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세상을 부정하는 용기
홍지인
삼성전자
어린 시절 대한민국을 벗어나 다른 문화권에 거주한 후 한국에 돌아오면서부터 나와 다른 것에 배타적인 한국의 획일적인 집단의식에 때때로 숨 막히는 것을 경험했다. 그래서 그 어느 곳보다 대한민국에 다양성이 공존하기를 바라 왔다. 타인의 삶을 감히 멋대로 짐작하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시간 낭비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그 끝이 꽃길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성장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지금의 시대정신에 다양성이 중요한 키워드인 것이, 이 사회가 진화하면서 성장하는 것이라 믿기에 기쁘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기적인 동기와 선택적인 방책으로 다양성의 가치를 차용하는 사람들도 많아지는 것 같다. 다양한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관습과 규칙을 어기면서 다양성 하에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 이를 바로잡으려는 사람을 요즘 말로 ‘프로 불편러’ 취급을 하며 오히려 본인들이 피해자인 척을 하는 사람들의 출현에 혼란스러울 때가 많아졌다.
   다양성의 전제는 어우러져 살기 위함이고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권리를 짓밟는 것이라면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존중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 또한 막상 다양성에 대해 글을 쓰려고 하니 내 스스로가 얼마나 위선적인지 느껴져 부끄러운 마음이다. 내게 다양성이 중요해질수록,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을 포용하는 마음은 작아져 가는 것만 같아 어렵다.
   점점 더 복잡해지는 세상 속 우리에게 필요한 인재는 불확실성 가운데에서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과거의 성공 방정식이 더 이상 미래에는 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다른 방식을 적용할 수 있는 유연한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회사의 청소년 교육 사회 공헌 프로그램을 개발할 때 하드 스킬(hard skill) 이외에도 21세기 미래 인재가 소유해야 할 소프트 스킬(soft skill)인 4C 능력-창의력(creativity), 소통 능력(communication), 협업 능력(collaboration), 비판적 사고력(critical thinking)-등이 포함되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것들이 타인의 입장에서 상상해 보고 소통하는 것이 중요한 다양성 가치의 실현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나올 이야기들은 회사 생활 10년 차가 되던 해에 번아웃이 온 내게 휴식과 채움의 시간을 주기 위해서 경력직 행정학 석사 과정(Executive Master of Public Administration)을 밟았던 시기의 경험들이다. 언뜻 일관성이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경험 이후 내가 개발하고자 했던 것은 내가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상대를 배려하는 품격을 키우고,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문제 해결을 할 수 있는 다양성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다양성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맞닥뜨린 당혹스러움과 나와 너, 우리가 모두 철저하게 틀렸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한 교육의 순간들을 소개한다.
나는 내가 경험한 것에 대해서만 알 수 있다:
다양한 경험의 중요성
리더십 수업 중 조직에 변화를 주도하는 방법을 학습하는 과정에서 동기들과의 견해 차이로 서로를 외계인 보듯이 보며 날을 세웠던 경험을 잊을 수 없다.
   어떤 면으로는 나와 공통점이 있는 상대라고 해도, 나와 다른 이의 경험은 동일할 수 없고 우리의 생각이 온전히 같을 수는 없다. 아무리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노력을 해 본들 서로의 세상을 단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나는 이때 왜 다양한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이 경쟁력을 갖는지 절실히 체감했다.
   체인지 프로(Change Pro)라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으로 진행되는 이 수업에서 그룹원들은 함께 시뮬레이션 상황을 종료해야 하며 빠른 시간 내에 완료한 그룹이 더 좋은 점수를 받게 된다. MBA 교수들이 만든 기업을 배경으로 한 이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은 10여 년간 기업에 몸담고 있는 나의 영역, 나의 언어였다. 그런데 우리 팀은 처참하게 망했다. 시작부터 문제였다.

학습 프로그램 소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에서 제시하는 학습 문제와 이를 해결하는 방법을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문제
어떤 조직에 새로운 시스템을 적용하고자 한다. CEO는 새로운 시스템 적용을 원하지만 실무 조직이 준비가 되어 있는지 의문인 상태다. 실무자들은 이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리더십이 진정 의지가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갖고 있는 상태이다.
 
