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내악,
다양한 울림이 공존하는
음악공동체
조은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실내악은 벗들의 음악이다. 2중주부터 9중주까지 가깝게 둘러앉아 또아리를 이룬 연주자들은 숨소리와 눈빛을 은밀히 교환하며 서로에게 집중한다. 다양한 성부가 동시에 어울리는 음악적 대화를 나누다 보면 연주자들 사이 친밀한 우정이 자연스레 싹트곤 한다. 함께 연주하는 멤버와 사사로이 다퉜더라도 서로의 소리를 들으며 합을 맞추게 되니 일상의 앙금이 눈 녹듯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처럼 다채로운 악기들이 주고받는 실내악의 친밀한 대화는 갈등을 무력화시키는 환대의 정신을 담고 있다. 작곡가들도 실내악을 작곡 할 땐 관객을 사로잡을 연주효과 만큼이나 연주자들의 음악적 우정을 섬세히 고려한다. 서로의 교감을 존중하는 합주의 즐거움은 실내악의 오래된 미덕이라 할 수 있다.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독주에 비해, 앙상블을 이루는 협업은 소통과 이해가 최우선이다. 몇 해 전 〈슈만의 피아노 4중주 내림 마장조 작품 47〉과 〈브람스의 피아노 5중주 바단조 작품 34〉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현악 4중주단과 리허설을 함께 했었다. 홀로 연습하던 독수공방으로부터 해방되어 뛸 듯이 기뻤다. 반쪽짜리 대본에 의지해왔던 배우 마냥, 청각적 상상으로나 떠올리던 상대편 목소리를 실제로 들을 수 있어 설레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나를 제외하고 나머지 네 명은 오래 전부터 현악4중주단을 결성해 전문적인 활동을 펼쳐왔었다. 피아노와 현악기군의 이질적인 울림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리허설 내내 심신의 귀를 쫑긋 세웠다.
   리허설이 거듭될수록, 피아니스트인 나는 현악주자들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며 교감할 수 있었다. 바이올린 주자는 실내악의 매력을 이렇게 설명하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독주회가 무대 위에서 홀로 펼치는 고독한 ‘모노드라마’고, 오케스트라 연주가 대규모 인원들을 등장시키는 화려하고 장대한 ‘블록버스터’라면, 실내악은 주연 배우 네다섯이 펼치는 고도의 ‘심리극’이라는 것이다.
   실내악에서는 주·조연의 계급 구별이 없다. 모든 성원은 갈등의 직접적인 당사자다. 익명성의 거대한 음향 뒤에 숨어 있을 수도 없다. 내 악기의 개성적인 음색은 다른 주자의 목소리와 확연히 분별되어 들리기 마련이다. 그러니 클래식 음악애호가들이 몰입하게 되는 장르는 순차적 동선으로 연결되곤 한다. 처음엔 강력한 음향을 내뿜는 교향악에 압도되고, 이후 솔리스트와 대비를 이루는 협주곡에 경도되었다가, 다시 개별악기의 매력에 탐닉하는 독주곡으로 이어져, 결국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든 실내악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브람스:
시간의 흐름을 다루는 템포(tempo)의 다변성

<악보1> Brahms, J. (1985). Piano Quintet f-minor, op.34 2nd mov. (Andante un poco adagio). Ed. Eulenburg.


브람스 피아노 5중주를 리허설하기 위해 모인 첫날이었다. 다채로운 사운드가 입체적으로 교차하니 연습실의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서로 간의 악절이 충돌하거나 이구동성으로 에너지를 상승시킬 때, 아래팔의 솜털이 곤두설 정도로 음악적 카타르시스를 느꼈는데, 혼자서 모든 것을 독백하는 원맨쇼와는 또 다른 차원의 즐거움이었다.
   2악장으로 넘어가던 순간 비올리스트가 불쑥 말을 건넸다. “템포 지시가 딱 브람스답지 않아? 안단테면 안단테고, 아다지오면 아다지오일 것이지. 안단테에운 포코 아다지오까지 붙였잖아. 거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비올리스트의 일성에 다른 멤버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브람스가 악보에 기입한 안단테 운 포코 아다지오(andante un poco adagio)란 지시는 ‘안단테라도 약간 아다지오스럽게’를 의미한다. 서로 다른 템포에 양다리를 걸친 모호한 지침이 아닐 수 없다. 다른 악장에서도 브람스가 템포를 지시하는 습관을 일별하다 보면 그가 얼마나 신중하게 템포를 다뤘는지 깨닫게 된다.
