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문학, 다양성으로부터의 가치
최정현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
‘러시아’라고 했을 때 많은 것이 연상될 수 있겠지만 제일 먼저 우리들의 뇌리에 떠오르는 것 중 하나는 바로 문학일 것이다. 물론 다른 사물이나 현상·개념들도 있겠지만, 전 세계 사람들에게 러시아는 많은 경우 다름 아닌 ‘문학’과 연결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러시아 문학이라고 하면 왠지 모를 심오함과 무거움, 그리고 러시아와 러시아인들, 그들만의 무엇인가 독특하고 배타적인 정서와 사상, 심지어는 그들만의 형식 등이 짙게 배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러시아 문학 전공자의 입장에서, 이런 관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들만의 가장 심오한 문학이라고 여겨지는 러시아 문학 또한 여러 다양한 문학을 바탕으로 형성된, 다양성으로부터 빚어진 가치라고, 이번 기회에 우리는 그간의 인식에 약간이라도 창조적이며 생산적인 궤도 수정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 문자의 시작
러시아를 유럽 대부분의 나라와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 러시아의 글자, 정확하게는 Б, Г, Д, П, Ф, Ш 등 난생처음 보는 매우 생소한 러시아어 알파벳의 영향도 클 것이다.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영어 알파벳(실은 라틴 알파벳이라고 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하다.)과 시각적으로 차이가 뚜렷하기에, 러시아에 대해서 갖는 여러 ‘다양한’ 생각들이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왜 러시아만 다른 문자를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고고학적 증거 등으로 살펴볼 때, 5~6세기경부터 중동부 유럽 지역의 넓은 평원에서는 오늘날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시 및 폴란드와 체코, 그리고 불가리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등 슬라브 여러 민족의 공통 조상 격인 사람들의 정주 생활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슬라브인들은 초기에 각자의 슬라브 구어로 의사소통을 했다. 말은 있었으나 문자는 아직 부재했던 초기 슬라브인들의 언어생활에서 문자의 탄생은 다름 아닌 기독교의 전파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서기 863년 오늘날의 체코 지역 모라비아(Moravia) 땅에서는 비잔티움 제국에 기독교를 전파해 줄 것을 요청하게 된다. 겉으로는 종교의 도입을 청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접경한 신성로마제국의 로마가톨릭 수용을 핑계로 한 정치적 간섭을 피하기 위해 로마가톨릭과 경합 관계에 있는, 동방정교(Eastern Orthodoxy) 세력인 비잔티움 제국에게 외교적 원조를 청한 것이었다. 이에 당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였던 미하엘 III세(840-867)는 모라비아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같은 슬라브 혈통으로 슬라브 구어에 능숙하며 콘스탄티노플에서 교육받은 비잔티움의 학자 키릴(Κύριλλος, 827-869)과 교회 행정가 메포디(Μεθόδιος, 815-885) 형제를 포교단으로 파견했다.
   이 중 특히 동생 키릴은 비잔티움 제국의 공용어인 그리스어를 바탕으로 슬라브 구어를 표기할 수 있는 문자를 창안해 그리스어 성서를 번역, 모라비아 땅의 슬라브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게 된다. 이들 형제가 모라비아로 가는 여정에서 창안한 바로 이 문자가 전체 슬라브인들의 초기 문자 체계인 글라골리차(Glagolitic script)였다. 키릴과 메포디가 창안해 전파하기 시작한 슬라브인들의 문자는 이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간소화되어 키릴 알파벳(Cyrillic alphabet), 즉 키릴리차(кириллица)로 불렸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러시아 문자가 바로 이 키릴리차이며, 키릴리차는 현재의 불가리아,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등의 남(南)슬라브 지역에서 널리 쓰였다. 시간이 지나 10세기 후반경에는 좀 더 북쪽에 거주하던 슬라브인들에게도 확산되었으니, 이때 키릴리차를 받아들인 슬라브인들이 러시아, 우크라이나, 그리고 벨라루시인들의 조상인 동(東)슬라브인들이다. 이 무렵을 기해 키릴 알파벳은 동쪽으로는 오늘날의 러시아로부터 서쪽으로는 체코, 남쪽으로는 불가리아에 이르는 지역에 거주하던 모든 슬라브인들의 문자로 쓰였고, 오늘날까지 많은 슬라브인들의 문자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키릴 알파벳(좌), 글라골 알파벳(우)
출처: Про религию 1)



키릴과 메포디 형제의 성화
출처: mycatholic.life 2)


