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후 삶이 시작된다
이수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종양내과 교수.
아흔이 넘은 외할머니는 목포에서 혼자 사셨다. 매일 새벽 미사를 다니고 성서를 통독하고 성서 필사를 위해 필기감 좋은 볼펜을 사러 문방구를 돌아다니는 것이 취미. 결국 91세의 나이에 구신약 성서를 두 번 필사하여 성당에 제출하셨다. 아파트 현관에는 전국 각지에서 살고 있는 자식들 집주소가 적힌 택배용지가 쌓여 있어서 계절마다 나오는 싱싱한 과일, 생선을 손질해서 자녀들에게 보낼 때 택배 기사가 갖다 붙이기만 하면 되게 준비해 두셨다. 자식들이 매달 보내주는 용돈을 모아 여름 휴가 때 자식들과 함께 가는 여행 경비를 통 크게 당신이 다 내는 해도 있었다. 자식들에게 인기 만점. 큰 아들을 먼저 떠내 보낸 할머니는 자식이 먼저 갔는데 오래 살아 뭐하냐며 아파도 병원에 잘 가지 않았다. 걷는 게 불편해서 무릎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관절과 관절 사이의 공간이 없어질 정도로 관절이 다 닳아버려서 통증을 못 느끼는 지경이 됐다고 하셨다. 그러면서도 나이를 먹으니 배가 나와서 큰일이라며 TV 보며 매일 요가도 하고 물구나무 서기도 하면서 열심히 건강관리를 하셨다. 습관처럼 ‘나이 너무 많이 먹었어. 빨리 죽어야지’ 말하면서 매일 열심히 운동하셨다. 동네 사람 누군가에게 홀려 3백만원이나 하는 찜질매트를 사고, 써보니 좋다며 자식들한테까지 사서 보내주는 거 빼고는 정말 멋진 할머니였다.
   그러던 어느 가을, 할머니께서 서울에 오셨다. 숨이 좀 찬다며 병원에 가보고 싶어하셨다. 흉부 엑스레이가 온통 허옇다. 할머니의 폐는 공기가 아닌 뭔가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 엑스레이 한장 만으로도 폐암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94세. 약간 숨찬 것 말고는 암에 의한 증상이 없었다. 이모, 이모부, 외삼촌 등 가족들과 상의하였고 암 관련 검사나 치료는 아무것도 하지 말자고 결정했다.
   외할머니에게 암이라는 걸 어떻게 얘기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미적미적 며칠을 보내던 중 할머니가 갑자기 의식을 잃었다. 뇌 MRI를 보니 정상 뇌 실질보다 암이 전이되어 공동화된 뇌병변이 훨씬 더 크게 뇌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뇌로 정상적인 대화와 사고가 가능했을까 싶게 정상 뇌부분이다 눌려 있는 상태였다. 오랫동안 천천히 뇌전이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적응을 하며 사신 것 같다. 우리 가족은 할머니에게 암이라는 말도 못하고 할머니 유언도 못 들은 상태라 뇌에 방사선치료를 해서 할머니가 잠시나마 깨어나실 수 있기를 기대해 보기로 했다.
   방사선 치료를 세 번 하고 할머니가 정신 멀쩡하게 깨어나셨고 말씀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먼 친척들까지 할머니를 만나러 병원에 왔고, 아무도 유언이라는 말은 안 했지만 우리 모두 이것이 할머니와의 마지막 인사가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이고, 내 살아 생전에 자식들한테 재산을 다 나눠주는 것이 아니었어. 내가 1억만 있었어도 치료받고 1년은 더 살아야 허는디…’
‘할머니, 맨날 죽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었어? 하느님이 부를 때 가는 거야.’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딨다냐. 노인들 다 말로만 그런 것이여. 나도 1년 정도만 더 살믄 쓰겄다.’



