서 눈앞에 놓인 그것에 우리는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이기성의 시에서는 “이것은 나의 이빨이 처음 어루만지는 너의 살, 너의 혀 그리고 너의 영원한 시체”(「육식의 종말」)라고 하여 육식의 장면을 낯설게 표현한다. ‘고기’가 동물의 ‘시체’라는 사실을 상기하는 순간, 고기라는 단어가 은폐하는 동물의 피 냄새와 죽음의 느낌이 강렬하게 다가온다. 또한 고기가 아닌 시체는 ‘나’와 마주한 동등한 생명체인 ‘너’의 몸으로서 전혀 다른 의미로 육박해온다.
  이처럼 고기가 실은 동물의 사체라는 불편한 진실은 편안한 육식이나 대량 사육과 살상을 위해 교묘하게 왜곡되거나 축소된다. 공장식 축사에서는 동물을 ‘도체(屠體)’라고 부르는데, 이는 도살한 가축에서 가죽이나 머리, 내장 등을 떼어낸 나머지 몸을 뜻한다. 그런데 공장식 축사에서는 아직 살아 있는 가축조차 도체라고 부름으로써 그것을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닌 고깃덩어리로 간주한다. 어떤 시인들은 고기가 동물의 시체라는 사실을 애써 환기함으로써 고기를 먹기까지 동물들에게 행해졌을 도축 과정을 되돌아보게 하고 편안한 육식에 반하는 윤리적 감각을 일깨운다.
  인류의 오랜 습속인 육식이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공장식 사육 방식 때문이다. 공장식 사육에서 동물은 태어나면서부터 고기로만 취급되며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다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다. 고기로서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최소한의 공간에 가둬진 채 활동이 제한된 동물들은 면역력이 극도로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구제역이나 조류독감 같은 전염병이 갈수록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2011년 초에는 구제역 때문에 돼지 330만 마리와 소 15만 마리가 무더기로 생매장당하는 참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때의 충격을 많은 시인들이 거론했는데, 특히 김혜순 시인은 『피어라 돼지』라는 시집 전체를 통해 대량 살육의 참상을 그려냈다.

무덤 속에서 운다
네 발도 아니고 두 발로 서서 운다
머리에 흙을 쓰고 운다
내가 못 견디는 건 아픈 게 아니에요!
부끄러운 거예요!
무덤 속에서 복부에 육수 찬다 가스도 찬다
무덤 속에서 배가 터진다
무덤 속에서 추한 찌개처럼 끓는다
핏물이 무덤 밖으로 흐른다
비오는 밤 비린 돼지 도깨비불이 번쩍번쩍한다
터진 창자가 무덤을 뚫고 봉분 위로 솟구친다
부활이다! 창자는 살아 있다! 뱀처럼 살아 있다!

피어라 돼지!
날아라 돼지!
  - 김혜순, 「돼지라서 괜찮아」 부분


  인간에게 이롭기 위해 집단적으로 사육되다 인간에게 해롭다는 이유로 이토록 잔혹하게 집단적인 살육을 당하게 된 돼지들의 처참한 최후를 묘사한 이 시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극치를 보여준다. 아니 현실 그 자체가 그로테스크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거대한 구덩이에 던져진 돼지들은 두 발로 선 채 파묻힌다. 쓰레기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는 돼지들을 보며 시인은 그들이 느꼈을 치욕을 떠올린다. 동물에게도 의식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저토록 함부로 다룰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들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급하게 봉합되었던 돼지들의 사체는 억압된 것들의 귀환처럼 느닷없이 출몰한다. 부패 끝에 파열한 돼지들의 사체가 무덤 밖으로 솟아오르는 장면은 참담하고 공포스럽다. 이것은 인간의 탐욕과 오만이 낳은 무자비한 지옥경이다.
  인간은 과연 다른 생물의 가치를 판단할 만한 절대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일까? 다른 동물들은 인간처럼 고통과 아픔을 느낄 수 없다고 보아도 되는가? 인간의 풍부한 육식을 위해 동물들이 생명과 자유를 누릴 권리는 무시되어도 좋은가? 시인들은 인간의 이익을 위해 눈감아왔던 많은 질문을 행한다. 시적 상상력은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넘어서는 동물적 전회(轉回)를 수월하게 한다. 동물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느낄 때 인간의 편의와 동물의 권리 사이에서 행해야 할 선택은 한결 선명해진다.
공감과 배려의 시선
이제 동물을 도구화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시선을 제시하는 시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시는 오래전부터 자연에 대한 공감을 표현하는 데 친숙했고 동물에 대해서는 각별한 소통의 면모를 보여왔다. 시에서 동물은 독립된 생명체로서 인정되며 인간과 다른 특별한 면모는 섬세한 관찰의 대상이 된다. 동물에 대한 존중은 인간과 다른 차이를 인정하고 하나의 생명으로서 평등하게 배려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는 개별 존재가 갖는 다양성을 열린 태도로 수용하고 각각의 존재들에게 필요한 서로 다른 권리를 용인하는 태도와도 상통한다.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깃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 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시도 땜쟁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니도 뭉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 백석, 「모닥불」 전문


