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들 – 성 정체성과 가정 배경
한국에서 ‘교수님’이라 하면 보통 어떤 모습을 떠올릴까? 요즘은 달라졌을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가 새내기일 무렵 마음속 교수님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양복을 차려입은 한국인 중년 남성이었다. 아마 머릿속의 그분은 50에서 60대쯤으로, 비슷한 연배의 아내와 갓 대학에 들어간 자녀가 있을 것이었다. 그분은 사회적으로 ‘어른’ 대접을 받는 이성애자 남성으로서, 한국인 ‘정상 가족’의 일원으로 나고 자라 또 다른 정상 가족을 꾸려 낸 가장일 것이었다.
이러한 이미지는 워싱턴주립대에 첫발을 디딘 지 얼마 안 되어 박살이 났다. 입학식 때 처음 본 총장님은 라틴아메리카 출신의 여성 레즈비언으로, 여성인 파트너의 팔짱을 끼고 등장했다.
(본토의 미국인이라 할 때 흔히 떠올리는) 백인 앵글로색슨 남성이 아닌, 성소수자이자 유색인종 여성이 명성 있는 대학의 총장일 수 있다니! 2022년의 한국에서는 이런 사례가 가능할까? 가령 태국이나 필리핀 출신의 레즈비언 여성이 흔히 말하는 ‘스카이’의 총장으로 임명된다고 가정해 보자. 해당 학교는 물론, 언론이며 인터넷 커뮤니티들은 대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아직은 상상하기 어렵다.
어느 맑은 날 워싱턴주립대의 정보대학과 그 앞의 드럼헬러(Drumheller) 분수
출처: 저자 제공
비단 총장님뿐 아니라, 오고 가며 마주치는 교수님들 중에서도 성소수자가 있었다. 모든 교수님이 돌아가며 갓 입학한 학생들과 편하게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는 ‘파이어사이드 챗
(fireside chat)’이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유난히 맵시 있게 옷을 차려입은 롭
(가명)이라는 교수님이 눈에 띄었다. 라디오 팟캐스트를 진행한다던 이분은 대단한 달변에다 무대 체질이라, 그날 수업에 참석한 학생들이 여러 번 폭소를 터뜨렸다. 학과 연말 파티에 참석했을 때, 같이 입학한 대학원생들 중 하나가 롭을 가리켰다.
“파트너랑 같이 왔네.”
롭은 자기 못지않게 훤칠한 중년 남성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옆 학과인 인간중심디자인 및 공학
(Human-Centered Design and Engineering)과에도 레이첼
(가명)이라는 교수님이 있었는데, 짧은 머리에 반삭을 하고 남방과 청바지를 입고 다녔다. 그분 역시 파트너가 여성이라했다.
교수님들의 가정 배경 역시 저마다 다양했다. 아만다
(가명)는 버뮤다 이민자 출신으로, 어릴 때 부모님이 이혼하고 각자 가정을 꾸리셨다고 한다. 휴가 때 가족을 만나러 간다고 하며 아무렇지 않게 새아버지 얘기를 꺼내시곤 했다. 함께 논문을 썼고 수업 조교를 했으며 지금까지 마음 속의 은사님으로 모시는 조앤
(가명)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을 둔 싱글 대디다. 오래전에 이혼한 아내와는 친한 친구로 지내며 함께 딸을 돌보다가, 내가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새로이 결혼을 했다. 이 모두가 다같이 점심을 먹거나 편하게 오가는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로, 정상 가족 외 다양한 가정 배경은 전혀 흠이 되지 않을뿐더러 그분들의 학자적 역량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혹시나 위 문단을 읽으며 의아함을 느꼈다면, 그 느낌이 맞다.
‘조앤인데 싱글 대디라고?’
조앤은 내가 학교에 입학하던 당시엔 조나단
(가명)으로 불렸다.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이었으니까. 조나단은 정말 모든 면에서 완벽한 교수님이었다.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이미 학자로서 너무나 출중했고 선생님으로서 모든 학생들에게 절대적인 존경을 받았으며, 보직 교수로서 학과를 위한 서비스 역시 모자람이 없었다. ‘이렇게 뛰어난 사람과 함께 일하며 배우기 위해 여기까지 왔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그런 그가 마흔이 되던 해 깜짝 선언을 했다. 자신은 사실 여자였다고. 언제나 잘못된 몸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었다고. 하지만 그동안 차마 터놓기가 두려웠다고. 딸이 무사히 대학에 입학했고,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었으며, 사랑해 주고 지지해 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는, 충분히 안심 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고. 학과 사람들의 열렬한 응원을 받으며, 조나단은 그렇게 조앤이 되었다. 머리를 기르고, 화장을 했으며, 수술을 받았다. 힘들거나 속상한 순간이 닥칠 때마다 페이스북에 감춤 없이 털어놓으면 격려와 응원의 댓글이 길게 달렸다.