   정신을 차린 할머니는 집안 꼴이 말이 아니라며 목포 집에 다녀오고 싶다고 했다. 차 뒷좌석에 이불을 푹신하게 깔고 할머니를 모신 후 내가 5시간 운전을 해서 목포에 갔다. 할머니는 당신의 네 딸과 함께 따뜻한 겨울 햇살을 받으며 자동차 여행을 하니 너무 행복하다고 하셨다. 목포 가는 내내 이모들이 돌아가면서 노래도 부르고 친척들 뒷담화도 하고 옛날 얘기를 하다 보니 순식간에 목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할머니는 고개를 들어 당신 살던 아파트를 올려다보며 ‘아 정말 좋다’ 한마디 하시더니 다시 쓰러지셨다.
   할머니를 다시 차 뒤에 태우고 병원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그날 이후 깨어나지 못했다. 가족 모두 담당의사인 나에게 언제 임종하실지 물어보았다.

“그건 환자의 생명력에 달려있는 문제죠. 그 순간이 언제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할머니는 혈압도 떨어지고 의식도 없고 통증 반응도 없는 상태에서 꽤 여러 날을 견디셨다. 그동안 가족들은 돌아가며 자리를 지켰고 모여 있는 동안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외할아버지는 이미 10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외할아버지 살아 생전 첫 중풍으로 쓰러지던 때 자식들이 깜짝 놀라 돌아가시기전에 두 분 좋은 곳으로 모시고 가족 여행을 가야 한다며 돈을 모았었다. 그렇게 시작한 여행이 20년 넘게 매년 여름 지속되었고 ‘이제 모아놓은 돈도 다 떨어졌는데, 돌아가셔도 될 것 같다’는 말을 농담처럼 할 즈음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때 돌아가셔서 다행(!)이라는 이야기, 외할아버지가 평생 사업하면서 돈 문제를 일으켰는데 억척 외할머니가 매번 그 어음을 다 막았다는 이야기, 이모들 어렸을 때 딸이랑 아들이랑 반찬이 달랐다는 둥 아들 손주에게 용돈을 더 많이 주는 거 같았다는 둥 외할머니는 남녀 차별주의자라고 할머니 흉을 보면서 며칠을 보낸 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 임종을 기다리며 가족들이 자주 모여, 힘들게 살았던 옛날 얘기, 할머니 고마웠던 이야기, 소원해진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외할머니의 유언에 따라 이혼했던 외삼촌과 숙모는 이혼을 파기하고 살림을 합쳤다. 죽어서도 우리 삶을 좌지우지한다며 지독한 할머니라고 욕하며 웃었다. 할머니의 삶과 죽음이 가족에게 사랑과 평화를 주고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데 친척들은 그때만큼 자주 모이지 않고 그때처럼 함께 여행을 가지 않는다. 말다툼이 있었던 이모부는 가족 모임에 오지 않는다.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헤어짐
항암치료를 그만 하는게 좋겠다고 했을 때, 그녀는 그럴 순 없다고 말했다. 보험이 안되는 비싼 약이라도 좋으니 자기는 치료를 더 받겠다고 했다. 몸무게는 40kg도 되지 않고, 최근에 한 항암치료는 모두 한두 번 만에 효과가 없음을 입증하고 있었다. 나는 몇번의 외래에서 한 시간 이상 그녀와 실갱이를 벌였다. 그녀의 남편도 회사 휴가를 내고 외래에 찾아와서 제발 아내의 뜻을 따라 달라고 나에게 부탁했다. ‘항암치료는 환자가 원한다고 하는게 아니다, 이제 더는 치료적 효과를 기대하고 쓸 만한 약이 마땅치 않다.’ ‘괜히 항암치료 하다가 고생만 하게 될 거다.’라며 몇 번을 얘기했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근거가 명확하지 않은 어떤 약을 선택해서 항암치료를 하였다.
   항암치료 후 최근 1년 동안 나빠지기만 했던 피부병변이 잠시 호전되는 듯 보이니, 환자는 병이 좋아질 거라고 기대한 모양이다. 그러나 다음 치료 주기가 돌아오기도 전에 심한 변비로 입원을 하였다. 항암치료 후 힘들어서 음식을 거의 못 먹었다고 한다. 어린 두 딸이 있어서 힘들어도 절대 입원은 안 하던 그녀가 오죽했으면 변비 때문에 입원을 하겠다고 했을까. 입원하던 날 찍은 흉부 엑스레이를 보니 폐에 물이 차기 시작한다. 지난번 항암제는 일부 암세포에는 효과가 있었지만 저항성 높은 다른 암세포에는 효과가 없어 다른 장기로 전이가 되어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아, 역시 치료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괜히 항암치료를 했구나’ 싶었다.

