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궁중 회화의 다양성:
조선 후기 궁중의 그림 병풍과 이국 취미
윤민용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올해 초,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는 다양한 궁궐의 실내 공간이 재현되었다. 영조(英祖, 재위 1724~1776)가 조회를 하는 정전과 휴식을 취하던 침전, 왕세손이었던 정조(正祖, 재위 1776~1800)의 편전은 장중하고 위엄이 넘쳤다. 또 정순왕후(貞純王后)와 혜경궁(惠慶宮)이 머물던 침전, 제조상궁이 머물던 처소의 실내장식은 세련되면서도 우아했다. 궁궐 개별 전각의 이러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한 것은 방을 사용하는 주인공의 뒤편에 설치된 병풍(屛風)이었다.
   조선 시대의 병풍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먼저, 한옥의 웃풍과 추위를 막는 효과가 컸다. 또 병풍은 대개 그림이나 글씨, 자수 등으로 채워져 공간의 분위기를 만드는 실내장식 효과가 있었다. 병풍은 접었다 펼 수 있는 단순한 구조의 가구지만 공간을 구획하기도 하고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는 역할도 하였다.
   병풍이 지니는 복합적인 기능과 성격으로 인해 조선 시대의 궁중에서 병풍은 실내뿐 아니라 실외 행사에서도 종종 사용되었다. 국가 의례나 궁중 행사에는 국왕과 왕비의 위엄을 높이고 행사의 분위기를 연출 하고자 다양한 주제를 재현한 그림 병풍이 배치되었다. 국왕이 정무를 돌보던 정전과 편전에는 강력한 왕권을 표상하는 일월오봉도 병풍을 설치하였고, 왕비가 머무는 내전은 화조도 병풍이나 자손 번창을 기원하는 백동자도,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 편안한 노년을 의미하는 요지연도(瑤池宴圖), 십장생도 병풍 등으로 꾸며졌다. 또 상장례에서는 모란도 병풍이 사용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조선 후기 궁중에서 제작되어 감상된 회화 가운데 병풍 형식이 주류라 할 정도로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이다. 병풍은 전통 회화의 형식 가운데 한눈에 전체를 파악할 수 있고 가장 전시적 성격이 두드러진다는 특징이 있다. 전통 회화는 두루마리라고도 불리는 권(卷)·축(軸) 이외에 부채 모양의 선면(扇面), 화첩, 병풍 등의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이 중에서 병풍은 가장 큰 화면을 구성할 수 있는 형식이다. 그래서 화가의 화면 구성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화면이 커질수록 제작 비용이 늘어나고 완성에 걸리는 시간도 상당했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의 궁중 회화에서 병풍 형식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경제력이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국가 최고 권력이 거처하는 공간을 위엄 있고 장중한 분위기로 연출하고자 하는 의도가 컸음을 의미한다.
   조선 후기에 궁중에서 사용된 그림 병풍 가운데에는 왕실의 이국(異國) 취미를 반영한 것들도 상당수 있다. 우리는 흔히 조선 시대의 궁궐이라 하면 가장 보수적인 전통이 유지되었던 권위의 공간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궁궐은 당대에 가장 새로운 첨단의 문화가 유입되는 공간이기도 했다. 이 글에서는 조선 후기에 궁중에서 사용된 그림 병풍을 통해 당시 궁중의 이국 취미를 살펴보고, 조선 후기 궁중 문화의 다양성에 대해 이해해 보고자 한다.