  「모닥불」은 1936년 출간된 백석의 시집 『사슴』에 수록된 시이다. 3연으로 이루어진 짧은 시로 모닥불에서 타고 있는 사물들, 모닥불을 둘러싼 사람들과 동물들, 모닥불의 슬픈 사연이 차례로 그려진다. 백석 시 특유의 열거법과 엮음의 형식이 두드러지고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다. 오래전 시여서 요즘 쓰지 않는 어휘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온갖 것들이 어울려 있는 모습은 충분히 감지된다.
  1연에서는 모닥불을 이루는 수많은 사물들이 펼쳐진다. 모닥불 안에서는 사람과 동물이 남긴 갖가지 물품과 흔적이 뒤섞여 타고 있다. 사람이 남긴 물건이나 동물이 남긴 자취들이 순서도 없고 경중도 없이 마구잡이로 나열된다. 모닥불은 탈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똑같이 끌어안아 하나로 만들고 있다. 이 모닥불이야말로 생물다양성이 실현된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한때 식물과 동물의 몸을 이루었다 생명과 효용이 다한 뒤에는 다시 모닥불이 되어 타오르는 이들의 모습은 끝없이 순환하는 자연의 작용과 흡사하다. 모닥불 안에서 자연은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가 된 채로 존재한다.
  2연에서는 이 모닥불의 온기를 함께 나누는 온 동네 사람들과 동물들이 등장한다. 마을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들이나 새로 알게 된 사람들이나, 노인이나 아이나, 주인이나 나그네나,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건, 심지어 큰 개나 강아지나 한데 어울려 불을 쬔다. 이들이 이루는 정경에 대해서는 아무런 수식이 없는데도,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있는 그 모습 자체가 훈훈하다. 끄트머리에 슬쩍 끼어있는 큰 개와 강아지를 통해 이 모닥불의 세계에서는 인간도 동물도 차별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앞의 두 연이 열거법으로 짝을 이루는 것에 비해 마지막 연의 서술 방식은 구분된다. 여기서는 모닥불이 어떻게 이 많은 사물들과 생명들을 품을 수 있게 되었는지를 추정할 수 있게 하는 사연이 제시된다.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살다 몽둥발이가 되기까지 한 모닥불의 슬픈 역사는 고통받는 다른 존재들과 공감할 수 있는 바탕을 이룬다. 쓸모를 다하고 모닥불 앞에 모인 사물들이나 추위를 피하려 모닥불로 다가온 생명들은 서로에게 동류의식을 느낀다. 슬픔과 고통의 체험은 서로 다른 존재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을 수 있는 동질감의 기반이 된다.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 김종삼, 「묵화」 전문


  사람과 동물이 동고동락하는 경우 서로가 느끼는 교감의 깊이는 말할 나위가 없다. 오늘날처럼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여기는 문화가 자리 잡기 훨씬 전부터 집에서 함께 사는 동물과 사람 사이에는 각별한 감정이 작용했다. 김종삼의 「묵화」는 할머니와 소 사이에 흐르는 고요하면서도 묵직한 감정의 교류를 간결한 수묵화의 느낌으로 그려내고 있다. 하루의 고된 노동을 마치고 물을 먹는 소의 목덜미에 얹힌 할머니의 손에는 고마움과 미안함, 동지애 같은 많은 감정이 담겨 있다. 외롭고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할머니에게 함께 지내며 함께 일하는 소는 누구보다도 소중한 존재이다. 할머니와 소 사이에는 어떤 차별과 억압도 작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한 채 살아가는 공생적 관계이다. 이 시는 인간과 동물 사이에 이루어질 수 있는 평등하고 아름다운 공존의 방식을 인상 깊게 재현한다. 군더더기 없는 시이기에 ‘함께’와 ‘서로’라는 부사가 눈에 띈다. ‘함께’와 ‘서로’야말로 생명공동체가 조화롭게 유지될 수 있는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의 삶을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기가 그것이다.
  동물권의 내용은 이러한 삶의 방식과 다르지 않다. 동물권은 인간과 동물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동물들에게 평등이라는 기본 권리를 확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바탕으로 한다. 이때 평등은 동일한 처우(treatment)에 대한 요구가 아닌 평등한 배려에 대한 요구를 뜻한다. 5) 배려는 서로 다른 존재들이 어울려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보호막 같은 것이다. 서로 같지 않기에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네가 두 발을 들고 일어서면
나는 앉는다
나의 사회와 너의 사회가 만나는
촉촉한 뽀뽀

