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안도》 병풍이 일본 회화가 조선 후기 궁중에 유입되어 실내를 장식하는 데 사용되고 왕족이 감상했던 궁중 문화의 단면을 보여 준다면, 책가도
(冊架圖) 혹은 책거리
(冊距里)로 불리는 그림 병풍은 조선 후기 궁중의 이국 취미가 조선 후기의 궁중 장식화의 주제로 정착하는 양상을 보여 준다.
책가도는 대형 병풍의 화면에 책장을 가득 배치하고, 책과 도자기, 식물, 문방구 등 각종 기물을 배치하여 그려 넣은 채색화이다. 책가도에 묘사된 기물들이 다양하여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이를 묘사하는 데 서양화법이 차용되어 더욱 흥미를 자아낸다. 책가도는 18세기 후반 정조대 때부터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책가도는 정조가 매우 애호한 그림이다. 처음에는 책을 중심으로 묘사한 그림 병풍이었다. 1791년 어느 날, 정조는 편전에 든 대신들에게 어좌 뒤편의 책가도 병풍을 보여 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찌 경들이 진짜 책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책이 아니라 그림일 뿐이다. 예전에 정자(程子)가 이르기를 비록 책을 읽을 수 없다 하더라도 서실에 들어가 책을 어루만지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였다. 나는 이 말의 의미를 이 그림으로 인해서 알게 되었다. 책 끝의 표제는 모두 내가 평소 좋아하는 경사자집(經史子集)을 썼고 제자백가 중에서는 오직 장자(莊子)만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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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정조의 어좌 뒤편에 설치된 책가도는 책으로 가득 차고, 책 제목도 쓰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책가도〉 병풍
(그림 3)은 19세기에 제작되었지만, 정조가 애호했던 유형의 책가도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책가도 병풍을 통해 정조가 서실의 분위기, 즉 학구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자 했던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책가도는 학문을 사랑했던 호학
(好學)군주, 정조의 취향을 잘 반영한 그림인 것이다.
그림 3. 〈책가도(冊架圖)〉, 19세기~20세기초, 10폭 병풍, 비단에 채색, 화면 각 폭 161.7×39.5cm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사실상 정조는 책가도의 탄생과 유행을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조는 회화의 공리적 성격, 정치적 효용성을 잘 파악하고 있는 왕이었다. 이에 따라 즉위 후에 규장각을 확대·개편하고, 1783년 규장각 산하에 국왕의 명을 받들어 궁중 회화와 각종 채색 작업, 궁중 의장물 등의 제작을 전담하는 궁중 화원 제도를 만들었다. 차비대령화원
(差備待令畫員)으로 불린 이들 궁중 화원은 도화서 화원 중에서 선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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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선발하고 녹봉을 지급하기 위해 계절마다 빠짐없이 녹취재
(祿取才)라고 불리는 시험을 실시했다. 조선 전기에 도화서 화원을 선발 할 때는 대나무·산수·인물·영모
(翎毛)·화초 시험을 실시했는데, 조선 후기의 차비대령화원은 여기에 3과목을 더했다. 바로 문방과 누각, 풍속화이다. 조선 전기에는 거의 그려지지 않았던 회화 장르이다. 책가도는 문방에 해당하는 회화 주제로, 문헌 기록에 따르면 정조가 책가도를 차비 대령화원의 시험 주제로 출제한 것은 1784년부터이다. 정조가 얼마나 책가도를 좋아했느냐 하면, 1788년 화원 신한평
(申漢枰, 1726~?)과 이종현
(李宗賢)이 녹취재 시험에서 책가도가 아닌 다른 그림을 그려 냈다며 파면하고 귀양을 보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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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국왕들도 책가도를 애호하여 종종 시험문제로 출제하곤 하였다. 조선 말기까지 책가도는 주로 국왕과 왕세자가 거처하는 공간이나 궁중 행사에서 이들이 앉는 자리 뒤편에 주로 설치되었다. 그러므로 책가도는 왕명에 따라 뛰어난 전문 화원을 양성하여 다량으로 제작해야 할 만큼 궁중에서 수요가 많았던 그림임을 알 수 있다.