조선 시대 궁중의 그림 병풍과 대외 교류
병풍은 고대 서주(西周, B.C. 11세기~B.C. 771) 시대에 이미 사용되기 시작해, 현재도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대개 병풍이라 하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이 여러 폭으로 구성되어 아코디언처럼 접을 수 있는 절첩식(折疊式) 병풍이다. 이 병풍은 4세기 무렵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1) . 이전에는 단폭으로 구성된 단병(獨屛)이나 ㄷ자 형태로 접히는 삼선(三扇) 병풍이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무덤 주인의 초상 뒤편에 병풍이 그려진 예가 보이는데, 이를 통해 늦어도 삼국시대에는 본격적으로 병풍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의 궁궐에서는 다양한 목적과 내용의 회화나 시각 자료가 제작되었는데, 그중 그림 병풍은 궁중을 장식하거나 위엄을 높이거나 통치자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조선 전기에 궁궐에서 사용된 그림 병풍 중에 실물로 전해지는 것이 없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국왕과 왕세자에게 교훈과 감화를 주는 내용의 감계화(鑑戒畵)를 중심으로 그림 병풍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감계화 병풍의 내용은 중국의 고사에 등장하는 현자(賢者)와 명군(名君), 현비(賢妃) 혹은 폭군 등을 소재로 한 것이었다.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서 유래하여, 농업과 잠업(蠶業) 등 고대 중국 백성들의 생업과 고충을 통해 왕도 정치의 중요성을 담은 빈풍칠월도(豳風七月圖), 무일도(無逸圖) 등도 그려졌다. 이러한 내용을 그린 병풍을 국왕이 거처하는 공간에 설치하여, 국왕이 수시로 바라보고 성찰하게 하여 국정을 운영하는 데 보탬이 되게 한 것이다. 즉 조선 전기 궁중에서 제작되고 감상된 그림은 실용적이거나 교훈을 지닌 것들이었다. 단순히 감상을 목적으로 하는 그림은 제작되지 않았으며, 만약 국왕이 그림 감상을 좋아하면 이는 왕의 본분을 잊고 나라를 망치는 문제로 인식되어 신하들의 호된 비판을 받았다. 예컨대 성종(成宗, 재위 1469~1494)은 궁궐 내에 화원을 불러 화조화를 그리게 하려 한다는 이유로 신하들과 논쟁을 벌였고, 연산군(燕山君, 재위 1494~1506)도 궁궐에서 병풍을 만들고 해가 바뀔 때 액막이용으로 제작한 세화(歲畫)의 수량을 늘렸다고 비판받았다. 2)
   그런데 그림을 잡기로 취급하여 비판적이었던 분위기는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현격히 달라진다. 국왕이 적극적인 회화의 주문자이자 감상자가 된 것이다. 또한 조선 후기에 중국, 일본이 사신단을 통해 보내온 외교 선물이나 조선에서 파견한 사신단이 청나라와 일본 에도(江戶)에서 구해 온 회화와 시각 자료, 특히 서양과 관련된 시각 자료가 조선 후기 궁중에 유입되어 궁중 회화의 내용이나 형식에도 영향을 끼쳤다.
영조가 왕세손에게 하사한 일본 금병풍
국립고궁박물관에 전하는 «부용안도(芙蓉雁圖)» 병풍(屛風)은 조선 후기 궁중의 이국 취미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그림이다(그림 1). 이 병풍은 6폭으로 구성된 병풍 2좌가 1쌍을 이루고 있다. 갈대와 부용이 어우러진 가을의 물가와 들판에서 여러 마리의 기러기가 노니는 모습을 그렸다. 배경에는 화려한 금박이 조각조각 붙어 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 시대의 회화와는 다른 미감이 느껴진다.

그림 1. 가노 유호 야스노부, «부용안도», 1748년, 6폭 병풍 1쌍, 비단에 금박·채색, 180.5×384.0cm
(위: 오른쪽 병풍. 아래: 왼쪽 병풍)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이 그림은 일본 에도 시대의 화가, 가노 유호 야스노부(狩野友甫宴信, ?~1762)가 1748년에 그렸다. 1748년은 제10차 통신사(通信使)가 파견되었던 해이다. 《부용안도》 병풍은 에도 시대의 도쿠가와(德川) 막부에서 조선의 국왕에게 선물한 병풍 중 하나이다. 에도 막부는 임진왜란 이후인 1607년에 일본과 국교를 재개한 이후, 조선에서 파견한 사신단인 통신사가 귀국할 때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 여러 가지 선물을 진상하였다. 그중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일본의 그림 병풍이었다.
   일본은 조선 전기에도 그림 병풍을 외교 선물로 보내 왔으나, 조선 후기에는 그 수량이 크게 증가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한 것은 모두 12회인데, 그중 전후 협상과 포로 쇄환(刷還)을 위한 1차(1607)부터 3차(1624)까지의 통신사를 제외하고, 4차(1636)부터 11차(1764) 통신사에 이르기까지 조선 국왕 앞으로 20쌍의 병풍을 보냈다. 마지막 12차 통신사(1811)의 방일은 쓰시마(對馬島)에서 간략하게 이루어지면서 선물의 규모도 줄어들었는데, 그때에도 병풍 10쌍을 보내왔다. 여하튼 이를 모두 더하면 조선 후기에 에도 막부가 조선 국왕에게 보낸 병풍만 170쌍에 달한다. 이뿐 아니라 조선과 에도 막부의 무역을 중개하던 쓰시마 도주(島主)도 통신사를 수행하는 관리들에게 사적으로 일본 병풍을 진상하였다. 또 조선-일본 간의 공무역 형태로 진상 되기도 했다. 생각보다 많은 수량의 일본 그림 병풍이 조선 후기에 유입된 것이다.