   4악장을 시작하는 장면, 브람스는 소스테누토(sostenuto, 깊고 무겁게)라고만 지시하지 않고 포코(poco, 조금만)를 앞에 덧붙인다. 연주자들은 헷갈리기 시작한다. 작곡가가 의도한 적절한 중도는 어디까지일까. 음악의 흐름에 내맡겨 깊이 몰입하다가도 혹시 과하게 가라앉은 것은 아닌지 늘 스스로 반문해야 한다. 서주에 이어 본격적인 본론이 시작되는 순간도 브람스는 알레그로(allegro)라고 선명히 요구하지 않는다. 뒤이어 마 논 트로포(ma non troppo, 그러나 과하지 않게)라고 소심히 토를 단다. 그뿐인가, 결승점을 향해 장렬히 산화해야 할 코다(coda) 부분에서도 프레스토(presto)라고 간단히 지시하면 될 걸, 또다시 마 논 트로포라고 사족을 붙인다. 질주하는 사람의 뒷덜미를 잡는 격이다.
   그러니 누군가는 브람스 음악을 심형래 버전의 ‘루돌프 사슴코’에 빗대기도 한다. ‘달릴까? 말까?’ 애간장을 태워도 너무 태운다는 것이다. 나는 그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템포라는 음악적 장치를 통해 브람스가 시간을 다루는 방식은 일변도의 흐름이 아니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다변적 시간성에 기반을 두고 음악의 흐름을 전개했다. 브람스 특유의 신중함은 그의 〈교향곡 1번〉 4악장에서 또 한번 강화된다. “알레그로 논 트로포 마 콘 브리오(allegro non troppo ma con brio): 알레그로, 과하게는 하지 마. 그래도 생기는 있어야!”
   그러므로 앙상블의 협업에 있어 가장 먼저 조율되어야 할 것은 다양한 ‘시점’에 관한 동의였다. 각양각색의 다이내믹과 템포에 음악적인 변화를 주고자 할 때, 어느 지점부터 몰고 갈 것인지, 어디까지 혹은 얼마만큼 크고 작아질 것인지에 대한 공감대가 아주 적확하게 형성되어 있어야 했다. 음악이 ‘시간 예술’임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인데도, 독주로 고군분투하며 혼자 모든 것을 감행해도 될 때는 미처 몰랐던 진리였다.
다양한 선율을 동시에 듣는
음악적 순간
연주자들은 실내악을 통해 다양한 성부와 음색을 듣는 귀를 효과적으로 훈련할 수 있다. 자신의 음악뿐만 아니라 모든 악기들의 소리를 동시에 들으며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되는데, 이때 내가 지금 주선율을 연주하고 있는지, 아님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주선율을 보조해야하는지, 혹은 주선율과 동등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대선율로 기능하는지 등을 매 순간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독주곡처럼 자신의 기분만 따르며 연주할 수 없다. 다양한 선율을 동시에 듣는 음악적 순간은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통찰하는 마음의 근육을 단련시킨다.
   피아노와 현악4중주의 협업으로 이루어진 ‘피아노 5중주’는 4중주에 비해 현악기군으로부터 피아노가 완벽히 독립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보통의 화음은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등 4개의 성부로 구성되는데, 이때 현악 4중주단은 네 개의 층위를 각각 제1바이올린, 제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에 의해 완성할 수 있다. 하지만 피아노 4중주의 경우, 현악기 주자가 3명이어서 모자란 성부 하나를 피아니스트가 바쁘게 채워야 한다. 현악기의 결핍을 건반 악기로 메꾸다 보니 음색의 조화가 삐걱거려 어긋나기도 한다. 반면 피아노 5중주는 현악기군이 이미 완성된 화성을 형성한다. 때문에 피아니스트로서는 독립적이고도 자유로운 행보가 가능해진다. 어느 때는 마치 협주곡을 연주하는 솔리스트처럼 스트링과 당당히 대적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거침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브람스 피아노 5중주의 마지막 악장, 포코 소스테누토-알레그로 논 트로포(poco sostenuto-Allegro non troppo)를 리허설 하던 때 특히 첼리스트와 열띤 논쟁을 나누었다. 가볍고 귀엽게 동동거리던 춤사위가 육중한 하중을 덧대어 전투력을 더하는데, 여기 투쟁적인 악상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피아니스트의 왼손과 똑같은 선율로 움직이는 첼리스트의 동선이었다. 이렇게 저음역을 중음으로 덧대어 연주하면 음색 자체의 하중이 무겁고 두터워질 수밖에 없다. 브람스가 화성을 배치하는 방식은 낮은 음역에 빽빽이 몰려 있다. 반면, 그와 동시대에 활동한 슈만은 브람스에 비해 화성의 배치가 열려 있어 공기의 순환이 자유롭다.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악절에서도 슈만이 고음역의 악기를 활용해 화려한 공중전을 선호한다면, 브람스는 첼리스트를 앞세워 육중하게 움직이는 지상전을 선호하는 것이다.
