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근교에 세워진 러시아 군 대성당(Main Cathedral of the Russian Armed Forces). 입구는 무기를 연상시키는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고 빛에 따라 달라지는 황록색 건물은 황금의 쿠폴로 장식되어 있다. 환상적이라 할 만큼 화려한 성당 내부 는 러시아 전쟁의 역사와 조국을 지키기 위해 죽어간 군사들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출처: : Leninskaya Shatura1)
러시아는 이상하다. 글자도 이상하고 러시아에 대한 건축적 도상이라 해도 좋을, 붉은 광장 가운데 서 있는 알록달록한 성당도 이상하고, 가끔은 그래서 매혹적이겠지만, 문학도 미술도 영화도 이상하다. 러시아 정교는 뭔가 비교
(秘敎)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몇 년 전에는 모스크바 근교에 러시아군
(軍)에 바쳐진 성당이 지어졌다. ‘국방색’에 금도금을 하고 입구에는 기관총이 성자의 상 대신 서 있는, 정말 야릇한
(부)조화의 건물이다. 블라디미르 푸틴이라는 지도자도 전대미문이고, 그를 중심으로 여전히 굳건한 러시아인들의 국가주의 또한 낯설다. 언젠가 윈스턴 처칠은 러시아를 “불가사의한 것 안에 들어 있는 미스터리로 싸인 수수께끼
(a riddle wrapped in a mystery inside an enigma)”라 정의했다. 러시아 시인 튜체프가 “러시아를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선언한 데 이어 러시아를 본격적인 철학적 주제로 테이블 위에 올린 서구주의자 차다예프
(Pyotr Chaadaev)는 러시아를 동양도 서양도 아닐 뿐 아니라 마치 시간도 영토도 기억도 없는 듯한 세계 외부에 존재하는 이상한 나라로 묘사한다. 보리스 그로이스
(Boris Groys)의 표현을 빌자면 러시아의 운명에 대한 러시아 지식인들의 오랜 논쟁에서 러시아는 늘 의식이라기보다는 규정하기 어려운 무의식에 가까운,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종의 ‘서구의 무의식’과 유사한 어떤 것으로 실재했다. 그가 말하는 “서구의 무의식으로서의 러시아”는 러시아 지식인들의 자기 분열에 대한 정신분석적 진단이었지만, 사실 이는 러시아를 대하는 유럽의 감각에서도 일찌감치 반복된 것이었다. 즉 러시아는 서유럽에서 보기에 이상했다.“피부를 벗기면 그 안에서 타타르
(Tatar)인이 나오는”
(나폴레옹) 러시아인들이 “그냥 가만히 있으면 유쾌하고 좋은데 동양의 제일 서쪽에 있으면서 제일 동쪽에 있는 유럽이 되려고 하니 그때부터 이상해 질 수밖에 없다”
(러디어드 키플링, Rudyard Kipling)는 것이다. 동양이면서 자꾸 서양이 되려고 하는 이상한 나라라는 유럽인의 러시아에 대한 경멸적 시각을 극복하는 것은 서쪽 끝, 심지어 국경 밖의 늪지에 도시를 건설해 그곳을 제국의 수도가 되도록 했던 표트르 대제
(Peter the Great)의 결단의 순간으로부터 19세기 러시아 제국의 역사 내내, 그리고 심지어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러시아인들의 과제였다.
피카소에게 야만의 생명력을 가진 이국적 아프리카 공예와 조각들이 영감을 주었고 그것이 입체파의 시작이 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피카소는 아프리카 조각뿐 아니라 러시아의 ‘이국적’ 무대예술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1910년대 프랑스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러시아 발레, ‘발레 뤼스
(Ballet Russe)’를 관람했을 뿐 아니라 그들과 어울렸다. 디아길레프
(Sergei Diaghilev)가 이끌던 러시아 발레단은 이제 겨우 유럽을 따라잡아 전성기를 맞이한 페테르부르크 황실 발레에 이국적 색채를 가미해 프랑스 무대로 향했고 이는 성공적이었다. 저물어 가는 문명의 위기에 대한 의식이 첨예했던 유럽의 관객들은 러시아 발레의 실험적 형식과 원시주의적 활력에 매료되었다. 스트라빈스키의 <불새>나 <페트루쉬카> 등의 작품은 대성공이었고, 관객들은 이어 일찌감치 예정되어 있었던 작곡가의 차기작 <봄의 제전> 공연에 큰 기대를 갖고 있었다.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에서 선정적인 춤을 선보여 논란이 된 니진스키
(Vatslav Nizhinskii)의 새로운 안무나 박스트, 베누아 등 페테르부르크 부르주아 문화의 집약과도 같은 예술세계파 화가들의 경이롭고 장식적인 무대 역시 이 작품에 대한 기대를 한층 더 높였다.
