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종류, 즉 장르는 어느 나라 방송이라 할 것 없이 거의 비슷하다. 뉴스 등의 보도 프로그램, 음악 쇼나 버라이어티쇼 등을 포함하는 오락 프로그램, 픽션물, 그리고 가장 최근 장르인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꽤나 다양한 장르들이 각 나라의 방송에 비슷하게 존재한다. 이는 초기에 영국의 공영방송 모델과 미국의 상업방송 모델이 전 세계 각국으로 보급되면서 그 프로그램 장르 또한 함께 이동, 안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동일한 장르들이 각각의 지역에서 똑같은 성장의 과정을 보인 것은 아니다. 방송이 따르고 있는 이념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가 어떤가에 따라, 그 지역의 사회·문화적 배경이 어떠하고 정치·경제적 환경이 어떠냐에 따라, 특정한 장르가 다른 장르보다 더 많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 왔던 것이다. 유럽에서는 유난히 토론 프로그램들을 많이 볼 수 있고, 미국에서는 오락 프로그램들이 대세를 이룬다. 한국에서는 유난히 드라마가 강세인 것처럼 말이다.
또한 한 나라에서 오락적 장르로 성공한 프로그램이 다른 지역에서는 본래와는 다른 공익적인 기능을 덤으로 수행하는 경우도 있다. 텔레비전의 창출물이 제도적인 것과 역사, 사회·문화적인 것 등에 인간의 상상력이 더해져서 만들어지는 만큼, 그 콘텐츠의 창작 범위와 그것이 만들어 내는 가치는 무한한 것이라 볼 수도 있겠다.
자유롭게 떠들기: 공론장의 가치
유럽에는 유난히 토론 프로그램들이 많다. 시사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예능 프로그램, 정보 전달 프로그램, 육아 프로그램, 책에 관한 프로그램, 심지어는 스포츠 정보 프로그램도
(토크가 아닌) 토론의 형식을 띠고 있다. 저녁 6~8시 사이에 흔히 방송되는 정보 프로그램의 경우, 6~7명이 한 테이블에 모여 코너마다 달라지는 주제에 관해 각자의 의견을 말하고 농담도 하면서, 때론 큰소리를 내기도 한다. 어떤 때에는 게스트로 정치인, 어떤 때에는 가수나 배우를 초대해 놓고 패널들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때로는 신랄한 비판도 쏟아 낸다. 남의 말이 끝날 때까지 점잖게 기다려 주지 않고 서로 자기 말을 하려고 상대의 말꼬리를 자르기에 바쁘다.
흔히 주말에 방송되는 책에 관한 프로그램은 조금 다르다. 신간 도서를 낸 4~5명의 작가들을 불러 놓고 각자의 책에 대해, 상대방의 책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게 한다. 출연자들은 사회적 이슈에 대한 의견을 내놓는 것도, 의견 대립의 상황에도 주저하지 않는다. 시사 토론 프로그램 중에는 한국의 일일 드라마와 같은 일일 토론 프로그램도 있다. 이모두 프랑스의 예이다. 텔레비전이 한마디로 ‘공론장’, 즉 다양한 주제들에 관해 여러 의견들이 오가면서 서로 부딪치고 싸우는,
(보기에는 비생산적인 것 같지만 결국에는) 생산적인 교류의 공간이 된다.
‘공론장’의 역할을 하고 있는 프랑스 TV 프로그램 1
출처: France2의 On a tout essay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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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론장’의 역할을 하고 있는 프랑스 TV 프로그램 2
France5의 La Grande Librair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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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론장’의 역사적인 기원을 찾아 올라가면, 18세기 영국의 커피 하우스가 필수적으로 언급된다. 이곳은 하버마스가 말한 ‘논의하는 공중’이 모여 실질적인 공론장을 만들어 낸 곳으로, 그곳은 단지 귀족층이나 지식층들만 모여 정치적인 논의를 하던 곳이 아니다. 모든 계층, 상류층부터 중간 계층, 노동자 계급까지 함께 모여 정치, 종교, 남의 가정사, 남녀 관계, 미신 이야기, 사회적 가십 거리 등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얘기하며 말싸움을 벌이던 곳이다. 그런데 그렇게 모든 계층이 서로 어울려 논쟁과 말다툼을 하다 보니 사람들 각자가 결국 자신만의 의견을 가지게 되고 비판적이거나 분석적인 생각을 품게 되며, 종국에는 시민 의식을 갖게 되어 그것이 차츰 단단해지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사실 유럽의 방송을 보면 18세기 커피 하우스의 이러한 난상토론 분위기가 방송으로 그대로 이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토론식의 프로그램들은 대중적인 공론장을 형성하면서 시민들에게 사회와 세계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지식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사회 현상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면서 시민들로 하여금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드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문화적 정체성의 전수: 교육‧문화적 가치
문화적 정체성의 전수 역시 유럽의 공영방송 프로그램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특징 중의 하나이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된 초기에는 특히 픽션 장르인 드라마가 이러한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대중들의 지적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에 매우 열의를 보인 초기 TV 드라마 연출가들은 고전 소설을 극화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건이나 역사적 인물을 중심으로 한 드라마 제작과 난해할 수도 있는 소설의 드라마화도 주저하지 않았다.
