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을 통해 이뤄 낸
고려의 최전성기
길승수
역사 소설 작가.
‘넷플릭스’에서 만든 ‘킹덤’이라는 한국 드라마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16세기 말,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의 상황에서 설정을 가져왔고, 한국 드라마에서는 흔히 접하지 못했던 좀비를 등장시킨 판타지물이다. 지난해 시즌 2 마지막 화가 끝나며 유명 배우인 전지현이 잠깐 등장해, 드라마 팬들은 시즌 3의 주인공이 전지현일 것이라고 예상하며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배우 전지현의 밝고 사랑스러운 에너지를 기대했던 것이다. 올해 7월에 후속편 ‘킹덤-아신전’이 공개되었는데, 과연 주인공이 전지현이었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다시피 ‘아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이다.
   팬들은 드라마 내용이 아신의 영웅적인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일단 아신은 조선인이 아니다. 당시 조선의 영향력 안에 있던 여진족이었다. 여진족들은 숙신(肅愼)‧말갈(靺鞨) 등으로도 불렸던 민족으로, 주로 만주와 연해주에 거주하며 우리나라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 왔다. 고구려와 발해의 주요 구성원이었으며, 고려가 가장 전성기를 누릴 때 역시 수많은 여진족들이 고려의 테두리 안에서 살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여진족은 주로 악역을 맡아 왔고, 더구나 주인공이었던 경우는 거의 없다. 또한 아신은 소위 영웅이 아니었다. 조선인들의 배신으로 아버지와 부족을 잃고 조선에 대해 복수를 하려는 사람이었다. ‘멸시와 탄압을 받는 여진족들’과 ‘그들을 이용하고 배신하는 조선인들’! 지금까지 우리나라 에서 이런 구도의 이야기는 없었다. 한국 드라마의 다양성 폭이 넓어졌다는 점에서 ‘킹덤-아신전’은 매우 흥미로웠다.

   우리 역사상 가장 개방적이었던 때를 꼽으라면 고려 시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고려의 다양성은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민족들 가운데 고려 주류 사회의 주역이 된 이들이 여럿이었다. 고려는 나라를 세우고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 속에서 민족을 가리지 않고 재능 있는 인재들을 십분 활용했다. 그리하여 폭넓은 다양성과 개방성으로 나라의 역동성이 절정에 달할 때 최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왕건의 포용력과 발해인 대도수(大道秀).
9세기,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신라는 이제 그 명운을 다하고 있었다. 각 지역에서 일어난 군웅(群雄)들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쟁투를 벌였고, 그중에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와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최종 승자는 궁예도 견훤도 아니었다. 승자는 궁예의 폭정을 계기로 쿠데타를 일으킨 궁예의 부하 왕건이었다. 왕건은 고려를 세우고(918년) 후백제와 신라마저 병합하여 명실상부한 한반도의 주인이 된다.
   왕건이 궁예나 견훤보다 월등히 뛰어난 점은 그의 포용력이었다. 궁예는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왕위에 오른 뒤 점점 포악해져, 신하들을 함부로 죽이고 심지어 자신의 부인과 두 아이까지 죽였다. 견훤은 경주로 쳐들어가 신라의 경애왕과 그 신하들을 죽이고 경애왕의 왕비를 비롯한 후궁들을 욕보였다. 몇 년 후 후백제군이 경주를 다시 침공하자, 후백제군에 의해 학살당한 경험이 있던 경주인들은 공포에 떨었다. 그때 왕건은 즉시 구원군을 보내 경주를 보호했다. 경주인들은 왕건의 은혜와 호의에 감동했고, 왕건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신라를 병합하게 된다.
   견훤은 넷째 아들인 금강(金剛)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다. 그러자, 첫째 아들 신검(神劒)이 반란을 일으켜 제 아버지를 금산사에 유폐한다. 견훤은 금산사를 탈출하여 왕건에게 귀순했고, 왕건은 그런 견훤도 포용하여 ‘상보(尙父)’라고 높여 부르며 우대했다. 얼마 후 후백제를 병합한 후, 신검을 비롯한 후백제 장수들 역시 모두 용서한다. 오직 견훤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던 몇 명만 처단했을 뿐이었다.
   왕건과 견훤이 각축을 벌이고 있던 무렵, 북쪽에서는 큰일이 발생한다. 당시 신생 국가인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켰던 것이다(926년). 발해 유민들이 살길을 찾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남하하자, 왕건은 이들을 받아들이고 보호해 준다. 특히 발해의 세자 대광현(大光顯)이 수만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오자 1), ‘왕계(王繼)’라는 이름을 내려 주고, 백주(白州, 황해남도 배천군)를 영지로 하사했다. 왕건은 귀순하는 발해인들을 매우 후하게 대하고, 살길을 마련해 줬다. 고려에서 살게 된 발해인들은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북방을 개척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된다.

