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보편성과 다양성:
가치 획일성에 관한 진화심리학적 관점
장대익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는 법이다. 짧은 외국 생활을 통해서도 명확히 알게 되었던 것 중의 하나는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획일적이라는 사실이다. 외국의 멋진 해변에 붐비는 사람들의 패션도 가지각색이지만 그 수영복의 개성만큼이나 그들의 몸매도 다양했다. 늘씬한 사람들 (여성이든 남성이든)만 몸매를 드러내고 해변을 즐기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 같으면 민망하다고 생각해 해변에서도 꽁꽁 싸매고 있을 몸매들이 거기에서는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우리 직장의 회식 자리로 시선을 옮겨 보자. 그 자리에 가면 이미 음식은 누군가에 의해 일괄적으로 주문돼 상에 올려져 있다. 시간을 절약하려는 차원도 있겠지만 선택의 다양성을 꺼리는 문화도 한몫한다. 이렇게 미리 준비된 회식 자리가 아니라면 어떤가? 교수가 김치찌개를 주문한다. 대학원생도 “저도 같은 걸로 주세요.”라고 이어받는다. 간혹 어떤 친구는 메뉴판을 한참 뒤적이다가 허무하게 “아무거나 주세요.”라고외친다(요즘은 이런 친구들이 별로 없다). 버거나 오믈렛도 자신의 취향대로 재료를 선택해 맞춤형으로 먹는 서양인들의 입장에서는 결코 이해하기 힘든 주문법이다. 내 돈을 내고 사 먹는데 ‘아무거나 달라.’니. 1)
   분명히 우리 문화는 자율성, 다양성, 창의성이 존중받는 풍토가 아니다. 2) 한마디로 우리는 획일화된 가치가 지배적인 사회의 일원이라는 뜻이다. 이 글은 이러한 우리 문화의 특성을 인간의 보편성과 다양성에 관한 진화심리학적 접근을 통해 새롭게 이해해 보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인간 본성, 보편성, 그리고 본질주의 3)
모든 사람은 고통을 느끼는가? 고통을 느끼지 못하면 그 고통의 원인에게서 멀어지려는 동기가 발생하지 않으므로 그런 인간들은 생존하기 힘들고 진화의 역사 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즉, 고통 감수 능력은 무릇 인간이라면 다 가지고 있는 특성이라고 할 만하다. 그래서 인간은 (물리적)고통을 가르칠 필요도 배울 필요도 없다. 그것은 그저 타고나는 것이다. 우리는 이 타고난 성향에 일단 ‘본성(nature)’이라는 용어를 붙인다. 본성이란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진화된 심리 성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본성을 이렇게 규정하면 금방 문제가 생기는 듯하다. 물리적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애슐린 블로커(Ashlyn Blocker, 24세, 미국)는 태어날 때부터 어떤 종류의 물리적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의 부모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를 보며 무척 고통스러웠다. 왜냐하면 ‘선천성 무통각증’이라고 불리는 이 희귀 질병을 갖고 태어난 아이들은 대개 유아기에 감염으로 사망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연구자들은 비슷한 증상을 앓고 있는 북파키스탄 지역의 세 가족을 찾아내었고, 애슐린과 그들의 SCN9A라는 유전자에 변이가 생겨서 이런 증상이 생겨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에 전 세계의 11개 가족 158명 환자들의 염기 서열을 분석하여, 9번 염색체에 위치한 PRDM12 유전자에 변이가 생기면 선천성 무통각증이 발현된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4)
   만일 인간 본성을 모든 인간 구성원이, 그리고 그들만이 공유하고 있는 속성이라고 정의한다면, 규정상 고통 감수 능력조차도 인간의 본성이랄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의 언어 능력(language faculty)은 어떨까? 이것도 녹록지 않아 보인다. 어느 언어권이든 언어 능력에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언어 능력의 핵심을 무엇(구문론, 의미론, 음운론, 화용론)으로 간주하느냐에 따라 그런 언어 장애가 본질적 손상인지를 따져 봐야 하겠지만, 늑대 인간의 경우처럼 특정 기간 동안에 아예 인간의 언어적 환경에 놓이지 못한 이들이 결국 인간의 언어를 배우지 못한다는 증거로부터 우리는 언어 능력 또한 인간의 본성에 해당된다고 말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고통 감수 능력과 언어 능력마저도 인간 본성의 구성 요소가 될 수 없다면 대체 어떤 능력(속성)들이 본질적 속성이 될 수 있겠는가?
