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시(英詩)가 전하는 다양성의 가치
장성현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영시는 다른 어느 언어권의 시문학보다도 지리적·시간적으로 광범위한 다양성을 보인다. 영시는 본래 영어의 본고장 영국에서 쓰인 시를 일컫는 것이었고 거의 영국 안에서만 읽혔다. 그러나 영국이 17세기 이후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불리면서 영시의 영향력은 세계적으로 확장되었다. 오늘날 영시는 영국과 (한때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뿐 아니라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들에서도 활발히 창작되고 있다. 영어가 세계어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면서 세계 문학에서 영시가 갖는 교육적·문학적 위상도 더욱 커져 왔다. 실로 영시는 국경을 초월해 세계인이 즐기는 시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대형 서점 문학 코너에 가 보면 수많은 번역 영시집을 만날 수 있다. 영시의 풍성한 문학성은 시인들의 다양한 국적에 기인할 뿐 아니라 오랜 역사 동안 탁월한 시인들이 지속적으로 배출되었다는 점에 있다. 영시의 긴 역사를 살펴보면 영국을 대표하는 대문호 셰익스피어(Shakespeare)와 『실낙원』이라는 장엄한 서사시를 남긴 밀턴(Milton)을 포함해 뛰어난 시인들이 중세부터 지금 시대까지 고루 분포되어 있다. 딱히 어느 시기를 가리켜 영시의 황금시대였다고 부를 수가 없다. 시대마다 탁월한 역량의 시인들이 등장해 다양한 형식과 주제의 작품들을 남김으로써 영시의 콘텐츠는 무척이나 풍부해졌다.
   이 글에서는 몇 편의 영시를 골라 다양성의 가치가 어떻게 설파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위에서도 영시 자체가 역사적·지리적으로 다양성을 축적해 왔음을 간략히 설명했으나, 『디베르시타스』의 독자에게 이 사실이 그다지 중요하게 와닿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독자가 보다 흥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한 편의 영시가 다양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고 독자에게 그 인식을 어떻게 전달하고 있는지, 또 시인이 다양성에 대해 취하는 입장이 현대사회에서 가지는 의의는 무엇인지 등일 것이다.
에밀리 디킨슨: 소수의 의견이 존중받는 사회

먼저 19세기 미국의 여성 시인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 1830-1886)의 작품을 살펴보자.

깊은 광기는 아주 신성한 분별력으로 보이지 ─
통찰력을 갖춘 눈에는 ─
깊은 분별력은 아주 뚜렷한 광기로 보이고 ─
다수가 이 일에도 전부인 양 이기지 ─
동의하면 ─ 당신은 제정신인 거고 ─
이의를 대면 ─ 당신은 즉시 위험한 인물이 되어 ─
사슬에 묶이지 ─ 1)


