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간에 대한 예술가의 세 가지 시선
신수진
한국외국어대학교 초빙 교수
미래에 대한 불안은 자신의 끝을 모르는 인간의 숙명이다. 만약 주어진 삶의 시간이 얼마만큼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면 인간은 지금과는 크게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제한된 시간을 살다 가야 하는 숙명이 영속성에 대한 열망과 도전을 강화한다.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물론 정신적이며 영적인 가치를 위한 모든 인간의 활동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의 시간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새로운 미디어 환경은 우리에게 눈앞에 있는 것만이 당신의 세상이 아니라고 손짓한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디지털 족적, 지속적으로 확장되는 가상의 현실, 실제보다 더 강렬한 경험을 주는 미디어 환경은 이미 우리 모두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이미 원하는 것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호세 사라마구(José Saramago)가 『죽음의 중지(Death with Interruptions)』를 통해 지적한 미처 준비하지 못한 세계에 살게 된 우리의 축복이자 재앙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세계의 확장은 철학보다 기술이 선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는 점점 한 덩어리가 되어 간다. 코로나 감염병의 팬데믹을 경험한 지난 2년 동안 물리적 거리는 뉴미디어를 통해서 메워졌고, 동시에 국경의 통제가 정서나 경험의 단절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이 다시금 확인되었다.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곳이라 할지라도 현장감 있는 정보를 구하는 데에 필요한 시간은 1초면 충분하다. 사람들은 마치 프로방스를 가기 전에 반 고흐의 노란 해바라기 밭을 떠올리듯이 세계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예술과 예술가는 우리가 아직 모르는 것을 위해 존재한다.
야스민 슈카이틀(Jasmin Schaitl)의 ‘공(空)의 충만함’
뇌과학자들은 평범한 사람이 평생 동안 뇌의 3퍼센트 정도밖에 활용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뇌를 조금만 더 쓸 수 있어도 지금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라는 말이니, 뇌 활용법에 대한 연구와 제안들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뇌를 자극해서 충분히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첫걸음은 익숙한 것들을 외면하는 것이다. 새로운 방법으로 생각해서 창의적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해야만 남보다 앞서갈 수 있다는 말이다. 어쩌다 보니 우리는 경쟁력 있는 창의성(comparative creativity)이 요구되는 세상에 살게 된 것이다.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를 통해서 의미를 만들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이 불합리한 존재인 것은 맞지만 그렇기 때문에 창의적인 의미의 개척자가 될 수 있다. 사실 예술가들이야 말로 창의성 전문가이다.
   예술가는 무언가 색다르고 비상식적인 것들을 만들어 내는 직업인이다. 세계 속에서 감각기관을 통해 정보를 수용하고 그 정보를 가공하고 의미 처리한 결과를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예술가의 역할인 것이다. 다만 그들은 경쟁보다는 공감에 관심이 있다. 현대 예술의 사회적 기능은 창의적인 방식으로 감정과 생각을 공유하게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새로운 시도는 효율성을 저해할 수 있다는 위험을 안고 있다. 이미 익숙해진 방법으로 보장받아 온 생산성을 일시적으로 떨어트릴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게다가 현상 유지를 선호하는 경향은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이므로 기존의 것을 벗어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본성을 거스르는 환경 속에 자신을 몰아넣을 필요가 있다. 처음 가 보는 곳이나 처음 만나는 사람, 즉 낯선 주변은 고착된 행동과 편향된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는 데에 도움을 줌으로써 결과적으로 창의성을 강제하는 환경이 된다.
