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올바름입니까, 혐오입니까?: 루소포비아를 다시 생각한다
이지연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연구소 HK 교수
이성으로는 러시아를 이해할 수 없다.
일반적인 척도로는 측량할 수 없다.
거기엔 특별한 것이 있다.
러시아를 그저 믿어 볼 밖에.


- 표도르 튜체프(Fyodor Tyutchev), 「이성으로는 러시아를 이해할 수 없다」


존재한다는 것은 곧 대화하는 것이다.
하나의 목소리는 아무것도 끝내지 못하며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두 개의 목소리는 삶의 최소 조건, 존재의 최소 조건이다.


-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 『도스토옙스키 시학의 제 문제』 中


   먼저 이 글을 쓰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음을 고백한다. 글의 대주제로 주어진 ‘다양성’이란 어떻게 해도 러시아와는 어울리지 않는, 일종의 모순 형용의 술어로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 30년도 더 되었지만 ‘쏘련’은 우리 사회에서 아직은 가치중립적인 단어가 되지 못한 ‘공산주의’의 원조로서 건재하며 독재자 스탈린의 국민에 대한 대테러의 역사나 개인을 부정하는 전체주의의 흔적 또한 결코 떠나지 않을 망령처럼 여전히 러시아라는 나라 위에 드리워져 있다. 게다가 요즘 러시아는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믿을 수”도 없게 되었다. 올해 초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최근 들리는 러시아의 잔인한 폭격 소식에는 정말이지 러시아 문화를 읽는 ‘다른’ 시각을 역설하고 루소포비아(Russophobia)의 연원을 추적하는 이 글을 접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했다. 단언컨대 그 어떤 나라도, 어떤 이유에서건 무자비하게 타국의 영토를 파괴할 권리는 없으며 이에 대해서는 그 어떤 변론도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몇 번이고 다른 주제들을 떠올렸다. 가령 등장인물들이 각자 내는 서로 다른 목소리가 최종 심급으로서의 작가의 말을 넘어서 마치 경쟁하듯 동시적으로 울리는 도스토옙스키 소설의 그 유명한 다성성(多聲性)에 대해 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한때 바흐친과 대화주의의 열풍 가운데 우리에게 소개된 도스토옙스키 문학의 다성성이 실상 그 흔한 ‘대화’라는 말의 의미 정반대편에서 더 깊은 울림을 주고 있음을 밝히고 싶었다. 아니면 1960년대 소련의 네오아방가르드를 대표하는 알프레드 슈니트케(Alfred Schnittke)의 전위적인 음악, 서양 음악사의 모든 기법들을 망라하는 그의 고유한 폴리스타일리즘(polystylism)을 소개함으로써 천편일률적인 소련 문화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포스트모던 음악 실험의 존재를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소련의 억압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러시아 문학과 음악은 가장 사랑받는 인류의 문화유산이 아니던가. 그게 아니라면 민족의 모자이크라는 말이 제격인 러시아 연방을 구성하는 160여 민족 또한 좋은 주제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 동과 서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영토 안에 공존하는 다양한 민족들은 러시아의 힘이자 잠재된 위기이며 그 자체로 사실 가장 러시아다운 러시아의 모습인 동시에, 유럽이 되고 싶었던 러시아가 끝내 “가장 서쪽에 있는 아시아”라는 유럽의 낙인을 벗어 던지지 못한 채 뿌리 깊은 지리적 정신 분열의 역사를 살아가야 했던 이유가 되었으니 말이다. 아예 서구 문화의 타락을 개탄하고 러시아 민족의 영적 순수성을 강조하는 오늘날 러시아 정치의 전형적 수사(修辭)를 조명하면서 왜 유독 러시아에서는 성소수자의 문제에 대해 국가가 행위자로 나서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지, 소련이 해체된 이후 러시아에서 문화 정체성이 어떻게 새롭게 ‘만들어져’ 왔는지를 해부할 수도 있었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그런데 나는 어느새 주저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도스토옙스키의 다성성을 ‘대화’라는 뿌리 깊은 정언명령의 선입견 없이 읽자는 것도, 러시아를 구성하는 다민족의 유기적인 공존에 대한 소개도, 억압적이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는 다양했고 인간적이었던 소련의 문화에 대한 설명도, 마지막으로 서구와는 다른 길을 가기로 선택한 현대 러시아 문화 정체성의 역사적 당위에 대한 폭로도 결국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의 강박을 잠시 벗어 두어야만 가능한 러시아에 대한 변론일 터이다. 그러면서도 러시아에 쉽게 독재 정권이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 러시아의 동양적 특성 때문이라는 몇몇 서구 역사학자들의 이론을 그대로 따르고, 모든 가치 있는 러시아 문화유산에 대해 “소련의 억압에 저항한”이라는 수식어를 자연스럽게 선택하는, 심지어 러시아혁명의 문학과 예술마저 그것이 혹 위대하다면 자동적으로 “소련에서 억압받은” 혹은 “반소비에트적인” 것으로 명명되는 학생들의 ‘성실하고도 진정성 있는’ 페이퍼에 놀라며, 이러한 판단을 독려하듯 러시아 정부에 대한 저항이 노벨상의 필요조건이 되는 현실을 보면서 러시아에 대한 공포와 혐오가 어쩌면 이데올로기의 탈을 쓴 문명사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이르고 만다. 그렇게 되면 나는 내 안에서 반목하는 정치적 올바름의 검열과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들이 공유하는 루소포비아에 대한 반감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다시 밝히지만 이 글은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을 설명하는 것도, 그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를 변론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다만 러시아에 대한 공포의 문명사적 뿌리를 보임으로써 그것이 어떻게 손쉽게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었는지 헤아려 보려는 것이다. 이는 사실 어쩌면 “러시아 얘기를 하면서 정치적 올바름이 왜 나와?”라고 질문할지 모르는 많은 이들에게 바치는 중언부언의 변명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오늘 이 글을 쓰기 위해 나는 약간의 용기를 냈다. 이 글 중간중간 정치적 올바름의 잣대에 맞지 않는 부분에 불편해할 분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대신 이런 질문을 해 본다. “혹시, 우리의 정치적 올바름의 담론과 실천이 때로는 타자와의 실재적인 만남을 체계적으로 회피하려는 시도는 아니었던가요?”
