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과 다양성:
TV가 전달하는 다양한 가치들
김설아
홍익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 문화예술경영대학원 겸직교수.
텔레비전은 쉽지 않은 매체이다. 아니 어렵다. 이와 관련된 요구와 의무들이 아주 많기 때문이다. 재미도 있어야 하고, 공정하면서도 객관적이어야 하며, 감동도 주어야 한다. 또 교육적이고 문화적이어야 한다고 한다. 픽션물일 경우 영화를 대하듯이 작품성과 미학적인 부분도 따지고 든다. 텔레비전 방송이 하나의 국가적인 미디어 시스템으로 자리를 잡게 되면서 이렇게 복잡다단한 요구들은 아예 방송국이 따라야 할 프로그램 편성 비율이라는 규칙으로 형식화되었다. 정보 프로그램은 어느 정도의 양으로 방송하고, 교양 프로그램 또는 오락 프로그램은 얼마나 방송할지를 의무 사항으로 정한 것이다. 복잡하다. 왜 텔레비전이라는 매체는 다른 미디어와 달리 이런 성가심과 복잡함, 엄격함 속에서 만들어져야 했을까?
   이는 이전의 다른 매체가 지니고 있지 못하던 텔레비전 고유의 힘 때문이다. 라디오와 달리 시각과 청각의 주의력을 동시에 요구하고,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영화와 달리 집 안의 거실 한가운데로, 우리 일상의 한 가운데로 파고 들어온 텔레비전은 아주 어마어마한 대중 친화력과 전파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중적인 영향력 말이다.
   유럽에서 라디오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인 1920~30년대, 프랑스 정부는 수많은 공영 라디오들을 개국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민영 라디오 방송국에 대해서도 방송 허가를 내주었다. 이후 프랑스가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독일 나치에 의해 점령당한 상황에서 그 민영 라디오들은 친나치 방송을 하게 되고, 1945년 해방 이후 새롭게 텔레비전 방송 체제를 정비해 가던 프랑스 정부는 나치 점령 시기에 라디오라는 전파 방송이 민영 업자의 손에 들어갔을 때 야기되었던 어두운 과거를 강조하며(또는 이를 빌미로), 라디오보다 더 큰 영향력의 텔레비전을 국가 체제 안으로 완전히 밀어 넣게 된다. 독일 나치의 ‘위대했던’ 프로 파간다가 영화라는 영상 대중매체와 라디오라는 전파 매체를 통해 아주 효과적으로 전개되었던 만큼, 즉 이 두 매체의 기능과 장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텔레비전의 위력이 자명한 만큼, 프랑스 정부는 이 강력한 미디어를 자신들의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 강력한 (훗날 한국에서는 ‘바보상자’라고도 불리게 될) ‘마술 상자’는 어찌 되었든지 간에(그 마술적인 힘이 정치적으로 쓰이게 되든, 공익적으로 쓰이게 되든, 아니면 상업적으로 쓰이게 되든 간에), 매체 운영자들의 그 강력한 전파의 힘에 대한 정확한 이해 속에서 다양한 시선을 담아내고, 다양한 정보를 전달하며, 다양한 의견의 장이 되고,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다소 교조적인 임무를 띠게 된다. 그리고 이 임무들은 곧 각 지역마다, 각 나라마다, 각 문화권마다 다르게 해석되어 고유의 방식으로 수행되고 실천되어 간다. 그리고 이 임무가 수행되는 방식에 따라 텔레비전은 한편에선 공영방송의 모습으로, 다른 한편에선 상업방송의 모델을 좇아 성장의 길을 닦아 나간다.
텔레비전의 다양한 성장 과정
텔레비전은 그 이전의 매체인 라디오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성장했다. 대부분 라디오를 경영했던 단체나 기업들이 전파 매체 사업을 확장하여 텔레비전 사업까지 도맡았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프로그램 형식과 내용, 제작 방식, 방송 사업 운영 방식 그리고 운영 철학 등이 고스란히 라디오에서 텔레비전으로 전수된다.

