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음의 인과: 다양성에 대한 어느 문화예술인의 소회
안재우
독립 큐레이터
사랑은 손을 놓을 때 끝나는 게 아니다.
놓은 손을 다시 잡을 수 없음을 깨달을 때 끝나는 것이다.


삶은 다양성을 잃어가는 과정이다
   나는 대학교 동문들을 만날 때마다 ‘인생은 안재우처럼!’이란 말을 종종 듣는다. 이는 나를 기쁘게 하기도 하고, 슬프게 하기도 하고, 부끄럽게 하기도 한다. 학교 다닐 때의 친구들은 대부분 회사원, 법조인, 공무원, 교수 등 내가 전공한 학과 출신이면 비교적 자연스럽게 맞이하게 되는 진로를 선택했는데 나는 그렇지 않고 미술 전시 기획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그들에게 나는 특이하고, 멋지고, 본인들의 삶보다 흥미로운 삶을 영위하는 사람으로 보인다고 한다.
   기쁜 일이다. 가까운 친구들로부터 이런 칭찬을 듣는 게 어찌 기쁜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친구들은 미술의 세계에 대해, 미술 작가들의 세계에 대해, 미술관과 갤러리 등 미술 전시 공간의 세계에 대해, 그리고 내가 방송에서 작가와 전시에 대한 소개를 하기 때문에 방송의 세계에 대한 질문들을 끝없이 쏟아내고, 나는 자주 만나지 못하는 이 친구들과 최대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진솔하면서도 재미있게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하고자 노력한다. 모두가 직장 상사 이야기, 날씨 이야기, 재테크 이야기, 자녀 교육 이야기, 건강 관리 이야기 등 중년에 접어들면 보편적으로 나누는 이야기들만 공유할 때, 그렇지 않은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는 건 분명 기쁜 일이다.
   슬픈 일이다. 적지 않은 친구들은 내가 이렇게 사는 게 부럽다고 한다. 나에게는 부러워할 게 별로 없을 것 같다고, 그리고 세상에는 다양한 노동에 대한 수요가 있으니 그 각각의 수요에 대한 수고로운 공급을 실천하는 여러분을 존경한다고 답한다. 또한 나는 타인의 삶을 부러워하는 게 꼭 잘못된 일은 아니겠지만, 가장 이상적인 일 또한 아닌 것 같다고 답한다. 부러워하지 말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 좀 더 능동적인 숙고와 실천 하기를 권한다는, 그런 소박하지만 우정이 가득한 의견의 공유와 함께. 그러고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자문한다: ‘내가 수많은 동문들 가운데 특히 이 친구들과 좀 더 친해질 수 있었던 건, 그리고 그 우정이 지금까지도 유지될 수 있는 건 이 친구들이 학교 다닐 때 참으로 보편적이지 않은 매력을 지녔기 때문인데 말이지. 가령 악기를 잘 연주했다든가, 토론 동아리에서 인권이나 환경 등에 대한 논제에 남다른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든가, 또는 내게 권한 책이나 영화가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든가 말이지. 그 당시에 우리의 부러움은 양방향적이고 호혜적이었는데, 왜 지금은 그렇지 않을까. 왜 비범한 학생들은 평범한 사회인이 되는 것일까. 왜 삶은 우리의 다양한 멋짐을 잃어 가는 과정일까. 슬픈 일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삶이 그렇지 않도록 하는 일, 그러니까 삶을 통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영감을 제공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문화예술인이라면, 나는 내가 지금까지의 활동을 통해 이룬 것보다는 앞으로 이뤄야 할 게 매우 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부끄러움을 성실하게 고백하는 동시에 이 글을 통해 내가 생성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영감을 제공하여 그 부끄러움을 조금이나마 줄여 보기 위해 한 문화예술인의 관점에서 보는 다양성의 중요성에 대한 졸견을 밝히고자 한다.
다양성의 정의와 함의: 사전적, 철학적, 그리고 예술적
『고려대 한국어대사전』에 의하면, 다양성이란 ‟여러 가지 양상을 가진 특성”이다.1) 사회학과 수학을 전공한 내가 볼 때 이는 매우 흥미로운 정의인데, 왜냐하면 ‘이질적 부분’과 ‘총체’의 개념들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다양성’이란 단어의 마지막 음절인 ‘성’은 속성을 의미하는데, 결국 다양성이란 무언가가 다양한 원소들로 구성된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즉 균질적이지 않은 부분들로 구성된 총체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는 일차적으로 다양성이란 속성을 지닌 존재들은 원소가 두 개 이상인 집합의 구조를 지닌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 글의 독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중학교 1학년 수학 교과 과정을 통해 배웠을 집합론을 복습해 보자. 집합 {a, b, c}가 원소가 세 개인 집합이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a ≠ b ≠ c’이다. 