은돌,
오늘 기분의 높이는 얼마니
잠의 강을 잘 헤엄쳐 건넜니

이상하지 우리는
온 힘을 다해 뛰어올라도 다시 바닥이라는 걸 알면서도 몇 번을 더 뛰어오르는지
기다리고 있는데 기다리라는 말을 들으면
괜히 발바닥을 할짝거리게 되지 않니
형제와 친구들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
한 발자국을 참는
  -‌ 박세미, 「접속」 부분


  이 시에는 반려동물과 교감하는 장면이 섬세하게 펼쳐진다. 화자는 반려견 은돌과 함께 살지만, “나의 사회”와 “너의 사회”가 다르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계속 인지한다. 반려견의 키 높이에 맞추어 앉은 채 함께 인사를 나누는 모습에서 상대에 대한 배려가 잘 나타난다. 이들이 행하는 “촉촉한 뽀뽀”는 서로의 다름을 알면서 함께 하기 위해 서로를 맞추는 노력의 산물이다. 화자는 은돌의 기분과 안위를 꼼꼼하게 살피고, 은돌 또한 소통을 위해 인내심을 발휘한다. 서로 다른 존재와의 소통이란 “온 힘을 다해 뛰어올라도 다시 바닥이라는 걸 알면서도 몇 번을 더 뛰어오르는지” 모를 행위처럼 힘겹지만, 지속해야만 하는 일이다.

동물과 인간의 교감(출처: pixabay)


  상대에 대한 지속적인 배려와 인내가 없이는 서로 다른 존재와 평화롭게 공존하기 어렵다. 상대가 인간과 다른 종일 때 그 어려움은 배가될 수밖에 없다. 동물권의 논의에서 종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윤리적 판단이 요구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인간 중심적 사고를 넘어설 수 있는 확장적 시선과 공감의 능력은 다른 생물이 갖는 평등의 권리를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다른 생물에 대한 관심과 배려 없이는 생명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하기 어렵다.

수달 멧돼지 오소리 너구리 고라니 멧밭쥐 다람쥐 관박쥐 검은댕기해오라기 중대백로 쇠백로 왜가리 원앙 청둥오리 흰뺨검둥오리 비오리 조롱이 새홀리기 꿩 깝작도요 멧비둘기 집비둘기 소쩍새 물총새 청딱다구리 가막딱다구리 오색딱다구리 쇠딱다구리 노랑할미새 알락할미새 직박구리 때까치 물가마귀 딱새 붉은머리오목눈이 오목눈이 쇠박새 진박새 곤줄박이 박새 동고비 멧새 쑥새 노랑턱멧새 어치 까치 큰부리까마귀 자라 아무르장지뱀 도마뱀 누룩뱀 무자치 구렁이 능구렁이 유혈목이 대륙유혈목이 살모사 쇠살모사 까치살모사 산줄점팔랑나비 뿔나비 푸른부전나비 암먹부전나비 먹부전나비 부전나비 작은멋쟁이나비 수노랑나비 제일줄나비 왕세줄나비 별박이세줄나비 애기세줄나비 네발나비 큰멋쟁이나비 사향제비나비 산제비나비 긴꼬리제비나비 호랑나비 꼬리명주나비 대만흰나비 큰줄흰나비 배추흰나비 노랑나비 남방노랑나비 각시멧노랑나비 굴뚝나비 물결나비 노랑누에나방 넉점물결애기자나방 두줄물결자나방 포플라잎말이명나방 뜰길앞잡이 애반딧불이 늦반딧불이

(중략)

「동강 유역 산림생태계 조사보고서」(1998.12. 산림청 임업연구원)를 읽으면서
내가 아무르장지뱀이나
용수염풀,
아니면 바보여뀌나 큰도둑놈의갈고리나 괴불나무로
혹은 더위지기로 태어났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랬더라면 내 이름이 어떻든
이름의 감옥에서 멀리 벗어나
삶을 사랑하는 일에 삶이 바쳐졌을 것이다.
무덤에나 핀 할미꽃이거나
내가 동굴에서 날개를 펴는
관박쥐라 해도…….
  - 최승호, 「이것은 죽음의 목록이 아니다」 부분