   마지막 악장은 론도(Rondo)의 유장한 반복을 거치며 결승점인 코다에 이른다. 악기들은 낮은 음역부터 시작해 천천히 자신의 공간을 확보하며 상승한다. 브람스가 템포를 다루는 방식은 결승점을 향해 질주하는 순간에도 여실히 드러나, 앞서 언급했듯 프레스토라 명료히 지시하지 않고, 논 트로포를 부연하며 연주자에게 다변적 시점의 ‘절제’와 ‘객관성’을 요구한다. 차곡차곡 쌓아온 갈등을 폭발시켜야 하는 순간, 그의 음악은 불꽃을 발하며 산화하지 않는다. 대신 목구멍 뒤로 삼켜 버린다. 이렇게 내장에 쌓인 불발탄은 억제된 듯 응결된 브람스 특유의 악상이라 할 수 있다.
실내악,
음악적 얼굴이 살아있는 입체적 음향
‘음악적 얼굴’이 살아있는 실내악은 익명으로 군집을 이루는 오케스트라와 다르다. 개별적 정체성을 포기하고 하나의 음악을 위해 서로 동화되어야 하는 오케스트라에 비해 실내악은 다양한 악기의 개성이 생생히 살아 있는 개인주의자들의 조합과 같다. 그러므로 오케스트라가 음악적 사회라면 실내악은 대화 공동체에 빗댈 수 있다. 오케스트라는 지휘자가 주도적으로 이끌지만 실내악은 연주자의 집단지성이 작동한다. 음악적 의견일치를 위해 개별 단원 모두가 실험과 타협, 조정과 다툼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 어떠한 위계 없이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다. 이렇듯 직접 민주주의의 이상적 실현은 실내악이라는 음악 공동체를 통해 구현될 수 있다.
   공간 혹은 머릿수의 차이는 음악의 내용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거대한 콘서트홀에서 100여명의 음악가들이 한꺼번에 무대에 오르는 교향곡의 경우, 대중적 소구력을 갖춘 멜로디에 작곡가의 자의식이 거창하게 투영되곤 한다. 반면 실내악은 관현악처럼 크고 화려한 음향만 쫓지 않는다. 귀에 쏙 박히는 선율의 기득권을 용납하지 않은 채, 다양한 성부를 평등하게 조화시키면서 청중으로 하여금 협소하고 얄팍한 음악적 취향을 극복케한다.
   현악4중주단과 합주를 이루는 동안, 피아니스트로서는 낯선 광경을 종종 맞닥뜨리기도 했다. 현악기 주자의 귀는 다른 악기군보다 훨씬 더 섬세하고 예민하다. 모든 낱낱의 음정을 스스로 조율해야하기 때문이다. 건반악기 주자는 조율사가 만든 음정을 그대로 수용하며 하나의 음을 하나의 건반에 대칭시키지만, 현악기 주자는 지판을 짚는 손가락의 미세한 차이, 0.01의 미세한 거리 혹은 0.01의 세밀한 각도에 따라 같은 음이라도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다. 악보에 ‘솔’음이 그려져 있다면, 피아노에서 솔은 솔일 뿐이지만, 현악기에선 밝은 솔 혹은 그보다 살짝 낮은 솔이 가능하다.
   음정뿐만 아니라 현악기 주자들은 아티큘레이션(articulation)과 프레이징(phrasing)을 ‘보잉(bowing)’을 통해 섬세히 다듬어 나갔다. 말총으로 제작된 활을 아래로 내려 그을 건지, 아님 위로 올려 그을 건지, 음가는 어느 음표까지 지속시킬 건지, 다양한 토론을 통해 합의된 보잉이 피아니스트에게는 손가락 번호와 페달링을 정밀히 다듬는 기초공사에 비견할 만했다.
슈만:
이질적 물성이 서로를 지탱시킬 때
슈만의 피아노 4중주 ‘안단테 칸타빌레(andante cantabile)’ 악장을 리허설 하려는데, 첼리스트가 낮게 속삭였다. “피아노는 이런 소리를 낼 수 없어. 현악기여서 가능하지.” 한숨을 토하듯 현악기의 울림이 바닥으로 털썩 내려앉자 바이올린 선율이 중력을 거스르며 포르타멘토(portamento: 한 음에서 다른 음으로 옮겨 갈 때 미끄러지듯이 연주하는 방법)로 떠올랐다. 단 세 마디의 짧은 도입부인데도 촉촉한 감성을 일거에 무장해제 시켜놓는 순간이었다.