   일본의 그림 병풍은 무로마치(室町) 시대부터 병풍 2좌가 1쌍을 이루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개개의 병풍을 하나의 화면처럼 펼쳐서 화면을 구성했다. 수묵화로도 제작되었지만, 일본이 조선과 명나라에 외교 선물로 보낸 그림 병풍은 금박과 금니(金泥)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화려하고 장식적 성격이 짙다. 3) 조선 후기에 일본이 조선 국왕에게 선물한 병풍에는 다양한 소재가 그려졌다. 배경지식 없이도 한눈에 이해할 수 있는 화조화나 일본의 실경을 그린 산수화뿐 아니라 일본 고유의 축제인 마츠리(祭り), 일본의 주요한 전투를 그린 역사화, 일본 최초의 고전소설로 일컬어지는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와 역시 헤이안 시대의 고전문학 작품인 『이세모노가타리(伊勢物語)』등에서 따온 내용 등이 그려졌다. 4)
   《부용안도》 병풍은 화조화의 대표적 소재로, 기러기와 갈대를 그린 노안도(蘆雁圖)에 해당한다. 편안한 노년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병풍에는 영조가 친필로 쓴 어제(御題)가 남아있다. 영조는 일본으로부터 선물 받은 이 병풍을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장자이자 정조의 친형인 정(琔, 시호명 의소, 懿昭, 1750~1752)을 왕세손으로 책봉한 이후에 선물로 하사했다. 의소세손은 영조의 후손 중에서 드물게 얻은 적통 왕손이었기 때문에 영조가 매우 아꼈다고 한다. 이에 만 나이로 채 1살이 되지 않은 때에 서둘러 왕세손에 책봉하였다.
   왕세손 책봉 의식은 1751년 5월 13일 창경궁 명정전에서 거행되었다. 영조는 왕세손 책봉이라는 왕실과 국가의 큰 경사를 맞아, 자신이 사용하던 ‘의물(儀物)’을 ‘복을 주려는 마음에서’ 왕세손에게 선물했다. 5) 노안도는 노후의 안락함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은 그림으로 보통 환갑 등 생일을 맞은 노인들에게 선물하던 그림이다. 아마도 한참 양육이 더 필요한 의소세손에게 노안도를 선물한 뜻은 건강하게 성장하여, 왕위를 계승하고 국가와 왕실의 번영을 이루기를 바라는 데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조의 바람과 달리, 안타깝게도 의소세손은 정조가 태어나던 해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여하튼 영조는 《부용안도》 병풍을 선물하면서, 친필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물가 위로 기러기가 날아가는 장면이 그려진 오른쪽 병풍에는 ‘전각 안에 2좌의 병풍은/여러 해 전에 온 것이네/이제 여기서 전각에 펼치니/어찌 우연한 일이라 하겠는가/신미년 봄’이라고 썼다. 가을 들판 위를 노니는 기러기가 그려진 왼쪽 병풍에는 ‘이 병풍 어느 때에 얻었던가/즉 내가 여러 해 전에 받은 것이네/원손전 안에 펼쳐서/이제 감상하니 감회가 먼저 이네/신미년 봄’이라고 썼다.
   여기에서 주목할 사실은 영조가 반짝반짝 빛나는 사치스러운 이국의 금병풍을 왕세손의 책봉 선물로 하사했다는 사실이다. 영조는 ‘사치를 경계하는 것(戒奢侈)’을 평생의 국정 운영 정책으로 삼았던 국왕이다. 자신은 검소하게 얇은 옷감으로 옷을 지어 입고, 거친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 백성들이 무늬가 있는 고급 비단으로 옷을 지어 입는 일이나 사대부 여인들의 화려한 가체(加髢)를 금지하였다. 화려한 청화백자 제작도 금지했으며 왕실 의장물에 사용되는 금과 옥도 아껴 쓰도록 했다. 이처럼 사치를 가장 경계했던 국왕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분위기의 일본 금병풍을 왕세손의 책봉 선물로 하사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일본이 보낸 그림 병풍에 대한 조선 왕실과 조정의 태도이다. 조선은 예로부터 명·청에는 사대를 하고, 일본에는 교린(交隣)정책을 취해 왔다. 더욱이 임진왜란을 겪고 난 17세기 전반에만 해도 일본에 대해서 경계하고 의심하는 태도가 짙었다. 때문에 일본이 보내온 선물을 거절하는 일이 왕왕 있었다. 1~3차 통신사 때에는 일본 측에서 통신사를 수행한 삼사(三使)에게 사적으로 그림 병풍을 선물했는데, 이들은 이를 사사롭다 하여 거절하기도 했다.
