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시대에 공동체를 생각한다
김신곤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내분비내과 교수
“우리는 미생물로 충만한 하나의 호수 속에서 헤엄치고 있다.”

- Gro Harlem Brundtland, 전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


   코로나19는 인류에게 심대한 피해를 주었다. 2022년 11월 13일 현재 전 세계에서 6억3천9백만 명이 감염되었고, 662만 명이 사망하였다. 건강과 생명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엄청난 파급효과를 낳았다. 글로벌 경제의 마이너스 성장, 백신 불평등으로 표출된 자국 이기주의, 마스크 착용 등 방역의 일상화, 코로나 블루의 확산, 랜선 라이프의 등장 등 인류 역사는 코로나 이전(BC, Before Corona)과 이후(AC, After Corona)로 나뉜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비싼 대가를 치르며 코로나19로부터 인류가 배우고 있는 교훈이 있다. ‘모든 생명은 잇대어 있다’는 점이다. ‘잇대어 있다’는 표현은 ‘서로 이어져 있고, 기대고 있다’는 의미이다.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동물이, 그리고 환경까지도 잇대어 있다. 해서 서로를 연결하던 생명의 끈을 놓는 순간, 타자뿐만 아니라 우리의 존재도 위협받기 마련이다. ‘남’이 건강하지 않으면 ‘나’도 위험해진다는 말이다. 일상이 된 마스크 쓰기나 백신 접종도 나의 건강을 지키기 위함이자 타인에 대한 배려이다. 시야를 넓혀 지구적 차원에서 바라보자. 백신으로 집단 면역이 가능하다는 나라에도 그렇지 못한 나라에서 발생한 또 다른 변이 바이러스에 의한 2차, 3차, 4차 감염의 위험이 상존한다. 이미 세상은 하루면 전 세계 어디든 갈 수 있고, 인간과 동식물·환경이 수시로 교차하는 ‘one world, one health’의 초연결(hyper-conneted) 사회로 변모했기 때문이다(그림 1). 따라서 지구적 차원에서 팬데믹이 마무리될 때까지 한 나라의 성공은 진짜 성공이 아니다. 21세기에도 19세기 방식의 방역인 ‘단절과 봉쇄’로 회귀한 문명의 역진(逆進)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다음에 다가올 팬데믹에 인류는 더 큰 충격에 휩싸일 가능성이 높다.
   이 글을 통해 얘기하고자 하는 키워드는 ‘생명’ 그리고 ‘공동체’이다. 이 둘을 묶으면 생명 공동체 혹은 건강 공동체가 된다. 건강 공동체는 생명이 움트고 서로 소통하고 공존하며, 그래서 더불어 성장하고 발전하는 공동체이다. 생명의 소통은 공동체를 살리는 자양분이다. 인류가 코로나19에 직면한 것은 동식물, 자연의 생명과 더불어 소통하며 공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구 공동체가 코로나19에 맞서며 난관에 봉착한 것도 생명의 본질에 주목하며 연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초연결 사회에 초장벽(super-wall)이 강화되는 역설
코로나19 팬데믹은 금세기 동안 경험한 바 없는 중대한 사변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인류의 대응은 지난 세기와 다를 바 없었다. 공간과 시간, 인간과 자원이 순식간에 만나는, 초연결된 세상에서 각 나라의 대응은 단절과 각자도생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림 1. 초연결, 초가속 사회와 One Health
출처: Our World in Data