   발해가 멸망한 지 70여 년이 지난 후, 이번엔 거란이 고려를 침공했다(993년). 거란군의 총사령관은 소손녕(蕭遜寧)이었다. 당시 고려에는 태조 왕건의 손자이며 6대 왕인 성종(成宗, 재위 981∼997년)이 즉위해 있었다. 성종은 즉시 내사시랑(內史侍郎) 서희에게 군사를 주어 거란군을 막게 했다. 그리고 본인 역시 이렇게 말하며 최전선으로 직접 달려 나갔다.

“지금 인근의 적이 침입하여 나라를 어지럽히니, 짐이 직접 군대를 인솔하여 적을 물리치러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거란은 이때 강한 군사력으로 송나라를 압박하고 있었다. 송나라는 여러 차례 거란군에게 패했다. 그 정도로 강력한 거란군의 침공에도, 성종은 위험을 무릅쓰며 스스로 앞장섰던 것이다.
   고려군과 거란군은 대령강(평안북도 청천강의 지류)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초반에 고려의 선봉군이 거란군에 패하자, 신하들 중에는 ‘항복론’과 땅을 떼어 주고 화해하자는 ‘할지론(割地論)’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다. 성종이 할지론에 잠시 흔들리자 서희가 강력히 주장했다.

“전투의 승부는 국력의 강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적의 빈틈을 보아 기동하는 데 있습니다. 국토를 적에게 떼어 준다는 것은 만세의 치욕입니다. 신으로 하여금 적과 전투를 하게 해 주십시오. 승부를 본 후 논의해도 늦지 않습니다.”

   성종은 서희의 의견에 따라 거란군과 승부를 겨루기로 결정했다. 서희가 이끄는 고려군과 소손녕의 거란군은 서로의 빈틈을 호시탐탐 노렸다. 먼저 움직인 쪽은 소손녕이었다. 원정군 입장에서는 시일을 오래 끌수는 없었다. 식량이 곧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소손녕은 고려의 주력군이 주둔해 있는 곳을 우회하여 청천강 하구에 있던 고려의 안융진(安戎鎭)을 급습했다.
   거란군이 안융진을 급습하자, 중랑장(中郞將) 대도수가 군사들을 지휘하여 이들과 맞서 싸웠다. 대도수는 결국 안융진을 지켜 낸다. 대도수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발해인이었다. 전해지는 대씨 족보에 의하면, 발해 세자 대광현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대도수의 승전으로 거란군의 남하는 저지되고, 고려와 거란은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된다. 여기서 그 유명한 서희의 담판이 있게 되는 것이다. 만일 대도수가 안융진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면 역사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었다. 이때의 공으로 대도수는 장군으로 승진하게 되고, 고려군의 중요 인물이 된다. 70여 년 전, 왕건이 발해인을 고려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우대한 결과였다.
왕건의 포용력과 발해인 대도수(大道秀)
거란족은 9세기까지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지 못하고, 때로는 고구려와 발해, 혹은 당나라 등에 복속되어 살아갔다. 9세기 말, 거란의 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등장하여 나라를 세우고 점차 강성해지다가 급기야 발해를 멸망시킨다. 야율아보기의 뒤를 이은 태종 야율덕광(耶律德光)은 만리장성을 넘어 남하하여 지금의 북경을 포함하는 지역인 ‘연운(燕雲) 16주’를 점령했다.
   야율덕광은 한족들이 사는 연운 16주를 거란의 정치 체제가 아닌 한족의 정치 체제로 다스렸다. 소위 말하는 ‘이원적인 통치 체제’였던 것이다. 거란의 변발을 한족에게 강요하지 않았으며, 한족 출신의 신하들에게는 황제가 주관하는 조회에 참석할 때에도 한족의 복식을 그대로 착용하도록 허용했다. 점령한 지역의 전통을 인정한 이런 통치 체제로 인해 거란의 국력은 막강해졌다. 거란 역시 다양성을 폭넓게 인정함으로써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한 것이었다.

