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을 마주하는 용기: 데이터주의 시대, 다양성과 어울림의 의미를 묻다
신은경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다양성은 다름이 얼마나 공존하는가를 측정하는 지표이다. 인종, 젠더, 종교, 성적 지향, 국적, 사회경제적 지위, 언어, 장애, 연령, 정치적 성향…. 나와 너를 구분하는,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는 기준은 다양할 수 있다. 다양성이 높은 사회는 여러 기준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 공간에 존재한다. 다양성이 높은 공동체라면 구성원은 어떻게 ‘우리’의 소속감을 가질 수 있을까? 이토록 나와 다른 너인데, 우리가 어울려 공존할 수 있을까?
   닮음에 기반한 기계적 연대를 이루던 시대를 살던 사람들에게 다름에 바탕한 유기적 연대로의 진입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 속에서는 낯설음이 주는 어색함을 피할 수 있다. 성향이 유사한 사람들과 함께할 때 우리는 편안함을 누린다. 좋아하는 것을 편식하는 것은 쉽다. 기계적 연대 안에서 인류가 오랫동안 안분지족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주는 안락함 덕분이었다. 나와 다른 네가 필요하긴 하지만, 함께 어울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다름은 긴장을 동반한다. 고로 불편할 수 있다.
   에코 챔버(echo chamber)1)와 필터 버블(filter bubble)2)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유유상종, 초록 동색으로 표현되는 동종 선호 경향은 인류의 역사에 항상 존재했다. 나 밖의 세계와 내 안의 재해석된 세계 사이의 먼 거리는 스스로가 만끽하는 안정감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오해’하고 있는지 모를 때, ‘자기 확신’이라는 달콤함을 최고로 향유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본인이 가진 세계관과 믿음이 옳다는 확신은 절대적 안정감을 동반한다. 나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 반대에 부딪히는 것은 불편하다. 그 의견의 거리를 좁히려고 대화를 하고 설득을 하는 과정은 더욱 어렵다.
   그러면 그냥 동질적인 사람들 속에서 살면 좋지 않을까? 더욱이 디지털 시대는 이런 좁은 세계에서 사는 것을 편리하게 실현할 수 있지 않은가? 물론, 그렇게 살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안락함을 위해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닫힌 세계에서 우리는 성장의 중요한 기회를 잃는다.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하고 한 공간에서 호흡하는 것은 내가 가진 편견의 허울을 깰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다양함을 마주하며 가지는 성찰의 기회는 우리의 성장에 주요한 동력이 된다. 다름이 주는 불편함은 우리를 더 성숙하게 한다. 일차적으로 내가 가진 편견을 깨 나가는 것은 개인적 성장이다. 자원과 권력의 분배 과정에서 배제되고 박탈당하는 사람이 적은 사회로 나아가는 것은 인류의 진보다.
   밀(Mill)은 자유론(1859)의 서두에서 풍요로운 다양성이 인간의 성장에 기여하는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중요성을 강조한다.3) 자유에 대한 고민을 다양성에서 출발하는 것은 양자가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다양성이 우리의 자유로움의 출발이자 발현인 까닭이다. 자유롭기에 우리는 다양하고, 다양하기에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
   다양성에 대처하는 유연성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정보사회의 노동시장이 점차 고도로 세분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공간은 다양한 행위자들을 무대 위로 끌어올린다. 하지만 다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 우리는 파편화된다. 사회 속 다양한 그룹들 간의 간극이 넓어지고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진다. 오늘날 우리가 곳곳에서 목도하고 있듯, 이는 풀어내기 험난한 사회적 갈등을 촉발한다.
데이터에서 폐쇄성의 민낯을 보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라틴어의 ‘주어진(given)’이라는 어원을 가진 데이터(data)는 분석을 위해서 모은 사실 혹은 값들의 집합이다. 전통적인 데이터는 고비용의 수집 계획, 정보 수합의 과정이 필요했다. 따라서 가장 적은 수의 데이터 값으로 모집단의 성격을 유추하기 위한 세밀한 샘플링이 필수다. 하지만 컴퓨터와 인터넷의 보급으로 생성되는 새로운 데이터는 자동적으로 기록되고 저장된다. 언제나 데이터를 갈망하던 인류는 디지털 공간이 도래하고, 분석 능력 이상의 데이터가 축적되는 상태로 강제 이주 당했다.