   키릴과 메포디 형제의 성화이다. 왼쪽 검은 옷을 입은 수도사가 키릴, 오른쪽 동방교회 십자가를 든 성인이 메포디이다. 두 사람은 흔히 키릴 알파벳이 적힌 두루마리와 키릴 알파벳으로 번역한 성서를 펼쳐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오늘날의 러시아 조상들의 역사 시대 첫 단계는 바로 이 키릴 문자의 도입과 그리스도교의 전래와 함께한다. 현대의 국가 단위로 러시아, 우크라이나 그리고 벨라루시의 조상들이 단일한 정치적 통합체로 마련한 키예프 루시(Киевская Русь) 3)는 새로 도입된 키릴 알파벳을 자신들의 음성 언어를 문자 언어로 정착하는 수단으로 수용,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나가며 문자 기록과 함께 역사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러시아, 다양성과 수용성의 시작에서
오늘날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그리고 벨라루시의 공통 조상 격인 키예프 루시는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기독교라는 종교와, 문자인 키릴 알파벳을 받아들이며, 사실상 자신들의 이념과 가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타자로부터 수용하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중세 동슬라브인들의 혈연 공동체로서 키예프 루시 국가 형성 초기, 오늘날 노르웨이와 스웨덴 계통의 바이킹들이 키예프 루시 땅에 들어와 국가 형성 세력의 일부분이 된다. 북쪽에서 해상 세력인 바이킹의 일부가 키예프 루시로 흘러들어 온 것처럼, 남쪽 스텝(steppe) 지대에 오래전부터 거주하며 생활해왔던 스키타이인들의 후손인 투르크 계통의 유목민들 또한 키예프 루시 국가 형성의 또 다른 일부로 흡수되기도 했다. 게다가 나중 13세기 초에는 몽골제국의 침략과 지배에 이어 타타르인(татары)들이 키예프 루시를 지배하며 그들의 영향 또한 직·간접적으로 배어들게 된다. 타타르인들을 내세운 몽골의 간접 지배를 받던 시기, 키예프 루시 시대의 서쪽 지역은 자신들과 좀 더 인접한 바로 이웃인 리투아니아와 이후 폴란드의 지배를 받으며 그 영향 아래 놓이게도 된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기로 서유럽 여러 국가들과 뚜렷한 차이점을 보이는 러시아는 뭔가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강하게 유지하며, 주변의 이질적인 타자 세력과는 조금도 섞이지도 않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기에 오늘날까지 뭔가 저렇게 ‘러시아스럽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들만의 어떤 특별한 것을 만들어 냈다고 여겨진다.
   그러한 일반의 통념과는 달리, 러시아는 자신의 조상 격인 키예프 루시 건국 초기부터 수많은 주변 세력과의 교류 및 영향 관계하에서 끊임없이 남의 것을 받아들이며 그로부터 서서히 자신들의 것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문학 또한 예외가 아니었으니, 기독교의 수용과 함께 도입된 문자 체계와 이를 통한 기록과 문학의 시작 단계에서부터 러시아는 비잔티움 제국의 동방 기독교적 전통하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조상 키예프 루시는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전해지는 것들을 순순히 받아들이지만은 않았다. 기독교 전파를 위해 키릴과 메포디가 글라골리차 알파벳이라는 새로운 문자 체계를 고안해 냈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 생각하면 이후 500년쯤 뒤에 있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움직임과 큰 차이가 없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로마가톨릭은 교회와 성서의 언어로 라틴어를 고집하고 있었기에, 성서는 라틴어로 쓰였고 복음을 이해하려면 라틴어를 배워야 했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은 자신들의 언어인 그리스어를 주변 세력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물론 비잔티움 제국이 특별히 자비로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동방정교는 로마 가톨릭에 비해 명백히 포교에서는 후발 주자였던 셈이니, 문맹에 가까운 유럽 주변부 민족에게 그리스어를 가르쳐 가며 복음을 전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그들 토착어에 기반한 문자 체계를 만들어, 그들의 언어로 성서를 번역해 선교를 한 셈이었다. 그게 포교에 더 빨랐고 유리했기 때문이다. 키릴과 메포디 형제가 슬라브인들에 대한 포교를 위해 문자를 새로 제정한 것 또한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렇게 슬라브 구어를 문자로 표현한 키릴 알파벳이 만들어졌고, 이를 키예프 루시가 받아들여 자신들의 기록과 문학을 위해 이용했다는 사실 자체가 러시아는 역사 시대의 첫 순간부터 서유럽의 로마가톨릭 라틴 공동 문명권에 속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앵글로 색슨 세력이 주도하는 서구 유럽이 러시아에 대해 보이는 배제와 경계의 출발점이기도 한 셈이다.
