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혜 앤파씨 대표
장르가 다르다_ 공동체로 움직이는 교수들
2021년 9월의 어느 날. 한 학기 동안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배우게 될 것인지를 설명하는 첫 수업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교수진 세 사람이 자기소개를 한다. 한양대학교/임팩트리서치랩의 신현상 교수, 진저티프로젝트의 서현선 이사, 그리고 앤파씨의 박보혜 대표. 각자 가르치는 내용을 분담하는 것이 아니라, 셋이 같이 팀으로 진행을 한단다. 세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이것이 수업인지 토크쇼인지 헷갈릴 정도다.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수업과는 장르가 달라도 많이 다르다.
학생들에게 안전한 공동체의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우리 또한 안전한 공동체로 움직였다. 수업 중간중간 서로의 마음을 메신저로 나누면서 응원하고, 수업이 끝나면 꼭 함께 회고를 했다. 대학에서는 처음 수업을 진행하는 나에게 특히 이러한 환경은 큰 안정감을 주었다. 물론 이미 나의 모든 취약성을 알고 있는 그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취약성과 공동체성
나는 완벽주의가 심각한 사람이었다. 일을 잘한다는 것은 함께하는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내가 맡은 바를 완벽하게 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실수를 하거나 모르는 것이 있을 때면 회사를 운영할 자격이 없다고 자책을 많이 했다. 그 마음이 깊어져 회사를 더 이상 운영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쯤 임팩트리서치랩과 진저티프로젝트 식구들을 만났다. 그들은 나의 약해진 마음을 보고서도 나약한 대표라고 비난하지 않고 진심을 다해 공감해 주고 내가 계속 일을 해 나갈 수 있도록 다방면으로 도왔다.
괜찮지 않아도 다 괜찮다고 말하면서 혼자 고군분투하는 나에게 ‘중증 괜찮아요 병’이라는 병명을 붙이고는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보혜 님은 아직 함께 일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함께 일을 한다는 것은 맡은 바를 완벽하게 해내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상태가 어떤지를 동료들과 공유하고 그들이 보혜 님을 도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에요.”
한마디로 취약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때는 임신 후 입덧으로 굉장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던 때였는데, 계속해서 나의 상태를 집요하게 묻는 통에 그들 앞에서는 나의 힘듦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가장 약함까지도 나누는 공동체가 되어 있었다.
수업 첫 시간, 우리가 서로의 삶을 나누며 공동체가 된 것처럼 학생들에게도 우리 삶의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멋지고 빛나는 이야기가 아닌, 나의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 어쩌면 찌질하고 짠 내 나는 이야기 말이다. 그것은 앞으로 학생들이 본인의 삶 이야기를 편안하게 나눌 수 있도록 우리가 먼저 취약함을 내보이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막상 30분가량 소요된 자기소개를 끝내고 나니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대중 앞에서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쉬는 시간에 이런 나의 마음을 교수진과 공유하고 공감을 받고 나니 1차적으로 안정이 되었다. 그 힘으로 쉬는 시간이 끝나자 학생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나니 발가벗겨진 기분이 든다”며 나의 상태를 솔직하게 오픈했다. 그 순간 학생들은 저마다의 반응으로 나를 응원해 주었고, 나의 마음도, 우리 사이의 공기도 한층 편안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취약성에 대해서 『최고의 팀은 무엇이 다른가』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많은 경우 신뢰나 취약성을 마치 단단한 땅 위에서 미지의 세상으로 뛰어 넘어가는 것처럼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먼저 신뢰를 쌓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취약함을 드러낸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과학적인 연구 결과를 보면, 이 과정은 거꾸로 진행된다. 취약성은 신뢰에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 선행한다. 미지의 세상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도약할 때, 견고한 신뢰의 기반을 쌓아 올릴 수 있다.
1)
우리가 안전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서로의 취약함을 드러내는 솔직함이다. 그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누군가의 용기는 또 다른 이들의 용기를 촉발하는 놀라운 힘이 있다.
취약함을 먼저 드러낸 한 사람의 용기
깊은 공감은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공감 실습을 할 때 본인의 사례
(예를 들면, 내가 후회하고 있는 일)를 이야기하면, 나머지 서너 사람이 그의 마음을 반영하도록 한다. 이때 공감을 제대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야 하지만, 많은 이들이 어디까지 솔직해져도 되는지를 고민한다.
