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다양성에 관한 소고
조은주
전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최근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화제가 되고 있다. 자폐 스펙트럼의 변호사를 주인공으로 한 이 드라마를 두고 많은 이야기가 오간다. 회전문 지나는 것을 어려워하고 타인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며 종종 반향언어를 사용하는 이 ‘낯선’ 존재는 이 사회가 우영우에게 어떤 곳인지를 우영우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한편에서는 이 드라마가 장애인의 현실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며 지극히 예외적인 가상의 인물을 내세운 판타지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그 비판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하지만 장애인 이동권 시위가 아무리 이슈가 되어도 장애인의 시선을 취해 볼 상상력을 갖추지 못하는 이 사회에서, ‘우영우의 시선으로’ 이 사회를 바라볼 계기가 판타지 없이 과연 주어질 수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되기도 한다.
   ‘장애인’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부르기는 하지만, 사실 그토록 서로 다양한 특징과 제각기 다른 어려움을 가진 존재들을 하나로 뭉뚱그려 ‘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이야말로 지극히 ‘비장애인’의 시선일지 모른다. 내가 수업에서 만난 장애인 학생들은 저마다 너무도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나는 종종 장애인과 장애인 사이의 차이가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차이보다 더 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곤 했다. 그런 점에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3화에 등장한 김정훈의 존재는 각별한 의미가 있다. 아름답고 비현실적인 이 드라마는 불쑥 우영우를 향한 시청자들의 공감과 애정이 김정훈을 향해서도 똑같이 작동할 수 있겠냐는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우영우를 보면서 ‘자폐 스펙트럼’에 대해 알게 됐다고 오해하지 말라고, 비장애인이 그러하듯이 같은 ‘자폐 스펙트럼’ 안에도 우영우와 김정훈처럼 저마다 다른 환경에 처해 있는 전혀 다른 특징과 성격을 가진 다양한 존재들이 있다고 말했다.
   ‘다양성’이 화두가 될 때마다 사실 나는 일종의 우려나 불안 같은 것을 느낀다. 왜냐하면 다양성이라는 말이 너무 아름답게 들리기 때문이다. 그 말이 아름다운 만큼 종종 너무 쉽게 말해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양성이라는 말이 품는 세계에는 왠지 엉뚱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우영우까지만 존재할 수 있을 것 같다. 힘이 세고 의사소통이 힘든 거구의 김정훈이나 장애인 이동권 시위에 나선 장애인에게, 그 다양성의 세계는 문을 열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하여 눈만 뜨면 보이는 수많은 갈등과 적대, 폭력의 차원들을 ‘다양성’이라는 아름다운 단어가 희미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걱정스럽다. 뿐만 아니라 다양성을 인정한다거나 다양성을 포용한다거나 할 때 그 인정과 포용의 주체는 누구이며 대상은 누구인가의 문제는 종종 누락된다. 그러니 다양성에 대해 이야기하면 할수록 인정과 포용의 주체와 대상 사이의 간극이 더 벌어지게 될 위험을 생각하게 되곤 한다.
   가족의 다양성 역시 마찬가지다. 최근 가족의 다양성은 가족 관련 법과 제도는 물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정책을 논할 때 종종 언급되는 주제다. 그러나 ‘다양성’이라는 이름 아래 포괄할 수 있는 다양성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는 논쟁적인 문제다. 조손가족이나 한부모가족을 떠올리면서 가족의 다양성을 긍정하는 사람이 동성애로 이루어진 가족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갖기도 한다. 혼인과 무관한 동거에 우호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이 비혼 동거 관계에 어떤 권리를 얼마만큼 부여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는 경우도 많다. 다양성이라는 말은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피상적일 수 있으며, 이 무수한 갈등과 첨예한 쟁점들을 직시하기보다는 피해 가게 만들 위험이 있다.