영국과 프랑스의 공영방송들
유럽에서 가장 먼저 방송의 기틀을 세운 곳은 바로 영국의 BBC였다. 1922년에 주식회사 형태로 설립된 영국방송주식회사(British Broadcasting Company)는 전파 방송을 매우 중요한 국가 자원으로 인지하고 있었던 총괄 매니저 존 리스(John Reith)의 신념과 노력 하에, 1927년 영국방송공사(British Broadcasting Corporation)로 거듭나게 된다(리스는 방송 사업에 대한 공적을 인정받아 같은 해에 기사 작위를 받는다). 그리고 곧 리스는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그 유명한 공영방송의 공식, ‘정보(Information), 교육(Education), 즐거움(Entertainement)’의 세 가지 기본 개념을 만들어 공영방송의 기본 틀을 세운다.
   시민에게 정확한 정보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알리고, 교육적이고 문화적인 내용을 전파하여 시민들의 지적 수준을 높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하는 것, 이 세 가지를 기본 의무로 삼게 된 BBC는 점차 그 제작과 편성의 초점을 예술과 교육 분야 쪽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이는 물론 시민의 교육과 교양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존 리스의 의지와 고집이 반영된 것이었다. 이처럼 라디오에서 드라마, 스포츠, 대중음악 및 고전음악, 종교, 토론, 인터뷰 등의 다양한 주제와 형식을 통해 수준 높은 방송을 지향하던 BBC는, 1930년대에 잠시 운영되다 전쟁으로 중단되었던 텔레비전을 1946년에 재개하면서 라디오와 동일한 공영방송 철학을 적용하게 된다.
   영국의 바다 건너 이웃인 프랑스는, 영국과 다르게 일찍부터 공영과 민영, 두 성격의 라디오 방송을 허가했고, 이후 그로 인한 역사적 폐단을 이유로 텔레비전에 대해서는 도입할 때부터 공영 체제를 굳혀 버린다. 그런데 사실 프랑스가 공영 텔레비전 모델을 택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원인은 민영 라디오가 저지른 역사적인 과오가 아니었다. 영국의 BBC가 만들어 낸 탄탄한 공영방송 모델에 대한 부러움, 전쟁 후 국가 재건의 시기에 효과적인 사회 통합을 위해 필요한 미디어에 대한 요구 등도 텔레비전 공영화의 주요 이유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고용된 인력들이 신문이나 라디오에서 건너온 기자들, 연극계에서 온 극작가와 연출가, 영화계의 시나리오 작가나 연출가 또는 배우들, 즉 프랑스에서 좌파 계열로 구분되는 문화 예술계나 엘리트층의 인력들이었는데, 그들은 보수적 우파 정권의 간섭과 통제가 심했던 텔레비전 방송사에서 일하는 것을 그다지 꺼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유럽의 좌파가 제일 우려하던 것 중의 하나는 유럽이 미국과 같은 자본주의 소비사회로 전환되는 것 이었다. 그들은 그러한 소비사회에 기대어 유지되던 미국의 상업방송, 즉 상업방송 모델에 강한 반감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비록 우파 보수 정권이 자신들과 정치적 목적이나 색깔이 다르기는 하지만, 그들이 국가의 간섭이 정당화되는 공영방송이라는 방송 모델을 취함으로써 텔레비전 방송을 ‘천박한 미국식’ 자본주의의 악영향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었던 만큼, 프랑스의 좌파 방송인들은 이러한 방송 환경에 충분히 만족하며 프로그램을 만들어 갔던 것이다.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방송인들이 중요시했던 것 또한 문화와 예술, 교육적인 프로그램의 제작이었다. 프랑스의 경우, 영국 BBC의 공영방송 공식 ‘정보, 교육, 즐거움’ 중 두 번째, ‘교육’을 ‘문화’로 대체한 ‘정보(information), 문화(culture), 즐거움(divertissement)’을 공식으로 삼아 자신들의 방송 이념으로 내세웠다. 그만큼 프랑스 방송인들은 초기부터 시청자들의 문화적인 수준을 끌어올리면서 이들 대중을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인간’, 또는 ‘깨어 있는 대중’으로 만드는 데에 집착했다. 프랑스 계몽주의의 이상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다음은 1950~60년대 텔레비전 연출가들의 프로그램 제작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는 당시의 글귀들이다.