   적극적 수집 과정이 필수였던 구(舊)데이터와는 달리 신(新)데이터는 ‘분석’을 목적으로 하여 모은 정보들이 아니다. 수동적으로 기록된 정보들이며 다양한 목적을 가진 수합 매체에 모아진 흔적들을 포괄한다. 국가나 기업 등 소수의 조직에 의해서 모아진 것이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그리고 기계적으로 모이는 정보들이기 때문에 그 축적 속도가 매우 빠르고 양적으로 방대하다. 뿐만 아니라 그 형태도 복잡하고 종류도 다양하다. 아울러 역사가 남긴 구(舊)데이터 역시 빠른 속도로 디지털화 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접근 가능한 기록의 총체를 우리는 ‘데이터’라는 용어로 총칭하고 있다.
   NEW AI(Artificial Intelligence) 시대의 도래는 기존의 인공지능이 프로그래밍에 기반한 시도였던 것과 달리 가용 데이터의 폭발적 축적에 힘입어, 폭넓은 ‘데이터를 통한 학습’으로 그 패러다임이 전환된 것이 가장 중요한 성공 요인이다. 21세기 현재 우리가 열광하는 NEW AI는 이러한 데이터의 범람과 컴퓨팅 기술의 발전이 결합되어 만든 찬란한 합작품이다.
   데이터주의 시대의 우리는 데이터에 담긴 다양하지 못했던 역사를 적나라하게 발굴하고 있다. 무비판적 기계 학습은 데이터에 녹아 있는 과거 역사의 버리고 싶은 부분들까지 재생산한다. 숨어 있던 우리의 편견과 배제의 논리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한다. 개인이 가진 생득적 범주들이 얼마나 강력히 역사 속에서 구별 짓기의 잣대로 작동하고 있었는지를 생생하게 포착할 수 있게 한다.

출처: Google Translation


   위의 그림은 2018년의 구글 자동 번역 결과다. 영어 문장을 3인칭 대명사에 성별 구분이 없는 터키어로 자동 번역을 한다. 다시 이 문장들을 영어로 번역했다. 놀랍게도, ‘그 사람은 의사다’와 ‘그 사람은 간호사다’라는 두 문장은 ‘그는 의사다.’와 ‘그녀는 간호사다.’라는 문장으로 번역이 된다. 구글의 자동 번역기를 두 번 거치면 성별이 처음 출발 문장과 반대로 출력된다. 심지어 그녀는 간호사라는 번역에는 인증 마크까지 있다.
   이는 알고리즘이 자동 번역을 위해 활용한 데이터에 의사는 남성 인칭 대명사와 간호사는 여성 인칭 대명사와 한 문장에 등장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터키어뿐만 아니다 헝가리어 등 성별 구별이 없는 다른 언어에서 영어로 번역할 때, 과학자·엔지니어와 CEO는 ‘그의 직업’이 되고 간호사와 제빵사는 ‘그녀의 직업’이 된다.4)
   이러한 폐쇄의 역사는 다른 곳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추천 구직 광고 역시 나의 성별을 여성으로 설정하면 추천되는 20만 달러 이상의 고액 연봉 직업 311개가 뜨는 반면, 남성으로 설정하면 1,816개의 광고가 추천된다.5) 왜 여성으로 성별을 설정했을 때 1,505개의 광고가 사라질까? 기존 데이터에서 고액 연봉 직업에 남성이 많았던 까닭이다. 동시에 여성을 대상으로 한 광고료가 상대적으로 비싸게 책정된 플랫폼 시장의 광고비 구조 때문이기도 하다.6)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 없는 新데이터 활용은 위험하다. 데이터는 그 양의 많고 적음을 떠나 사회적인 맥락을 떠나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정보사회에서 주요 동력이 되는 데이터는 인간 사회의 역사를 녹여 담고 있다. 사회적 산물인 데이터에는 기존의 편향과 배제, 불평등의 굴곡이 그대로 담겨 있다. 양이 방대해졌기 때문에 객관적인 것은 아니다. 종류가 다양해졌기 때문에 탈정치적인 것도 아니다. 新데이터에 기반한 기술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자동화된 편견을 톺아보다
경찰이 속도위반을 하며 달리는 차를 멈춰 세우고 운전자에게 운전면허증을 요구한다. 운전면허증에는 운전자의 외관으로 식별되는 성별과 다른 성별이 적혀 있었다. 혼란스러워하는 경찰관에게 데이비드는 “저는 100% 남자입니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여자입니다.”라고 답했다. 2018년 캐나다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다.