‘이 병으로 내가 죽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가 직면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환자는 손으로 자기 귀를 막는다.



‘그런 얘기는 나중에 했으면 좋겠어요.’



   피부 병변이 좋아졌으니 이 항암제를 다시 쓰면 더 좋아질 거라며 우기지만, 환자는 볼 수 없는 등쪽에서 새로운 피부전이 병변이 생기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폐의 늑막에 물이 고여서 숨이 차기 시작한다. 그 물을 빼는 시술을 하다가 기흉이 생겼다. 기흉을 치료하기 위해 음압이 걸린 관을 삽입했다. 환자는 조금씩 나빠질 것이 자명했다. 조만간 열이 나고 의식도 흐려질 것이다. 나는 환자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판단했다. 아직 통증도 심하지 않고 의식도 명료하니 지금이 어쩌면 마지막으로 생의 좋은 순간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경제적으로 형편이 어려운데도 남편은 예민한 부인을 위해 2인실 비용을 감당하며 매일 저녁 퇴근 후에 병원에 와서 쪽잠을 자고 간다. 환자가 마음을 여는 유일한 창구가 남편이라는 점이 다행이다. 남편도 몸과 마음이 많이 지치고 경제적으로도 힘든 와중에, 곧 죽을 것 같은 아내를 위해, 아내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싶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환자는 음압이 걸려있는 흉관을 가지고 있어서 움직이는 것도 원할치 않다.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낸다. 지인들의 전화도 받지 않고 호스피스 팀의 방문도 원치 않는다. 집에 있는 두 딸에게도 전화하지 않고, 다 나은 다음에 집에 가서 애들을 보겠다고 한다. 하루 종일 음식도 거의 못 먹고 있다가 늦은 밤 병원으로 퇴근하는 남편을 만나 죽 한 숟가락 떠 먹고 잔다. 이 환자에 대한 나의 목표는 이제 치료가 아니었다. 임종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면하고 남은 시간을 잘 쓸 수 있게 돕는 것이 중요한데, 환자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아침 회진 때 나는 ‘날씨가 좋으니 바깥 바람을 한번 쐬 보세요’ 라고 말하는 것이 전부이다. 끝내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환자를 떠나 보내게 되었다. 모두가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환자는 떠났다.
병이 낫지 않을 때
의사가 할 수 있는 것
나보다 훨씬 젊은 유방암 환자. 종류별로 항암제를 다 썼건만 2주기만에 나빠지고 약을 바꾸면 3주기만에 나빠지기를 반복. 매번 증상도 악화되고 폐에 물이 조금씩 고이면서 숨이 차기 시작한다. 치료 효과가 신통치 않으니 다른 의사에게 가보고 싶다고 해서 소견서와 사진을 준비해 드렸다. 그런데 환자가 다음주에 외래로 돌아와서 나한테 미안해서 그렇게 못하겠다고 하신다. 나는 다른 의사에게 의견을 들어보는 것은 환자의 권리이니 나에게 미안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치료를 잘 못한 거 같아 내가 미안하다고 했다.

‘선생님, 저 그냥 치료 안하면 안돼요? 치료하는 게 더 힘들어요. 결국 나빠지겠지만 얼마간이라도 편하게 지내고 싶어요.’
‘그럼 한 달에 한 번은 병원 오세요. 병원에 등 돌리지는 말구요.’



   환자는 그 한 달을 다 채우지 못하고 새로운 증상이 생겨서 병원에 왔다.
   갑자기 다리가 안 움직인다며 응급실로 왔다. 척추로 전이된 종양이 신경을 누르고 있었다. 방사선 치료를 하고 다시 걷게 되었다. 또 한 달이 되지 않아 숨이 차서 도저히 누울 수 없게 되어 병원에 왔다. 늑막에 관을 넣고 물을 뺐더니 편안해졌다. 환자는 관을 가지고 퇴원했다.