   어쨌든 지금 우리의 논지에서 중요한 점은, 비잔티움으로부터 동방 기독교를 받아들이며 키릴 알파벳을 도입한 키예프 루시가 서유럽 로마가톨릭의 공통 문어로서 라틴어가 아닌, 자신들의 토착어(vernacular language)인 슬라브어를 종교적·정치적 기록의 영역 전반에서 쓰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점이 러시아와 러시아 문명의 다양성과 독자성을 동시에 설명해 줄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로마가톨릭 영향권에서는 라틴어가 공통 문어로 작용함으로써 각 지역어의 발달이 지연되었다면, 동방정교 영향권에서는 그리스어 대신에 자신들의 구어를 바탕으로 한 토착어를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독자적인 언어 발달이 가능했었다. 러시아가 바로 그런 교차점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민족 구성과 정치 체제 및 문화 형성에 수많은 외부의 타자적 요소가 녹아들었으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외래적 요소를 용융(溶融)시켜 자신들의 독자적인 부분으로 체화해 낼 수 있었다. 바로 그런 다양성과 수용성, 내재화의 가능성의 경계선상에서 러시아적 삶의 방식의 많은 부분은 서서히 형성되어 나간 것이다. 그중 자신들의 감정과 사고를 글로 표현하는 문학은 특히 더욱 그러했다.
중세 시대 러시아 문학의 다양성
15세기 중반, 비잔티움 제국이 결국 멸망하게 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을 쓰러트린 세력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으로, 이후 투르크 제국의 술탄은 비잔티움 황제를 대신해 소아시아 반도는 물론 지중해와 흑해, 그리고 북아프리카에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다.
   이렇게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자, 제국의 수많은 지식인 및 학자들은 이웃 나라로 피신을 하게 되었다. 그때는 마침 절묘하게도, 오늘날 러시아의 실질적 조상 격이 되는 모스크바 공국(Московское княжество)이 13세기 초에 키예프 루시를 멸망시키고 200년이 넘게 자신들을 지배해 온 타타르인들의 지배를 스스로 걷어 낸 무렵이었다. 이렇게 1480년, 240여 년에 걸쳐 지속된 이민족의 정치적 지배를 걷어 내고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통합을 이루기 시작한 동슬라브는 억압된 체제를 극복할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한 동슬라브인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원형이자 풍요로운 정신적 고향, 그리고 정치적 이상향으로 키예프 루시 시대의 전성기를 떠올렸다. 그들은 11세기 초반에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블라디미르 대공 때와 여러 공후(公侯)들이 정치적으로 단합했을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나 종교적으로도 융성했던 야로슬라프 현제(Ярослав Мудрый) 치세(ок. 1019-1054)를 자신들이 구현해야 할 이상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 모스크바 공국의 동슬라브인들에게 남아 있는 유산은 거의 없었고,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정치적 프로그램에 걸맞은 문화적 성취를 내세울 기반이 없었다. 이에 동슬라브인들은 다시 한번 비잔티움과 남슬라브로 고개를 돌리게 된다. 10세기 말, 비잔티움 제국을 통한 그리스도교의 전파와 남슬라브계(그리스,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 학자들을 통한 문자와 문학, 지적 유산의 전파를 통해 동슬라브가 개화되었듯이(제1차 남슬라브 영향), 14세기 말부터 15세기 초에 이르는 동안 동슬라브는 또다시 남슬라브(비잔티움 제국의 그리스 혈통 지식인들과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를 통한)의 문화적·종교적 전통을 통해 키예프 루시부터 모스크바 공국으로 이어지는 자신들의 문화적 전통의 영속성을 확인받으려 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바로 ‘제2차 남슬라브 영향(второе южнославянское влияние)’이라고 한다. 이러한 정신사적, 문화적 전통의 계승을 주창했던 배경에는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한 북동부 세력이 동슬라브의 핵심인 키예프를 여전히 계승하고 있다는 이유로 정치적 적자임을 표방하려 했음과 무관하지 않다.