   서울을 처음 방문한 야스민 슈카이틀의 밤은 낯설다 못해 다소 공포스러웠다. 기계음처럼 들리기도 하고 규칙이 없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던 소음 때문이었다. 두려운 불면의 밤이 지나고 그것이 매미 우는 소리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작가의 낯선 이야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매미는 대표적인 여름 곤충으로 수컷 한 마리가 내는 소리는 약 70-90 데시벨 정도이다. 매미의 울음소리는 짝짓기를 위한 유인책인데 과거에는 주로 낮에만 울었지만 도시 불빛의 영향으로 서울의 매미들은 밤에도 울음을 멈추지 않는다. 개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매미들이 동시에 울어 대는 소리는 가히 공포 영화를 떠올릴 만하다. 하지만 매미는 그저 여름이 지나면 거짓말처럼 사라질 미물이다. 매미들의 합창 소리가 아무리 기괴했다 한들, 일단 그 소리의 정체를 파악하고 나면 매미와 관련된 이야깃거리가 생겨날 뿐 그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할 일은 사라진다. 낯선 것은 그렇게 익숙한 것으로 바뀐다. 작가가 경험한 첫 밤의 공포는 낯섦과 익숙함의 사이에 생겨난 이음새 같은 것이다. 흐르는 시간 속 어느 한 지점에 마치 바느질 자국이 남은 것처럼 기억의 솔기가 생겨났다. 그 솔기의 양쪽으로 감각과 인식, 실체와 허상, 존재와 부재가 너울너울 편을 가른다.
   작품 <(스피크) 볼륨((Speak) Volumes)>은 세 파트, 실로 만든 조각과 잉크-펜 드로잉, 그리고 천장에 매달린 실패에서 당겨진 실뭉치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모두 연결된 듯 보인다. 쪼그리고 앉은 사람의 형상을 한 조각은 가느다란 철사로 형태를 잡아 가며 그 위에 검은 실을 구부려서 접착제로 고정하는 방법으로 표면을 만들었다. 검은 실로 얼기설기 만들어진 사람은 좌식 생활에 익숙한 동양인에겐 그리 어렵지 않은 ‘쪼그려 앉기’ 자세를 하고 있는데 숭숭 뚫린 구멍 사이로 텅 빈 속이 들여다보인다. 실로 만든 조각은 단단하고 무거운 조각과는 달리 가볍고 가변적으로 보인다. 슬쩍 밀치면 쓰러질 듯한 자세는 물론이고 공기를 잔뜩 품은 부피감 때문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적이지 않은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작가는 이러한 긴장감을 보디(body)의 존재와 부재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조각과 연결된 그림은 여러 장의 펜화를 겹쳐서 구체적인 형상을 읽어 내기 어렵지만 쪼그려 앉은 사람의 그림자를 모티브로 한 것이다. 그림자의 형상은 음화상(negativeimage)처럼 그려졌고 조각보다 높은 위치에 걸렸다. 만약 실제로 어떤 사람이 햇빛 아래 앉아 있었고 그 아래 그림자가 드리운 장면을 눈으로 보았다면 그림자에까지 시선이 머물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공에 뜬 그림자 그림을 통해서 조각으로 형상화된 보디가 차지하는 공간은 크게 확장되었다. 그리고 그 그림은 다시 실뭉치로 연결되었다. 조금만 잡아 당겨도 술술 풀려나오는 실타래가 머리 위쪽에 매달려 있는 좌대 앞에서 관객들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실을 풀어 쌓아 놓는다. 매달린 실에 손을 대는 순간 관객은 경건한 의식에 동참하는 것처럼 작품의 실체가 만들어 낸 공간으로 들어서게 된다. 검은 실은 경계를 만든다. 그것은 작품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이다. 그 경계는 매우 선명해 보이지만 견고하지 않다. 흔들리고 흐트러진다. 손으로 당겨서 쉽게 끊어 낼 수 없을 정도로 강하지만 다양한 형태와 텍스처를 만들어 낼 만큼 유기적이다. 실은 공간에 대한 열린 가능성을 상징한다.