   대시(─)의 잦은 사용은 디킨슨 시의 특징이다. 이 시는 광기가 분별력으로 보인다는 디킨슨 특유의 패러독스로 시작한다. 패러독스는 언뜻 보기에 앞뒤가 안 맞는 말이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진리가 담긴 말을 가리킨다. 1-2행은 통찰력 있는 관찰자가 보기에 대부분 사람들이 한낱 광기로 치부하는 게 사실은 탁월한 분별력일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왜 “신성한 분별력”일까? 성경을 보면 신의 영감을 받고 예언을 하는 사람이 광인으로 취급받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다수가 광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폄하하는 생각이 실은 신이 부어 준 영감에서 나온 생각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분별력’으로 옮긴 영단어 sense가 ‘감각’, ‘직감’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광기는 신과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정신적 경지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3행에서 디킨슨은 1행의 내용을 뒤집어 다수가 탁월한 분별력에서 나온 행위로 칭송하는 것이 실은 미친 짓일 수 있다는 말을 한다. 통찰력을 갖춘 현인의 눈에는 다수가 분별 있는 생각이라고 받아들이는 게 광기의 소산이라는 점이 너무나 분명하다. 필자가 ‘뚜렷한’으로 번역한 stark는 ‘완고한’, ‘황량한’이란 의미도 있다. 사람은 자신이 하고 있는 생각을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생각에 대해 아주 완고한 입장을 취하기 쉽다. 자신의 생각이 다수의 지지를 업고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가 생각을 바꿀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진다. 현인이 보기엔 이런 완고함이야말로 광기가 들린 상태이고 그 사람의 정신을 황폐하게 만든다. 디킨슨은 4행에서 다수가 자신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소수를 아예 없는 존재로 간주하여 자신들의 생각이 만장일치에 의해 도출된 것인 양 행세한다고 비판한다. 다수를 전부와 동일시하여 무엇이 광기이고 무엇이 분별인지 자신들이 정해 버린다는 것이다.
   5행부터 7행까지는 다수가 자신들에게 동의하는 개인과 이의를 제기하는 개인을 어떻게 다르게 대하는지 묘사한다. 당신이 다수의 의견에 찬성하면 다수는 당신을 제정신을 갖춘 사람, 사회의 안전에 위협이 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선포한다. 그러나 당신이 다수의 의견에 반대하면 당신은 곧바로 위험한 사람으로 낙인찍혀 사슬에 묶일 것이다. 다수에게 정상인으로 인정받는 길은 빠르고 쉽다. 당신이 다수에 동조하면 당신은 세 단어(‘당신은 제정신인 거고’) 만에 그들의 일원으로 편입되고, 동조하지 않으면 당신은 그 두 배가 넘는 일곱 단어(‘당신은 즉시 위험한 인물이 되어 / 사슬에 묶이지’)에 걸쳐 요주의 인물이 되고 신체적 구속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6행의 첫 단어 ‘이의를 대면’의 영단어가 demur인 점은 흥미롭다. 사실 이 단어는 ‘반대하다’를 의미하는 영단어들 중에선 톤이 낮은 단어이고, 발음상 ‘속삭이다’라는 뜻의 murmur를 떠올리게도 한다. 다수의 의사에 반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속삭이듯 말해도 인정사정없이 혹독한 처벌이 뒤따른다. 동사 demur에 e를 붙이면 ‘침착한’, ‘예절 바른’을 뜻하는 demure가 되는데 이 형용사는 디킨슨 자신의 성격을 연상시킨다. 겉으로 보기에 디킨슨은 다수가 수용하는 사회적 관습과 인식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는, 예의 바르고 차분한 여성이지만 그녀의 내면에선 다수의 지배에 대한 반항심이 계속해서 고개를 들었던 것이다. 6행 ‘이의를 대면’ 바로 다음에 나오는 대시는 겉보기에 온순한 성격의 여성인 디킨슨이 자신의 자유를 억압하는 다수에게 소리 없이 던지는 단도처럼 느껴진다.
   디킨슨의 시는 사회 공동체 내의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해선 다수의 횡포를 방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다수의 사람들이 2행의 ‘통찰력을 갖춘 눈’으로 세상을 볼 수는 없다. 무엇이 진짜 미친 짓인지, 무엇이 진정으로 분별력 있는 행동인지 가려낼 수 있을 정도의 지혜와 식견을 갖춘 사람들은 소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수가 자신들이 사회 전체를 대변한다는 착각 하에 자신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소수를 불순분자로 몰아 온갖 검열과 폭력을 가한다면 그 사회는 다양성의 활력을 잃어버린 사회, 즉 전체주의 사회가 돼 버리고 말 것이다. 다수가 소수집단의 견해와 사고를 존중하고 관용을 베푸는 사회가 다양성의 가치가 뿌리내린 건강하고 성숙한 사회이다.
셰익스피어: 그대의 사랑은 그대의 언어로 표현하라

다음에 읽을 시는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문호로 꼽히는 셰익스피어(1564-1616)의 시이다.