유럽의 무의식, ‘언캐니(uncanny)’ 러시아

모스크바 근교에 세워진 러시아 군 대성당(Main Cathedral of the Russian Armed Forces). 입구는 무기를 연상시키는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고 빛에 따라 달라지는 황록색 건물은 황금의 쿠폴로 장식되어 있다. 환상적이라 할 만큼 화려한 성당 내부 는 러시아 전쟁의 역사와 조국을 지키기 위해 죽어간 군사들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출처: : Leninskaya Shatura1)


   러시아는 이상하다. 글자도 이상하고 러시아에 대한 건축적 도상이라 해도 좋을, 붉은 광장 가운데 서 있는 알록달록한 성당도 이상하고, 가끔은 그래서 매혹적이겠지만, 문학도 미술도 영화도 이상하다. 러시아 정교는 뭔가 비교(秘敎)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몇 년 전에는 모스크바 근교에 러시아군(軍)에 바쳐진 성당이 지어졌다. ‘국방색’에 금도금을 하고 입구에는 기관총이 성자의 상 대신 서 있는, 정말 야릇한 (부)조화의 건물이다. 블라디미르 푸틴이라는 지도자도 전대미문이고, 그를 중심으로 여전히 굳건한 러시아인들의 국가주의 또한 낯설다. 언젠가 윈스턴 처칠은 러시아를 “불가사의한 것 안에 들어 있는 미스터리로 싸인 수수께끼(a riddle wrapped in a mystery inside an enigma)”라 정의했다. 러시아 시인 튜체프가 “러시아를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선언한 데 이어 러시아를 본격적인 철학적 주제로 테이블 위에 올린 서구주의자 차다예프(Pyotr Chaadaev)는 러시아를 동양도 서양도 아닐 뿐 아니라 마치 시간도 영토도 기억도 없는 듯한 세계 외부에 존재하는 이상한 나라로 묘사한다.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ys)의 표현을 빌자면 러시아의 운명에 대한 러시아 지식인들의 오랜 논쟁에서 러시아는 늘 의식이라기보다는 규정하기 어려운 무의식에 가까운,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종의 ‘서구의 무의식’과 유사한 어떤 것으로 실재했다. 그가 말하는 “서구의 무의식으로서의 러시아”는 러시아 지식인들의 자기 분열에 대한 정신분석적 진단이었지만, 사실 이는 러시아를 대하는 유럽의 감각에서도 일찌감치 반복된 것이었다. 즉 러시아는 서유럽에서 보기에 이상했다.“피부를 벗기면 그 안에서 타타르(Tatar)인이 나오는”(나폴레옹) 러시아인들이 “그냥 가만히 있으면 유쾌하고 좋은데 동양의 제일 서쪽에 있으면서 제일 동쪽에 있는 유럽이 되려고 하니 그때부터 이상해 질 수밖에 없다”(러디어드 키플링, Rudyard Kipling)는 것이다. 동양이면서 자꾸 서양이 되려고 하는 이상한 나라라는 유럽인의 러시아에 대한 경멸적 시각을 극복하는 것은 서쪽 끝, 심지어 국경 밖의 늪지에 도시를 건설해 그곳을 제국의 수도가 되도록 했던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의 결단의 순간으로부터 19세기 러시아 제국의 역사 내내, 그리고 심지어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러시아인들의 과제였다.
   피카소에게 야만의 생명력을 가진 이국적 아프리카 공예와 조각들이 영감을 주었고 그것이 입체파의 시작이 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피카소는 아프리카 조각뿐 아니라 러시아의 ‘이국적’ 무대예술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1910년대 프랑스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러시아 발레, ‘발레 뤼스(Ballet Russe)’를 관람했을 뿐 아니라 그들과 어울렸다. 디아길레프(Sergei Diaghilev)가 이끌던 러시아 발레단은 이제 겨우 유럽을 따라잡아 전성기를 맞이한 페테르부르크 황실 발레에 이국적 색채를 가미해 프랑스 무대로 향했고 이는 성공적이었다. 저물어 가는 문명의 위기에 대한 의식이 첨예했던 유럽의 관객들은 러시아 발레의 실험적 형식과 원시주의적 활력에 매료되었다. 스트라빈스키의 <불새>나 <페트루쉬카> 등의 작품은 대성공이었고, 관객들은 이어 일찌감치 예정되어 있었던 작곡가의 차기작 <봄의 제전> 공연에 큰 기대를 갖고 있었다.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에서 선정적인 춤을 선보여 논란이 된 니진스키(Vatslav Nizhinskii)의 새로운 안무나 박스트, 베누아 등 페테르부르크 부르주아 문화의 집약과도 같은 예술세계파 화가들의 경이롭고 장식적인 무대 역시 이 작품에 대한 기대를 한층 더 높였다.
   그러나 1913년 5월 29일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초연된 <봄의 제전>은 음악사 최악의 스캔들 중 하나로 남게 된다. 당시 유럽 관객들에게 <봄의 제전>은 발레 뤼스의 전작(前作)들, 러시아 민담을 소재로 한 <불새>나 장터 인형극을 발레로 만든 <페트루쉬카>와 너무 달랐다. 그들이 기대했던 ‘러시아적’ 이국성은 이미 허용되는 그로테스크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불길하게 울리는 익숙하지 않은 관악기의 리듬은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작품을 여는 조용하면서도 날카로운 바순의 독주가 불러일으키는 묘한 불쾌감과 뒤이어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무용수들의 경련으로 마비된 듯한 몸의 반복적인 움직임은 공포스러웠다. 공연은 몇 분 지나지 않아 관객들의 아우성 가운데 중단되고 만다.

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에서 공연된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의 한 장면. 이 작품의 러시아어와 프랑스어 제목을 직역하면 "성스러운 봄"으로, 이 작품은 봄을 맞이하기 위해 젊은 소녀를 제물로 바치는 통과의례를 표현하고 있다.