   초연결 사회에 초장벽이 강화되는 역설이었다. 장벽 높이기를 통해 코로나19 대응에 성공적인 것으로 보였던 대만도 결국은 팬데믹을 막을 수 없었고, 2020년 2월부터 육·해·공 국경을 모두 봉쇄하며 단 한 명의 환자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자랑하던 북한마저도 결국은 코로나의 광풍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문명의 역진을 강요하는 코로나19에게 우리는 공존과 협력을 통해 당당히 전진하는 인류의 미래를 보여 줘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 위기를 통해 인류의 부끄러운 민낯을 적나라하게 목격했다. 전염성 위기를 초래한 지역에 대한 고립과 단절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그곳 출신 사람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 낙인찍기가 횡행했다. 심리적 초장벽의 등장이었다. 코로나19 초기 독일의 유명 시사 주간지 <슈피겔(Der Spiegel)> 표지에는 ‘코로나바이러스, 메이드 인 차이나’라는 문구와 함께 붉은 방호복과 방독면, 헤드폰을 착용한 사람이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는 사진이 실렸다. 이탈리아의 한 학교는 중국·한국·일본 등 동아시아 학생들에게 공문을 보내 수업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여 논란을 일으켰고, 미국에서도 아시아인들에 대한 증오 범죄가 증가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우한 바이러스’라는 명칭을 경멸적인 맥락에서 사용하는 경우들이 있었는데, 서양에서는 우한이나 중국을 넘어 아시아인 전반에 대한 낙인찍기와 혐오, 인종주의 공격이 늘어났던 것이다. 세계적 의학 저널인 <네이처(Nature)>지는 사설을 통해 2015년에 이미 WHO가 발표했던 내용을 인용해 낙인찍기와 악영향을 줄이기 위해 바이러스성 질병과 전염병이 창궐한 지역, 지점이나 구역을 연관 짓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또 바이러스는 모든 인류를 감염시킬 수 있으며 전염병이 발생하면 그들이 누구이건, 어디에서 왔건 모든 사람이 다 위험하다고 강조했다1).
   가슴 아픈 것은 이런 팬데믹이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고 관심받지 못하는 계층에 더욱 상처를 줬다는 점이다. 요양원과 요양병원의 좁은 침상에 몸을 누인 어르신들, 병실 모퉁이에서 24시간 그들의 수발을 들었던 간병인들, 격무에 시달리던 콜센터와 택배 노동자들, 그리고 정통 교회를 등진 채 영혼의 위로를 구했던 신도들… 이들은 코로나19 집단감염의 희생양이었지만 대중들로부터 비난 세례를 받기 일쑤였다. 이태원 클럽에서 코로나19 집단감염이 있었을 때는 ‘게이클럽’을 강조한 기사들이 포털의 순위 상단을 장식했으며 성소수자에 대한 원색적 비난과 혐오가 이어졌다. 과학적 사실을 말하자면 바이러스는 어느 지역, 누구에서든 시작될 수 있다. 어제의 우한이 오늘의 뉴욕, 내일의 서울이 될 수 있다. 바이러스는 인종과, 국적, 지역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이나 이웃이 환자가 되면 안타까워하며 쾌유를 비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감염병의 역사 속에서 대유행은 일부 집단에 대한 낙인찍기를 통해 희생양을 찾아왔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혐오라니… 불과 100nM의 크기에 불과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수만 년 이상을 이어 온 인류애를 파괴하고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인지상정과 연대감을 마비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코로나19와의 대결에서 진짜 패배를 증명하는 쓰라린 증거이지 않겠는가?