   다윈의 진화론은 플라톤 이후로 존재론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본질주의(essentialism)와 반본질주의(anti-essentialism) 사이의 깊은 골에도 관련이 있다. 간단히 말해 본질주의는 자연 세계가 어떤 구분된 본질들로 정확하게 구획되어 있다는 견해이다. 예컨대, 금과 구리가 각각의 고유한 본질적 속성들에 의해서 뚜렷하게 구분되듯이, 자연 세계의 모든 것들이 각각의 유형으로 구분된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모든 생명체를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하는 완벽한 형상의 불완전한 모방쯤으로 본 플라톤으로부터 생물종이 신에 의해 각 종류대로 창조되었다고 믿는 기독교에 이르기까지 그 역사가 매우 깊다. 5)
   하지만 진화론은 그러한 부류의 본질주의적 세계관을 거부하는 듯이 보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 서로 다른 조건들이 만족될 때이다. 6) 어떤개체군 내의 유기체들은 다양하다(변이 조건). 어떤 변이들은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이 부과하는 문제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다른 개체들보다 더 적합할 것이다(차별적 적합도 조건). 그러면, 이 변이들은 다른 변이들에 비해 번식기까지 더 많이 생존하거나 더 많은 자손을 남길 것이다. 만일 생존과 번식에 차이를 낳는 그런 특성들이 부분적으로 대물림이 가능하면(대물림 조건), 다음 세대의 개체군에서는 그런 이로운 형질들이 더 많아질 것이고 결국 개체군 내의 형질 분포는 변할 것이다.
   이처럼 변이 조건 또는 변이성(variability)은 자연선택이 작동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즉, 변이는 더 이상 중심으로부터의 이탈이 아니라 중심 그 자체다. 다시 말해서 개체군 내의 구성원들이 서로 이질적이어야 생명의 진화가 가능하다.
   진화생물학자 마이어(E. Mayr)는 이런 의미에서 다윈의 진화론으로인해 해묵은 본질주의가 ‘개체군 사상(population thinking)’이라는 비본질주의적 견해로 대체되었다고 주장한다. 7) 생물철학자 헐(D. Hull)은 이 개체군 사상을 더욱 발전시켜 생물종이 더 이상 자연종(natural kind)에 해당하지 않는다고까지 말한다. 그에 따르면, 예컨대 금(金)의 경우처럼 자연종의 구성원들은 본질적 속성들(essential properties)을 서로 공유하는 데 비해, 생물종의 구성원들에게는 그런 식으로 공유되는 본질(essence)이 없다. 8)
딸기 치즈 케이크와 BTS
하지만 인간 본성을 ‘구성원들만이 공유하는 본질’로 꼭 규정해야 하는가? 진화론이 본질주의와 양립 불가능하다는 헐의 주장에는 기꺼이 동의할 수 있다. 유형론적 사고(typological thinking)와 같은 본질주의를 타파한 것은 다윈의 혁명적 업적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물종에 대한 본질주의적 관점이 틀렸기에 인간 본성 개념도 포기해야 한다.”는 헐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인간 본성이 인간 구성원 모두에게 꼭 보편적(universal)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과학철학자 머셔리(E. Machery)는 인간 본성을 ‘인간 종 진화의 결과로서 인간들이 가지는 성향적 속성들의 집합’이라고 규정함으로써 본질과 본성을 분리한다. 그에 따르면, 어떤 형질이 본성이 되기 위해 꼭 보편적일 필요는 없으며 전형적(typical)이기만 하면 된다. 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성향적 속성’의 뜻이다. ‘물에 잘 녹는’이라는 속성은 ‘둥근’과 같은 속성과 다르다. 전자는 성향적 속성이지만 후자는 비성향적 속성이다. 성향을 택하면 보편성을 버릴 수 있다. 잠재력은 있는데 특정 조건이 만족되지 않아서 현실에서는 발휘되지 않는 속성(성향적속성)들이 진화했다면, 그런 형질들은 인간 모두가 공유하는(보편적) 형질일 수 없고 오히려 기껏해야 전형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BTS에 대한 열광 같은 현상은 보편성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우선, ‘BTS를 좋아함’과 같은 속성은 진화의 산물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BTS를 좋아하는 이유가 인간의 진화된 심리를 자극하기 때문이라면 어떻게 될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BTS를 좋아함’은 인간 본성이 되는가?