거란을 다룬 중국 드라마 ‘연운대(烟云台)’의 거란족 복장의 관리들(좌)과 한족 복장의 관리들(우)
출처: 채널차이나 '연운대'


   서희와 소손녕의 협상으로 군사적 충돌은 멈췄지만, 완전히 종식된것은 아니었다. 소강상태에 가까웠다. 서희는 후에 강동 6주라고 불리게되는 지역을 개척하여 이곳을 단단한 방어선으로 만든다. 거란의 재침략에 대비한 것이었다. 또한 고려 성종은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같이 거란을 공격할 것을 제안했다. 거란군에 여러 번 대패했던 송나라는 이 제안을 거절한다. 그런데 고려가 송나라에 이런 제안을 한 것을 거란이 모를 수가 없었다. 고려와 거란의 긴장감은 높아져 갔다.
   이때 거란에서 고려에 사신을 보내서 먼저 유화적인 태도를 취했다. 좋은 말로 고려 성종을 달랜 것이었다(994년 8월). 역사 기록이 단순하여 정확히 무슨 말들이 오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서로 간에 무척 호의적이었다는 것은 추측할 수 있다.
   그다음 해(995년 9월), 고려 성종이 거란에 혼인 관계를 맺을 것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거란이 이 제안을 수락하여 고려 성종의 배필을 정했다. 배필이 될 여인은 바로 소손녕의 딸이었다. 거란은 황제의 가문인 야율(耶律)씨와 황후의 가문인 소(蕭)씨의 연합으로 출발한 국가였다. 소손녕은 가장 지체 높은 황후 가문에 속해 있었으며, 거란 황제의 부마(사위)였다. 그러니까 요약하면 소손녕의 딸은 공주급의 신분이었던 것이다. 이때 고려 성종의 나이는 36세로 슬하에 딸 2명만 두고 있었다. 만일 소손녕의 딸이 고려로 시집와서 아들을 낳게 되면 거란의 핏줄을 이어받은 고려의 왕이 탄생할 수도 있었다.
   거란 황실의 혼인 제도는, 어린 나이에 정혼(약혼)을 한 후, 혼인 생활을 할 만한 나이가 되면 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가서 시집살이를 하는 형태였다. 이때 고려 성종의 나이는 36세로 불혹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럼 배필인 소손녕의 딸 나이는 과연 몇 살이었을까? 그 나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추정할 수는 있다. 월국공주(소손녕의 부인)의 당시 나이는 20세였다. 따라서 소손녕의 딸 나이는 4~5세 정도, 어쩌면 더 어린 갓난아기였을지도 모른다.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있을 수 없는, 상당히 나이 차가 나는 혼인이었다. 그런데 실제 결혼 생활로 이어지진 못했다. 성종이 혼인을 요청하고 2년 후, 38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채충순과 주저의 충성과 절개
채충순(蔡忠順)은 고려의 관료로 개경 궁궐에 있었다.
그때 송나라의 장삿배가 들어와서 표문(表文)을 올렸는데 채충순이 보기에 문장이 정교하고 학식이 있었다. 채충순은 사람을 보내 표문 지은 사람을 불렀다. 그는 송나라 온주(温州) 사람 주저(周佇)였다. 채충순은 주저와 문장을 주고 받으며 이야기를 나눈 후, 주저의 재주가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채충순은 즉시 당시의 왕인 목종(穆宗, 재위 997∼1009년)에게 보고했고, 목종은 주저를 예빈성주부(禮賓省注簿)에 임명했다. 예빈성은 외국의 사신을 맞이하고 접대하는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었고, 주부는 종7품에 해당하는 직이다. 과거에 급제해야 임명되는 관직으로, 매우 파격적으로 임명된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이런 파격 인사가 꽤 흔했다.
   현대의 한국은 유교적 문화가 깊이 뿌리박혀 있는 나라이다. 그 시발점은 고려 광종(光宗, 재위 949∼975년) 때 도입된 과거제이다. 과거제가 시행되면서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아가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이었으므로, 과거를 볼 수 있는 신분의 사람들 대다수가 유교 경전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고, 유교 문화 역시 차츰 생활 속으로 침투하게 되었던 것이다.
   과거제를 도입하기 전에는 신분제를 바탕으로 관리들을 뽑았다. 그러다 보니 인재 풀이 매우 좁을 수밖에 없고, 특정 세력이 관직을 독점하게 되는 일도 생겼다. 시험으로 관리를 뽑는 과거제는 이전보다 훨씬 공정한 제도였으며, 다양한 인재를 뽑을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또한 특정 세력에 의지하는 일이 줄어드니 왕권이 강화될 수 있었다.
   이 과거제의 도입은 쌍기(雙兾)라는 관리가 광종에게 건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쌍기는 고려인이 아니었다. 그는 후주(後周) 2) 사람으로, 956년(광종 7년)에 사신단의 일원으로 고려에 왔다가 병에 걸려 고려에 머물렀다. 광종이 쌍기의 재주를 알아보고는 등용했던 것이다.
   쌍기가 고려에서 후대받자, 고려로 귀화하는 한족들이 크게 늘었다. 광종은 이들 중 학문적인 능력이 있는 자들을 후대하여 관직에 임명했고, 이들은 광종의 개혁 정책을 추진하는 세력이 되었다. 고려에서는 광종 이후에도 재능있는 한족들을 계속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 주저 역시 등용되었던 것이다.
   목종 12년(1009년), 고려에서 변란이 일어났다. 중추사(中樞使) 강조(康肇)가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顯宗, 재위 1009~1031년)을 새로운 왕으로 세웠던 것이다.
   거란은 고려의 왕이 교체된 것을 빌미 삼아 4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공했다(1010년). 거란군은 통주(평안북도 동림군) 근처 삼수채에서 강조가 이끄는 고려의 주력군을 격파하고, 고려의 성곽을 우회해서 개경까지 남하한다. 거란군이 개경까지 몰려오자 개경의 관료들 상당수는 남쪽으로 도망쳤고, 남아 있던 조정의 신하들은 항복할 것을 현종에게 건의했다. 이때 예부시랑(禮部侍郎) 강감찬이 일갈했다.