   중요한 것은 장애인에 관해 이야기할 때나 가족에 관해 이야기할 때나 주어져 있는 현실 자체가 이미 다양하다는 점이다. 다양성은 인정이나 포용의 차원, 규범이나 지향의 차원이기 이전에 사실의 차원이다. 사람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정부의 정책이나 법과 제도가 포용하든 포용하지 않든, 편견이나 거부가 줄어들든 줄어들지 않든, 이미 사람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다양하게 존재하고 다양하게 관계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정책과 가족의 다양성
2021년 4월 27일, 여성가족부는 ‘제4차 건강가정기본계획’을 발표했다. 2005년 1월부터 시행된 ‘건강가정기본법’에 따라 여성가족부 장관은 중앙행정기관의 장과 협의하여 가족정책의 근간이 되는 건강가정기본계획을 5년마다 수립해야 한다. 이 기본계획을 바탕으로 각 중앙행정기관의 장과 지방자치단체의 장은 ‘건강가정시행계획’을 수립 및 시행·평가해야 하며, 이 시행 계획과 추진 실적을 매년 여성가족부 장관에게 제출하게 되어 있다. 2006년에 처음 발표된 제1차 기본계획에서 제4차 기본계획에 이르기까지 건강가정기본계획의 정책 비전과 목표는 조금씩 변화해 왔다. 크게 보자면 ‘가족 구성원 내부’의 평등한 관계를 강조하는 방향에다 점차 ‘가족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방향이 더해지는 변화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2021년의 제4차 기본계획은 가족의 다양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제4차 건강가정기본계획은 ‘모든 가족, 모든 가족 구성원을 존중하는 사회’라는 비전과 함께 ‘가족 다양성 인정’, ‘평등하게 돌보는 사회’라는 정책 목표를 제시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세상 모든 가족을 포용하는 사회 기반 구축’, ‘모든 가족의 안정적 생활 여건 보장’, ‘가족 다양성에 대응하는 사회적 돌봄 체계 강화’, ‘함께 일하고 돌보는 사회 환경 조성’이라는 4개 정책 영역을 설정하고 각 정책 영역별로 총 11개 정책 과제를 마련했다. 11개 정책 과제 중 첫 번째가 ‘가족 다양성을 수용하는 법·제도 마련’이었던 것을 보면, 제4차 기본계획에서 가족의 다양성이 얼마나 핵심적인 위상을 차지하는지 알 수 있다. 두 번째 정책 과제 역시도 ‘가족 다양성 인식과 평등한 가족 문화 확산’으로 설정되어 있다.

출처: 여성가족부, 건강가정기본계획(제1차~제4차)에서 주요 내용을 간추려 재구성함


   이처럼 제4차 기본계획이 가족의 다양성에 초점을 둠으로써 많은 주목을 받기는 했지만, 가족의 다양성에 관한 관심이 이전까지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제3차 기본계획에서도 이미 양대 정책 목표 중 하나가 ‘다양한 가족의 삶의 질 향상’이었다. 사실상 건강가정기본계획이 처음 수립된 2006년부터 가족의 다양성은 얼마나 명시적으로 언급되거나 반영되었는가와는 별개로 이미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전제로 작동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가령 2006년에 발표된 제1차 건강가정기본계획도 가족 정책 추진 배경으로 ‘가족의 변화’라는 요소를 꼽았으며, 가족의 규모와 형태는 물론 가족의 기능이 변화하고 가족 가치관이 변화하면서 가족 정책에 대한 새로운 요구가 증대되고 있다는 점을 기본계획 수립의 출발점으로 다루고 있었다. 실은 건강가정기본계획만이 아니라 여러 논쟁 끝에 2003년 12월에 건강가정기본법이 국회를 통과하여 2004년 2월 9일 제정된 배경에도 ‘가족의 변화’가 있었다.
   이 변화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중요한 문제를 잠시 접어 두고 보자면, 가족의 다양성이란 규범적 지향의 문제가 아니라 불가피하게 직면해 있는 현실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 어떤 지표를 살펴본다 하더라도 확인하게 되는 것은 가족의 다양성을 제도나 정책이 얼마나 인정하거나 얼마나 포용하는가와 무관하게 가족은 이미 다양하다는 사실, 그리고 앞으로 더욱 다양해지리라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알던 그 가족, 이른바 ‘정상 가족’이라고 간주되는 가족의 모습 자체가 역사적으로 지극히 짧은 기간만 유지되었던 모델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순애 씨, 향지 씨, 정자 씨 이야기
순애 씨는 가난한 산골 마을에서 6남매의 외딸로 태어났다. 사실 순애씨의 어머니가 낳은 자식은 아홉 명이었지만 그중 셋이 죽어 여섯이 남았다. 순애 씨는 어렸을 적부터 형제 많은 대가족이 싫었다. 어머니가 일곱 번째 아들을 해산했을 때, 순애 씨는 어머니가 너무 미워서 “어머니는 돼지야? 이렇게 고생스럽게 살면서 왜 자꾸 아기만 낳는 거야. 개돼지나 그렇게 많이 낳지, 사람이 이렇게 낳을 수 있어요?”라고 말하며 엉엉 울었다. 순애 씨는 스물세 살에 결혼해서 아들 둘을 낳았고, 둘째를 낳은 후 조산원을 찾아가 아이를 안 낳게 해 달라고 애원한 끝에 자궁에 금고리(링)를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심한 염증이 생겼고, 금고리를 제거한 자궁에 옥도정기(소독에 쓰이는 약)를 발랐다고 했다. 다시 심한 염증을 앓고 오래 아파 몸이 고생스러웠지만 그래도 순애 씨는 자식을 둘만 낳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겼다. 나중에 가족계획 사업에서 홍보하는 피임법을 알게 된 후 진작 편리하고 안전한 피임법이 보급되지 않은 것에 원망스런 마음이 일었다. 하지만 일찌감치 자식을 낳아 기른 순애 씨는 부업도 하고 교회 봉사 활동도 하면서 단란한 네 식구의 삶에서 행복을 느꼈다.