다양성의 파괴가 초래한 팬데믹
최재천 교수는 오늘 우리가 직면한 팬데믹은 생물 다양성 파괴에서 초래되었다고 강조해 왔다. 고대 혁신포럼 ‘코로나19 이후 넥스트 노멀과 대학의 역할’과 현대차 정몽구 재단의 ‘미래지식포럼’ 강연 등에서 같은 맥락으로 얘기해 왔다2). 그는 “농경 사회를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인간과 가축의 총 무게는 지구 전체의 1% 미만에 불과했지만 이후 급격히 증가하면서 지금은 전체의 96~99%를 차지하며 지구를 점령했다”며 “이로 인해 야생동물에게 있던 바이러스가 인류와 가축에게 옮겨 왔다”고 지적했다. 지구 전체에서 인류가 차지하는 면적도 1990년 14%에서 2020년 77%로 증가했고, 세계 인구의 증가 속도도 매우 가팔라서 1억 명에서 20억 명이 되는데 2천 년이 걸린 데 비해, 20억 명에서 70억 명이 되는 데는 불과 5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그림 1). 야생동물에게만 기생하던 바이러스의 입장에서는 지구를 점령한 인간이라는 숙주가 공격하기 쉬운 목표물이 된 것이다. 게다가 인간의 난개발과 환경파괴, 지구온난화 등으로 인간에게 노출되지 않았던 바이러스들이 인류에게 옮아 오기 좋은 조건이 만들어졌다. 그는 “20세기까지만 해도 전염병 발생 주기는 20~30년 정도였다”며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는 조류독감·사스·돼지독감 등의 전염병이 2~3년에 한 번씩 발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경험한 코로나19보다 더 센 팬데믹이 이번 세기에 또 올까? 미래학자들과 감염학자들은 앞으로 더 빨리, 더 강하고, 더 오래 지속될 전염병이 다시 올 것이라고 예측한다(그림 2). 사람뿐만 아니라 동식물과 자연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자본을 넘어 생명의 관점으로 인류의 삶이 재편되지 않는 한 전망은 비관적이다.

그림 2. 21세기는 감염병의 시대


  
“자연은 순수를 혐오한다(왜냐하면 그것은 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 William Donald Hamilton


   맑은 물, 깨끗한 공기 등 자연은 순수해야 좋은 것처럼 인식되곤 하지만, 실상 자연에서 말하는 ‘순수’는 다양성이 결여된 상태이고 질병에 취약하다고 얘기한다. 조류독감으로 셀 수 없이 많은 닭과 오리가 살처분되지만, 정작 이를 옮기는 철새에게는 큰 피해가 없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 개량되어 비슷한 유전적 구조를 갖게 된 종들의 동일성이 취약성을 키운 결과이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대부분을 지배했던 합스부르크 왕조는 순수 혈통을 지키기 위해 근친결혼을 이어 갔는데, 결국 이것이 유전적 취약성으로 인한 질병을 일으키고 왕조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팬데믹은 섞이면 위험하다. 그래서 격리하고 단절한다. 그러나 사회적 거리두기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가까워져야 했다. 마스크라는 물리적 차폐 행위도 실은 나를 지키고 남도 지키기 위한 자리행 이타행(自利行 利他行)의 상징적 행위이다. 그래서 코로나 시대에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 중 하나가 연대(solidarity)이다. ‘연대(solidarité)’라는 말과 사상이 역사에 의미 있게 등장한 것은 프랑스혁명기이며, 이 시기에 ‘연대’는 자유(liberté)·평등(égalité)과 함께 혁명의 이념으로 제시된 ‘형제애(fraternité)’의 유사 개념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연대는 사람들 속에 존재하는 공감으로 시작된다. 특히 의료인에게 공감은 타인의 고통과 아픔을 상상하는 것이며, 이런 공감 능력이 있는 의료인이 좋은 의료인이다. 팬데믹 상황에서 서로 다른 처지와 상황에 대한 공감, 팬데믹 극복이라는 공동 이익에 기반한 책임감, 이것을 가능케 할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 그리고 다름이 틀림이 아님을 알고 이해하고 배려하는 다양성의 가치가 구현되어 왔다면 인류의 팬데믹 극복, 혹은 코로나와의 공생은 훨씬 빨라졌을 것이다.