프로그램 실행 방법
CEO메모, 뉴스레터, 타운홀 미팅, 워크샵, 파일럿 실행, A와 B를 만나게 하기, 전문가 강의 등 실제 조직에서 실행하는 것들이 수단(Tactic)으로 주어지고 이를 사용하면 일정 시간이 차감되는 형태다. 120일 내에 조직원 24명이 변화에 동의하게 이끌어야 한다. 특정 단계에 도달할 때마다 어떤 사람들이 비공식적 네트워크로 이어져 있는지 등의 문제 해결에 필요한 추가 정보를 얻게 된다.
 
학습 목표
이 시뮬레이션을 통해 학습자는 조금 더 객관적으로 실제 조직에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 공식적인 수단뿐만 아니라 사적 네트워킹 활용과 같은 비공식적인 수단도 중요하며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톱다운(top-down)과 바텀업(Bottom-Up) 방식이 적재적소에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체득하게 된다.


체인지 프로 학습 프로그램 화면 구성
출처:https://www.learningways.com/changepro.html



그룹원들의 공통점

우리는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의지가 있었고, 이를 위해서는 점점 더 복잡해지는 세상의 문제를 여러 분야 사람들이 협력해서 풀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졌다.
   나의 학업 지원서 에세이에는 정부나 국제기구 등 다른 섹터와 협력할 상황이 많은데, 서로의 언어에 익숙하지 않아 결국 원하던 결과를 모두가 얻지 못하는 일이 많아서 다른 부문의 언어를 배우고 싶다는 지원 동기가 명백히 쓰여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지원 동기는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우리를 이 교실에서 만나게 했지만,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나 다른 경험을 거쳐 온 사람들이었다.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 자부심을 가질 만한 서로의 경험으로 인해 우리는 앞으로 이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서로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하고 날을 세우게 된다.

그룹원들의 차이점

내가 속해 있던 그룹의 구성원은 성별로는 여자 둘, 남자 넷, 인종으로는 백인 넷, 아시아와 남미인 각 1명이었고, 커리어 관점에서는 기업에서 일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내가 유일했고 나머지는 NGO, 외교부, 준정부기관, 국제기구에 몸담고 있었다.
   컨설팅을 포함해 여러 차례 이러한 프로젝트를 진행한 경험이 있던 나는 매우 자신 있게 가장 먼저 실무적 연관성이 큰 부서의 담당자 미팅을 해야 한다고 얘기했는데, 나머지가 ‘그 무슨 헛소리냐?’ 라는 눈빛으로 ‘CEO를 먼저 만나야지.’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실제 기업 현장에서도 많은 의사 결정 과정에서 황당한 경우가 많지만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는 연륜이 생긴 지 오래다. 그런데 함께 공부하는 공통점 많은 동기들이란 생각에 오히려 배신감과 충격이 컸는지, 나 또한 ‘니들 제정신이냐?’ 라는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어쨌든 이유를 들어 보니 프로젝트 오너인 CEO를 먼저 만나지 않으면 그가 무시당했다고 느낄 수도 있다는 것이며,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가장 자세한 조언은 그에게서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거였다. 나는 속으로 ‘무슨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며 “이미 문제의 지령에서 어디서부터 시작할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며, 그리고 최소한 CEO를 만날 거면 우선 CEO의 비서랑 약속부터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했지만, 그룹원들을 전혀 설득하지 못했다.
   첫 실행 버튼을 누르기까지 너무나 오랜 설전이 벌어졌는데, 5:1로 자기들 조직에서는 이러했다고 하니 나 혼자 이들을 설득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리고 정말 이게 무슨 대수라고, 굉장히 불편한, 서로를 부정당한 것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각 그룹의 진행 상황을 컴퓨터에서 모니터하던 교수님도 아무 진척이 없는 우리 그룹의 상황에 의아해하며 들어왔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퇴장하셨다.
   결국 우리의 첫 실행 수단은 CEO만나기였고, 나의 예상대로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 이 친구들이 그다음에도 CEO를 가장 먼저 만나야 한다는 자기들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 비서 만나기를 실행했다. 다시 한번 쓴맛을 보고 한 발짝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후에도 우리 그룹은 계속해서 의견 충돌이 있었고 우리 조는 꼴찌로 시뮬레이션을 마쳤다.

