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 중심 의사결정의
한계와 다양성의 필요성:
교육 복지 생태계를 중심으로
이의헌
교육 소셜 벤처 점프 설립자 겸 대표.
디베르시타스(Diversitas). 발음도 어려운 이 잡지의 독자는 대부분 엘리트일 것으로 추측된다. 다행이다. 이 글의 목적은 엘리트 집단이 공적인 의사결정을 독점하는 현실 자체와 그 결과물의 적절성을 생각해 보는데 있기 때문이다. 핵심 독자인 대학 구성원들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 엘리트 중에서도 교수 사례를 예로 많이 가져왔다.
   이 글은 지난 10년간 교육 봉사 단체 ‘점프’에서 일한 경험에 기반한다. 엘리트 중심 의사결정의 한계와 다양성의 필요성을 쉽게 전달하기 위해 자동차 경음기, 탈북자 서재석 씨, 티치 포 아메리카, 공급자 중심 접근법, 교육 불평등 토론회, 정부 혁신위원회, 코로나와 온라인 교육 등 직접 경험한 사례를 다룬다. 각각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독자의 마음에 불편함과 동의할 수 없는 감정이 조금이라도 생긴다면 글을 쓴 보람이 있을 것 같다.
들어가며
자동차 경음기
25년 전 이야기로 시작해 보자. 해외 경험의 기회가 지금보다 적었던 1990년대. 미국에 유학을 다녀온 교수님들에게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미국 사람들은 참 시민 의식이 높다. 운전 중 앞차가 멈춰 있어도 절대 경음기를 울리지 않고 기다리거든.” 이런 자극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젊은 청년에게 미국은 아메리칸 드림과 팍스 아메리카나로 상징되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대학 졸업 후 운 좋게 미국 LA의 한 언론사에 취직해 8년간 일했고, 그 뒤 2년은 보스턴의 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미국 사람들이 자동차 경음기를 울리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시민 의식이 높아서만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해변가 대도시를 제외하면, 미국의 많은 대학은 대학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형성된 작은 도시에 위치하고 있다. 미국 운전자의 높은 시민 의식을 이야기하셨던 분들은 아마도 이런 캠퍼스 타운에서 공부를 하셨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대도시가 아니니 교통 체증이 거의 없고, 작은 대학 타운의 특성상 아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경음기를 누를 이유가 별로 없는 것이다. LA, 뉴욕, 샌프란시스코, 보스턴 같은 대도시 출퇴근 시간의 분주함은 우리 대도시와 형편이 비슷하다. 반대로 우리나라에서도 읍·면 지역에 가면 도시보다 경음기 소리의 빈도가 확실히 줄어든다.
   당시 내가 받은 자극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또는 ‘확증편향’ 사례였다. 우리나라 운전자가 경음기를 울리는 것은 심한 교통 체증과 대도시 속에서의 익명성 등이 주요 이유인데, 낮은 시민 의식에서 원인을 찾으니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경음기의 주된 사용 목적은 사고 위험에 대한 경고이고, 경음기 소음의 부정적 특성이 사회적으로도 부정적 역할을 끼친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는 1) 주장도 있으니, 경음기를 울리는 것이 낮은 시민 의식의 결과라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경음기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 이유는,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과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점에 동의를 얻기 위해서다. 사적 영역에서 자신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자연스럽고 괜찮다. 문제는 공적인 영역에서도 편향된 의사결정을 내리는 데 있다. 적어도 내가 만난 교육 복지와 사회 혁신 분야의 많은 엘리트들 역시 그런 경향성을 종종 보여 주고 있다. 이 글의 다양한 사례들을 읽고 당신이 좀 더 균형 잡힌 의사결정을 내린다면 더 없이 기쁠 것 같다.
   미국 생활 10년은 경음기를 누르고 안 누르는 행동의 진짜 원인을 고찰하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내 자신의 정체성도 돌아볼 수 있게 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명문고와 명문 대학을 졸업한 군필 남성. 나는 엘리트이면서 다수자였다. 낯선 미국에서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이주 노동자로 살기 전에는 다수자와 엘리트 집단이 누리는 편안함과 우월감이라는 장막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소수자의 삶을 살면서 이 장막 밖을 조금은 볼 수 있었고,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는 엘리트적 사고방식의 한계에 대한 단서도 얻었다.