“지금의 일은 근심할 바가 없습니다. 단지 지금은 우리의 군세가 적어 적들을 상대할 수 없으니, 일단 예봉을 피해 시간을 번 뒤에 서서히 이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현종은 강감찬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나주로 몽진을 떠났다. 군사 50명과 비교적 젊은 관리들이 현종을 호종(扈從)했다. 그때 채충순과 주저도 있었다. 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개경을 떠나자마자 고려인들이 현종의 일행을 공격했다. 당시 고려 중앙 정부의 행정력이 지방 구석구석까지는 미치지 않았던 것이다. 창화현(경기도 양주시)에 이르러서는 지역민들의 공격에 왕을 따르던 관리들이 뿔뿔이 흩어질 정도였다. 대부분의 관리들은 현종을 버리고 살길을 찾아 도주했다. 그러나 채충순과 주저는 현종을 기어코 찾아 다시 합류했다. 나주로 가는 동안 여러 번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들은 끝까지 현종의 곁을 지켰다.

   채충순의 집안은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채인범(蔡仁範, 934∼998년)이라는 사람의 묘지명(墓誌銘)이 발견되면서 실마리를 찾게 된다. 묘지명은 죽은 사람의 행적을 돌에 새겨서 무덤 속에 넣은 것이다. 비석과 비슷한데, 비석은 무덤 근처에 세우는 것이고, 묘지명은 무덤 안에 넣는다는 것이 다르다. 채인범의 묘지명에 의하면, 그는 송나라 사람으로 970년(광종 21년)에 고려로 귀화했다. 묘지명의 내용을 연구한 결과, 채충순이 채인범의 아들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즉 채충순은 송나라계 고려인이었던 것이다.