   당시 캐나다 보험국은 25세 이하의 남성은 위험군으로 분류하여 높은 보험료를 적용하고 있었다. 데이비드는 의사를 찾아가서 자신이 여성이라고 주장하고, 법원에 우편으로 의사의 소견서를 보낸다. 그리고 그는 여성으로 성별이 바뀐 새로운 신분증을 발급받았다. 이 신분증으로 그는 한 달에 $91의 보험료를 덜 낼 수 있었다. 이런 행위를 통해 그는 자신이 시스템을 이긴 것으로 느꼈다고 말했다. LGBTQIA+ 권리를 비난하거나 조롱하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덧붙였다. 결국 이 사건은 과속 사건에 덧붙여 공문서위조 사건으로 확장되었다. 과연 이 사건에서 가장 큰 윤리적, 법적,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제도의 빈틈을 활용한 것일까, 아니면 범죄일까?
   지난 학기 데이터과학과 인공지능 교양 수업에서 활용했던 케이스다. 철학과에서부터 컴퓨터학과와 의예과 학생까지 55개 학과의 630명의 수강생들은 다양한 답을 내놓았다. 많은 학생들은 데이비드의 법적 책임이 제일 무겁다고 이야기했다. 전문가로서 오판을 내린 의사의 잘못을 지적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소견서만 믿고 성별을 바꾸어 준 판사의 결정이 제일 큰 문제라고 주장하는 친구들도 있다. 눈치 빠른 몇몇 학생들은 데이터과학 수업에서 이 사건을 다루는 이유를 고민하다 보험국의 차별적 보험료 적용도 문제일 수 있다고 말했다.
   왜 보험국은 남성에게 더 높은 보험료를 부과할까? 많은 학생들은 이것이 당연하다고 이야기했다. 회사에서는 수익을 최대화하기 위해서 누적된 자동차 사고 데이터를 활용하는 것이고, 20대 초반의 남성이 사고를 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정말 괜찮을까? 본인이 선택한 자동차의 가격에 따라서 보험료가 달라지는 것은 사고가 일어났을 때 손실금에 차등이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납득이 된다. 기존에 사고를 낸 경력이 많은 운전자에게 더 많은 보험료를 부담하라고 하면, 기꺼이 지불할 것이다. 하지만 운전자의 생득적 성별 때문에 그 운전자가 더 위험한 운전을 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은 불편하지 않나? 과거 다른 사람들이 만든 교통사고 데이터에 기반해서 이제 막 운전을 시작하는 데이비드에게 같은 조건의 여성에 비해서 한 달에 $91의 보험료를 더 내게 하는 것은 공정한가?
   이어서 학생들에게 조금 더 복잡한 케이스를 제시했다. 거주 지역에 따라서 보험료가 다르게 측정되는 것은 괜찮을까? 프로퍼블리카(Pro-Publica)의 2017년 보도에 따르면 미국 시카고에서 경비와 방역 요원으로 일하는 어떤 이는 5년 된 혼다로 통근을 하는데, 한 달에 $190.69의 부담스러운 자동차 보험료를 납부한다.7) 옆 동네에 사는 누군가는 3년된 아우디를 타는데 한 달에 $54.67의 보험료를 낸다. 운전 경력이 비슷한 운전자라도 거주지에 따라서 과거 사고 건수가 많은 지역에 사는 운전자에게는 더 높은 보험료를 청구한다. 미국의 곳곳에서 지역 사고 데이터에 기반해서 소득 수준이 낮은 동네의 거주자는 때로는 같은 조건에서 4배 이상의 보험료를 내야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왜 보험 회사는 열악한 운전 환경을 가진 동네의 주민들에게 더 높은 보험료를 부과하는가? 왜 운전자의 사고 경력과 무관한 거주 지역의 평균 사고율에 따라서 더 비싼 보험료를 납부해야 할까? 사고 다발 지역이 되기까지에는 거주민의 운전 미숙이 문제인 경우도 있겠지만 그 지역 도로의 관리 상태 혹은 도로 설비에 속하는 문제일 수도 있다. 또한 그 지역의 사고율에는 그 지역에 사는 주민들에 의한 사고만 계상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 지역의 주민들은 그 지역에서 발생한 사고들에 대해서 부당한 부담을 져야 하는 것인가?