   기자라는 직업 덕분에 이런 생각은 개인을 넘어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될 수 있었다. 영화와 드라마에도 많이 나오는 베벌리힐스 부자들의 비현실적 삶과 어바인 중산층의 안락한 삶을 보았다. 그 반대쪽에 있는 불법 체류자라고도 불리는 서류 미비 이주 노동자, 부모님 때문에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게 된 이민 1.5세와 2세들, LGBT(lesbian, gay, bisexual, and transgender)라 불리는 성 소수자들, 아프가니스탄의 전쟁 난민, 고향 북한에 대해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고 있는 탈북 청소년, 자연재해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 그리고 노숙자와 도시 빈민들도 취재했다. 다양한 삶의 모습과 만나며 약 30년 동안 내가 바라보고 생각해 온 세계관이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탈북자 서재석 씨
두 번째 이야기 보따리는 내가 취재했던 북한이탈주민 서재석 씨의 이야기다. 아래 사진을 찬찬히 보자.

미국 망명 허가 받은 서재석 씨 가족
출처: 미주한국일보 2)


   취재 당시 서재석 씨는 제3국을 거처 한국에 입국해 우리처럼 한국 여권을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었다. 10년을 탈북자로 한국에 살았던 서씨를 미국 법원에 망명 신청을 한 최초의 한국 국적 탈북자로 만났다. 북에서 군인으로 안정적 삶을 살았던 서씨는 폭발 사고로 전신 화상을 입어 군복을 벗게 된 뒤 월남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차별 때문에 장애를 가진 탈북자가 지속가능한 경제생활을 하기 어렵고, 그 차별이 아이들에게까지 대물림되어 정상적 생활이 불가능하다. 미국이 나의 망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 가족은 다시 제3국으로 가야 하고, 그럼 가족의 안전이 위협을 받는다.’는 논리가 받아들여져 망명이 승인됐다. 3) 현재에도 수백 명의 한국 국적 북한이탈주민이 미국에 망명 신청을 했거나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씨가 한국에서 차별을 느낀 것은 벌써 20년 전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오늘 우리 주변의 이주민, 북한이탈주민, 장애인, 성 소수자 같은 다양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리의 시선과 차별이 그때와 비교해 얼마나 나아졌는지는 의문이다. 아무튼 그때는 이런 삶을 지켜보고 객관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목격자’인 기자의 삶도 의미 있었지만, 현실을 조금이라도 개선할 수 있는 ‘실천자’가 되고 싶어 공공정책 대학원에 진학했다.
교육 소셜 벤처 ‘점프’
대학원에서 머릿속에 자리 잡은 문제의식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의 주어진 환경으로 인해 기회가 제한되고, 그것으로 인해 삶의 다양한 가능성이 한정되는 사회가 옳은가?’였다. 대학원에서 만난 많은 친구들과 2년의 시간 동안 이런 문제의식을 나누며 여러 교수님들의 도움을 받아, 졸업논문 대체 정책 보고서로 ‘점프’를 제안했다. 4) 그리고 6명의 한국 출신 유학생 친구들과 많은 지인의 도움을 받아 2011년에 한국으로 역이민하면서 사단법인 점프를 시작할 수 있었다.
   11년이 지난 지금은 매년 약 1,000명의 청년·대학생이 다양한 배경의 어린이·청소년 약 4,000명에게 1년 단위, 소그룹으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해 학습을 중심으로 공정한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비영리 사회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 글은 점프가 아닌, 점프를 하면서 느낀 엘리트 중심 세계관의 한계에 대한 글이다. 따라서 이주 노동자로 미국에서 살 당시 느꼈던 문제의식인 사회적 약자의 공정한 기회를 증대하기 위해 점프가 어떤 활동을 하고 있고 어떤 임팩트를 만들어 내는지 궁금한 독자는 관련 논문과 5) 홈페이지(www.jumpsp.org)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티치 포 아메리카(Teach for America)
대학원에서 졸업논문을 쓸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기존 시장을 분석한 것 이었다. 티치 포 아메리카(TFA)가 가장 많은 영감을 주었다. TFA는 미국 대학생들이 졸업 후 2년 동안 빈민 지역 공립학교에서 2년간 교사로 일하는 프로그램이다. 웬디 콥(Wendy Kopp)이 프린스턴대학 재학 중 TFA 계획을 졸업논문으로 제출했을 때 지도교수는 비현실적인 아이디어라고 평가했다. 6) 하지만 30년 뒤 TFA는 미국을 넘어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교육 봉사 단체 중 하나로 성장했다.