   물론 BTS를 좋아하게끔 우리의 마음이 진화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미각이 딸기 치즈 케이크를 좋아하게끔 진화했다고 말하는 것이 어색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딸기 치즈 케이크에 대한 선호는 수렵 채집기에 달고 기름진 음식을 좋아했을 때 생존과 번식에 유리했던 미각이 현대의 음식 환경에 반응하는 경우라고 해야 한다. 그래서 진화심리학자 핑커가 <빈 서판>에서 힘주어 말하지 않았는가? 딸기 치즈 케이크를 좋아하는 습성(이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테니까)은 마음의 적응(adaptation)이 아니라 부산물(byproduct)이라고. 10) 여기서 진화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에 대한 계산주의 이론과 행동생태학이 결합하여 생겨난 학문으로서, 인간의 마음이 여러 종류의 수많은 적응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인간은 오랜 진화의 역사를 거치면서 여러 유형의 ‘적응 문제’에 직면했고,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게끔 설계된 마음을 가진 개체만이 진화적으로 성공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적응 문제 (예를 들어, 적절한 음식 찾기, 짝을 찾거나 지키기, 상대방의 마음 읽기, 동맹 만들기 등)를 해결하기 위해 자연선택에 의해 설계되었다는 대목이다. 11) 이는 마치 우리의 신체가 적응적인 여러 기관(눈, 다리, 심장 등)으로 구성되듯이, 인간의 마음도 하나의 적응적인 기관이라는 뜻 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이 마음을 ‘정신 기관(mental organ)’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 마음의 진화에 대한 이들의 연구는 인간 본성에 대한 가장 노골적인 옹호이다. 예컨대 ‘본성 대 양육’ 논쟁을 다시 점화한 핑커는 <빈 서판>에서 17세기의 철학자 로크 이후로 오늘날까지 맹위를 떨치고 있는 인간 본성에 관한 이른바 ‘백지’ 이론을 본격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인지신경학, 행동유전학, 진화심리학이 밝혀낸 놀라운 반대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많은 지식인들이 ‘빈 서판’, ‘고상한 야만인’, ‘기계 속의 유령’이라는 세 가지 독단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고 진단했다. 여기에서 ‘빈 서판(the blank slate)’의 의미는 마음은 타고난 특성이 없다는 뜻이고, ‘고상한 야만인’은 인간은 선하게 태어나지만 사회 속에서 타락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기계 속의 유령’은 우리 각자는 생물학적 제약 없이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영혼을 지닌다는 뜻이다.
   그가 이 세 가지 독단을 비판하는 요지는 이렇다. 우선, 지난 반세기동안 ‘행동주의(behaviorism)’-인간의 마음을 블랙박스로 상정하고 자극과 반응의 관계만으로 이해하려던 사조–는 과학의 전 분야에서 축출되었다. 둘째, 인간의 심성도 수렵 채집기의 진화적 적응 환경에 잘 적응 한 것일 뿐, 본래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수많은 증거들에 의해 밝혀졌다. 마지막으로 그는 최근에 눈부신 발전을 보이고 있는 뇌과학을 언급하면서 이제는 뇌의 작용과 정신 활동을 분리하여 이해하기는 힘들다고 말한다 12).
   인간 본성 개념에 대한 가장 강력한 옹호자인 핑커는 인간의 언어, 추론, 수리, 짝짓기 능력 등은 수렵 채집기에 우리를 옥죄었던 적응 문제들을 해결하게끔 자연선택에 의해 직접적으로 설계된 적응들이고, 종교·예술·창의성·유머 등은 이런 적응들의 부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지금의 우리가 찬란한 현대 문명 속에 있지만 사실은 수렵 채집기에 잘 적응된 몸과 마음을 장착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는 이런 견해를 바탕으로 진화심리학적 인간관이 기존의 인간 본성론과 얼마나 큰 차이를 보이는지 이야기한다.
   만일 거의 모든 인류가 무언가를 좋아한다면, 그리고 그런 선호가 진화의 산물(적응이든 부산물이든)이라고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런 선호를 우리의 본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맥락에서 BTS의 퍼포먼스를 좋아하는 것을 우리의 본성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이런(이상하지 않은) 생각은 BTS의 노래와 춤, 그리고 그들의 또 다른 행위들이 인간의 진화된 근본적 욕망(동기) 중 무엇을 어떻게 건드렸기에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지를 연구하도록 이끈다.
인간 본성과 다양성
그런데 진화심리학과 관련하여 자주 제기되는 반론 중 하나는 인간 본성 개념이 문화적 차이 및 인간의 개성과 양립이 불가능하다는 지적이다. 즉, 인간의 개성과 문화의 차이가 존재한다면 인간에게 본성이 있다고 주장하기 힘들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것은 참이 아니다. 다양성은 본성의 반대가 아니라 본성이 환경과 상호작용한 결과라고 봐야 한다. 문화적 느슨함/엄격함에 대한 진화심리학적 연구는 본성과 다양성이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13)
   싱가포르에 껌을 반입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왜냐하면 발각되었을 때 최대 10만 달러의 벌금을 물거나 2년간 수감되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에나 나올 만한 이 법규는, 매일 껌을 씹고 길거리를 활보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대다수의 국가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제도이다. 껌에게 무슨 죄가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인구밀도가 극도로 높은 싱가포르에서 여기저기 가리지 않고 사방에 붙어 있던 껌 딱지 때문에 공무원들은 죽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미관만의 문제가 아니라 공공시설을 운영하는 데 방해가 되기에 충분한 위협이었다고 한다. 이에 싱가포르 당국은 1992년에 문제의 근원이라고 여긴 껌을 불허하기에 이른다. 솔직히 우리 입장에서는 완전히 납득되는 설명은 아니다.