Jasmin Schaitl, <(Speak) Volumes> sculpture/drawing/performance, thread, glue, paper, ink-pen
출처: 작가 제공


   함께 실행된 퍼포먼스에서 낯선 매미 소리 이야기와 실이 만들어 낸 선(line)은 다른 방식의 소통을 유도하는 매개로 확장되었다. 그녀는 이야기의 시작과 끝, 그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들을 실을 당기는 행위를 통해 시청각적으로 경험하게 했다. 퍼포먼스의 맥락 안에서 실을 당기는 손동작은 시간성과 관계에 대한 해석의 여지를 열어 두게한다. 천천히 또는 빠르게, 간결하게 또는 화려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점점 늘어 가는 선들은 시간 속에서 쌓여 가는 이야기를 시각화한다. 관객들은 작가의 말과 움직임을 통해서 공간과 시간에 대한 차별적인 경험을 공유하게 된다. 작가의 행위는 멀리 북극성이 있음을 알리는 손가락질처럼 목적 지향적이지만 분명한 정답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손가락 끝을 더듬어 하늘 위 어딘가를 찾아 헤맨 후에야 우리는 겨우 북극성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는 별에 눈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역할은 처음부터 거기까지로 계획되었다. 실뭉치를 보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작가는 자신에게 귀 기울이는 이들에게 이야기 너머에 무언가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아주 느슨한 지시성은 얇고 가느다란 실이 만들어 내는 선으로 형상화되었다. 안과 밖의 경계를 겨우 보여 줄 만한 느슨함, 최소한의 원시적 형태의 반복이 만들어 내는 윤곽선과 그로 인해 완성된 형상들이 작가가 슬며시 들이미는 이야기의 전부이다. 선은 그렇게 경계이면서 동시에 경계 없음을 드러낸다.
   야스민 슈카이틀은 낯선 곳에서 수집한 소리와 장면들을 은유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들을 연결하는 유추적 사고(analogical thinking) 과정을 통해서 낯선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일상에 대한 무력감을 밀쳐 내고 마음 충만의 세계로 다가서도록 우리를 이끈다. 이는 작가가 지닌 불교에 대한 관심, 즉 보이는 것 이면에 내재된 질서를 추구하고 존재의 물질성에 질문을 던지는 태도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여기에서 불교적 접근 방식이라 함은 신앙으로서의 종교에서 기인한다기보다는 세계와 나의 관계에 대한 철학 또는 태도를 보여주는 방편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 철학자이자 신경과학자인 폴 태가드(Paul Thagard)는 종교적 신앙도 일종의 감정적 의식일 수 있음을 분명히 하였는데, 종교와 예술적 행위가 큰 틀에서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의식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야스민 슈카이틀의 작품에 반영된 명상적 세계에 대한 관심은 반야심경의 명구(名句)인 색불이공공불이색(色不異空空不異色)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니,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 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색’으로 대변되는 번뇌의 세계를 꿰뚫고 ‘공’의 깨달음으로 향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다. 그녀의 작업은 감각을 통한 인식을 일깨우고 존재와 부재가 공존하는 균형과 충만감을 추구한다. 그리하여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의미 찾기를 게을리하는 우리에게 스스로에 대한 의심과 회의를 털어 내라고 친절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다.
조덕현의 ‘고귀하게, 광대하게’
인간의 눈은 전면을 바라본다. 생김새에서부터 안구의 안쪽을 들여다보거나 뒤통수 방향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바로 눈앞에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보려면 도구가 필요하다. 사람이 자신의 눈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거울을 보는 것이다. 나르키소스(Narcissus)가 반해 버린 대상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결국 물속에 뛰어들었듯이, 한 번도 거울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거울에 비친 자신을 알아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스스로를 볼 수 있다는 면에서 거울은 단순한 도구 이상의 의미를 지녀 왔다. 자기 인식이나 자기애, 관계 형성, 동일시나 동조 등 심리·사회적으로 다양한 맥락의 이야기가 거울에 담겨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엔 미디어가 거울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소통의 매개인 미디어는 근사한 삶의 표준을 보여 주기도 하고 실제로 가 보지 않은 곳에 대한 환상을 심어 주기도 한다. 거울상은 현대인의 뇌가 실재하지 않는 것들을 포함한 세계에 대한 인식의 틀을 구축하는 방식에 필수적으로 개입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때에 거울은 물건이 아니라 경험이다.
   조덕현의 <미러스케이프(Mirrorscape)>는 거울과 유사한 시각적 효과를 만드는 반사면에 반영된 이미지 (‘셀피(Selfie)’)를 말하기도 하고, 거울상(像) 효과를 반사체의 개입 없이 만들어서 이미지의 반복, 확장, 변용(變容)을 꾀한 경우﹙‘유크로니아(Uchronia)’)와 설치 장면에 거울을 이용한 사례 (‘미러스케이프’)를 포함하고 있다. 거울은 당연히 공간에 대한 이해를 달리하는 도구이지만, 이렇게 여러 경우의 수를 아우르는 작품들을 보고 나니 작가가 생각하는 거울상 효과의 지향점이 공간을 쌓아 올린 시간 축에 닿아 있음을 가늠하게 되었다.