출처: : 마린스키 극장2)


   <봄의 제전>에서 마치 땅에 묶인 듯 발을 구르며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려는 무용수들의 몸짓은 단조롭지만 동시에 변칙적인 불안정한 음악의 리듬 안에서 계속되면서 마지막의 갑작스러운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그것은 익숙한 발레 예술의 미학적 관례를 완전히 뛰어넘는, 낯설고 폭력적인 에너지였다. 유럽의 지성들은 이 작품에 이르러 더는 러시아 고유의 생명력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제 유럽인들은 러시아적인 것에서 시원적 공포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것은 개인에 가해지는 폭력의 형상, 야수파 회화의 포효하는 듯한 비명, 입체파 미술의 왜곡되고 해체된 주체의 탄식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때 <봄의 제전>을 둘러싼 소동은 유럽인들에게 있어 ‘러시아적인 것’이 얼마나 쉽게 기괴하고 낯선 공포로 전환될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스트라빈스키의 전작들이 보여준 러시아풍에 열광하던 서유럽 관객들은 정작 러시아성의 정수를 재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스트라빈스키 스스로 확신했던 <봄의 제전>으로부터 거부감과 공포를 느낀 것이다. 사실 <봄의 제전>의 내용 자체는 러시아적인 것이라 하기 어렵다. 오히려 유럽 문화 보편의 신화적 제의에 더 가깝다. 문제는 유럽 관객들이 이러한 플롯의 친숙함과 별개로 어렴풋이 존재하는 낯설고 이상한 대상을 보았다는 사실이었다. 익숙한 것, 혹은 적어도 그들 스스로 익숙하다고 여겼던 신화의 줄거리와 러시아적 양식화의 관례화된 표현들은 <봄의 제전>의 강박적으로 전치된 리듬과 움직임 없는 춤 속에서, 화가 레리흐(Nicholas Roerich)가 창조한 이교적이며 관조적인 무대 미술 안에서 어느 순간 낯선 것이 되어 그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유럽 관객들이 느낀 이러한 야릇한 감정은 프로이트가 자신의 논문 「언캐니(The uncanny)」를 통해 호프만(E. T. A. Hoffmann)의 작품을 분석하며 제기한 바 있는 미적 경험으로서의 기괴함과 유사한 것이다. 이는 그들이 지금까지 발레 뤼스의 작품들에서 흐릿하게 감지했던 자신의 알 수 없는 심연, 혹은 망각되거나 불분명한 기억을 본격적으로 대면하는 것, 프로이트의 말을 빌자면 욕망을 억압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억압된 금기와 무의식을 계속해서 환기하는 자기모순적 대상을 전면적으로 응시하는 것과 같았다. 1900년대 초 유럽에서 러시아풍은 귀족들의 문화적 장식품이 되고 있었지만 그들의 러시아는 그저 오리엔탈리즘의 구조 속에서 사유될 뿐이었다. 유럽 문명이 맞이한 위기의식에 직면해 이들이 발견한 이국적이고 ‘어린’ 러시아 문화의 매혹은 실상 서구 문화가 인위적으로 부정해 온 자신의 문화적 원시성의 흔적이자, 부르주아 사회의 윤리 강령 아래 깊이 숨겨 둔 관능과 기괴함, “발작과 폭력, 군집한 검은 눈알들의 팽창하는 움직임”(카미유 모클레르 Camille Mauclair) 같은 억압된 ‘무의식’의 형상일 뿐이었다.
   포스트니체 시대의 트라우마와 가부장적 문화의 파괴 과정에서 복권되었던 설명하기 어려운 분열적이고 부조리한 인간 심연의 모습은 너무 쉽게 러시아적인 것과 결합되었다. 프로이트가 1918년 『유아기 신경증에 관하여』에서 소개하는 ‘늑대인간’이라는 별명의 환자 판케예프는 사실 발레 뤼스의 다수의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제국 출신 유대계 귀족이었다. 그의 꿈을 묘사하는 프로이트의 어조에서 유럽인들이 <봄의 제전>에서 느낀 공포와 유사한 무언가를 감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1920년대 이후 독일 표현주의 영화가 수용한 러시아적 기괴함이나 프랑스 문화에서 형성된 정체성 분열을 겪는 ‘러시아적’ 주인공의 형상이 가능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폴 레니(Paul Leni)나 로버트 비네(Robert Wiene) 등의 영화감독들은 러시아를 늘 어두움과 악몽의 공간으로 그렸다. 이반 뇌제(Ivan the Terrible)는 욕망과 잔혹성의 화신으로 묘사되었고 도스토옙스키 주인공들의 서사에는 의도적으로 라스푸틴이나 타라스 불리바, 스페이드의 여왕(알렉산드르 푸시킨의 단편소설 제목이자 등장인물)의 기괴함이 더해졌다. 점차 기행과 독재, 광기와 그로테스크의 아우라가 러시아라는 기호를 잠식해 갔다. 심지어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을 소재로 만든 영화에서도 주인공은 늘 신경증적이고 불안감에 사로잡힌, 정신적 폐허와 혼돈을 드러내는 그야말로 ‘표현주의적’ 전형들이었고 당시 비평가들은 주인공이 보여 주는 분열과 카오스, 광기와 신경증, 파괴와 퇴폐야말로 뿌리 깊은 ‘러시아성’의 결과물이라 여겼다.
   프로이트가 평생 매달렸던 도스토옙스키와 그 주인공들에 대한 정신분석은 단순히 병리학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민족 정체성이라는 문화적 맥락과 관련된다. 그가 평생의 연구 대상이었던 작가 도스토옙스키와 환자 판케예프를 하나의 ‘러시아적 인간형’으로 결합하려 했다는 사실은 이를 증명한다. 프로이트가 판케예프의 꿈을 기록하면서 말하는 짐승에 대한 공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등의 요소들은 1928년 그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관한 논문 모음집 서문 「도스토옙스키와 부친 살해」를 통해 행하는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정신분석에서 다시 반복된다. 즉 프로이트에게 있어 판케예프, 도스토옙스키와 그의 주인공들을 한데 묶는 것은 신경증이라기보다 러시아라는 ‘이상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프로이트가 러시아에 대해 가졌던 감정이 다분히 양가적이었던 것과 달리 미국 학자 제임스 라이스(James Rice)가 1993년 발표한 책 『프로이트의 러시아』에서 러시아는 다음과 같이 극단적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금지된 영토, 아버지의 땅, 고대적인 독재와 현대적 제노사이드(genocide)가 공존하는 곳, 자신의 가장 소중하면서 또한 문제적인 환자의 고향이자 도스토옙스키와 같은 위대한 예술가의 고향, 부친 살해와 황제 살해의 공간, 꿈을 현실로 육화하려는 혁명의 폭력적 에너지로 넘치는 세계를 향한 지향이었다.


