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적 다양성을 통해 인간적 다양성을 통찰할 수 있다면, 인간적 다양성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를 통찰해 보는 것도 유의미할 것이다. 즉 같은 사회의 구성원들임에도 불구하고 각 개인은 창작적으로나 감상적으로나 다양한 예술적 취향을 갖고 있는데, 그 다양성의 원인은 무엇일까.
집단적 다양성의 교집합과 여집합
사회학적으로 볼 때, 이는 ‘사회’라는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특히 어떤 맥락에서 어떤 의미·범위로 그 개념이 사용되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가령 ‘한국 사회’라는 지역사회의 경우, 한국 거주자들을 모두 같은 사회의 구성원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세부적인 지역·사회계층·연령·성별·전공·직업 등 수많은 하위 집단들의 소속 여부에 따라 각 개인의 사회적 정체성은 다를 것이고, 이는 각 개인의 사회화 과정 또한 다르다는 것을 자명하게 함의한다. 여기서 사회화를 언급하는 이유는 우리 취향의 형성 과정에서 사회화가 명백한 기여를 하기 때문인데, 이는 사회학도가 아닌 사람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2011) 중 씨민이 히잡을 만지고 있는 장면
출처: Asghar Farhadi Productions5)
서울에서 2022년 9월 28일에 일어난 이란의 히잡 규정에 대한 항의 시위(2022)
출처: BBC코리아6)
가령 어떤 나라의 국민이 그 나라의 문화를 기반으로 한 예술 작품을 창작하여 선보일 때, 그에 대해 같은 나라의 모든 국민이 똑같이 반응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이란 사람인 아시가르 파르하디
(Asghar Farhadi, 페르시아어: اصغر فرهادی) 감독이 세계적으로 극찬을 받은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같은 이란인들 사이에서도 감상자의 경제적 지위, 종교적 가치관, 그리고 성별 등에 의해 영화가 주는 감흥이 상이할 것이다. 특히 여성주의적인 시각에서 보면, 이 영화는 여성 인권의 문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 주는데, 일례로 여성인 씨민이 자신의 히잡을 만지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 줌으로써 남성이기에 히잡을 착용하지 않는 나데르하고의 대조가 부각된다.
전체집합: 존중, 통합, 그리고 보편성
문화예술의 다양성을 논하는 이 글에서 사회적 집단의 차이에 따른 다양성에 대한 언급이 왜 중요할까. 우선 감각적 다양성과 마찬가지로, 이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주요한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즉 문화예술의 다양성은 세상이란 다양한 사회적 배경이 공존하는 곳이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굳이 문화예술의 다양성에 대한 능동적인 성찰을 하지 않아도 경험적으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 사실을 이 논의의 맥락에서 언급해야 하는 이유는, 우선 여기에 ‘존중’이라는 도덕적 실천의 문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이해가 단순히 지식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것과 그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하여 도덕적으로 이상적인 실천을 행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가령 자신에게 이질적인 예술 작품을 접할 때, 그에 대해 ‘이상하긴 한데, 뭐 세상에는 다양한 예술가가 있는 것이고 그래서 다양한 예술이 있는 거니까.’ 정도의 가치 판단을 하는 게 ‘내가 지금 일차적으로 느낀 이질감은 이 작품이 세상의 수많은 취향과 가치관 가운데 나라는 한 개인의 취향과 가치관에 따른 것이지 타인의, 특히 창작자의 그것들은 다를 수 있으며 이는 세상의 근본적 정체성의 일부이다’로 정리되는 사유와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어느 청소년이 학교 도덕 과목 시험에서 높은 성적을 받는 것과 교실 안팎에서 실제로 높은 도덕성을 실천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과 마찬가지이다.