(텔레비전을) ‘보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참여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시청자를 적극적이게 만들어야 한다. 나는 부르주아의 평범함이 담긴 이야기보다 심각한 문제들이 가지고 있는 난폭함을 좋아한다.…… 나는 ‘모두를 즐겁게 만든다.’는 것이 텔레비전이 가진 저 뛰어난 능력을 감소시킬까 봐 걱정이다. 진정한 TV 연출가라면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드라마로 만드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 내용이 아주 적은 소수의 대중에게만 관련되어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쟝 폴 까리에르[Jean-Paul Carrière], 1960)

“시청자를 일깨워서 이들이 자기 자신을, 자신의 고독과 자신이 지닌 내적 풍부함을 자각하도록 만드는 것, 웃고 떠드는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일깨우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로제 이글레시스[Roger Iglesis], 1959)

   유럽의 공영방송 독점 체제는 1980년대 초반까지 유지되다가, 당시 전 세계에 퍼지기 시작한 ‘탈규제’와 ‘세계화’의 흐름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점차 그 자리를 상업방송에 내주게 된다. 1980년대 초반까지 (서)유럽 전역에는 단 하나의 민영 채널만이 존재했을 뿐, 그때까지 유일했던 영국 민영 채널 ITV도 실상은 ‘공영적인 상업방송’이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공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미국의 상업방송
미국의 텔레비전은, 이미 언급했듯이 완전하게 상업방송으로 시작했다. 1920년, 미국의 최대 무선 기기 제조사인 RCA (Radio Corporation of America)의 영업 담당 임원이었던 데이비드 사노프(David Sarnoff)는 그때까지의 통신 형태이던 1:1의 통신 대신 1: 다(多)의 통신 형태를 회사에 제안하게 된다. ‘Radio Music Box Memo’라 불렸던 그 아이디어는 사노프의 과거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그는 그로부터 8년 전인 1912년에 타이타닉호 침몰 사건을 무선통신으로 수신해 72시간 동안 쉬지 않고 언론과 승객의 가족들에게 알린 적이 있었다. 그때 무선통신의 위력을 몸소 체험한 사노프는 이후 이를 기록으로 남겼으니, 그것이 바로 Radio Music Box Memo였다.
   그리고 8년 후, 그는 이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송신 기능이 제거된 저렴한 가격의 라디오 수신기를 일반 대중에게 판매할 것을 회사에 제안한다. 또한 강력한 출력으로 넓은 지역에 송신할 수 있는 방송국을 하나 만들고, 이 방송국에서 내보내는 전파에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유성기의 음악을 실어 내보낼 것을 제안한다. 그러면 결국 대중들이 라디오 수신기를 구매할 것이라고, 즉 RCA가 제조한 라디오 수신기를 살 것이 라는 것이 사노프의 주장인 것이다. RCA는 곧 방송 분야의 수익 전망을 높게 보고 이에 투자하기 시작하여, 얼마 후(1926년)에 NBC(National Broadcasting Company) 네트워크를 세우게 된다.
   또 다른 방송사 CBS(Columbia Broadcasting System)는, 1927년에 설립되었으나 경영난에 허덕이던 라디오 방송사를 컬럼비아 레코드사가 사들여(1928년) 세운 방송사로, 이로써 미국에서 전국 규모의 두 번째 네트워크가 탄생하게 된다. CBS의 경우 컬럼비아 레코드사가 음반 판매를 목적으로 인수한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세 번째 방송사는 1943년에 설립된 ABC(American Broadcasting Company)로 두 개의 전국구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던 NBC가 하나를 양보하면서 독립시킨 방송사이다. 이렇게 ABC의 탄생과 함께 이후 50여 년 동안 미국 방송계를 지배할 3대 네트워크 시스템이 성립된다.
   이렇게 미국의 방송은 국가 기관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신기 판매 수익을 올리기 위한 수신기 제조 회사에 의해, 음반 판매 수익을 위한 음반 회사에 의해 모습을 갖추어 갔다. 그리고 그 운영 자금은 당시 미국의 소비사회로의 성장과 함께 급격히 커 가던 미국의 광고 시장에 의해 조달되었다. 이후 이 세 개의 상업 라디오 네트워크를 근간으로 1940년 대 말부터 똑같이 세 개의 상업 텔레비전 네트워크가 들어서게 되고, 라디오의 프로그램 내용과 형태, 제작 및 편성 방식 등이 그대로 텔레비전 방송에게로 전수된다.