백신 불평등이 악화시킨 팬데믹
백신은 코로나19의 게임 체인저로 등장하였다. 통상 백신 개발에는 10년 정도가 걸리는 데 비해 코로나19 백신은 불과 1년여 만에 상용화되었다.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초고속 개발이다. 이 백신의 등장으로 코로나19의 공포로부터 인류가 여유를 찾게 되었고, 백신 접종률이 높은 국가에서부터 ‘위드 코로나’ 전략이 시작되었다
   백신과 관련된 국가 간 격차는 인류의 또 다른 부끄러운 민낯이다. 11월 현재 세계 인구의 68%가 1회 이상 백신 접종을 받았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국가들의 백신 접종률은 아직도 23%에 머물러 있다3). 백신 접종률이 80%를 넘는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4차 부스터 접종을 한 반면에, 아프리카나 동남아의 저소득 국가들은 1차 백신의 확보조차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서 팬데믹 극복을 어렵게 했다. 바이러스도 생명체이기 때문에, 백신을 손에 쥔 인류의 대응에 맞서 반격을 하기 마련이다. 변이 바이러스의 등장이 그런 예이다. 영국, 인도,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에서 발생한 알파·베타·감마·델타·오미크론과 같은 변이 바이러스들은 영국을 제외하고는 모두 경제적으로 어려운 지역에서 시작했다. 백신 접종률이 높지 않은 나라의, 영양이나 환경이 좋지 않은 밀집 거주지에서 유행이 폭증하면서 변이가 발생했다. 따라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백신의 효과를 무력화하는 방식으로 진화해 나가기 전에 지구적 차원에서 백신의 생산과 분배가 계획되고 신속하게 집행되었다면 변이의 상당 부분을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백신 및 치료제 접근, 검사와 연구 역량 등 모든 측면에서 언제나 잘사는 국가들에 자원이 크게 치우쳐 있다. 백신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지식재산권을 유예하거나, 신속한 기술 이전을 진행하자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현실화하지 못했다. 코로나19와 관련된 세계적인 불평등이야말로 우리가 팬데믹을 3년 넘게 종식하지 못하고 있는 중요한 이유이다.
공식적 백신 접종률이 제로인 나라
북한은 공식적인 백신 접종률이 0%인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국가이다. 지난 4월까지만 해도 세계보건기구를 통해 공식적으로 발표된 북한의 코로나19 환자는 0명이었다. 검사 자체가 제한적일 상황이라 그대로 믿기 어렵지만, 국경의 전면 봉쇄와 강력한 이동 제한 등 고전적인 방역으로 팬데믹 예방에 성공한 국가라고 선전되었다. 그러다가 지난 5월 12일에 코로나19 확진자 발생을 처음으로 인정하였고, 6월 기준 458만 명(북한 인구의 18%)이 발열자인 것으로 보도되었다. 코로나19 제로 국가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유병 규모가 증가한 나라로 급변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8월 10일에는 코로나 방역 대전에서의 승리를 선포하였다.
   북한은 코로나19에 매우 취약할 것으로 예상되어 왔다. 코로나19로 인해 북-중 국경이 폐쇄되며 북한의 대외무역의 90%를 차지하는 대북 수입이 2020년 통계에서 80%나 급감하였다. 식량 부족도 심각하여 미국 CIA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 주민의 2~3개월치 식량에 해당하는 86만 톤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게다가 봉쇄 조치로 인해 대부분의 인도적 구호단체들도 북한에서 철수하였고, 식량이나 의약품의 지원도 매우 제한되는 3중고의 상황이었다. 영양부족 인구가 전 주민의 40%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었고(Global Hunger Index 2021), 결핵 유병 인구는 13만 5천 명으로 추정되며, 방역 장비, 의약품 및 치료 장비가 미흡하며 무엇보다도 백신 접종률이 공식적으로 0%인 나라였다. 게다가 다른 개발 도상 국가와 달리 코로나19에 매우 취약한 고령 인구의 비율이 240만 명(전 인구의 10%)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얼마나 많은 북한 사람들이 사망했을까? 우리나라 백신 미접종자의 사망률 0.6%와 이상에서 언급한 북한의 취약성을 고려할 때 수만 명에서 10만 명의 이상이 사망할 것이며, 강력한 봉쇄의 부작용에 따른 식료품 공급 부족으로 더 많은 非코로나 사망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비관적 시나리오가 제시되었다. 그러나 북한 당국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사망자 수는 불과 74명으로 사망률은 0.002%에 불과하다. 감염학자들은 세상에 이런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들 생명의 무게는 다른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생명의 무게가 다르지 않다는 당연한 전제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목도되는 현실은 그렇지 않다. 북녘땅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영유아 때 사망할 가능성이나 출산 중 산모가 사망할 가능성은 우리에 비해 각각 5배가 높다. 북한에는 코로나19로 국경이 봉쇄되면서 결핵약이나 백신 등 필수 의약품마저 제대로 공급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의 코로나19 창궐 역시 북한 주민, 특히 취약 계층의 건강과 영양 상태에 심각한 위협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긴급 구호뿐만 아니라 북한 보건 의료의 회복 탄력성과 중장기적 내구성을 지원할 수 있는 대북 활동들은 매우 미흡한 상황이다. 한반도의 현실에서 생명의 무게는 다르다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을 그냥 바라만 보고 있을 것인가? 가슴이 먹먹해진다.