   프로이트가 러시아를 불가해한 폭력과 죽음의 영토로, 그러나 인간 정신의 심연과도 같은 미지의 땅이자 파괴적인 자유의 에너지로 충만한 공간으로 이해했다면, 20세기 후반의 역사를 경험한 라이스의 책에서 러시아는 독재와 허무주의, 테러와 혁명의 폭력성 등의 본성으로 인해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 큰 영향을 준 전근대적 국가로, 문명의 감옥이자 ‘극복되고 치유되어야 하는’ 원시성의 공간으로 바뀐다. 심지어 그는 프로이트가 죽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대인들이 겪어야 했던 민족적 수난의 역사까지 암시하면서, 자연스레 러시아성에 파시즘과 전체주의의 형상을 덧씌운다. 전체주의 체제로의 이행과 독재정치라는 소련의 역사적 경험에 직면해 서구와 구별되는 ‘동양’의 제국이자 서구의 문화적 타자인 러시아의 낯선 정체성이 테러와 폭력성의 맹아로 평가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이처럼 러시아에 대한 공포는 자주 합리적인 이해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것은 러시아의 주장이 틀렸다거나 러시아의 행위가 잘못됐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슬프게도 그것은 때로 러시아라는 존재 자체의 기괴함을 내재화한 무조건적 공포에 가깝다. 표트르 대제를 통해 러시아가 갑자기 유럽에 등장했던 18세기 초, 또 러시아가 나폴레옹에 맞섰던 19세기 프랑스나 2차 세계대전 중 독소전쟁의 당사자였던 독일에서 등장했던 러시아에 대한 혐오로부터 한발 더 나아가, 20세기 후반 냉전의 경험 가운데 맥락화되고 이데올로기의 종말 이후 오히려 더 강화되어 작동하게 된 루소포비아는 러시아에 대한 이상한 매혹과 공포를, 그러한 기이한 타자성을 동양적 야만과 미개함으로 전치해 온 유럽인들의 관성을 반복하고 있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서구가 지금까지 극복해 왔고 타자화했던 자신의 과거를, 혹은 억압된 무의식을 다시 마주하는 데에서 느끼는 불편하고 기괴하고 섬뜩한(uncanny) 감정이었다.
두 전체성: 파시즘과 유라시아주의
다시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으로 돌아가 보자. 바그너가 음악을 통해 신화화된 독일 민족의 이념을 창조했다고 격렬히 비판했던 아도르노(Adorno)는 『신음악의 철학』에서 동일한 어조로 스트라빈스키를 비판한다. 1913년 초연된 <봄의 제전>이 파시즘과 전체주의의 도래를 감지하게 한다는 것이다. 아도르노의 책이 출판된 것이 1948년임을 생각해 본다면 그의 이러한 음악론 역시 서유럽의 근대적 역사 발전 모델을 역행하는 소련에 대한 환멸, 나아가 그가 목도한 홀로코스트의 비극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그는 유토피아의 이상을 구현할 수 있는 유일한 예술, 순수성의 공간인 음악마저 어느새 나치즘과 스탈린주의라는 재난의 징후들로 물들어 마법적 비합리성과 폭력의 표현으로 변질되는 과정을 스트라빈스키 발레의 집단적 움직임에서 발견한다.
   그런데 이때 흥미로운 것은 아도르노의 스트라빈스키 비판이 어쩌면 스트라빈스키 음악의 정수를 누구보다 정확히 꿰뚫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그가 주목하고 있는 파괴적 에너지와 주체의 상실, 개인의 소멸과 전체성을 향한 지향, 종교적 낭만주의에 가까운 총체적 종합예술의 추구는 스트라빈스키 음악을 환호한 러시아 비평가들이 무엇보다 높이 평가했던 것이었다. 즉 아도르노와 러시아 비평가들이 스트라빈스키에게서 본 것은 서로 다르지 않았다. 단지 각자의 역사적 경험의 맥락에서 달리 해석되고 있을 뿐이다. 서유럽 평자들이 섬뜩하게 본 주체성을 잃은 개인의 좀비와 같은 몸짓은 러시아 평자들에게 기존의 발레 음악이 표현한 적 없었던 움직임과 힘을, 그 폭발의 긍정적 에너지를 재현하는 군중의 포효를 의미했다. 아도르노는 이 작품의 “총체성의 환상 가운데서 은폐된 민족주의적 낭만주의”를 가리켜 파시즘의 맹아라 지적했지만 사실 그것은 20세기 초 러시아 지식인들을 사로잡았던 유기적 몸의 관념에 대한 표상으로도 읽힌다.
   <봄의 제전>은 고전 발레의 선형적 움직임이 아닌 무용수들의 발작적인 수직적 도약으로 채워져 있다. 그것은 변칙적으로 치환되고 변형되지만 변화와 진행으로 이어지지 않는 작품의 반복적 리듬을 표현하는 움직임으로서 차라리 균질적 동작을 파괴하는 경련이나 뒤틀림에 가깝다. 그러한 의미에서 시간의 진행을 계속해서 끊어 내는 <봄의 제전>의 춤은 사실 아도르노가 비판한 바그너적 종합예술의 의도된 피날레를 향해 가는 신화적 서사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끊임없이 되돌리는 움직임(iteration), 이전의 것을 지양하고 이후의 것을 예고하며 대단원을 향해 가는 변증법적 서사를 부정하면서 존재와 동시에 그 안에 배태된 부재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움직임 그 자체’이다.