   향지 씨는 2남 5녀 중 셋째 딸이었다. 1967년에 결혼식을 올렸지만 갓 결혼한 부부는 경제적 기반이 없어 시가에서 살기 시작했다. 향지 씨 언니는 딸 넷을 연달아 낳은 후 아들 둘을 더 낳아 힘들게 살고 있었다. 고향 집 동네에서도 자식을 많이 낳는 게 흔한 일이었다. 향지 씨는 아이 여섯을 낳고 기르느라 힘겨운 언니처럼 살고 싶지는 않았다. 향지 씨 부부에게 콘돔은 필수품이었다. 부부는 착실하고 알뜰하게 돈을 모아 시집살이 반년 만에 분가를 할 수 있었다. 이듬해가 되자 향지 씨 부부는 아이를 가지기로 했다. 1월에 임신해서 더위를 넘긴 가을에 아이를 낳기로 의논한 후 계획대로 10월에 딸을 낳았다. 첫아이가 젖을 떼고 돌을 넘길 무렵 둘째를 계획했고, 이듬해 7월에 아들을 낳았다. 두 남매를 낳고 더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지만 계획과 달리 향지 씨는 다시 임신을 하게 됐다. 번민으로 밤을 지샌 향지 씨는 결국 “치밀어 오르는 오열을” 삼키며 산부인과에서 임신중절을 했다.
   정자 씨는 농촌 마을의 8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가난한 살림에 겨우겨우 중학교까지만 다닌 정자 씨는 스물세 살에 7남매의 장남과 결혼했다. 남편도 형제 많은 가난한 집 장남 처지라 공부가 하고 싶었지만 고등학교를 간신히 마쳤고, 두고두고 대학에 못 간 것을 한탄했다. 결혼해서 시부모를 모시고 산 정자 씨는 줄줄이 딸린 시동생들 뒷바라지까지 했다. 중학교도 제대로 못 마친 시동생들은 삶에 불평이 가득했다. 십년 넘게 시집살이를 한 끝에 분가를 하게 되면서 정자 씨의 삶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시부모와 시동생 뒷바라지에서 겨우 벗어나 두 딸과 부부의 오붓한 살림을 꾸렸다. 아이가 둘이라 방 한 칸 전세면 족했고, 남편의 봉급이 넉넉하지 않아도 알뜰하게 아끼고 모아서 삶을 계획할 수 있게 되었다. 두 딸은 피아노도 배울 수 있었고, 일요일이면 가족끼리 나들이도 다녔다. 착실하게 살림해서 몇 년이 지나면 집도 사고 살림도 더 늘어날 거라는 희망에 네 식구의 단란한 삶은 흡족하기만 했다. 1)
우리가 알던 그 가족
통계청에서 처음 ‘경제활동인구조사’를 시작한 1963년에 농업을 비롯한 1차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비중은 전체 취업자의 63%였고, 일용직을 제외한 임금 근로자는 20%도 되지 않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1960년대의 한국이 전형적인 농업 사회였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이 간단한 통계 수치는 우리가 알던 가족의 전형적인 모습이 실은 아주 최근에 이르러서야 생겨난 것이고 지극히 짧은 역사를 가졌을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환기해 준다.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breadwinner)’으로서 아버지가 일터에 나가 노동을 하고, 아버지가 벌어 온 생계비로 어머니가 알뜰하게 살림을 꾸리며 자녀를 양육하는 형태의 가족은 이념형(ideal type)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겨우 50년 전, 한두 세대 전에야 시작된 모델일 뿐이다.