반면 그렇지 않은 경우, 가령 ‘a = b = c = 1’이라면, {a, b, c}는 {1, 1, 1}의 구조를 지닌 원소 세 개의 집합이 아니라 {1}의 구조를 지닌 원소 한 개의 집합이 된다. 이러한 이해 하에 다음 세 집합들을 보자: {국어국문학, 사회학, 수학}, {아시아인, 아프리카인, 유럽인}, 그리고 {하늘, 땅, 바다}. 각각 세 학문 분야의 집합, 세 지역인의 집합, 그리고 세 환경적 영역의 집합이며, 서로 같은 집합이 아니다. 하지만 세 집합 모두 세 개의 원소로 된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점, 따라서 구조적으로 동일하다는 점, 그러니까 모두 복수의 다양한 원소를 지닌 집합이라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점은 다양성의 구조적 성질을 근본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학문 분야, 지역·문화권, 그리고 환경을 넘어 ‘보편적 다양성’의 의미를 통찰하는 데 있어서 숙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학술적 글쓰기, 저널리즘, 또는 일상적인 담론에서 ‘사전적 정의’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는 어느 개념의 사전적 정의만으로는 그 개념이 좀 더 구체적인 맥락에서 사용될 때의 함의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a의 사전적 의미가 b인데, 그 언어학에서의, 철학에서의, 그리고 예술에서의 의미·함의는 각각 c, d, 그리고 e이다’와 같은 언급을 하기 위해 사전적 정의를 논의에 포함하는 일이 종종 있고, 이 글 또한 예외가 아니다. 우선 현대 철학에서의 구조주의를 보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는 언어가 이질적인 기호들의 집합이며, 기호 체계의 이러한 다양성 덕분에 각 기호가 서로 다른 의미를 지시할 수 있게 되고, 즉 고유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게 되고, 언어라는 총체는 이처럼 이질성을 통해 고유성이 정의될 수 있는 원소들로 구성된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통찰을 통해 구조주의 언어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Hjelmslev, 1969).2) 가령 ‘안암동의 방 수요’와 ‘안암동의 빵 수요’라는 표현들을 보자. 전자는 안암동의 원룸이나 하숙집 등 부동산 시장에 대한, 반면 후자는 같은 지역의 베이커리 시장에 대한 논의에서 등장할 표현들이다. 이처럼 이 둘이 각자의 고유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건 ‘방’이 지시하는 것과 ‘빵’이 지시하는 게 다르기 때문이고, 이러한 다름이 있기에 각자가 고유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다름을 통한 고유성의 확립이라는 구조를 지니고 있는 총체가 언어라는 게 구조주의 언어학의 초석인 것이다.
   인문사회과학의 많은 학생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소쉬르의 이러한 통찰은 철학을 비롯하여 인문사회과학의 여러 분야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가령 인류학적으로 보면, 신장이 187cm인 성인이 ‘키 큰 사람’이라 정의될 수 있는 건 순수히 187cm라는 물리적 측정치 때문이 아니라 그 측정치가 인류의 평균 키보다 크기 때문이라는 통찰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리고 구조적으로 완전히 똑같은 이유로, 동일 인물이 농구 선수가 된다면 ‘키가 매우 크다고 보기는 어려운 농구 선수’라 정의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예시의 인물을 비롯하여 세상의 모든 대상은 그 대상 스스로가 아닌 다른 대상과의 차이를 통해 자신의 고유성이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이고, 따라서 ‘다양성이란 각 대상의 고유성을 보장하는 것인 동시에 대상들이 속한 총체의 구조적 성격’이란 다양성의 철학적 함의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화예술의 영역에서 다양성은 어떤 함의를 지니고 있을까. 이 글의 집필을 의뢰받은 나는 감각적 다양성, 집단적 다양성, 그리고 자아적 다양성을 숙고하고 있다.
내 귀, 눈, 그리고 마음:
감각적 다양성과 초-감각적 다양성
감각적 다양성
‘문화예술의 다양성’이란 말을 처음 듣는 순간, 거의 자동적으로 ‘장르’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즉 음악, 미술, 무용, 연극, 영화, 만화, 문학, 가구 디자인 등 예술의 형태적 다양성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이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각 분야의 형태적 이질성이 직관적으로 뚜렷해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 어떤 이는 각 분야의 하위 장르 또한 생각할 것이다. 가령 음악은 시나위, 산조, 클래식, 재즈, 힙합 등의 하위 분야를 갖는다. 그리고 이 하위 분야들은 또 더 구체적인 하위 분야들을 지닌다. 가령 산조에는 김죽파류 가야금산조, 성금연류 가야금산조, 지영희류 해금산조 등이 있다.