   물론, 우리의 사회적 규범 중에서도 외국인의 관점으로는 이상한 것들이 있다. 수년 전에 외국 언론의 해외 토픽란에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이 소개된 적이 있다. ‘여기 아침 7시 반부터 0교시를 시작으로 학교 수업을 5시까지 듣고, 편의점에서 저녁을 때우고는 곧바로 학원에 가서 수업을 또 듣다가 밤 12시에 귀가하는 고등학생들이 있다. 이게 믿어지는가?’ 하는 식이었다. 동서양 학습 전통을 탐구한 어떤 다큐멘터리에서 미국 하버드대학교 학생들이 밤 12시에 대치동 학원에서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는 광경을 보고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던 모습이 기억난다.
   하지만 대학 입시에서의 실패가 인생의 실패인 양 인식되는 한국의 교육 문화에서 “우리 애는 학원 뺑뺑이를 돌지 않는다.”는 당당함은 조롱받기 십상이다. 자기 자녀를 소위 한국의 명문대에 입학시키겠다는 부모라면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대치동의 규칙을 따르는 게 제일 마음 편하다는 사실을 곧 깨달을 것이다. 자녀를 학원에 보내지 않는 부모는 학부모 사회에서 집단 따돌림의 대상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는 사회적 규범이지만, 입시 지상주의는 가장 강력하게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있는 영향력이다. 우리는 사회적 규범이 매우 강하게 작동하고 있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이왕에 말이 나왔으니 이상한 풍경 몇 개를 추가해 보자. 아직까지도 명절에 우리 고속도로는 주차장으로 변모한다. 평상시에 그렇게 특별히 어른의 말씀을 공경하는 사람들도 아니다. 하지만 이때만 되면 고향에 찾아간다(중국의 경우에는 더욱 심하다). 신기한 것은 더 이어진다. 여성의 관점으로, 아니 제3자의 눈으로 명절의 노동 풍경을 보자. 여성들은 부엌에서 각종 음식과 과일을 조달하고 남성들은 그것을 먹으며 텔레비전 앞에서 담소를 나누며 시간을 보낸다. 명절의 성별 분업은 거의 자동이다. 물론 이제 적지 않은 남성들이 이 상황을 가시방석처럼 느끼긴 하겠으나, 오늘 하루만은 그냥 이대로 가길 내심 바라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래서 ‘명절 증후근’은 진단명이 되었고 <82년생 김지영>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매 명절의 승자는 남성이 아니다. 최후에 웃는 것은 전통 유교의 규범이다.
   유교적 규범의 영향력은 이 땅에서 살아온 한국인들에게는 지금도 막강하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한국인이라면 상대방의 나이에 이상하리만큼 집착한다. 상대방의 고향과 출신 학교에도 지나치게 관심이 많다. 이른바 호구조사는 관계 시작의 필수 관문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우리는 자신보다 어린 상대를 하대하는 행위를 상대적으로 용인해 주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대체 사회적 규범의 구속력은 왜 이렇게 문화마다 차이가 날까? 왜 북미와 유럽 문화에서는 사회의 규범이 느슨하고, 우리 같은 문화에서는 엄격할까? 왜 어디는 동성결혼이나 마리화나까지도 합법이고, 다른 곳에서는 금기시하는가? 문화적 엄격함(또는 느슨함)이 무엇 때문에 진화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보편성과 다양성을 바라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문화적 엄격함의 차이에 관한 진화심리학적 연구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생태적 위협에 빈번하게 노출되었던 집단일수록 사회적 규범에 대한 민감도가 높다. 여기에서 일컫는 생태적 위협에는 전쟁, 자연재해, 전염병, 높은 인구밀도 등이 포함된다. 이런 위협에 자주 노출되면 생존을 위해서라도 합심하고 협력을 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 엄격한 사회 규범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규범을 어긴 이들을 비난하고 처벌해 왔다. 즉, 고난이 많은 집단일수록 엄격한 규범을 만들고 따르는 사회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일단 우리 조상들이 겪었던 극심한 고난이 우리 사회의 획일성을 설명한다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할 필요가 있다.