단 한 순간도 어색함이 없었느냐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하겠다. 잘 알고 지내던 사람 중 성별을 바꾼 이는 조앤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소식을 듣고 난 직후엔 어떻게 대해야 가장 자연스러울지 고민이 되었다. ‘실수로라도 조앤을 조나단이라고 부르면 어떡하지?’, ‘이제 여선생님이 되었으니 뭔가 여성의 삶에 관련된 주제로 얘기를 꺼내야 하나?’ 등의 생각이 오갔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내가 성별을 바꿨다면 남들이 날 어떻게 대하길 바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을 때 저절로 사라졌다. 만일 오랫동안 숨겨 온 진정한 내 자신의 모습을 가족과 동료와 제자들 앞에 보여 줘야 한다면, 적어도 나라면, 그들이 달라진 내 모습에 지나치게 놀라거나 의식하지 않길 바랄 것이다. 이전과 별다를 바 없이 관계를 유지해 나가길 바랄 것이다. 내게 있어, 나는 여전히 나니까. ‘그렇다면 조앤도 비슷한 마음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고민이 어느 정도 정리되어 마음 편하게 조앤을 대할 수 있었다.
타고난 생물학적 성별을 바꾸어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일은 아무리 미국에서라도, 심지어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도시에서도 결코 쉽지 않은 결단이다. 조앤의 곁에는 여전히 그녀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응원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 나를 포함해. 조앤이 뛰어난 학자이자 훌륭한 인품을 지닌 선생님이란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녀가 남성이든 여성이든간에.
동료들 – 나이와 커리어
박사과정에 함께 입학한 동기들
(cohorts) 역시 내게 다양성의 폭에 대해 일깨워 주었다. 한국에서 석사과정에 입학했을 때는 거의 모두가 나처럼 갓 대학을 졸업한 20대 중반으로, 개중 절반 이상이 같은 과 출신이었다. 박사과정 중인 연구실 선배들도 30대가 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대체로 비슷한 경험을 한 동년배들끼리 비슷한 진로 고민을 지닌 채 연구의 길로 뛰어든다 하겠다.
그런 경험을 가지고 시애틀로 떠나온 내게,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난 동료들은 경이롭게 느껴졌다. 친절하며 수다스럽고 산타클로스를 닮은
(실제로도 학과 파티에서 산타로 열연한) 제이크
(가명)는 40대 중반으로, IT 매니지먼트 일을 하다 아내와 함께 시애틀로 이사를 왔다. 멋진 문신이 있고 웃을 때 생기는 주름이 시원스러운 케이트
(가명)는 넷째딸이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다정한 웃음에 조곤조곤한 목소리의 나탈리
(가명)는, 자폐가 있는 첫째 아들이 사회에 나가 스스로의 역량을 온전히 발휘하며 살아갈 방법에 대해 연구하고 싶다고 했다. 나탈리로부터 ‘자폐
(autism)’를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인 ‘신경학적 다양성
(neurodiversity)’이란 말을 그때 처음 배웠다.
새로 입학한 열세 명 중에서 내 또래는 네다섯 명뿐이었다. 나머지는 스스로 선택한 인생을 한동안 살아 본 어른들이었다. 학교 밖에서 저마다 다른 경험을 쌓으며, 새롭게 생겨난 각자의 고민과 소망을 풀기 위해 다시 학교로 돌아온 것이다. 이들의 지도 교수 중엔 나이 지긋한 노교수도 있었으며, 갓 임용된 30대 후반의 교수도 있었다. 중요한 건 나이가 아니라, 지도 교수가 얼마나 학생과 손발을 잘 맞춰 가며 연구 주제를 이끌어 줄 수 있는지 여부였다.