침몰 후의 깨달음

혼란 속에서 과정을 마치고 망연자실해 있는 나에게 교수님은 “공공 부문(public sector), 그리고 조직의 크기가 작은 경우에 그런 방식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라고 말씀하셨다.
   실제로 기업에서 일할 때 정부, NGO, 국제기구의 협업 제안도 많이 받지만 의사 결정의 속도가 굉장히 달라 함께 일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와중에 함께 진행하는 프로젝트들도 결국 원하는 성과를 얻지 못하고 서둘러 종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다음과 같은 일이 많이 벌어지는데, 예를 들어 상대 기관의 수장이 갑자기 담당하는 실무자를 건너뛰고 윗사람 혹은 최고 경영진에게 연락해서 서로의 신뢰를 깨 버리는 상황을 많이 목격했다.
   나는 그전까지는 이것이 개인의 성격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이 수업을 통해 이것이 섹터 간 언어, 즉 방식의 차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와 당신들의 경험이 다르다는 것, 당신의 세계에서는 통할지라도 다른 세계에서의 문법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진심으로 알고 실천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룹원의 반응을 듣고 난 후의 내가 좀 더 품위 있게 행동하여 나의 당황스러움이 조금 덜 티가 났더라면, 나의 동기들도 다른 섭리가 있다는 것을 조금만 빨리 인정했더라면 우리는 좀 더 서로를 배려하는 품격 있는 소통을 하며 시뮬레이션을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도 나는 그때의 좌절감, 아무도 설득할 수 없었던 순간을 떠올리며 나를 포함해서 모두가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되뇌이곤 한다. 내가 옳다고 믿어왔던 것, 내가 살아온 세상을 때로는 부정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자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를 머리로는 알아도 행동으로 나타내는 데에는 얼마나 큰 용기와 결심이 필요한 일일까?
모두에 대한 실망 후에 오는 깨달음: 소통의 중요성
갈등 관리(conflict management) 수업 때는 동기들과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경험을 했다. 무엇보다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는 열린 사람이 아닐 수 있다는 것, 경쟁 사회에서 훈련된 획일적인 방식이 내 피에 흐르고, 내가 원치 않은 모습을 답습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강생들을 3개의 그룹으로 나눠 다른 공간으로 분리한 후 각 그룹에 지령을 나눠 주고 다시 과제를 수행할 방에 모이게 한다. 각자 받은 지령은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그룹1) 모든 의자를 똑바로 서 있지 않도록 하라.
그룹2) 모든 의자를 세워라.
그룹3) 의자가 모두 연결될 수 있도록 하라.
공통) 과제 수행 방에 모인 이후 그 누구와도 대화는 금지이다.

   그다음에 벌어지는 상황은 다음과 같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바보 같을 줄은 몰랐다

