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구성원 관점의 기업 혁신 사례
제2차세계대전 중 MIT에는 군사 기술 개발을 목적으로 ‘Building 20’이라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공간에서 무려 9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으며 많은 혁신 기술이 개발되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 이유로 다양성을 꼽을 수 있다. 왜냐하면 칸막이가 없는 공간에서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모여 학제 간 경계를 허문 조직을 구성했기 때문이다. 특히 미로와 같이 설계된 연구실과 복도 탓에 자신의 연구와 무관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우연히 만날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다양성을 통한 통섭
(consilience) 차원에서의 연구가 가능하게 되었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연구실은 항상 문이 닫혀 있고 보안이 중시되는 폐쇄적 공간이지 않은가?
1979년, 미국의 한 디자인 회사에서 근무하던 26살의 패트리샤 무어
(Patricia Moore)는 상품 디자인 관련 회의 시 상사에게 크게 꾸지람을 들었다. 자신과 함께 살고 있던 할머니가 냉장고를 힘겹게 여는 모습을 보고 근력이 약한 노인들이 쉽게 열 수 있는 손잡이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냈기 때문이다. 당시 기업 입장에서 노인들은 수익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통념으로 인해 패트리샤 무어의 의견은 바로 묵살된 것이다. 이에 회의감을 느낀 그녀는 회사를 그만두고 얼굴에 주름 분장을 한 것에 더하여 물리적 도구를 이용해 눈, 귀, 허리, 다리 등을 실제 노인처럼 불편한 상태로 만든 채, 무려 3년 동안 미국과 캐나다의 전역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러한 체험을 토대로 상품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널리 사용되고 있는 물 끓는 소리가 나는 주전자, 양손잡이 가위와 칼, 저상 버스 등이다. 그동안 그 어떤 기업도 노인의 관점을 기업 활동에 연계하는 다양성이 없었기에 만들지 못했던 것들이다.
한편, GE Healthcare는 MRI 스캐너의 외관 및 검진 과정을 해적·우주·정글·사파리 등의 주제별 체험 과정으로 새롭게 디자인하였다. 또한 어린이들에게 검진이 아닌 모험의 여정
(예를 들면, 배에 올라타 있는 동안 움직이지 않아야 해적들에게 들키지 않는다고 얘기해 주거나 MRI 스캐너의 굉음이 초항속 모드라고 설명)을 안내하였고 항해
(검진)를 마치면 검사실 한편의 상자
(일명 해적 가슴)에서 작은 보물을 하나씩 가져갈 수 있게 하였다.
그 결과, 어린이들은 부작용이 우려되는 약품의 도움 없이 MRI 검진을 받을 수 있었고
(기존에는 수면제나 마취제 적용 비율이 80%), 병원 측에는 MRI 검진을 받는 어린이 환자의 수가 크게 증가하여 수익에 도움이 되었다. 이 역시 GE Healthcare가 어린이의 관점이라는 다양성을 통해 이루어 낸 성과이다.
해적선 모양의 MRI
출처: GE Healthcare
시각장애인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상품도 있다. 기존의 스마트 워치들과 확실히 차별화된 고객 가치
(customer value proposition)를 담고 있는 세계 최초의 점자 스마트 워치이다. 시각장애인들은 일반적으로 음성으로 듣는 시계를 착용해 왔다. 그런데 음성으로 시간을 알려 주다 보니, 강의 시간이나 실내 활동 시 타인에게 불편을 주고 장애 사실도 드러나기 때문에 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점자를 활용한 닷 워치
(Dot Watch)이다. 닷 워치는 시계 표면을 터치하면 전기 신호를 통해 돌기가 움직여 점자를 표시한다. 초 단위까지 시간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블루투스를 통해 스마트폰과 연결하여 전화 및 문자·날씨·뉴스·내비게이션·e-Book·이미지 등을 전부 점자로 바꾸어 수신할 수 있다. 단순히 시간 인지를 넘어 스마트 워치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세련된 디자인, 사회적 약자와 공감하고 싶어 하는 밀레니얼
(millennial) 세대의 니즈 덕분에 비시각장애인들로 고객층이 확대되었다.