공동체, 한반도 건강 공동체
북한을 우리의 공동체라고 볼 수 있을까? 공동체의 사전적 정의가 ‘특정한 사회적 공간에서 공통의 가치와 유사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을 가리키는 사회학 용어’임을 고려할 때 지리적 공통성과 유사한 민족적 정체성은 공유하지만, 가치의 측면에서는 공동체라 할 수 없을 만큼 남과 북은 멀어져 왔다. 특히 북핵 개발과 최근 연이은 미사일 발사로 인한 남북 위기 국면을 고려할 때 ‘한반도 공동체’라는 용어는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통일이라는 용어보다는 더 현실적이고 수용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통일은 우리의 소원이며 미래 한반도의 궁극적 비전이다. 그러나 통일은 한편에서는 적화 통일로, 또 한편에서는 흡수 통일로 적잖은 오해를 불러왔다. 또한 준비되지 않은 급격한 통일은 남북 모두에 상당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최근에는 한반도 건강 공동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한반도 공동체 준비』의 대표 저자인 전우택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통일이라는 단어가 분단의 궁극적 극복 방법으로서 매우 중요한 단어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둘을 억지로라도 하나로 만든다는 무언가 공격적이고 강압적인 느낌을 주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한반도 공동체’라는 용어는 다르다. 굳이 두 개를 하나로 만들지 않아도, 서로를 인정하고 협력하여 각자가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공동 노력한다는 의미가 더 크기 때문이다. 그런 일들이 꾸준히 이루어져, 정말 서로가 기쁜 마음으로 최종적 ‘통일’에 합의하면 그것도 좋고, 설사 그런 일이 바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괜찮은 그런 여유 있고 평화적인 관계를 상정하도록 한다.”


그런데 왜 건강 공동체인가? 전 교수의 설명을 계속 들어 보자.


“민족의 분단은 이 땅 대부분의 지역에서 엄청난 양의 총알들이 날아다니게 하였고, 엄청난 양의 폭탄이 떨어지게 했다. 그리고 그에 의하여 그야말로 강처럼 피가 산하에 흐르면서, 민족의 가슴속에 엄청난 상처와 트라우마를 남겼다. 한반도 공동체의 형성,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통일은 바로 그런 상처, 그런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일이다. 개인적이고, 집단적이고, 그리고 공간적인 이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 바로 보건 의료의 가장 직접적이고 일차적인 역할이다.”