‘사회혁신 공감 실습’ 수업에서도 처음에는 마찬가지였다. 수업은 코로나19로 인해 전면 온라인으로 진행되었는데, 온라인 환경상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구글 스프레드시트
(Google Spreadsheet)의 워크시트
(Worksheet)를 활용해서 그곳에 학생들이 자신의 사례를 적으면서 실습하도록 했다. 곧잘 잘 써 내려가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1/3가량 되는 학생들은 자신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평가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 동료들에게 약점을 잡힐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쉽사리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지 못했다.
그러던 중, 한 학생의 자원을 받아 공감 시연을 하자고 제안했다. 좀처럼 쉽게 자원하기 어려워하는 그때 침묵을 깨고 한 친구가 자원에 나섰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본인이 후회하고 있는 사례를 이야기하고, 그때 본인이 느꼈던 느낌과 중요했던 욕구를 함께 찾아보는 공감을 진행했다. 그 학생의 고민은 본인에게 꽤나 무겁고 어려운 일이었고, 모두가 숨죽여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한마디 한마디 꺼내 놓기 어려웠지만, 끝까지 진솔하게 내면을 털어놓은 시연이 끝나고 나자 학생들 사이에 감도는 공기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교육자인 내가 취약성을 드러냈던 것과 동급생이 자신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강력한 영향력이 있었다. 그때까지 본인의 사례를 기록하지 못하고 있던 학생들의 대다수가 자신의 진솔한 이야기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먼저 자신의 취약성을 드러낸 용기가 다른 이들에게도 용기를 준 것이었다. 그날의 성찰 과제
(reflection memo)에는 시연을 보고 자신 또한 솔직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음을 언급한 학생들이 꽤 많았다.
“‘걱정, 불만, 후회 등과 같은 이야기를 꺼낸다는 게 나의 약점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구나.’, ‘누군가 나의 이야기를 가지고 판단, 조언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 주기도 하는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한양대학교 ‘사회혁신 공감 실습’ 참가 학생 C
나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것은 커다란 한 걸음이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로부터 비난이나 조롱을 받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랬구나.”, “그런 마음이었구나.”라고 온전한 공감을 받게 될 때 나의 내면에서는 치유가, 우리 사이에서는 두터운 신뢰와 안전감이 자리하게 된다. ‘여기에선 솔직해져도 된다.’라는 믿음이 그렇게 우리를 단순히 ‘같이 수업을 듣는 사이’에서 ‘친밀하고 안전한 공동체’로 만들어 주었다.
신나게 무슨 이야기든 떠들어도 괜찮아
공감 실습 수업에는 ‘체크인 공작단’이라는 시스템이 있었다. 서로 편하게 대화하며 마음의 장벽을 깰 수 있는 체크인
(check-in)으로 수업을 시작하고, 그날의 수업을 통해 깨닫거나 배운 점들을 나누는 체크아웃
(checkout)으로 수업을 끝맺었는데 이 중에서 체크인을 함께 기획하고 진행해 보는 학생들의 자원 모임이었다. 학생 D도 이 체크인 공작단이었다.
“저는 스무 살 이후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생각을 안 했었어요. 그동안 만나 온 사람들과 무탈하게만 지내고 싶었어요.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게 마음도 놓이지 않고 사실 무서웠어요. 처음에 이 수업에서도 제 이야기를 꺼내 놓는 게 굉장히 어려웠거든요. ‘근래 마음이 아팠던 기사문이 무엇이었는지’ 묻는 질문에도 미처 다 적지 못하고 그냥 ‘…’으로 마무리를 했어요. 적으면서 생각했죠. 이렇게 대충 적어서 마이너스 점수를 받겠구나. 그런데 우연히 공작단에 들어가게 된 거죠. 그 이후로 많은 것이 변했어요. 사람을 볼 때 충분히 마음을 놓는다거나 아니면 그 사람 안에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됐어요. 또 공감 실습에서 만난 친구들은 이상하게 좀 더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어요. 오래 보고 싶고요.”
체크인 공작단은 흡사 수다 모임과 같았다. 매주 수요일 저녁 9시 반부터 교수진과 체크인 공작단 친구들이 모였다. 필수는 아니었고 그냥 시간이 되는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모였다. 한 시간가량 아주 신나게 다양한 주제로 수다를 떨다 보면 어느새 ‘그럼 이번 주에는 이 주제로 체크인을 진행해 볼까?’가 정해졌다. 그날 무엇을 했는지, 무슨 음악을 좋아하는지, 추억 속 소울푸드
(Soul Food)는 무엇인지 등등 자기 자신과 관련된 무슨 이야기든 할 수 있었고, 모두 배꼽 빠지게 웃었다.