성금연 명인과 지영희 명인의 딸인 지순자 명인의 성금연류 가야금산조 연주가 수록된 앨범인 《부활》의 표지(1997)
출처: 지순자. (1997). 부활[앨범]. 삼성뮤직.


힙합 뮤지션 이영지의 라이브 공연 모습(2022)
출처: 이영지 인스타그램


   예술은 어떻게 다양한 방식으로 발달할 수 있었을까. 우선 미술이 시각 예술인 반면 음악은 청각 예술인 것처럼 인간에게는 생물학적으로 다양한 감각 기관이 있기 때문에 그 다양성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는 다양한 생물학적 방식으로 대상을 인지하며, 그 다양한 방식에 대응하여 예술을 창작하고 감상할 수 있다. 예술이 그 풍성한 다양성을 지닐 수 있는 건 우리 감각의 다양성 없이는 분명 불가능했을 것이고, 이는 결국 예술이 감각의 다양성이라는 인간의 정체성을 밝힌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무지개의 형형색색을 보거나 새의 울음소리를 듣는 등 예술이 아닌 방식으로도 우리는 우리 감각 기관들을 사용하기에, 우리의 그러한 감각 행위가 아닌 예술적 실천을 고려할 때 감각의 생물학적 다양성을 넘어 감각을 통해 창작이나 감상 등 예술을 추구하고자 하는 속성이 우리에게 있고, 따라서 예술을 위한 감각의 활용적 다양성 또한 우리 정체성의 주요한 일부임을 확인할 수 있다. 눈으로 예술적 감흥을 얻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귀로도 그것을 얻기 위해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다.

다양성의 다양성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해바라기》 연작 중 하나(1887)
출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3)


후니다 킴(Hoonida Kim)의 인터렉티브 설치 예술 작품인 <데이터스케이프>(2021)
출처: 국립현대미술관4)


   한편 이러한 감각적 구분의 역사 속에는, 특히 현대 예술에서는, 혼합을 시도하는 역사 또한 있다. 가령 초창기의 영화는 완전한 무성영화였지만, 얼마 뒤 무성영화도 영사와 동시에 뮤지션들이 극장에서 직접 음악을 연주하는 형식의 상영이 이뤄졌으며, 결국 기술의 발달로 영화에 대사, 음악, 그리고 다양한 효과음 등이 직접 녹음되는 지금의 시청각 영화가 탄생하였다. 반면 음악에서는 일종의 짧은 영화라고 할 수 있는 뮤직비디오가 탄생하였고, 앨범 표지의 예술성을 부각하는 커버 아트는 그보다도 역사가 길며, 라이브 공연의 경우에도 무대미술과 뮤지션들의 의상 디자인 등 시각 예술이 음악과 공존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현대 미술에서는 소리를 미술에 활용하는 시도들이 점차 늘고 있는데, 일례로 ‘소리를 이용한 공기 조각가’로 알려진 후니다 킴과 같은 예술가들이 꾸준히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러한 혼합의 시도들은 예술적 다양성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주요한 함의를 드러낸다. 바로 ‘다양성의 다양성’이다. 붉은색 물감을 사용하는 화가는 붉은색 그림만 그릴 수 있지만, 붉은색 물감과 노란색 물감을 쓰면 붉은색 그림, 노란색 그림, 그리고 주황색 그림을 그릴 수 있고, 파란색까지 사용하면 붉은색, 노란색, 파란색, 주황색, 녹색, 보라색, 그리고 검은색을 표현할 수 있다. 게다가 녹색에 노란색을 충분히 더 섞으면 연두색이 되는 것처럼, 색을 혼합할 때 혼합의 비율에 따라 더욱 다양한 색을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혼합의 시도들 덕분에 노란색에 흰색과 검은색을 다양한 방식으로 섞어서 반 고흐는 그의 《해바라기》 연작을 그릴 수 있었고, 후니다 킴은 자신만의 독특한 시청각 예술을 창작할 수 있다. 결국 다양성은 인간의 창의력을 통해 더욱 큰 다양성이 될 수 있고, 그 무한한 가능성은 우리에게 꾸준히 새로운 영감을 제공할 수 있기에 소중한 것이다.

