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혁신이란 나무는 다양성을 먹고 자란다:
내 안의 다양성, 내 밖의 다양성
이혜영
아쇼카(Ashoka) 한국 법인 대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는 2021년 12월은 개인적으로 의미가 큰 시기이다. 대학 캠퍼스를 떠나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꼭 20주년이 되는 달이기 때문이다. 지난 20년간 북한 인권 NGO 소속 활동, 중국 내 탈북 여성 인신매매 실태 조사 활동, 동북아시아를 위한 비영리 인권 단체 설립, 그리고 지난 9년간 일해 온 글로벌 비영리 조직 아쇼카(Ashoka: Innovators for the Public)로 이어지는 여정 속에서, 나에게 북극성이 되어 준 것은 확실히 ‘사회 혁신’이었다. 사회 혁신이 무엇인지, 왜 필요한지를 묻는 질문들에는 꽤 자신 있게 답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양성’의 관점에서 사회 혁신을 바라보려고 하니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알 것 같기도 하지만, 실상 그동안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 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거꾸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나에게 ‘다양성’이란 어떤 의미였고 경험이었길래 세상의 많은 길들 중에서도 ‘사회 혁신’에 매료되고 지금도 그 길 위에 서 있게 된 것일까 하고 말이다. 그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다양성’을 정의할 수 있는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어쩌면 지극히 보편적인 단서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아주 어린 시절부터 청소년기, 성인기, 이제 중년에 들어선 내가 되기까지, ‘다양성’에 대해 내가 인지하고 느끼고 기억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되짚어 보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글의 1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무엇이 나로 하여금 ‘사회 혁신’과 ‘다양성’이란 주제에 대해 끊임없는 호기심을 갖게 만들었는지를 되돌아보고, 2부에서는 그 호기심을 채워 주고 나아가 지금도 나에게 영감과 용기를 주고 있는 사회 혁신가들의 사례를 소개하도록 하겠다.
1부: 내 안에 축적된 다양성의 기억과 감각들
그 모든 다양성의 시작–탄생과 가정
나의 어린 시절을 대표하는 한 가지 표현이 있다면 ‘5남매’일 것이다. 내가 태어난 70년대 중후반에는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가 공식 모토였다고 하니, 5남매라면 당시에도 이미 매우 이례적인 숫자였다. 이유가 없지는 않았다. 종손 집안의 2대 독자이셨던 나의 아버지가 결혼식 전날 함에다 아이 5명의 이름을 넣어 오셨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만 나이 다섯 살이 되기도 전에 3명의 어린 동생을 보았고 그걸로 끝인 줄 알았지만, 초등학교 2학년 때 엄마가 다섯째를 임신했다는 소식에 어린이답지 않게 한숨을 내쉰 기억이 있다. 그렇게 아주 어린 나이부터 생명의 탄생과 인간의 가장 연약한 시기(영유아기)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것이 나의 무의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아직도 스스로 탐구 중이다. 하지만 그 후 네 명의 동생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성장하면서 한 가지 분명히 깨달은 것이 있다. 바로 아무리 같은 부모의 DNA를 물려받고 같은 뱃속에서 태어난 형제자매지간이라도 인간은 서로 아주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 다른 욕구와 개성을 가진 존재들이 동일한 부모님의 애정·관심·시간·재원 같은 제한된 자원을 나눠 갖기 위해 벌이는 눈에 보이는, 또 보이지 않는 ‘투쟁’ 속에서, 어쩌면 자연스럽게 인생의 첫 좌절을 맛보기도 하고 때로는 심각한 상처를 입기도 했다. 거기다 우리 집의 특수 상황으로, 부모님 간 그리고 할머니와 어머니 간의 종교적 갈등으로 인해 우리 5남매는 성장 과정 내내 불화와 긴장, 때론 폭력을 고스란히 겪어 내야 했다. 부모님은 물론 형제자매들 각자의 개성과 약점들이 거칠게 부딪칠 때마다 몹시 아팠고, 도망가고 싶기도 했다. 한편 180도 상반된 세계관의 존재와 그로 인한 갈등의 존재가 초깃값이었던 나의 어린 시절은 아이러니하게도 ‘다양성’을 향한 나의 갈망의 불씨가 되었다.

홍콩에서 만난 다양한 맛, 언어, 인종
그다음으로 내가 기억하는 내 인생의 ‘다양성’의 시기는 홍콩에서 펼쳐진다. 중학교를 막 졸업할 무렵, 은행에 다니셨던 아버지가 홍콩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그렇게 나와 우리 가족은 1992년부터 약 3년간 ‘동양의 진주’라 불리던 홍콩에 살게 되었다. 그 전까지의 다소 위축된 삶으로부터의 변화였고 해방이었다. 10대 후반의 감수성 예민한 시절을 홍콩에서 지내면서 나는 그 전에는 느껴 보지 못한 수많은 감각들에 열리게 되었다. 가장 먼저 나를 사로잡은 것은 홍콩에서 처음 보거나 맛본 많은 과일과 음식들의 다양성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몸이 아플 때나 한번 먹어 볼까 말까 한 과일 ‘바나나’가 홍콩에서는 가장 싸고 맛도 밋밋한 과일에 속했다. 도깨비방망이처럼 울퉁불퉁하게 못생겼는데 냄새와 질감은 독보적인 고급 과일 ‘두리안’이나 과일의 여왕이라 불리는 벨벳 느낌의 ‘망고’를 처음 맛보고 느낀 황홀감은 아직도 내 입속 미뢰들이 그때 그대로 기억하고 있다.