<악보2> Schumann, R. (2000). Piano Quartet Eb-Major, op.47 3rd mov. (Anadante cantabile). Ed. Peters.


   서주에 이어 마음을 어루만지는 첼로 선율이 등장한다. “이 음악을 들을 때면 중년의 여인이 떠올라. 빛바랜 사랑을 쓸쓸히 회상하는 장면처럼…….” 비올리스트의 언급에 나는 첼로의 애절한 음색이 자칫 신파로 연결될지 모른다 경고한다. 슈만은 이 짤막한 선율에 7도 음정을 두 번이나 포함시켰다. 선율작법에 있어 ‘7도’는 감정의 불안한 동요를 의미한다. 마치 밀물과 썰물처럼 감정의 파고가 크게 일렁거리는 선율을 이번에는 바이올린이 한 옥타브를 높여 이어 받는다. 나무의 울림이 자아내는 호소력이 한층 더 고양될 때 피아노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 피아노의 잔잔한 반복음과 부드럽게 에워싼 화성은 현악기의 절절한 토로가 신파로 매몰되지 않도록 의연히 중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감정은 고양되더라도 난파되지 않아야 한다. 이렇듯 피아노와 현악기의 물성은 서로 이질적이나 동시에 서로를 지탱시켜 준다. 음향의 다양성은 실내악의 깊이를 배가시킨다.
   폐부를 찌르는 듯한 현악기의 직접적인 호소력에 비하면, 피아노는 중성적이고 객관적인 목소리를 지닌 악기다. 슈만은 앞서 전개된 주선율을 피아노의 음색에 최적화시켜 변형한다. 리듬은 엇박으로 해체되고 음정의 폭도 점진적으로 움직이는데, 심장을 톡톡 건드리는 듯한 피아노의 악상은 한곳에 머물지 못한 채 부유하고 방황한다. 이때 비올라의 중음역이 목소리를 덧대어 피아노를 돕는다. 여인의 쓸쓸한 ‘현재’가 현악기로 표현됐다면, 피아노가 바통을 이어받는 이 부분은 여인이 애절히 회상하는 찬란한 ‘과거’일 듯도 하다.
먼 거리 낯선 조성,
과감한 접합
‘안단테 칸타빌레’ 악장의 구조는 A-B-A'라는 전형적인 3부분 형식(ternary form)의 골격을 지닌다. A로 둘러싸인 B부분은 피아노와 현악기가 공히 차분한 호흡으로 전개된다. 선율의 수직적 굴곡보다는 화성의 완만한 수평에 기대어 음악을 이어가는데, A가 인간의 감정을 깊숙이 들춰내 보였다면, B는 자연의 풍광을 멀리 관조하는 듯한 양상이다. 그 공간적 거리를 널찍이 떼어놓기 위해 작곡가는 먼 거리의 조성을 선택했다. 플랫(♭)이 2개 붙은 내림 나장조의 A부분은 돌연, 플랫이 6개 붙은 내림 사장조의 B부분으로 연결되는데, 가까운 조성의 동질성에 기대기보단 낯선 문화의 유입에 비견할만한 먼 거리 조성, 그 과감한 접합을 시도한 것이다. 기존의 관성을 흐트러뜨린 작곡가의 실험정신 덕택에 연주자와 감상자는 날 것과 같은 일탈을 경험할 수 있다.
   음악은 다시 A'로 이어진다. A'는 초장에 등장했던 A와 똑같은 외양이 아니다. B의 시공간을 거치며 한 살 더 나이를 먹은 듯 성숙하다. 중년 여인의 토로는 화려한 음형으로 몸집을 불린다. 쓸쓸한 체념으로 퇴락하지 않기 위해 부산히 기운을 내어보지만, 그 파닥거림이 애틋하다. 흑백사진과 같던 회상은 감정의 파고를 넘나들며 총천연색 찬란한 빛으로 반짝인다.
   이제 여인의 애절한 사연을 마무리할 차례이다. 슈만은 통상적인 코다로 수렴하지 않았다. 이제껏 들려준 신파와는 달리 산뜻한 음색적인 실험을 감행하는데, 음악의 뿌리라 할 ‘배음(overtone)’의 원리를 십분 활용한다. 배음이란 한 음을 연주한다 해도 홀로 울리지 않으며, 실제로는 여러 음이 함께 공명하는 음악의 기본 원리를 일컫는다. 피아노가 음의 뿌리(기음)를 울리자, 공기 중에 숨어 있던 공명음들이 현악기에 의해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낸다. 개인적으로는 전 악장을 통틀어 가장 매력적인 악절로 꼽는 순간이다. 여인의 회상은 배음의 마법으로 인해 과거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이 풀려난다. 닫힌 회상이 아니라 열린 현재로 남겨둔 작곡가의 음악적 역량은 언제 들어도, 언제 연주해도 늘 탄성을 자아낸다.