   1609년의 〈양귀비도(楊貴妃圖)〉 병풍을 둘러싼 해프닝은 일본 병풍에 대한 조선 조정의 경직된 태도를 보여 주어 흥미롭다. 당시 일본은 조선과 국교를 정상화하는 내용의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면서, 선물로 금병풍 5쌍을 진상하였다. 그중에 〈양귀비도〉 병풍 1쌍이 섞여 있었다. 알다시피, 중국의 4대 미인으로 일컬어지는 양귀비는 당(唐) 현종(玄宗, 재위 712~756)의 후궁으로, 안사의 난(安史之亂, 755~763)에 결정적 동기를 제공하여 당을 쇠락으로 이끈 인물이다. 조선 관리들은 일본이 보낸 〈양귀비도〉의 내용이 음란하다면서, 일본이 하는 짓이 무례하고 거만하고 교활하다고 흥분하여 일본에 병풍을 다시 돌려보내자는 둥 큰 논란을 벌였다. 논의 끝에, 이를 부산 왜관에 두고 일본인을 접대할 때 사용하기로 하였다. 6)
   한데 그로부터 1세기가 지나고 난 뒤인 18세기 중반에는 일본이 보낸 병풍을 국왕의 처소에서 사용하고, 이를 왕세손에게 하사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일본의 금병풍을 조선 궁중에서 애호했던 사실이 확인된다. 영조뿐 아니라 조선 후기의 국왕들은 일본이 보낸 금병풍을 궁중 전각에 비치하고 감상했다. 영조 이전에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은 일본인이 사냥하는 장면을 그린 출렵도(出獵圖)를 감상하고 시를 남겼다. 7) 정조는 금계를 그린 일본 병풍을 화원 김홍도(金弘道)를 시켜 모사하게 하고, 이를 자신이 자주 행행하던 화성 행궁에 비치하도록 했다고 한다. 8) 또 순조(順祖, 재위 1800~1834)가 순원왕후(純元王后)를 맞아들이면서 새로 꾸민 창덕궁 대조전의 왕비 침실에는 학 7마리가 그려진 금병풍이 설치되었다. 9)
   아쉽게도 조선 후기에 통신사 선물로 왕실에 유입된 일본 병풍 170쌍의 행방은 대부분 알 수 없다. 현재 국내에 소장 중인 것은 6점밖에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에 유입된 일본 병풍은 조선 후기 궁중 미술에서 병풍이 주요 화면 형식이 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 후기 궁중에서 제작된 행사도나 장식화 대부분은 일본 병풍처럼 화면 전체를 하나의 캔버스처럼 사용하는 ‘연폭 병풍’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조선 전기에도 그림 병풍이 제작되었지만, 기록이나 현전하는 조선 전기의 병풍을 살펴보면 대부분 폭마다 다른 그림이 그려진 ‘각폭 병풍’ 방식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가 되면 병풍 화면 전체를 통째로 사용하는 연폭 방식이 늘어난다. 이러한 방식으로 제작된 병풍을 조선 후기 왕실 문헌에서는 ‘왜장(倭粧) 병풍’이라 기록하였다. 일본에서는 14세기부터 연폭 형식의 그림 병풍을 외교 선물로 제작하여 조선에 선물하였는데, 이러한 전통으로 인하여 연폭 방식이 ‘왜장’, 곧 일본 스타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화려한 일본의 금병풍은 19세기 말의 궁중 회화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무렵에는 아예 일본 병풍처럼 병풍 2좌를 1쌍으로 구성하는 방식이 크게 유행했다. 또 대한제국기에는 일본의 금병풍을 모방하여 금박을 붙인 〈해학반도도(海鶴蟠桃圖)〉와 같은 병풍이 제작되기도 했다(그림 2). 10)

그림 2. 〈해학반도도(海鶴蟠桃圖)〉, 1902년, 12폭 병풍, 비단에 채색·금박, 각 폭 227.7×59.3cm
출처: 미국 호놀룰루 미술관


   문화 교류라는 것은 언제나 일방적이지 않다. 일본의 그림 병풍은 조선 후기의 궁중 미술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 후기 궁중에서 일본의 병풍을 감상했던 사실이나 연폭 병풍이 유행했던 현상, 금박을 붙인 병풍이 대한제국기에 궁중에서 제작되었던 사실은 기존에 조선의 문화를 우위에 두고 일본의 문화를 낮춰 보던 인식을 깨뜨린다. 역으로 조선 후기의 궁중 문화는 상당히 개방적이었으며, 일본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 내는 데에도 상당히 적극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국 취향의 결집체, 책가도
《부용안도》 병풍이 일본 회화가 조선 후기 궁중에 유입되어 실내를 장식하는 데 사용되고 왕족이 감상했던 궁중 문화의 단면을 보여 준다면, 책가도(冊架圖) 혹은 책거리(冊距里)로 불리는 그림 병풍은 조선 후기 궁중의 이국 취미가 조선 후기의 궁중 장식화의 주제로 정착하는 양상을 보여 준다.