그림 4. 이응록(李膺祿), 〈책가도(冊架圖)〉, 19세기 후반, 10폭 병풍, 비단에 먹과 안료, 화면 전체 152.4×351.8 cm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정조대 이후, 즉 19세기와 20세기의 책가도는 조선 후기의 이국 취향과 욕망의 결집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물건 중심으로 그려진다. 19세기 중·후반에 활동한 궁중 화원 이응록
(李膺祿, 1808~1883 이후)이 그린 <책가도> 10폭 병풍이 바로 이러한 유형의 책가도에 속한다
(그림 4). 이 책가도를 살펴보면 책장은 꽉 차 있지 않고, 듬성듬성 비어있는데 책이 절반이고 나머지 절반은 화훼, 문방구, 도자기 등의 장식물로 채워져 있다. 책은 책갑으로 포장되어 있는 것과 낱권을 쌓아 올린 책더미 등으로 구분된다. 장식물은 대부분 중국의 도자기나 청동기로 조선 후기 문인들이 서화와 골동품을 수집하고 탐닉하던 시대적 분위기를 대거 반영하고 있다. 오른쪽의 제1폭부터 살펴보면, 중간에 보자기를 두른 노란색 채색 자기는 중국 청대의 법랑채 자기를 묘사한 것인데, 철쭉이 꽂혀 있다. 주변에는 입구가 넓은 청자병과 중국제 청동기, 특이한 형태의 자기가 놓여 있다. 제3폭에는 활짝 핀 수선화를 얹은 붉은색 수반 형태의 도자기가 진열되어 있다. 제4폭에는 국화꽃이 꽂힌 청색 채색 자기와 병 전체에 금이 간 것처럼 빙렬
(氷裂) 무늬를 낸 가요
(哥窯) 자기가 그려져 있다. 제5폭에는 공작 깃털과 산호를 꽂은 녹색 자기가 보이고, 제 6폭 하단에는 중국제 청동 향로와 함께 산호석에 걸어 둔 서양 회중시계가 눈길을 끈다. 그 위에 빨간색 완
(盌)에 담긴 노란색 과일은 부처님의 손바닥을 닮았다 하여 이름 지어진 불수감
(佛手柑)으로, 불
(佛)의 발음이 복
(福)의 중국어 발음과 같아서 복을 상징하는 도상이다. 이밖에 기기묘묘한 형태의 화반, 붓과 필통, 먹과 벼루 등의 문방사우, 두루마리, 잔과 잔받침, 둥근 옥환
(玉環) 등이 그려져 있다. 제10폭에서는 등용문 고사에서 유래하여 출세를 상징하는, 도약하는 잉어 모양의 장식물과 부귀영화를 의미하는 모란꽃 가지가 담긴 녹색 가요 자기가 눈에 띈다. 책가도에 그려진 식물과 도자기, 청동기 등은 대개 출세와 복을 기원하는 길상적 의미를 강하게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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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제9폭의 중간에 그려진 도장에 새겨진 이름을 통해서, 조선 후기 궁중 화원 가운데 책가도의 명수로 불리던 이응록이 이를 그렸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본명은 이형록
(李亨祿)으로, 이응록이라는 이름은 1864년부터 1871년까지 사용되었다. 이 책가도의 제작 시기도 이 무렵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응록의 집안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원 가문이다. 그의 증조부는 영조대에 통신사 수행 화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적이 있는 화원 이성린
(李聖麟)이며, 조부 이종현은 앞서 정조대에 녹취재 시험에서 자신이 잘 그리는 책가도를 그려 내지 않아 유배되었던 궁중 화원이다. 아버지 이윤민
(李潤民)도 순조대에 활발히 활동한 궁중 화원이었다. 즉, 이형록의 집안은 대대로에 책가도에 뛰어났던 화원 가문으로, 책가도를 그리는 기술이 대대로 전수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기술의 핵심은 서양화법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응록의 〈책가도〉 병풍을 살펴보면 선 원근법과 명암법이 사용되어 책장 선반의 깊이감과 공간감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책가도는 정조대부터 서양화법으로 그려진 그림이었다. 현재 정조 대인 18세기 후반의 책가도로 확실하게 알려진 작품은 없다. 그러나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김홍도가 당시에 ‘사면척량화법
(四面尺量畫法)’이라 불린 서양화법을 이용하여 책가도를 잘 그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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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정조대의 궁중 회화에서는 이미 다양한 서양화법이 구사되었다. 정조의 초상화인 어진
(御眞)과 신하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린 화원 이명기
(李命基)는 명암법을 이용하여 얼굴의 입체감을 잘 표현하였고, 1796년에 완공된 수원 화성과 행궁의 건축 현황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
(華城城役儀軌)』에서는 선 원근법과 투시도법 등이 사용되었다. 정조가 궁중 화원들이 치르는 시험 녹취재에 문방과 누각을 추가한 것은 그만큼 이러한 회화 장르에 대한 수요가 높았으며, 문방과 누각 그림에 서양화법이 적극적으로 구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책가도 병풍이 정조의 명으로 처음 궁중에서 만들어지기는 하였으나, 모든 것이 정조의 구상은 아니었다. 책가도의 화면 구성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눈속임 기법
(trompe l’œil)’을 이용하여 공간을 장식했던 가상의 벽감
(壁龕), 예컨대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구비오
(Gubbio) 궁전의 스튜디올로
(Studiolo)와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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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책가도와 유사한 그림으로 청대 궁정에서 활동한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화가인 낭세녕
(郞世寧, 1688~1766)이 그렸다고 전하는 <다보격경도
(多寶格景圖)>가 있다. 이 그림은 가상의 벽감을 중국풍으로 번안하여, 다보격이라는 진열장에 책과 기물을 배치하여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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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보격경도>는 선 원근법과 명암법, 그림자 등이 자연스럽게 조합되어 마치 실제의 진열장을 그린 듯 입체감과 공간감이 살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청대 궁중에서 회화 주제로 크게 유행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신에 청대 궁정에서는 이러한 장식장을 배치한 인물화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까지 활발하게 그려졌으며, 민간에서는 상업 회화로 제작되어 18세기 중반이 되면 베이징
(北京)의 시장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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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청대 궁궐에서는 다보격이라는 가구를 실제로 만들어서 진귀한 골동품이나 문방사우를 진열하였고, 황제의 취향을 드러내고 문화적 우월감을 과시하기 위하여 다보격이 설치된 공간에서 신하들을 만나기도 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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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 청의 자금성
(紫禁城)과 상류층의 저택에서는 책과 관련된 각종 기물 모티브가 건축 부재에 장식 문양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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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경로로 조선 후기 청에 파견된 사신들이 다보격 문화를 경험하고 다보격을 그린 그림을 조선에 들여왔던 것 같다. 다보격과 다보격경도라는 새로운 청의 시각 문화가 조선 궁궐에서 지적이고 학문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호학 군주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책가도라는 주제로 정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