   다시 말해서 이민족의 속박을 종식하며 모스크바가 중심이 된 동슬라브는 키예프 시대의 문화적 영광을 재현코자 갈망했기에, 동슬라브인들에게 중세 유럽의 문자 문화와 그리스도교 문화로의 길을 연 키예프 루시가 비잔티움과 주변 슬라브족들과의 관계 속에서 문화적 발전을 이루었던 만큼, 몽골-타타르 지배기 동안 단절된 키예프 루시의 영광을 재생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바로 키예프 루시가 걸었던 길-비잔티움과 다른 슬라브 문화와의 직접적 교류-을 반복하는 방법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셈이다 .
   즉 모스크바 공국으로선 영광스러운 민족적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고,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던 불명예스러운 오늘을 전복하는 가장 선명한 기제로서 과거의 종교적 영성을 외부로부터의 영향력과 함께 되살리려 했음 역시 주목할 점이다. 이 시기에 이미 멸망한 비잔티움 제국의 그리스 혈통의 학자를 비롯하여 불가리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등 남슬라브 혈통 출신의 많은 두뇌들이 자의 반 타의 반 모스크바로 와서 동방 교회 세력의 중심으로 남은 모스크바와 동슬라브의 문화적 부흥을 위해 협조하게 된다. 동슬라브 또한 이들 타자의 존재를 적극 받아들이며 자신들의 과거 종교적, 민족적, 정치적 영광의 복원을 위해 진력하게 된다.
초기 근세 17세기 러시아 문학의 다양성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 시기인 초기 근세 17세기는 아주 입체적이고 다양하다. 17세기에 대한 정당한 관심의 첫걸음은 무엇보다 모스크바 대공국의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입체적 측면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에서 비롯한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그 17세기 모스크바 대공국의 복잡한 양상에 대해 사회적·문화적으로 보다 올바른 관심은 1654년에 우크라이나의 일부와 모스크바 대공국의 정치적 합병 조약인 페레야슬라블 라다(Переяславская рада)로 맺어진 드네프르강 좌안(Левобережная Украина) 그리고 모스크바 대공국의 키예프 합병과 이후 일련의 사건에 대해 17세기라는 ‘과도기적 시공간’을 감안한 접근일 것이다. 이른바 폴란드-리투아니아 공국 지배하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시를 통한 모스크바 대공국으로의 서구 문화 유입이 시작된 흐름, 그리고 이에 대한 모스크바의 반응에 대한 천착이 바로 17세기라는 러시아 ‘사회’(이 단어의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를 이해하는 데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지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스크바의 반응은 라틴 이단 폴란드의 오랜 문화적 지배하에 변증법적 발전 경로를 겪어 온 키예프의 정교 지식인 사회라는 ‘익숙한 타자’에 대한 모스크바의 ‘내적’ 수용일 것이며, 그 내적 수용이 모스크바 대공국에 어떻게 반영되었는가 하는 점에서 읽어 낼 수 있을 것이다.
   17세기의 문학의 번역과 이행기적 흐름은 서구의 바로크를 전폭적으로 수용했다. 그렇게 이념적 측면에서 수용된 바로크와 함께 17세기 중반부터 동슬라브에서는 서구, 특히 같은 슬라브이지만 동방교회가 아닌 로마가톨릭의 가장 신실한 동쪽 세력이었던 폴란드를 통해 유럽 근대의 문화를 접하게 된다. 그런 ‘타자’로서의 문학적, 문화적 조우와 번역의 매우 흥미로운 사례가 바로 시작법(詩作法) 수용이다.