   농업 사회에서 자녀는 일손이자 자산이며 노후를 의지할 일종의 보험이기 때문에 많을수록 좋은 것이었다. 순애 씨가 울면서 “어머니는 돼지야? 이렇게 고생스럽게 살면서 왜 자꾸 아기만 낳는 거야. 개돼지나 그렇게 많이 낳지, 사람이 이렇게 낳을 수 있어요?”라고 어머니를 원망했지만, 순애 씨의 어머니가 자식을 아홉이나 낳았던 것은 순애 씨 어머니가 정말로 아무 생각도 계획도 없이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근대적 피임술이 196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보급되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피임술의 보급이 곧바로 피임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1960년대 한국의 가족계획 사업은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라는 구호를 내세웠지만, 사람들이 여러 명의 자녀를 낳아 기른 이유는 무식하거나 무지해서가 아니라 자식이야말로 대다수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손이자 자산이며 보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사회에서 자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성인이 되어 가족경제에 일정하게 기여할 수 있을 때까지, 자녀는 장기간에 걸쳐 시간과 노력과 비용을 쏟아부어야 하는 존재다. 그리고 부모가 쏟는 시간과 노력과 비용은 자녀가 성인기에 살아갈 삶을 현저하게 다른 것으로 만들어 낼 가능성이 크다. 빈곤한 농촌 가족의 딸들이 결혼하여 도시 임금노동자 가족의 주부가 되면서, 자식이 생기면 낳아야 했던 자신의 어머니와 달리 계획하고 피임해서 자녀의 출산과 자녀의 수를 조절하기 시작했다. 순애 씨와 향지 씨, 정자 씨의 이야기는 농촌 사회에서 살아가던 사람들과 그 자녀들이 급속한 산업화와 함께 산업사회의 임금노동자와 그 가족으로 뒤바뀌는 전형적 서사를 담고 있다. 이들은 자신이 속해있던 ‘가족’의 족쇄로부터 벗어나 전혀 다른 삶의 가능성을 가진 ‘가족’을 만들어 내고자 했다.
   순애 씨와 향지 씨, 정자 씨가 원한 삶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가족’으로부터 벗어난 삶이었다. 이들에게 이전 시대의 가족은 자신을 옭아매던 전통적인 삶의 표상이었다. 그 가족은 자기 의지가 관철되지 않는 전통의 세계, 궁핍한 살림에 근대적 교육의 의미가 받아들여지지 않던 세계, 임신과 출산이 숙명에 속하던 세계의 다른 이름이었다. 다른 한편 순애 씨와 향지 씨, 정자 씨가 원했던 삶도 역시 ‘가족’으로 형상화되었다. 자기 힘으로 성취해 내는 삶, 숙명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구상하고 계획해서 실현하는 삶, 시간이 흐를수록 더 나아지고 발전해 가는 삶을 순애 씨와 향지 씨, 정자 씨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구현하고자 했다. 순애 씨가 자궁에 금고리를 넣은 것도, 향지 씨가 눈물을 삼키며 임신중절을 했던 것도, 그들이 그토록 만들고 싶어 했던 그 ‘가족’ 때문이다.
민수, 은혜, 현지, 성호 이야기 2)
현장 연구 과정에서 민수와 은혜를 처음 만났을 때, 둘은 한국식의 세는 나이로 각기 스무 살과 열여덟 살이었다. 민수와 은혜는 가출 청소년을 위한 쉼터에서 처음 알게 되었고, “서로 또라이라는 걸” 알아봤다고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각기 다른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민수는 구치소로, 은혜는 심사원으로 들어갔다. 은혜가 민수 있는 곳을 수소문해 인천구치소로 편지를 보내면서 둘은 사귀기 시작했다. 둘이 사귄 지는 꽤 되었지만, 민수가 구치소에 다녀왔기 때문에 실제로 만난 기간은 길지 않았다. 민수는 소년원과 구치소를 여덟 번이나 다녀왔고, 학교는 고등학교 1학년까지 다니다 자퇴했다.