   물론 홍콩에서의 새로운 삶이 달콤함만 선사한 것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문화 충격’도 컸다. 내가 마주친 문화 충격은 크게 두 가지 축이었다. 하나는, 난생처음 접해 본 인종차별이라는 현실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주 노동자의 현실을 마주한 것이었다. 물론 당시 나는 고등학생으로서 주로 ‘국제학교’라는 이름의 잘 정비된 시스템 안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노골적인 인종차별을 경험한 적은 없다. 하지만 캐나다 국제학교와 영국 국제학교 두 곳을 연이어 다니면서, 서양인과 동양인, 백인과 유색인종, 심지어 같은 유색인종들 사이에도 출신 국가나 지역에 따라 미묘한 우열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캐나다 국제학교에서는 그나마 수적으로 앞선 동양의 여러 나라 친구들–일본, 인도네시아, 대만, 인도 등–간에 우정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아서 좋았다. 다들 외국에 나온 지 오래지 않아 영어도 서툴고 새로운 문화에도 적응해야 하는 같은 처지라 그랬을까. 비슷한 취약성을 가졌다는 사실이 언어 장벽이나 기존의 편견을 뛰어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도 이 무렵 알게 된 것 같다.
   그 후 나는 객관적으로는 더 높은 평가를 받는 학교인 영국 국제학교로 옮겨 갔다. 그곳은 부모를 따라 미국이나 유럽에서 홍콩으로 온 백인 학생들이 주를 이루는 학교였다. 초반에 적응이 쉽지 않았던 나는 아주 가끔 쉬는 시간에 혼자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다 보고도 몇 분씩 더 있다가 나오기도 했다. 얼마 후 말레이시아계 중국인 친구와 단짝이 되어 함께 교내 필드하키 팀에 가입해 활동하는 등 즐겁게 생활했지만, 학교 자체에서 느껴지는 인종 간 분리된 느낌은 늘 나를 긴장하게 했고 불편함을 느끼게 했다. 점심시간에도 백인 아이들과 동양 아이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식사를 하는 테이블은 따로 정해진 듯한 모양새였다. 주말이면 부유층이 모여 사는 홍콩섬 해변가에서 파티가 자주 열리는 것 같았지만, 동양 아이들 중 그런 파티에 가는 아이는 매우 드물었다. 아무도 대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누구나 감지할 수 있는 경계가 존재했던 것이다.

‘멜팅 팟(melting pot)’의 빛과 그림자
출신 국가나 인종에 따른 격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사실 학교 안에서 보다 바깥세상에서 더욱 확연히 눈에 보였다. 바로 홍콩에 와 있던 수많은 동남아시아 출신 이주 노동자들의 모습에서였다. 당시 홍콩은 경제·문화적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고, 전 세계 곳곳의 유망 기업과 사업가들이 비즈니스 기회를 보고 모여드는 그야말로 동양의 ‘멜팅 팟(melting pot)’ 같은 곳이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육체적 노동력으로 돈을 벌기 위해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도 홍콩으로 대거 몰렸는데, 필리핀·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이었다. 남성들도 있었지만, 대다수가 여성들이었고 주로 가사 노동자로서 일자리를 찾아 왔다. 알고 보니, 당시 홍콩의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는 아예 가사 노동자가 잠을 자는 작은 방이 하나씩 따로 있었다. 한국에 살 때 파출부란 이름으로 가사 일을 돕는 직업이 있다는 건 알았고, TV 드라마에서 부잣집으로 출퇴근하는 ‘아줌마’ 역할을 본 적은 있지만, 거의 모든 가정집에 가사 노동자가 있고 아파트 설계 구조에서부터 아예 가사 노동자가 잠만 자는 단칸방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나로서는 처음 보고 듣는 일이었다. 마치 홍콩의 모든 집의 방마다 에어컨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고 놀란 것과 비슷했다.