   <봄의 제전>의 대단원, 제물을 높이 들어 공양하는 장면은 분명 세계의 변화를 맞이하는 순간이지만 그것은 작품의 종결이자 시간의 끝으로서의 파국이기도 하다. 그러니 <봄의 제전>은 그러한 폭발을 가능하게 한 시간들의 집적과 그 힘의 폭발에 대한 서사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스트라빈스키는 아도르노가 비판했던 거짓 화해나 거짓 기다림로부터 거리를 둔다. 사실 개인의 희생을 통해 얻어지는 전체성의 환상은 스트라빈스키의 관심사가 아니다. <봄의 제전>은 개별자의 움직임이 집적되어 만들어지는 유기적 전체와 그것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세계의 리듬을 담는다. 그것은 아도르노가 비판한 바그너적 라이트모티브(Leitmotiv)가 아니라 동일한 리듬과 그것의 변형, 멜로디의 중첩이며, 동일성을 강요하는 전체주의의 서사가 아닌 보이지 않지만 서서히 다가오는 변화의 리얼리티에 대한 표상이다. 이는 분명 고통의 스펙터클이지만 그것이 전체를 위해 개체를 부정하는 파시즘의 고통은 아니다. 이는 유럽 문화의 끝에 선 계몽주의와 합리성이라는 궁극에서 도달하게 되는 동일성의 절대화로서의 파시즘보다는 고유한 개별자들이 이루어 내는 하나의 전체라는 생물학적이고 때로는 종교적인 경험으로서의 ‘유라시아주의’를 닯았다. 즉 그것은 변증법적 종합이 아니라 최종을 염두에 두지 않는 변화 그 자체이다.
   오늘날 유라시아주의는 푸틴의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근거가 되는 사상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구소련의 영토 회복을 꿈꾸는 러시아 제국주의의 다른 이름 같은 것이다.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 가운데 푸틴의 측근이자 유라시아주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한 사상가 알렉산드르 두긴(Aleksandr Dugin)의 딸이 모스크바에서 자동차 폭발로 사망했다. 폭발은 두긴에 대한 테러였으며 그의 딸이 우연히 아버지의 차를 탔다가 대신 희생된 것으로 밝혀졌다. 두긴이 푸틴의 측근이라는 세간의 평가에 동의하기 어렵고 심지어 그의 이데올로기가 현대 러시아 국가주의와 푸틴주의 정치 이데올로기의 근간이 되었는지도 매우 의심스럽지만, 분명한 것은 세계를 크게 두 개의 연합으로 가르고 미국을 위시한 서유럽연합과 러시아·아시아·아프리카 연합이 벌이는 아마겟돈을 부추기는 듯 보이는 두긴의 전투적이고 황당무계한 사상과 ‘모스크바-제 3 로마’라는 러시아 고유의 종교적 선민의식을 왜곡된 방식으로 차용한 그의 기행(奇行)이 유라시아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 이해되며 또 소비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엄밀히 말해 유라시아주의는 단일한 사상이 아니다. 소련 해체 이후 국무총리 프리마코프(Yevgeny Primakov) 등에 의해 소환되어 푸틴에게로 이어진 일종의 정치사상으로서의 유라시아주의가 분명 존재하지만 그 뿌리를 스트라빈스키와 함께 유럽에서 활동하던 20세기 초 러시아 망명 지식인들로부터 시작된 유라시아주의의 개념사에서 찾아내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영어의 Eurasianism을 경유해 유라시아주의로 번역되는 이 개념의 원래 러시아어 단어 Евразийство는 ‘유라시아주의’보다는 ‘유라시아성’, ‘유라시아적인 것’에 가깝다. 그러니 러시아가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도, 러시아의 넓은 영토뿐 아니라 그 위에 공존하는 다민족의 문화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도 이 단어 Евразийство를 피해 가기란 어려운 일이다. 말하자면 이 러시아어 단어는 다양성을 하나로 아우르는 러시아 영토 전체의 모습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러시아 정상의 입에서 유라시아라는 단어가 나온다면 세계는 자동적으로 그 위에 전체주의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제국이 제국주의와 동일시될 수 없듯 전체성이란 전체주의와 분리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20세기 초 러시아 망명 지식인들의 향수 어린 유라시아의 꿈은 구소련의 영광을 회복하려는 현대 러시아의 국가주의와 구별되어야 한다. 게다가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결정조차도 구소련 영토의 회복이라는 지나치게 단순한 이유보다는 훨씬 더 복잡한 국제 관계 및 정치경제 구조에 의해, 세계 질서의 재편을 위한 도전이라는 러시아의 사활을 건 기획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로마 이후 로마제국과 가장 유사한 형태의 제국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러시아-소련의 경험에서 전체성이란 사실 스탈린 시기의 전체주의적 문화와는 별개로, 강제된 통일성보다는 언제나 총체성에 가까웠다. <봄의 제전>은 그러한 총체성의 신화로 나아가기 위한 불가피한 문화적 파국의 희생 제의로도 읽힌다.
