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 수업 중 조직에 변화를 주도하는 방법을 학습하는 과정에서 동기들과의 견해 차이로 서로를 외계인 보듯이 보며 날을 세웠던 경험을 잊을 수 없다.
어떤 면으로는 나와 공통점이 있는 상대라고 해도, 나와 다른 이의 경험은 동일할 수 없고 우리의 생각이 온전히 같을 수는 없다. 아무리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노력을 해 본들 서로의 세상을 단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나는 이때 왜 다양한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이 경쟁력을 갖는지 절실히 체감했다.
체인지 프로
(Change Pro)라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으로 진행되는 이 수업에서 그룹원들은 함께 시뮬레이션 상황을 종료해야 하며 빠른 시간 내에 완료한 그룹이 더 좋은 점수를 받게 된다. MBA 교수들이 만든 기업을 배경으로 한 이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은 10여 년간 기업에 몸담고 있는 나의 영역, 나의 언어였다. 그런데 우리 팀은 처참하게 망했다. 시작부터 문제였다.
학습 프로그램 소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에서 제시하는 학습 문제와 이를 해결하는 방법을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문제
어떤 조직에 새로운 시스템을 적용하고자 한다. CEO는 새로운 시스템 적용을 원하지만 실무 조직이 준비가 되어 있는지 의문인 상태다. 실무자들은 이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리더십이 진정 의지가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갖고 있는 상태이다.
프로그램 실행 방법
CEO메모, 뉴스레터, 타운홀 미팅, 워크샵, 파일럿 실행, A와 B를 만나게 하기, 전문가 강의 등 실제 조직에서 실행하는 것들이 수단(Tactic)으로 주어지고 이를 사용하면 일정 시간이 차감되는 형태다. 120일 내에 조직원 24명이 변화에 동의하게 이끌어야 한다. 특정 단계에 도달할 때마다 어떤 사람들이 비공식적 네트워크로 이어져 있는지 등의 문제 해결에 필요한 추가 정보를 얻게 된다.
학습 목표
이 시뮬레이션을 통해 학습자는 조금 더 객관적으로 실제 조직에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 공식적인 수단뿐만 아니라 사적 네트워킹 활용과 같은 비공식적인 수단도 중요하며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톱다운(top-down)과 바텀업(Bottom-Up) 방식이 적재적소에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체득하게 된다.
체인지 프로 학습 프로그램 화면 구성
출처:https://www.learningways.com/changepro.html
그룹원들의 공통점
우리는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의지가 있었고, 이를 위해서는 점점 더 복잡해지는 세상의 문제를 여러 분야 사람들이 협력해서 풀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졌다.
나의 학업 지원서 에세이에는 정부나 국제기구 등 다른 섹터와 협력할 상황이 많은데, 서로의 언어에 익숙하지 않아 결국 원하던 결과를 모두가 얻지 못하는 일이 많아서 다른 부문의 언어를 배우고 싶다는 지원 동기가 명백히 쓰여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지원 동기는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우리를 이 교실에서 만나게 했지만,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나 다른 경험을 거쳐 온 사람들이었다.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 자부심을 가질 만한 서로의 경험으로 인해 우리는 앞으로 이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서로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하고 날을 세우게 된다.
그룹원들의 차이점
내가 속해 있던 그룹의 구성원은 성별로는 여자 둘, 남자 넷, 인종으로는 백인 넷, 아시아와 남미인 각 1명이었고, 커리어 관점에서는 기업에서 일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내가 유일했고 나머지는 NGO, 외교부, 준정부기관, 국제기구에 몸담고 있었다.
컨설팅을 포함해 여러 차례 이러한 프로젝트를 진행한 경험이 있던 나는 매우 자신 있게 가장 먼저 실무적 연관성이 큰 부서의 담당자 미팅을 해야 한다고 얘기했는데, 나머지가 ‘그 무슨 헛소리냐?’ 라는 눈빛으로 ‘CEO를 먼저 만나야지.’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실제 기업 현장에서도 많은 의사 결정 과정에서 황당한 경우가 많지만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는 연륜이 생긴 지 오래다. 그런데 함께 공부하는 공통점 많은 동기들이란 생각에 오히려 배신감과 충격이 컸는지, 나 또한 ‘니들 제정신이냐?’ 라는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어쨌든 이유를 들어 보니 프로젝트 오너인 CEO를 먼저 만나지 않으면 그가 무시당했다고 느낄 수도 있다는 것이며,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가장 자세한 조언은 그에게서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거였다. 나는 속으로 ‘무슨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며 “이미 문제의 지령에서 어디서부터 시작할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며, 그리고 최소한 CEO를 만날 거면 우선 CEO의 비서랑 약속부터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했지만, 그룹원들을 전혀 설득하지 못했다.
첫 실행 버튼을 누르기까지 너무나 오랜 설전이 벌어졌는데, 5:1로 자기들 조직에서는 이러했다고 하니 나 혼자 이들을 설득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리고 정말 이게 무슨 대수라고, 굉장히 불편한, 서로를 부정당한 것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각 그룹의 진행 상황을 컴퓨터에서 모니터하던 교수님도 아무 진척이 없는 우리 그룹의 상황에 의아해하며 들어왔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퇴장하셨다.
결국 우리의 첫 실행 수단은 CEO만나기였고, 나의 예상대로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 이 친구들이 그다음에도 CEO를 가장 먼저 만나야 한다는 자기들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 비서 만나기를 실행했다. 다시 한번 쓴맛을 보고 한 발짝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후에도 우리 그룹은 계속해서 의견 충돌이 있었고 우리 조는 꼴찌로 시뮬레이션을 마쳤다.
침몰 후의 깨달음
혼란 속에서 과정을 마치고 망연자실해 있는 나에게 교수님은 “공공 부문
(public sector), 그리고 조직의 크기가 작은 경우에 그런 방식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라고 말씀하셨다.
실제로 기업에서 일할 때 정부, NGO, 국제기구의 협업 제안도 많이 받지만 의사 결정의 속도가 굉장히 달라 함께 일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와중에 함께 진행하는 프로젝트들도 결국 원하는 성과를 얻지 못하고 서둘러 종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다음과 같은 일이 많이 벌어지는데, 예를 들어 상대 기관의 수장이 갑자기 담당하는 실무자를 건너뛰고 윗사람 혹은 최고 경영진에게 연락해서 서로의 신뢰를 깨 버리는 상황을 많이 목격했다.
나는 그전까지는 이것이 개인의 성격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이 수업을 통해 이것이 섹터 간 언어, 즉 방식의 차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와 당신들의 경험이 다르다는 것, 당신의 세계에서는 통할지라도 다른 세계에서의 문법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진심으로 알고 실천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룹원의 반응을 듣고 난 후의 내가 좀 더 품위 있게 행동하여 나의 당황스러움이 조금 덜 티가 났더라면, 나의 동기들도 다른 섭리가 있다는 것을 조금만 빨리 인정했더라면 우리는 좀 더 서로를 배려하는 품격 있는 소통을 하며 시뮬레이션을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도 나는 그때의 좌절감, 아무도 설득할 수 없었던 순간을 떠올리며 나를 포함해서 모두가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되뇌이곤 한다. 내가 옳다고 믿어왔던 것, 내가 살아온 세상을 때로는 부정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자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를 머리로는 알아도 행동으로 나타내는 데에는 얼마나 큰 용기와 결심이 필요한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