   나와 처음 만난 날은 마침 민수가 출소한 다음 날이기도 했다. 민수는 이제 정말 착실하게 살고 싶다고 했다. 구치소에 들어가기 전에는 일용직으로 일하기도 했고, 도난당한 핸드폰을 팔아서 한달에 500만 원을 벌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자기도 성인이 되니까 어떻게든 열심히 살 거라고 했다. 게다가 집행유예 상태였기 때문에 사고를 치면 큰일 난다고도 했다. 민수는 소년원과 구치소에서 자동차 정비와 미용, 제빵, 응급환자 심폐소생술, 컴퓨터 활용까지 자격증을 5개나 땄다고 자랑도 했다. 1년 전, 구치소에 들어가기 직전에 고졸 검정고시도 합격했다고 했다. 은혜도 중학교를 “짤렸다가”(유예) 다시 복학해서 간신히 졸업한 상태였다. 다음 해에 고등학교에 갈 거라고 했다.
   고등학교를 왜 그만뒀냐고 물었을 때, 민수는 “가정사 때문”이라고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하고 각기 다른 사람과 재혼한 후 머릿속이 혼돈스러웠다고 했다. 민수는 출소해서 지낼 곳이 없었다. 아버지나 어머니 모두 각자 자기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방을 구하는 사이, 통장을 발견한 아버지가 그 돈의 일부를 가져갔다. 키워 준 값으로 알라고 했다고, 민수가 말했다. 민수는 어른 중에 사회복지사 선생님 빼고는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고 했다. 부모가 이혼한 건 은혜도 마찬가지였다. 은혜는 다른 도시의 아버지 집에서 살다가 어머니랑 살게 된 후로 훨씬 더 좋다고 했다. 아무튼 둘은 민수가 출소한 직후여서인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물론 둘의 사이가 오래가지는 않았다. 나중에 다시 만난 은혜는 민수에 대한 험담을 한참 늘어놓았다. 비슷한 일은 비슷한 아이들 사이에서 빈번하게 일어났다. 카톡의 프로필 사진에 남자친구나 여자친구 사진을 올려 두는 아이들은 그 사진의 주인공을 자주 바꿨다. 아이들은 가족 안에서 여러 종류의 문제를 많이 겪으며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가족 바깥의 누군가와 더 나은 관계를 자꾸 꿈꿨다. 현지도 그런 아이들 중 한 명이었다. 현지는 네 살 때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한 후 할머니 집에 맡겨졌고 어린 시절부터 막내 삼촌에게 셀 수 없이 성폭행을 당했다. 현지의 첫 가출은 중학교 1학년 때였고, 그 후로도 가출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가출한 현지는 종종 홍대 앞에 갔다. 홍대 앞에는 밤새도록 공연하고 춤추는 사람들이 많아 사람들 사이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성매매를 해서 돈이 생기면 현지는 홍대 앞으로 가서 음료수를 수십 캔 사서 공연하는 팀에게 가져다주었다. 음료수를 받은 공연 팀 멤버들이 자기를 반가워하고 고마워하는 게 좋았다. 다정한 타인의 존재는 그토록 사무치게 필요한 것이었다.
   순애 씨와 향지 씨, 정자 씨가 꿈꾼 삶은 구체적이었고 저마다 엇비슷했다. 바꿔 말하면 순애 씨와 향지 씨, 정자 씨는 꿈꿀 수 있는 전형적인 삶이 있었던 시대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민수나 은혜나 현지가 바라는 삶에는 구체성이 없었다. 민수나 은혜나 현지는 꿈꿀 수 있는 전형적인 삶이 부재한 시대의 존재들이다. 얼핏 보면 민수나 은혜, 현지 모두 이미 특이한 사례들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부모의 이혼을 경험하는 자녀들은 점점 많아질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어쩌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꿈꿀 수 있는 전형적인 삶이 부재한 시대를 사는 것이 이혼한 부모의 자녀나 가난한 집의 아이들만은 아니기도 하다.