   물론 카르사빈(Lev Karsavin) 등 유라시아주의자가 개진한 ‘교향악적 사회’의 이상 같은 경우는 분명 전체주의적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스트라빈스키는 공공연히 무솔리니를 비롯한 유럽의 파시즘을 옹호하였고 이는 분명 그의 음악이 미학적 전체주의로 확대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고전적 의미의 유라시아주의는 애당초 전체주의의 폭력과는 거리가 멀다. 고전적 유라시아주의는 1921년 언어학자였던 트루베츠코이(Nikolai Trubetzkoy) 지리학자 사비츠키(PyotrSavitskii), 정교 신학자 플로롭스키(Georges Florovsky) 등을 주축으로 불가리아의 소피아에서 시작된 다분히 슬라브주의적 민족운동이다. 혁명 전 러시아 모더니즘 문화의 수혜를 받은 이 사상은 상징주의 문학의 신지(神智)학적 비전과 미래주의의 유토피아에 대한 지향을 흡수했고 알렉산드르 블록(Aleksandr Blok)의 ‘스키타이주의’, 안드레이 벨르이(Andrei Bely)의 ‘동(東)’, 벨미르 흘레브니코프(V. Khlebnikov)의 ‘아시아로부터 부는 바람’ 등에서 반복된 이상적 공간으로서의 아시아를 주목하면서 위기의 유럽을 대체하는 새로운 가능성으로서의 유라시아 개념을 주조한다. 유라시아주의 형성에는 20세기 초 러시아 예술과 사상 전반에 배어 있었던 베르그송주의의 영향 또한 지대했다. 서구의 물질주의와 기계문명을 비판하며 유기주의 철학과 신화적 세계관으로의 회기를 꿈꾸었던 러시아 모더니스트들은 ‘지속(durée)’으로서의 시간과 그 가운데 쉼 없이 움직이는 진화와 생성에서 생명의 본질을 발견하는 베르그송의 직관적이고 유기체적인 세계 인식의 영향을 받았고, 이는 개별자들이 엉겨 만들어 가는 새로운 총체적 연속체로서의 유라시아 개념에 반영되었다. 즉 이들이 본 유라시아는 분리된 두 대립적 기원인 동과 서, 아시아와 유럽의 인위적 재결합으로서의 하나의 전체가 아니다. 식생학자 사비츠키, 언어학자 트루베츠코이는 각각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걸친 식생의 분포와 민족어 간의 유사성을 연구하면서 동으로부터 서로, 혹은 서로부터 동으로의 점진적이고 연속적인 흐름을 발견하였으며, 개별자가 인접해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연속적으로 존재하는 유라시아라는 총체를 러시아로 정의하기에 이른다.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기준이 어디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주저 없이 우랄산맥이라 답할 것이다. 그러나 중세부터 심지어 18세기 초까지도 유럽인들에게 유럽의 지리적 경계는 그보다 훨씬 더 서쪽, 흑해와 타나이스(Tanais)강 언저리 왼편에 치우쳐 있었다. 우랄산맥이라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는 사실 표트르 대제 시기 러시아의 지리학자들이 새롭게 수립한 것이다. 그 이전까지 유럽인들의 지리적 상상 안에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러시아를 당당한 유럽 국가의 하나로 만들기 위해 표트르 대제는 우랄산맥 동쪽의 더 넓은 영토를 아시아로 편입시키는 방법을 택한다. 이로써 그 이전까지 아시아인지 유럽인지가 전혀 문제 되지 않았던 러시아인들은 이제 지리적 정신 분열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이는 19세기 내내 러시아 지식인들에게 서구와 아시아 사이에서의 러시아의 정체성과 ‘러시아의 길’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TO 지도(T and O map) 7세기경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중세 유럽인들의 지리적 상상을 보여주는 T and O map. 이 지도의 지리적 의식 속에 사실상 러시아의 영토는 존재하지 않는다. 15~16세기에도 서구의 지리학자들은 아조프해와 흑해 지역으로 흐르는 타나이스강을 서양과 동양의 경계로 정의했다.
출처: : Wikipedia3)



   유라시아주의자들이 개진한 유기적 전체로서의 유라시아 개념은 바로 이처럼 인위적으로 분리를 겪은 러시아의 정체성을 본원의 것으로 되돌리는 일종의 치유의 방법론이었다. 즉 이들에게 유라시아는 대립적인 기원의 통합을 통해 만들어진 단일하고 균질적인 전체가 아닌, 개별자들을 있는 그대로 포괄하는 다성적 총합이자, 세기말의 위기감과 전쟁, 혁명의 기억과 같은 파국의 의식으로부터의 구원이 되는 민중적·유토피아적 공간이었다. 그것은 심지어 도스토옙스키 소설의 다성성을 연상시킨다. 바흐친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이 대화적임을 지적했지만 여기에서의 대화가 종결된 최종적인 말에 이르는 것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인간의 삶이, 러시아의 삶이 그렇지 않은데 소설 속 주인공들의 대화가 어떻게 최종적 말로 귀결될 수 있겠는가? 심지어 나는 나의 말이 발화되는 순간 그것의 분열을 읽는다. 나와 너의 목소리는 차이를 통해 존재한다. 이러한 차이들의 거짓 화해가 아닌 그러한 차이를 있는 그대로 포용하는 총체성이 바흐친이 본 도스토옙스키 소설의 모습이었으며 또한 작가가 느낀 러시아 사회의 풍경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유라시아는 도스토옙스키의 삶과 소설에 있어 궁극의 크로노토프(chronotope)4) 가 된다. 그것은 모든 목소리를 아우르지만 결코 하나의 목소리로 귀결되지 않는다. 러시아 문화의 특징 중 하나로 언급되는 공동체 정신은 흔히 러시아의 아시아적 기원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그것을 동양적인 것이라 칭하며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 전체주의와 독재의 맹아를 발견해 내는 것은 사실 편견이거나 우리조차 내재화하고 있는 오리엔탈리즘의 결과다. 유라시아주의는 러시아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로 환원될 수 없다. 그것은 러시아의 민족, 언어, 문화, 자연, 영토를 정의하는 가장 러시아적인 술어였다.
정치적 올바름과 존재 권력(ontopower)
2022년 2월 24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특별 군사작전’ 개시 명령을 선언했다. 바로 그 며칠 전 나는 원래도 마이너스 수익률이었지만 아예 바닥이 어딘지 모르게 떨어지고 있던 러시아 펀드를 좀 더 샀다. 금융에는 문외한이지만 러시아 전공자로서 이번만큼은 확신이 있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목전에 이르렀다고 아무리 떠들어도 절대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에. 러시아가 왜 자국에 아무 이익이 안 되는 일을 저지르겠는가. 21세기에 유럽 대륙에서 대규모 전면전이 말이 되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전쟁은 시작되었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며, 도무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로 러시아 펀드는 아예 거래 중지 상황이 되었고, 수익률은 차마 여기서 말하지 않겠다.