   17세기 초, 운문 혹은 시의 개념이 동슬라브에 처음 등장했을 때 그것은 ‘비르쉬’(вирши)란 이름으로 지칭되었다. 비르쉬라는 이 말은 폴란드어로 ‘시’를 의미하는 ‘wierszy’의 동슬라브어식 표기이다. 이 비르쉬는 그 형식에서도 폴란드 시의 작법을 모방했으니, 비르쉬는 17세기 초반의 초보적인 시와 후속 단계의 음절 시 모두를 포괄하는 명칭이다. 이런 외국어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 동슬라브에게는 시·운문이라는 문학적 개념 자체가 또한 ‘타자’로부터 주어진 것이었다. 또한 명백히 교회적 측면이지만, 중세 시대 연극의 일부인 교회극을 통해 전파되기 시작한 서구식 드라마와 희곡 또한 17세기 모스크바 대공국이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타자의 유산이었다.

17세기 후반 벨라루시 폴로츠크 출신으로 모스크바 궁정에서 활약한 시인 시메온(Symeon Polotsky)의 시각 시(視覺 詩)
출처: Simeon Polotsky(1661) 4)


   이렇게 오늘날 러시아의 조상 격이 되는 모스크바 대공국이 자신들의 서쪽 이웃으로부터 그들이 내재화한 서구적 문화유산을 받아들이며, 자신들 러시아 고유의 전통과 용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서서히 형성해 나가기 시작했음은 매우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18세기 근대 러시아 문학의 다양성
흔히 전공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1703년에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 제국의 새로운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그를 건설한 것을 두고 러시아 사회 전반의 가장 큰 전환점이라 한다. 이른바 before/after로 나뉠 수 있는 지점이 바로 18세기 초의 사건인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러시아라는 사회와 공동체는 유럽적 근대(modernity)와의 이념과 가치를 공유하며, 그간 유럽 변방의 은둔 세력에서 유럽 주요 국가와의 여러 교류를 통해 본격적으로 유럽이라는 정치·사회·문화의 무대에 나서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러시아 제국이 받아들인 타자의 영향으로 자신들의 사회와 문학을 다양하게 만든 외부 요소는 본격적인 서구적 개념의 글 쓰는 방식이었다. 국내 한 연구자에 의해 ‘습작의 시대’라고 명명된 것처럼, 18세기의 러시아라는 사회에서는 문학이 중세의 성격을 벗고 새로운 규범을 세우는 시기였다. 일종의 습작의 시대인 셈이다. 새로운 규범을 세우고 그것을 습득하는 18세기에 러시아 문학의 가치는 규범의 준수에서 먼저 발생했다. 그리고 러시아가 준수하기 위해 열심히 학습한 규범은 바로 역시 한층 가까워진 서구의 문학 규범이었으며, 그 전초전은 이미 ‘시’라는 형식의 습득을 위해 애써 보았던 전대 17세기 중반의 경험이 토대가 되었다.
   학습을 통해 습득해야 하는 규범은 18세기 서유럽에서는 전통적인 ‘시’와 ‘드라마’라는 두 장르에서 러시아에 몇 가지 규칙들을 요구했다. 즉 한 행에 일정한 수의 음절을 배치해야 하며, 끝에서 두 번째 음은 반드시 강제 음절이 와야 된다는 그 규칙, 그리고 압운(押韻)은 2행 단위로 전개되며 여성운이어야 한다는 그 규칙, 또한 절대주의 황정을 반영하는 질서와 규범의 현현체로서 송시(ode; ода)의 주제와 구성, 수사에 대한 그 규칙은 바로 ‘배워야 하는’ 것이었다. 아무렇게 할 수 없고 또 그냥 할 수도 없는 것으로서, 그것은 철저한 선행 학습과 반복 학습을 통해 일종의 장인성에 올라서야 하는, 부단한 ‘습작’의 과정을 통해 완성될 수 있는 일종의 지적 공예품이었다. 