인구밀도, 인간 본성, 그리고 다양성
인구밀도도 문화의 엄격함과 높은 상관관계가 있다. 우리 사회의 초저출산 현상 14)은 경제 지표와 복지 정책만으로는 이해될 수 없다. 인간의 ‘생존과 번식’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세상의 모든 생물은 생애사(life history)를 갖고 있다. 예를 들면, 인간이라는 동물은 짝짓기를 통해 자식을 낳고, 그 아이가 성장해 청년이 되면 또 짝을 만나 아이를 낳고, 또 그 아이가 똑같은 생애사를 겪는다. 그런데 모든 생물은 나름의 생애사가 있다. 가령, 개구리는 한 번에 상당히 많은 알을 낳고, 그 알이 올챙이로 자란 후 성체 개구리가 되어 또 많은 알을 낳는 식의 생애사를 지니고 있다.
   인간은 어떤가? 동물행동학자들에 따르면, 인간의 생애사는 다른 영장류(그리고 다른 동물들)에 비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영유아기가 매우 길다. 둘째, 상대적으로 오래 산다는 점이다. 셋째, 다른 동물들에 비해 자식을 많이 낳지 않는다. 이 관점에서 보면 ‘얼마나 일찍 낳느냐’와 ‘얼마나 많이 낳느냐’가 상당히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종간에 차이가 있는데 가령 설치류는 이른 나이에 출산하며, 한 번에 많이 낳는다. 그에 비해 코끼리와 오랑우탄 같은 큰 동물들은 1년에 한번, 심지어는 5년에 한 번 새끼를 낳는다.
   이렇게 종마다 차이가 있지만 한 종 내에서도 개체 간 차이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이른바 ‘빠른 생애사 전략(fast strategy)’을 취한 개체는 상대적으로 자녀를 많이 낳고 양육에 신경을 덜 쓴다. 그에 비해 ‘느린 생애사 전략’을 택한 개체는 상대적으로 아이를 적게 낳고 양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여기에서 ‘생애사 전략(life history strategy)’이란 ‘언제 번식하는 것이 좋을까’, ‘얼마나 낳으면 좋을까’, ‘언제까지 살면 좋을까’와 같은 생애사의 중요한 의사 결정 전략을 뜻한다. 이 과정에서 여러 요인이 충돌한다. ‘성장을 더 할 것이냐’, ‘생존에 더 많은 에너지를 쓸 것 이냐’ 아니면 ‘번식에 더 많은 에너지를 쓸 것이냐’에 대한 의사 결정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 결국 이것이 상충과 균형(trade off)을 이루어 어떤 개체는 특정 환경에서 빨리 많은 아기를 낳는 쪽으로, 다른 개체는 같은 환경에서도 아기를 늦게 그리고 적게 갖는 쪽으로 행동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인간의 출산은 ‘성장-출산-양육’이라는 생애 단계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물질적이고 시간적인 자원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각 단계에 효율적으로 배분해야 하며, 주어진 환경에 맞춰 어떠한 배분 전략을 취하는지에 따라 효율성에 차이가 생긴다. 가령 인구밀도가 높은 환경에서의 섣부른 출산은 비효율적 의사 결정이다. 왜냐하면 그런 환경에서는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자손이 번영할 가능성은 낮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환경에서는 출산을 미루고 자신의 경쟁력을 높이는 전략이 더 효율적일 수 있다. 즉, 출산 대신 자신의 성장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자하는 전략이다.
   그렇다면 이런 생애사 이론의 관점에서 저출산 문제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경쟁이 치열하다고 느낄 때 출산을 미루거나 적게 하는 저출산은 병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적응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비경쟁적이고, 불안정적인 환경에 놓여 있다고 판단하는 순간 우리는 자원을 여러 곳에 나눠 투자하는 양적인 분산투자를 한다. 그리고 성과를 빨리 확인할 수 있는 단기적인 전략을 발달시킨다. 반대로 경쟁적이고 안정적인 환경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원을 확실한 곳에 집중투자하는 질적인 투자를 하고 오랜 노력을 기울여 목적을 달성하는 장기적인 전략을 발달시킨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환경에 민감한 심리적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 남는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얼마나 경쟁적인가? 아니, 우리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경쟁적이라고 지각(perceive)하는가? 그리고 왜 그렇게 지각하는가?
