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넘게 교육 문제 해결을 위한 비영리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면서 수많은 엘리트를 만났다. 그중에는 현장과 수요자 중심으로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훌륭한 분들도 많았다. 하지만 엘리트 중심 의사결정의 한계를 생각해 보기 위해 다소 극단적이지만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사례를 몇 가지 소개한다.
교육 불평등 토론회
창업 초기 한 소셜 벤처가 주최한 교육 불평등 문제에 관한 토론회에 참석했다. 전통적 토론회가 아니고, 당시 20~40대 젊은 현장의 전문가들과 교육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 격의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나누기 시작했다. 유학을 다녀온 어느 참가자가 “유학 생활을 하다 보니 한국 학생은 자신의 생각을 잘 이야기하지 못하는데, 이는 한국의 주입식 교육에 원인이 있다.”라는 취지의 이야기를 하면서부터 활기를 띠었다. 교육 불평등 문제에 관심 있는 엘리트들답게 유학을 다녀온 사람이 많았고, 참가자들은 본인이 생각하는 한국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주입식 교육을 시작으로 입시 위주의 교육 정책, 획일화된 커리큘럼, 사회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교육 시스템, 교사 이기주의 등등 많은 문제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누군가는 토론 교육이, 누군가는 코딩 같은 기술 기반 교육이, 누군가는 학부모 교육이, 누군가는 다양한 경험이 교육 불평등의 해결책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날 토론은 학습에서 높은 성취를 달성한 엘리트 학생들의 문제에 집중하고 말았다. 교육 기회의 불평등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느리거나 낮은 성취를 이루는 다수 학생들이 겪는 어려움과 그 해결 방안에 대한 논의는 진행되지 못했다. 당사자가 없었고, 그 목소리를 대변할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다음의 표를 보면 그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
(socioeconomic status, SES)에 따라 자녀의 미래가 결정되니, 이미 개천 용은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엘리트 집단이 점점 더 비슷한 사회·경제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로 채워지니 결국 자신들의 렌즈로 세상을 보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SES)에 따른 수학 학업성취 수준
(단위:점)
* 2003~2011년 전국 최대 672개 초·중·고교학생 4만123명 대상 수학 평균점수 분석결과로, 학업성취수준은 전체 평균을 50점, 표준오차를 21점으로 잡은 표준화 점수 출처: 세계일보
7)
교육 불평등 토론회에서 만난 젊은 엘리트들은 대부분 자신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더 좋은 사회를 위한 문제의식을 갖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훌륭한 청년들이었다. 운 좋게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은 부모님을 만나 강남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나오고 명문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라면 우리 주변에 월 30만 원짜리 단칸방에서 할머니와 함께 사는 어린이를 직접 만나기는 어렵다. 이주 노동자 부모님을 돕기 위해 중학교 졸업 후 공장에 취업하는 것이 꿈인 청소년에게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
‘점프’에도 많은 엘리트 대학생이 찾아온다. 하지만 이들은 점프에서 1년간 활동한 뒤 조금은 바뀐다. 자신이 속한 과와 학교가 아닌 다른 배경의 동료 대학생들을 만나고, 자신이 전혀 생각지 못하던 분야에 종사하는 사회인 멘토를 통해 다양한 삶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배경의 어린이, 청소년과 라포를 형성한 대학생 봉사자들이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가 있다. 청소년들을 통해 자기가 살던 세상과 전혀 다른 세상이 우리 지역에도 존재함을 알게 되었고, 멘티로부터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는 것이다.
엘리트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다양성을 접하고 경험할 기회다. 현실은 그렇지 못해 그날의 토론회는 산으로 갔지만, 사적 의견의 교환이라 크게 걱정할 것은 없었다. 문제는 대부분의 엘리트가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더 자신의 전문 분야와 그 인적 네트워크에 고립되어 다양성에 대한 감수성이 개선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결국 많은 엘리트들은 공적 의사결정의 영역에서도 현장의 다양한 의견이 아닌 자신의 경험과 관점에서 판단해 크고 작은 불합리와 불공정을 야기한다.
정부 혁신위원회
중앙정부 한 부처 혁신위원회에서의 경험이다. 정부 시스템과 보상 체계, 제도 혁신을 고민하는 위원회였는데, 위원은 주로 50대와 60대의 행정학과 교수였다. 교수 위원들은 이미 공무원과도 친분이 깊었다. 민간 전문가로는 나와 대기업의 30대 여성 등이 포함되었다. 위원회의 취지에 맞추어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해 중년 남성 교수 중심인 위원회 구성의 변경을 제안했다. 무엇보다 공무원과 친한 기성세대보다는 그렇지 않은 젊은 사람들이 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조심스럽게 “우리 위원회가 특별한 이권이나 보상이 주어지는 자리도 아니니 연령과 성별, 직업 등 인구 분포를 고려해 임명하면 어떨까요?”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예상을 깨고 여성 교수가 반대를 했다. 그분은 기계적 중립의 함정에 빠지지 말자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위원장은 좋은 의견에 감사하다며, 앞으로 계속 다양한 의견을 반영해 위원회를 이끌어 가겠다고 다짐했다.
