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눈은 전면을 바라본다. 생김새에서부터 안구의 안쪽을 들여다보거나 뒤통수 방향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바로 눈앞에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보려면 도구가 필요하다. 사람이 자신의 눈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거울을 보는 것이다. 나르키소스
(Narcissus)가 반해 버린 대상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결국 물속에 뛰어들었듯이, 한 번도 거울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거울에 비친 자신을 알아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스스로를 볼 수 있다는 면에서 거울은 단순한 도구 이상의 의미를 지녀 왔다. 자기 인식이나 자기애, 관계 형성, 동일시나 동조 등 심리·사회적으로 다양한 맥락의 이야기가 거울에 담겨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엔 미디어가 거울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소통의 매개인 미디어는 근사한 삶의 표준을 보여 주기도 하고 실제로 가 보지 않은 곳에 대한 환상을 심어 주기도 한다. 거울상은 현대인의 뇌가 실재하지 않는 것들을 포함한 세계에 대한 인식의 틀을 구축하는 방식에 필수적으로 개입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때에 거울은 물건이 아니라 경험이다.
조덕현의 <미러스케이프
(Mirrorscape)>는 거울과 유사한 시각적 효과를 만드는 반사면에 반영된 이미지 (‘셀피
(Selfie)’)를 말하기도 하고, 거울상
(像) 효과를 반사체의 개입 없이 만들어서 이미지의 반복, 확장, 변용
(變容)을 꾀한 경우﹙‘유크로니아
(Uchronia)’)와 설치 장면에 거울을 이용한 사례 (‘미러스케이프’)를 포함하고 있다. 거울은 당연히 공간에 대한 이해를 달리하는 도구이지만, 이렇게 여러 경우의 수를 아우르는 작품들을 보고 나니 작가가 생각하는 거울상 효과의 지향점이 공간을 쌓아 올린 시간 축에 닿아 있음을 가늠하게 되었다.
‛미러스케이프 1, 2’는 시각적으로 무한하게 반복, 확장되는 거울방 안에 풍경 사진을 배치해서 현실에는 존재할 수 없는 정원을 만들었다. 벽에 설치된 창은 그리 크지 않아서 동시에 여러 명이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감상자가 공간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한 사람만을 위한, 저 너머에 존재하는, 이상적인 풍경은 오래전 고귀한 존재들의 정자나 발코니에 선 것 같은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이 작품의 감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경험은 반복과 확장이 만들어 낸 풍경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풍경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눈높이의 교차이다. 작가가 원화로 활용한 사진은 보통 사람의 눈높이에서 찍혔고 그에 따른 공간감을 유발한다. 그에 비해 거울을 이용해서 원화를 반복해 무한히 넓어진 풍경은 더 높은 곳이 아니라면 볼 수 없는 광대함을 만들어냈다. 이 두 시점
(視點)의 부조화가 만들어 내는 낯선 감각이 우리를 다른 차원의 세계로 이끈다.
거울의 시각적 효과는 후면이 어두운 반사 표면에 생기는 이미지를 보게 되는 경험인데, 관찰 방향과 밝기 차이 등이 맞아떨어지면 ‘반영된 나’를 볼 수 있게 된다. 일반적으로 반사면을 기준으로 뒤편이 어둡고 반대편, 즉 관찰자의 후면이 더 밝을 때 매끈한 표면에서 관찰자 자신의 형상을 볼 수 있게 된다. 깊은 산속 옹달샘이나 낯선 도시의 쇼윈도우에서 마주하게 되는 나의 모습은 대개 이런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관찰된다.
작가는 여행 중에 찍은 자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긴 복도에 설치함으로써 이 모든 작업의 출발과 끝이 자신의 개인적 관점으로 수렴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방과 방을 잇는 복도에 ‘셀피’를 배치하고, 관람을 마치고 돌아 나오는 복도의 끝 마지막 벽에 아들의 유아기 시절 초상을 배치한 것은 역사적 기록이나 명작을 작업의 모티브로 차용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작가가 이야기하는 역사는 작가의 눈으로 과거를 수렴해서 재해석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의미를 발생 시킨다는 면에서 사적
(史的) 모티브에 대한 사적
(私的) 해석에 해당한다.