   더욱 놀랄 일은 매주 일요일에 벌어졌다. 그때까지도 주 6일 근무였고, 일요일이 유일한 휴일이었다. 그런데 일요일에 홍콩의 도심이나 큰 길가에 나가 보면, 곳곳의 인도와 일부 차도를 점한 수백, 수천 명으로까지 보이는 사람들이 군중을 이루고 앉아 밥도 먹고 이야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하는 모습을 늘 볼 수 있었다. 바로 자신들의 고용주 가족이 모두 쉬는 날인 일요일에는, 그들도 쉴 수는 있지만 고용주의 집을 떠나 길바닥으로 나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평소엔 누군가의 더 편안한 삶을 위해 종일 쓸고 닦고 음식을 만들고 남의 아이들을 돌보던 사람들이, 그 누군가의 편의를 위해 지붕 없는 곳에서 한 주일 가운데 유일한 휴일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뭔가 부당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그들의 표정은 대부분 밝았던 것이 인상 깊었다. 아마 자리는 불편해도 마음은 편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백인 친구들이 다수인 학교에서 마음이 편치 않았던 시간을 떠올리며. 그리고 또 알게 되었다. 그런 이주 노동자들 대다수가 자신이 번 돈의 상당 부분을 남은 가족이 어렵게 살고 있는 필리핀 등 해외의 본국으로 송금하고 있다는 사실과 적잖은 여성 가사 노동자들이 고용주의 학대나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고 있다는 사실도. 그래서 타인의 삶을 쉽게 비극이나 희극으로 규정지을 수 없음을 그때 그분들을 통해서 배웠다.

나를 울린 소설 속 다양성의 주인공들
홍콩에서 보낸 학창 시절의 경험 중 ‘다양성’과 관련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캐나다 국제학교의 문학 수업에서 읽은 두 권의 소설책이다. 어느 정도 영어를 따라갈 수 있게 된 시점이라 다행히 원서로도 무리 없이 읽었는데, 픽션이라는 상상의 세계가 때로는 현실 세계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그 시절에 알게 된 건 행운이었다. 그 두 권의 책 제목은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와 『알제논을 위한 꽃다발(Flowers for Algernon)』이다. 그땐 전혀 몰랐지만, 『앵무새 죽이기』는 미국의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소설이다. 2018년의 PBS(Public Broadcasting Service) 조사 결과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오죽하면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퇴임 연설에서도 언급이 되었겠는가. 이 소설은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에서 일어난 흑인 변호 사건을 통해, 인종차별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고 있다. 특이한 점은 소설의 화자가 백인 변호사의 어린 딸이었다는 것이다. 그 어린 딸이 학교에서 급우와 갈등 상황에 처하자, 아버지인 애티커스(Atticus) 변호사는 다정스럽게 이런 말을 해 준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고는 그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그 사람의 피부 속으로 들어가서 그 사람의 눈으로 보는 거지.”라고. 딸에게 그 말을 하면서, 그는 동시에 그렇게 하는 것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어려운 일인가를 되뇌이며 속으로 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피부 속으로 들어가 보려는 노력은 고사하고, 피부색의 차이만으로도 진실과 거짓, 생과 사가 갈리는 냉혹한 현실과의 고된 싸움의 한복판에 있었던 그였기에.
   두 번째 소설 『알제논을 위한 꽃다발』은 『앵무새 죽이기』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내게는 소설을 읽다가 눈물을 쏟은 첫 경험을 준 특별한 소설이다. 미국 작가 대니얼 키스(Daniel Keyes)가 쓴 SF 소설로, 지적 장애 있는 찰리가 주인공이다. ‘저능아’라 불리던 찰리의 지능이 실험적 뇌 수술을 통해 천재 수준으로 높아졌다가 일정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원래의 낮은 지능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느끼는 관계의 변화와 비애를 1인칭 시점에서 생생하게 서술한 소설이다. 소설 제목의 ‘알제논’은 찰리가 받은 동일한 뇌 수술을 먼저 받았던 실험용 쥐의 이름이다. 알제논을 통해 자신이 맞이할 최후를 미리 알게 된 찰리의 마음. 그 마음을 읽어 버린 나는, 이 소설을 읽기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었다. 모든 사람에게는 IQ로 대표되는 지능뿐 아니라, 마음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다양성 부재의 폐해를 목격하다
그렇게 내 삶의 무대는 홍콩을 지나 다시 한국 서울로 옮겨왔다. 고대하던 대학 생활의 시작이었다. 영문학과라는 원하는 학과에 입학했지만, 다른 고민이 생겼다. 소속된 학과에 소속감을 느끼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얼마 전까지 해외에서 살다가 특별 전형으로 입학한 ‘정원 외’라는 꼬리표가 어쩔 수 없이 심리적 장벽을 만든 탓도 있겠지만, 나에게 특히 낯설고 어려웠던 것은 같은 학과 동기들 중 대다수가 몇몇 유명한 외국어 고등학교 출신들로 채워져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초등학교나 중학교때부터 같은 동네, 같은 학교, 같은 학원을 다니다가 대학까지 같은 과로 온 친구들도 적지 않아 보였다. 결국 나는 신입생 2학기때부터는 교내 학보사 중 하나인 영자 신문사에 수습기자로 들어가 나의 활동 거점을 바꾸었다. 영자 신문사에서는 확실히 다양한 전공과 배경을 가진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잡지 형태의 신문을 만든다는 공통 목표하에 농업경제학과, 법학과, 신문방송학과, 심리학과, 컴퓨터공학과, 역사교육과, 수학과 등등 다양한 전공과 성향을 가진 사람들과 부대끼고 협업하는 일이 나에게는 잘 맞고 즐거웠다.