   이제 러시아 국민이 아닌 이상 러시아를 지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심지어 푸틴의 결정을 이해하고 이 전쟁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아닌 미국과 러시아의 전쟁이라 굳게 믿는 러시아인들조차 오늘의 러시아 현실을 슬퍼하고 우크라이나의 친지들이 겪는 고통에 눈물을 보인다. 사회주의 유토피아 건설을 위해 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현재를 사유하고 미래를 위해 기꺼이 그것을 유예했던 소련의 독특한 시간 경험에 익숙하며 러시아의 명분과 소명에 늘 공감해 온 나이 지긋한 세대들은 러시아의 자기 파괴적 결정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자녀 세대와 충돌하며 그저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이처럼 부모와 자식은 물론, 부부가, 수십 년지기 친구들이 전쟁에 관해 의견을 달리해 등을 돌리기도 한다. 지금 러시아 사회는 분열하고 있다. 청년들의 징병이 결정된 이후 러시아 국민들은 상황의 특수성을 이해해야 한다는 내적 명령과 국가의 당황스러운 결정에 대한 분노 사이를 오간다. 소련 해체 이후 정교가 종교라는 자리를 넘어 새로운 국가 정체성으로 가공된 러시아에는 최근 10여 년 동안 많은 숫자의 성당이 지어졌지만, 이제 그 성당들에서는 하나둘 전쟁에서 죽어 간 젊은 병사를 추모하는 위령제가 열리기 시작하고 있다. 러시아는 물론 우크라이나에도 많은 지인들이 있는 나로서는 그저 현재의 상황에 참담함을 느낄 뿐이다. 우리가 냉전의 종식을 평화의 시작으로 받아들인 것은 어쩌면 미망일지도 모르겠다. 냉전은 사실 ‘뜨거운 전쟁’의 잠정적 휴지 상태를 의미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냉전의 종식은 평화의 도래일 수 있는 만큼 새로운 전쟁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 아닌가.
   솔직히 러시아 전공자로서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상황에서는 미국과 유럽의 행태에 화가 나기도 했다. 나토를 확장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러시아의 안보 이익에 직접적 위협을 가하는 도발은 부당해 보였고 이번 전쟁의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글로벌 에너지 믹스의 변화에 직면해 미국이 유럽의 러시아 천연가스 의존도를 낮춤으로써 자국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한 것임은 누가 봐도 분명했다. 거기에 미국의 국내 정치 상황이나 통화 패권 문제도 분명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 경제가 정상화되고 국가 경쟁력이 높아지려는 순간마다 미국이 유가 조작 등을 통해 러시아 경제를 위기로 몰고 갔다는 러시아인들의 음모론적 확신이 정말인가 싶기까지 했다.
   그러나 전운이 감돌고 있음에도 결코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 굳게 믿고 있던 시기 내게 다른 무엇보다 첨예하게 다가온 것은 이런 정치경제 및 안보 이슈가 아니었다. 미디어에 의해 계속 반복 재생산되며 더욱 강화되는 러시아의 악마화된 이미지였고, 그것이 만들어 내는 공포와 위협이었다. 루소포비아는 미국과 유럽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여전히 공고했고 각국의 언론 보도는 그것을 더욱 강화하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얼마 전부터 영미 언론을 받아쓰는 국내 언론사들은 기사를 통해 ‘익명의 첩보에 의하면 러시아가 곧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것이다’라는 미국 정부의 말을 쏟아 내기 바빴다. 물론 미국의 싱크탱크와 위성사진이 총동원된 정확한 첩보였을 것이고 실제로 러시아는 우크라이라를 침공했지만 러시아의 침공이 분명하다는 세계의 너무도 확신에 찬 언론 보도에서 사실 이미 전쟁은 시작된 것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뉴스에는 어김없이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하는 독재국가 러시아를 규탄하는 혐오의 댓글이 수백 개씩 달렸다. 심지어 아직 전쟁이 시작되지 않았을 때인데도. 어쩌다 보이는 러시아 입장을 옹호하는 댓글에 대해서는 사정없는 언어 폭력이 자행됐다. 루소포비아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러시아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는 이들은 말하자면 소수자였다. 소수자에 대한 배려를 핵심으로 하는 정치적 올바름은 이 경우엔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쟁 이후 유럽 정상들의 연이은 반러시아 선언에서 볼 수 있듯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주체라면 러시아를 결코 이해해서도 믿어서도 안 됐다.
   사실 익명의 첩보라는 정보적 권위에 러시아를 둘러싼 불량 국가 프레임이 더해져 러시아가 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당연할 뿐 아니라 필연적이었다. 냉전이 종식되고 소련이 러시아가 되었어도 ‘러시아는 애초부터 위험하고 폭력적이며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독재국가이기 때문에’ ‘전쟁을 안 할 것이라는 러시아의 말은 거짓이며’, 그래서 ‘전쟁은 분명히 일어날 것’이라는 기사가 마치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외워야 하는 주문처럼 반복되었다. 주체의 행위에 대한 윤리적 평가 이전에 그 존재 자체를 선제적으로 규정함으로써 공포를 환기했고, 공포는 위협을 만들어 냈다. 그러니 전쟁이 현실이 된 이후 이런 비윤리적이고 폭력적인 국가 러시아에 모두가 공분하고 러시아군에 타격을 입히는 것은 충분히 정당한 일이었다. 게다가 러시아가 전쟁에서 자행한 만행들이 밝혀지면서 러시아에 대한 비난과 제재는 당연한 것이 되었다. 물론 민간인 학살 등과 관련해 러시아 내의 언론 보도의 내용은 전혀 달랐다. 나를 포함해 그 누구도 러시아 언론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못하지만,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한다고 해도 전 세계 그 누구도 그것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을 것임은 자명하다. 이미 러시아에 대한 판단은 전쟁 전에 완결된 것이기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실재가 되는 과정은 그야말로 “어떻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의 비존재성이 완전히 완료된 것보다 더 현실적일 수 있는지”(브라이언 마수미 Brian Massumi, 『존재권력』)를 직접 보여 준다. 뿌리 깊은 루소포비아는 손쉽게 러시아를 잠재적 적으로 만들 수 있었고, 그 적과 싸워야 하는 명분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니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러시아라는 확고한 적의 이미지였고, 그 필연적 위협을 널리 알려 공유하는 것이었다. 자연히 이번 전쟁에서 미디어의 역할은 그 어떤 때보다 컸다. 전쟁과 안보에는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인 불가지의 여백을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의 포스트는 마치 그런 여백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으며 우리가 모든 진실을 알려 줄 수 있다는 듯 지워 버렸다.
   브라이언 마수미의 책 『존재권력』은 911 테러 이후 조지 W. 부시 정부가 선포한 테러와의 전쟁을 중심으로 억제가 아닌 선제로서의 미국 신보수의 안보 논리를 해부한다.