한국의 방송: 공영방송과 상업방송의 그 중간 어디 즈음에
한국에 텔레비전이 처음 등장한 때는 1956년이다.
HLKZ-TV 또는 KORCAD-TV라고도 불렸던 이 텔레비전은 미국의 RCA의 한국 지사가 운영한 상업 텔레비전이었다. 1954년 한국전쟁으로 손실된 국가의 라디오 방송국 기자재를 구입하기 위해 미국 뉴욕의 RCA 본사를 방문한 한국 지사장 황태영은, 미국 본사로부터 거래에 대한 수수료를 받는 대신 당시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중매체인 텔레비전 수상기를 받아 들여오게 된다. 이를 계기로 한국에도 미국의 상업방송 NBC를 모델로 한 HLKZ-TV가 1956년에 세워진다. 하지만 수상기가 모두 수입품이다 보니 그 가격이 너무 비싸 한국 사회에 텔레비전 보급을 기대하기 어려웠고, 게다가 전쟁이 끝난 지 겨우 3년이 지나 아직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는 시점에서 상업 텔레비전에 광고비를 댈 광고주를 찾기도 매우 어려웠다. 결국 1년여가 지난 1957년에 한국일보사가 HLKZ-TV를 인수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화재로 방송국이 소실되고 만다.
   1961년에 군사정권이 들어선 후, 공보부가 국영 TV 설립을 계획하면서 HLKZ-TV의 채널(9번)과 제작 요원들을 거두어 갔고, 이후 KBSTV가 1961년 12월 31일에 개국하게 된다. 하지만 1960년대는 한국 사회에서 라디오가 대중매체로서 승승장구하던 시기로, 텔레비전이 매스미디어로 자리 잡기까지에는 1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결국 한국의 첫 번째 텔레비전으로 호기롭게 출발한 HLKZ-TV는 너무 성급한 등장으로 실패를 맛봐야 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경성방송국으로까지 그 근원을 찾아 올라갈 수 있는 KBS라디오는 미 군정기와 이승만, 장면 정권을 거치며 국영방송으로 자리를 잡아 간다. 1950년대부터는 한국에도 종교 방송인 극동방송, MBC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부산문화방송과 같은 민영 라디오 방송국이 다수 출현했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1960년대 이후, MBC라디오, 동양방송라디오 등이 개국하면서 라디오 전성시대가 열린다.
   그리고 같은 시기, 당시의 주요 방송사로 자리를 잡게 된 세 개의 방송-KBS라디오, 동양방송라디오, MBC라디오-는 각기 1961년, 1964년 1969년에 텔레비전 방송국 또한 개국을 하게 된다. KBS는 국영방송, MBC는 준국영방송, 동양방송(TBC)은 상업방송이라는 서로 각기 다른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셋은 모두 광고주들의 관심을 끌기에 바빴다. 그리하여 1960년대의 라디오에서건, 1970년대의 텔레비전에서건 이 셋은 가장 인기 있는 장르였던 드라마를 두고 항상 불붙는 듯한 경쟁을 해 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드라마를 둘러싼 방송사들의 열띤 경쟁은 1980년, 1990년대를 거쳐 훗날 2000년대의 한류 현상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1971년, KBS TV드라마 녹화 장면
출처: 국가기록원 1)