   다른 현장 연구에서 만난 성호는 이른바 중산층에 속하는 가족에서 부족함이 없이 풍족하게 성장한 아이였다. 어머니는 성호에게 많은 관심을 쏟았다. 만나는 친구들, 공부, 학업 성적에 두루 관심을 가졌다. 성호도 어머니의 관심을 잘 알고, 어머니의 당부를 큰 반발 없이 따르는 아이였다. 스마트폰을 쓰지 못하게 하는 어머니의 바람에 따라 스마트폰 없이 지냈고, 거기에 크게 불만을 갖지도 않았으며, 필요한 일이 있을 때면 어머니의 스마트폰을 빌려서 사용했다. 성적이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성호는 아주 ‘정상적이고’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그런 성호가 나에게 “죽고 싶다”고 했을 때, 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잠자코 듣기만 했다. 죽고 싶다는 성호의 말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니었다. 아무 감정의 동요 없이 건조하게 성호는 죽고 싶다고 했다. 성호를 여러 해에 걸쳐 만났지만 만날 때마다 무표정하게 때로는 조금 웃으면서 자기는 스무 살이 되면 죽을 거라고 했다. 특별한 이유도 없었다. 부모에 대한 불만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학교생활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성호가 죽고 싶은 이유로 얘기한 것은 자신이 성인기의 삶을 살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흔하고 뻔한 삶,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졸업한 후 취업을 하고 돈을 벌어서 자기 삶을 영위하는 것 자체가 너무 불가능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결혼이나 자녀에 대한 생각을 언급한 적은 없으니 성호가 불가능하다고 느낀 그 삶의 궤적에 결혼, 출산, 자녀 양육같은 것들이 들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명백한 것은 성호가 도저히 불가능하리라고 느낀 그 흔하고 뻔한 평범한 삶이라는 게 실제로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는 점이다. 순애 씨와 향지 씨와 정자씨가 꿈꿨던 삶, 그 남편들의 삶, 학교를 마치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아 키우고 은퇴해서 다정하게 늙어 가는 삶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점점 더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되어가고 있다. 한때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른바 ‘삼포 세대’가 연애와 결혼·출산을 포기한 세대의 등장을 알리고 있었다는 사실, 새로운 세대의 불안이 가족 형성의 통상적 단계로 표상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가족은 어떻게 변해 갈까
2020년 통계청의 사회조사에서 ‘결혼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고 답한 비율은 전체 응답자의 45.8%에 달했다. 특히 주목해 볼 부분은 결혼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 비율이 젊은 연령대일수록 더 높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40대 이하의 모든 연령대에서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결혼을 할 필요가 없다고 답했다. 특히 10대와 20대 응답자 중 결혼이 필요 없다고 답한 비율은 70%가 넘었다. 이혼에 대해서도 비슷했다. 이혼을 할 수도 있고 이유가 있다면 이혼하는 게 더 좋다고 답한 비율은 전체 응답자의 70%에 육박했고, 10대와 20대에서는 80%가 넘었다. 재혼에 대해서는 전체 응답자의 80% 이상이 해야 한다거나 해도 좋다고 답했다. 10대와 20대에서 재혼에 대해 부정적인 응답은 10%도 되지 않았다.

출처: 통계청, 2020년 사회조사


주:
1) 각 항목별로 ‘잘 모르겠다’ 포함
2) ‘반드시 해야 한다’와 ‘하는 것이 좋다’를 합한 수치
3) ‘하지 않는 것이 좋다’와 ‘하지 말아야 한다’를 합한 수치
4) ‘어떤 이유라도 이혼해서는 안 된다’와 ‘이유가 있더라도 가급적 이혼해서는 안 된다’를 합한 수치

   결혼과 동거, 자녀에 관한 견해에 있어서도 이런 변화의 양상은 뚜렷이 나타났다. ‘남녀가 결혼을 하지 않더라도 함께 살 수 있다’는 항목에 동의한다고 답한 응답자는 60%에 가까웠고, 특히 10대와 20대에서는 각각 76.1%, 78.5%가 혼인과 무관한 동거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했다. 또한 ‘결혼하지 않고도 자녀를 가질 수 있다’는 항목에 동의한다고 답한 10대와 20대의 응답자는 38% 이상이었다. ‘결혼하면 자녀를 가져야 한다’는 항목에 반대한다고 답한 응답자는 전 연령대를 합치면 32.0%였지만, 10대와 20대의 경우 무려 60.6%, 52.5%가 반대한다고 답했다.

출처: 통계청, 2020년 사회조사


   요약해 보자면 젊은 세대일수록 결혼을 꼭 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설령 결혼한다 하더라도 이혼할 수도 있고 어쩌면 이혼하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이혼 후 다시 재혼하는 것에도 그다지 부정적이지 않다. 결혼과 무관하게 같이 사는 것도 괜찮다고 여기며, 결혼한 사이가 아니어도 자녀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혼했다고 해서 꼭 자녀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런 변화의 방향은 일관되게 나타난다. 젊은 세대일수록 일관된 추세로 이전의 가족과 반대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변화의 폭이나 속도가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은 더욱더 결혼하지 않을 것이고, 혼인 외 동거 관계는 늘어날 것이며, 혼인 외 출산이나 무자녀 가족도 점점 많아질 것이다. 결혼한 부부와 그들의 미성년 친자녀로 이루어진 가족 모델은 점점 더 약화될 것이다.