내 연인의 눈은 태양 같지 않으며,
그녀의 입술보단 산호가 훨씬 붉다.
눈이 희다면 그녀의 가슴은 왜 그리 시커먼 건지,
머리카락이 금사(金絲)라면 그녀의 머리엔 검은 철사가 자란다.
붉고 흰 장미를 나도 보아 왔지만
그녀의 뺨에선 그런 장미를 볼 수 없다.
그리고 어떤 향수 중엔 내 연인이 풍기는
입 냄새보다 더 기분 좋은 것도 있다.
난 그녀가 말하는 걸 듣길 좋아하긴 하나,
음악이 훨씬 더 감미로운 소리를 갖고 있다는 걸 잘 안다.
난 여신이 걷는 걸 본 적이 없다는 걸 인정하겠다.
내 연인은 걸을 때 땅 위를 밟는다.
그러나 맹세컨대 난 내 사랑이 허황된 비교로
잘못 묘사한 여자만큼이나 드물다고 믿는다. 2)


   이 시는 형식상 쏘네트(sonnet)라고 불리는데, 쏘네트는 14행의 정형시를 가리킨다. 셰익스피어가 창작한 모든 쏘네트는 동일한 압운(押韻)형식을 갖는다. 셰익스피어가 1609년에 출간한 쏘네트 시집에 실린 이 시는 당대의 연애시들에 대한 일종의 패러디라고 할 수 있다. 16세기의 많은 연애시 작가들은 연모의 대상인 여성의 외모를 이상화해 찬미했는데, 그들이 특히 즐겨 쓰던 방식은 블라종(blazon)이었다. 블라종은 여성의 신체적 아름다움을 부위별로 비유법을 써서 묘사하는 것을 뜻한다. 보통 여성의 머리에서 발로 시선을 이동하며 목록화해 묘사했다. 그녀의 눈은 태양같이 빛나고, 입술은 산호보다 붉고, 피부는 백설 같고, 뺨은 장밋빛이고 등등. 그런데 문제는 많은 시인들이 블라종의 방식을 쓰다 보니 그들의 묘사가 비슷해졌다는 데 있다. 블라종의 많은 비유들이 거의 공식처럼 굳어졌다. 찰스 소렐(Charles Sorel)이란사람의 책에 실린 아래 그림은 이러한 관습적 표현들을 한 여인의 초상화 안에 한데 모아 놓았다. 3)

출처: 찰스 소렐(1653)