그러나 1913년 5월 29일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초연된 <봄의 제전>은 음악사 최악의 스캔들 중 하나로 남게 된다. 당시 유럽 관객들에게 <봄의 제전>은 발레 뤼스의 전작
(前作)들, 러시아 민담을 소재로 한 <불새>나 장터 인형극을 발레로 만든 <페트루쉬카>와 너무 달랐다. 그들이 기대했던 ‘러시아적’ 이국성은 이미 허용되는 그로테스크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불길하게 울리는 익숙하지 않은 관악기의 리듬은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작품을 여는 조용하면서도 날카로운 바순의 독주가 불러일으키는 묘한 불쾌감과 뒤이어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무용수들의 경련으로 마비된 듯한 몸의 반복적인 움직임은 공포스러웠다. 공연은 몇 분 지나지 않아 관객들의 아우성 가운데 중단되고 만다.
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에서 공연된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의 한 장면. 이 작품의 러시아어와 프랑스어 제목을 직역하면 "성스러운 봄"으로, 이 작품은 봄을 맞이하기 위해 젊은 소녀를 제물로 바치는 통과의례를 표현하고 있다.
출처: : 마린스키 극장2)
<봄의 제전>에서 마치 땅에 묶인 듯 발을 구르며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려는 무용수들의 몸짓은 단조롭지만 동시에 변칙적인 불안정한 음악의 리듬 안에서 계속되면서 마지막의 갑작스러운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그것은 익숙한 발레 예술의 미학적 관례를 완전히 뛰어넘는, 낯설고 폭력적인 에너지였다. 유럽의 지성들은 이 작품에 이르러 더는 러시아 고유의 생명력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제 유럽인들은 러시아적인 것에서 시원적 공포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것은 개인에 가해지는 폭력의 형상, 야수파 회화의 포효하는 듯한 비명, 입체파 미술의 왜곡되고 해체된 주체의 탄식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때 <봄의 제전>을 둘러싼 소동은 유럽인들에게 있어 ‘러시아적인 것’이 얼마나 쉽게 기괴하고 낯선 공포로 전환될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스트라빈스키의 전작들이 보여준 러시아풍에 열광하던 서유럽 관객들은 정작 러시아성의 정수를 재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스트라빈스키 스스로 확신했던 <봄의 제전>으로부터 거부감과 공포를 느낀 것이다. 사실 <봄의 제전>의 내용 자체는 러시아적인 것이라 하기 어렵다. 오히려 유럽 문화 보편의 신화적 제의에 더 가깝다. 문제는 유럽 관객들이 이러한 플롯의 친숙함과 별개로 어렴풋이 존재하는 낯설고 이상한 대상을 보았다는 사실이었다. 익숙한 것, 혹은 적어도 그들 스스로 익숙하다고 여겼던 신화의 줄거리와 러시아적 양식화의 관례화된 표현들은 <봄의 제전>의 강박적으로 전치된 리듬과 움직임 없는 춤 속에서, 화가 레리흐
(Nicholas Roerich)가 창조한 이교적이며 관조적인 무대 미술 안에서 어느 순간 낯선 것이 되어 그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유럽 관객들이 느낀 이러한 야릇한 감정은 프로이트가 자신의 논문 「언캐니
(The uncanny)」를 통해 호프만
(E. T. A. Hoffmann)의 작품을 분석하며 제기한 바 있는 미적 경험으로서의 기괴함과 유사한 것이다. 이는 그들이 지금까지 발레 뤼스의 작품들에서 흐릿하게 감지했던 자신의 알 수 없는 심연, 혹은 망각되거나 불분명한 기억을 본격적으로 대면하는 것, 프로이트의 말을 빌자면 욕망을 억압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억압된 금기와 무의식을 계속해서 환기하는 자기모순적 대상을 전면적으로 응시하는 것과 같았다. 1900년대 초 유럽에서 러시아풍은 귀족들의 문화적 장식품이 되고 있었지만 그들의 러시아는 그저 오리엔탈리즘의 구조 속에서 사유될 뿐이었다. 유럽 문명이 맞이한 위기의식에 직면해 이들이 발견한 이국적이고 ‘어린’ 러시아 문화의 매혹은 실상 서구 문화가 인위적으로 부정해 온 자신의 문화적 원시성의 흔적이자, 부르주아 사회의 윤리 강령 아래 깊이 숨겨 둔 관능과 기괴함, “발작과 폭력, 군집한 검은 눈알들의 팽창하는 움직임”
(카미유 모클레르 Camille Mauclair) 같은 억압된 ‘무의식’의 형상일 뿐이었다.
