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은 다름이 얼마나 공존하는가를 측정하는 지표이다. 인종, 젠더, 종교, 성적 지향, 국적, 사회경제적 지위, 언어, 장애, 연령, 정치적 성향…. 나와 너를 구분하는,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는 기준은 다양할 수 있다. 다양성이 높은 사회는 여러 기준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 공간에 존재한다. 다양성이 높은 공동체라면 구성원은 어떻게 ‘우리’의 소속감을 가질 수 있을까? 이토록 나와 다른 너인데, 우리가 어울려 공존할 수 있을까?
닮음에 기반한 기계적 연대를 이루던 시대를 살던 사람들에게 다름에 바탕한 유기적 연대로의 진입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 속에서는 낯설음이 주는 어색함을 피할 수 있다. 성향이 유사한 사람들과 함께할 때 우리는 편안함을 누린다. 좋아하는 것을 편식하는 것은 쉽다. 기계적 연대 안에서 인류가 오랫동안 안분지족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주는 안락함 덕분이었다. 나와 다른 네가 필요하긴 하지만, 함께 어울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다름은 긴장을 동반한다. 고로 불편할 수 있다.
에코 챔버
(echo chamber)1)와 필터 버블
(filter bubble)2)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유유상종, 초록 동색으로 표현되는 동종 선호 경향은 인류의 역사에 항상 존재했다. 나 밖의 세계와 내 안의 재해석된 세계 사이의 먼 거리는 스스로가 만끽하는 안정감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오해’하고 있는지 모를 때, ‘자기 확신’이라는 달콤함을 최고로 향유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본인이 가진 세계관과 믿음이 옳다는 확신은 절대적 안정감을 동반한다. 나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 반대에 부딪히는 것은 불편하다. 그 의견의 거리를 좁히려고 대화를 하고 설득을 하는 과정은 더욱 어렵다.
그러면 그냥 동질적인 사람들 속에서 살면 좋지 않을까? 더욱이 디지털 시대는 이런 좁은 세계에서 사는 것을 편리하게 실현할 수 있지 않은가? 물론, 그렇게 살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안락함을 위해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닫힌 세계에서 우리는 성장의 중요한 기회를 잃는다.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하고 한 공간에서 호흡하는 것은 내가 가진 편견의 허울을 깰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다양함을 마주하며 가지는 성찰의 기회는 우리의 성장에 주요한 동력이 된다. 다름이 주는 불편함은 우리를 더 성숙하게 한다. 일차적으로 내가 가진 편견을 깨 나가는 것은 개인적 성장이다. 자원과 권력의 분배 과정에서 배제되고 박탈당하는 사람이 적은 사회로 나아가는 것은 인류의 진보다.
밀
(Mill)은 자유론
(1859)의 서두에서 풍요로운 다양성이 인간의 성장에 기여하는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중요성을 강조한다.
3) 자유에 대한 고민을 다양성에서 출발하는 것은 양자가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다양성이 우리의 자유로움의 출발이자 발현인 까닭이다. 자유롭기에 우리는 다양하고, 다양하기에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
다양성에 대처하는 유연성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정보사회의 노동시장이 점차 고도로 세분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공간은 다양한 행위자들을 무대 위로 끌어올린다. 하지만 다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 우리는 파편화된다. 사회 속 다양한 그룹들 간의 간극이 넓어지고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진다. 오늘날 우리가 곳곳에서 목도하고 있듯, 이는 풀어내기 험난한 사회적 갈등을 촉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