   영자 신문사 활동에 전념하느라 학과 동기들과는 대부분 눈인사만 하는 사이가 되고 말았지만, 그중에서도 두세 명과는 계속 인연을 이어갔고 서로의 안부와 근황을 챙기곤 했다. 그러다 졸업을 앞둔 4학년 때, 그중 한 친구가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다. 병명은 누가 봐도 거식증 이었다.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에 나와 준 그 친구는 근황을 묻는 나에게 자신은 항공사 스튜어디스가 되기 위한 학원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살을 더 빼야 하는데 고민이라고 했다. 그 순간, 대학교 1학년 시절 초반에 그 친구가 했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자신은 외국어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했고, 자기 주변에는 공부도 잘하고, 집도 잘살고, 거기다 외모까지 완벽한 친구들이 아주 많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명문대 인기학과에 입학하긴 했지만, 자신보다 더 좋은 대학이나 학과에 입학한 옛 친구들을 생각하면 자신은 별 볼일 없는 존재로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4학년 어느 봄날의 그 애처로운 만남이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이듬해 겨울 졸업식을 앞두고 그 친구는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획일화된 입시 위주의 교육, 부모와의 관계 등등 원인을 찾자면 한 가지가 아닐 것이다. 나는 그 친구가 왜곡된 거울로 오랫동안 자신을 바라봤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다양한 사람들과의 자연스러운 만남과 접촉을 통해 내가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보다 균형 있고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면, 그 친구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연령 다양성이라는 뜻밖의 선물
이제 내 삶의 무대를 학생이 아닌 직업을 가진 사회인이 된 이후로 이동해 보고자 한다. 이 시기에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다양성’의 요소는 무엇보다 나이의 다양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첫 직장으로 ‘북한인권 시민연합’이라는 비영리단체에 들어갔는데, 이 단체에서 활동하는 2년동안 무려 인생의 귀인 세 명을 만났다. 한 분은 그 단체의 설립자이자 이사장으로 당시 70대 중반이셨는데, 말하자면 내 인생의 첫 보스가 70대였던 것이다. 또 다른 한 분은 이 단체와 협력 관계에 있는 베테랑 국제 인권 전문가인 미국인이었는데, 그분도 나와 함께 호흡을 맞춰 일을 시작할 당시 60세에 가까운, 역시 시니어이셨다. 20대 중반이었던 내가 70대 중반 그리고 60대 초반 나이의 분들과 긴밀히 협력하며 일을 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는 쉽게 그림이 그려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분야에서 수십 년간의 경험과 내공을 쌓아 온 분들과 함께 일하면서 나는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그분들의 판단과 의사결정, 태도, 눈빛 하나하나에서 많은 배움을 얻을 수 있었다. 나의 70대 보스로부터는 전략적 사고를 한다는 것과 국제적 스케일과 감각을 배웠고, 나의 60대 미국인 파트너로부터는 노련한 인터뷰 방법과 삶을 즐길 줄 아는 여유를 배웠다. 나 역시 언젠가는 그분들의 나이가 될 것이고, 그때 과거의 나 같은 또 다른 젊은이에게 그분들이 내게 해 준 역할을 비슷하게라도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세 번째 귀인은 앞에서 소개한 분들과는 정반대로,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었다. 어느 날 미국에 사는 인턴십 지원자가 북한인권시민연합으로 이메일을 보내 왔다. 그 지원자에 대해 좀 더 알고 보니 어렸을때 한국에서 미국 미네소타주로 입양이 되었고, 함께 입양된 한국인 남동생과 함께 백인 부모 밑에서 성장해 대학을 갓 졸업한 상황이었다. 나도 고등학교 시절에 홍콩에서 살면서 여러 국적의 친구들과 지낸 경험이 있긴 했지만, ‘해외 입양’이란 주제에는 처음으로 맞닥뜨린 것이라 긴장되는 면도 없지 않았다. 두 개의 이름을 가진 그녀는 한국으로 날아와 1년 넘게 ‘인턴’이란 이름으로 나와 일했고, 결국 내 인생에서 진정한 첫 ‘멘토(mentor)’가 되어 주었다. 나보다 나이가 두세 살 적다는 것은 아무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내가 이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는 세상을 12가지 색으로 보고 있었다면, 이 친구를 만나 서로의 삶을 공유하면서 48가지 색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녀는 내가 인권 단체에서 일하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정독해 본 적이 없던 ‘세계인권선언문’을 읽어 주며 가슴 벅차게 했고, 소주와 맥주밖에 모르던 나에게 ‘테킬라’ 제대로 마시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미네소타주가 미국에서도 역사적으로 가장 난민을 많이 받은 지역이라 관련 봉사 활동을 한 적이 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북한의 난민 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음을 이해하게 해 주었고, 해외 입양된 사람도 생모나 헤어졌던 다른 형제자매와 재회해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사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몸소 보여 주었고, 나에게 쿠바와 멕시코에 대한 로망을 갖게 해 주었다. 심지어 훗날 내가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에는 어떤 방식의 출산을 할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고민과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나에게 결정적인 질문을 해 주었다. 그때에서야 나는 처음으로 획일적이고 심지어 폭력적일 수 있는 기존 의료계의 출산 관행에 의문을 가질 수 있었고, 그 일은 지금까지도 그 친구에게 가장 감사하는 일 중의 하나이다.