학생 D는 이야기했다. 이 시간이 너무 기다려졌다고. 원래 외향적이고 도전하길 좋아했던 D이지만, 학교 때문에 서울로 오면서 많이 위축되었고, 코로나19로 인해 더 메말라 버린 마음에 단비 같은 시간이었다고 했다.
“나도 더 표현해 보고 싶다, 뭐든 더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사람들이 자기의 세상을 많이 이야기해 주잖아요. 제 세상이 넓어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사람의 세상에 놀러 갔다 오니까, ‘재밌는 세상이 있구나. 나도 가 볼래! 내 세상을 넓혀 볼래!’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우리는 생산성에 대한 강한 환상이 있는 것 같다. 시간을 쓸 때에도, 대화를 나눌 때에도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쓸데없는 수다는 시간만 잡아먹는 비효율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본론부터!’를 외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 이야기라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때부터 수동적으로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때 뭔가를 더 하고 싶다는 ‘동기’가 만들어진다.
정말로 여기에서는 아무 이야기나 해도 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뭔가를 잘 말해야 한다는 평가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을 수 있다. 그때야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말랑말랑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수업 시간에 공감을 경험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첫걸음이다.
충분한 자기 공감은 나를 사랑하게 하고, 타인을 공감할 마음의 여유를 준다
수업은 공감에 대해 배우고 실습하는 전반부 8주와 배운 공감을 바탕으로 관심 있는 사회문제의 당사자들을 인터뷰하는 후반부 8주로 구성되었다. 전반부의 절반은 나 자신을 공감하는 것을 배우고 실습하는 데 할애했다. 그만큼 자기 공감이 타인 공감, 사회 공감의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대체로 공감한다고 했을 때 자연스레 ‘타인을 공감하는 것’을 떠올리기 쉬운 학생들에게 ‘자기 자신을 공감한다.’는 개념은 굉장히 낯설고 새로웠다. 그만큼 엄청난 파급력이 있었다. 특히 오늘날의 청년들은 평생에 걸친 심한 경쟁과 비교 가운데 자기 자신을 몰아세우고, 가혹하게 구는 것에 이미 익숙해졌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며 나 자신에게 공감한 적이 없었다. 나는 항상 나를 채찍질하기만 했지, 나를 이해해 보려 한 적은 없었다. 타인에게는 관대했지만, 정작 나 자신에게는 엄격했다. 그런 나에게 자기 공감 실습은 나 자신을 대하는 새로운 태도를 갖게 해 주었다.”
한양대학교 ‘사회혁신 공감 실습’ 참가 학생 E
이는 한 사람의 고백이 아닌, 수업에 참가한 대다수 학생들의 고백이다. 학생들은 첫 한 달 동안 ‘지난 일주일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일’, ‘ 후회되는 일’, ‘분노했던 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일’ 등을 주제 삼아 본인의 내면을 느낌·생각·욕구·신념이라는 세밀화된 층위로 면밀히 들여다보고, 스스로를 공감하는 연습을 했다.
스스로에 공감한다는 것은 본인이 발견한 마음에 물음표
(?)를 붙이지 않고 느낌표
(!)를 붙이는 것이다. ‘왜 그랬어?’가 아니라 ‘그랬구나!’라고 자기 스스로에게 공감해 주는 것이다. 자기 공감 실습을 통해 학생들은 치유를 넘어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변화를 경험했다.
“지금까지 후회했던 일과 그때 들었던 죄책감을 마음에 깊이 새겨두고, 스스로에게 족쇄처럼 만들어서 살아왔던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일이든 더 희생하려고 했고, 이로 인해 나 자신에게 많은 제약을 가했다. 이제는 그런 후회와 죄책감에서 벗어나 내가 하는 일에 자유를 주려고 한다.”
한양대학교 ‘사회혁신 공감 실습’ 참가 학생 F
누구나 제대로 된 공감을 받으면, 내면에 일종의 여유 공간이 생기게 된다. 우리는 비로소 그 공간 안에 다른 사람의 마음을 품을 수가 있다. 학생들은 4주간의 자기 공감 실습 후에 비로소 서로를 공감하는 타인 공감을 실습했다. 그 과정에서 본인들이 지금까지 공감이라 생각하며 해 왔던 것들이 사실은 공감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본인들이 지금껏 해 왔던 공감은 잔뜩 힘을 주고 에너지가 소진되는 것이었는데 진정한 공감은 쌍방으로 에너지가 채워지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 것 이다. 이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를 몸으로 알아 버린 이들은 자연스레 자신의 일상의 관계에서 계속 공감을 실천하고 싶어졌다.