   미국 사회도 이 운동에 화답했다. 내가 다녔던 학교를 포함해 많은 대학원이 TFA 졸업생을 위한 별도 입학 전형을 마련하고, 기업에서도 관련 경력을 인정하는 등 공공성을 실천한 인재 육성을 권장하고 있다.
   TFA모델에 감동을 받아 처음에는 한국 지부 설립을 추진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당시 TFA는 공립학교에 교사를 파견하는 미국식 모델을 고집했다. 한국은 전국의 공교육 수준이 비슷한 데다, 획일화된 교사 채용 방식, 강력한 교사 노조 등으로 인해 자격이 없는 대학생이 교사로 채용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여러 차례 이러한 한국의 현실을 반영한 유연한 접근을 요청했지만 결론은 같았다.
   관점을 바꿔 한국의 사례들을 살펴봤다. 한국은 일제시대의 ‘브나로드(Vnarod)운동’과 광복 이후 야학에서 시작되는 깊은 교육 봉사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지금도 다양한 정부 기관, 기업, 비영리단체, 대학 동아리 등이 멘토링과 교육 봉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관심과 자원 투입에도 교육 기회와 성과의 격차가 줄어들지 않고 불평등이 심화되는 원인이 궁금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거시적 원인이 아닌, 프로그램이 작동하지 않는 미시적 원인에 접근을 해 보았고 공급자 중심 방법론으로 많은 설명이 되었다.

공급자 중심 접근법
공급자 중심 접근은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많은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프로그램들이 공급자 위주로 설계된다는 것이다. 교육 봉사 활동의 경우 재원을 제공하는 정부 기관과 기업,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학생 등이 주요 공급자다. 프로그램 설계에 자문을 하는 교수나 학자, 현장 전문가도 넓은 의미의 공급자라 할 수 있다. 당연히 수요자는 다양한 배경 을 가진 아동·청소년이다. 이 과정에 참여하는 공급자는 대부분 선의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선의를 가진 엘리트가 내리는 의사결정의 한계는 분명히 존재했다.
   정부와 기업의 담당자와 책임자는 자신의 임기에 결과물을 보기 원하고, 같은 비용으로 더 많은 혜택을 제공하기를 원한다. 대학생은 자신의 학기 스케줄에 맞추어 3개월 정도의 단기 봉사를 선호한다. 현장 전문가들은 자신의 전공과 관심사에 맞추어 이런저런 프로그램과 접근법, 솔루션을 제시한다.
   이렇다 보니 10년 전에도 지금도 교육 봉사 생태계에는 건물을 지어주거나 컴퓨터 같은 물품을 지원하는 하드웨어적 접근이 넘쳐난다. 그러나 교육 환경이 열악할 것으로 생각할 도서 지역 학교의 대다수는 학교 시설도 좋고 컴퓨터, 드론, 3D프린터 등 첨단 교육 보조 기구가 넘쳐난다. 엘리트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다양한 심리 상담, 독서 토론, 기업가 정신교육, 디자인 씽킹(design thinking), 미술 치료, 연극 동아리, 코딩 수업 등등이 제공되고 성과 측정을 위한 평가가 뒤따른다. 대학생들은 계획된 단기 프로그램을 많은 아이들에게 전달하면서 이력서에 봉사 활동 경력을 채워 넣는다.
   수요자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우선 현장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복지 기관의 선생님들은 아동·청소년이 아닌 대학생의 스케줄에 맞추어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데다 관리도 어렵고, 제공 기관이 요구하는 서류도 많아 실질적인 도움이 안 되거나 부담스럽다는 의견이 많다. 아이들은 프로그램 평가를 할 때 “어떻게 써 드릴까요?”라고 먼저 물어볼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반복적으로 노출된 프로그램의 패턴에 학습이 되어 있다. 대학생 자원봉사자도 다른 공급자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지만, 아이들은 “선생님, 대충 시간이나 때우다 가세요. 어차피 선생님도 우릴 떠날 거잖아요.”라는 반응을 보인다.
   교육 봉사를 해 보았거나 관심 있는 사람들은 이 이야기에 대부분 충격을 받는다. 모두가 선의를 가지고 많은 자원을 투입하고 봉사하고 희생하지만 결과는 의도와 다르다. 이유는 엘리트들이 현장의 목소리를 듣기보다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효과적이고 이상적인 결과를 실험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삶은 실험 대상이 아니기에 이상적이지 않고, 효과적일 필요도 없다.