   ‛미러스케이프 1, 2’는 시각적으로 무한하게 반복, 확장되는 거울방 안에 풍경 사진을 배치해서 현실에는 존재할 수 없는 정원을 만들었다. 벽에 설치된 창은 그리 크지 않아서 동시에 여러 명이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감상자가 공간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한 사람만을 위한, 저 너머에 존재하는, 이상적인 풍경은 오래전 고귀한 존재들의 정자나 발코니에 선 것 같은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이 작품의 감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경험은 반복과 확장이 만들어 낸 풍경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풍경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눈높이의 교차이다. 작가가 원화로 활용한 사진은 보통 사람의 눈높이에서 찍혔고 그에 따른 공간감을 유발한다. 그에 비해 거울을 이용해서 원화를 반복해 무한히 넓어진 풍경은 더 높은 곳이 아니라면 볼 수 없는 광대함을 만들어냈다. 이 두 시점(視點)의 부조화가 만들어 내는 낯선 감각이 우리를 다른 차원의 세계로 이끈다.
   거울의 시각적 효과는 후면이 어두운 반사 표면에 생기는 이미지를 보게 되는 경험인데, 관찰 방향과 밝기 차이 등이 맞아떨어지면 ‘반영된 나’를 볼 수 있게 된다. 일반적으로 반사면을 기준으로 뒤편이 어둡고 반대편, 즉 관찰자의 후면이 더 밝을 때 매끈한 표면에서 관찰자 자신의 형상을 볼 수 있게 된다. 깊은 산속 옹달샘이나 낯선 도시의 쇼윈도우에서 마주하게 되는 나의 모습은 대개 이런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관찰된다.
   작가는 여행 중에 찍은 자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긴 복도에 설치함으로써 이 모든 작업의 출발과 끝이 자신의 개인적 관점으로 수렴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방과 방을 잇는 복도에 ‘셀피’를 배치하고, 관람을 마치고 돌아 나오는 복도의 끝 마지막 벽에 아들의 유아기 시절 초상을 배치한 것은 역사적 기록이나 명작을 작업의 모티브로 차용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작가가 이야기하는 역사는 작가의 눈으로 과거를 수렴해서 재해석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의미를 발생 시킨다는 면에서 사적(史的) 모티브에 대한 사적(私的) 해석에 해당한다.
   <미러스케이프>가 보여 주는 작가의 관점은 시선이 닿는 지점인 대상의 물성을 뛰어넘는 시간성을 구축한다. 이러한 특성은 작가가 사진과 회화 작품을 함께 제시함으로써 선명해졌다. 오래된 사진이나 회화 작품을 모사하여 그림으로 완성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대상의 실체보다 관찰자인 자신의 눈으로 수렴되는 빛의 효과에 집중하게 되었을 것이다. ‘정해창 오마주’를 보면, 본래 정해창의 사진은 필연적으로 피사체인 인물과 그 사진이 찍힌 시간에 대한 충실한 기록이지만, 이 사진을 원화로 삼아 그린 ‘사진 같은 그림’은 등장인물의 연대기를 특정하는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원화로서의 사진이 품고 있는 시간은 조덕현의 그림 속에 충실하게 재현됨으로써 ‘조덕현의 시간’ 또는 ‘감상자의 시간’으로 연결되어 중층적 시간성을 구축한다.
   시간성에 대한 탐구는 가정법의 역사를 보여 주는 ‘유크로니아’에서도 잘 드러난다. 작품의 제목은 어디에도 없는 장소인 유토피아(Utopia)를 공간이 아닌 시간에 적용한 것이다. 어느 시간에도 없는 이상시(理想時)의 개념은 소설이나 영화, 게임 등에서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다. ‘만약에 조선 왕조가 지금까지 이어졌다면’, ‘6.25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과 같은 특정 시기에 대한 허구적 접근을 출발점으로 삼는데, 이러한 전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돌아보게 한다. 전국 구석구석을 걸어 다니며 작가는 평범하고 볼품없는 장면들 속에서 쇠락하고 낙후된 모습을 되돌려서 빛나는 아름다움을 찾아냈다.