목소리를 잃어버린
무성 피아노
실내악의 효율적 연습을 위해 스튜디오에 아담한 디지털피아노를 하나 더 들여놓았다. 본래의 용도라면 전기의 힘을 빌려 소리를 내지만 멀찌감치 플러그를 치워 버렸다. 그러니 88개의 건반을 제대로 갖췄어도 소리는 먹통일 수밖에 없다. 이 악기에 매료됐던 계기는 역설적이게도 ‘무성(無聲) 피아노’의 기능 때문이었다. 비록 말문이 막힌 피아노라 할지라도 흥미로운 연습방법들을 발굴하면서 이 악기와 소일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소리가 나지 않는 피아노와 연습하다보면 신체동작을 좀 더 면밀히 점검 할 수 있다. 보통의 악기에선 몸의 움직임이 음색의 굴레, 혹은 청각에 묶여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무성 피아노에서는 촉각과 근육이 전혀 새로운 인지를 일으키게 된다. 이 동작이 꼭 필요했던가, 왜 유독 이 악절에서 근육이 뭉치는가 등 소리에 매몰되었던 문제의식을 새삼 진지하게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억눌린 청각은 한편으론 전혀 새로운 ‘청각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물리적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마음 안의 울림은 무궁무진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들리지 않는 소리가 더 큰 울림을 일으킨다니 얼마나 매력적인 역설인가. 이렇듯 소리 없는 피아노의 또 다른 진가는 ‘경청’에 있다. 실내악처럼 여러 악기와 협업을 이루는 작품에선 더욱 반짝이는 역량을 발휘한다. 실내악 연주에서 큰 도움을 받고 있는 연습 방법은 다음과 같다.
경청,
다양한 목소리를 공들여 듣다
우선 실내악 음반을 풍성한 음량으로 틀어 놓는다. 이때 피아노 파트는 무성 악기로 온 힘을 다해 연주한다(그러나 들리지는 않는다). 이렇게 연습하다 보면 내 육중한 소리에만 매몰되어 있던 이기적 관성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다른 악기들의 여러 성부들이 생생히 살아나는 ‘입체적 경청’을 경험하게된다. 피아노는 본질적으로 고독한 악기라 푸념해 왔건만, 무성 피아노는 ‘함께 어울릴 궁리’를 제시해주니 놀라웠다.
   독주곡에도 이 연습 방법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다른 연주자의 음반을 걸어놓고 그의 연주가 마치 나인 듯 무성 피아노를 연주해본다. 내가 허투루 흘려버렸던 악절들이 의외의 순간에 빛을 발할 때, 템포를 밀고 당기는 루바토(rubato)가 나의 어조와 사뭇 다를 때, 내 고착된 습관을 돌이켜보게 된다. 내 해석과의 교집합이 반갑다가도 나와 전혀 다른 여집합이 참신하게 느껴져 스스로의 객관화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의 연주를 통해 그로 살아보는 것은 역지사지의 또 다른 경지와 같다.
   이처럼 소리가 나지 않는 침묵의 악기는 마음속 더 큰 울림을 일으키고, 다른 악기의 음색과 타인의 해석을 귀 기울여 듣게 한다. 다양한 목소리를 공들여 듣는 경청은 역지사지와 객관화를 이끌어낸다. 그러니 피아노는 매력적인 역설을 지닌 악기가 아닐 수 없다.
피아노,
다양한 음색을 너그럽게 품는 중립적인 음색
피아노와 마주 앉다 보면 종종 흑백의 조각들이 맞물린 거대한 가구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첼로처럼 부둥켜안을 수 없고 클라리넷처럼 감싸 쥘 수 없다. 그저 마주 보되 간격마저 유지해야 한다. 손끝을 통해 접촉하는 상대는 건반이지만 실제 소리는 건반 배후의 육중한 울림통에서 태어난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눈에 보이는 대상이 전부가 아닌데도 본질(울림통)을 잊고 외형(건반)에 현혹되는 것이다. 수많은 사운드가 담겨 있는 울림통 안에는 230여개의 현(鉉)이 70~300kg의 장력을 버티며 팽팽히 당겨져 있다. 건반과 연결되어 양털로 둘러싸인 망치(해머)는 이 현을 때려 소리를 낸다. 그래서 우리는 피아노를 타현악기(打絃樂器)라 분류한다.