채인범 묘지명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3)

포용함으로써 확대된 영향력
거란군은 개경까지 함락했지만, 퇴각하는 중에 고려의 장수 양규(楊規)를 비롯한 고려군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서 송나라 역사서인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編)』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때, 거란이 다시 대군으로 고려를 정벌했다. 왕순(현종)이 여진과 병사를 합쳐서 항거하여 거란군을 대패시켰다. 거란의 귀족과 병사, 수레중에 돌아온 것이 드물었다. 거란의 관리들도 태반이 전사했다. 이에 유주(幽州, 현재 북경)와 계주(薊州)에 영을 내려, 일찍이 관직을 구하려던 사람부터 조금이나마 글을 아는 사람까지 뽑아서 관리에 보충했다.’

   거란의 피해는 막대했고 사실상 패한 전쟁이었던 것이다. 거란의 자존심은 크게 상처받았다. 따라서 고려를 완전히 멸망시키려고 했다. 그리하여 1013년부터 매년 군대를 보내 고려를 침공했다. 1014년, 1015년, 1016년, 1017년…,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목사(木史)는 압록강 인근에 사는 여진족이었다.
   계속되는 전쟁에서 여진족들은 처음에는 주로 거란군에 가세해서 고려를 침공했다. 거란과 고려 사이에 끼인 존재들인 이들은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 어느 편에든 가담을 해야 했다. 그렇다면 더 강한 쪽에 붙는 것이 이익이 되는 일이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되자 이들이 입는 피해는 극심해졌다.
   목사는 어느 날 결심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일족을 데리고 고려로 망명을 했다. 목사뿐만 아니라 많은 여진인들이 고려로 넘어오거나 협조했다. 거란의 편에 서는 것보다 고려의 편에 서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목사는 고려의 구주성(평안북도 구성시)에 거주하게 되고, 고려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그리고 고려군과 더불어 거란군에 맞서 싸워 전공을 세운다.
   1018년 12월, 소배압(蕭排押)이 10만 군사를 이끌고 또다시 고려를 침공했다. 현종은 소배압이 침공해 오자, 강감찬을 고려군 총지휘관인 상원수(上元帥)로 임명했다. 소배압은 강감찬의 주력군을 피하고 고려의 모든 성곽을 우회해서 개경까지 진격했다. 개경까지 오면 현종이 또다시 도망갈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현종의 준비는 철저했고 개경을 강력히 사수했다. 이때에도 채충순과 주저는 현종의 곁을 지켰다. 거란군은 회군하게 되고, 강감찬은 회군하는 거란군을 추격한다. 결국 1019년 2월 1일, 구주성 동쪽 들판에서 두 나라 군대가 마주쳐 전투가 벌어지게 되고 이 전투를 ‘구주대첩’4) 이라고 한다.

‘거란 군사가 구주를 지나니, 강감찬 등이 동쪽 들판에서 맞아 크게 싸웠는데 서로 막상막하로 승패가 쉽게 결정되지 않았다. 이때 김종현이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러 왔는데, 갑자기 비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자 우리 군사가 기세를 타서 분발하여 적을 공격했다. 곧 거란 군사가 패하여 북쪽으로 도망하니 우리 군사가 뒤쫓았다. 죽어 널부러진 거란군 시체가 들판을 덮고, 사로잡은 군사와 말‧낙타‧갑옷‧투구‧병기는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었으며, 살아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뿐이었다. 거란 군사의 패전함이 이때와 같이 심한 적은 없었다.’

   이때 목사도 고려군의 일원으로 구주대첩 기간 동안 거란군에 맞서 싸웠다. 그 당시 고려군에 가담한 여진족의 인원수는 상당했다. 거란이 모든 국력을 동원해 고려를 멸망시키려고 했지만, 현종을 비롯한 고려인들은 그것을 막아냈고 그 일에는 많은 여진족들도 함께했던 것이다.