‘선생님, 제가 언제 죽게 될까요? 제가 살려고 너무 아등바등하는 거 같아요. 마음 정리 다 하고 병원에 절대 안 올 거라고 다짐하는데, 힘들어서 못 견디겠으니 결국 병원에 오게 되는 것 같아요.’
‘병이 그런 거에요. 힘든 건 해결해야죠. 그래도 매번 해결이 되니 다행이에요.’



   한 달 후 시력이 약간 흔들리는 느낌이 들더니 오른쪽으로 몸이 자꾸 기우는 증상이 생겨서 화장실 가기도 힘들다며 병원에 왔다. 뇌전이였다. 종양의 크기는 작은데 부종이 심하다. 스테로이드와 만니톨을 썼더니 금방 좋아졌다. 아침에 회진을 가니 환자가 과일을 먹고 있다.

‘병이 뇌까지 전이가 되었는데도 이런 게 먹고 싶네요.’
‘뭔가 먹고 싶다는 건 좋은 징조에요.’
‘그래요? 저는 제가 너무 살려고 아등바등하는것 같아 좀 부끄러워요.’
‘무슨 말씀이세요. 병원에 와서 조치를 하면 훨씬 낫잖아요. 그렇게 할 수 있는 데까지 합시다. 그게 하느님의 뜻이에요.’