   이러한 데이터 활용은 분석 수준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우리 반의 수학 평균이 80점이라는 것은 나의 수학 점수가 80점이라는 것이 아니다. 자동차 사고가 날 확률이 0.0024%라 할지라도 내게 일어날 경우의 수는 이진법의 세계이다. 자동차 1만 대 중에 두 대가 사고를 경험하니까 나는 사고를 내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할 수 없다.
   그룹의 평균값을 그 그룹에 속한 모든 사람의 속성으로 오해하는 순간, 인권 침해가 시작된다. 남성이라고 난폭 운전을 하는 것도 아니고, 가난한 지역의 사는 사람들 모두가 거친 운전을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존의 차별적 통념이 데이터 분석에 활용되어 편견을 재생산하고 불평등을 증폭하는 예는 자동차 보험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건강 보험 시스템, 주택 담보 대출 시스템, 복지 혜택 수혜 시스템, 범죄 예방 시스템, 아동 학대 방지 프로그램 등 사회 전반에서 발견되고 있다.
   혼란스러워하는 학생들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학생들의 수업료는 왜 획일적으로 책정되어 있을까? 보험료가 다르게 책정되듯, 학생들의 수업료도 다르게 부과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수업을 열심히 듣고 많은 것을 배워 가는 학생에게는 더 비싼 수업료를 내게 하고, 집중을 별로 하지 않아서 10%만 듣고 가는 학생들은 10%의 수업료만 내게 하는 것은 어떨까 하고 제안해 본다. 예를 들어 과거의 데이터를 보니 평균적으로 초록 동네에 사는 학생들의 성적이 높았으므로 그 동네 학생들에게 더 비싼 수업료를 부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작년의 수업에서 파랑 학과 학생들의 점수가 높았으니까 그 학과 학생들에게는 비싼 수업료를 청구할 수도 있다. 아니면 후불제로 많이 배워 가서 A를 받은 학생은 100% 수업료를 내고 D를 받은 학생은 50%의 수업료만 내는 방식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문제로 프레임을 전환하는 순간 학생들의 반응이 뜨거워졌다. 학생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타인에게 책정되는 보험료가 과거의 데이터를 활용해서 회사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정해지는 것에 대해 반감이 적었는데, 본인에게 부과되는 수업료의 경우에는 다양한 반응들이 이어졌다.
   어떤 변수들을, 어떻게 분석해서 의사결정에 반영할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이다. 예전부터 행해진 관례라는 것은 정당화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쉽게 구할 수 있는 데이터이기 때문에 더 적절하거나 타당한 데이터인 것은 아니다. 데이터를 활용한다고 무조건 합리적인 결정인 것도 아니다. 빅데이터를 활용한다고 더 객관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눈먼 과학은 우리 사회의 취약 계층에게 더욱 혹독한 부가세를 부여할 수도 있다. 20세기 초 자동차 보험회사들이 출범하면서 접근이 쉬운 가입자의 정보는 나이와 성별이었다. 가입자의 사는 지역까지 포함하여 분석하면 더 정교한 분석이라고 자신했을 터이다.
   잘못 사용된 기술은 우리의 편견에 확성기를 달아 준다. 보험료 관련 두 사례는 과거의 편견에 무비판적으로 데이터의 갑옷을 입혀서 제도에 반영했을 때 나타나는 데이터 분석 부작용의 전형적인 예이다. 내가 남성이라서 더 거친 운전을 한다고 오해받고 싶지 않고, 우리 동네에 사고가 많이 나기 때문에 나도 사고를 낼 것이라고 예측되는 것은 불편하다. 범주에 기반한 차별의 논리가 폭력적인-그래서 공정하지 않은-이유는 내가 나의 데이터로 평가받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범주의 서사를 새로 쓰다
디지털 사회에서의 다양성에 대한 고민은 매우 시급한 문제이다. 새로운 데이터 과학과 인공지능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부족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력은 매우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또한 그 파급력은 과거의 기계적 산업 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앞서 언급된 구글 자동 번역의 경우, 2019년부터는 위의 실험을 해보면 그녀를 주어로 하는 문장으로 번역된다. 이러한 문제를 인식한 구글은, 중성 대명사는 자동적으로 여성형으로 번역하는 방향으로 알고리즘을 변경했다. 물론 인증 마크도 사라졌다. 또한 2014년부터 유럽에서는 성별에 따른 차등 보험료 부과는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최근 미국에서는 운전자의 차에 센서를 달아서 본인의 운전 데이터에 기반해서 보험금을 책정하는 서비스가 소개되었다. 누군가가 낼 사고의 확률은 본인의 운전 습관과 운전 경로에 따라 다르게 계산되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전의 범주에 근거한 계산법보다 훨씬 반가운 일이다.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범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 것이다. 범주를 기반으로 누군가의 기회와 자유를 박탈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배제의 장치들이 어떤 카테고리를 중심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찾는 것, 그리고 이에 저항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민주 시민으로서 당연한 책임이자 의무다. 획일적인 범주로 평가되고 재단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간절히 바라던 우리는 범람하는 데이터 속에서 자칫 새로운 덫에 빠질 수 있다. 거칠고 빠르게 쏟아지는 데이터 앞에서 우리는 비판적 검토 없이 쉽게 데이터 결정권을 기존의 관행과 존속하는 권위 집단에 넘겨준다.