포스트니체 시대의 트라우마와 가부장적 문화의 파괴 과정에서 복권되었던 설명하기 어려운 분열적이고 부조리한 인간 심연의 모습은 너무 쉽게 러시아적인 것과 결합되었다. 프로이트가 1918년 『유아기 신경증에 관하여』에서 소개하는 ‘늑대인간’이라는 별명의 환자 판케예프는 사실 발레 뤼스의 다수의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제국 출신 유대계 귀족이었다. 그의 꿈을 묘사하는 프로이트의 어조에서 유럽인들이 <봄의 제전>에서 느낀 공포와 유사한 무언가를 감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1920년대 이후 독일 표현주의 영화가 수용한 러시아적 기괴함이나 프랑스 문화에서 형성된 정체성 분열을 겪는 ‘러시아적’ 주인공의 형상이 가능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폴 레니
(Paul Leni)나 로버트 비네
(Robert Wiene) 등의 영화감독들은 러시아를 늘 어두움과 악몽의 공간으로 그렸다. 이반 뇌제
(Ivan the Terrible)는 욕망과 잔혹성의 화신으로 묘사되었고 도스토옙스키 주인공들의 서사에는 의도적으로 라스푸틴이나 타라스 불리바, 스페이드의 여왕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단편소설 제목이자 등장인물)의 기괴함이 더해졌다. 점차 기행과 독재, 광기와 그로테스크의 아우라가 러시아라는 기호를 잠식해 갔다. 심지어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을 소재로 만든 영화에서도 주인공은 늘 신경증적이고 불안감에 사로잡힌, 정신적 폐허와 혼돈을 드러내는 그야말로 ‘표현주의적’ 전형들이었고 당시 비평가들은 주인공이 보여 주는 분열과 카오스, 광기와 신경증, 파괴와 퇴폐야말로 뿌리 깊은 ‘러시아성’의 결과물이라 여겼다.
프로이트가 평생 매달렸던 도스토옙스키와 그 주인공들에 대한 정신분석은 단순히 병리학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민족 정체성이라는 문화적 맥락과 관련된다. 그가 평생의 연구 대상이었던 작가 도스토옙스키와 환자 판케예프를 하나의 ‘러시아적 인간형’으로 결합하려 했다는 사실은 이를 증명한다. 프로이트가 판케예프의 꿈을 기록하면서 말하는 짐승에 대한 공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등의 요소들은 1928년 그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관한 논문 모음집 서문 「도스토옙스키와 부친 살해」를 통해 행하는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정신분석에서 다시 반복된다. 즉 프로이트에게 있어 판케예프, 도스토옙스키와 그의 주인공들을 한데 묶는 것은 신경증이라기보다 러시아라는 ‘이상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프로이트가 러시아에 대해 가졌던 감정이 다분히 양가적이었던 것과 달리 미국 학자 제임스 라이스
(James Rice)가 1993년 발표한 책 『프로이트의 러시아』에서 러시아는 다음과 같이 극단적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금지된 영토, 아버지의 땅, 고대적인 독재와 현대적 제노사이드(genocide)가 공존하는 곳, 자신의 가장 소중하면서 또한 문제적인 환자의 고향이자 도스토옙스키와 같은 위대한 예술가의 고향, 부친 살해와 황제 살해의 공간, 꿈을 현실로 육화하려는 혁명의 폭력적 에너지로 넘치는 세계를 향한 지향이었다.
프로이트가 러시아를 불가해한 폭력과 죽음의 영토로, 그러나 인간 정신의 심연과도 같은 미지의 땅이자 파괴적인 자유의 에너지로 충만한 공간으로 이해했다면, 20세기 후반의 역사를 경험한 라이스의 책에서 러시아는 독재와 허무주의, 테러와 혁명의 폭력성 등의 본성으로 인해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 큰 영향을 준 전근대적 국가로, 문명의 감옥이자 ‘극복되고 치유되어야 하는’ 원시성의 공간으로 바뀐다. 심지어 그는 프로이트가 죽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대인들이 겪어야 했던 민족적 수난의 역사까지 암시하면서, 자연스레 러시아성에 파시즘과 전체주의의 형상을 덧씌운다. 전체주의 체제로의 이행과 독재정치라는 소련의 역사적 경험에 직면해 서구와 구별되는 ‘동양’의 제국이자 서구의 문화적 타자인 러시아의 낯선 정체성이 테러와 폭력성의 맹아로 평가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이처럼 러시아에 대한 공포는 자주 합리적인 이해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것은 러시아의 주장이 틀렸다거나 러시아의 행위가 잘못됐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슬프게도 그것은 때로 러시아라는 존재 자체의 기괴함을 내재화한 무조건적 공포에 가깝다. 표트르 대제를 통해 러시아가 갑자기 유럽에 등장했던 18세기 초, 또 러시아가 나폴레옹에 맞섰던 19세기 프랑스나 2차 세계대전 중 독소전쟁의 당사자였던 독일에서 등장했던 러시아에 대한 혐오로부터 한발 더 나아가, 20세기 후반 냉전의 경험 가운데 맥락화되고 이데올로기의 종말 이후 오히려 더 강화되어 작동하게 된 루소포비아는 러시아에 대한 이상한 매혹과 공포를, 그러한 기이한 타자성을 동양적 야만과 미개함으로 전치해 온 유럽인들의 관성을 반복하고 있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서구가 지금까지 극복해 왔고 타자화했던 자신의 과거를, 혹은 억압된 무의식을 다시 마주하는 데에서 느끼는 불편하고 기괴하고 섬뜩한
(uncanny) 감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