재능과 취향: 인간적 다양성
그런데 예술적 다양성의 원인을 감각의 다양성이나 감각의 활용적 다양성으로만 국한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일단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시각보다 청각이 생물학적으로나 예술적으로 뛰어나서 그렇다고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지 않은가. 그게 사실이라면 청각장애인이었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었겠는가. 이는 예술적 다양성의 다양한 원인 가운데 감각적 다양성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청각장애인이 음악인이 되고, 아무런 장애가 없는 사람이 청각 예술보다 시각 예술을 선호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감각에만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이러한 사유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적 다양성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어떤 추가적 정보를 제공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자명해 보인다. 결국 단순히 감각적 다양성 때문이 아니라 개인적 재능과 취향의 다양성에 의해 예술적 다양성이 형성될 수 있는 것이고, 이는 개인이란 타인과 무조건 동일한 재능과 취향을 갖고 있는 게 아님을, 그리고 사회란 인간이 보편적으로 보유한 감각기관의 차원에서는 균질적일 수 있어도, 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 코 그리고 입을 가지고 있어도, 정신적으로는 이질적인 개인들이 모여서 구성된 집단임을 입증하기도 한다. 결국 예술의 다양성은 감각의 다양성을 넘어 사회의 다양성을 함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포근한 겨울나기를 하기 위해서는 각 구성원의 체격에 맞는 다양한 사이즈의 보온 의류와 각 구성원의 임금 수준에 맞는 다양한 가격의 옷이 필요한 것처럼 모두가 각자의 취향에 맞는 예술적 경험을 실천하기 위해서 그에 대응한 예술적 다양성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예술적 다양성은 ‘나는 누구인가’와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 논제들과 깊은 연관이 있고, 이에 모두가 고민해 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내 눈과 당신의 눈: 집단적 다양성
감각적 다양성을 통해 인간적 다양성을 통찰할 수 있다면, 인간적 다양성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를 통찰해 보는 것도 유의미할 것이다. 즉 같은 사회의 구성원들임에도 불구하고 각 개인은 창작적으로나 감상적으로나 다양한 예술적 취향을 갖고 있는데, 그 다양성의 원인은 무엇일까.

집단적 다양성의 교집합과 여집합
사회학적으로 볼 때, 이는 ‘사회’라는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특히 어떤 맥락에서 어떤 의미·범위로 그 개념이 사용되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가령 ‘한국 사회’라는 지역사회의 경우, 한국 거주자들을 모두 같은 사회의 구성원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세부적인 지역·사회계층·연령·성별·전공·직업 등 수많은 하위 집단들의 소속 여부에 따라 각 개인의 사회적 정체성은 다를 것이고, 이는 각 개인의 사회화 과정 또한 다르다는 것을 자명하게 함의한다. 여기서 사회화를 언급하는 이유는 우리 취향의 형성 과정에서 사회화가 명백한 기여를 하기 때문인데, 이는 사회학도가 아닌 사람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2011) 중 씨민이 히잡을 만지고 있는 장면
출처: Asghar Farhadi Productions5)


서울에서 2022년 9월 28일에 일어난 이란의 히잡 규정에 대한 항의 시위(2022)
출처: BBC코리아6)


   가령 어떤 나라의 국민이 그 나라의 문화를 기반으로 한 예술 작품을 창작하여 선보일 때, 그에 대해 같은 나라의 모든 국민이 똑같이 반응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이란 사람인 아시가르 파르하디(Asghar Farhadi, 페르시아어: اصغر فرهادی) 감독이 세계적으로 극찬을 받은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같은 이란인들 사이에서도 감상자의 경제적 지위, 종교적 가치관, 그리고 성별 등에 의해 영화가 주는 감흥이 상이할 것이다. 특히 여성주의적인 시각에서 보면, 이 영화는 여성 인권의 문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 주는데, 일례로 여성인 씨민이 자신의 히잡을 만지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 줌으로써 남성이기에 히잡을 착용하지 않는 나데르하고의 대조가 부각된다.