이때의 경험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적어도 그 여성 교수에게는 여성이라는 정체성보다는 교수라는 정체성이 더 크고 중요했던 것 같다. 만일 그분이 내 의견에 동의해 위원회 구성을 인구 비례에 맞추어 재편하고, 모든 중앙정부 기관 산하 위원회의 위원을 인구 통계학적 특성을 최대한 반영해 구성하도록 제안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지금도 가끔 한다.
안타깝게도 정부의 다양한 위원회, 자문 회의, 정책 토론회 등에 참여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유사한 경험을 했다. 어느 부처가 주관하느냐에 따라 주인공은 사회복지학과 교수가 되기도 하고, 경영학과 교수가 되기도 하고, 변호사가 되기도 하고, 시민사회 운동가가 되기도 하고, 공무원이 되기도 할 뿐이다. 많은 경우 이 주인공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개인의 이해관계 혹은 관점에 맞추어 교육 불평등 토론회 같은 결론을 이끌어 내곤 했다.
코로나와 온라인 교육
마지막 이야기는 최근 교육계에서 뜨거운 열풍이 불고 있는 온라인 교육에 대한 것이다. 코로나로 어쩔 수 없이 시작된 원격 수업은 온라인 교육 시장의 문을 활짝 열었다. 물론 이미 대입과 취업 분야에서 인강
(인터넷 강의) 시장이 활성화되어 있었지만, 오프라인 기반 공교육의 파행적 운영이 오랜 기간 지속되면서 초·중등 교육으로까지 온라인 교육이 급속히 확장되었다. 소위 에듀테크
(education tech)라 불리는 기술 기반 스타트업뿐 아니라 전통적 교육 관련 기업들도 AI와 빅데이터를 내세우며 온라인 교육 플랫폼과 솔루션을 앞다투어 내놓고 있다.
교육 복지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앞에 기술한 대학생 중심 교육 봉사 프로그램의 문제점을 해결할 솔루션으로 온라인 교육이 주목을 받고 있다. 기술 기반으로 개인에 최적화된 맞춤형 교육을 제공한다는 온라인 교육의 보편적 효과성과 유효성에 대한 판단은 이 글의 관심 사항은 아니다. 다만 교육 복지 분야에서 현재의 접근법이 과연 최선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기초, 광역, 중앙정부와 몇몇 기업, 대학은 코로나 상황에 맞추어 교육 복지 대상에게 온라인 학습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많은 예산을 투입해 기업의 교육 솔루션을 구매하면서 ‘모든 아이들이 가정 형편과는 상관없이 배움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자랑한다. 하지만 앞에 적은 것처럼, 꿈이 없고 동기가 없는 대상에게는 이런 자극을 제공해도 높은 효과가 나오기 어렵다. 인강과 온라인 교육 프로그램을 접해 본 사람은 그것이 동기부여 된 학생이 주변의 지속적인 지원과 관심을 받을 때 유효한 솔루션임을 누구나 알고 있다.
‘점프’도 폐광 지역 청소년과 폐광 지역 대학생을 연결하는 프로그램에서는 온라인 교육 기법
(화상 멘토링)을 사용하고 있고, 비교적 잘 작동한다. 참가하는 대학생과 청소년이 같은 지역 출신으로 동네와 학교의 선후배라는 유대감이 있어 온라인에서도 빠르게 라포가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장과 수요자의 특성을 반영한 결과다.
교육 분야의 많은 엘리트들이 점점 더 온라인 교육의 우수성과 효과성을 내세우는 걸 보면 교육 복지 분야에서도 온라인 기반 프로그램이 더 많이 늘어날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높은 수준의 교육과 자극을 받은 본인에게는 크게 거부감이 없는 데다 비용 면에서도 효과적일 수 있다. 반복되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엘리트의 관점이 아닌 수요자 관점으로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사회문제를 바라보기를 부탁한다.
오래전 자동차 경음기 이야기를 해 준 교수님도, 웬디 콥에게 티치 포 아메리카가 비현실적이라고 충고한 교수님도, 교육 불평등 토론회에 참여했던 젊은 인재들도, 정부 혁신위원회에 참여했던 교수님들도, 코로나 시국에 온라인 교육을 복지 분야에 도입한 공무원도 모두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라 믿는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결정이 옳았는지는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