2020년대에 접어들며 다소 누그러진 듯하지만, 나이에 대한 한국 사회의 통념이 한 번에 사라질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대학 새내기들끼리 한두 살 차이로 군기를 빵빵하게 잡는다든가, 상사보다 나이가 많으면 승진하기 어렵다든가 하는 등의 얘기들이 잊힐 만하면 들려온다. 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이가 너무 많으면 한국에 돌아갔을 때 임용이 어려워진다는 얘기가 유학 나온 학생들 사이에서 어쩌다 한번씩 오래된 괴담처럼 떠돌곤 했다. 교수진과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나면 ‘애매’해진 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니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빨리빨리 학위를 마치고 때 잘 맞춰 얼른얼른 파릇파릇한 조교수가 되자, 으쌰. 이런 관점이라면 나와 같이 입학한 동기들의 미래 커리어에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그 나이에 학위를 마쳐도 임용해 주는 데가 있어요?’
거기에 대해선 꽤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다. ‘그렇습니다.’라고. 함께 일한 교수들 중 한 명인 엘라
(가명)는 워싱턴주립대 타코마
(Tacoma) 캠퍼스의 부교수다. 프로필 페이지를 볼 때 학부를 졸업하고 16년 후 인간중심디자인 및 공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니, 교수로 부임했을 때는 적어도 40대 중반이었던 셈이다. 한 학년 위의 동기인 스티브
(가명)는 현재 영국에 소재한 앨런튜링연구소
(Alan Turing Institute)의 펠로우로 근무하고 있다. 의지할 수 있는 어른다운 사람으로 동기들에게 평판이 좋았던 그 역시 중간에 커리어를 바꾼 케이스였다. 기업의 중간 관리자로 일하다가 40대 중반에 기술 및 정보 윤리라는 관심사를 좇아 박사과정을 시작했다고 들었다. 그러니 재작년에 박사 학위를 받았을 무렵엔 이미 50대에 접어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엘라와 스티브, 그리고 같이 입학한 내 동기들은 마치 바다 건너에 버티고 선 등대와 같아 그 존재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을 환하게 밝혀 준다. ‘반드시 나이에 맞춰 인생의 방향을 정할 필요는 없어.’, ‘공부를 하다가 일을 하러 떠나는 것만큼이나 일을 하다가도 언제든지 공부를 시작할 수 있어, 진심으로 원하기만 한다면.’ 이렇게 생각할 때마다 강력한 해방감이 찾아든다. 물론 세상의 모든 커리어가 이와 같지는 않겠으나, 적어도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만큼은 공부를 시작한 그때의 나이가 흠이 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다음부터 어떻게 하느냐니까. 모두가 똑같이 20대 중반부터 학위과정을 달려서 30대 초중반에 끝내야만 성공적인 삶이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저마다 다 다른 사람들인데.
간혹 UX 리서처를 지망하는 친구들이 찾아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묻곤 한다.
“꼭 대학원을 가야 할까요?”
“지금 석사를 받아야 할까요?”
“너무 늦어지는 건 아닐까요?”
나는 그럴 때마다 웃으면서 대답하곤 한다.
“공부는 언제든지 할 수 있어요. 하고 싶은 때가 왔을 때 하세요.”
학생들 – 인종과 언어
타지에서 공부하며 어려운 순간은 많고 많지만, 개중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건 강의하기가 아닐까 싶다. 영어도 어려운데 그 영어가 모국어인 이들에게 지식을 전달해 줘야 한다니! 혹시나 실수하지는 않을지, 또 무시당하지는 않을지, 생각만 해도 내장이 목구멍으로 올라올 일이다.
그 점에서 나는 운이 좋았다. 학과에서 성격 좋고 포용력 있기로 유명한 리즈
(가명)와 함께 인생 첫 강의를 반반씩 맡아 진행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리즈는 20년 넘게 학생들을 가르쳐 온 노련한 선생으로, 유쾌하고 강인한 사람이었다.
“만일 가르치다 실수를 하면 학생들에게 진심을 담아 미안하다고 사과해. 그걸로 많은 게 해결되지.”