   책가도는 대형 병풍의 화면에 책장을 가득 배치하고, 책과 도자기, 식물, 문방구 등 각종 기물을 배치하여 그려 넣은 채색화이다. 책가도에 묘사된 기물들이 다양하여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이를 묘사하는 데 서양화법이 차용되어 더욱 흥미를 자아낸다. 책가도는 18세기 후반 정조대 때부터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책가도는 정조가 매우 애호한 그림이다. 처음에는 책을 중심으로 묘사한 그림 병풍이었다. 1791년 어느 날, 정조는 편전에 든 대신들에게 어좌 뒤편의 책가도 병풍을 보여 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찌 경들이 진짜 책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책이 아니라 그림일 뿐이다. 예전에 정자(程子)가 이르기를 비록 책을 읽을 수 없다 하더라도 서실에 들어가 책을 어루만지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였다. 나는 이 말의 의미를 이 그림으로 인해서 알게 되었다. 책 끝의 표제는 모두 내가 평소 좋아하는 경사자집(經史子集)을 썼고 제자백가 중에서는 오직 장자(莊子)만을 썼다.” 11)

   즉, 정조의 어좌 뒤편에 설치된 책가도는 책으로 가득 차고, 책 제목도 쓰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책가도〉 병풍(그림 3)은 19세기에 제작되었지만, 정조가 애호했던 유형의 책가도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책가도 병풍을 통해 정조가 서실의 분위기, 즉 학구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자 했던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책가도는 학문을 사랑했던 호학(好學)군주, 정조의 취향을 잘 반영한 그림인 것이다.

그림 3. 〈책가도(冊架圖)〉, 19세기~20세기초, 10폭 병풍, 비단에 채색, 화면 각 폭 161.7×39.5cm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사실상 정조는 책가도의 탄생과 유행을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조는 회화의 공리적 성격, 정치적 효용성을 잘 파악하고 있는 왕이었다. 이에 따라 즉위 후에 규장각을 확대·개편하고, 1783년 규장각 산하에 국왕의 명을 받들어 궁중 회화와 각종 채색 작업, 궁중 의장물 등의 제작을 전담하는 궁중 화원 제도를 만들었다.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畫員)으로 불린 이들 궁중 화원은 도화서 화원 중에서 선발되었다. 12) 이들을 선발하고 녹봉을 지급하기 위해 계절마다 빠짐없이 녹취재(祿取才)라고 불리는 시험을 실시했다. 조선 전기에 도화서 화원을 선발 할 때는 대나무·산수·인물·영모(翎毛)·화초 시험을 실시했는데, 조선 후기의 차비대령화원은 여기에 3과목을 더했다. 바로 문방과 누각, 풍속화이다. 조선 전기에는 거의 그려지지 않았던 회화 장르이다. 책가도는 문방에 해당하는 회화 주제로, 문헌 기록에 따르면 정조가 책가도를 차비 대령화원의 시험 주제로 출제한 것은 1784년부터이다. 정조가 얼마나 책가도를 좋아했느냐 하면, 1788년 화원 신한평(申漢枰, 1726~?)과 이종현(李宗賢)이 녹취재 시험에서 책가도가 아닌 다른 그림을 그려 냈다며 파면하고 귀양을 보낼 정도였다. 13) 이후의 국왕들도 책가도를 애호하여 종종 시험문제로 출제하곤 하였다. 조선 말기까지 책가도는 주로 국왕과 왕세자가 거처하는 공간이나 궁중 행사에서 이들이 앉는 자리 뒤편에 주로 설치되었다. 그러므로 책가도는 왕명에 따라 뛰어난 전문 화원을 양성하여 다량으로 제작해야 할 만큼 궁중에서 수요가 많았던 그림임을 알 수 있다.