<미러스케이프>가 보여 주는 작가의 관점은 시선이 닿는 지점인 대상의 물성을 뛰어넘는 시간성을 구축한다. 이러한 특성은 작가가 사진과 회화 작품을 함께 제시함으로써 선명해졌다. 오래된 사진이나 회화 작품을 모사하여 그림으로 완성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대상의 실체보다 관찰자인 자신의 눈으로 수렴되는 빛의 효과에 집중하게 되었을 것이다. ‘정해창 오마주’를 보면, 본래 정해창의 사진은 필연적으로 피사체인 인물과 그 사진이 찍힌 시간에 대한 충실한 기록이지만, 이 사진을 원화로 삼아 그린 ‘사진 같은 그림’은 등장인물의 연대기를 특정하는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원화로서의 사진이 품고 있는 시간은 조덕현의 그림 속에 충실하게 재현됨으로써 ‘조덕현의 시간’ 또는 ‘감상자의 시간’으로 연결되어 중층적 시간성을 구축한다.
시간성에 대한 탐구는 가정법의 역사를 보여 주는 ‘유크로니아’에서도 잘 드러난다. 작품의 제목은 어디에도 없는 장소인 유토피아
(Utopia)를 공간이 아닌 시간에 적용한 것이다. 어느 시간에도 없는 이상시
(理想時)의 개념은 소설이나 영화, 게임 등에서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다. ‘만약에 조선 왕조가 지금까지 이어졌다면’, ‘6.25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과 같은 특정 시기에 대한 허구적 접근을 출발점으로 삼는데, 이러한 전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돌아보게 한다. 전국 구석구석을 걸어 다니며 작가는 평범하고 볼품없는 장면들 속에서 쇠락하고 낙후된 모습을 되돌려서 빛나는 아름다움을 찾아냈다.
‘유크로니아 2111-2’는 언뜻 보기엔 현실인 듯하다. 숲으로 둘러싸인 반듯한 건물, 양쪽에 당당하게 높이 솟은 철탑, 너른 앞마당 중앙에 근사하게 관리된 정원수는 절반만 현실이다. 프레임 속 모든 피사체의 형태는 완벽하게 좌우대칭이고 색은 반전되었다. 굳이 말하자면 작품의 왼쪽 절반이 원본에 가깝다. 일부러 지우지 않고 남겨 둔 단서처럼 철탑에 부착된 ‘각계 교회’ 간판은 이 작품이 온전히 사실적인 사진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증거한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영민한 시골 소년을 당당한 예술가로 성장시킨 상상력은 사실 위에 구축된 허구를 통해 초라하게 뭉그러진 일상을 고귀하고 광대하게 바라보도록 제안한다.
조덕현, <유크로니아 2111-2> 42x80.5cm, Pigment print
출처: 작가 제공
조덕현의 작업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상징되는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 대해 예술가가 행한 도전적 실험의 결과물이다. 그의 거울 실험은 데카르트 이후의 이성주의 광학 원리에 입각해서 실체와 허상, 현실과 반영을 선명하게 구분한다. 작가는 둘 간의 관계를 혼란스럽게 만들거나 혼재시키지 않음으로써, ‘눈으로 보는 실제’와 ‘거울로 비추어 보는 해석’이 공존하는 세계를 설계하였다. 거울은 조덕현의 작품 속에서 공간을 확장적으로 재편성하였고 시간을 중층적으로 쌓아 올렸다. 이러한 시공간에 대한 경험의 재구성을 통해서 작가는 존재의 영속성이나 초월성처럼 현실에선 불가능한 상태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