사실 유럽의 방송들은 자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의식이 매우 강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자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드라마 제작을 통해 가시적으로 드러내던 방송사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러한 문화 정체성의 전수라는 역할을 점차 내면화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역할을 방송이 당연히 해야 할, 태생적으로 품고 있는 근본 역할로 인지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상업 채널조차 문화적이면서 교육적인 기능을 자신들이 담당해야 할 당연한 역할로 여기고 시청자들이 가볍게 볼 수 있는 예능 프로그램을 만들면서도 그 속에서 중요한 사회적 가치들을 반영하는 내용들을 아주 매끄럽게 쇼적인 방식으로 연출해 낸다.
세계적인 음악 경연 프로그램 포맷으로 자리 잡아 2000년대를 풍미한
(한국의 ‘슈퍼스타 K’의 원조 프로그램인) 영국의 ‘Pop Idol’은 프랑스에서 ‘Nouvelle Star’로 각색되어 방송되었다. 지상파 상업 채널인 M6가 2000년대에 거의 10년간 정기적으로 방송했던 이 프로그램은 매주 금요일 저녁
(황금 시간대인 8시 반부터 10시 반까지의 두 시간을 꽉 채웠음) 시청자들을 TV 앞으로 모여들게 하는, 당시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참가자들이 부르는 경연곡의 목록을 살펴보면 최신 유행곡보다는 1940~50년대의 프랑스 샹송, 60~70년대의 프랑스 락 음악, 80년대의 아방가르드한 프랑스 음악 등, 프랑스 고유의 대중음악을 시대별로 훑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시청하던 타깃 시청자가 대부분 10대의 프랑스 청소년임을 감안할 때, 이 프로그램이 이들 청소년들에게 단지 음악적인 즐거움뿐만이 아니라, 프랑스 대중음악의 역사와 아울러 이전 세대의 음악에 묻어 있는 옛 감성과 감각 등도 함께 전수했다고 볼 수 있다.
문화적 유산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TV 프로그램 1
출처: M6. Nouvelle S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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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유산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TV 프로그램 2
출처: JTBC. 싱어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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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유럽의 방송들은 자국의 문화적 유산들을 여러 종류의 포맷을 통해 세대에서 세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보여 주는 프로그램을 발견할 수 있으니, 민영 채널인 JTBC가 올해 초에 방송한 ‘싱어게인’이 그것이다. 196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의 곡이 골고루 들어 있으면서 1970~2000년대의 곡들이 전체 경연곡의 2/3를 넘어서는 노래 목록을 지니고 있다는 점, 그러면서 이 예전의 곡들에 묻어 있는 옛 시대적 감수성이 심사위원들의 코멘트나 해석을 통해 다시금 명확하게 시청자들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점 등은 본 프로그램이, 더 나아가 한국의 프로그램이 현재 대중문화 정체성 전수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잘 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퀄리티 있는 상상력: 미학적 가치
픽션물 장르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인 쪽은 미국의 상업방송이었다. 유럽의 공영방송처럼 문학적이고 역사적인 드라마 제작의 사명감에 얽매이지 않았던 미국의 방송사는 초기부터 코믹한 요소나 로맨틱한 요소가 가미된 드라마를 양산해 냈다. 방송 3사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1970년대에 이르러 미국의 텔레비전 픽션물은 형식적인 면에서나 내용적인 면에서 굉장한 발전을 이루게 된다. 유태인 대학살에 연루된 한 유태인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미니시리즈 ‘홀로코스트(Holocaust)’(1978)와 흑인 노예제도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뿌리
(Roots)’(1977) 등은 미국 내에 사회적 논쟁의 불을 지피기도 하였다. 텍사스 오일회사와 목장을 운영하는 한 가문을 둘러싼 갈등과 치정을 그린 시리즈 ‘달라스
(Dallas)’(1978~1991)는 세계적인 히트를 치며 텔레비전 드라마 제작의 문법을 바꿔 버리기도 했다. 유럽의 방송인들조차 ‘미국인들처럼’ 이야기를 써 내려가야 한다는 입장을 받아들이며 ‘달라스’를 차용한 시리즈물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미국의 방송 시장에 유선 방송사들이 진입한 이후에는 드라마를 둘러싼 방송사 간의 경쟁은 더욱 심해진다. 이러한 가운데 1990년대에 들어 드라마의 작품성과 독창성 면에서 눈에 띄는 발전을 이루며 드라마 시장에서 독보적인 행보를 이어 나간 방송사가 있으니, 바로 HBO이다. 1996년, “It’s not television, it’s HBO”라는 새로운 홍보 슬로건을 내걸고 이미지 쇄신 작업에 들어간 HBO는 ‘엘리트주의’를 내세우며 자신들의 콘텐츠가 여느 텔레비전 채널들의 콘텐츠들과는 다름을, 다시 말해 보다 우월한 콘텐츠임을 강조한다. 그들의 채널 가입자들에게 이렇게 선별적인 프로그램을 시청하게 되면 보통 사람들과 달리 보다 상위층에 존재하는 지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의 집단에 속하게 될 것임을 강조하면서 ‘나도 지식인층에 속한다.’는, 한마디로 ‘사회‧문화적 지위’가 격상된 느낌을 받도록 만든 것이다.