그림 4. 이응록(李膺祿), 〈책가도(冊架圖)〉, 19세기 후반, 10폭 병풍, 비단에 먹과 안료, 화면 전체 152.4×351.8 cm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정조대 이후, 즉 19세기와 20세기의 책가도는 조선 후기의 이국 취향과 욕망의 결집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물건 중심으로 그려진다. 19세기 중·후반에 활동한 궁중 화원 이응록(李膺祿, 1808~1883 이후)이 그린 <책가도> 10폭 병풍이 바로 이러한 유형의 책가도에 속한다(그림 4). 이 책가도를 살펴보면 책장은 꽉 차 있지 않고, 듬성듬성 비어있는데 책이 절반이고 나머지 절반은 화훼, 문방구, 도자기 등의 장식물로 채워져 있다. 책은 책갑으로 포장되어 있는 것과 낱권을 쌓아 올린 책더미 등으로 구분된다. 장식물은 대부분 중국의 도자기나 청동기로 조선 후기 문인들이 서화와 골동품을 수집하고 탐닉하던 시대적 분위기를 대거 반영하고 있다. 오른쪽의 제1폭부터 살펴보면, 중간에 보자기를 두른 노란색 채색 자기는 중국 청대의 법랑채 자기를 묘사한 것인데, 철쭉이 꽂혀 있다. 주변에는 입구가 넓은 청자병과 중국제 청동기, 특이한 형태의 자기가 놓여 있다. 제3폭에는 활짝 핀 수선화를 얹은 붉은색 수반 형태의 도자기가 진열되어 있다. 제4폭에는 국화꽃이 꽂힌 청색 채색 자기와 병 전체에 금이 간 것처럼 빙렬(氷裂) 무늬를 낸 가요(哥窯) 자기가 그려져 있다. 제5폭에는 공작 깃털과 산호를 꽂은 녹색 자기가 보이고, 제 6폭 하단에는 중국제 청동 향로와 함께 산호석에 걸어 둔 서양 회중시계가 눈길을 끈다. 그 위에 빨간색 완(盌)에 담긴 노란색 과일은 부처님의 손바닥을 닮았다 하여 이름 지어진 불수감(佛手柑)으로, 불(佛)의 발음이 복(福)의 중국어 발음과 같아서 복을 상징하는 도상이다. 이밖에 기기묘묘한 형태의 화반, 붓과 필통, 먹과 벼루 등의 문방사우, 두루마리, 잔과 잔받침, 둥근 옥환(玉環) 등이 그려져 있다. 제10폭에서는 등용문 고사에서 유래하여 출세를 상징하는, 도약하는 잉어 모양의 장식물과 부귀영화를 의미하는 모란꽃 가지가 담긴 녹색 가요 자기가 눈에 띈다. 책가도에 그려진 식물과 도자기, 청동기 등은 대개 출세와 복을 기원하는 길상적 의미를 강하게 담고 있다. 14)
   한편 제9폭의 중간에 그려진 도장에 새겨진 이름을 통해서, 조선 후기 궁중 화원 가운데 책가도의 명수로 불리던 이응록이 이를 그렸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본명은 이형록(李亨祿)으로, 이응록이라는 이름은 1864년부터 1871년까지 사용되었다. 이 책가도의 제작 시기도 이 무렵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응록의 집안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원 가문이다. 그의 증조부는 영조대에 통신사 수행 화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적이 있는 화원 이성린(李聖麟)이며, 조부 이종현은 앞서 정조대에 녹취재 시험에서 자신이 잘 그리는 책가도를 그려 내지 않아 유배되었던 궁중 화원이다. 아버지 이윤민(李潤民)도 순조대에 활발히 활동한 궁중 화원이었다. 즉, 이형록의 집안은 대대로에 책가도에 뛰어났던 화원 가문으로, 책가도를 그리는 기술이 대대로 전수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기술의 핵심은 서양화법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응록의 〈책가도〉 병풍을 살펴보면 선 원근법과 명암법이 사용되어 책장 선반의 깊이감과 공간감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책가도는 정조대부터 서양화법으로 그려진 그림이었다. 현재 정조 대인 18세기 후반의 책가도로 확실하게 알려진 작품은 없다. 그러나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김홍도가 당시에 ‘사면척량화법(四面尺量畫法)’이라 불린 서양화법을 이용하여 책가도를 잘 그렸다고 한다. 15) 뿐만 아니라, 정조대의 궁중 회화에서는 이미 다양한 서양화법이 구사되었다. 정조의 초상화인 어진(御眞)과 신하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린 화원 이명기(李命基)는 명암법을 이용하여 얼굴의 입체감을 잘 표현하였고, 1796년에 완공된 수원 화성과 행궁의 건축 현황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서는 선 원근법과 투시도법 등이 사용되었다. 정조가 궁중 화원들이 치르는 시험 녹취재에 문방과 누각을 추가한 것은 그만큼 이러한 회화 장르에 대한 수요가 높았으며, 문방과 누각 그림에 서양화법이 적극적으로 구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책가도 병풍이 정조의 명으로 처음 궁중에서 만들어지기는 하였으나, 모든 것이 정조의 구상은 아니었다. 책가도의 화면 구성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눈속임 기법(trompe l’œil)’을 이용하여 공간을 장식했던 가상의 벽감(壁龕), 예컨대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구비오(Gubbio) 궁전의 스튜디올로(Studiolo)와 유사하다. 16) 조선의 책가도와 유사한 그림으로 청대 궁정에서 활동한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화가인 낭세녕(郞世寧, 1688~1766)이 그렸다고 전하는 <다보격경도(多寶格景圖)>가 있다. 