다양성–‘진짜 사회 문제’를 발견하는 열쇠
지금까지 내 삶 속에서 ‘다양성’이 어떤 위치에 있었고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었는지를 최대한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았는데,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처음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근원적이고 강력한 힘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놀랍게도 다양성과 관련된 경험들(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속에서는 어김없이 어떤 사회문제와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이 입양의 문제이든, 인종차별의 문제이든, 획일적 교육의 문제이든, 정신 건강의 문제이든, 장애와 소외의 문제이든, 이주와 노동의 문제이든, 직업과 존엄의 문제이든, 학대와 폭력의 문제이든, 나이 차별과 세대 갈등의 문제이든 말이다. 다양성에 더 열려 있을수록, 다양성에 더 민감해질수록, 다양성에 더 노출될수록, 우리는 그 안에서 다양한 사회 현상들을 보다 예리하고 섬세하게 볼 수 있는 시각을 더 많이 갖게 되는 것 같다. 물론 세상엔 수많은 사회문제들이 있다. 거기에다 사회문제들은 점점 더 복잡하고 다양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에게 중요한 사회문제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야 그 문제에 보다 효과적으로 또는 창의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올 확률도 높아지고, 내가 직접 그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더라도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나의 재능이나 재원을 어떻게 기여할지 만족스러운 선택과 의사결 정을 할 수도 있다.
   지금부터는 다양성이라는 열쇠를 통해 자신이 풀고 싶은 진짜 사회 문제를 발견한 뒤, 실제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사회 혁신을 일으킨 사람들, 바로 사회 혁신가들의 이야기를 공유하고자 한다. 사회 혁신이 실제로 구현되는 과정에서도 다양성의 가치와 역할이 얼마나 큰 것 인지를 어느 정도 전달할 수 있기를 바란다.
2부: 다양성–사회 혁신가들의 뿌리이자 열매.
나는 2013년부터 아쇼카의 한국 지부 대표를 맡고 있다. 아쇼카는 1980년에 빌 드레이튼(Bill Drayton)에 의해 설립된 글로벌 비영리 조직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사회 혁신가들의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다. 빌드레이튼은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탄소 배출권 거래’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고안해 낸 전직 미국 환경보호청 공무원이었다.

아쇼카(Ashoka: Innovators for the Public) 1)


   아쇼카는 지난 40년 동안 전 세계 90개국 이상에서 4,000여 명에 달하는 사회 혁신가를 발굴해 ‘아쇼카 펠로우(Ashoka Fellow)’로 선정해, 생활비 지원, 파트너 연결, 평생 지속되는 동료 펠로우 커뮤니티 멤버십 등을 제공해 왔다. 또한 아쇼카는 ‘사회적 기업가(social entreprenuer)’와 ‘체인지메이커(changemaker)’와 같은 용어를 최초로 사용하고 확산 시킴으로써, 사회 혁신의 정신과 방법론을 주류화하고 나아가 보편화하는 데 앞장서 왔다.
   4,000여 명에 달하는 아쇼카 펠로우 커뮤니티를 단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나는 큰 고민 없이 ‘다양성’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 만큼 그들이 풀고 있는 사회문제도, 문제를 푸는 방식도, 그 문제에 천착하게 된 이유나 계기도, 그들 스스로가 살아온 인생 경험이나 경로도, 모두 다양하고 독특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회 혁신가가 만들어 낸 어떤 해결책이나 성공 모델을 복제하거나 확산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사회 혁신가 자체를 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내가 믿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복제 불가능한 사회 혁신가들의 ‘스토리(story)’에는 커다란 힘과 확장성이 있다. 그들이 삶 속에서 마주하고 경험한 사건이나 상황들은 우리 모두의 일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며, 그들이 해야 했던 고민과 선택의 순간들을 우리 모두도 각자의 삶에서 어떤 식으로든 겪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 혁신가들이 지닌 다양성의 진폭이 크면 클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스토리에서 영감을 얻거나 자신에게 꼭 맞는 지혜나 해결책을 발견할 가능성도 커진다고 생각한다.
   그럼 이제부터 4명의 아쇼카 펠로우들을 만나 보자. 그들이 다루는 사회문제가 우리의 삶 자체 그리고 일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람의 생애 주기 순서에 맞춰서 펠로우 4명의 스토리를 간략히 공유해 보고자 한다.

펠로우#1: 메리 고든(Mary Gorden).