점자 스마트 워치
출처: 닷워치
CJ제일제당은 페닐케톤뇨증
(Phenylketonuria)을 앓고 있는 자녀를 둔 직원의 아이디어를 수용하여 저단백 햇반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했다. 이는 단백질 함유량을 일반 햇반의 10% 수준으로 낮추어 선천성 대사 질환을 앓는 환자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MCU: Marvel Cinematic Universe)의 영화, <이터널스>를 보면 그 어떤 영화에서보다도 다양한 인종의 히어로가 등장한다. 더군다나 주요 히어로 중에는 동성애자도 나온다. MCU의 다양성에 대한 포용력을 잘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디즈니의 많은 애니메이션 작품들 속 주인공도 과거에 천편일률적이었던 금발의 백인에서 흑인, 아시아인, 라틴인, 성소수자 등으로 다양성을 넓혀 가고 있다.
기업 민주주의 관점의 기업 혁신 사례
우리나라의 많은 기업에는 신입 사원에 대한 사수
(射手) 문화와 위계질서 문화가 존재한다. 이것은 선배들이 체득한 업무 경험과 지식을 빨리 익히도록 하는 장점이 있지만, 일종의 군대 문화와 유사하여 상사에 대한 암묵적인 복종심을 강요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리고 상사의 의견이나 방식이 옳다는 통념을 공유하게 된다. 이렇게 축적된 기업 문화는 의사 결정의 상위층으로 갈수록 더욱 심화한다. 의사 결정권자가 지시한 것은 타당성을 논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따른다. 비록 그것이 잘못된 지시 사항일지라도 타당한 논리와 근거로 다른 의견을 내는 경우가 드물다. 그리고 최고 의사 결정자가 바뀌면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존의 방향성, 실행 방안, 수행 조직이 폐기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조직 문화의 가장 큰 폐단은 구성원들이 영혼 없이 기계적으로 일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것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맥락적 이해 없이 획일적으로 처리하므로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다가 결국 기업은 제자리걸음만 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 기인한다. 하나는 경영학 연구를 통해 밝혀진 대리인 비용 문제
(agency problem)이다. 전문 경영인은 때론 기업의 장기적인 목표보다는 단기적 목표를, 근본적 문제 해결보다는 표면적 문제 해결을 원하는 경향이 있다. 개인의 이익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의 심리 현상이다.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
(Stanley Milgram)은 1963년에 밀그램 효과
(Milgram Effect)를 알리며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그는 인간의 권위에 대한 복종 실험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권위자의 부당한 지시에 옳고 그름의 가치 판단 기준을 망각했는지를 알렸다. 안타깝지만 밀그램 효과는 부당함의 정도 차이가 있을 뿐 아직도 많은 조직에서 현재 진행형이다. 물론 세상은 부당한 권위에 순응하는 다수의 사람들보다 그것에 도전하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더 나아지고 있다.
그럼 기업 민주주의 관점에서 CEO의 역할은 무엇일까? CEO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어야 한다. CEO는 조직 간 사일로 효과
(silo effect)가 발생하지 않도록 각 기능을 조율하고 적재적소에 자원을 배치하여 사업의 장기적인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하지만 일부 CEO들은 마케팅, 개발, 생산, 인사, 홍보 등 각 가치 사슬
(value chain) 에 대한 과도한 관여와 세세한 영역에 대한 의사 결정에 집중하다 보니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는 오류를 범한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모든 악기를 연주할 수 없듯이, CEO도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위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기업의 예를 들어 보자. 한때 전통만을 중시하다 매출이 30% 이상 급감하는 위기에 처했던 구찌
(Gucci)는 ‘그림자 위원회’
(의사 결정이 필요한 중요 사안에 대해 고위 경영진들과 토론 후, 30대 미만의 젊은 사원들의 의견을 듣고 최종 의사 결정하는 리버스 멘토링(reverse mentoring) 제도로서 여타 기업들이 운영하는 복지 제도 개선 차원의 위원회와 다름)를 도입하여 밀레니얼 세대를 공략하기 위한 과감한 변신을 꾀했다. 이를 통해 한동안 고루하고 그저 따분한 명품 브랜드로만 여겨지던 구찌는 밀레니얼 세대가 가장 좋아하는 패션 브랜드로 탈바꿈했다. 매출은 2017년을 기점으로 매년 폭발적으로 성장했으며, 35세 이하의 젊은 고객층이 매출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명품 브랜드 최초의 온라인 판매 채널 오픈, O2O
(Online to Offline) 방식의 구찌 플레이스 구축, 동물의 모피를 이용한 옷 생산 금지 등 그림자 위원회를 통해 이루어 낸 성과들이 꽤 많다.