둘째, 이러한 존중이 보편적인 가치로 확산될 수 있다면 우리는 다양한 이로운 문화적 결실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고, 그중 가장 명백한 하나가 이상적인 사회 통합이다. 사회적 갈등의 해소와 사회 구성원들의 이상적인 통합을 위해 인류는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는데, 가령 학술적 노력, 관련 입법 등 제도적 노력, 그리고 국가 간의 화합을 위한 외교적 노력 등이 있다. 그런데 상술한 대로 지식의 차원을 넘어 진정한 존중의 차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결국 ‘마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고, 문화예술의 다양성은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예술은 지성과 논리의 담론인 동시에 감성과 정서의 담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어영문학, 사회학, 그리고 수학을, 즉 인문사회과학과 연역 논증을 전공한 내가 결국 전시 기획자가 된 이유는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예술가가 예술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기획자는 전시를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에, 즉 예술가와 감상자의 만남을 주선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직업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논한 다양한 이유 때문에 상당히 이질적일 수 있는 이 두 사람이 가장 온전한 만남을 경험할 수 있도록 둘 사이의 다리를, 그 이질감이 일으킬 수 있는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그리고 만남 이전보다 이후의 각자의 삶이 더욱 값질 수 있는 방향으로 설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현재 기획하고 있는 전시인 ‟유리 히잡
(가제)”에 대한 소개를 하자면, 이는 이란의 히잡 문제에 대한 한국의 일부 사람들이 나타내는 반응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란의 히잡 반대 운동은 2022년만의 특이한 현상이 아니라 이란에서 오래전부터 실천되고 있는 것인데, 몇 해 전 테헤란에서의 한 시위에 대해 한국의 일부 네티즌들이 보인 어떤 반응이 있었고, 그 반응에 대해 내가 당시에 문화평론가로 출연 중이었던 TBS 라디오의 <라디오를 켜라 김보빈입니다>라는 프로그램의 2018년 2월 10일 방송에서 한 이야기가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당시에 시위 참여자 29명이 구속된 사건이 있었는데, 이 내용을 다룬 기사에 달린 ‘베스트 댓글,’ 즉 여러 사람으로부터 지지받은 댓글 가운데 “진짜 페미니즘은 저런곳에 필요한것 아닌지 생각한다.”가 있었다.
(노재현, 2018)7) 나는 이에 대해 방송에서 ‘이 댓글을 쓰신 분과 공감하신 분들이 한국 사회는 여성들에게 투명한 히잡을 입힌다는 것을 아셨으면 합니다.’라는 내용의 발언을 통해 은유적으로 한국도 이란과 마찬가지로 성 불평등 문제를 갖고 있다고 지적했고, 진행자와 프로듀서, 그리고 작가, 이 세 명의 이란인이 아닌 한국인 여성으로부터 공감을 얻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지금, 이란의 히잡 반대 운동은 2022년 9월 28일의 서울 시위를 비롯하여 세계적인 운동으로 확산되고 있다. 한국을 비롯하여 이 운동이 실천되고 있는 나라들 가운데 적지 않은 곳은 히잡의 의무적 착용이라는 법적인 여성 복장 규제가 없지만, 이 국가들이 모두 성 불평등 문제를 갖고 있기에, 즉 ‘투명한 히잡’의 문제를 지니고 있기에 히잡 반대 운동이 단순히 이란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 모두의 문제가 될 것이다.
‟유리 히잡”이라는 전시 주제는 그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성 불평등과 관련된 다양한 용어 가운데 ‘유리 천장’의 개념을 ‘투명한 히잡’에 적용하여, 이 주제에 공감한 조각가들이 다양한 인종, 직업, 그리고 연령 등의 여성들을 조각 작품으로 만든 뒤 모두 3D 프린터로 복제하고, 복제된 조각들에 유리로 제작한 히잡을 입힌 뒤 전시하는 것이다. 안경을 착용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안경 렌즈는 투명하긴 하나 빛을 비추면 그림자가 발생한다. 이러한 원리를 활용하여 유리 히잡에 조명을 비추면, 유리 히잡을 착용하지 않은 원래 조각과 달리 유리 히잡을 착용하고 있는 복제 조각 작품에는 그림자가 생기게 되고, 이에 ‘이해’를 상징하는 빛의 기능을 수행하는 조명의 비춤을 통해 가시성이 떨어질 수 있는 문제를 가시화하는 내용의 전시를 기획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수고를 통해 우리가 추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문화예술의 인간적 다양성이 지닌 또 하나의 중요성은 다름 아닌 다양성의 기저에 내재하는 보편성이다. 가령 여성 인권 운동은 히잡 반대 운동이나 미투 운동 등 다양한 형태로 실천되지만, 그 본질에는 성 불평등의 문제가,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보편적 문제의식이 있다는 것을 이 표면적으로는 상이해 보이는 운동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다양성의 이해, 그 이해를 통한 상호 존중의 형성, 그리고 그 존중을 통한 보편적 가치의 사회 통합적 추구는 내가 생각하는 문화예술의 다양성이 지닌 가장 중대한 잠재성과 담론적 생산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