캐나다 토론토에서 시작되어 현재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학교 교실 기반 어린이 공감 교육 프로그램이자 단체가 된 ‘공감의 뿌리’의 창시자인 메리 고든은 원래 유치원 교사였다. 그녀는 일찌감치 가정 내에서 부모와 아이의 관계가 갖는 결정적이고 지속적인 영향력을 감지했고, 교육 시스템과 가정 사이에 존재하는 단절을 다시 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특히 가정 내 폭력이나 트라우마는 평생에 걸쳐 부정적 영향을 끼치거나 대물림될 수 있다는 사실에 큰 경각심을 느꼈다. 캐나다 최초의 ‘양육 및 가정 리터러시센터(Parenting and Family Literacy Centers)’를 설립해 거리, 세탁소, 레스토랑 등 부모들을 만날 수 있는 곳 어디에서나 자신의 생각과 새로운 접근법을 알리기 시작했고, 1996년에 ‘공감의 뿌리’를 설립해 어린이들의 공감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학교 교실 기반의 프로그램을 캐나다 공교육으로 확산시켜 나갔다. 지금은 이 프로그램이 캐나다를 넘어 아일랜드, 미국, 뉴질랜드, 영국을 포함해 약 15개국에 전파되었고, 지금까지 1백만 명이 넘는 어린이들의 삶에 영향을 끼쳤다.
   이 프로그램이 지난 25년 이상 꾸준히 명성을 얻으며 확산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인간관계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무슨 말일까? ‘공감의 뿌리’ 수업의 교사는 태어난 지 2-3개월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기이다. 실제로 ‘Baby Teacher’라고 쓰인, 어른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공감의 뿌리’ 전용 티셔츠를 입고 당당하게 초등학생 형, 누나들이 있는 교실로 입장한다. 물론 아기의 엄마, 그리고 훈련 받은 ‘공감의 뿌리’ 강사가 함께한다. 초등학생 어린이들은 이 아기 선생님과 학기 초부터 한 학년이 끝날 때까지 거의 1년 동안 정기적인 만남과 교감을 갖게 된다. 처음에는 목도 가누지 못하던 아기가 점차 몸을 뒤집고, 기고, 앉고, 서고, 걷기 시작하는 생애 첫 1년이라는 폭풍 성장의 과정을 지켜보는 것뿐 아니라, 말 못 하는 아기의 다양한 감정과 욕구에 반응하는 중요한 존재와의 상호작용, 즉 아기와 엄마의 관계를 중심으로 관찰과 추측, 대화, 소통하는 일련의 학습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는 매우 놀라웠다고 한다. ‘공감의 뿌리’ 수업을 경험한 어린이들에게서 호전성과 폭력성이 현격히 줄어들었고, 소위 ‘문제아’라고 불리거나 심각한 트라우마를 가진 아이들에게서도 마찬가지의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났다고 한다.
   ‘공감의 뿌리’의 슬로건은 ‘Changing the world, child by child’이다. 한 번에 한 명씩, 한 아이의 삶을 바꿈으로써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겠다는 것이다. 메리 고든은 이 일을 시작한 지 30년 가까이 되어 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사명을 위해 뛰고 있다. 그녀의 저서 『공감의 뿌리』는 한국어로도 번역·출판되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아쇼카한국의 미래 교육 혁신 사업의 일환으로,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기 직전인 2019년에 비영어권 국가로서는 최초로 한국의 수도권 6개 초등학교 12개 교실에서 ‘공감의 뿌리’ 프로그램 시범 사업을 성공적으로 진행한 바 있다.

펠로우#2: 브렌 스미스(Bren Smith).

‘그린 웨이브’의 설립자 브렌 스미스는 현재 기후변화 문제에 대응하는 혁신적인 해결사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친환경 기업으로 널리 알려진 브랜드 ‘파타고니아’의 창립자 이본 쉬나드(Yvon Chouinard)도 최근 그를 ‘영웅’으로 추켜세울 정도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원래 친환경과는 매우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학교를 중퇴하고 10대 중반부터 오랫동안 바다로 나가서 고기 잡는 어부로 일했다. 그는 자신이 바다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고, 자신이 잡은 물고기가 미국 국민들의 식탁에 오른다는 것을 늘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가 가장 많이 납품하던 회사 중 하나가 바로 맥도날드(‘필레오-피시 버거’를 위해)였다고 한다. 하지만 물고기를 잡는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 그가 상업적 어부로 먼 바다를 누비던 호황기 10여 년 동안, 당시 업계가 주로 사용하던 어업 방식은 저인망으로, 말 그대로 그물을 사용해 바다 생태계의 바닥까지 긁어내는 파괴적 방식이었던 것이다. 너무 많은 물고기들이 불필요하게 그 그물에 걸려 죽거나 가차 없이 버려졌다. 바다 생태계는 균형을 잃고 점차 황폐해져 갔고 생물 다양성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그러다 어느 날 큰 기후 재난이 닥쳤고, 회복 탄력성을 잃어버린 바다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하루 아침에 자신과 수만 명의 동료 어부들이 일자리를 잃고 사랑하는 바다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그는 무언가 크게 잘못됐었다는 걸 깨닫고 스스로 해결책을 찾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 바로 ‘그린 웨이브’이다. 최근 10여 년간 브렌 스미스는 세상에서 가장 빨리 자라는 식물 중 하나이자 가장 많은 탄소를 흡수하는 식물 중 하나인 다시마를 중심으로 세계 최초의 ‘다종 3D 해양 농법’을 개발해 보급 중이다. 여기에서 다종이라 함은 미역, 가리비, 홍합, 굴, 조개까지 여러 품종의 해양생물을 우리와 밧줄을 활용해 상호 보완이 되는 수직(vertical) 물기둥 구조로 기르는 것을 말한다. 이 모델은 신선한 물, 비료, 살충제를 전혀 투입할 필요가 없는 데 반해, 연간 1에이커(acre)당 20톤의 해초와 50만 마리의 조개를 양식할 수 있는 생산성을 자랑한다고 한다. 또한 진입 장벽도 낮아서, 바다 면적 20에이커, 배 한 척, 미화 약 2~5만 달러면 거대한 초기 자본 없이도 누구나 해양 농사를 시작할 수 있다고 한다. 월드 뱅크(World Bank)의 한 연구에 따르면, 전 세계 바다의 1%에서만 해초 농사를 짓게 해도 무려 5천만 개의 일자리 창출 효과가 생긴다고 하니, 그 파급력을 짐작해 볼 수 있겠다.