출처 : https://pxhere.com/en/photo/1349108 ( CCL )


   피아노의 소리는 태어난 동시에 사라지는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다. 현을 때린 해머는 건반의 복귀와 상관없이 곧장 제자리로 돌아가 버린다. 그러니 건반을 계속 누르더라도 그 음은 사실상 소멸해 한 번 만들어낸 소리는 다시 돌이킬 수 없다. 한번 소리를 내고 나면 다른 악기처럼 강약에 변화를 줄 수도, 음을 지속하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피아노로 음을 연결한다는 것은 실제적으론 청각적 환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피아니스트는 이 착청(錯聽)에 맞서 분투한다. 건반을 누르기 전 소리의 방향을 미리 설정하면서 음과 음을 연결하는 레가토(legato)에 가장 많은 공을 들인다. 한 번 건반을 누르고 나면 끝, 가장 비음악적인 악기라 종종 투덜거리기도 한다.
   이런 투정을 상쇄하고도 남을 많은 장점을 피아노는 갖고 있다. 그중 하나가 다양한 음색을 너그럽게 품는 중립적인 음색이다. 음의 높낮이에 관계없이 피아노의 음색은 고르고 음량은 일정하다. 낮은 음역과 높은 음역을 연주 할 때 마치 다른 악기의 음색처럼 들리는 클라리넷 같은 악기와는 그래서 다르다. 중립적인 음색의 피아노는 어느 악기와도 잘 어울려 앙상블의 파트너로 늘 독보적이다. 노래하는 사람의 노고를 집어삼키지 않아 성악가와도 훌륭한 합을 이루고, 바이올린 소나타는 반드시 훌륭한 피아니스트를 필요로 한다.
   피아노는 10개의 손가락으로 연주하는 실내악 앙상블과 같다. 여러 층 위로 겹친 다성음악의 입체적 구조를 동시에 연주할 수 있는 덕택이다. 이를테면 바흐의 〈이탈리아 협주곡 바흐작품목록 971〉을 연습할 때, 나는 각 악장마다 다른 편성을 떠올리며 청각적 상상을 부추기곤 한다. 1악장은 독주(solo)와 합주(tutti)가 번갈아 대화하는 장면과 같고, 2악장은 통주저음을 타고 유려하게 펼쳐지는 오보에의 선율을 상상하며, 3악장은 찬란히 질주하는 쳄발로의 음색을 대응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곡가들은 음악적 실험을 위한 탁월한 도구로 꾸준히 피아노를 선택해왔다. 피아노 앞에서 작곡하면서 음색의 조합을 확인했고, 자신의 영감을 물리적 울림으로 번역했다. 몬테베르디(Monteverdi)는 피아노를 통해 불협화음을 발견했으며, 모차르트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피아노 없인 작곡을 할 수 없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바흐:
독립적인 성부의 다채로운 결합
피아니스트들에게 〈바흐의 평균율〉은 평생동안 꾸준히 일용해야 할 양식과도 같다. 이 악보집에서 바흐는 푸가(fuga) 형식의 완성을 이뤄냈다. 여러 독립적인 성부를 결합해 하나의 음악을 엮어내는 다채로운 가능성을 실험했는데, 다성음악의 모든 것을 성취한 동시, 모든 가능성을 소진시킨 것이다. 이때 연주자는 각기 다른 입체적인 음색으로 여러 성부를 동시에 연주할 수 있어야 한다. 바흐의 다성음악은 그래서 품이 많이 들고 만만찮은 공력이 필요하다. 모차르트나 베토벤처럼 오른손이 주선율을 이끌고 왼손이 펼친 화음으로 배경을 떠받치는 간결한 2분법이 아니다. 여러 성부를 동시에 연주해야 하니 양손은 복잡한 실타래처럼 뒤엉킨다. 뭉뚱그려 뭉개지지 않은 채 입체적 수평으로 개별 선율의 흐름을 풀어내려면 고도로 정제된 손끝 감각과 청각적 몰입이 필요하다.
   이렇듯 층층이 쌓여 수평으로 흐르는 바흐의 다성음악 중에서도 인간의 귀가 가장 현혹되는 성부는 아무래도 하늘을 활공하는 소프라노와 땅 속에 뿌리내린 베이스라 하겠다. 이 둘은 물리적 거리가 뚜렷해서 높은 음역은 오른손에, 낮은 음역은 왼손에 그 역할을 쉽사리 분담시킬 수 있다. 그런데 푸가 연주의 성패는 오른손과 왼손이 쉴 새 없이 주고받으며 연주해야 할 중간 성부에 있다. 알토와 테너 중간성부는 하늘의 소프라노와 땅 밑의 베이스를 아우르고 엮어내면서 선율의 교차를 세밀하게 직조한다. 소리의 직물은 중간 성부의 중재 없이는 파탄에 이르고 만다. 각각의 성부가 조화롭게 공명하기 위해서는 상대방 주제 선율에 부단히 조응하면서 자신을 조절해야 한다. 이처럼 중간성부의 조율, 상대방에 대한 부단한 조응, 스스로를 성찰하는 자기 조절은 바흐 평균율로부터 배울 수 있는 진리이자 미덕이다.