전체집합: 존중, 통합, 그리고 보편성
문화예술의 다양성을 논하는 이 글에서 사회적 집단의 차이에 따른 다양성에 대한 언급이 왜 중요할까. 우선 감각적 다양성과 마찬가지로, 이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주요한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즉 문화예술의 다양성은 세상이란 다양한 사회적 배경이 공존하는 곳이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굳이 문화예술의 다양성에 대한 능동적인 성찰을 하지 않아도 경험적으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 사실을 이 논의의 맥락에서 언급해야 하는 이유는, 우선 여기에 ‘존중’이라는 도덕적 실천의 문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이해가 단순히 지식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것과 그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하여 도덕적으로 이상적인 실천을 행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가령 자신에게 이질적인 예술 작품을 접할 때, 그에 대해 ‘이상하긴 한데, 뭐 세상에는 다양한 예술가가 있는 것이고 그래서 다양한 예술이 있는 거니까.’ 정도의 가치 판단을 하는 게 ‘내가 지금 일차적으로 느낀 이질감은 이 작품이 세상의 수많은 취향과 가치관 가운데 나라는 한 개인의 취향과 가치관에 따른 것이지 타인의, 특히 창작자의 그것들은 다를 수 있으며 이는 세상의 근본적 정체성의 일부이다’로 정리되는 사유와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어느 청소년이 학교 도덕 과목 시험에서 높은 성적을 받는 것과 교실 안팎에서 실제로 높은 도덕성을 실천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과 마찬가지이다.
   둘째, 이러한 존중이 보편적인 가치로 확산될 수 있다면 우리는 다양한 이로운 문화적 결실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고, 그중 가장 명백한 하나가 이상적인 사회 통합이다. 사회적 갈등의 해소와 사회 구성원들의 이상적인 통합을 위해 인류는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는데, 가령 학술적 노력, 관련 입법 등 제도적 노력, 그리고 국가 간의 화합을 위한 외교적 노력 등이 있다. 그런데 상술한 대로 지식의 차원을 넘어 진정한 존중의 차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결국 ‘마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고, 문화예술의 다양성은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예술은 지성과 논리의 담론인 동시에 감성과 정서의 담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어영문학, 사회학, 그리고 수학을, 즉 인문사회과학과 연역 논증을 전공한 내가 결국 전시 기획자가 된 이유는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예술가가 예술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기획자는 전시를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에, 즉 예술가와 감상자의 만남을 주선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직업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논한 다양한 이유 때문에 상당히 이질적일 수 있는 이 두 사람이 가장 온전한 만남을 경험할 수 있도록 둘 사이의 다리를, 그 이질감이 일으킬 수 있는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그리고 만남 이전보다 이후의 각자의 삶이 더욱 값질 수 있는 방향으로 설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현재 기획하고 있는 전시인 ‟유리 히잡(가제)”에 대한 소개를 하자면, 이는 이란의 히잡 문제에 대한 한국의 일부 사람들이 나타내는 반응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란의 히잡 반대 운동은 2022년만의 특이한 현상이 아니라 이란에서 오래전부터 실천되고 있는 것인데, 몇 해 전 테헤란에서의 한 시위에 대해 한국의 일부 네티즌들이 보인 어떤 반응이 있었고, 그 반응에 대해 내가 당시에 문화평론가로 출연 중이었던 TBS 라디오의 <라디오를 켜라 김보빈입니다>라는 프로그램의 2018년 2월 10일 방송에서 한 이야기가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당시에 시위 참여자 29명이 구속된 사건이 있었는데, 이 내용을 다룬 기사에 달린 ‘베스트 댓글,’ 즉 여러 사람으로부터 지지받은 댓글 가운데 “진짜 페미니즘은 저런곳에 필요한것 아닌지 생각한다.”가 있었다.(노재현, 2018)7) 나는 이에 대해 방송에서 ‘이 댓글을 쓰신 분과 공감하신 분들이 한국 사회는 여성들에게 투명한 히잡을 입힌다는 것을 아셨으면 합니다.’라는 내용의 발언을 통해 은유적으로 한국도 이란과 마찬가지로 성 불평등 문제를 갖고 있다고 지적했고, 진행자와 프로듀서, 그리고 작가, 이 세 명의 이란인이 아닌 한국인 여성으로부터 공감을 얻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지금, 이란의 히잡 반대 운동은 2022년 9월 28일의 서울 시위를 비롯하여 세계적인 운동으로 확산되고 있다. 한국을 비롯하여 이 운동이 실천되고 있는 나라들 가운데 적지 않은 곳은 히잡의 의무적 착용이라는 법적인 여성 복장 규제가 없지만, 이 국가들이 모두 성 불평등 문제를 갖고 있기에, 즉 ‘투명한 히잡’의 문제를 지니고 있기에 히잡 반대 운동이 단순히 이란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 모두의 문제가 될 것이다.
   ‟유리 히잡”이라는 전시 주제는 그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성 불평등과 관련된 다양한 용어 가운데 ‘유리 천장’의 개념을 ‘투명한 히잡’에 적용하여, 이 주제에 공감한 조각가들이 다양한 인종, 직업, 그리고 연령 등의 여성들을 조각 작품으로 만든 뒤 모두 3D 프린터로 복제하고, 복제된 조각들에 유리로 제작한 히잡을 입힌 뒤 전시하는 것이다. 안경을 착용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안경 렌즈는 투명하긴 하나 빛을 비추면 그림자가 발생한다. 이러한 원리를 활용하여 유리 히잡에 조명을 비추면, 유리 히잡을 착용하지 않은 원래 조각과 달리 유리 히잡을 착용하고 있는 복제 조각 작품에는 그림자가 생기게 되고, 이에 ‘이해’를 상징하는 빛의 기능을 수행하는 조명의 비춤을 통해 가시성이 떨어질 수 있는 문제를 가시화하는 내용의 전시를 기획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수고를 통해 우리가 추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문화예술의 인간적 다양성이 지닌 또 하나의 중요성은 다름 아닌 다양성의 기저에 내재하는 보편성이다. 가령 여성 인권 운동은 히잡 반대 운동이나 미투 운동 등 다양한 형태로 실천되지만, 그 본질에는 성 불평등의 문제가,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보편적 문제의식이 있다는 것을 이 표면적으로는 상이해 보이는 운동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다양성의 이해, 그 이해를 통한 상호 존중의 형성, 그리고 그 존중을 통한 보편적 가치의 사회 통합적 추구는 내가 생각하는 문화예술의 다양성이 지닌 가장 중대한 잠재성과 담론적 생산성이다.
내 눈과 내 삶: 자아적 다양성
물리적 온도, 체감 온도, 심감 온도
전시나 공연 등의 문화예술 행사를 기획하는 사람들은 기획에 앞서 다양한 변수들을 고려하는데, 그중 많은 기획자들이 보편적으로 중시하는 것 가운데 하나로 ‘타이밍’을 들 수 있다. 가령 봄에는 개화부터 낙화까지의 꽃의 생애를 소재로 한 미술 전시를, 여름에는 시원한 물이 흐르는 계곡 근처에서의 음악 축제를, 또는 대학에서 학생이나 교직원의 인권 침해가 발생했을 때 그에 대응하는 캠퍼스 문화제 등을 기획하게 된다.