   브렌 스미스의 이 모델이 최근에는 ‘복원적 해양 농사(regenerative ocean farming)’라고 불리는 이유는, 일자리 창출을 넘어서는 더 큰 영향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이 모델 자체가 해양 생태계 복원은 물론 바다의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 기후변화 문제 같은 심각한 환경문제 해결에도 일정한 기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다 자란 굴한 개체는 하루에 50갤런의 물을 정화할 수 있다고 하고, 버려지는 해초를 화석 연료 기반의 패키징 제품에 사용되는 플라스틱 대용으로 사용 할 수도 있고, 해초를 가축인 소나 양의 사료에 섞어 먹이면 온실가스의 주범 중 하나인 메탄가스를 60~80%까지 감축할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브렌 스미스가 하고 있는 일은 단지 어부들의 일자리를 지켜 준 것 뿐 아니라, 그 직업이 갖는 사회적 의미와 역할을 미래 지향적으로 대폭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펠로우#3: 올레 카소우(Ole Kassow).
2012년 가을, 덴마크 코펜하겐의 어느 요양원에서 시작된 이 특별한 자전거 타기 프로그램은 불과 2년 만에 덴마크 전역의 100개 이상의 요양원에서 진행되었고, 2014년 9월에 설립자인 올레 카소우가 이 이야기를 TEDxCopenhagen에서 한 이후로는 세계 곳곳의 관심이 쇄도해 지금까지 50개 이상의 나라로 확산되는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올레 카소우가 여느 때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던 길에 어느 요양원 앞에서 90대 연로한 남자와의 만남이었다. 그는 그 노인도 젊었을 때에는 자신처럼 자전거를 타고 꽤 먼 거리의 일터까지 출퇴근을 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고, 그에게 다가가 자전거를 다시 타고 싶은지 물었다. 대답은 “물론 그렇다!”였다. 그다음 날 그는 3륜 자전거를 한 대 빌려서 다시 요양원을 찾았고, 그때부터 요양원에 사는 노인들을 한 분씩 밖으로 모시고 나가 코펜하겐시 곳곳을 함께 돌았다. 노인들의 반응은 뜨거웠고, 함께 나눈 대화 속에서 자연스레 처음에 만난 그 90대 노인이 20대 때는 시내 한복판에 있는 왕실의 경호원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얼마 후 코펜하겐시로부터 5대의 3륜 자전거를 제공 받았고, 1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합류하면서 CWA라는 정식 단체가 만들어졌다.
   이 단순해 보이는 솔루션이 가진 의미와 임팩트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주로 70~90대 노인들이 승객이 되고 20대부터 50대 이상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자원봉사자로 함께 자전거를 타는데, 양쪽 모두의 삶의 질 측면에서 매우 긍정적인 피드백이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치매 증세가 있는 노인들의 경우에도 자전거를 타고 돌아온 날이면 평소보다 공격성이 줄고 밝은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시각 장애가 있는 노인들의 경우엔, 자전거를 타면서 느끼는 들판의 꽃향기나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좋았다는 이야기부터, 놀랍게도 머리카락 사이를 통과하는 바람을 느끼는 것이 좋다는 피드백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올레 카소우는 자신이 하는 일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right to wind your hair’, 즉 바람에 머리카락을 흩날릴 권리를 지키는 일이라고 위트 있게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고차원의 기술이 아닌, 자전거 한 대와 다양한 세대간의 관계 맺기를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반드시 이동의 자유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니며, 고립과 격리가 아닌 커뮤니티의 일원으로서의 즐거움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함을 유쾌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문득 궁금하지 않는가? 올레 카소우는 왜 이 일에 거의 지난 10년을 열정적으로 바쳐 왔을까. 그에게도 개인적인 사연이 있었다. 바로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중추신경이 마비되는 질병으로 하루아침에 왕성한 사업가에서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되었고, 결국 그가 23세 때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유머 감각과 낙천성을 유지했던 아버지가 사망하기 전까지 그는 이동의 자유가 크게 줄어든 아버지와 바깥세상을 연결하는 든든한 다리의 역할을 했던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솔루션에 더욱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이다.