가족과 정상성
근대 사회에서 가족은 정상화(normalization)를 전개하는 핵심적인 제도다. 한 사람이 태어나고 자라나 학교에 가고 군대에 가고 노동하도록 만드는 것도 가족이고, 학교를 떠난 학생이 돌아가는 곳, 군대를 벗어난 군인이 돌아가는 곳, 일터에서 나온 노동자가 돌아가는 곳도 가족이다. ‘정상적인’ 사회 구성원을 길러 내는 것도 가족이고,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삶을 다시 정상의 범주에 재진입시키기 위한 실천이 벌어지는 곳도 가족이다. 가족은 정상성을 구축하는 일차적이고도 최종적인 기제였다.
   그러나 가족과 정상성의 관계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물론 한편으로 여전히 가족은 견고하고 굳건해 보인다. 정상 가족의 규범이 약화되는 것을 가족의 파괴나 해체로 여기는 사람들의 우려나 불안은 기존의 제도를 더욱 강하게 고수하려는 완고함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우려나 불안과 무관하게, 가족 내 관계의 불평등에 대한 여성들의 불만 때문이든 신자유주의 질서에 의해서든 먹고 살기 힘든 세상때문이든, 실은 바로 그 모든 힘들에 의해 정상 가족의 규범은 이미 무너지고 있다. 여러 학자들이 우리가 알던 그 가족의 모델은 이제 새로운 계급 구분의 표식이 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근대 가족이 출현하던 시점부터 이미 ‘정상적인’ 가족이란 계급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지만, 그 가족이 부서져 나가는 방향과 속도는 한층 더 계급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더 이상 가족에 의지할 수 없게 된 개인들은 노동시장과 복지 제도, 교육제도, 각종 의료 기관과 상담 센터 등에 한층 더 제도적으로 종속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런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각종 법과 제도에서 전제하고 있는 혈연과 법률혼 중심의 가족 정의는 의문시되지 않을 수 없다.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동거 커플이 늘어나는 것은 물론, 특히 사별하거나 이혼한 노인들의 동거는 더욱 늘어나고 있다. 부모의 학대를 피해 많은 아이들이 위탁가정에 맡겨지고 있으며, 반대로 부양의 노력을 기울인 적이 없는 직계혈족이 부모나 자녀의 사망 후 상속을 위해 갑자기 나타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민법 제779조는 가족의 범위를 ‘배우자, 직계혈족 및 형제자매’와 생계를 같이하는 ‘직계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직계혈족 및 배우자의 형제자매’로 명시적으로 한정하고 있다. 가족 정책의 근거가 되는 기본법인 건강가정기본법 역시 제3조에서 가족을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기본단위’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처럼 협소한 가족의 법적 정의와 가족 범위 규정이 가족 정책의 근간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가족 정책과 제도가 포괄하지 못하는 삶이 더욱 더 늘어 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다른 한편, 가족의 다양성에 대한 관심이 점점 더 증대되고 있는 현실은 가족의 다양성에 관한 논의가 얼마나 충분히 타당하게 이루어지는가에 관한 문제의식을 더욱 절실하게 요청하고 있다. 가족의 다양성에 대한 논의가 기존의 가족 개념에 포섭되지 않는 잔여적 범주를 포함하고 취약한 가족을 제도적으로 구제하는 방안에 관한 논의로 흐르게 된다면, 가족의 다양성에 관한 논의는 다양성이라는 이름 아래 현실의 다양한 가족을 위계화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위험이 있다. 가족의 다양성에 대한 논의는 단지 가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가족을 경유하여 이 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는 여러 형태의 불평등과 차별의 문제를 더 깊이 사유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가족을 둘러싼 권리의 문제를 통해 권리 개념 자체를 보다 확장하는 방향으로, 가족의 변화를 통해 사회의 변동과 그 결과가 사회 구성원에게 미치는 효과를 더욱 복잡하게 들여다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목차
다름을 마주하는 용기: 데이터주의 시대, 다양성과 어울림의 의미를 묻다
가족의 다양성에 관한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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