   진화심리학자 승(Sng, O.) 등에 따르면, 인구밀도가 높을 경우 사람들은 느린 생애사 전략가가 된다. 인구밀도가 높은 국가의 국민일수록 성적인 엄격성이 높은데, 다시 말해 아기를 낳을 가능성을 만드는 짝짓기에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런 사람일수록 기대 수명이 높다. 즉, 출산에 투자해 자녀를 빨리, 많이 낳고 일찍 사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장에 자원을 더 많이 사용함으로써 오래 사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인구밀도가 높은 국가일수록 유치원 등록률도 높다. 또 다른 번식보다는 이미 출산한 자녀의 성장에 투자한다는 또 다른 증거이다. 결과적으로 인구 고밀도 국민들의 출산력은 상대적으로 더 낮다. 15)
   다시 말해, 내 주변이 사람들로 넘쳐난다고 감지하면 ‘아이를 낳는 것보다는 그냥 내가 성장해 경쟁력을 길러야겠다.’는 판단 회로가 작동해 출산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경쟁이 치열하다고 지각하면 지각할수록 저출산으로 이어지는 것은 진화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문제는 ‘환경을 어떻게 지각하는가’에 달려 있다. 객관적 환경이 어떠한가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지각하는가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결국 지각을 통해 적응적 메커니즘이 작동하니까. 인구밀도가 높으면, 다시 말해서 사용 가능한 바람직한 자원에 대비해 경쟁자 수 혹은 인구의 수가 늘었다고 지각되면, 진화를 거쳐 형성된 인간 심리의 반응 체계가 작동한다. 경쟁이 심하다고 지각하는 순간 사회적 공격성과 공격의 욕구가 증가하며,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목표와 가치가 획일화되기 시작한다. 즉,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가 점점 일원화되며 생각과 행동의 다양성은 감소한다.
   이렇게 한국 사회의 초저출산 현상과 가치 획일성은 주위 환경(인구밀도)에 대한 인간의 오래된 마음이 적응적으로 반응한 결과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인구밀도가 매우 높은 국가에 사는 한국인은 경쟁심이 강하고, 자식 낳기를 주저하며, 다양성을 참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양성 자체가 인간 본성 개념을 위협하는 것도 아니고, 획일성 자체가 본성 개념을 추가로 옹호하는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는 문화적 느슨함/엄격함 자체는 일차적으로 특정 환경에 대한 적응일 뿐임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본성은 환경에 따라 획일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다양성을 선호하기도 한다.
   물론 문화적으로 엄격한 사회는 기존 질서와 규범, 가령 남성 중심 주의를 더욱 공고히 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양성평등에 대한 담론에 남성들이 때로 발끈하는 이유는 그 담론이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생태적 위협만큼이나 심리적 위협은 엄격한 기존 사회 규범을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 세대 간 갈등의 핵심에는 소위 MZ 세대의 거침없는 언행을 위협으로 느끼는 이전 세대의 심리적 상태가 자리하고 있다.
전염병, 인간 본성, 그리고 다양성
높은 인구밀도 외에도 전염병 확산도 다양성 감소를 일으키는 변인이다. 16)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 6월 퓨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가 미국 성인 9,654명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코로나 이후로 미국 내 아시아인의 31%가 인종차별적 발언을 경험했고, 26%는 누군가의 물리적 폭력이 두렵다고 답했다. 또한 미국인 10명 중 4명은 아시아계를 향한 인종차별적 발언이 더 흔해졌다고 응답했다. 이 비율은 히스패닉이나 백인을 향한 인종차별적 발언보다 두 배나 높고, 흑인들에 대한 경우와 비교해서도 10% 정도 더 놓은 수치이다. 미국 내 아시아인은 반 이상 자신들을 향한 인종주의적 발언이 더 흔해졌다고 응답했다. 17)
   무릇 21세기 시민이라면 인종주의는 이미 쓰레기통에 내버렸어야한다. 20세기 내내 인종차별이 얼마나 큰 재앙을 몰고 오는지를 뼈저리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인종에 대한 편견이 왜 잘못된 생각인지를 가르치고, 사회에서는 인종 혐오 범죄를 결코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인종주의는 박멸되지 않은 채 인간 무의식의 세계를 끝없이 배회하고 있다. 마침내 그것은 코로나19 바이러스 덕택에 화려하게 부활했다.
   팬데믹이 어떻게 인종주의의 부활을 이끌었는지를 이해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전염병은 다른 질병과 뚜렷이 구별되는 속성을 지닌다. 그것은 병자에 대한 혐오와 공포심을 이끌어 낸다는 점이다. 배워서 그런게 아니라 수렵 채집기부터 진화한 ‘자연스런’ 적응 기작(機作)이다. 감염자에 깊은 연민을 느껴 접촉한 이들은 유전자를 후대에 남기지 못했기에 우리 조상일 수 없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면역력이 있었던 운 좋은 사람들이거나 감염자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무심한 자들이었다. 반면 암과 같은 질병에 걸린 친구를 떠올려보라. 연민이 일어난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이런 맥락에서 전염병은 회피 심리를 이끌어 내는 특별 변수이다. 전염병이 우리 동네에 창궐하고 있다는 기사만 읽어도 우리는 감염자만이 아니라 외국인, 노인, 심지어 비만인에게까지 혐오감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자기 집단에 대한 충성심도 무의식적으로 올라가고 집단주의적 관념이 더 강력해진다. 이질성에 대한 민감도가 극도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부터 방심하면 큰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 혐오는 자연스러운 것이니까 용인될 수 있지.’라고 추론하기 딱 좋다. 이것은 오류이다.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해서 올바른 것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로부터 거짓말을 하는 행위가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심지어는 나쁘다고도 말할 수 없다. 아무리 많은 사실들이 나열되어도 사실 명제만으로는 그것이 좋거나 올바르다와 같은 가치 명제를 따라 나오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과 가치와의 간극은 0과 1의 차이만큼 크다. 철학에서는 이것을 ‘자연주의 오류’라고 부른다.