   구주대첩 이후로 고려는 북방을 계속 개척했다. 1031년에는 천리장성을 쌓았고, 1044년에는 동쪽 국경인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군 지역에 성을 쌓아 개척한다. 이때 고열(高烈)이라는 장수가 공을 세우는데 그의 관직은 병부상서(兵部尙書)였다. 병부상서는 지금의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관직이었다. 그런데 고열은 여진족(흑수말갈족) 출신이었다. 지금에 비유하자면 일본인이나 중국인 같은 외국인이 한국의 국방장관이 된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여진족 출신이 국방장관이 될 정도이니, 그 아래로는 수많은 여진족들이 고려의 관직을 받았을 것이다. 특히 군대 내에는 여진족의 숫자가 상당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열은 사공(司空)이라는 관직까지 올라간다. 사공은 정1품의 최고위직이었다. 1056년에 고열이 사망하자, 당시 고려의 왕인 문종(文宗, 재위 1046∼1083년)은 3일간 조회를 중지하고 모든 관리들에게 장례식에 참석할 것을 명했다. 최고의 예우를 한 것이다. 사람들이 고열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다고 한다.
   고려에서 정책적으로 여진족들을 후대하자, 고려의 동북 방면에 사는 여진족들이 자신의 마을을 고려의 행정구역에 편입해 달라고 요청했다. 부족 단위로 살아가는 여진족들 사이에는 서로 간에 죽고 죽이는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고려의 체제 속에서 안정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이들은 거란보다 고려를 택했는데, 이들에 대한 대우가 고려 쪽이 훨씬 나았던 것이다.
   고려에서는 여진족 마을에 고려식 군현을 설치했다. 그렇지만 다양성과 관습을 존중하여, ‘여진족 사이에 서로 죄를 범한 경우 각각 부족의 관습대로 처리한다.’는 법령을 제정하여 그들을 관리했다. 여진족 마을들은 속속 고려에 편입되었다. 고려의 영향력은 크게 확대되었고 『고려사 지리지 서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서북쪽 국경은 고구려에 미치지 못했으나, 동북쪽은 고구려를 넘어섰다.’

   고려의 이 지역 영향력은 여진족들이 금나라(1115∼1234년)를 세울 즈음까지 계속되었다.
송나라 사람이 고려에서 거란군을 보다
1123년(고려 인종 원년)에 송나라의 사신단이 고려에 온다. 그 사신단 중에 서긍(徐兢)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고려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기록한 『선화봉사고려도경』이라는 책을 지었다. 보통 『고려도경』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서긍이 개경에 왔을 때, 기병 수십 기가 앞서 달려가는 것을 보고 이렇게 기록했다.

‘앞에서 인도하는 기병 수십 기(騎)를 보았는데, 말방울을 울리며 치닫고 안장과 등자 사이에서 날렵한 동작을 취하는 것이 경쾌하고도 민첩하였다. 이것은 무술을 자랑하려는 것이다.’

외국 사신 앞에서 경쾌한 기마술을 자랑하는 고려 기병들을 보다가, 서긍은 이들의 옷차림에 차이가 있음을 발견한다.

‘기병들의 복식이 한결같지 않다. 긴 두건을 쓴 기병들은 모두 고려 사람이었다. 머리를 깎고 두건을 정수리에 딱 붙게 쓴 것은, 듣건대 거란 사람들이라고 한다.’

   고려인들과 거란인의 두건이 달랐던 이유가 있다. 고려인들은 상투를 틀었기 때문에 정수리가 솟은 두건을 쓰지만, 변발을 한 거란인은 상투가 없기 때문에 정수리에 딱 붙는 두건을 썼던 것이다.

고려의 두건(좌) 거란의 두건(우)
출처: 상상화 - 필자 제공


   한국에서는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외관상 명백히 차이 나는 혼혈인들은 한국 국적임에도 군대에 갈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시기의 고려에서는 외관상 명백히 차이가 나는 거란인들도 고려군에 복무했으며, 변발과 같은 거란인의 전통을 그대로 존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사』에는 고려에 살고 있던 위초(尉貂)라는 거란인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그는 아버지가 병에 걸리자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먹여 아버지의 병을 치료했다. 이 사실을 들은 당시 고려의 왕 명종(明宗, 재위1170∼1197년)은 그를 크게 칭찬하며 포상했다.