<공허한 공휴일(Hollow Holidays)> 중
출처: 저자 제공


   2018년 12월은 그런 차원에서 내게 특별한 연말이었다. 겨울이 시작되면서 물리적 기온과 체감 기온이 크게 떨어지기 시작하는 이 시기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기온이 오히려 올라가기도 하는 시기이다. 친구들과의 각종 송년회, 송구영신의 기운, 그리고 무엇보다도 연인과 함께 즐기는 연말 분위기 등의 현상들 때문일 것이다. 한데 물리적 온도나 체감 온도의 의미는 온도계에 보이는 숫자로만 결정되는 게 아니라 그 숫자와 다른 숫자들하고의 차이에 의해, 즉 그 다양성에 의해 결정된다. 물리적으로나 체감적으로나 똑같은 섭씨 25도의 경우, 여름에 냉방기가 가동될 때의 실내 온도라면 시원한 온도이지만, 겨울의 난로 앞에서는 포근한 온도이지 않은가. 마음의 온도도 마찬가지여서, 그 높낮이는 상대적으로 결정된다. 만성적 외로움이라는 심적 혹한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의 <사계>는 얼마나 거짓말처럼 들리겠는가.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아이와 배우자는 12월 31일 저녁의 송구영신 식탁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별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사람의 눈에 각종 음식점, 주점, 그리고 여행사 등에서 실시하는 연인들을 위한 연말 이벤트는 어떻게 보일까.
   <공허한 공휴일>이란 연말 행사는 이런 성찰의 결과로 탄생하게 되었다. ‟Summer Days in Bloom”과 ‟I'll Be a Virgin, I'll Be a Mountain” 등의 노래들로 한국 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 독일 뮤지션이자 내 친구인 막시밀리안 헤커(Maximilian Hecker), 그가 2018년 말에 내한 공연을 가졌을 때 나는 그에게 심적 혹한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연말을 ‘Happy holidays!(즐거운 연말 되세요!)’라는 연말 인사가 상징하듯 주류 문화적인 밝고 명랑한 방식만이 아닌 또 다른 방식으로 보낼 수 있는 내용의 공연과 대화가 섞인 행사를 함께 해 보자는 제안을 했고, 그는 흔쾌히 좋다고 해서 우리는 연말을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실천한 것이었다. 서울의 대부분의 번화가에서 ‘징글 벨(Jingle Bells)’이 울려 퍼지는 시기에, 우리는 관객, 뮤지션, 그리고 기획자가 각각 겪어 본 상실의 힘겨움, 마음의 한겨울, 그리고 그 극복을 위한 다가오는 새해의 계획 등에 대한 이야기를 헤커의 공연 중간 중간에 공유하여 좀 더 깊은 울림의 종소리를 만든 것이다.