   데이터들이 모이기 시작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던 범주들에 대해서 과연 이것이 적절한 카테고리인가에 대해 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노이즈들도 함께 보인다. 연어(salmon)와 폐어(lungfish), 그리고 소(cow)를 어떻게 분류할 수 있을까? 폐어와 소는 후두개(기관을 덮는 작은 피부 덮개)가 있지만, 연어는 후두개가 없다. 폐어의 심장은 연어보다 소처럼 구성되어 있고, 폐어는 물 밖에서도 호흡을 할 수 있다. 폐어는 연어에 가까울까, 소에 가까울까? 실제로 소에 더 가깝다는 주장이 한때 화제가 되기도 했다.8) 더 많은 데이터를 축적하게 되자, 생물계를 이해하는 전통적 계통발생학의 분류법이 적절한가에 대한 논의가 거세지고 있다.9)
   사람을 이해하는 분류법 역시 창조적 해체를 경험하고 있다. 2004년 페이스북이 처음 선을 보였을 때, 두 가지의 젠더 선택지가 있었다. 남성 그리고 여성. 추가적으로 성별을 공개하지 않도록 설정할 수 있었지만 그 이외의 범주는 주어지지 않았다. 사용자들은 이런 제한된 카테고리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를 높였다. 2014년 페이스북은 더 다양한 젠더 항목을 만들고 사용자들은 여성과 남성 외에도 56개에 달하는 성별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2022년 현재 페이스북은이 자생적 카테고리에서 파생된 14개의 성별 카테고리와 함께 자유 기입란을 제공하고 있다. 과연 한 개인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는 그 성별의 범주가 얼마나 큰 설명력을 가져야 하는가. 피부색에 따른 범주는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사회적 계층에 따라 누군가의 교육 수준이 얼마나 큰 영향을 받는가.
   우리는 긴 시간 통용되던 카테고리에 부여된 낡은 서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지점에 서 있다. 최소한 다행스러운 사실은 이제 이런 배제와 편향의 메커니즘이 데이터를 통해 가시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찾고자 한다면, 숨어 있는 사각지대에 배제된 그룹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릴 수 있다. 데이터를 제대로 활용하면 범주의 붕괴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수집된 데이터가 많아지면 평균값을 중심으로 수렴하는 정규분포를 그린다. 동시에 우리는 평균 밖의 많은 데이터 값들이 존재함도 알게 된다. 데이터가 많아지면 노이즈도 많아진다. 그 분산의 곡선 위에 내가 찍은 점 하나가 존중받기를 바란다면, 그 선을 이룬 숱하게 많은 다른 점들도 똑같은 열망으로 존중해야 할 것이다.
유연함 없이는 다양성도 없다
다양성은 단순히 1/n의 지표를 맞추는 숫자놀이가 아니다. 다양성을 살펴보는 것은 숨겨지고 배제된 범주를 찾는 숨바꼭질이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폐쇄성을 포착하게 해 준다. 다양성 들여다보기는 우리 사회의 포용력에 편향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자기 검열의 도구이다. 다양성은 단순히 얼마나 다양한 성별·계층·인종이 사회 혹은 조직을 구성하고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다양하고 풍성한 삶의 경로를 확보하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한다. 이를 바탕으로 얼마나 포용력 있는 환경을 더 많은 개인에게 제공해 주는가를 측정할 수 있게 한다. 다양성은 그 사회의 공정성을 가늠할 수 있는 준엄한 지표이다.