   그러므로 바흐의 평균율은 지금 이 땅에서 함께 들어야할 음악일지 모른다. 내 편과 네 편으로 분열된 양극화가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으니 말이다. 얼마 전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의 충돌에 대한 여론조사의 결과를 보고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46.1%. 그 찬반의 비율이 소수점 첫 자리까지 똑같았다. 중간성부의 교집합을 공유하지 못하니 갈등을 해결하고 합의를 도출하기가 점점 어려워지지 않던가. 게다가 온갖 정파적 미디어는 상대방의 선율엔 아예 귀를 닫아 버리고 내 성부의 의견만 계속 반복해 듣길 부추긴다.
   ‘너는 너의 말을 하고, 나는 나의 말을 한다.’ 어떻게 하면 이 동떨어진 괴리를 줄이고 중간 성부의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서로 설득이 가능한 세상을 구현할 수 있을까. 자기편 목소리만 반복해 강화하고 다른 편 목소리는 물리쳐 혐오하는 우리 사회에 한 사람의 음악가로서 바흐의 푸가를 공들여 들어보자 제안하고 싶다. 중간 성부의 조율과 상대방에 대한 부단한 조응과 스스로를 성찰하는 자기 조절의 미덕이 바흐의 음악 속에 생생히 살아 있으니 말이다.
바이올린 가족,
순혈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활로
얼마 전, 실내악 공연을 함께 감상한 지인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질문했다. 왜 바이올린과 첼로 소리를 구분하는 것이 플루트와 바순을 구분하는 것보다 더 어렵게 느껴지는 걸까. 현악기군의 동질적인 음색은 어떤 장단점을 갖고 있을까. 학생들에게서도 종종 받는 질문이다. ‘직업인인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라고 십분 공감하며 답변을 시작했다.
   실내악은 개성이 제각각인 악기들로 하나의 조화로운 음악을 추구하는 음향 공동체이다. ‘관현악의 팔레트’와도 같아서 어떤 악기를 어떻게 선택하고 조합시키느냐에 따라 천변만화(千變萬化)의 음색이 구현된다. 음악용어로는 ‘관현악법’이라 일컫는데 작곡가의 역량과 취향을 헤아리는 중요한 시금석이 되기도 한다.
   현악기군은 호흡으로 소리를 내는 관악 주자에 비해 템포의 구애 없이 음표의 군집을 능수능란하게 연주할 수 있다. 관악기는 금방 숨이 차고 입술근육이 쉽게 풀리지만, 현악주자의 활은 오랜 시간 연주해도 지치지 않는 덕택이다. 여러 음표를 흔들림 없이 연주할 수 있는 특성은 작곡가에게 크나큰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출처: https://pxhere.com/en/photo/956977 ( CCL )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 등의 악기로 구성된 현악기군은 크기만 다를 뿐 악기의 모양과 구조가 같아 ‘바이올린 가족’이라 통칭한다.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악기는 사람의 몸을 닮았다. 실제 명칭도 인체를 연상케 하는데, 탄성이 높은 가문비나무로 울림을 일으키는 앞면은 ‘배(belly)’라 불리고, 딱딱한 단풍나무로 악기를 지탱하는 뒤판은 ‘등(back)’이라 칭한다. 줄이 감기는 ‘목(neck)’ 부분도 사람의 몸을 떠올리게 한다.
   현악기는 몸통의 크기가 크고 현이 길어질수록 음역이 낮아진다. 바이올린보다는 비올라가, 첼로보다는 더블베이스가 낮은 소리를 낸다. 하지만 음색 자체는 동질적이다. 악기의 모양과 연주법이 같은 까닭이다. 비올라의 저음역과 첼로의 고음역, 이 두 음색을 분간하는 것이 종종 어렵게 느껴질 정도다. 오죽하면 같은 혈통의 ‘바이올린 가족’이라 묶이겠는가. 그만큼 현악기군의 소리는 서로 이물감 없이 섞여 풍성하게 어우러진다.
통일성에 기반 을 둔
다양성의 발현
실내악에서 현악기군의 동질성을 강화시키는 또 하나의 장치는 운궁법의 통일이다. 활을 아래로 내려 그을 땐 중력의 하중을 받아 짙은 소리가 나고, 위로 그을 땐 그보다 부드러운 소리가 난다. 똑같은 선율을 연주하더라도 한 음마다 각 활을 그어 개개의 음을 강조할 수 있고, 아니면 활을 연결해 음을 그룹화할 수도 있다. ‘아버지가 방에 들어 가신다’와 ‘아버지 가방에 들어 가신다’처럼 활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악상의 문맥이 천차만별 달라질 수 있다.