이러한 HBO의 엘리트주의 홍보 전략의 대표적인 예로 ‘소프라노스
(The Sopranos)’(1997~2007)의 홍보 포스터를 들 수 있다. 오른쪽 페이지 맨 위 사진은 1999년에 발표된 첫 번째 홍보 포스터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유명한 작품 ‘최후의 만찬’의 구도를 응용해 찍은 사진 포스터이다. 첫 번째 사진에 대한 연이은 호평과 함께 HBO는 2002년, 새로운 시즌의 시작과 함께 또 하나의 ‘예술적’ 포스터를 내놓는다. 이는 떼오도르 제리코
(Théodore Géricault)의 ‘메듀즈호의 뗏목’의 구도를 차용한 이미지 포스터이다
6).
이들은 마피아 조직을 이끌며 가족과 조직원에 대한 무거운 부담감과 분노를 마음속 깊이 담고 있는 주인공 토니 소프라노의 불안하면서도 심약한 심리를 고도의 예술성과 함께 이미지로 표현했다고 칭송받았다.
소프라노스 홍보 포스터(1999)
출처: HBO. Sopran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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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라노스 홍보 포스터(2002)
출처: HBO. Sopran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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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듀즈호의 뗏목
출처: 루브르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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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포스터들과 함께 HBO는 본 픽션물에 위대한 예술 작품의 틀을 씌우면서 시청자로 하여금 그들이 텔레비전 시리즈물이 아닌 하나의 예술 작품을 대하고 있음을 느끼도록 만들었고, 동시에 그렇게 수준 높은 작품을 대하는 자신 또한 엘리트 계층에 속한다는, 일종의 지적 충족감 또한 느끼도록 만들었다.
HBO의 드라마가 독창적이며 작품성 있다고 평가받은 것은 단지 이들 포스터들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작품성과 독창성을 지닌 픽션 시리즈물이라 했을 때 흔히들 기대하는 것은 색다른 장르의 틀 안에서 색다른 소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들일 것이다. HBO의 시리즈물이 그 독창성으로 인정받는 것은 확실하나,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면 이 픽션물이 장르적인 면이나 소재 면에서 그다지 독창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할리우드의 황금기를 가능하게 해 준 미국의 고전적인 영화 장르들, 즉 서부극, 갱스터 무비, 로맨틱 코미디 등의 장르가 HBO의 시리즈물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을 뿐이다. 서부극은 ‘데드우드
(Deadwood)’, 갱스터는 ‘소프라노스’, 로맨틱 코미디는 ‘섹스 앤 더 시티
(Sex and the City)’에 각각 대입된다. 그런데 만약 HBO가 미국의 대표적인 영화 장르의 틀을 가져오면서 장르적 클리셰까지 자신들의 시리즈물 속에 그대로 재현했다면 HBO는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수준 높은 채널로서의 평판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데드우드’ 안에서의 총싸움은 전통 서부영화 속에서처럼 장렬하게 전개되지 않고, ‘소프라노스’ 안에서 갱스터들의 생활은 각박하기 그지없으니, 영화 ‘대부’ 안에서처럼 멋있거나 스릴이 있지도 않다. 또한 ‘섹스 앤 더 시티’ 안에서의 사랑은 해피엔드로 끝나지도 않는다. 이들 시리즈물들은 현실을 그대로 반영, 묘사하려는 일종의 사실주의 원칙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HBO의 시리즈물들의 특징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섹스와 폭력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 비속어의 남발도 이러한 사실적 표현의 의도하에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HBO의 시리즈물들은 고전적 장르의 틀은 그대로 받아들이되 각각의 장르가 지닌 클리셰들을 사실주의적 표현과 함께 비틀거나 무너뜨림으로써 내용적인 면, 형식적인 면에서 자신만의 독창성을 만들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