    ‘드라마’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류와 같은 고전 고대 그리스 로마 희곡의 전통적인 규칙의 숙지로부터 시작해, 창작이라는 자유가 허용되는 영역보다 엄밀하게 준수해야 하는 규칙이 더욱 강하게 요구되는 영역이었다. 러시아 제정은 이런 시와 드라마 장르의 규칙, 게임의 법칙을 18세기의 백 년 동안 게걸스레 학습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중세 시기의 문학이 비옥한 흑토와 같다면, 18세기 서구 신고전주의와 절대주의 시대의 러시아는 자신들의 콘텐츠를 아름답게 담아낼 수 있는 서구식의 우아한 화분을 굽고 있었던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렇게 18세기에 표트르 대제가 이끈 서구화와 근대화 개혁 속에 함께 추진된 일련의 문화적·문학적 서구화 또한 러시아 문학에 깊고도 결정적인 영향과 흔적을 남겼으니, 바로 타자의 ‘언어’와 ‘규칙’의 정확한 준수로서 자신들 역시 이젠 같은 언어와 같은 문법으로 말하고 소통할 수 있는 틀을 갖춘 셈이 되었던 것이다. 러시아의 18세기는 궁정과 귀족이 프랑스어만 배운 것이 아니라, 서구적 글쓰기와 글짓기의 기본적이고 종합적인 문법 자체를 학습해 ‘자기화’해 나가던 시기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초 낭만주의 시기 러시아 문학의 다양성
18세기 후반 독일에서 나타난 소위 ‘질풍 노도(Sturm und Drang)’ 운동은 문학에 있어서 낭만주의의 의식적인 표출로, 그 자체로 이웃한 러시아에 전이되었다. 러시아에로의 이런 낭만주의적 사조의 유입에 결과적으로 앞선 이들은 18세기 절대주의 시대에 교육 받은 귀족을 중심으로 문학 비전문가의 입장에서 정서적이며 예술적인 글을 쓰던 이들이었다. 초기에 넘쳐나는 감상성(感傷性)을 무기로 한 니콜라이 카람진(Н. М. Карамзин) 등의 작가로부터 시작된 러시아 낭만주의의 전 단계는 서서히, 서구적 영향을 여전히 받아들이며 성숙한 낭만주의로의 점진적 이행을 준비하게 된다. 초기 낭만주의자 그룹을 거치며 대략 1810년대 후반부터 보다 성숙한 낭만주의의 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성숙한 낭만주의로 진화하며, 특히 1812년 나폴레옹의 모스크바와 러시아 침략을 경험한 러시아 제정 사회는 낭만주의의 민족주의로의 전변을 목격하게 된다. 1) 전대 18세기 절대주의 시대와 계몽의 습작 시기, 전체를 중시하며 조화와 질서를 추구하던 상황, 그리고 2) 유럽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이해하며 ‘타자’의 규칙을 습득할 것을 강조하던 몰개체적 상황, 마지막으로 3) 러시아인의 개성보다 계몽된 문명인으로의 진입이 강조되던 상황에서, 다름 아닌 감정을 지닌 창조적 개인에 대한 강조는 그 개인의 집합체로서 결국 개별 ‘민족’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러시아의 이러한 민족적 낭만주의로의 이행에는 특히 독일 학자들의 영향이 컸었다.
   그 결과 개별 민족만의 독특한 자국어, 자국 풍습과 민속, 자국의 역사 등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 낭만주의의 핵심이자 러시아 민족 문학의 국부로 등장한 알렉산드르 푸쉬킨(А. С. Пушкин, 1799 -1837)은 귀족 계층의 태생적 조건으로 외국어에 능통하며 러시아적 현실과 상황을 함께 바라보는 경계인이자 종합인으로 기능했다. 아프리카계 혈통에서부터 비롯해, 러시아 문학사에서 가장 세계 시민(cosmopolitan)적이었던 푸쉬킨은 어렸을 때부터 수많은 외국어 문학 작품을 원전으로 직접 접하며 여러 다양한 종류의 글과 말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감각을 길러 왔다.