우선 대다수, 약 90%의 사람들이 각자 맡은 지령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려고 한다. 다만 약 10%의 사람들은 처음부터 소극적인,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한다. 누군가 의자를 세우면 다른 지령을 받은 누군가가 바로 그것을 다시 눕힌다. 그러다 보면 특히 평소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사람들 중 체격 조건이 좋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감정이 고조되면서 몸싸움으로까지 번질 것만 같은 위험천만한 순간이 온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이것은 절대적으로 승자 독식 게임인 것처럼 보인다.
   이때 체격이 작은 사람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한 발짝 물러설 수밖에 없게 되고 처음부터 이미 자조적인 태도로 관전하던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이 상황을 멀찍이 떨어져 조망하게 되면서 이 문제가 윈윈(win-win) 게임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아하!’ 모멘트가 오게 된다. 격렬한 그룹이 잠시 몸을 추스리는 때를 틈타 누군가 한 명이 이 솔루션을 실행하여 다수에게 매우 충격적인, 허탈한 순간을 선사한다.
   다수의 사람들이 어떤 통상적인 관습에 빠져 있을 때, 세상의 문제를 푸는 것은 오히려 아웃사이더 같은 소수의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다양한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해 다시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경쟁 사회의 산물과 자기 인식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는, 지령을 받은 후 대다수가 아주 비장하게 과제를 수행할 방에 모이는데, 다양한 사람들일지라도 결국은 경쟁 사회 시스템에서 자라 온 사람들이어서 다른 그룹은 분명 나의 경쟁 상대고, 내 목적을 이루는 데 방해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탑재한 채 이겨야 한다는 마음을 너나 할 것 없이 갖게 된다는 점이었다.
   내가 방에 들어가자마자 다른 그룹에 속해 있던 수강생이 내게 ‘대체 이것이 뭐하는 것인고?’ 하는 표정으로 수화 몸짓으로 말을 걸어 왔다.
   나는 1초의 망설임 없이 이것을 저쪽 그룹에서 협의한 방해 공작이라고 생각했다. 거리에서 만나는 “도를 믿으세요?” 포교인 취급을 하며 당당하게 그녀를 상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방안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절정의 순간에 나에게 한번 더 몸으로 말하기를 시도했고, 나는 미소 짓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녀를 또 한번 지나쳤다.
   수업이 끝나고 유니세프에서 일하는 그녀에게 “나에게 왜 그랬냐? 그룹원들끼리 어떤 전략을 짠 거냐?”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다른 꿍꿍이 같은 것은 없었다고, 내가 다른 수업을 같이 들을 때 말이 잘 통했고, 그래도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에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몸짓으로라도 대화를 시도한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지령 자체에 대화를 하지 말라고 되어 있었지만, 경청을 잘하는 것이 나의 강점 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나는 민망했다. 심지어 그녀를 지나치며 굳게 마음을 먹고 상대 팀의 전략에 말려들지 않은 나를 칭찬까지 했으니 말이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두번씩이나 소통을 시도한 그녀의 용기있는 자세가 인상 깊었고, 대화를 할 수 없다는 그 지령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문제 해결에서 소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깨닫게 해 주었다.
내 자신을 확장할 기회를 선택하는 용기
음악을 업으로 삼지는 않았지만 세 살 때부터 지금까지 감상과 연주를 손에서 놓지 않은 터라 음악을 온몸의 세포로 느끼면서, 이보다 더 깊고 밀도 있게 음악을 느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하는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직접 해 보면서 나의 단언이 오만한 착각이었음을 깨닫고, 내 세계를 확장하는 귀중한 기회를 얻게 되었다.

다양한 관점에 눈을 뜨게 해 준 연출가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중 하나인 베를린 필하모닉이 소속된 재단은 시민들을 위해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연출가 피터 셀라스(Peter Sellars)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기> 라는 프로그램명을 보고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터 셀라스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다. 여전히 백인 중심적인 클래식 오페라의 영역에서, 90년대 초반에 스페인을 무대로 한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를 뉴욕 할렘의 흑인 쌍둥이 형제를 주인공으로 설정하여 충격을 주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오히려 이런 것을 자연스러운 오페라의 세계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클래식 음악계가 꼽은 21세기 클래식 연주 역사에 남을 무대라고 여겨지는 것들 중에 그가 연출한 바흐의 <마태 수난곡>이 있다.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연주에서 탈피하여, 연주자 상호 간 교감하고 관객과도 소통하며 하나 되는 연주를 보여 주는 그런 연출, 음악의 본질을 꿰뚫면서도 다양한 접근을 가능하게 하고 영감을 주는 그의 연출을 나는 좋아한다. 그렇기에 이와 비슷하게 연출한 <요한 수난곡>을 그가 왜, 어떻게 구상했는지 경험해 볼 수 있는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어 기뻤다.

일반적으로는 정적으로 연주되는 작품
출처: 콘서트헤보(Concertgebouw) 오케스트라 유튜브1)


연극적, 동적으로 연출한 수난곡 공연 모습
출처: 베를린 필하모닉 유튜브2)