   ‘유크로니아 2111-2’는 언뜻 보기엔 현실인 듯하다. 숲으로 둘러싸인 반듯한 건물, 양쪽에 당당하게 높이 솟은 철탑, 너른 앞마당 중앙에 근사하게 관리된 정원수는 절반만 현실이다. 프레임 속 모든 피사체의 형태는 완벽하게 좌우대칭이고 색은 반전되었다. 굳이 말하자면 작품의 왼쪽 절반이 원본에 가깝다. 일부러 지우지 않고 남겨 둔 단서처럼 철탑에 부착된 ‘각계 교회’ 간판은 이 작품이 온전히 사실적인 사진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증거한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영민한 시골 소년을 당당한 예술가로 성장시킨 상상력은 사실 위에 구축된 허구를 통해 초라하게 뭉그러진 일상을 고귀하고 광대하게 바라보도록 제안한다.

조덕현, <유크로니아 2111-2> 42x80.5cm, Pigment print
출처: 작가 제공


   조덕현의 작업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상징되는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 대해 예술가가 행한 도전적 실험의 결과물이다. 그의 거울 실험은 데카르트 이후의 이성주의 광학 원리에 입각해서 실체와 허상, 현실과 반영을 선명하게 구분한다. 작가는 둘 간의 관계를 혼란스럽게 만들거나 혼재시키지 않음으로써, ‘눈으로 보는 실제’와 ‘거울로 비추어 보는 해석’이 공존하는 세계를 설계하였다. 거울은 조덕현의 작품 속에서 공간을 확장적으로 재편성하였고 시간을 중층적으로 쌓아 올렸다. 이러한 시공간에 대한 경험의 재구성을 통해서 작가는 존재의 영속성이나 초월성처럼 현실에선 불가능한 상태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리라.
장태원의 ‘나를 뛰어넘는다는 것’
봄날의 빛은 매력적이지만 차가운 바람을 숨기고 있다.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서 바람을 피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살랑거리며 흔들리는 연초록 이파리들을 바라볼 때, 봄볕은 가장 이상적이다. 내가 좋아하는 장면이긴 하지만 적고 보니 참 까다롭기도 하다. 계절에 날씨에 시간대에 장소까지, 이 모든 조건을 갖추어 즐거움을 찾기란 얼마나 힘든가 말이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장면을 위해선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이 조건들은 그간의 경험이나 기억, 학습이나 문화적 배경에 의해 차곡차곡 쌓인 개인의 취향이다.
   제한된 조건 안에서만 충족되는 취향의 기준들은 나를 만족하게 하기보다 부족함을 찾아내는 일에 더 잘 쓰인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봄은 너무 짧고, 투명한 햇빛은 금세 구름에 가려지고, 바람엔 먼지가 실려 오고, 꽃잎은 한나절 봄비에도 허무하게 져 버린다. 취향이 분명할수록, 나를 기쁘게 하는 조건들은 충족되기 어렵다. 무엇 덕분에 기쁘고 만족스럽기보단 무엇 탓에 아쉽거나 성가신 일이 어느새 훨씬 많아진다. 행복을 위해 갖추어져야 하는 조건들이 까다로워질수록 행복은 쉽게 방해받는다. 내가 이미 알고 있고, 내가 충분히 즐겨 왔고, 내게 익숙해진 모든 것을 벗어나 아름다움을 찾을 수만 있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살 만 한 곳이 될 것이다. 나를 뛰어넘는다는 건 바로 이런 거다.
   인간은 빛이 있어 세상을 볼 수 있다. 빛에 의지해 세상을 바라보고, 빛으로 바라본 세상에 비추어 나를 찾아간다. 우리는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들에 둘러싸여 세상을 살아가지만, 볼 수 있는 것만을 주로 바라보면서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만약 우리의 관심이 ‘볼 수 있는 것’에만 머물러 왔다면 오늘날 인류는 지금과 사뭇 다른 세계에서 살아야 했을 것이다. 새로운 세상은 끊임없이 경험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지식을 축적해 가며, 그것을 바탕으로 보지 못하던 것을 바라보게 되면서 만들어져 왔다.