   현악기군의 음색은 오랫동안 들어도 싫증나지 않는다. 인간의 음성과 유사한 덕택이다. 말총으로 만든 활 털로 금속 현을 마찰해 소리를 내는 현악기 특유의 찰현 기법은 풍부한 배음과 표정으로 노래하는 사람을 모방한다. 그러므로 현을 튕겨서 소리를 내는 발현악기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그윽한 음색이 만발한다. 반면 피아노처럼 현을 때려 소리를 내는 타현악기는 현악기처럼 폐부를 찌르는 서정적 음색보다는 중성적 음색에 특화되어 있다.
   그러므로 현악기군은 특유의 동질적 음색 덕택에 작곡가는 바이올린에서 더블베이스까지 7옥타브의 넓은 음역을 자유로이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서로 닮은 목소리가 발성하는 균질적 사운드는 작곡가에게 극복의 대상이었다. 음향적 차이로는 다양성을 드러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대신 음악의 본질, 즉 선율과 리듬, 화성과 대위법 등에 집중해 활로를 찾았다. 통일성에 기반을 둔 다양성의 발현, 현악 앙상블의 윤리이자 미덕이 아닐 수 없다.
실내악의
인문주의적 사명
기말고사의 일환으로 감상시험을 진행했다. 강의 중 다뤘던 각 실내악 작품에서 주요 장면을 발췌해 30초에서 1분 정도 들려주고 그 악절이 어떤 곡에 해당하는지 물었다. 다양한 음악적 장면을 구별하기 위해 학생들은 실내악 작품을 반복해 들으며 여러 악기군에서 다층적으로 전개되는 악상을 구조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했다.
   실내악에선 ‘음악적 진술’이라 할 주제 선율이 빈번히 등장한다. 중요한 음악적 순간을 구분 짓는 이 주요 주제가 학생들의 기억에 뚜렷이 각인될 수 있도록 강의를 구성했다. 한번 기억한 선율은 악곡의 구조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다음 번 등장을 향한 청각적 기대감을 높이곤 한다. 실내악 1악장은 대개 소나타 형식을 기반으로 전개되는데, 주요 주제는 제시부의 첫 도입 이후 발전부의 다채로운 변형을 거쳐 재현부에서 재등장한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실내악을 통해 다시 만난 주제를 기억하는 능력을 훈련할 수 있다.
   강의 내내 가장 공들여 강조하는 것은 ‘경청’의 미덕이었다. 주선율이라는 강자의 주장뿐 아니라 쉼표 같은 약자의 침묵마저 존중하는 이 미덕을 때론 시민의식에 빗대기도 한다. 실내악에선 자신의 파트만 훌륭히 연주한다고 해서 충분할 리 없다. 듣지 않으면 다른 파트를 삼켜버리고 앙상블의 균형을 무너뜨리니 말이다. 듣기만 해서도 충분하지 않다. 내 소리가 음형의 파고에 익사당하지 않으려면 늘 깨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단원은 자신을 스스로 표현하는 동시에 다른 음악가들을 쉴 새 없이 경청해야 한다. 하나의 성부는 다른 성부에 의해 생기를 북돋게 되고, 음악엔 이들 성부들의 대립과 헌신이 공존한다.
   경청은 사회적 기능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대화의 경우 상대방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응답이나 코멘트를 이어가지만, 음악에서는 2개 이상의 성부가 동시에 대화를 하며 스스로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실내악 앙상블에서 여러 성부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은 여러 견해를 동시에 듣고 이해하는 능력으로 진화할 수 있다.
   실내악의 모든 악기군은 각 성부의 개별성을 존중하면서 입체적인 통합을 지향한다. 비단 내 파트뿐만 아니라 서로가 몰두한 것을 귀 기울여 듣다 보면, 다른 성부의 자유와 개성을 수용할 여력이 생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내악을 통해 인문주의적 사명을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의 개성과 자유를 드러내면서도 서로의 다름을 유지하고 존엄성을 인정할 수 있으니 말이다. 다양한 성부들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이 음악적 유토피아는 소음의 소란이 난무하는 현대사회에 유의미한 이정표를 제시해 준다. 다양성의 조화로운 공존, 그 실현 가능성을 실내악 앙상블은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 증명해왔다.
목차
생활툰: 재구성된 일상의 다양성
실내악, 다양한 울림이 공존하는 음악공동체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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