창피함을 내려놓고 말랑해지기 위해 용기를 내다

이 프로그램은 내가 오랫동안 전혀 하지 않았던 것들을 하게끔 독려했는데, 바로 노래를 따라 부르고 꽤 과격한 율동을 하는 것이었다. 언제부턴가 교육 프로그램의 아이스브레이킹(Icebreaking) 등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율동 같은 것을 나는 거의 따라 하지 않는 사람들 중 한 명이 되었다. 이유를 확실히 말하기는 힘든데, 쿨해 보이지 않고 어차피 어릴 때 다 해 본 것이다, 굳이 지금 와서 또 해 봤자 그게 그거다, 피곤하다 대충 살자, 이러지 않아도 나의 예민한 감각으로 느낄 건 모두 느낀다, 결론적으로 어색하고 민망하고 창피하고 머쓱한 이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피터 셀라스가 연출한 <요한 수난곡>의 첫 도입부는 합창단이 무대에 누운 채 앞으로 다가올 수난을 응축한 것 같은 불안한 기운이 엄습하는 분위기의 음악에 맞춰 지렁이처럼 꿈틀대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후 음악과 가사에 맞춰 다양한 동작을 행한다. 대략 난감했지만, ‘이왕 이렇게 온 것, 이번만큼은 한번 해 보자.’라는 마음으로 참여를 했다. 꿀렁꿀렁 최선을 다해 몸을 움직이고, 음악과 가사에 맞는 동작과 함께 감정과 에너지를 평소보다 과장된 느낌으로 발산했다.


내가 따라 했던 <요한 수난곡>의 공연 모습
출처: 베를린 필하모닉 유튜브3)



   처음에는 정말 민망하고 부끄러웠는데, 웬걸! 그 순간을 넘어가니 수면 아래에 잠겨 있던 딱딱한 사고와 단단함이 허물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온몸의 감각이 각성하고 다양한 모든 것을 편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처럼 세포가 깨워지는 듯한 느낌을, 최소한 사회생활 이후에 그 정도로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뒤통수를 한 대 강하게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식으로 음악과 나 자신을 더욱더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는 경험을 해 보기 전까지는 상상도 못 했다. 나 스스로 종착점에 와 있다는 생각을 가졌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전까지 이러한 참여는 그저 나의 가벼운 의지에 달린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이것은 꽤나 큰 용기가 필요했던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발적으로 이곳에 온 다양한 참가자들의 열정적인 에너지, 아마도 여기를 나가면 다시는 만나지 않을 사람들일 수 있다는 사실이 선사하는 자유 등이 맞물려 내가 조금 더 용기를 내게끔 도운 것일까?
   이후에 나는 내게 중요한 사람들, 그리고 어린아이들은 무조건 이러한 교육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수면 아래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고 표현해본 사람들이 타인의 다양한 감정을 슬기롭게 배려하는 방법을 더욱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하여 다양한 사람들이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음악을 소리 내어 따라 부르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 전체를 써서 감정을 표현하는 경험을 한다면 조금 더 서로를 이해하는 세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다양성 교육을 꿈꾸다

한국에 돌아와서 다른 임직원들과도 이러한 경험을 공유하고 싶어서 이를 적용하고 응용한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우물 안에서 한 방향만 바라보던 환경에서 탈피해 공감 능력을 극대화하고 이후에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면서 내 방식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그런 프로그램을 기획하면서 걱정이 되기도 했다. 조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양성을 이해하고 공감 능력이 높은 것보다 오히려 타인의 감정에 무덤덤해서 자기 이익을 관철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편이 유리한 것 같아 씁쓸할 때가 종종 있다. 따라서 굳이 이런 교육을 통해 감수성을 높여,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 내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내게 간절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간절할 수 있다는 것을 공감하는 품격을 갖춰 봤자 세상살이 더 힘들어지는 것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도 있었다. 어쨌든 아쉽게도 기획 중 코로나로 인해서 프로그램 실행은 하지 못한 상황이지만, 마음에 드는 제목까지 생각해 놓은 이 프로그램을 언젠가 세상에 꼭 선보이고 싶다.
끝인사 : 소수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마지막으로 태국 소수 민족과 함께한 임직원 해외 봉사 프로그램 오프닝 스피치 중 일부를 공유하는 것으로 여러분을 응원하는 나의 마음을 전달하고 싶다.
   유네스코 태국지부와 협업한 이 프로그램은 담당자간 소통 방식 및 섹터 간의 업무 방식의 차이 등으로 인해 우여곡절이 많았다. 또한 같은 회사일지라도 참여하는 임직원들과 프로그램 담당자들 사이에 어느 정도의 거리감은 필연적이지만, 이때는 특히 많은 임직원들이 유네스코에서 원했던 해커톤(hackathon)4) 방식에 회의적이어서 더욱 어려웠다.
   현장에 도착한 첫 날까지도 서로를 충분히 신뢰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사람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 준비했던 이 스피치를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공감해주었고, 이후에 조금 더 빠르게 서로를 믿고 대화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일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할 수 있었다.
   다양성에 진심인 사람들, 아직은 대한민국에서 소수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차별 없이 존중할 줄 아는 사람들이 리더의 자리에 많기를 소망한다.
   선택이었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든 간에 결코 쉽지 않은 다양성의 가치를 실천하는 삶이 여러분이 원하는 성공을 향한 나침반이자 디딤돌이면 좋겠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서로의 삶을 다채롭게 확장하고, 나를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해 주는 동지들을 만나는 행운이 깃들기를 바란다. 만나지는 않았지만 내 이야기에 공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 또한 기쁘고 든든할 것 같다.