   통일 이전에 공동체가 선행되어야 하며, 진정한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서도 공동체 단계가 꼭 필요하다는 말이다. 건강 공동체는 경제·사회·문화, 더 나아가 최종적인 통일의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정치·군사 공동체에 우선해서 형성되어야 하고, 그럴 때 다른 공동체의 형성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다. 경제 공동체를 예로 들어 보자. 경제 공동체를 위해선 북한 사람들의 노동력이 필수적이다. 건강 공동체는 건강한 사람을 준비하는 것이며, 이들이 제공하는 노동력이 한반도 경제 공동체의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따라서 경협을 할 때도 북한 지역의 보건 의료와 복지 수준을 높이고 건강한 사람을 준비한다는 관점이 겸비되어야 한다. 즉 건강 공동체가 먼저 혹은 동시에 형성되어야 경제 공동체도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남북한의 경제협력은 ‘돈’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상호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돈을 매개로 하여 이어지는 소통과 협력은 위험할 수 있다. 반면에 보건 의료 협력은 ‘사람’을 향한 움직임이다. 분단 이후 서로에게 너무도 큰 상처를 주고 긴 세월을 지내 온 남북의 사람들에게 보건 의료는 각별할 수 있다. 치유는 크고 넓고 따뜻한 마음이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건 의료는 서로를 이해하고 어루만지는 치유의 도구이자 따뜻한 화해의 단초이며, 이후 전개될 경제 협력, 정치 협력 등에 마중물이 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적어도 지리적 측면에서는 한반도 건강 공동체라는 말에 수긍하리라 본다. 한반도의 면적은 22만 km²에 불과하다. 이 작은 땅덩어리에서 전염성 세균이나 바이러스는, 또한 미세먼지나 오염원, 지진 등 재해들은 남북을 가리지 않는다. 한반도는 환경과 기후, 감염병 등이 쉽게 공유될 수 있는 지정학적 구조라는 얘기다. 영화에서 다루어졌던 것처럼 만약 백두산이 폭발한다면 그 재난의 무게는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질 것이다. 반대로 남북의 협력으로 말라리아를 퇴치해 낸 경험도 있다. 개성공단이 열려 있을 때, 남북한이 공동 방역을 하면서 북한의 말라리아 퇴치를 위해 노력한 결과, 우리 쪽에서도 말라리아가 없어진 것이다. 인도적 지원을 넘어 건강 이슈에 대한 공동 대처가 남북한의 상호 이익에 기여한 경험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도발을 반복하는 북한 당국이 미워도 건강 안보(health security)의 측면에서라도 남북한 주민의 건강과 생명이 잇닿아 있음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극적 유산을 희망의 자산으로
한반도에는 아직도 전쟁과 분단이라는 유산이 깊게 배어 있다. 남북한 군인, 참전국 군인, 민간인을 망라하여 500여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한국전쟁은 비극 그 자체였다. 그 이후 분단된 한반도는 70년 이상의 고통 속에서 살아온 회복하기 어려운 중환자처럼 보인다. 전쟁의 상흔, 공동체의 파괴. 이념 대립, 성공주의, 속도전, 엄청난 군사비 등 분단이 초래한 부정적 결과들은 현재 진행형이며,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에 격화된 남남 갈등, 진영 갈등도 분단의 상처가 잉태한 쌍생아일 수 있다.
   전쟁은 공동체를 파괴했다. 같은 동네에서 형, 동생 하며 지내던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이념으로 서로를 죽고 죽였다. 우리 가문에도 그런 비극적 유산이 아로새겨져 있다. 종교적 이유로 21명이 순교하는 아픔을 겪었다. 내가 통일 보건의료에 관심을 갖게 된 개인적인 사연이다. 북한 이탈 주민(탈북민)들도 분단된 한반도의 유산이다. 3만4천 명에 달하는 탈북민들은 ‘동일 민족에서의 이주민 혹은 난민’의 성격을 갖는다. 이들이 우리 사회에 잘 적응하고 더불어 잘 살아가는지 여부는 이후 한반도 공동체의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온 통일이다. 2008년부터 여러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탈북민 무료 검진을 하며 이들의 검진 결과를 바탕으로 ‘동일 민족에서의 이주민 코호트(NORNS)’를 구축했다4). 이를 기반으로 이제는 우리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탈북민 전수인 3만 4천 명을 대상으로 우리나라 사람 70만 명과 1:20의 비율로 매칭하여 질병 양상, 질병 부담, 기대 여명 등을 비교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시야를 확대하면 한반도는 전 세계적 차원에서 매우 독특한 코호트이다. 