‘위초의 효성은 고금에 으뜸이다. 효는 모든 행실의 근원이라 하였고, 또 충신은 효자의 집안에서 구한다고 하였으니, 위초의 효성은 상을 받아 마땅하다.’

   이때 위초의 관직은 산원동정(散員同正)이었다. 산원은 현대로 치면 중위나 대위 정도의 군 장교직이었다. 거란인이 장교로 복무할 정도로 고려 군대는 개방적이었다.

   구주대첩 이후 고려에 수많은 거란인이 살게 되었으므로 그들만의 집단 거주지도 있었다. 마치 현대의 미국에 있는 차이나타운이나 코리아타운과 같았다. 다음은 『고려사』의 1117년 기록이다. 당시 고려왕 예종(睿宗, 재위 1105∼1122년)은 남경으로 순행을 갔다.

‘8월, 왕이 남경(南京)에 행차하였다. 왕이 남경에 도착하자, 귀화해 남경 부근에 거주하는 거란인들이 자기 고유의 가무(歌舞)와 잡희(雜戱)를 공연하며 어가를 맞이하니, 왕이 행렬을 멈추게 하고 관람했다.’

   남경은 지금의 서울특별시이다. 고려 시대에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지역에 거란타운이 있었던 것이다. 수만 명에 달했던 이들은 긴 세월을 지나며 한국인의 일부분을 구성하게 되었다. 거란족은 기본적으로 한국인과 같은 황인종이지만, 유목민답게 혼혈이 많이 이루어져서 외모가 지금의 위구르인이나 터키인처럼 생긴 사람이 꽤 있었다.
   이제 거울을 한번 보자. 만일 자신의 코가 높고 이마가 솟아 있다면 거란인의 후예일 수도 있다.
문화 교류의 진수, 진병대장경과 고려 청자
당시는 고려나 거란, 송나라 모두에 불교가 융성하던 시절이었다. 상호간에 불교문화의 교류가 이어지는데, 그중의 대표적인 것이 ‘대장경판(大藏經板)’이다. ‘대장경판’과 ‘대장경’은 엄밀히 말하자면 개념의 차이가 있다. ‘대장경판’은 불교 경전과 관련된 내용을 새긴 목판(木板)이고, ‘대장경’은 그런 내용이 적힌 책이다. 그러니까 ‘대장경판’으로 인쇄한 것이 ‘대장경’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대체로 혼용해 쓴다. 따라서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면 대개 ‘팔만대장경판’을 지칭하는 것이다.
   ‘대장경판’은 먼저 송나라에서 만들어진다. 이 대장경을 ‘북송관판대장경(北宋官版大藏經, 971∼983년에 간행)’이라고 한다. 이 ‘대장경판’의 인쇄본은 991년(성종 10년)에 고려에도 전해졌다. 그런데 1010년 거란군의 침공으로 개경까지 함락당하는 등 큰 위기를 겪자, 고려 왕 현종은 ‘대장경판’을 직접 만들라고 지시했다. 당시 불교는 고려의 국교나 다름없었고, 이런 대형 불교 사업을 통해 백성들의 호국 일념을 고취하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장경판을 ‘진병대장경판(鎭兵大藏經板)’이라고 한다. ‘진병대장경’의 뜻은 ‘전쟁을 진압하는 대장경’이라는 뜻이다. 현종의 바람대로 고려인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결국 거란군을 막아 냈다. 이 ‘진병대장경판’은 지속적으로 내용을 추가하게 되는데, 후에 거란에서도 ‘대장경판(1031∼1054년 간행)’이 만들어지자, 이 ‘대장경’의 인쇄본도 수입하여 내용을 보충했다. 거란을 막고자 했으나, 거란의 문화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 이다.
   국가적인 상징물이었던 ‘진병대장경판’은 안타깝게도 몽골 침략기(1232년)에 불에 타 버리고 말았다. ‘진병대장경판’이 불에 타 버리자, 다시 만든 것이 그 유명한 ‘팔만대장경판’인 것이다. ‘진병대장경’은 처음 만든 ‘대장경’이라는 의미에서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라고도 불리며, ‘팔만대장경’은 다시 만들어진 ‘대장경’이라는 의미에서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라고도 불린다. ‘팔만대장경’은 ‘진병대장경’, ‘북송대장경’, ‘거란대장경’을 면밀히 참고해 만들어졌다.