이상적 온도의 자아를 위한 다양성이라는 땔감
이 글 또한 4년 전 그 행사와 본질적으로 유사한 영감을 독자들에게 줄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우선 획일적인 삶의 권태를 느끼는 모두에게 다양성의 가치를 노래하고 싶다.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의 삶을 부러워하지 말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부러워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고, 다양성에 대한 이해와 실천이 그 여정에 특별한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아울러 앞서 집합론을 이용한 분석을 통해 언급한 다양성의 본질적 구조에 대한 인식이 자신의 모습은 물론 세상 전체의 모습에 대한 좀 더 정밀하고 이상적인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기여할 수도 있도록, 문화예술의 다양성을 접하는 경험이 신체적 다양성, 성격적 다양성, 그리고 정치적 성향의 다양성 등 다른 개념들의 다양성에 대해 조금이라도 덜 좁은 시야를 계발하는 데 기여하기를 소망한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2004)
출처: : Anonymous Content8)


영화 <피나(Pina)>(2011)
출처: Eurowide Film Production9)


   이 글의 첫 두 문장인 ‟사랑은 손을 놓을 때 끝나는 게 아니다. 놓은 손을 다시 잡을 수 없음을 깨달을 때 끝나는 것이다.”는 내가 개봉 이후 여러 차례 감상한 미셸 공드리(Michel Gondry)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 이 2013년 초봄, 내가 정신적으로 몹시 힘겨웠던 시기에 속초 여행을 다녀온 뒤 오랜만에 다시 떠올라 그 감흥에 대해 쓴 일기의 일부이다. 앞서 나는 내 대학 시절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그 다양했던 친구들이 ‘대한민국에서의 사회생활’이라는 과정을 통해 다소 획일적인 사회인들이 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밝혔는데, 자신이 한때 열정적으로 붙잡고 있던 악기의, 시집의, 그리고 세상을 좀 더 폭넓게 경험하고 싶어하는 마음의 손을 다시 잡을 수 없다고 확신하는 게 아니라면, 이 글이 꺼져 가는 열정의 불을 다시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는 미풍과 같았으면 한다. 잃음의 인과를 좀 더 진지하게 성찰해 보자: 잃은 건 음악과 문학이지 그들에 대한 애정은 아니지 않은가, 자아의 꺼진 등불은 말 그대로 꺼진 등불이지 분실된 등불이 아니지 않은가, 자아의 냉각은 냉각일 뿐 자아의 죽음은 아니지 않은가. 다양한 체중, 의상, 그리고 인종의 무용수들이 우리의 관습적 중력장보다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해 주는 곳에서 신나게 그 자유를 춤추는 듯한 현대무용 작품인 피나 바우슈(Pina Bausch)의 <보름달(Vollmond)>처럼, 당신인 당신과 나인 내가 다양성이란 위대한 광원의 안무를 함께 즐기자.

런던 웜우드 가(Wormwood Street, London)에 설치된 서도호의 공공미술 작품 앞에서

목차
잃음의 인과: 다양성에 대한 어느 문화예술인의 소회
정치적 올바름입니까, 혐오입니까?: 루소포비아를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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