   환자의 남편은 목사님이다. 내 진료 중에 한 번도 말씀이 없으시다. 반복되는 증상의 악화와 그만큼의 반복되는 검사에도 별 말씀이 없으시다. 묵묵히 부인을 병원에 데리고 오고 치료하는 과정에 협조해 주신다. 아무말 없이 검사동의서에 사인을 하신다. 환자의 상태는 매우 나쁘지만 병을 관리하고 삶과 죽음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이들 부부의 모습은 눈물겹고도 평화롭다. 증상을 호전시키는 것은 병을 낫게 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환자가 눈 뜨고 살아있는 동안은 단 하루라도 잘 먹고 잘 자고, 잠시라도 편하게 지내야 하는 거니까. 첨단 의학이 아니라 폼은 좀 안 나지만 환자가 힘든 걸 해결해 줄 수 있는 뭔가를 찾아 주는 게 종양내과 의사의 몫이다.
환자를 위한
기도
50대 후반의 그녀. 담낭암을 진단받고 수술과 방사선치료, 항암치료를 다 마치고 3개월 만에 처음 찍은 CT에서 이전 수술한 부위 근처에서 재발된 것을 확인하였다. 아무 증상이 없다. 재수술을 하고 다시 항암치료를 하였다. 항암 치료를 세 번 하고 찍은 CT에서 폐로 새로운 전이가 생긴 것을 확인하였다. 역시 아무런 증상이 없다. 약을 바꿔서 항암치료를 여섯 번 했다. 이번에는 폐전이가 더 악화되었다. 다시 약을 바꿔서 항암치료를 했다. 이번에는 약물 부작용으로 설사하고 입안도 많이 헐고 삶의 질이 너무 떨어진다.
   아무 증상도 없는데 계속 항암치료를 하니 몸만 상하는 것 같다며 더 이상 치료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10kg 이상 살을 뺐다. 그동안 입었던 구질구질한 옷은 다 버리고, 부자는 아니지만 모아 놓은 돈으로 명품 브랜드의 좋은 옷과 핸드백, 액세서리 등을 사 모았다. 누가 봐도 멋지고 세련된 아줌마로 변신했다. 환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돈을 다 쓰고 죽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컨디션이 나쁘지 않으니 여기 저기 여행도 많이 다닐거라고 했다. 항암치료 안하니까 구찌뽕, 약초다린 물, 흑마늘, 몸에 좋다는 것을 다 먹는 식이요법을 하겠다고 한다. 병은 여전히 조금씩 진행 중이다. 다른 병원에서 온열치료 중인데 효과가 있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동생이 하기를 원하니까 하고 있다고 한다. 그녀가 대체의료에 너무나 많은 돈을 쓰고 있는 것에 대해 여러 번 설명하고 굳이 그러지 마시라고 우회적으로 말씀드렸지만, 증상이 별로 없고 어디 특별히 아픈 곳이 없는 그녀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겠다고 했다.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시간이 나면 치유집회를 다니는데 하느님이 나를 낫게 하고 다시 쓰실 것으로 믿고 있다고 했다.
   자기는 암을 진단받았을 때 수술만 하면 완치가 되는 줄 알고 철석같이 의사가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재발한 것에 대해 내심 원망이 있는 눈치다. 평소 건강했던 그녀는 병원이라고는 다녀본 적이 없다. 의사랑 생전 처음 이야기해 본다고 했다. 의사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병이 낫지 않으니 신뢰감이 떨어지는 것 같다. 드러내 놓고 그런 내색을 하지는 않는다. 특별히 비협조적이고 말 안 듣는 그런 환자도 아니다. 지금 마음이 편하고 좋다 하니 그냥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놔 두자. 한 달에 한 번씩 날 만나러 오신다. 자기 사는 얘기도 잘 하신다. 의사가 지시하는 것을 다 따르지 않지만 그렇게 나름으로 사는 환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의사로서는 알 수 없는 환자들의 삶과 가치관, 병을 다스리고 사는 방법을 접하게 된다. 누구나 자신의 몫으로 주어진 인생을 자기 방식으로 사는 것이고 인생에 정답은 없는 것이겠거니 한다. ‘그녀가 나를 필요로 할 때 그때 도움이 되는 의사가 되어야지, 나를 찾을 일이 한동안 없기를 기도해야지.’ 그것이 내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기도.
젊은 환자의 죽음
그리고 반전
환자가 돌아가신 후 며칠 지나 환자의 어머니가 문자메시지를 보내셨다. 아마 환자 물건을 정리하다가 내 생각이 났나 보다. 40대 의사 아들을 보내고 난 어머니는 수년간의 긴 아들의 암 투병기간 중 아들의 병과 건강, 삶에 대해 이야기를 가장 많이 나눈 사람이 나였다고 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위험한 순간에 찾은 사람도 나였다고. 아들을 생각하면 꼭 내 생각이 같이 난다고 하였다. 한번 식사 대접을 하고 싶다고 하시지만 나는 거절하였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생각만 해도 불편하다.
   환자가 임종하기 전, 내 부모님 연배의 그들이 당신 자식이 조절되지 않는 통증으로 힘들어 하는 것을 지켜보며 자식보다 더 큰 고통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통증을 잘 조절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마지막 가는 길, 편안히 돌봐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죽음을 기다릴 수 밖에 없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더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의사란 자존심을 걸고 환자에게 ‘잘못’해서 ‘죄송’한 일 없도록 노력하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나는 결국 죄송하다고 말씀을 드리고 물러났다. 죽어가는 아들을 돌보는 어머니, 죽어가는 남편 곁의 젊은 부인. 나는 치료 기간 중 이들 두 여인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한결같이 이들의 환자를 아끼는 마음이 놀라웠다.
   한참 지나 부인이 진단서 때문에 외래로 오셨다. 그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 이후 며느리와 관계를 단절하고 손녀 양육비도 보내 주지 않는다고 한다. 당신이 손녀를 키우겠다며 양육권을 달라고 요구한다 하신다. 부인은 결혼 후 십년 이상 집에서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살림을 하느라 자기 명의로 재산도 없고 모아 놓은 돈도 없어서 요즘 일자리를 찾고 있다고 했다. 미국에서 성악을 전공한 부인이 한국 땅에서 경력 단절녀로 직장을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남편 간병할 때보다 얼굴이 더 안 좋다. 반전이다.
엄마의 일기장
환자를 만나본 적은 없다. 그녀의 딸이 엄마가 받은 치료 기록을 가지고 내 외래에 몇 번 왔다. 나는 딸과 상담을 하고 환자를 위해 진통제를 처방하였다. 병원에 오실만한 컨디션이 되면 같이 오시라고. 그러나 겨울내 병원에 오지 못하고 아팠던 환자는 그 겨울을 못 넘기고 돌아가신 모양이다. 두 남매는 아직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도, 어른이 될 준비도 안 되었는데, 어느새 3월 새학기가 되었고 어색하게 일상으로 돌아갔다. 딸은 엄마 살아생전 자주 싸웠었는데 엄마가 죽고 나니 마음 속 아물지 않은 상처가 아팠는지 내 외래로 왔다. 엄마가 죽고 일기장을 보는데 엄마의 일기장에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고 했다. 만나본 적도 없는 의사선생님을 의지하며 매일 일기장에 의사에게 물어보고 싶은 거, 치료 가능성, 남은 기대 여명 그런 걸 상의하려고 병원에 오고 싶어했다고 한다. 딸은 환자란 그렇게 의사를 의지하는 마음이 크니, 늘 환자들을 사랑하고 아껴 달라고 당부한다. 마음 속 우물에서 마르지 않는 샘물이 나오는 것처럼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달라고.