 

푸쉬킨(좌)과 러시아로 건너온 그의 조상으로 이야기되는 에디오피아 출신의 한니발 장군(우)
출처: 위키피디아 5)


   하지만 푸쉬킨의 문학적 시작은 다름 아닌 모방으로부터 비롯했다. 남의 말과 글을 열심히, 특히 프랑스와 영국 낭만주의 시인들의 말과 글을 열심히 모방하며, 문학의 길로 들어선 푸쉬킨은 시간이 지나며 축적된 모방으로부터 나아가 어느덧 자신의 말과 글을 세상에 내놓기 시작했다. 그의 많은 성숙한 문학작품들은 낯선 말, 낯선 언어의 (익숙한 말과 익숙한 언어로서) 모국어로의 ‘번역’뿐 아니라 실은 번역을 대리 창작과 모방을 통한 재창조의 선언으로 삼았다. 이는 어찌 보면, 모든 문학에 조금씩 편재하는 현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매우 적극적으로 타자의 목소리와 텍스트에 반응하며 그로부터 자신의 목소리와 텍스트를 생산해 내는 근대 러시아 문학 일반의 경향을 정향(定向)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푸쉬킨 이후의 러시아 문학은 도스토옙스키(Ф. М. Достоевский)도 초기에는 프랑스 리얼리즘 소설가들의 작품을 번역하며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이후 19세기 말 20세기 초 이른바 모더니즘의 시기에도 프랑스의 상징주의와 고답파(高踏派), 이탈리아의 미래주의 등을 그 영감의 원천으로 삼아 자신들 러시아인의 문학으로 체화하고 승화해 나갔다.
러시아 문학, 다양성으로부터의 가치
사실상 모든 민족 문학은 러시아 문학의 경우처럼 수많은 갈래의 이질적이고 타자로부터 비롯한 여러 다양한 영향 아래 형성되어 간다. 그 영향 관계를 명시적으로 밝혀내기가 쉽지 않은 경우가 있겠지만, 문화는 기본적으로 언제나 복합적인 상호작용하에 축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 중 가장 정교하며 복잡한 인간의 언어를 매개로 생성되는 예술인 문학, 그리고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배경뿐 아닌 개인의 개성적 부분까지 가장 섬세하게 표현해 낼 수 있는 예술인 문학, 그리고 한 민족의 집단의식을 반영하고 선도한다는 문학, 그중에서도 가장 독자성이 강하며 자신들만의 유일무이하고도 독특한 특징이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러시아 문학 또한 사실은 문자의 도입이라는 시작 단계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매우 다양한 여러 주변 문학의 영향하에서 자신들의 문학을 형성해 나갔다. 러시아 하면 문학이고, 문학 하면 러시아를 떠올릴 수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 문학은 우리의 예상과는 조금은 달리 의외로 상당 부분 여러 다양한 남의 것들로부터 시작했고, 또 그렇게 이어져 내려갔다.
   러시아 문학에서 상정되는 다양성의 진원지로서 타자의 그림자는 넓고 두터웠다. 한때는 거역할 수 없을 정도로 짙기까지 했었다. 첫머리에 언급한 것처럼, 러시아는 자신들의 문학을 만들어 나감에 있어 남의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남은 우리와 같지 않은 것이 지당하며,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것을 보아야 한다는 존재론적 명제로 모든 경우 회귀해 왔다.
   비록 남의 것을 가져오고, 남의 것으로부터 시작하지만, 러시아인들의 문학은 오히려 그 다양한 출발과 근원에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들의 일반적 통념처럼 러시아인들은 일방적으로 오로지 자신들만의 것에 매달리지 않았고, 그걸 지켜야 한다고 애써 방어 본능을 불러일으키지도 않았다. 오히려 놀랍다 싶을 정도로 다양한 외부로부터의 영향과 전파에 개방적이었으며, 자신들이 먼저 그걸 받아들이려 애를 쓰기도 했었다. 하지만 타자로부터의 다양한 연원에 대해 러시아는 일방적으로 수용만 하지 않았다. 남들로부터 출발한 것을 러시아는 누구보다 빨리 그리고 진정 자신들에게 잘 어울리게 내재화해서 이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다. 종교도, 문자도, 문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결국 오늘날 러시아적 가치의 많은 부분은 여러 다양한 외부적 근원에서 비롯했지만, 이를 자신들의 것으로 현명하게 체화해 냈다는 점은 러시아의 힘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다양성으로부터 비롯한 내재화야말로 러시아 문학의 진정한 가치인 것이다.
목차
영시(英詩)가 전하는 다양성의 가치
러시아 문학, 다양성으로부터의 가치
듣기
화면 설정
arrow_drop_down
  • 돋움
  • 바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