   혐오에 대한 용인은 논리적 오류만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 사회를 붕괴시킬 수 있는 사회적 오류이기도 하다. 에너지 섭취 효율이 높은 기작은 근근이 먹고 살던 수렵 채집기에는 매우 적합한 특징이었지만, 고열량 음식이 널려 있는 현대 사회에서는 결코 적합하지 않다. 즉, 오래된 진화의 산물이라고 해서 꼭 좋은 것은 아니다. 최적의 무엇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비만의 기작처럼 현재의 최악을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수렵 채집기의 전염병 상황에서 잘 통했던 혐오 전략은 현대의 다인종 사회를 붕괴시킬 시한폭탄으로 전락했다.
SNS, 인간 본성, 그리고 다양성
실제로 미국 보수층의 주거지인 남부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구글 검색창에 ‘기후변화’를 치면 ‘기후변화는 거짓말’이 자동으로 생성될 확률이 높다. 반면 보스턴에 사는 하버드대학 학생이 같은 단어를 치면 ‘기후변화는 사실’라는 문구가 제일 먼저 자동 생성될 것이다. 이제 동일한 검색 결과란 없다. 누구에겐 진리가 다른 이에겐 거짓으로 검색된다. 18)
   더 심각한 문제는 매사에 극단적 언행을 일삼는 사람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거부감과 달리, 온라인상에서는 극단적 내용을 담은 영상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훨씬 더 관대하다는 데 있다. 이것은 마치 온라인 슈팅 게임(shooting game)에서는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진짜 전쟁터의 공포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래서 오히려 더 자극적인 게임에 열광한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사라지면 우리 속의 극단(極端)은 꿈틀거리고, 우리는 훨씬 더 극단적인 부족주의자들로 돌변한다. 더 큰 자극은 (자기들끼리의) 더 진한 공감을 낳는다(더 넓은 공감이 아님에 주의하라).
   공유 플랫폼은 나의 클릭을 우리의 분열로 이끄는 마력을 갖고 있다. 혹시 당신은 페이스북(이하, 페북)에서 ‘좋아요’ 버튼을 지금까지 총 몇 번 정도 눌렀는가? 네트워크 과학에 따르면, 페북의 여기저기서 ‘좋아요’를 200번 정도 누르기만 했어도 페북 알고리즘은 당신의 실제 절친이나 연인보다 더 정확히 당신에 대해 안다. 300번 이상 눌렀다면 ‘그’는 심지어 당신 자신보다 당신을 더 잘 안다! 페북도 사용자의 과거 선호를 통해 미래의 반응을 예측하는 알고리즘을 장착하고 있다.
   최근 넷플릭스의 개봉 화제작인 올롭스키(J. Orlowski) 감독의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는 구글, 페북, 트위터 등의 과거 주역들이 등장해 데이터 브로커가 된 자신의 발명품들에 대해 경고한다. 페북의 ‘좋아요’ 버튼 개발자는 “우리가 ‘좋아요’ 버튼을 만들 땐 세상에 긍정과 사랑을 퍼뜨리는 것이 목표였다. 오늘날의 10대가 ‘좋아요’를 덜 받아서 우울해하거나 정치적 양극화를 걱정하는 것이 우리의 의도는 아니었다.”고 털어놓고, 핀터레스트(Pinterest)의 대표를 역임한 켄달(T. Kendall)은 SNS가 지금처럼 사용자의 마음을 계속 갈취한다면 가까운 미래에는 ‘내전이 일어날 것’이라며 두려워한다.
   <소셜 딜레마>의 최고 메시지는 ‘상품의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면 바로 당신이 상품’이라는 명제다. 우리가 유트뷰나 페북을 무료로 사용하는 게 아니고 그 회사들이 우리를 상품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기업이 소비자의 관심을 얻기 위한 무한 경쟁에 돌입한 것은 오래된 일이지만, SNS가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하여 소비자의 선호 예측 모형을 엄청난 수준으로 정교하게 다듬었다는 측면은 분명 새로운 변화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예측 모델이 과거의 언행에 기반해 있다는 점이다. 한 인간으로서 우리는 성장한다. 매일매일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는지, 어떤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지에 따라 인생은 변하고 또 변한다. 우연은 삶의 필연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과거가 미래를 결정하는 식의 추천 알고리즘을 작동시킨다면, 우리의 테크놀로지는 한 개인의 성장과 변화를 가로막을 수 있다. 우리에게는 과거와 단절할 권리가 있지 않은가!