   한국의 방송은 그동안 권위주의적인 정권의 요구 아래, 그리고 보수적인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온 국민의 취향에 맞는 즐거움과 감동만을 선사하는, 즉 비판과 논쟁은 피하는 온순한 공영방송의 외관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동시에 내부적으로는 상업방송의 ‘효율적인’ 시스템을 철저하게 체화하며 실리적인 ‘내실’을 꾀하는 영리한 모습 또한 보여 왔다. 공영적인 상업방송이라 칭하든 상업적인 공영방송이라 칭하든, 한국의 방송은 공영방송과 상업방송, 그 중간 어딘가의 지점에 안착하여 자신만의 모습을 키워 왔다고 하겠다.
텔레비전이 만들어 내는 다양한 콘텐츠와 가치들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종류, 즉 장르는 어느 나라 방송이라 할 것 없이 거의 비슷하다. 뉴스 등의 보도 프로그램, 음악 쇼나 버라이어티쇼 등을 포함하는 오락 프로그램, 픽션물, 그리고 가장 최근 장르인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꽤나 다양한 장르들이 각 나라의 방송에 비슷하게 존재한다. 이는 초기에 영국의 공영방송 모델과 미국의 상업방송 모델이 전 세계 각국으로 보급되면서 그 프로그램 장르 또한 함께 이동, 안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동일한 장르들이 각각의 지역에서 똑같은 성장의 과정을 보인 것은 아니다. 방송이 따르고 있는 이념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가 어떤가에 따라, 그 지역의 사회·문화적 배경이 어떠하고 정치·경제적 환경이 어떠냐에 따라, 특정한 장르가 다른 장르보다 더 많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 왔던 것이다. 유럽에서는 유난히 토론 프로그램들을 많이 볼 수 있고, 미국에서는 오락 프로그램들이 대세를 이룬다. 한국에서는 유난히 드라마가 강세인 것처럼 말이다.
   또한 한 나라에서 오락적 장르로 성공한 프로그램이 다른 지역에서는 본래와는 다른 공익적인 기능을 덤으로 수행하는 경우도 있다. 텔레비전의 창출물이 제도적인 것과 역사, 사회·문화적인 것 등에 인간의 상상력이 더해져서 만들어지는 만큼, 그 콘텐츠의 창작 범위와 그것이 만들어 내는 가치는 무한한 것이라 볼 수도 있겠다.

자유롭게 떠들기: 공론장의 가치
유럽에는 유난히 토론 프로그램들이 많다. 시사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예능 프로그램, 정보 전달 프로그램, 육아 프로그램, 책에 관한 프로그램, 심지어는 스포츠 정보 프로그램도 (토크가 아닌) 토론의 형식을 띠고 있다. 저녁 6~8시 사이에 흔히 방송되는 정보 프로그램의 경우, 6~7명이 한 테이블에 모여 코너마다 달라지는 주제에 관해 각자의 의견을 말하고 농담도 하면서, 때론 큰소리를 내기도 한다. 어떤 때에는 게스트로 정치인, 어떤 때에는 가수나 배우를 초대해 놓고 패널들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때로는 신랄한 비판도 쏟아 낸다. 남의 말이 끝날 때까지 점잖게 기다려 주지 않고 서로 자기 말을 하려고 상대의 말꼬리를 자르기에 바쁘다.
   흔히 주말에 방송되는 책에 관한 프로그램은 조금 다르다. 신간 도서를 낸 4~5명의 작가들을 불러 놓고 각자의 책에 대해, 상대방의 책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게 한다. 출연자들은 사회적 이슈에 대한 의견을 내놓는 것도, 의견 대립의 상황에도 주저하지 않는다. 시사 토론 프로그램 중에는 한국의 일일 드라마와 같은 일일 토론 프로그램도 있다. 이모두 프랑스의 예이다. 텔레비전이 한마디로 ‘공론장’, 즉 다양한 주제들에 관해 여러 의견들이 오가면서 서로 부딪치고 싸우는, (보기에는 비생산적인 것 같지만 결국에는) 생산적인 교류의 공간이 된다.

