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과학 시간에 배웠습니다. 생명의 가장 큰 사명은 번식이라고 말입니다. 그때는 그 말을 듣는 것 만으로도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부끄러웠는데 어 느덧 저도 번식에 두 번이나 성공하고 두 딸도 하루 속히 번식하기를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뭐, 번식이 생명의 유일한 목적은 아니겠지만 가장 큰 사명이자 기쁨인 것은 맞는 말 같습니다.
대학생들이 가장 많이 읽는 과학책이라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 자』도 결국에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번식이라는 것은 유전자가 자신 이 들어가 존재하는 기계를 교체하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도킨스는 자신이 걱정한 대로 ‘이기적’이라는 표현 때문에 오해를 많이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기적인 유전자 때문에 사회는 이타적이어야 한다는 게 이 책의 핵심 주장입니다.
번식에 번식을 거듭하다 보면 유전자를 보관하는 기계가 조금씩 변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복제를 하다가 실수를 하기 도 하고 단순 복제를 하는 게 아니라 두 유전자를 새롭게 조합하다 보니 유전자가 변형되기도 하는 것이죠. 그러니 번식이라는 것은 유전자를 단순 보존 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유전자로 변화 시키는 과정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변화가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어느덧 번식 과정에 함께 참여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하게 됩니다. 이것을 진화라고 합니다. 진화의 주체는 어떤 생 물 개체나 종이 아니라 유전자인 것이죠. 유전자는 특정 개체나 종을 보존하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랬다면 진화라는 것은 일어나지도 않았겠죠.
지구가 탄생한 게 46억 년 전인데 생명은 38억 년 전에야 처음 등장 합니다. 최초의 세포가 생기는 데 8억 년이나 걸렸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류가 등장하는 데는 여기서 무려 38억 년이 더 걸립니다. 생명 진화는 실로 지난 한 사건입니다. 38억 년이라는 시간은 너무나 긴 세월입니다. 우리 머리로는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에겐 1년이 따지기 편한 시간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1년을 가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겨울이 끝날 무렵 학교에 갔는데 금방 여름방학이 되었습니다. 여름이 끝날 무렵 다시 학교에 갔더니 금세 겨울방학이 왔고, 다시 겨울이 끝날 때가 되자 2학년이 되더라고요. 이 때 저는 2학년 생활도 어떻게 펼쳐질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죠.
생명의역사 38억 년을 1년으로 줄여서 생각해 보죠. 38억 년 전 어느 날 바닷가 한구석에서 RNA 분자가 기름 주머니 속에 갇혔습니다. 왜 DNA나 단백질이 아니고 RNA일까요? 잠깐 따져보죠.
‘DNA → RNA → 단백질’이라는 생물학의 중심 원리가 있습니다. DNA 는 도서관 서랍에 보관된 설계도, RNA는 복사해서 공장에 가지고 온 설계 도, 단백질은 설계도로 만든 기계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세포라는 공장에서 는 단백질이 기계입니다. 단백질 기계가 있어야 세포라는 공장이 돌아갑니다. 기계를 만들려면 우선 설계도가 있어야겠지요? 그런데 설계도를 복사하려면 복사기라는 기계가 먼저 있어야 하잖아요. 또 설계도에 따라서 기계를 만들려고 해도 공작기계가 있어야 하고요. 아니 그렇다면 최초에는 설계도가 먼 저 있었을까요, 기계가 먼저 있었을까요? 이 딜레마를 RNA가 해결해 줍니 다. 어떤 RNA는 설계도이면서 기계 역할을 하거든요. 그러니 최초의 세포에는 RNA가 들어있었으리라고 생각하는 거죠.
실제로 지금도 DNA가 아니라 RNA를 기본 정보장치로 가지고 있는 것 들이 있습니다. 학생과 교수의 대면을 방해하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가 바 로 그런 놈들입니다. 왜 놈이냐고요? 바이러스는 딱히 생명이라고도 할 수 없 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거든요. 살아 있지 않으니 죽을 수도 없어요. 우리 같은 생명이 바이러스라는 생명도 아닌 존재와 싸우려니 쉽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