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를 유럽 대부분의 나라와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 러시아의 글자, 정확하게는 Б, Г, Д, П, Ф, Ш 등 난생처음 보는 매우 생소한 러시아어
알파벳의 영향도 클 것이다.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영어 알파벳
(실은 라틴 알파벳이라고 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하다.)과 시각적으로 차이가 뚜렷하기에, 러시아에 대해서 갖는 여러
‘다양한’ 생각들이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왜 러시아만 다른 문자를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고고학적 증거 등으로 살펴볼 때, 5~6세기경부터 중동부 유럽 지역의 넓은 평원에서는 오늘날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시 및 폴란드와 체코, 그리고 불가리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등 슬라브 여러 민족의 공통 조상 격인 사람들의 정주 생활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슬라브인들은 초기에 각자의 슬라브 구어로 의사소통을 했다. 말은 있었으나
문자는 아직 부재했던 초기 슬라브인들의 언어생활에서 문자의 탄생은 다름 아닌 기독교의 전파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서기 863년 오늘날의 체코 지역 모라비아
(Moravia) 땅에서는 비잔티움 제국에 기독교를 전파해 줄 것을 요청하게 된다. 겉으로는 종교의 도입을 청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접경한 신성로마제국의 로마가톨릭 수용을 핑계로 한 정치적 간섭을 피하기 위해 로마가톨릭과 경합 관계에 있는, 동방정교
(Eastern Orthodoxy) 세력인 비잔티움
제국에게 외교적 원조를 청한 것이었다. 이에 당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였던 미하엘 III세
(840-867)는 모라비아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같은 슬라브 혈통으로 슬라브 구어에
능숙하며 콘스탄티노플에서 교육받은 비잔티움의 학자 키릴
(Κύριλλος, 827-869)과 교회 행정가 메포디
(Μεθόδιος, 815-885) 형제를 포교단으로 파견했다.
이 중 특히 동생 키릴은 비잔티움 제국의 공용어인 그리스어를 바탕으로 슬라브 구어를 표기할 수 있는 문자를 창안해 그리스어 성서를 번역, 모라비아 땅의 슬라브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게 된다. 이들 형제가 모라비아로 가는 여정에서 창안한 바로 이 문자가 전체 슬라브인들의 초기 문자 체계인 글라골리차
(Glagolitic script)였다. 키릴과 메포디가
창안해 전파하기 시작한 슬라브인들의 문자는 이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간소화되어 키릴 알파벳
(Cyrillic alphabet), 즉 키릴리차
(кириллица)로 불렸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러시아 문자가 바로 이 키릴리차이며, 키릴리차는 현재의 불가리아,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등의 남
(南)슬라브 지역에서 널리 쓰였다. 시간이 지나 10세기 후반경에는 좀
더 북쪽에 거주하던 슬라브인들에게도 확산되었으니, 이때 키릴리차를 받아들인 슬라브인들이 러시아, 우크라이나, 그리고 벨라루시인들의 조상인 동
(東)슬라브인들이다. 이 무렵을 기해
키릴 알파벳은 동쪽으로는 오늘날의 러시아로부터 서쪽으로는 체코, 남쪽으로는 불가리아에 이르는 지역에 거주하던 모든 슬라브인들의 문자로 쓰였고, 오늘날까지 많은 슬라브인들의 문자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키릴 알파벳(좌), 글라골 알파벳(우)
출처: Про религию
1)
키릴과 메포디 형제의 성화
출처: mycatholic.life
2)
키릴과 메포디 형제의 성화이다. 왼쪽 검은 옷을 입은 수도사가 키릴, 오른쪽 동방교회 십자가를 든 성인이 메포디이다. 두 사람은 흔히 키릴 알파벳이 적힌 두루마리와 키릴 알파벳으로
번역한 성서를 펼쳐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오늘날의 러시아 조상들의 역사 시대 첫 단계는 바로 이 키릴 문자의 도입과 그리스도교의 전래와 함께한다. 현대의 국가 단위로 러시아, 우크라이나 그리고 벨라루시의 조상들이 단일한
정치적 통합체로 마련한 키예프 루시
(Киевская Русь)
3)는 새로 도입된 키릴 알파벳을 자신들의 음성 언어를 문자 언어로 정착하는 수단으로 수용,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나가며 문자 기록과 함께
역사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