‘공론장’의 역할을 하고 있는 프랑스 TV 프로그램 1
출처: France2의 On a tout essayé 2)


‘공론장’의 역할을 하고 있는 프랑스 TV 프로그램 2
France5의 La Grande Librairie 3)


   ‘공론장’의 역사적인 기원을 찾아 올라가면, 18세기 영국의 커피 하우스가 필수적으로 언급된다. 이곳은 하버마스가 말한 ‘논의하는 공중’이 모여 실질적인 공론장을 만들어 낸 곳으로, 그곳은 단지 귀족층이나 지식층들만 모여 정치적인 논의를 하던 곳이 아니다. 모든 계층, 상류층부터 중간 계층, 노동자 계급까지 함께 모여 정치, 종교, 남의 가정사, 남녀 관계, 미신 이야기, 사회적 가십 거리 등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얘기하며 말싸움을 벌이던 곳이다. 그런데 그렇게 모든 계층이 서로 어울려 논쟁과 말다툼을 하다 보니 사람들 각자가 결국 자신만의 의견을 가지게 되고 비판적이거나 분석적인 생각을 품게 되며, 종국에는 시민 의식을 갖게 되어 그것이 차츰 단단해지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사실 유럽의 방송을 보면 18세기 커피 하우스의 이러한 난상토론 분위기가 방송으로 그대로 이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토론식의 프로그램들은 대중적인 공론장을 형성하면서 시민들에게 사회와 세계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지식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사회 현상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면서 시민들로 하여금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드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문화적 정체성의 전수: 교육‧문화적 가치
문화적 정체성의 전수 역시 유럽의 공영방송 프로그램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특징 중의 하나이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된 초기에는 특히 픽션 장르인 드라마가 이러한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대중들의 지적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에 매우 열의를 보인 초기 TV 드라마 연출가들은 고전 소설을 극화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건이나 역사적 인물을 중심으로 한 드라마 제작과 난해할 수도 있는 소설의 드라마화도 주저하지 않았다.
   사실 유럽의 방송들은 자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의식이 매우 강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자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드라마 제작을 통해 가시적으로 드러내던 방송사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러한 문화 정체성의 전수라는 역할을 점차 내면화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역할을 방송이 당연히 해야 할, 태생적으로 품고 있는 근본 역할로 인지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상업 채널조차 문화적이면서 교육적인 기능을 자신들이 담당해야 할 당연한 역할로 여기고 시청자들이 가볍게 볼 수 있는 예능 프로그램을 만들면서도 그 속에서 중요한 사회적 가치들을 반영하는 내용들을 아주 매끄럽게 쇼적인 방식으로 연출해 낸다.
   세계적인 음악 경연 프로그램 포맷으로 자리 잡아 2000년대를 풍미한 (한국의 ‘슈퍼스타 K’의 원조 프로그램인) 영국의 ‘Pop Idol’은 프랑스에서 ‘Nouvelle Star’로 각색되어 방송되었다. 지상파 상업 채널인 M6가 2000년대에 거의 10년간 정기적으로 방송했던 이 프로그램은 매주 금요일 저녁(황금 시간대인 8시 반부터 10시 반까지의 두 시간을 꽉 채웠음) 시청자들을 TV 앞으로 모여들게 하는, 당시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참가자들이 부르는 경연곡의 목록을 살펴보면 최신 유행곡보다는 1940~50년대의 프랑스 샹송, 60~70년대의 프랑스 락 음악, 80년대의 아방가르드한 프랑스 음악 등, 프랑스 고유의 대중음악을 시대별로 훑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시청하던 타깃 시청자가 대부분 10대의 프랑스 청소년임을 감안할 때, 이 프로그램이 이들 청소년들에게 단지 음악적인 즐거움뿐만이 아니라, 프랑스 대중음악의 역사와 아울러 이전 세대의 음악에 묻어 있는 옛 감성과 감각 등도 함께 전수했다고 볼 수 있다.

문화적 유산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TV 프로그램 1
출처: M6. Nouvelle Star 4)


문화적 유산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TV 프로그램 2
출처: JTBC. 싱어게인 5)