   블라종의 종합판이라 할 이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선 여인의 이마에는 사랑의 신 큐피드가 화살을 든 채 앉아 있다. 큐피드의 화살을 맞으면 처음 본 사람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여인의 두 눈 역시 화살을 쏘고 있고, 눈썹은 활의 모양을 하고 있다. 어느 남자든 이 여인과 시선을 마주치면 그녀에게 매혹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인의 두 눈동자는 태양이고, 뺨에는 백합과 장미가 피어 있고, 입술은 붉은 산호, 이빨은 진주이다. 머리에 쓴 망에는 심장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지금껏 이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긴 남자들의 심장인가? 재미있게도 두 가슴은 지구의(儀) 모양을 하고 있다.
   사실 소렐의 삽화 자체가 식상하고 관습화된 블라종에 대한 패러디라 할 수 있다. 시인들이 흔히 쓰는 블라종을 시각적으로 재현해 보니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외모의 여인이 나오더라는 것이다. 이 삽화가 나온 17세기 중엽에 이르러선 여성에 대한 비현실적이고 과장된 묘사는 이미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반세기 전에 나온 셰익스피어의 쏘네트는 블라종의 진부하고 허황된 비유들을 거부하고, 연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직시할 것을 요구한다. 판에 박힌 듯한 블라종은 개별 여인의 ‘유니크(unique)’한 아름다움을 포착하기엔 너무나 부적합한 언어가 돼 버렸다. 진부하고 뻔한 비유로 여성 개인이 지닌 다양한 미(美)를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셰익스피어는 연인의 눈이 빛나는 태양의 모습과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는 점, 산호가 연인의 입술보단 훨씬 붉다는 점, 연인의 피부는 백설 같기는커녕 햇볕에 그을어 까무잡잡하다는 점, 연인의 머리는 금발이 아니라 흑발이라는 점, 연인의 뺨에선 장밋빛을 (그게 어떤 색깔이건 간에) 아예 찾을 수가 없다는 점, 연인의 구취(口臭)보단 향수 냄새가 훨씬 향긋하다는 점, 연인의 목소리가 사랑스럽긴 하나 솔직히 음악 소리보다는 못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리고 다른 시인들은 연인을 여신이라 부르며 떠받드는데 자신의 연인은 여신이 아니기에 공중에 떠다니지 않고 땅 위를 밟고 다닌다고 말한다. 셰익스피어는 이렇게 연인에 대한 과도한 이상화를 거부함으로써 사랑의 진정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셰익스피어가 마지막 두 행에서 하는 말은 우리의 기대에서 살짝 어긋난다. 그는 ‘난 내 사랑이 허황된 비교로 / 잘못 묘사한 여자만큼이나 드물다고 믿는다’라고 말한다. 다른 시인들이 과장이 넘치는 블라종으로 리얼리티가 매우 떨어지게 묘사한 여자들보다 내 여자가 더 귀하다, 라고 말해야 되는 것 아닌가? 왜 굳이 동등 비교(as ... as)를 쓰고 있는 것일까? 시인들이 그들의 연애시에서 칭송하는 미의 특징을 모두 갖춘 여성은 아마도 현실엔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두 세 가지라도 갖춘 여성을 찾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시인들이 흠모하는 아름다움을 (일부라도) 지닌 여성이 현실에 무척 드문 것처럼 자신의 연인 또한 현실에서 마주치기엔 무척 드문 아름다움을 지녔다는 것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그의 연인은 연애시에 흔히 등장하는 여인과는 많이 다른 외모를 갖고 있다. 그가 연인을 사랑하는 것은 그녀에게 그만이 알아본 아름다움, 어쩌면 그이기 때문에 알아볼 수 있었던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사랑의 주관성이다. 이 점은 시 본문에 주격 ‘나’와 소유격 ‘나의’(혹은 ‘내’)가 도합 8번이나 등장(영어 원문에선 11번)한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내’ 연인만이 지닌 아름다움을 획일적이고 진부한 언어로는 담아낼 수 없다. 각자가 사랑하는 연인의 아름다움은 각각 특징이 다르다. 사랑의 본질은 보편적으로 동일하지만 그것의 양태는 연인들마다 제각각이다. 남이 만들어 낸 비유, 처음엔 신선했을지라도 지금은 식상하기 그지없는 표현으로는 나의 고유한 사랑의 감정을 진정성 있게 표현할 수 없다. 셰익스피어의 쏘네트는 화석화된 획일적 언어를 거부하고 개인의 사랑을 개인의 진정성 있는 언어로 표현할 것을 주장한다. 결국 사랑의 다양성은 다양한 사랑의 언어로써만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사랑은 나의 언어로만 진심을 담아 전할 수 있다.
월러스 스티븐스: 획일화된 삶의 거부

다음에 읽을 시는 20세기 미국의 시인 월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 1879-1955)의 작품이다. 제목은 「10시의 환멸」(Disillusionment of Ten O’Clock)이다.

저택에 하얀 잠옷이
출몰한다.
어떤 잠옷도 녹색이거나,
녹색 동그라미 그려진 자줏빛이거나,
노란색 동그라미 그려진 녹색이거나,
파란색 동그라미 그려진 노란색이 아니다.
어느 잠옷도 기묘하지 않은데,
양말에 레이스가 있거나
띠에 구슬이 달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개코원숭이와 페리윙클에 대한
꿈을 꾸지 않을 것이다.

다만, 여기저기, 늙은 선원이,
술에 취해 신발을 신은 채 잠들어,
석양에
호랑이를 사냥한다. 4)