‘그래 노력할게. 근데 그런 마음이 노력한다고 되는 일은 아닌 거 같아. 엄마가 걱정하고 기대한 만큼 너도 잘하렴.’
‘그래야겠죠? 근데 그것도 노력한다고 되는 일은 아닌 거 같아요.’
‘일이 잘 안 풀리면 동생이랑 병원에 들리렴. 내가 커피 사줄게.’



   만나본 적도 없는 나를 의사라며 의지했던 엄마에게 마음의 편지를 보낸다. 딸이 엄마의 일기장을 보면서 의지하고 매일 다짐하는 거 같다고. 동생도 잘 돌보고 자기 인생도 잘 꾸려 나갈 것이니 엄마는 이제 편히 쉬시라고.
동영상으로
엄마를 찍는 아들
아주 착한 아들. 그는 취업 준비 중이었다. 1년전 엄마가 전이성 대장암을 진단받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빠짐없이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다닌다. 증상에 따라 진통제 용량이 바뀌니 진통제 복용일지도 잘 적어 온다. 엄마가 불편한 곳이 많아 약도 많고 다양한데 그걸 종류별로 잘 챙겨서 드시게 한다. 어떤 증상 때문에 약을 더 드셨으니까 그 약은 며칠 치가 부족하고, 어떤 증상은 요즘 호전돼서 약을 안 먹고 있으니 처방 안 해줘도 되고, 때에 따라 약 처방 일수가 넘치기도 하고 부족하기도 한데 그런 걸 아주 꼼꼼히 잘 챙긴다. 흉수와 복수 관이 있을 땐 그 소독도 자기가 챙긴다. 엄마가 이것저것 투정을 많이 부리는데 오빠처럼 그 투정을 다 받아주며 엄마 수발을 들고 있다.
   그러던 엄마가 많이 나빠졌다. 칼륨 수치가 급격하게 증가해서 심장마비로 금방 돌아가실 것 같았다. 최근에 암도 많이 진행하고 있어서 우리는 별 조치없이 임종을 맞이하기로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다행히 엄마는 조금씩 나빠지고 있기는 해도 그럭저럭 괜찮기도 하다. 간 전이가 심해서 황달 수치가 10을 넘었고 혈소판 수치도 2만 정도 밖에 안된다. 그런데 아직 소변도 잘 보고 있다. 간성혼수가 왔다갔다 하긴 하지만 낮에는 의식이 또렷하다. 말기 임종 기간이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다. 엄마 곁에 있는 아들은 한 달째 간병인 없이 혼자 엄마 간호를 하고 있다. 아침 회진을 가면 피곤에 지쳐 자고 있다. 그래도 내가 가서 인기척을 하면 벌떡 일어난다.
   오늘은 그가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새벽에는 이런 모습으로 힘들어 하시더라구요.’
   간성혼수가 온 것 같다. 간성혼수의 치료를 위해 관장을 해야 하지만 지금 혈소판 수치도 낮고 환자가 잘 협조하지도 못한다. 콧줄을 끼워서 듀파락 시럽을 투여하여 설사를 유도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혈소판이 낮아 콧줄 끼우기에도 출혈 위험이 높다.
   아들은 엄마 곁을 지키다가 뭔가 이상한 게 있거나 의료진에게 보고해야 할 것 같은 사항이 생기면 스마트폰으로 찍어서 회진 때 나에게 보여준다. 아주 훌륭한 보호자다.
   아주 서서히 나빠지는 엄마. 심폐소생술은 안 하기로 했지만 생각보다 임
   종이 빨리 오지도 않는다. 의식이 맑지 않으면 흡입성 폐렴이 오기 마련인데 그런 조짐도 없다. 피검사도 자주 안하는데, 환자가 그냥 저냥 잘 버티고 있다. 환자는 가끔 의식이 맑아져서 집에 가고 싶다고 하신다. 지금의 병원 생활 이 환자를 편하게 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집으로 가기에는 컨디션이 좋지 않다. 이렇게 연명하는 시간이 환자와 가족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는 며칠을 고민 고민하다가 아들에게 말한다.