   사진술이 처음 발명되었을 당시만 해도, 기술의 최대 목표는 사람의 눈이 볼 수 있는 것을 재현하는 수준이었다. 19세기 당시 화가들은 어떻게 하면 좀 더 사실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인가에 관심을 쏟고 있었는데, 눈에 보이는 것을 최대한 화폭에 정확하게 옮기는 일은 아무리 솜씨가 빼어난 화가라 해도 만만치 않은 과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손으로 그리지 않아도 빛을 고정해서 그림을 완성할 수 있다는 매력적인 발상이 사진의 발명으로 이어졌고, 사진술은 이전에 어떤 재주 좋은 화가도 그려 내지 못했던 섬세하고 완벽한 그림을 누구나 그릴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기술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사진 발명 이후 불과 한 세기 만에 인류는 눈보다 빛에 더 빠르게 반응하고 더 세밀하게 볼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 내었고, 그 결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세계를 그려 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사진은 완성도 높은 ‘그림’이 아니라 ‘사진’ 그 자체일 수 있었다. 본 적이 없는 것을 보여 주고, 볼 수 없어서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을 상상하게 만들면서 사진은 그 태생적 한계를 뛰어넘어 독립적인 예술의 영역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이다.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사진의 힘은 장태원의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사진을 찍는다. 깊은 밤에 달이나 별빛에 의지해서 8″×10″ 크기의 대형 필름을 사용하는 카메라로 작업을 하기 때문에, 한 장의 사진을 찍는 데 두 시간에서 여덟 시간까지도 걸린다고 한다. 그는 사진이 찍히는 동안 눈을 뜨고 있어도 그 장면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때론 자신의 손바닥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곳에서 작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두려움과 맞서며 그는 필름이 천천히 빛을 흡수하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본 적이 없는 것을 사진에 담아내기 위해 인내의 시간을 보낸 것이다.
   그의 <스테인드 그라운드(Stained Ground)> 연작은 산업혁명 이후에 인류의 생활 기반을 형성해온 주요 산업에 대한 조사를 통해서 산업 구조의 변화가 초래한 산업 풍경의 변모를 추적한 작업이다. 철강·섬유·교통·석탄 등으로 한때 인류의 번영과 풍요를 주도하면서 번영을 구가하던 시설들에 불이 꺼지고, 사람들의 출입이 통제되고, 버려지거나 완전히 다른 용도로 쓰이게 된 곳들을 찾아다니며, 작가는 번영과 쇠락이 커다란 변화의 흐름 속에서 순환되고 있음에 주목하게 되었다. 인간의 눈으로는 온전히 볼 수 없는 어둠의 깊숙한 곳으로부터 그들의 가장 빛나는 시간을 되살려 내기라도 하듯, 그는 아무런 조작도 없이 기다림만으로 환상적이면서도 강렬한 장면들을 만들어 냈다. 그렇게 그의 사진은 말 그대로 시간의 축적인 동시에 긴 시간에 대한 관찰의 도구가 되었다.

장태원, 286x360cm, Inkjet print
출처: 작가 제공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찍는 사진가, 장태원의 작품들을 보고 있자면 그의 용기에 숙연한 마음이 들곤 한다. 그는 어둠 속에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충분히 밝은 빛에 의지해서 사각 프레임에 담을 장면을 면밀히 관찰하고, 화면 안에서 중요하게 처리할 주 피사체를 선택하고, 여러 번 셔터를 누르며 기회를 늘리고, 필름에 닿는 빛의 양을 세밀하게 통제하면서 갖출 수 있는 ‘좋은 사진’의 조건들을 그는 과감하게 버렸다. 자신의 눈에 의지하지 않고 빛을 느끼는 것, 이것이야말로 작가로서 그가 지닌 가장 중요한 차별적 경쟁력이 되었다. 뛰어난 사진가가 되기 위해 몸과 마음에 새겨 온 가장 기본적인 노하우들을 포기함으로써, 그는 스스로를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지금의 나에게 기대해 본다. 어제의 나에게 뒷덜미를 내주기 않기를, 고집스럽게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지 않기를, 아직 내가 겪어 보지 못한 것들에 매료될 수 있기를.
목차
조선 시대 궁중 회화의 다양성: 조선 후기 궁중의 그림 병풍과 이국 취미
시공간에 대한 예술가의 세 가지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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