   학창 시절 나는 어떻게 성장했고, 내가 내 자녀에게 무엇을 해 주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된다. 학생은 공부가 주업이고, 학업에서 높은 성취를 거둘 때 자존감을 포함한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님의 관심(당근과 채찍), 롤모델이 되는 주변의 좋은 선후배, 친구들과의 건전한 또래 압력(peer pressure) 등 복합적 자극이 필요하다. 여러분은 이런 관계 속에서 성장했는지, 심리 상담, 미술 치료, 기업가 정신 교육, 독서 토론 같은 프로그램 덕분에 성장했는지 자문해 보면 같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그래서 ‘점프’는 기존 솔루션들과 문제에 거꾸로 접근했다. 프로그램이 아닌 사람 사이의 관계와 믿음에 기반했다. 정기적이고 장기적인 만남을 통해 멘토(mentor)와 멘티(mentee) 사이에 라포(rapport)가 형성되어야 서로가 자신의 결핍과 꿈을 이야기하면서 동기를 부여받을 수 있고, 그래야 두 사람이 신뢰의 관계 속에서 그 목표를 향한 여정을 함께 시작할 수 있다. 그게 현장에서 원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그래서 지금도 수요자와 현장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을 핵심 방법론으로 지키고 있다.
엘리트 중심 의사결정의 한계
10년 넘게 교육 문제 해결을 위한 비영리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면서 수많은 엘리트를 만났다. 그중에는 현장과 수요자 중심으로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훌륭한 분들도 많았다. 하지만 엘리트 중심 의사결정의 한계를 생각해 보기 위해 다소 극단적이지만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사례를 몇 가지 소개한다.

교육 불평등 토론회
창업 초기 한 소셜 벤처가 주최한 교육 불평등 문제에 관한 토론회에 참석했다. 전통적 토론회가 아니고, 당시 20~40대 젊은 현장의 전문가들과 교육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 격의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나누기 시작했다. 유학을 다녀온 어느 참가자가 “유학 생활을 하다 보니 한국 학생은 자신의 생각을 잘 이야기하지 못하는데, 이는 한국의 주입식 교육에 원인이 있다.”라는 취지의 이야기를 하면서부터 활기를 띠었다. 교육 불평등 문제에 관심 있는 엘리트들답게 유학을 다녀온 사람이 많았고, 참가자들은 본인이 생각하는 한국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주입식 교육을 시작으로 입시 위주의 교육 정책, 획일화된 커리큘럼, 사회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교육 시스템, 교사 이기주의 등등 많은 문제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누군가는 토론 교육이, 누군가는 코딩 같은 기술 기반 교육이, 누군가는 학부모 교육이, 누군가는 다양한 경험이 교육 불평등의 해결책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날 토론은 학습에서 높은 성취를 달성한 엘리트 학생들의 문제에 집중하고 말았다. 교육 기회의 불평등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느리거나 낮은 성취를 이루는 다수 학생들이 겪는 어려움과 그 해결 방안에 대한 논의는 진행되지 못했다. 당사자가 없었고, 그 목소리를 대변할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다음의 표를 보면 그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socioeconomic status, SES)에 따라 자녀의 미래가 결정되니, 이미 개천 용은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엘리트 집단이 점점 더 비슷한 사회·경제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로 채워지니 결국 자신들의 렌즈로 세상을 보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SES)에 따른 수학 학업성취 수준

(단위:점)

* 2003~2011년 전국 최대 672개 초·중·고교학생 4만123명 대상 수학 평균점수 분석결과로, 학업성취수준은 전체 평균을 50점, 표준오차를 21점으로 잡은 표준화 점수 출처: 세계일보 7)


   교육 불평등 토론회에서 만난 젊은 엘리트들은 대부분 자신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더 좋은 사회를 위한 문제의식을 갖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훌륭한 청년들이었다. 운 좋게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은 부모님을 만나 강남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나오고 명문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라면 우리 주변에 월 30만 원짜리 단칸방에서 할머니와 함께 사는 어린이를 직접 만나기는 어렵다. 이주 노동자 부모님을 돕기 위해 중학교 졸업 후 공장에 취업하는 것이 꿈인 청소년에게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
   ‘점프’에도 많은 엘리트 대학생이 찾아온다. 하지만 이들은 점프에서 1년간 활동한 뒤 조금은 바뀐다. 자신이 속한 과와 학교가 아닌 다른 배경의 동료 대학생들을 만나고, 자신이 전혀 생각지 못하던 분야에 종사하는 사회인 멘토를 통해 다양한 삶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배경의 어린이, 청소년과 라포를 형성한 대학생 봉사자들이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가 있다. 청소년들을 통해 자기가 살던 세상과 전혀 다른 세상이 우리 지역에도 존재함을 알게 되었고, 멘티로부터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는 것이다.