‘이제 영양제도 떼고 진통제만 유지하며 최소한으로만 치료했으면 해요. 지금 뭔가를 조금씩 해 드리니까 시간이 조금씩 더 연장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연장된 시간이 환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러면 금방 돌아가시나요? 언제인가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안 그러면 언제 돌아가시나요? 한 달 버티실까요?’
‘지난 한 달간 서서히 나빠지는 속도를 보면 그만큼 견디실 거 같아요. 그러니 어떤 결단을 내려야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시간이 길어지니 아드님도 많이 지쳐가는거 같구요.’
‘근데요… 엄마가 정신이 너무 맑아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내가 보기엔 맑지 않은데, 그는 맑다고 한다.)



   남은 생이 얼마 안될 것 같은 엄마가 조금이라도 힘들어 하는 것 같으면 그는 그 모습을 찍어 나에게 보여주며 아침마다 보고하고, 그에 대한 나의 판단을 귀담아 듣는다. 그런 그에게 만약의 상황이 오면 엄마에게서 모든 적극적인 조치를 철회하는 것에 대한 나의 의견을 말했더니 그가 고개를 떨군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게 맞는 걸까? 병의 진행 코스를 되돌이킬 수 없는 말기 임종환자에서는 수액, 항생제, 영양제, 수혈 등이 추천되지 않는다. 의미없는 시간을 연장할 뿐이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이론적으로는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그에게는 단 하나뿐인 엄마인데. 아픈 엄마 몸을 구석구석 닦아 주고, 아픈지 물어보고, 나에게 엄마의 하루를 동영상으로 보고하는 아들. 우리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며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환자는 행복하게 임종을 맞이하고 아프지 않게 돌아가셨다. 아들은 장례 준비도 다 해두었다고 했다. 그렇게 보내드려서 다행이다.
약한 고리
병은 우리 삶의 약한 고리를 노출시킨다. 바쁜 삶 속에 꾹꾹 묻어주고 덮어둔 채 살았는데 암과 같이 큰 병을 진단받고 나면 그렇게 묻어둔 개인의, 가족의 많은 문제들이 다 폭발하는 것 같다. 전이성 암을 막 진단받은 남편. 큰 병을 진단받았는데도 치료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전신상태가 좋지 않아 항암치료를 받기 어려워 보인다. 어쩌면 치료를 시도조차 못할 가능성도 있다. 부인이 수발을 하고 있다. 이들은 재혼한 부부고 각자 당신들의 장성한 자식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은 병원에 오지 않는다. 가족간에 앙금이 있는 것 같다. 간병하는 부인의 안색이 더 좋지 않다. 손목을 잡아보니 부정맥이 있는 것 같다. 본인도 최근 숨도 차고 몸도 자꾸 붓는 것 같고 해서 건강검진을 받아봐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먼저 암을 진단받는 바람에 자기 몸은 챙길 여가가 없다고 했다. 작은 보호자 침대에서 쪽잠 자기를 며칠째. 잠을 설치는 남편 시중을 드느라 그나마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보호자가 쉴 시간을 주기 위해 자원봉사자가 하루 세 시간 부인을 대신하여 간병해 주기로 했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사람과 그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에 대해 환자가 매우 어색해 하였다. 나는 그 시간이라도 부인이 쉬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해주었다. 그렇게 하루 세 시간이 주어지자 부인은 우리 병원 가정의학과에서 기본 진료를 받고 심장내과로 연결되어 검사도 하고 약도 먹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환자는 자살시도를 하였다.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드니까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었나 보다. 그러나 그 마음의 이면에는 그만큼 살고 싶은 마음도 컸다. 그 마음을 부인에게 털어놓지 못하고 품고 있었다. 재혼 후 살아온 10년의 시간, 좋기도 하고 고달프기도 했던 그 시간들.
   그들은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했고 어렵지만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남은 시간이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서로의 마음에 충만한 사랑이 남을 수 있다면 그 시간의 길이가 얼마인지가 중요하겠는가. 병은 우리 삶의 약한 고리를 노출시키지만 어쩌면 그 과정에서 더 크고 강한 사랑을 깨닫는 기회를 줄지도 모른다.
죽음을 눈앞에 둔 암환자와
대화하기
환자와 가족은 병이 나빠지고 있는 것은 알지만 그 누구도 그것이 오늘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매일 그날이 바로 오늘일 수 있다고, 그러니까 환자 의식이 명료할 때 지인들과 만나고 작별인사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린다. 병원에 계시다 임종이 임박하면, 형편이 어려우시더라도 마지막 시간이니 1인실로 옮겨서 편안한 환경에서 돌아가실 수 있게 하자고 한다. 돌아가시기 48시간 전에는 진통제를 제외한 모든 약을 중단한다.
  