   스티븐스는 먼저 교외 저택에 거주하는 중산층의 삶을 묘사한다. 이들은 모두 하얀 잠옷을 입고 밤 10시면 잠자리에 드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잠옷은 그저 흰 천으로 만들어졌을 뿐 다른 색깔도 문양도 없고, 레이스나 구슬이 달려 있지도 않다. 스티븐스는 이들이 꿈속에서 개코원숭이와 페리윙클 꽃을 볼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한다. 왜 굳이 개코원숭이와 페리윙클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요지는 이들은 결코 기묘한 꿈을 꾸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두가 똑같이 흰색 잠옷을 입는 이들은 개성을 잃어버린 사람들, 정해진 루틴(routine)에 따라 획일화된 삶을 사는사람들이다. 이들의 삶에는 녹색·노란색·파란색 등의 색상과 레이스 있는 양말, 구슬 달린 띠 등이 상징하는 다양성과 상상력이 부재한다. 1-2행에서 이들이 자신이 사는 저택에 ‘출몰한다’(haunt)고 표현된 것은 의미심장하다.영단어 haunt엔 ‘귀신 혹은 유령이 나타나다’의 의미도 있기 때문에, 1-2행은 하얀 잠옷을 입어 외관상으로도 유령을 연상케 하는 이 사람들이 실은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는 건 무엇이든 거부하고 상상력의 발현을 (꿈에서조차) 억제하는 이들의 삶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삶, 활력을 잃어버린 삶이다. 이렇게 볼 때 시의 제목 「10시의 환멸」이 의미하는 바는 밤 10시가 되면 약속이나 한 듯 흰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로 향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느끼는 환멸이다. 조금만 상상력을 발휘하면 삶을 훨씬 더 다채롭게 만들 수 있는데 그 정도도 하려 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시인의 환멸이다. 
    시인은 이런 환멸을 떨쳐 버리려는 듯 2연에서 호랑이를 사냥하는 꿈을 꾸는 한 늙은 선원 이야기를 한다. 이 선원은 1연에 나오는 교외의 주민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세계 곳곳을 항해하며 낯선 풍토, 신기한 문화 속에서 인간 삶의 다양성을 체험했을 것이다. 그에게 일상의 루틴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잠옷으로 갈아입기는커녕 신발조차 벗지 않고 잠이 든 것은 그가 굳어진 관습에 따라 사는 것을 거부하는 인물임을 말해 준다. 꿈에서 개코원숭이를 본 적이 없는 교외 주민들과는 달리 선원은 꿈속에서 호랑이를 잡는다. 사실 현실에서 호랑이 같은 맹수는 사냥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동물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을 꿈속에서 성취한 것은 선원이 그만큼 왕성한 상상력을 지닌 인물이라는 것을 뜻한다. 또 현실에서 정말 호랑이 사냥을 나간다면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크겠지만, 꿈속에서의 호랑이 사냥은 흥분되고 박진감 넘칠 것이다. 배경이 해가 지기 전 석양인 것은 선원이 죽음의 때와 멀지 않은 노인인 것과 연관이 있다. 그러나 석양의 붉은빛이 암시하듯 선원은 여전히 삶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삶의 다양한 모습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여전히 갈망한다. 그의 삶은 생명력을 잃고 유령처럼 살아가는 교외 주민들의 삶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G. M. 홉킨스: 다양한 것이 곧 아름답다

스티븐스의 시는 삶에 다양성의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우리가 이제부터 읽을 영국 시인 G. M. 홉킨스(G. M. Hopkins, 1844-1889)의 시는 바로 상상력이 자연의 아름다움이 지닌 다양성을 통찰할 수 있는 힘임을 가르쳐 준다. 다음은 홉킨스의 시 「얼룩덜룩한 아름다움」(Pied Beauty)이다.

얼룩무늬 만물을 지으신 주님께 영광─
얼룩빼기 암소 같은 두 가지 색깔의 하늘,
헤엄치는 송어 등에 빼곡히 점각한 장밋빛 점들,
땅에 떨어져 갓 피운 석탄처럼 열매를 드러내는 밤, 피리새의 날개들,
구획되고 결합한 풍경─방목지와 휴경지와 경작지,
그리고 온갖 교역, 의복과 연장과 배의 장비들에 대해.
만물은 상반되고 색다르고 희귀하고 낯설다.
무엇이든 변하기 쉽고 반점들 생기니 (누가 연유를 알리?)
빠르거나 느리고, 달거나 시큼하고, 눈부시거나 흐릿하다.
이 모든 것을 변치 않는 아름다움을 지닌 그분이 낳으셨다.
그분을 찬양하라. 5)