“만일 우리가 위협이 완전히 가시화되길 기다린다면, 우리는 너무 오래 기다린 것일 겁니다. 우리는 그것들이 드러나기 전에 적에게 싸움을 걸어 그의 계획을 붕괴시키고 가장 나쁜 위협에 맞서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 세계에 들어섰으며 안전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행동의 길입니다.”(조지 부시 대통령, 2002)


   어디 숨어 있는지 알 수 없는 테러리스트, 위협임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아직 그 어떤 공격도 하지 않는 대상을 그들이 악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미리 무력화시키기 위해 선제적 공격이 필요함을 역설하는 조지 부시 대통령의 이러한 전략은 실제로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 전 러시아의 위협을 가시화하는 과정에서 그대로 반복되었다. 마수미가 지적하듯 사실이건 아니건 일단 미디어를 통해 발화된 말은 그 자체로 자율성을 가지고 움직이며 사실처럼 작동한다. 위협은 아직 출현조차 하지 않았고 따라서 불확실성 그 자체이지만 바로 그것이 위협의 본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수미는 이러한 권력의 선제성을 냉전의 억제력과 대비시킨다. 가령 핵무기 사용과 관련된 MAD(Mutual Assured Destruction , 상호확증파괴)가 대등한 두 힘의 팽팽한 균형에서 가능했던 것이라면 냉전의 종식 이후 테러와의 전쟁은 보이지 않는 적과 그 불확실한 위협을 미리 파괴하는 선제 권력 사이의 불공정한 싸움이다.
   사실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는 서구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9·11테러 이후 푸틴 대통령은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가장 먼저 전화를 걸어 위로를 건넸다. 이후 러시아는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 참여하며 미국과의 연대를 선언했다. 심지어 러시아에서는 9·11테러가 미국과 친해지기 위한 푸틴 대통령의 자작극이라는 농담 섞인 말도 안 되는 음모론까지 돌았다. 그러나 냉전의 패배자였던 러시아의 성장이 가시화되고 러시아가 과거의 영광을 찾겠다는 의지를 내보이면서 러시아는 다시 한번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했다. 러시아를 유럽에 편입시키려는 표트르 대제의 노력에 루소포비아로 답했던 역사는 사실 21세기에도 반복되었다.
   러시아 학자들은 미국을 위시한 서구 민주주의 사회가 냉전의 종식을 그들이 획득한 일종의 승리의 트로피로 간주하며 자연히 어렵게 쟁취한 승리를 영원히 지켜 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겨나고 그것이 여전히 군사적 개념으로 세계 질서를 읽을 수밖에 없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의견에 따르면 이러한 의식 가운데에서 새로운 세력의 성장은 곧 자유민주주의의 승리 위에 구축된 세계 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될 것이고, 자연히 러시아의 부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루소포비아를 환기할 뿐이다. 실제로 푸틴이 집권한 2000년부터 십여 년간 러시아는 다양한 공공 외교 프로젝트를 통해 러시아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것은 늘 러시아 국가주의 프로젝트라고 비판받았다. 여전히 잠재된 악이자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독재국가라는 프레임을 벗어날 수 없음을 확인한 러시아의 자조적 인식은 사실 2013년 전후로 러시아 대외정책 및 공공 외교 콘텐츠가 급격히 방향을 선회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신냉전의 위기 담론이 본격화된 것도 그때였다.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함께 정체성 정치가 전면화된 데 이어 21세기의 국제 관계는 감정으로의 전환(emotional turn), 심지어 정동으로의 전환(affective turn)의 경향을 명백히 드러낸다. 이는 때로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러시아에 대한 서구의 평가에서뿐 아니라, 이를 다시 한번 정치 담론으로 가공하는 러시아의 공공 외교 전략에서도 감지된다. 국제 관계는 이제 이성과 합리성을 통해 이해될 수 없는, 정서적이고 감정적이며 불확실한 주체의 영역이 되었다. 2014년 2월 소치 동계 올림픽 개최 즈음에 이르러 러시아는 소련 해체 이후의 짧은 역사를 거치며 복원되고 새롭게 구성된 국가 정체성을 축으로 결집한 단일하고 통합된 정동의 집단으로 변화한다. 사실 러시아인들은 냉전 후에도 해소되지 않는 러시아와 서구의 대립 구조 위에서 서구가 러시아의 주권에 대해 공격을 가한다는 피해의식을 느꼈으며 이는 일종의 구조적 정동으로서의 분노로, 이에 대한 저항으로, 나아가 전복적 실천으로서의 권력 의지로 진화해 갔다. 마치 스탈린의 소련이 그러했듯 현대 러시아 사회에서 정치는 다시 한번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영역과 합쳐졌으며, 이는 현대 러시아 사회를 도덕적 순수주의와 메시아주의라는 단일한 가치로 무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 세계의 미디어를 통해 증폭된 러시아의 위협을 실제 전쟁으로 가시화해 버린 러시아의 이번 결정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도 사라지지 않고 작동하는 뿌리 깊은 러시아에 대한 혐오 가운데 차라리 대등한 힘으로 서로를 억제하는 과거 냉전의 질서로 돌아가겠다는 선언 같은 것은 아닐까. 미국 중심의 단일한 세계 질서에 균열을 내겠다는 러시아의 공공연한 목표는 이번 전쟁으로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몇 년간 러시아의 공공 외교는 언어 공동체, 혹은 감정의 공동체라 할 수 있는 친러시아 세계에 집중되었다. 언젠가부터 러시아의 제국 이데올로기로 가공된, 친러시아 세계를 아우르는 유라시아 지정학은 물리적인 유라시아 공간을 넘어서 작동하는 단일한 정동의 몸과 같은 것이 되었다. 그것은 집적된 감정들과 그것의 기호로 구성된 경계인 동시에 이제 그 안에 잠재된 생명력과 권력 의지를 직접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그 경계를 계속해서 갱신해 가는 유기체로서의 지정학적 ‘되기(becoming)’이다. 러시아의 지정학적 소명과 메시아주의, 정교적 정체성은 유라시아 지정학의 시작인 동시에 그 결과다.
   신냉전은 어쩌면 루소포비아로부터 촉발된 정동 정치의 산물일 것이며, 이를 넘어서는 것 역시 그러할 것이다.
목차
잃음의 인과: 다양성에 대한 어느 문화예술인의 소회
정치적 올바름입니까, 혐오입니까?: 루소포비아를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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