‘선생님, 제가 만약 상태가 나빠지면 언제 죽을지 미리 알려주세요. 아무 준비도 못하고 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불현듯 저세상으로 가고 싶지는 않아요. 그 시간을 꼭 알려주세요. 못다한 이야기를 해야 해요.’



   오늘 돌아가신 환자와 가족은 이런 문제에 대해 충분히 잘 논의하였다. 암치료 중 좋아지고 나빠지기를 반복하며 무의미한 생면연장을 위해 심폐소생술은 하지 않겠다는 것도 미리 얘기하고, 어떤 싸인이 나오면 그건 병이 나빠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더 이상의 검사나 투약은 하지 않기로 했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몇 번을 울고 아프게 죽음을 준비하였다. 임종이 예상되면 가능한 집에서 편안한 시간을 가져보려고 하지만 임종의 순간이 편한 환자는 별로 없다. 컨트롤되지 않는 병 때문에 숨이 차고 배가 부르고 진통제를 먹어도 통증이 찾아온다. 집으로 갔던 환자는 며칠을 못 버티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오늘처럼 편안히 가시면 잘 돌아가셔서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잘 죽으면 잘 산 것이다. 아름다운 죽음. 그래서 난 죽음을 앞둔 암 환자들에게 ‘잘 죽는 법’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죽기 전에는 삶의 매듭을 다 풀어야 하고, 오해도 애증도 다 풀어야 하고, 반드시 마음도 다 비워야 하고, 그런 과정을 밟아야 제대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종양내과 의사는 그렇게 하라고 배웠다. 그러나 다양한 인생만큼 다양한 형태의 죽음을 만나며, 인생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다채로운 순간의 연속임을 알게 된다. 정답이 있으니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죽음은 그 나름의 의미로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옳고 그름으로 말할 수 없는 삶의 애환이 녹아있다. 그 흔적은 그렇게 슬프기만 한 것도 아니고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 죽음의 순간에는 매우 복잡한 삶의 흔적과 기억이 얽혀 있고, 원하지 않아도 남은 자의 삶에 이어진다.
   톨스토이는 판사인 이반 일리치가 죽고 난 후 누가 그 자리에 승진할 것인지 살피는 동료, 남편의 죽음 후 국가로부터 더 많은 연금을 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골몰하는 아내의 모습을 통해 죽음 앞에서 개인의 삶이 적나라하게 평가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남은 자들이여, 죽음을 가슴에 품고 열심히 잘 살지어다.
목차
고대의대 초기역사에 담긴 박애정신과 다양성
죽음 후 삶이 시작된다
듣기
화면 설정
arrow_drop_down
  • 돋움
  • 바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