이 그림은 가상의 벽감을 중국풍으로 번안하여, 다보격이라는 진열장에 책과 기물을 배치하여 그린 것이다. 17) <다보격경도>는 선 원근법과 명암법, 그림자 등이 자연스럽게 조합되어 마치 실제의 진열장을 그린 듯 입체감과 공간감이 살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청대 궁중에서 회화 주제로 크게 유행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신에 청대 궁정에서는 이러한 장식장을 배치한 인물화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까지 활발하게 그려졌으며, 민간에서는 상업 회화로 제작되어 18세기 중반이 되면 베이징(北京)의 시장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었던 것 같다. 18) 또한 청대 궁궐에서는 다보격이라는 가구를 실제로 만들어서 진귀한 골동품이나 문방사우를 진열하였고, 황제의 취향을 드러내고 문화적 우월감을 과시하기 위하여 다보격이 설치된 공간에서 신하들을 만나기도 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기도 했다. 19) 이 밖에 청의 자금성(紫禁城)과 상류층의 저택에서는 책과 관련된 각종 기물 모티브가 건축 부재에 장식 문양으로 사용되었다. 20) 이러한 경로로 조선 후기 청에 파견된 사신들이 다보격 문화를 경험하고 다보격을 그린 그림을 조선에 들여왔던 것 같다. 다보격과 다보격경도라는 새로운 청의 시각 문화가 조선 궁궐에서 지적이고 학문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호학 군주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책가도라는 주제로 정착한 것이다.
화려하고 환상적인 건축물이 가득한 한궁도
조선 후기의 궁중 회화 가운데, 서양화법을 적극적으로 차용한 회화는 책가도뿐만이 아니다. 화려한 중국풍의 건축물을 화면 가득 그려 넣은 <한궁도(漢宮圖)>에서도 서양화법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21)

그림 5. <한궁도(漢宮圖)>,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6폭 병풍, 비단에 채색, 전체 78.0×267.6cm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상상의 중국풍 건축물을 그린 <한궁도>는 조선 후기에 새롭게 출현하였다. <한궁도>라는 이름은 현대에 붙인 것으로, 이전에는 궁궐도, 궁전도, 누각도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는 제작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창덕궁에서 전해 내려오는 <한궁도> 병풍만 5좌가 전해지며, 다른 기관과 경매나 전시 등에 공개된 것을 더하면 약 10여 점 정도가 알려져 있다. 대체로 6폭 이상의 연폭 병풍 형식으로 제작되었고, 진하게 채색하는 궁중의 화원 화풍으로 그려졌다. 건축물은 계척(界尺)이라는 자를 이용해서 그리는 정밀한 계화 기법으로 묘사되었다.
   건축물 이미지가 궁중 회화의 주요한 주제로 부상한 것은 조선 후기에 보이는 특별한 현상이다. 상상의 건축물을 그린 <한궁도>뿐 아니라 실제의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라든지, 이상적인 도시의 모습을 그린 <태평성시도>나 경기 감영 일대의 도시를 그린 <경기감영도>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 조선 후기 궁중에서 시행된 궁중 행사를 묘사한 기록화나 <한궁도> 이외에 화려한 중국풍의 궁궐을 배경으로 한 고사 인물도에서도 정밀하고 섬세하게 묘사한 건축물이 그려져 있다. 조선 전기에는 건축물의 배치를 간략하게 기록한 시각 자료는 제작되었지만, 건축물을 주제로 삼은 회화는 발달하지 않았다. 본래 궁궐은 국가 최고 권력이 거처하며 정사를 돌보는 공간이기 때문에, 이를 함부로 시각 자료로 기록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는 상상하는 궁궐뿐 아니라 실재하는 궁궐을 대형 화면에 그렸고, 여타 다양한 건축물이 회화의 주제로 전면에 등장하였다. 이렇게 건축물 이미지의 수요가 증가하였기 때문에, 정조가 궁중 화원의 시험 과목에 누각을 포함시켰던 것이다.
   이국적인 건축물을 중심으로 재현한 <한궁도>는 조선 시대의 회화로는 이례적으로 환영감을 강하게 자아낸다. 예컨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누각도>는 평행사선도법과 부감시를 택하여 중국풍의 건축물을 재현하였다. 이러한 시점과 도법은 고대 한대의 벽화에서도 사용된 건축물 도법으로, <동궐도>에서 동일한 도법이 확인된다. 흥미로운 것은 화면 뒤로 후퇴할수록 건축물의 크기를 축소하여 그리는 단축법(foreshortening)을 사용하여, 화면에 공간감과 원근감을 강하게 나타냈다는 사실이다. 예로부터 동아시아의 회화에서도 먼 곳의 경물은 작게 그려 원근감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서양 회화처럼 가까운 곳부터 먼 곳을 일목요연하게 묘사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화면의 부분 부분을 생략하고 구름이나 안개 등을 그려 넣는 대기원근법(大氣遠近法)을 사용하여 공간감을 암시하였다. 화면 전체에 걸쳐 일정한 시선 축을 따라서 건축물의 크기를 줄여 나가며 그리는 단축법은 주로 서양에서 선 원근법과 함께 사용된 기법이다.