펠로우#4: 카트리나 스페이드(Katrina Spade).
죽음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전히 사회적으로 터부시되는 주제이다. 그런데 여기 죽음과 장례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독창적인 솔루션으로 사람들의 사고와 선택의 폭을 넓혀 나가는 사회 혁신가가 있다. 카트리나 스페이드는 어렸을 때 의사 집안에서 자랐다고 한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의사였던 부모님으로부터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고, 그 덕분에 죽음은 그녀에게 자연스러운 대화 소재였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가족들처럼 의대에는 진학하지 않았고, 대신 디자인에 관심이 많아 건축을 전공했다. 결국 그녀는 죽음 이후 인간의 몸이 다뤄지는 절차와 과정을 새롭게 디자인하고 설계하는 일을 하게 된다.
   카트리나 스페이드가 발견한 문제는 기존의 사후 처리 방식과 장례 문화가 지나치게 획일적이고 상업적이라는 것이었다. 더욱이 죽은 사람을 떠나 보내는 방식으로 매장 또는 화장이 있는데, 둘 다 지속 가능하지 않거나 환경에 부담을 주는 것이었다. 특히 보다 바람직한 방식으로 여겨지는 화장의 경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한 사람이 지구에서 보내는 마지막 순간마저도 이산화탄소를 배출해 기후변화를 가속화하는데 일조하는 것이다. 과연 그래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에서 그녀의 혁신은 시작된다. 지구 환경에도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고인은 물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가족들에게 매장과 화장 외의 다른 경험과 선택지를 제공할 수는 없을까를 고민했다. 결국 그녀는 인간의 죽은 몸이 자연의 흙으로 가장 자연스럽고 빠르게 돌아갈 수 있게 하는 변형 과정–일명 ‘퇴비화’ 과정–을 실험하고 정교화하기 시작했고, 2014년에 설립한 비영리단체 ‘Urban Death Project’에 이어 2017년에는 정식으로 ‘생태적인 죽음 케어(ecological death care)’를 표방하는 사회적 기업 ‘Recompose’를 설립했다. 그 후로도 지속된 연구와 실험을 거쳐, 드디어 2019년에 미국의 워싱턴주로부터 세계 최초로, 이제 ‘natural organic reduction(NOR)’이라 부르는 새로운 사후 처리 방식을 법적으로 승인 받았다. 2020년에는 한화 80억 원에 달하는 투자를 받게 되고, 그해 겨울부터 시애틀 남부에 건립한 전용 장소에서 특수 제작된 ‘캡슐(vessel)’에 의한 ‘인간 퇴비화’서비스를 시작한다. 2021년에는 콜로라도주와 오리곤주가 나란히 두 번째와 세 번째로 이 서비스를 합법화한 지역이 되었다. 앞으로도 전망은 밝아 보인다.
   흥미롭게도 ‘Recompose’의 공식 홈페이지에는 이 모든 일들이 시작되는 데 씨앗이 된, 2011년의 여름 어느 날에 있었던 카트리나 스페이드의 개인적인 경험이 소개된다. 바로 당시 자신의 어린 아들을 바라보다가 지금처럼 아이가 빨리 커서 언젠가 40세가 되면 그때 자신은 이미 70세가 넘는 나이라는 걸 문득 깨닫게 되었고, 그 순간 자신의 죽음과 유한성에 대해 진지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이 ‘Recompose’ 아이디어를 시작하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비웃음이나 오해를 받기 쉬운 아이디어였지만, 그녀에게는 지난 10년 동안 이 일을 포기하지 않게 해 준 자신만의 분명한 ‘Why(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나가며
지금까지 간략히 소개한 4명의 사회 혁신가들의 이야기 중 어느 한 대목에서라도 이 글을 읽는 사람의 마음에 울림이나, ‘아하!’의 순간이 있었다면 나는 충분히 보람을 느낄 것 같다. 그 마음 진동의 의미를 각자 잘 들여다볼 수 있으면 좋겠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다.’라는 말은 영화감독이나 예술가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위 네명의 사회 혁신가들의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개개인의 다양하고 고유한 삶 속에서의 문제의식과 도전 정신이 사회 혁신의 가장 중요한 자양분이 되기 때문이다. 때로는 자신의 결핍이나 약함이 어떤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고 해결해 나가는 가장 강력한 동력이 되기도 한다.
목차
사회 혁신이란 나무는 다양성을 먹고 자란다: 내 안의 다양성, 내 밖의 다양성
엘리트 중심 의사결정의 한계와 다양성의 필요성: 교육 복지 생태계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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