   엘리트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다양성을 접하고 경험할 기회다. 현실은 그렇지 못해 그날의 토론회는 산으로 갔지만, 사적 의견의 교환이라 크게 걱정할 것은 없었다. 문제는 대부분의 엘리트가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더 자신의 전문 분야와 그 인적 네트워크에 고립되어 다양성에 대한 감수성이 개선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결국 많은 엘리트들은 공적 의사결정의 영역에서도 현장의 다양한 의견이 아닌 자신의 경험과 관점에서 판단해 크고 작은 불합리와 불공정을 야기한다.

정부 혁신위원회
중앙정부 한 부처 혁신위원회에서의 경험이다. 정부 시스템과 보상 체계, 제도 혁신을 고민하는 위원회였는데, 위원은 주로 50대와 60대의 행정학과 교수였다. 교수 위원들은 이미 공무원과도 친분이 깊었다. 민간 전문가로는 나와 대기업의 30대 여성 등이 포함되었다. 위원회의 취지에 맞추어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해 중년 남성 교수 중심인 위원회 구성의 변경을 제안했다. 무엇보다 공무원과 친한 기성세대보다는 그렇지 않은 젊은 사람들이 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조심스럽게 “우리 위원회가 특별한 이권이나 보상이 주어지는 자리도 아니니 연령과 성별, 직업 등 인구 분포를 고려해 임명하면 어떨까요?”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예상을 깨고 여성 교수가 반대를 했다. 그분은 기계적 중립의 함정에 빠지지 말자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위원장은 좋은 의견에 감사하다며, 앞으로 계속 다양한 의견을 반영해 위원회를 이끌어 가겠다고 다짐했다.
   이때의 경험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적어도 그 여성 교수에게는 여성이라는 정체성보다는 교수라는 정체성이 더 크고 중요했던 것 같다. 만일 그분이 내 의견에 동의해 위원회 구성을 인구 비례에 맞추어 재편하고, 모든 중앙정부 기관 산하 위원회의 위원을 인구 통계학적 특성을 최대한 반영해 구성하도록 제안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지금도 가끔 한다.
   안타깝게도 정부의 다양한 위원회, 자문 회의, 정책 토론회 등에 참여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유사한 경험을 했다. 어느 부처가 주관하느냐에 따라 주인공은 사회복지학과 교수가 되기도 하고, 경영학과 교수가 되기도 하고, 변호사가 되기도 하고, 시민사회 운동가가 되기도 하고, 공무원이 되기도 할 뿐이다. 많은 경우 이 주인공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개인의 이해관계 혹은 관점에 맞추어 교육 불평등 토론회 같은 결론을 이끌어 내곤 했다.

코로나와 온라인 교육
마지막 이야기는 최근 교육계에서 뜨거운 열풍이 불고 있는 온라인 교육에 대한 것이다. 코로나로 어쩔 수 없이 시작된 원격 수업은 온라인 교육 시장의 문을 활짝 열었다. 물론 이미 대입과 취업 분야에서 인강(인터넷 강의) 시장이 활성화되어 있었지만, 오프라인 기반 공교육의 파행적 운영이 오랜 기간 지속되면서 초·중등 교육으로까지 온라인 교육이 급속히 확장되었다. 소위 에듀테크(education tech)라 불리는 기술 기반 스타트업뿐 아니라 전통적 교육 관련 기업들도 AI와 빅데이터를 내세우며 온라인 교육 플랫폼과 솔루션을 앞다투어 내놓고 있다.