그림 6. 〈누각도(樓閣圖)〉,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8폭 병풍, 비단에 채색, 각 첩 113.0×38.0cm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회화에서 입체감을 드러내는 여러 가지 기법 중에는 선 원근법이나 단축법뿐 아니라 명암 표현이나 하이라이트(highlight) 등 빛과 관련된 기법도 있다. <누각도>를 잘 살펴보면, 건물의 정면부는 밝은 색조로 채색하고 측면부는 어두운 색조로 채색되었다. 이는 일정한 방향에서 비추는 광원의 존재를 상정하고, 이에 따른 명암의 차이를 표현한 것이다. 또 나뭇가지를 묘사할 때에는 명도와 채도가 다른 녹색의 색점을 이용하여, 사물에서 가장 밝은 부분인 하이라이트를 표현하여 입체감을 연출하려 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국립고궁박물관 소장의 <한궁도> 6폭 병풍에서 더욱 전형화되어 나타난다. 앞서 살펴본 <누각도>에 비해서는 훨씬 도식적인 양식의 서양화법을 구사하였다. 브로콜리와 같은 질감으로 점묘법을 연상케 하는 나뭇가지는 앞서 살펴본 하이라이트 기법이 도식화된 방식이다. 또 일괄적으로 건축물의 측면은 모두 회색으로 그려 넣어 음영을 표현했다.
   <한궁도> 병풍은 조선 시대의 회화 중에서 일점투시도법을 가장 잘 구사한 그림이다. 화면 맨 우측 중앙에 소실점이 설정되어, 화면에 그려진 건축물의 투시선이 이곳에 모여든다. 동시에 이와 동일한 밑그림을 따라 그린 <한궁도> 병풍이 국립민속박물관에도 전하고 있어서, 일본 병풍의 구성인 2좌 1쌍을 따라 제작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동아시아 회화에서 하늘이나 물 등을 채색하지 않고 여백으로 남겨 두었던 것과 달리 <한궁도> 병풍에서는 바탕 전체를 꼼꼼하게 채색하고 있는데, 이 또한 서양화법과 일본화풍을 함께 수용한 것이다.
   <한궁도>에 그려진 건축물은 도교적 의미에서는 불로장생하는 신선이 사는 궁궐을, 역사적으로는 한대(漢代)에 황제의 모후가 노년에 편안하게 거처하던 궁궐을 의미한다. 즉, <한궁도>에 그려진 건축물은 장수와 복록(福祿)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시에 조선 후기 궁중에서 선망하던 이국 취향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누각도>와 <한궁도>에는 중국식 맞배지붕인 경산(硬山) 지붕 건물과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無樑閣) 지붕 건물, 벽돌 건물 등이 가득 채워져 있다. 또 <누각도>에서는 건물마다 녹색, 황색, 보라색, 청색 등 각양각색의 유리 기와를 얹고 둥근 월광문, 중층의 사모지붕을 얹은 수각(水閣), 호리병을 닮은 절병통 등을 얹어 장식한 모습이 표현되었다. <한궁도>에 그려진 이국적인 건축물은 청대(清代)의 건축 양식과 닮았다. 그리고 실제로 청대의 건축 양식을 모방한 건축물이 조선 후기 궁궐과 사대부 저택으로 축조되기도 했다. 요컨대 <한궁도>는 조선 후기의 궁중에서 애호하던 이국 취향의 건축물과 시대적 분위기를 이국의 화풍을 결합하여 묘사한 그림이다.
나오며
흔히 조선 후기를 떠올리면 영·정조 시대를 정점으로 하여, 19세기는 세도정치와 쇄국정책으로 인해 조선의 문화가 쇠락하고 침체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궁궐에 장식되었던 그림 병풍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얼마나 이국의 문물에 관심이 많았는지, 그리고 그러한 취향과 관심을 자기화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소화하려고 노력했는지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조선 후기의 궁궐이 기존의 전통을 고수하고 답습하는 보수적인 공간이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와 달리 조선 후기의 궁궐은 문화적으로 열린 다양성의 공간이었다.
목차
조선 시대 궁중 회화의 다양성: 조선 후기 궁중의 그림 병풍과 이국 취미
시공간에 대한 예술가의 세 가지 시선
듣기
화면 설정
arrow_drop_down
  • 돋움
  • 바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