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충순(蔡忠順)은 고려의 관료로 개경 궁궐에 있었다.
그때 송나라의 장삿배가 들어와서 표문(表文)을 올렸는데 채충순이 보기에 문장이 정교하고 학식이 있었다. 채충순은 사람을 보내 표문 지은 사람을 불렀다. 그는 송나라 온주(温州) 사람 주저(周佇)였다. 채충순은 주저와 문장을 주고 받으며 이야기를 나눈 후, 주저의 재주가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채충순은 즉시 당시의 왕인 목종
(穆宗, 재위 997∼1009년)에게 보고했고, 목종은 주저를 예빈성주부(禮賓省注簿)에 임명했다. 예빈성은 외국의 사신을 맞이하고 접대하는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었고, 주부는 종7품에 해당하는 직이다. 과거에 급제해야 임명되는 관직으로, 매우 파격적으로 임명된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이런 파격 인사가 꽤 흔했다.
현대의 한국은 유교적 문화가 깊이 뿌리박혀 있는 나라이다. 그 시발점은 고려 광종
(光宗, 재위 949∼975년) 때 도입된 과거제이다. 과거제가 시행되면서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아가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이었으므로, 과거를 볼 수 있는 신분의 사람들 대다수가 유교 경전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고, 유교 문화 역시 차츰 생활 속으로 침투하게 되었던 것이다.
과거제를 도입하기 전에는 신분제를 바탕으로 관리들을 뽑았다. 그러다 보니 인재 풀이 매우 좁을 수밖에 없고, 특정 세력이 관직을 독점하게 되는 일도 생겼다. 시험으로 관리를 뽑는 과거제는 이전보다 훨씬 공정한 제도였으며, 다양한 인재를 뽑을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또한 특정 세력에 의지하는 일이 줄어드니 왕권이 강화될 수 있었다.
이 과거제의 도입은 쌍기(雙兾)라는 관리가 광종에게 건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쌍기는 고려인이 아니었다. 그는 후주(後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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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956년
(광종 7년)에 사신단의 일원으로 고려에 왔다가 병에 걸려 고려에 머물렀다. 광종이 쌍기의 재주를 알아보고는 등용했던 것이다.
쌍기가 고려에서 후대받자, 고려로 귀화하는 한족들이 크게 늘었다. 광종은 이들 중 학문적인 능력이 있는 자들을 후대하여 관직에 임명했고, 이들은 광종의 개혁 정책을 추진하는 세력이 되었다. 고려에서는 광종 이후에도 재능있는 한족들을 계속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 주저 역시 등용되었던 것이다.
목종 12년
(1009년), 고려에서 변란이 일어났다. 중추사(中樞使) 강조(康肇)가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
(顯宗, 재위 1009~1031년)을 새로운 왕으로 세웠던 것이다.
거란은 고려의 왕이 교체된 것을 빌미 삼아 4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공했다
(1010년). 거란군은 통주
(평안북도 동림군) 근처 삼수채에서 강조가 이끄는 고려의 주력군을 격파하고, 고려의 성곽을 우회해서 개경까지 남하한다. 거란군이 개경까지 몰려오자 개경의 관료들 상당수는 남쪽으로 도망쳤고, 남아 있던 조정의 신하들은 항복할 것을 현종에게 건의했다. 이때 예부시랑(禮部侍郎) 강감찬이 일갈했다.
“지금의 일은 근심할 바가 없습니다. 단지 지금은 우리의 군세가 적어 적들을 상대할 수 없으니, 일단 예봉을 피해 시간을 번 뒤에 서서히 이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현종은 강감찬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나주로 몽진을 떠났다. 군사 50명과 비교적 젊은 관리들이 현종을 호종(扈從)했다. 그때 채충순과 주저도 있었다. 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개경을 떠나자마자 고려인들이 현종의 일행을 공격했다. 당시 고려 중앙 정부의 행정력이 지방 구석구석까지는 미치지 않았던 것이다. 창화현(경기도 양주시)에 이르러서는 지역민들의 공격에 왕을 따르던 관리들이 뿔뿔이 흩어질 정도였다. 대부분의 관리들은 현종을 버리고 살길을 찾아 도주했다. 그러나 채충순과 주저는 현종을 기어코 찾아 다시 합류했다. 나주로 가는 동안 여러 번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들은 끝까지 현종의 곁을 지켰다.
채충순의 집안은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채인범(蔡仁範, 934∼998년)이라는 사람의 묘지명(墓誌銘)이 발견되면서 실마리를 찾게 된다. 묘지명은 죽은 사람의 행적을 돌에 새겨서 무덤 속에 넣은 것이다. 비석과 비슷한데, 비석은 무덤 근처에 세우는 것이고, 묘지명은 무덤 안에 넣는다는 것이 다르다. 채인범의 묘지명에 의하면, 그는 송나라 사람으로 970년(광종 21년)에 고려로 귀화했다. 묘지명의 내용을 연구한 결과, 채충순이 채인범의 아들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즉 채충순은 송나라계 고려인이었던 것이다.
채인범 묘지명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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