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다양성, 동물권, 그리고 문학
요즘 많이 사용하는 다양성 개념 중에 ‘생물다양성’이 있다. 생물다양성(biodiversity)은 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이 ‘생물학적 다양성(biological diversity)’을 축약하여 쓰기 시작하면서 널리 퍼지게 된 말이다. 생물다양성이라 하면 대개 생물종의 다양성을 떠올리게 되지만, 더 넓게는 생물체 내부의 유전적 다양성과 생물과 무생물이 상호작용하면서 이루는 생태계의 다양성까지 포괄한다.
생물다양성이 중요해지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다양한 생물들이 계속 줄어들게 되면서 그 위험성을 경고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생명 유지와 번성을 위해 자연을 이용하는 것은 인류가 오랫동안 이어온 활동이지만, 이용을 넘어 남용에 가까운 착취가 빈번해지면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70억 명이 넘는 사피엔스가 살고 있다. 이 모든 사람을 한데 모아 거대한 저울 위에 세운다면 그 무게는 약 3억 톤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축화한 모든 농장 동물 암소, 돼지, 양, 닭 을 더욱 거대한 저울 위에 세운다면 그 무게는 약 7억 톤에 달할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현재 살아 있는 대형 야생동물 호저에서 펭귄, 코끼리에서 고래에 이르는 의 무게를 모두 합쳐도 1억 톤에 못 미친다.”
1)
고 할 정도로 지구는 인간과 식용동물에 잠식된 상태이고 생물다양성은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생물학자들은 현재와 같은 환경파괴가 계속될 경우 2030년 경에는 현존하는 동식물의 2퍼센트가 절멸하고 이번 세기 말에는 절반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한다.
생물다양성이 파괴된 지구는 다른 생명체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심각한 재앙이 될 수밖에 없다. 생물다양성이 훼손되면 공기와 물의 정화 작용이 약화되고, 코로나19 같은 바이러스나 농업 해충의 발생을 억제하는 생물 방어막의 기능도 떨어진다. 질소와 인 등 무기원소가 정상적으로 순환하면서 자연스럽게 쓰레기를 분해하고 토양의 독성을 없애던 역할이 줄어들 뿐 아니라 기후를 안정화하고 태양의 해로운 자외선을 막아주던 역할도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또한 많은 의약품이나 다양한 산업의 재료로 쓰이던 풍부한 자원으로서의 미래 가치도 보장할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심신을 안정시키는 기반이자 다양한 문화 창조의 원천으로 작용하던 자연의 아름다움을 상실하게 된다. 이처럼 생물다양성의 상실은 그 원인 제공자인 인간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이 될 것이다.
따라서 생물다양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자각하고 그것이 훼손되었을 때의 심각한 결과를 예측하고 대비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인류를 위협하는 가장 큰 문제로 생물다양성을 지적하는 과학자 집단의 인식과 달리 보통 사람들에게 그것은 직접 와닿지 않는다. 차라리 해마다 체감할 수 있는 기후변화는 점차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에 비해, 그로 인해 벌어질 생물다양성의 격감이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는 그만큼 관심을 끌지 못한다. 생물다양성의 위기를 먼 곳 불구경하듯 바라보지 않고 생존의 문제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감성과 윤리에 호소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결코 생물다양성의 위기 상황에서 바깥에 놓인 예외자가 아니라 관계의 사슬 속에 있으며, 원인 제공자이자 해결의 주체로서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문학이나 철학 등의 다양한 인문학적 접근이 요청된다.
이 글에서는 한국시에 나타나는 생물다양성에 대한 인식을 특히 동물권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려 한다. 동물은 생물다양성의 일부일 뿐이지만 인간과 비교적 유사하고 긴밀하게 관련되기 때문에 생물다양성의 문제를 좀 더 직접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한다. 동물권은 생물다양성과 직결되는 문제이며 생명윤리의 핵심을 내포하고 있어서 생물다양성의 위기와 대책을 모색하는 데 있어 각별한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하다.
생물다양성과 관련하여 동물권이 주목되기 시작한 것은 최근 들어 빈번해지는 전염병의 확산과 무관하지 않다. 갈수록 대량화되고 비자연적으로 변하고 있는 공장식 축산으로 전염병에 취약해진 동물들이 쉽게 감염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량 살상이 거듭되면서 사람들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게 된 것이다. 전염병의 확산을 막는다는 이유로 행해지는 끔찍한 살상의 장면들은 본능적인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며 생명 경시 풍조에 대한 우려를 낳았다. 또한 최근 과학계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연구 결과 인간과 동물의 차별을 뒷받침하던 전통적인 주장들이 반박되고 동물권을 옹호할 만한 이론적 근거가 확립되고 있다. 이의 연장 선상에서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종의 이익을 옹호하면서 다른 종의 이익을 배척하는 ‘종차별주의(speciesism)’에 대한 비판이 강화되고 있는 변화도 눈여겨볼 만하다.
‘종차별주의’에 대한 비판이 일고 ‘동물권’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기까지 인류는 뿌리 깊은 차별의 역사를 이어왔다. 같은 인간종 안에서도 성별, 인종별, 계급별, 연령별로 행해진 갖가지 차별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1792년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가 여성의 권리 옹호를 주장했을 때 토머스 테일러(Thomas Taylor)는 “여성의 평등에 대한 주장이 건전하다면 그와 같은 논증이 개나 고양이, 또는 말에게 적용되어서는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추론은 이러한 ‘짐승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짐승들에게 권리가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따라서 짐승들에게 권리가 있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추론은 건전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2)
남성에 대한 여성의 평등을 인정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동물의 평등을 인정하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현대사회에서는 펼쳐지고 있다. 동물에게도 생명, 자유, 행복추구권이 보장되고 인간과 동물을 평등한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동물권’의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1975년 『동물해방』이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동물권 개념에 불을 지폈던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사람들에 대한 문제가 동물들에 대한 문제보다 언제나 우선되어야 한다는 믿음은 아프리카계 노예들의 이익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데 반대한 백인 노예소유주들의 편견보다 더 나은 근거를 갖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3)
동물들에게 행해지는 차별이나 학대는 흑인 노예에게 가해졌던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생명에 대한 존중과 평등권에 대한 인정이 없다면 그 누구도 자신보다 힘센 존재의 위압에서 벗어날 수 없다. 동물권에 대한 논의는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던 갖가지 차별을 줄이고자 노력해온 윤리적 선택과 연결되어 있다. 이는 약자에 대한 강자의 지배보다 차이를 인정하고 공존하려는 노력이 인류 전체의 발전에 유리하다는 다양성 가치의 발견과도 관련된다.
문학은 사회적 제도와 규율의 바깥에서 좀 더 폭넓고 자유로운 시선으로 생물다양성이나 동물권의 문제를 조명해왔다. 생물다양성이나 동물권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기 훨씬 전부터 문학은 이미 그런 문제의식을 내포하고 있었다. 문학에서 자연이나 동물은 친근한 삶의 바탕이자 역동적인 묘사의 대상으로서 등장해왔다. 문학적 상상력은 인간의 시선을 넘어 자연이나 동물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문학은 어떤 선언적 윤리보다 더 절실하게 왜 우리가 다양성의 가치를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지, 왜 타자의 고통에 무감할 수 없는지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