   이렇게 유럽의 방송들은 자국의 문화적 유산들을 여러 종류의 포맷을 통해 세대에서 세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보여 주는 프로그램을 발견할 수 있으니, 민영 채널인 JTBC가 올해 초에 방송한 ‘싱어게인’이 그것이다. 196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의 곡이 골고루 들어 있으면서 1970~2000년대의 곡들이 전체 경연곡의 2/3를 넘어서는 노래 목록을 지니고 있다는 점, 그러면서 이 예전의 곡들에 묻어 있는 옛 시대적 감수성이 심사위원들의 코멘트나 해석을 통해 다시금 명확하게 시청자들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점 등은 본 프로그램이, 더 나아가 한국의 프로그램이 현재 대중문화 정체성 전수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잘 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퀄리티 있는 상상력: 미학적 가치
픽션물 장르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인 쪽은 미국의 상업방송이었다. 유럽의 공영방송처럼 문학적이고 역사적인 드라마 제작의 사명감에 얽매이지 않았던 미국의 방송사는 초기부터 코믹한 요소나 로맨틱한 요소가 가미된 드라마를 양산해 냈다. 방송 3사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1970년대에 이르러 미국의 텔레비전 픽션물은 형식적인 면에서나 내용적인 면에서 굉장한 발전을 이루게 된다. 유태인 대학살에 연루된 한 유태인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미니시리즈 ‘홀로코스트(Holocaust)’(1978)와 흑인 노예제도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뿌리(Roots)’(1977) 등은 미국 내에 사회적 논쟁의 불을 지피기도 하였다. 텍사스 오일회사와 목장을 운영하는 한 가문을 둘러싼 갈등과 치정을 그린 시리즈 ‘달라스(Dallas)’(1978~1991)는 세계적인 히트를 치며 텔레비전 드라마 제작의 문법을 바꿔 버리기도 했다. 유럽의 방송인들조차 ‘미국인들처럼’ 이야기를 써 내려가야 한다는 입장을 받아들이며 ‘달라스’를 차용한 시리즈물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미국의 방송 시장에 유선 방송사들이 진입한 이후에는 드라마를 둘러싼 방송사 간의 경쟁은 더욱 심해진다. 이러한 가운데 1990년대에 들어 드라마의 작품성과 독창성 면에서 눈에 띄는 발전을 이루며 드라마 시장에서 독보적인 행보를 이어 나간 방송사가 있으니, 바로 HBO이다. 1996년, “It’s not television, it’s HBO”라는 새로운 홍보 슬로건을 내걸고 이미지 쇄신 작업에 들어간 HBO는 ‘엘리트주의’를 내세우며 자신들의 콘텐츠가 여느 텔레비전 채널들의 콘텐츠들과는 다름을, 다시 말해 보다 우월한 콘텐츠임을 강조한다. 그들의 채널 가입자들에게 이렇게 선별적인 프로그램을 시청하게 되면 보통 사람들과 달리 보다 상위층에 존재하는 지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의 집단에 속하게 될 것임을 강조하면서 ‘나도 지식인층에 속한다.’는, 한마디로 ‘사회‧문화적 지위’가 격상된 느낌을 받도록 만든 것이다.
   이러한 HBO의 엘리트주의 홍보 전략의 대표적인 예로 ‘소프라노스(The Sopranos)’(1997~2007)의 홍보 포스터를 들 수 있다. 오른쪽 페이지 맨 위 사진은 1999년에 발표된 첫 번째 홍보 포스터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유명한 작품 ‘최후의 만찬’의 구도를 응용해 찍은 사진 포스터이다. 첫 번째 사진에 대한 연이은 호평과 함께 HBO는 2002년, 새로운 시즌의 시작과 함께 또 하나의 ‘예술적’ 포스터를 내놓는다. 이는 떼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의 ‘메듀즈호의 뗏목’의 구도를 차용한 이미지 포스터이다 6). 이들은 마피아 조직을 이끌며 가족과 조직원에 대한 무거운 부담감과 분노를 마음속 깊이 담고 있는 주인공 토니 소프라노의 불안하면서도 심약한 심리를 고도의 예술성과 함께 이미지로 표현했다고 칭송받았다.