유전적으로는 동일하나 70년 이상의 분단을 통해 상당히 다른 환경에 노출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전적 동일성을 전제한 환경의 변화가 세대를 넘어 질병에 미치는 영향을 추적할 수 있는 전 세계적으로 유일한 코호트가 한반도다. 갈라파고스라는 고립된 섬이 현대 과학에 엄청난 영감을 주었던 것처럼, 고립되어 있던 북한 주민들과 개방되어 있던 남한 주민들의 건강 비교 연구를 남북한의 학자들이 함께 진행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나라에서 시행하는 국민건강영양조사를 남북이 동시에 진행하는 미래를 상상해 보자. 이를 통해 한반도 건강 지도를 그려 내고, 환경이 질병의 양상에 미친 영향, 후생유전학 등 관련된 병인, 치료에 있어서의 공통점과 차이점 등, 다양한 연구 주제에 대해서 남북한 학자들이 공동 연구를 진행하게 된다면 전 세계에 울림을 줄 수 있는 기념비적 결과들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정신건강의학, 사회의학 분야도 중요한 연구 영역이다. 내전으로 수백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70년 이상을 상호 간 증오로 대립해 왔던 집단이, 그 갈등 구조를 극복하고 화해와 협력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사회 치유, 정신 건강의 역동과 관련된 수많은 학문적 해법들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전 세계적 차원의 사회치유학, 화해학, 평화학의 교과서는 우리가 써야 한다.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이 갈등하고 충돌하던 격전지였던 한반도가 화해와 상생의 진원지로 변모한다면 인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K-story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분단이라는 과거의 비극적 유산이 미래의 희망적 자산이 되는 유쾌한 상상들을 해 보았다. 그러나 현실은 엄혹하다. 코로나19가 단절시킨 우리의 일상보다도 남북한의 단절이 더 심각해 보인다. 겨울의 추위만큼이나 차가워진 남북 관계에 언젠가 다시 온기가 돌아 따뜻해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크다. 그런 미래를 누군가는 준비해야 한다. 동토에도 봄은 오고, 마른 땅에서도 생명의 씨앗이 움트는 것처럼, 지금의 상황이 역전될 미래를 기대하며 준비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죽음의 팬데믹에서 살림의 팬데믹으로
전 세계 사람들에 대한 수많은 정보와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하는 시대이지만,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외로움과 소외감은 더 커져 간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중요한 특질 중 하나가 공감이지만, 현대문명은 이를 왜곡할 수 있다. 소셜 미디어의 공감 방식은 알고리즘을 통해 비슷한 생각을 갖는 사람들과의 공감은 강화하고, 그렇지 않은 이들과는 이질감, 더 나아가 적대감까지 유발하는 식으로 오용되곤 한다. 이미지와 텍스트를 통한 소통은 전례 없이 많은 양적 교류를 가져오지만 실상은 질적으로 매우 얕은 경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코로나19 사망자 수 - 6,653,850명(2022.12.8. 현재)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수백만의 죽음은 통계일 뿐이라는 말이 있다. 어느덧 무덤덤해진 죽음의 숫자는 내 삶에 미동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게 내 가족이나 친척, 동료라면 어떨까? 그때는 공감이라는 심리 기전이 작용하기 마련이다. 결국 공감 능력은 시선과 시야의 확대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입장을 바꾸어 상상하는 능력, 이해하고 배려하는 기술을 통해 확장된다. 자밀 자키(Jamil Zaki)는 『공감은 지능이다』라는 책에서 공감은 인류의 생존을 위한 최선이자 최후의 희망이라고 말한다. 그런 공감하는 능력으로 주위를 돌아보자. 이웃이 살아야 나도 살 수 있다. 인간이 겸손해야 자연도 살고 지구도 숨 쉴 수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서로 공감하며 관계해 나가는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athicus)’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류는 서로 협력하도록 진화해 왔고, 분업을 통해 서로 필요한 것을 나눠 왔다. 그런 공감의 관점에서 팬데믹을 바라보자.