  지면 관계상 중략했지만, 이 시를 처음 보았을 때의 놀라움을 잊을 수가 없다. 시집의 여러 장에 걸쳐 수많은 동물과 식물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이 시에 등장하는 동식물의 이름은 무려 763개에 이른다고 한다. 이 황당한 시가 생겨난 이유는 시의 끝부분을 통해 짐작해볼 수 있다. 시인 자신이 「동강 유역 산림생태계 조사보고서」(1998.12. 산림청 임업연구원)를 읽으면서 받은 충격을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 보고서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았던 것이다. 동강 유역 개발 문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무렵 이 지역의 산림생태계를 조사한 이 보고서는 시인의 마음을 흔들었고, 그로 인해 쓴 이 시는 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동강 개발로 이곳에서 나고 살아온 수많은 동식물들이 터전을 빼앗기고 죽음으로 내몰 릴 상황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무분별한 개발을 반대하고 저지했다.
  보고서를 보며 시인은 거대한 생명공동체의 일부로서 자신을 인식한다. 어떤 우연에 의해 인간으로 태어났을 뿐 자신 또한 아무르장지뱀이나 용수염풀 같은 다른 생물로 태어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아닌 다른 생물이었다면 오롯이 “삶을 사랑하는 일”에 온 생을 바쳤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동강의 생명체들은 인간의 시선으로 만들어놓은 “이름의 감옥” 밖에서 저마다의 생을 위해 전력을 다해 살아왔다고 보기 때문이다. 동강 유역에는 인간이 붙인 이름보다도 많은 생물종과 그보다 훨씬 많은 개체 생명들이 공존해왔다. 보고서는 동강 개발로 사라질 수 있는 생물종을 제시함으로써 인간의 책임 의식을 촉구한다. 인간 중심의 개발이 동강의 생태계에 얼마나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 있는지를 그곳의 생명공동체를 이루는 주민인 많은 동식물의 이름으로 웅변한다.
  동강 생태계의 주민들을 지키려는 각고의 노력이 진가를 발휘해 동강댐 개발 계획은 백지화되었다. 이는 생태계 보전을 위한 노력이 개발 논리를 극복한 드문 사례에 해당한다. 동강의 생명공동체를 인간이 얻을 수 있는 당장의 이익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확고한 가치관이 작동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멀리 보면 이러한 선택이야말로 생명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야 할 인간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기도 하다.
‘다른’ 생명과 ‘함께’ 살아가기
여성이 참정권을 얻기까지, 흑인 노예가 해방되기까지, 어린이가 존중되기까지, 차별을 당연시하는 풍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다름을 약함으로 보는 편견은 뿌리 깊게 작용했다. 인간과 다른 생물 사이의 간극은 인간종 사이에서 벌어졌던 것보다 더 극복하기 어려운 차별을 일으켜왔다. 그러나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윤리의식이 한 차원 더 확산된다면 동물권을 인정하고 생물다양성을 보존하는 것 또한 새로운 당위가 될 것이다.
  동물을 비롯한 다른 생명체와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서는 인간세계의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많은 노력이 요구된다.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크기 때문에 공감하고 배려하기 위해 더욱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 문학 특유의 교감의 능력은 우리가 다른 생물에게 다가갈 때 취해야 할 태도에 좋은 참조가 된다. 동물이 등장하는 시들을 통해 우리는 동물에 대한 공감과 배려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무심코 행해지는 동물 학대와 차별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한국시에 표현된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통해 동물권과 생물다양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 먼저 다른 존재가 겪는 고통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동물실험이나 전염병 예방을 위해 희생되는 수많은 동물들의 고통을 직시한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그 일들을 반복하기는 힘들 것이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간의 본성이며 실천의 힘을 갖는 윤리이다. 동물들이 당하는 부당한 고통에 측은지심을 갖고 대응해야 할 것이다. 또한 다른 존재의 입장을 상상할 수 있는 풍부한 공감의 능력은 생물다양성을 이해하는 데 요긴하다. 한국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동물적 전회는 동물의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이렇게 새로운 관점을 통해 볼 때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벗어나 다른 존재의 삶에 민감해질 뿐 아니라 전체를 통찰할 수 있다. 무엇보다 다른 생명체를 이익이 아닌 공존의 대상으로 여기는 가치관의 변화가 필요하다. 인간의 이익이 동물의 편에서는 희생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동물에 대한 차별적 관점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그들도 인간과 동등한 생명을 지닌 존재로서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보고 그것을 보장한다면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동물권이나 생물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은 인간에게 손해가 될까? 당장은 그렇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지속 가능한 생태계에서 공존하는 삶을 원한다면 그것은 선택이 아닌 당위의 문제가 된다. 인간의 이익을 위해 여러 생명체 사이의 균형과 조화를 무시하는 현재의 삶이 계속된다면 인간의 안위 또한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생물다양성이 유지되는 지구는 눈앞의 이익보다 훨씬 더 큰 보이지 않는 혜택을 제공한다. 다양성이 인간사회의 건강한 존립을 위해 필수적인 요건이 되어가듯 생물다양성은 지구 생명체 전체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요건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생명체들을 지구라는 공동주택에서 함께 살아갈 소중한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생물다양성을 지키기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목차
한국시(詩)에서 만나는 생물다양성과 동물권
인간 감정의 다양성에 대한 용인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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