“나와 친구는 항상 현실적인 것들에 대한 대화만 해서 감정 자체에 대한 것은 대화 주제로 삼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타인 공감 실습 후) 고민을 이야기하다 친구의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니 서로 벅차오르기도 하였다. 감정을 인정한다는 그 자체로 공감이 가진 힘에 놀랐다.”
한양대학교 ‘사회혁신 공감 실습’ 참가 학생 G
“투닥거리기만 했던,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동생에게 수험 생활의 힘듦에 대한 공감을 한 것은 아마 내가 동생에게 태어나서 처음 한 공감일 것이다. 눈시울이 붉어지며 더 열심히 공부하는 동생을 보며, 공감은 나와 내 주변의 관계를 진정으로 연결해 준다는 것을 체감했다.”
한양대학교 ‘사회혁신 공감 실습’ 참가 학생 H
내게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자기 공감과 타인 공감을 통해 공감이 가진 힘을 경험한 사람들은 공감이 너무 좋은 것이기에 ‘언제나 공감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기 쉽다. 공감을 교육하는 나에게도 종종 “너는 당연히 나를 공감해 줘야지!”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그러나 내겐 내 마음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공감 역시 내가 기쁜 마음으로 공감할 수 있는 만큼만 공감해도 된다. 나에게 공감 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은 나를 지키면서 다른 사람들을 공감하기 위한 제1의 원칙이다.
학생 I는 자라 온 환경적으로나 성향적으로도 공감력이 높은 학생 이었다.
“어릴 때부터 가족, 교회 공동체에서 받아들임에 대한 교육을 많이 받았어요. 지금 돌아보면 죄책감을 건드리는 것들이 많았던 거죠. 예전에는 가족으로부터 독립을 하려고 해도 죄책감을 느끼고 불편함을 느꼈거든요. 그 죄책감을 숨기려고 오히려 더 잘해 주고 그랬어요. 그런데 이 수업을 듣고 나서 내가 그들과 거리를 둬도 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노력을 하게 되었어요. 이제는 마음에 좀 더 여유가 생겼다고 해야 하나 그래요.”
학생 I의 이야기를 듣는데 나의 과거가 떠올랐다. 내가 공감을 배우기 전까지 나를 움직여 온 에너지 또한 ‘죄책감’이었다. 마셜 로젠버그
(Marshall B. Rosenberg)는 그의 책 『비폭력 대화』에서 이러한 상태를 ‘정서적 노예 단계’라고 말한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타인의 감정과 욕구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자신의 감정과 욕구는 잘 살피지 못한다. 빈번히 타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에 책임감을 느끼며 나의 욕구를 뒷전으로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왜 내 욕구는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해 주지 않지?’하는 피해 의식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점점 가까운 사람들이 부담스럽고 불편해진다. 심지어 이들을 멀리하고 싶은 마음까지 드는 비극적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반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많은 것들이 변하게 된다.
2)
“새벽에 과제를 하다가 딱 깨달았어요. ‘내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서 선택했던 것들에서도 사실 누리고 있던 것들이 있구나’라고요. 가족에게서 독립하고 싶기도 했지만 사실 다른 데로 가면 불안하니까나 자신에 대한 신뢰 없음을 사실 가족한테 투영하고 안정을 누리고 있던 것처럼요. 내가 하기 싫다고 생각한 선택들도 사실은 제가 뭔가를 얻고자 했던 것이라는 걸 깨닫고 나니까 다른 선택도 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선택의 힘을 깨닫기 시작한 사람은 가벼워진다. 죄책감, 두려움, 수치심으로 인해 움직여 왔던 삶이 자발적인 동기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가벼워지니 타인에게도 가벼워진다. 남에게 무언가를 강요하지 않고, 그들의 의사를 존중할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도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깨달음은 공감을 실천하는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소위 ‘좋은 일’을 한다는 사람들, 사회혁신/비영리 섹터
(sector)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도 매우 중요하다. 사회를 올바르게 바꾸겠다는 좋은 신념이 강할수록 나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이건 꼭 해야만 해”라는 강요를 하기 쉽다. 이 분야에 있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는 너무 좋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는 혹독하고 폭력적으로 구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이유는 대부분 이러한 마음에서 기인한다. 10년 이상 사회 혁신/비영리 섹터에 종사하면서 이 섹터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이 섹터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청년들에게 건강한 공감을 교육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