   세계적 유행병을 뜻하는 ‘팬데믹(pandemic)’은 pan(모든)+demos(군중)를 의미한다. 전 세계 사람들에게 전염되는 병이라는 말이다. 이를 비틀어 얘기하자면, 팬데믹을 극복하는 방법도 ‘인류 모두(pan+demos)’에게 달려 있다. 인류가 힘을 모으면 죽음의 팬데믹을 살림의 팬데믹으로 역전시킬 수 있다. 나에서 이웃으로, 한반도로, 그리고 지구로 지평을 확대하며 살림을 위한 배려와 연대의 팬데믹이 유행했다면 오늘 우리는 자못 다른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살고 있을 것이다. 바이러스는 면역력이 취약한 곳을 공격한다. 코로나 이후에도 반복될 또 다른 신종 감염병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인류는 공동체 정신으로 사회적 면역력(social immunity)을 강화하고 회복력(resilience)을 키워야 한다.
에필로그 - 경계를 허물며 살아가기
“온생명(global life)이 기존의 생명 개념과 구분되는 가장 중요한 차이는 지구상에 나타난 전체 생명 현상을 하나하나의 개별적 생명체로 구분하지 않고 그 자체를 하나의 전일적 실체로 인정한다는 사실이다.”

-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 『삶과 온생명』


   사람의 몸은 수십조 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세포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생명체이다. 그런데 장 교수는 세포 하나만 따로 떼어냈을 때 그것을 생명의 단위로 볼 수 있는가를 묻는다. 다른 세포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세포라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세포들의 유기적 결합체인 생물체가 생명의 단위인가? 사람이나 동물에서 보듯이 그런 생명체도 혼자서 살 수는 없다. 그러면 한 단계 더 높여서 생물 종(種)을 생명의 단위로 볼 수 있을까? 그러나 생물 종도 고립되어 존재할 수 없다. 지구 위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 종의 생존에는 태양과 자연이 주는 에너지와 자양분이 필요하다. 이렇게 올라가다 보면 모든 생명은 서로 연결되어 존재함을 발견하게 된다. 장 교수는 이것을 ‘온생명’이라고 하였다.
   고립과 단절은 생명에 반한다. 생명의 본질인 소통과 공존, 연대의 가치를 이번 팬데믹을 통해 배워야 한다. 특히 우리 사회의 취약 계층, 존중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공개가 주저되는 삶의 자리가 바이러스가 노리는 곳이다. 이들과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따듯한 온기가 공유되어야 한다. 팬데믹 위기에서도 과학과 의학을 뒤로 한 채 자신이 속한 진영과 이념에 갇힌 채 다툼은 이어졌다. 서로 입장이 다르더라도 이해할 만한 부분은 없는지, 배울 만한 것은 없는지 소통해야 한다. 그리고 인류가 지구의 최고 종(種)으로 등장한 이후 군림만 해 온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이제 인간 이기주의를 넘어 동식물과 환경도 돌아보며 그들이 아프면 나도 아플 수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는 아직도 전쟁이라는 반(反)생명의 유산이 어슬렁거리고 있는 곳이다. 이제 우리는 또 다른 전쟁을 힘들게 치르고 있다. 남북 모두를 압도한 바이러스와의 전쟁이다. 이중적 전쟁의 기운이 지배하는 한반도에서 생명을 논하는 게 역설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남북이 직면한 상황이 어두울수록 생명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생명이 반생명을 넘어설 수 있다. 집요한 바이러스는 인류의 가장 취약한 곳을 공격하고, 그곳이 또 다른 아웃브레이크의 진원지가 되어 결국은 건강해 보이는 생명도 무너지게 한다. 팬데믹 시대, 공동체를 생각해 본 이유이다. 내 이익, 우리 집단의 이익을 넘어 대학 공동체, 지역 공동체, 한반도 공동체, 지구 공동체를 함께 살아가는 생명에게로 시야와 지평을 넓혀 보자. 그리고 이들 공동체의 구성원들, 삶을 잇대고 있는 존재들과 어울리고 소통하며 상생할 수 있도록 나만의 경계를 조금씩이라도 허물어 보자.
목차
팬데믹 시대에 공동체를 생각한다
아흘람 이야기
듣기
화면 설정
arrow_drop_down
  • 돋움
  • 바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