   가톨릭교회의 사제였던 홉킨스는 자연의 다채로운 아름다움에서 창조주 신의 영광을 목도한다. 첫 행의 ‘주님께 영광’과 마지막 행의 ‘그분을 찬양하라’는 홉킨스가 속했던 예수회의 표어 2개를 살짝 변경한 것이다. 시의 제목 「얼룩덜룩한 아름다움」에서 드러나듯 홉킨스가 보기에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은 그 본질이 얼룩덜룩함, 즉 다양성에 있다. 홉킨스는 신을 얼룩덜룩한 모든 것의 창조주로 찬양한 후 2행부터 6행까지 얼룩무늬를 지닌 것들의 예를 제시한다. 2행에서 드는 예는 몸에 줄무늬가 난 얼룩소를 연상케 하는 하늘의 모습이다. 이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기만 한 하늘이 아니라 흰색 구름이 군데군데 띠를 이룬 하늘이다. 시인은 구름이 푸른 하늘에 흰 줄무늬를 새긴 것을 보며 암소의 얼룩 줄무늬를 떠올린다. 3행에서 시인은 강으로 시선을 돌린다. 강에서 헤엄치는 송어의 몸에 무수히 찍혀 있는 장밋빛 반점들 역시 얼룩진 미를 느끼게 해 준다. 홉킨스는 신이 화가처럼 점각법(點刻法)의 기술을 사용해 송어 등에 점들을 찍은 것으로 상상한다. 4행에선 가을의 대지로 다시 시선을 돌려 밤나무에서 떨어진 열매를 관찰한다. 땅에 떨어질 때 갈색의 껍질이 깨지며 안에서 드러난 불그스름한 밤은 난롯불에 갓 넣은 석탄이 부서지면서 빨갛게 빛나는 모습과 비슷하다. 밤 열매를 석탄에 비유하는 이 복잡하고 정교한 이미지는 영어 원문에서 겨우 네 단어(‘Freshfirecoal chestnut-falls’)로 만들어졌다. 필자가 이 네 단어를 두 배인 여덟 단어의 한국어로 옮긴 것은 (단어 수를 더 줄일 순 없었다) 홉킨스가 그만큼 시어를 압축적이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창조했음을 의미한다. 네 단어의 원문에서 특히 눈에 띄는 점은 홉킨스가 두 단어씩 하이픈을 이용해 결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홉킨스는 2행의 ‘두 가지 색깔’(couple-colour)과 3행의 ‘장밋빛 점들’(rose-moles)의 경우에도 하이픈으로 두 단어를 결합했다. 이것은 한국어 번역으로는 전달이 불가능한 이 시만의 언어적 특징이다. 시인은 일상 영어에선 아무 관련이 없는 단어들을 하이픈으로 연결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얼룩무늬의 아름다움을 언어적으로 구현한다. 상호 무관해 보이는 이미지들을 얼룩을 매개로 엮었던 시인은 품사와 의미가 다른 단어들을 하이픈으로 묶음으로써 시의 주제를 언어적 형식으로도 전달하고 있다. 
    홉킨스는 5-6행에 가선 자연풍경 속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활동에 주목한다. 그의 눈에 인간이 다양한 목적으로 구획한 토지의 모습은 그 얼룩덜룩함 때문에 아름답다. 어떤 땅에선 양을 방목하고 있고, 어떤 땅은 경작지로 쓰고 있고, 또 어떤 땅은 놀리고 있다. 아래 사진에서처럼 용도에 따라 토지는 다른 색깔을 띠게 되고, 위에서 보면 반듯하게 구획된 다양한 색깔의 토지들이 모여 얼룩무늬를 이룬다.

출처: Herry Lawford(2009) 6)