삼성 원위크 X 유네스코 ‘태국 소수 민족 어려움 함께 해결해요’ 디지털 솔루션 해커톤 행사
출처: 삼성전자 뉴스룸 5)


Good morning minorities? 소수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제가 말한 소수자는 여러분 중 누구를 지칭한 말일까요?
소수자라는 말이 멸시와 차별을 받는 열등한 이방인에게 주로 붙는 말이라서, 여러분은 소수자에 속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시나요?
유네스코의 제안 ‘소수 민족 여성 강화(Empower Ethnic Minority Women)’는 제목부터 제 관심을 끌었습니다. 사회학에서 소수 집단은 지배적인 사회 집단의 구성원과 비교하여 상대적인 불이익을 경험하는 사람의 범주를 나타낸다고 하는데 오늘 저는 이 단어를 사회학의 맥락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처음 나오는 정의, ‘더 작은 수’ 에서 시작하려고 합니다. 저와 제 동료는 삼성전자에서 글로벌 사회 공헌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관리하는 여성으로서 기술 업계에서는 여전히 여성이 소수입니다. 여기 이 자리에 10:1의 경쟁률을 뚫고 앉아 있는 30명의 임직원들은 여러분들에게 기술적인 지식과 함께 기업가 정신을 전달하기 위해 오기 전부터 100시간 이상의 개인 시간을 투자하고, 이곳에 오기 위해 5일의 개인 휴가를 썼습니다. 한국에 있는 10만 명의 임직원 중 이들은 소수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만나기로 선택한 몽족의 소수 민족 여성들에게 존경을 표합니다. 새로운 사람들과 배움에 나 자신을 열기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소수 민족인 여러분이 전통 수공업품과 무형 문화를 보존하는 것은 단지 여러분만을 위해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류를 위해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의 역사에 대해 표현하는 다양성을 포함해 우리 스스로를 이해하는 다양한 방식을 알려 줍니다. 또한 여러분의 작품 뒤에 숨겨진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현대 사회의 정서적 공허함을 채울 수 있는 양분이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다양하고 특별한 사람들을 한데 모을 수 있게 한 이 자리의 다양한 파트너 기관들에도 정말 자랑스럽고, 고맙다는 마음을 표합니다.
다시 한번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소수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특별한 여러분, 좋은 아침입니다.
산 것조차 기억나지 않는 여행지에서의 기념품들 사이에, 드물게 인생이란 여행길에서 평생 동안 잘 보이는 곳에 장식해 두고 싶은 기념품을 만나기도 합니다. 당신이 용기를 내어 자기 자신을 마주하고 장벽을 허물며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던 그 순간, 한 사람으로서의 한계를 벗어나 동료들과 함께 유연하게 더욱 크고 강한 세계를 함께 만들어 내려고 노력한 위대한 순간, 그런 순간들로 되돌아가게 하는 그런 기념품 말이죠.
바로 지금, 서로 다른 세상을 품은 특별한 소수자들이 만났습니다.
이 일주일 동안 여러분들이 원팀이 되어 앞으로도 당신이 가장 필요할 때 용기를 줄 수 있는 그런 기념품과 같은 시간을 만들어 나가시길 응원합니다.
목차
기업은 왜 다양성이 필요한가?
나의 세상을 부정하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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