   인류는 집단생활을 잘 하게끔 진화한 사회적 동물이다. 그렇기에 큰 공동체를 만들었고, 문명을 건설했지만 타인에게 영향을 받는 민감한 존재가 되었다. 우리의 본능은 타인의 평판에 민감하고, 집단의 대세에 따르고자 하며, 집단의 일원으로 인정받길 갈망한다. 동맹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자신과 견해가 유사한 타인에게 훨씬 더 큰 호감을 느낀다. 200명 내외의 작은 무리 생활을 했던 수렵 채집기에는 이런 본능 자체가 이득이 되었겠지만, 지금처럼 다양한 문화와 가치를 품어야 하는 대규모 사회에서는 오작동을 일으킬 수 있다. SNS 기술이 본질적으로 위험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과거의 클릭에 기반한 작금의 SNS 알고리즘은 기존의 편견을 증폭 시키고 새로운 도전과 선택을 제약하여 결국 한 인간의 성장을 지체시키는 해악을 가져다주기 쉽다. 이런 방식의 추천 알고리즘이 SNS의 수익 모델의 거의 전부라는 점이 딜레마의 본질이다. <소셜 딜레마>에서 ‘20명의 개발자가 20억 명의 행동을 통제하는 기술’이라고 말한 어떤 개발자의 고백은 다소 과장이 섞여 있지만, 이 기술이 근본적으로 위험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해 주기에는 충분하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유튜브나 페북 없이 삶을 살 수 있을까? ‘디지털 아미쉬(Amish)’ 같은 길이 물론 있다. SNS나 영상 공유 플랫폼이 없던 시대처럼 다 절연하는 삶이다. 쉽지도 않고 지속하기도 힘들 것이다. 두 번째 길은 디지털 다이어트를 시도하는 삶이다. 플랫폼 소비 시간을 줄이는 방식이다. 가령, 스마트폰을 끄고 잠자리에 들기, 하루 사용 시간 제한하기, 간헐적 단식처럼 며칠 동안 사용하지 않기 등의 방법도 효과가 있다. 유튜브나 페북에서 추천해 주는 세상이 단지 하나의 세상이라는 사실을, 내가 실제로 만나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또 다른 세상의 주역들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어떤 세상이 더 크고 중요한지는 그가 그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애정을 쏟았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세 번째 길은 기술적 혁신으로 알고리즘을 개선하는 방법이다. 현재의 알고리즘은 과거만을 기반으로 편견을 부추기는 폐쇄 방식이지만, 과거와는 다른 선택을 하게끔 적절한 기회를 주는 열린 알고리즘이 불가능 하지는 않다. 만일 인간의 성장과 발달에 대한 연구와 깊은 융합이 일어난다면 기술적 혁신의 길은 기업과 고객 모두를 웃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는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온라인 세계에서 쓰고 있다. 그만큼 중요해졌고 그만큼 더 위험해졌다. 양극화의 위험은 더 커졌고 비판적 중도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온라인에서는 이미 내전 중이다. 그러나 좀 더 평온한 오프라인 실세계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인간 본성과 다양성의 미래
인간은 진화의 역사를 가진 동물이다. 여기에서 왜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지를 묻는다면 그 진화 역사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진화의 역사는 중력과 같은 것이다. 느끼긴 어렵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거대한 힘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집단의 문화와 발달 환경에 영향을 받는 개인의 생활사는 미세 조정과 같다. 마치 중력에 의해 자유낙하 하는 물체가 받는 마찰력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인간의 보편성과 다양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중력과 마찰력만 고려하면 되었다.
   하지만 인공물의 세계가 밀려오고 있다. 중력을 거스를 만한 힘을 가진 신세계일지 모른다. 세계 바둑 챔피언인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 알고리즘은 인간 본성에 또 한 번의 상처(위협)를 주고 바둑계를 홀연히 떠났다. 그때 우리가 받은 충격은 인간 본성의 전면은 아니었지만, 가까운 미래에 등장할 인공지능이 인간 본성의 모든 측면에 위협을 가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 19) 그때에도 우리는 인간 본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날에는 기계의 본성을 더 많이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동안 인간 본성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다른 특성들(가령 실수를 잘하는 것)을 발굴하는 것으로 인류는 자존감을 유지하려 들 수도 있다. 그때가 되면 인간 본성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다양성은 그 줄을 끊고 자유롭게 날아가 버릴지 모른다.
목차
장애의 사회·문화적 구성: 다문화 교육과 장애
인간의 보편성과 다양성: 가치 획일성에 관한 진화심리학적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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