   고려청자는 9세기경 당나라의 도자기에 영향을 받아 탄생하게 된다. 거란의 도자기는 한족 도공들의 기술을 흡수하여 발전을 이룬다. 구주대첩(1019년) 이후 고려와 거란은 다시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게 되고 서로 문화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다음은 거란 도종(道宗, 재위 1055∼1101년)의 황후인 선의황후(宣懿皇后) 소관음(蕭觀音, 1040∼1075년)이 지은 시의 일부분이다.

展瑤席,花笑三韓碧。
笑妾新鋪玉一床,
從來婦歡不終夕。
展瑤席,待君息


아름다운 옥으로 만든 자리를 깔아 놓으니,
꽃은 ‘삼한의 푸르름’을 비웃네.
미소 짓는 첩은 새로이 옥으로 만든 상을 놓으며,
지어미의 기쁨은 저녁 내내 끊이지 않네.
아름다운 옥으로 만든 자리를 깔아 놓고,
임금이 오셔서 쉬기를 기다리네.


   여기에서 ‘삼한의 푸르름(三韓碧)’은 시 전체의 의미를 고려했을 때 고려청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소관음은 자신의 ‘옥으로 만든 자리의 푸른빛’이, ‘고려청자의 푸른빛’보다 더 좋다고 말하고 있지만, 역으로 생각해 보면 거란 황후가 시샘할 정도로 고려청자가 거란에서도 명품으로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청자가 이렇게 짧은 기간 내에 발전할 수 있는 이유는, 고려 도공들이 기술을 계속 발전시킨 것이 가장 큰 원인이겠으나, 다른 이유도 있었다. 서긍의 『고려도경』 제19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예전에 고려가 거란 포로 수만 명을 잡았는데, 그중에 기술이 정교한 자들을 왕부(王府)에 머무르게 하여 근래에는 도자기를 비롯한 그릇과 의복이 더욱 정교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긍이 말한, 거란 포로 수만 명은 구주대첩에서 사로잡힌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고려는 그들을 흡수하여 기술의 발전을 이루어냈다. 특히 고려청자는 거란의 도자기로부터 굽는 법, 장식 기법과 문양 등을 수용하여 비약적인 발전을 거두게 된다. 5)

흡사하게 닮은 고려와 거란의 도자기 - 청자 투각 용머리장식 붓꽂이(고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6)


흡사하게 닮은 고려와 거란의 도자기 - 요삼채 삼채어룡형필가(거란)
출처: 박병선(2013) 7)


   건국 당시부터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흡수하며 발전했던 고려는 11세기 중기 이후에는 정치‧문화‧군사적으로 가장 완숙한 전성기를 맞게 된다. 고려가 세계에 ‘코리아’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이다.
다양성, 합리성, 투명성
얼마 전 경찰, 인권 활동가, 통역사 등으로 활동하며 유리 천장을 깨뜨린 ‘이주 여성’들에 대한 BBC코리아의 기사를 접했다.8) 그동안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는 데 폐쇄적이었던 한국이 속도는 느리지만 분명 변화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사람들이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종종 과거에서 오늘의 답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양성을 폭넓게 인정하는 사회일수록 합리성과 투명성 역시 높아지며 더 많은 역량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
   다양성을 폭넓게 받아들일 때 고려는 성장했고, 다양성이 축소되고 사회가 경직되자 고려는 쇠락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세계적인 경제·문화 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다. 다양성을 더욱 폭넓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면 이 성장은 지속될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에게 고려의 역사는 하나의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목차
다양성을 통해 이뤄 낸 고려의 최전성기
텔레비전과 다양성: TV가 전달하는 다양한 가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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