어떤 면에선 기업의 민주주의가 정치나 사회의 민주주의보다 뒤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정치나 사회적 이슈에 대해 개인 의견을 밝힌다고 해서 생업에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은 낮지만, 기업에서의 위계질서를 벗어난 소신과 행동은 설령 그것이 옳다고 해도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기업 민주주의가 곧 기업의 성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기업 민주주의가 앞서 구찌의 그림자 위원회나 EU 기업들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노동자의 경영 참여 등 꼭 거창한 제도로 발현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직급·직함·나이라는 상하 관계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자유로운 의견 개진 문화, 누구든 잘못된 것에 대해선 직언하고 그것이 타당하다면 누구의 의견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 그리고 구성원들에게 비전과 가치를 공유하고 심어 줄 수 있는 문화, 그것이 기업 민주주의의 근본이다. 최근 직장 내 밀레니얼 세대가 늘어나자 많은 기업들이 수평 문화를 강조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단지 캠페인으로만 그치는 것은 왜일까? 기업 민주주의는 CEO와 경영진 스스로 열린 의사 결정 과정을 보여 주지 못하면 절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이 처한 현실처럼 기업 내 대부분의 중요한 문제들은 근본적 원인을 꺼내지 않은 채 표면적 원인들만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기업은 재무적 성과를 위해서는 그 어떤 곳보다 빠르게 변할 수 있는 조직이다. 그러므로 생산성 차원에서 다양성이라는 기업 민주주의를 바라본다면 그것은 가치 사슬의 혁신을 이끄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통념 깨기 관점의 기업 혁신 사례
미국에는 2010년에 설립되어 온라인으로 안경을 판매하는 ‘와비 파커
(Warby Parker)’라는 기업이 있다. 와비 파커가 사업을 시작하기 전, 거의 모든 전문가들은 그 사업성에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가졌다. 심지어 창업자들을 가르쳤던 저명한 경영학자조차도. 하지만 모두의 통념을 깨고 와비 파커는 안경 업계의 넷플릭스라 불리며 현재도 사업을 잘 영위하고 있다. 이 회사는 ‘home-try-on’ 방식을 도입하여 고객이 집에서 마음에 드는 안경을 써 보고 살지 말지 결정하도록 하였고, 절감된 오프라인 매장 운영비를 저렴한 상품 가격으로 치환하여 고객 가치를 실현하고 있다.
앞서 코닥의 사례를 언급하였다. 이번에는 동종 업계 경쟁사였던 후지필름
(Fuji Film)의 사례를 살펴보자. 후지필름의 CEO인 고모리 시게다카
(古森重隆)는 전통적인 카메라 필름 사업이 어려워질 것임을 예측하고 기존의 ‘타도 코닥’에서 ‘탈
(脫) 필름’으로 전략적 방향을 재설정했다. 특히 자사
(自社)의 핵심 역량을 철저히 분석하여 자신들이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냈고, 이를 통해 새로운 사업 기회를 만들었다. 우선 기존에 자신들이 만들던 필름의 구조와 LCD TV의 편광 필름 구조가 유사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TAC
(Tri-Acetyl Cellulose) 라는 것을 만들어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후지필름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아스타리프트
(Astalift)라는 상품도 개발했다. 아스타리프트는 얼굴의 주름을 방지하는데 효과적인 화장품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언뜻 보면 기존의 핵심 역량과 전혀 무관한 상품 같지만 필름의 주성분인 콜라겐이 피부 노화 방지에 효과적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기존의 핵심 역량을 전이한 것이다. 그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제약 산업에 진출하여 아비간
(Avigan)이란 약품을 만들었다. 이 약품은 원래 조류 인플루엔자 치료를 목적으로 만들어졌는데, 훗날 에볼라 바이러스 치료에 탁월한 효과가 입증되면서 제약 시장에서도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어떻게 이런 약까지 만들 수 있었을까? 후지필름은 수만 가지의 화학품을 다뤄 본 경험을 토대로 제약이 화학 물질과 관련이 깊다는 점을 십분 활용한 것이다. 후지필름은 상품을 기획하고 개발할 때, 핵심 역량의 전이라는 다양성을 마치 플랫폼처럼 확장하여 지속 가능 경영을 실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