그렇게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는 미국인 학생 가르치기가 시작되었다. 여름 학기 첫 수업에 들어가 학생들을 바라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물론 백인 학생들도 있었지만, 동양인이나 혼혈 혹은 하와이인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더 많았다. 워싱턴주 서쪽에는 동양계 미국인 인구가 유독 많은 편인데, 동아시아 국가들과 하늘길이 가장 가까운 미국 본토의 도시가 시애틀이기 때문이다. 미국 내에서도 이러한 사정은 도시마다 달라서, 가령 필라델피아 같은 경우 인구의 40% 정도가 흑인이라고 한다. 이처럼 미국인의 얼굴은 다양하다. 때문에 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미국인이 아닐 거라 단정 짓는 일은 큰 결례다. 설령 눈에 보이는 얼굴이 나와 참으로 닮아 보인다 하더라도 그 얼굴의 주인이 자라온 배경과 삶의 방식과 마음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를 테니까.
잘된 날도 영 안 된 날도 있었지만, 어쨌든 할 수 있는 한 꾸역꾸역 수업을 해 나갔다. 놀랍게도 학생들은 내 영어를 들먹이거나 지적하지 않았고, 예상 외로 잘 따라와 줬다. 학기 말 평가에서는 좋은 코멘트도 제법 받아 가슴을 쓸어내렸다. 백인 학생이 주류를 이루는 학교에서 동양인 선생이라는 이유로 무례한 일을 당한 에피소드 몇 가지를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그런 일을 한 번도 겪지 않았다는 게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받아들여졌다는 기분이 들어 기쁘기도 했던 것이었다.
이후 조앤과 함께했던 조교 수업
(teaching practicum)은 그 이상으로‘나도 나쁘지 않은 선생이 될 수 있겠다.’는 믿음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본래 선생 노릇을 싫어할뿐더러 학생과 대면하는 것도 고역이라 여겼지만, 강단에 서고 질문에 답하고 서면이나 면대면으로 피드백을 주며 타지의 학생들과 신뢰를 쌓아 가는 과정은 그 자체로 훌륭한 공부였다.
워싱턴주립대에 다니는 동양계 미국인 학생들 중 많은 이들이 이민 1세대나 1.5세대를 부모로 두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학생들은 영어가 서툰 부모님을 곁에서 보며 자랐을 것이다. 비록 영어가 능통하지는 못하더라도 부모님은 많은 일을 매일매일 위대하게 해낸다. 부모로서 돈을 벌고 가정을 꾸리고 자식의 안위를 책임진다. 그런 모습에 익숙하다면 매번 관사 빠진 영어를 구사하는 한국인 조교에 대해서도 역시 영어가 유창한지 아닌지 여부 하나만으로 단순히 판단하지는 않았으리라. 비슷한 맥락에서, 타국에서 온 친구나 지인을 사귈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한 채 백인 부모 밑에서 자란 백인 학생이라면 자기도 모르는 새 ‘낯선 외국인’에 대한 편견이 자리 잡았을 가능성도 높아지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다시 한번 비슷한 맥락에서, 위의 ‘백인’을 ‘한국인’으로 바꿔 보자. 한국에서 나고 자란 경우 일터나 학교 등지에서 한국어가 서툰 외국인과 매일매일 얼굴을 맞대며 지낼 기회는 매우 드물다. 적어도 2010년대 이전엔 그러했다. 티비 프로그램에 출연해 유창한 한국어로 의견을 개진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산낙지를 맛보는 외국인의 모습에 넋을 잃거나 경탄하기도 하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잘 연출된 이미지일 뿐이다. 게다가 그 좋은 모습으로 출연하는 외국인의 대다수는 선진국 출신의 백인이다. 매체에 나올 정도의 유명인이 아닌 개발도상국 출신의 유색인종은 대체로 한국인의 관심 밖에 머물러 있으며, 어쩌다 일상에서 언급 될 때는 아직까지도 부정적이거나 비하하는 표현이 따라붙는 것을 본다. 영어를 잘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한국인 선생을 무시하는 백인 학생의 얘기에 인종차별을 당했다며 안타까워하지만, 한국어가 서툴면서도 한국인 학생을 가르치려는 필리핀 선생을 앞에 둔다면 우리는 그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까?
다양성은 단순히 서로 다른 이들과 부대끼는 것 그 이상의 개념이다. 한 사람의 언어나 생김새가 그의 본질을 좌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전 과정이 거기에 담겨 있다. 언어에 구애받지 않고 나를 선생으로 인정하고 대해 주던 학생들은 내게 다양성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 선생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