소프라노스 홍보 포스터(1999)
출처: HBO. Sopranos 7)


소프라노스 홍보 포스터(2002)
출처: HBO. Sopranos 8)


메듀즈호의 뗏목
출처: 루브르 박물관 9)


   이들 포스터들과 함께 HBO는 본 픽션물에 위대한 예술 작품의 틀을 씌우면서 시청자로 하여금 그들이 텔레비전 시리즈물이 아닌 하나의 예술 작품을 대하고 있음을 느끼도록 만들었고, 동시에 그렇게 수준 높은 작품을 대하는 자신 또한 엘리트 계층에 속한다는, 일종의 지적 충족감 또한 느끼도록 만들었다.
   HBO의 드라마가 독창적이며 작품성 있다고 평가받은 것은 단지 이들 포스터들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작품성과 독창성을 지닌 픽션 시리즈물이라 했을 때 흔히들 기대하는 것은 색다른 장르의 틀 안에서 색다른 소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들일 것이다. HBO의 시리즈물이 그 독창성으로 인정받는 것은 확실하나,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면 이 픽션물이 장르적인 면이나 소재 면에서 그다지 독창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할리우드의 황금기를 가능하게 해 준 미국의 고전적인 영화 장르들, 즉 서부극, 갱스터 무비, 로맨틱 코미디 등의 장르가 HBO의 시리즈물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을 뿐이다. 서부극은 ‘데드우드(Deadwood)’, 갱스터는 ‘소프라노스’, 로맨틱 코미디는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에 각각 대입된다. 그런데 만약 HBO가 미국의 대표적인 영화 장르의 틀을 가져오면서 장르적 클리셰까지 자신들의 시리즈물 속에 그대로 재현했다면 HBO는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수준 높은 채널로서의 평판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데드우드’ 안에서의 총싸움은 전통 서부영화 속에서처럼 장렬하게 전개되지 않고, ‘소프라노스’ 안에서 갱스터들의 생활은 각박하기 그지없으니, 영화 ‘대부’ 안에서처럼 멋있거나 스릴이 있지도 않다. 또한 ‘섹스 앤 더 시티’ 안에서의 사랑은 해피엔드로 끝나지도 않는다. 이들 시리즈물들은 현실을 그대로 반영, 묘사하려는 일종의 사실주의 원칙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HBO의 시리즈물들의 특징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섹스와 폭력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 비속어의 남발도 이러한 사실적 표현의 의도하에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HBO의 시리즈물들은 고전적 장르의 틀은 그대로 받아들이되 각각의 장르가 지닌 클리셰들을 사실주의적 표현과 함께 비틀거나 무너뜨림으로써 내용적인 면, 형식적인 면에서 자신만의 독창성을 만들어 나갔다.
한국 방송의 도약을 위한 다양성
한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들도 많은 성장을 해 왔다. 1960년대의 라디오 방송 시대 때부터 시작된 드라마 전쟁은 1970년대의 텔레비전 드라마 전쟁으로 이어졌고, 1980~90년대의 수많은 작품들을 내놓으며 쌓은 제작 노하우를 바탕으로 한국 방송은 2000년대 이후 한류 드라마 시대를 이끌어 내기까지 하였다. 엄청난 성장을 이루어 온 것이다. 그런데 한국 방송에서는 항상 모든 것이 드라마에만 집중되었다.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 장르를 제외한 타 장르의 성장은 매우 더디게 이루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나마 2010년대에 종합 편성 채널들이 들어선 후, 토론식 예능 프로그램들-‘썰전’, ‘비정상회담’, ‘마녀사냥’ 등-이 제작, 방송되며 잠시나마 ‘입’들이 모여 시끄러운 말싸움을 벌이는 공론장이 형성되는가 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시끄러운’ 프로그램들도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이제는 정말 한국 방송도 종전의 관행-시청률에 전전긍긍하면서 한 번 성공한 포맷만을 반복적으로 제작하는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는 정말 도전적인 자세로 우리의 다양한 생각들과 감성들을 표현할 다채롭고도 독창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한국 대중문화의 수준이 많이 향상된 만큼, 이제 한국의 텔레비전도 차별성을 내세우며 조금 더 용기 있는 자세로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도 되지 않을까 싶다. 다양성이란 바로 용기와 도전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 가치이다. 이 짧은 글 안에서 차마 다 기술하지 못한 텔레비전 방송의 역사와 프로그램의 역사가 이를 증명해 준다.
목차
다양성을 통해 이뤄 낸 고려의 최전성기
텔레비전과 다양성: TV가 전달하는 다양한 가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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