   교육 복지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앞에 기술한 대학생 중심 교육 봉사 프로그램의 문제점을 해결할 솔루션으로 온라인 교육이 주목을 받고 있다. 기술 기반으로 개인에 최적화된 맞춤형 교육을 제공한다는 온라인 교육의 보편적 효과성과 유효성에 대한 판단은 이 글의 관심 사항은 아니다. 다만 교육 복지 분야에서 현재의 접근법이 과연 최선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기초, 광역, 중앙정부와 몇몇 기업, 대학은 코로나 상황에 맞추어 교육 복지 대상에게 온라인 학습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많은 예산을 투입해 기업의 교육 솔루션을 구매하면서 ‘모든 아이들이 가정 형편과는 상관없이 배움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자랑한다. 하지만 앞에 적은 것처럼, 꿈이 없고 동기가 없는 대상에게는 이런 자극을 제공해도 높은 효과가 나오기 어렵다. 인강과 온라인 교육 프로그램을 접해 본 사람은 그것이 동기부여 된 학생이 주변의 지속적인 지원과 관심을 받을 때 유효한 솔루션임을 누구나 알고 있다.
   ‘점프’도 폐광 지역 청소년과 폐광 지역 대학생을 연결하는 프로그램에서는 온라인 교육 기법(화상 멘토링)을 사용하고 있고, 비교적 잘 작동한다. 참가하는 대학생과 청소년이 같은 지역 출신으로 동네와 학교의 선후배라는 유대감이 있어 온라인에서도 빠르게 라포가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장과 수요자의 특성을 반영한 결과다.
   교육 분야의 많은 엘리트들이 점점 더 온라인 교육의 우수성과 효과성을 내세우는 걸 보면 교육 복지 분야에서도 온라인 기반 프로그램이 더 많이 늘어날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높은 수준의 교육과 자극을 받은 본인에게는 크게 거부감이 없는 데다 비용 면에서도 효과적일 수 있다. 반복되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엘리트의 관점이 아닌 수요자 관점으로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사회문제를 바라보기를 부탁한다.
   오래전 자동차 경음기 이야기를 해 준 교수님도, 웬디 콥에게 티치 포 아메리카가 비현실적이라고 충고한 교수님도, 교육 불평등 토론회에 참여했던 젊은 인재들도, 정부 혁신위원회에 참여했던 교수님들도, 코로나 시국에 온라인 교육을 복지 분야에 도입한 공무원도 모두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라 믿는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결정이 옳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맺는말
이번 글의 큰 주제는 ‘대안 교육, 청년 교육’이다. 대안 교육 전문가도 청년 교육 전문가도 아니어서 해당 분야를 다양성 관점으로 분석하지는 못했다. 대안 교육, 청년 교육 분야를 포함해 특정 분야의 엘리트 전문가들이 자신의 경험과 관점에 기반해 문제를 분석하고 솔루션을 내놓는 것이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현장 수요자들의 목소리에 응답하는 해결방식을 선택한 것이 다행인 것 같기도 하다. 같은 맥락에서 교육 불평등 문제를 줄이기 위해 ‘점프’가 고민하고 실행했던 많은 일들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현장과 수요자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이 글을 쓴 이유는 안타깝게도 지난 10년간 한국에서 만난 많은 엘리트들이 공적인 영역에서 반복적으로 자신의 경험과 이해관계에 기반해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글을 읽은 독자라면 아무리 뛰어난 엘리트여도 그런 방식의 의사결정을 내리지 않고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들을 것으로 기대한다.
   대학원에서의 경험을 나누면서 글을 정리하려 한다.
   국제기구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통계 과목 교수는 “여러분이 모국에 돌아가면 수학과 숫자로 무장한 다양한 엘리트 집단이 통계자료를 내세우며 여러분을 설득하려 할 것이다. 통계를 배우는 것은 통계학자가 되는 데 있지 않고, 그런 환경 속에서 최선의 솔루션을 찾는 데 있다”고 말했다. 노벨상 수상자를 포함한 거의 모든 교수가 학문은 목적이 아닌 수단이고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는 현실에서 좋은 의사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라고 반복해 말했다.
   졸업생들의 마지막 수업은 정년을 앞둔 노교수님과의 대담으로 진행됐다. 그때에도 교수님은 한결같이 “너희가 아는 것으로 판단하지 말고, 고향에 돌아가면 적어도 3년 동안은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라. 현장에 답이 있다.”고 말했다.
목차
사회 혁신이란 나무는 다양성을 먹고 자란다: 내 안의 다양성, 내 밖의 다양성
엘리트 중심 의사결정의 한계와 다양성의 필요성: 교육 복지 생태계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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