   인류는 다양성이 존중받지 못하던 시대를 거쳐 왔다. 폐쇄적인 범주에 속한 소수에 의해 자원 및 권력이 배분되는 것은 기존 사회의 오래된 작동 방식이었다. 우리는 피부색, 생득적 성별, 출신 계층에 따라서 구성원이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접근 가능한 자원이 결정되는 사회를 살아왔다. 2천 년 전으로 돌아가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 필자와 독자가 누리는 소통을 경험할 수 있었을까? 아니 20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불과 얼마 전까지 글과 지식은 지극히 소수의 사회 구성원에게만 허락되던 자원이었다. 이러한 자원의 분배와 접근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의 숫자를 줄여 나가는 것이 인류의 진보이며, 성장의 역사이다.
   동질성에 익숙하던 사회가 다양성을 존중해야 하는 상황으로 나아가는 것에는 피할 수 없는 성장통이 따른다. 이질성에 기반한 개방 사회는 메타인지를 필요로 한다. 서로 다르므로 상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성숙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입 초기에 느끼는 어려움은 획일화를 탈피하여 모두가 존중받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기꺼이 치러야 하는 입장료다.
   다양성은 우리에게 유연성을 요구한다. 다양성의 향유는 우리 모두가 기성복처럼 널리 팔리는 통념을 거부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범주가 차별의 근거가 되지 않으려면, 데이터의 세계에서 재생산되는 범주에 대해 날카로운 성찰이 필요하다. 범주로 개인을 치환하여 가치 판단을 하는 풍토가 만연한다면 성별, 출신 지역, 학교 등에 따른 다양한 사람들이 한 공간에 자연스레 어울리기 어렵다. 누군가의 단편적인 특성 하나가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재단하는 것을 피해야 할 것이다.
   디지털 대전환의 시대, 과거의 편견을 재생산하지 않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인공지능과 기계 학습이 우리 인류에게 바람직한 도구로 쓰이기 위해서는 어떤 데이터를 축적할 것인가, 어떤 데이터를 기계 학습에 활용할 것인가, 그리고 어떤 알고리즘의 디자인을 통해서 데이터의 축적 및 활용 과정에서의 불평등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책임에 관한 인본주의적 고민이 함께 필요하다. 인간에게 학습과 배움은 과거를 반복하기 위함이 아니다. 과거의 부족함을 반성하고 실수를 극복하며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움직임, 그것이 인간의 학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우리가 걸어야 할 데이터 과학과 인공지능의 미래는 절실히 데이터에 대한 비판적 상상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
   다름을 마주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아날로그 시대나 디지털 시대나, 다름과 공존하는 것은 노력을 요한다. 내가 알고 있던 남성과 여성, 정상과 비정상,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의 카테고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나의 세계관을 깨고 나오는 일이다. 나의 기준이 실패했음을, 내가 틀렸을 수도 있음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쾌재를 불러 마땅하다. 그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를 보고 세상을 바라볼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 까닭이다.
   우리는 지금 범주의 평균으로 쏠려서 놓쳐 온 많은 것들을 다시 살펴볼, 더없이 좋은 출발점에 서 있다. 과거에 생득적 성별, 피부색, 계층 때문에 교육의 기회에서 배제되고 특정 직업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생의 여정이 허락되었더라면, 인류는 지금보다 더 다양한 소크라테스와 아인슈타인을 가졌을 것이다. 보다 다양한 어울림의 미래를 개척하는 일은 이제 시작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에필로그
사회학자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는 귀하다. 이 짧은 다양성 예찬론은 학술적 논문과는 다른 바람으로 쓰인 글이다. 이 글은 간절히 읊조리는 주술서이며, 동시에 용기 내어 털어놓는 자기 고백서다. 개인의 이야기를 공적 영역에서 나누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독자들께서 개인의 이야기들이 자유롭게 공유되고 공감되는 것 또한 다양성의 영역이라 여기며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사실 나는 장애를 가지고 있다. 1983년 처음으로 ‘소아 고관절 탈구’라는 병명을 진단받았다. 지금은 치료법이 어느 정도 개발되었지만, 당시에는 한국에서 수술의 성공 사례가 없는 희귀 케이스였다. 첫 아이가 아장아장 걸음마를 시작하는 모습이 부모님 눈에는 마냥 귀여워 보이셨다고 하셨다. 하지만 사촌 언니와 오빠를 키우시던 이모님께서 당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내 걸음걸이가 이상하다고 느끼셨고, 부모님께서는 당시 막 돌을 지난 나를 병원에 데리고 가셨다. 왼쪽 다리가 탈구된 상태였다.