   시인은 지금 자연의 본래 풍경이 아니라 인간이 축산과 농업을 위해 변형을 가한 자연을 바라보고 있다. 중요한 점은 인간의 활동으로 인해 변형이 가해져 얼룩의 미를 갖게 된 토지이지만 본래 얼룩미를 가진 자연물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얼룩무늬 토지는 주변의 자연풍경과 전혀 이질감을 일으키지 않고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홉킨스는 6행에서 보다 인간에게 시선을 집중해 인간의 교역과 생업에 쓰이는 도구와 연장, 배의 장비 등도 얼룩미를 지닌 것으로 언급한다. 그는 자연 세계에서 관찰한 아름다움과 동일한 아름다움을 인공물에서 발견한다. 이 인공물들을 사용해 이루어지는 인간의 교역과 생업은 자연에 해를 입히지 않는다. 인간의 모든 경제적 활동은 자연환경과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행해진다.    아름답게 얼룩진 것들의 구체적인 예를 1연에서 나열했던 홉킨스는 2연에선 이것들의 속성에 대해 사색한다. 얼룩덜룩한 것은 무엇이건 상이한 색깔들로 구성돼 있고, 그 색깔들의 조합은 각자 고유해 희귀하고 낯선 느낌을 관찰자에게 준다. 또한 얼룩덜룩함의 조합과 형태 역시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주근깨 비슷한 반점들이 생기기도 한다. 여기서 ‘변하기 쉽고’(fickle)와 ‘반점들 생기니’(freckled)는 일반적으로 부정적 함의를 지닌 단어들이지만 시인은 얼룩덜룩한 미의 속성을 가리키는 어휘로 쓰고 있다. 홉킨스는 언어를 관습화된 용법에 따라 사용하기보다는 신선하고 때론 놀라움을 안겨 주는 방식으로 구사한다. 괄호 안에 있는 ‘누가 연유를 알리?’도 이런 언어 구사의 한 예이다. 이 말의 원문은 ‘who knows how?’인데, 일상 대화에서 흔히 쓰는 너무나 구어적인 표현이라 19세기의 시에서 (자유시가 대세가 된 20세기도 아니고) 이런 표현을 본다는 게 낯설게 느껴진다. 다양한 색상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 고유하고 독특한 미를 발산하는지 시인은 설명할 길이 없다. 다만 그 아름다움에 순수하게 감탄할 뿐이다. 정반대의 특성들—빠르거나 느림, 달거나 시큼함, 눈부시거나 흐릿함—이 부단히 새로운 결합을 만들면서 빚어내는 아름다움은 가톨릭 사제인 홉킨스에게 신의 존재에 대한 명확한 증거로 여겨진다. 자연 세계의 다양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아름다움은 신의 불변하는 아름다움이 발현된 것이다. 다시 말해 변하지 않는 신의 아름다움이 그의 창조물인 자연 속에서 다양성과 변화의 아름다움으로 나타난 것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 신의 아름다움을 체험한 시인은 신을 찬양하라는 말로 시를 끝맺는다. 
    이 시에서 홉킨스는 지나치기 쉬운 자연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의 보편적 특성을 사색한다. 그는 섬세한 관찰력과 상상력을 발휘해 서로 무관해 보이는 사물과 현상의 연관성을 얼룩을 매개로 파악한다. 홉킨스는 자연 세계가 빚어내는 아름다움이 그 속에 가득 차 있는 얼룩덜룩한 것들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즉 아름다움의 본질은 얼룩이 상징하는 다양성에 있다. 다양성이 아름다움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이다.
맺는말

지금까지 네 편의 영시를 읽으면서 이 작품들이 다양성의 가치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논의하였다. 디킨슨의 시에서는 다수의 지배와 횡포로 인해 사회적 다양성이 훼손되는 일이 없어야 함을, 셰익스피어의 쏘네트에서는 각자가 품고 있는 사랑의 다양한 감정은 각자의 고유한 언어로 표현할 때만 진정성을 담을 수 있음을 보았다. 또 스티븐스의 시에서는 획일화된 삶의 방식에서 탈피해 상상력을 펼치며 삶의 다양한 가능성을 최대한 탐색해 보라는 시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홉킨스의 시를 통해서는 다양한 것이 아름답기까지 하다는 점을 배울 수 있었다. 다양성은 곧 자연 세계의 형성 원칙이다. 따라서 다양성을 잃어버리면 아름다움마저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다양성의 가치를 필자의 전공인 영시 독해를 통해 탐구해 보고자 했던 이 글이 다양성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조금이라도 풍부하게 해 주기를 기대해 본다.
목차
영시(英詩)가 전하는 다양성의 가치
러시아 문학, 다양성으로부터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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