   정말 운이 좋게도 당시 영국에서 막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셨던 이석현 교수님을 비롯한 의료진의 큰 도움으로 무사히 수술을 마쳤다. 그렇게 나는 대한민국 첫 소아 고관절 탈구 교정 수술 성공 사례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 덕에 나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전 국민에게 걸음걸이를 선보이기도 했다. 병원에서는 한 달만 늦게 걸음마를 시작했거나, 한 달만 늦게 병원에 왔더라면 지금처럼 자유롭게 보행하는 일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기적에 가까운 성공적인 수술에도 불구하고, 나의 왼쪽 다리와 오른쪽 다리는 길이가 약간 다르다. 병원에서는 당시 생후 13개월이었던 나에게 장애 3급 판정을 받을 수 있음을 안내해 줬다고 한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정중히 장애 판정을 거부하셨다. 한참이 지나서야, 딸이 장애 판정으로 누릴 수 있는 혜택보다는 그 분류 때문에 겪어야 할 세상의 편견이 두려우셨다고 말씀해 주셨다.
   수술 후 10년 동안 나만 모르던 나의 비밀은 우리 가족, 동네 어른들, 학교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초등학교 때 나는 한 번도 100m 이상을 달려 본 적이 없다. 이상하게도 체육 시간 혹은 체력장의 장거리 달리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담임 선생님의 호출에 달려가거나 체육 선생님의 심부름을 해야했다. 가족들 어느 누구 하나 내 몸에 있는 수술 흉터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씀하시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또래와 조금 다른 나의 몸에 대해 크게 의식하지 않고 자랄 수 있었다. 필자가 수술 받았던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왜 달리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풀린 것보다, 노심초사 그 아이를 지켜 준 공동체의 따뜻한 마음이 더욱 놀라웠다.
   사실 가족들과 가까운 친구들만 아는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글로 옮기기까지에는 두 가지 고민이 있었다. 첫 번째는 내가 혹시 눈에 드러나지 않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수준의 장애를 겪고 있기 때문에 쉽게 장애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러웠다. 두 번째는 내 경험을 통해 장애를 낭만적인 경험으로 포장하는 우를 범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 여러 날과 밤을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니라고 답을 하면서도, 여전히 마음 한편이 무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면을 빌려 나의 이야기를 ‘고백’하는 것은 나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이라고 생각했던 개인들이 이미 ‘우리’와 함께 일상을 공유하고 있음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장애의 유무가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기준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뛰어난 의료진과의 만남과 성공적인 수술도 천운이었다. 하지만 나를 장애를 가진 사람이 아닌, 그저 신은경으로 대해 준 공동체 속에서 살아온 것이 더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필자의 경험을 스스로 행운이라고 부르는 것은 안타깝게도 장애를 가진 많은 분들은 신체적 장애뿐만 아니라, 장애를 불편으로 만드는 일상적 제약과 사회적 편견들 속에서 살아가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 개인의 존엄과 가치가 아닌 장애의 유무로 한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적 인식이 여전히 팽배하기 때문이다.
   장애라는 이름으로 어린 나를 재단하지 않았고, 나의 가능성을 제한하지 않았기에 그 물리적 다름을 인지할 필요조차 없었다. 필자는 스스로가 누렸던 행운이 우리 모두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가 되는 사회를 소망한다. 장애뿐 아니라 인종·섹슈얼리티 등 정체성의 ‘다름’이 일상의 제약과 장애로 작용하지 않는 세상이 되기를, 그리고 그러한 세상을 위해 우리 모두가 마음과 힘을 모을 수 있기를 바란다. 문명의 가치는 그 문명이 구성원의 발전에 디딤돌이 되는가, 아니면 걸림돌이 되는가에 달려 있지 않은가. 다름을 통해서 서로가 성장하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자신의 삶의 무한한 가능성을 꿈꾸고 실현할 수 있는 어울림의 미래를 간절히 염원한다.
목차
다름을 마주하는 용기: 데이터주의 시대, 다양성과 어울림의 의미를 묻다
가족의 다양성에 관한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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