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 어느 가을, 할머니께서 서울에 오셨다. 숨이 좀 찬다며 병원에 가보고 싶어하셨다. 흉부 엑스레이가 온통 허옇다. 할머니의 폐는 공기가 아닌 뭔가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 엑스레이 한장 만으로도 폐암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94세. 약간 숨찬 것 말고는 암에 의한 증상이 없었다. 이모, 이모부, 외삼촌 등 가족들과 상의하였고 암 관련 검사나 치료는 아무것도 하지 말자고 결정했다.
외할머니에게 암이라는 걸 어떻게 얘기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미적미적 며칠을 보내던 중 할머니가 갑자기 의식을 잃었다. 뇌 MRI를 보니 정상 뇌 실질보다 암이 전이되어 공동화된 뇌병변이 훨씬 더 크게 뇌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뇌로 정상적인 대화와 사고가 가능했을까 싶게 정상 뇌부분이다 눌려 있는 상태였다. 오랫동안 천천히 뇌전이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적응을 하며 사신 것 같다. 우리 가족은 할머니에게 암이라는 말도 못하고 할머니 유언도 못 들은 상태라 뇌에 방사선치료를 해서 할머니가 잠시나마 깨어나실 수 있기를 기대해 보기로 했다.
방사선 치료를 세 번 하고 할머니가 정신 멀쩡하게 깨어나셨고 말씀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먼 친척들까지 할머니를 만나러 병원에 왔고, 아무도 유언이라는 말은 안 했지만 우리 모두 이것이 할머니와의 마지막 인사가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이고, 내 살아 생전에 자식들한테 재산을 다 나눠주는 것이 아니었어. 내가 1억만 있었어도 치료받고 1년은 더 살아야 허는디…’
‘할머니, 맨날 죽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었어? 하느님이 부를 때 가는 거야.’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딨다냐. 노인들 다 말로만 그런 것이여. 나도 1년 정도만 더 살믄 쓰겄다.’
정신을 차린 할머니는 집안 꼴이 말이 아니라며 목포 집에 다녀오고 싶다고 했다. 차 뒷좌석에 이불을 푹신하게 깔고 할머니를 모신 후 내가 5시간 운전을 해서 목포에 갔다. 할머니는 당신의 네 딸과 함께 따뜻한 겨울 햇살을 받으며 자동차 여행을 하니 너무 행복하다고 하셨다. 목포 가는 내내 이모들이 돌아가면서 노래도 부르고 친척들 뒷담화도 하고 옛날 얘기를 하다 보니 순식간에 목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할머니는 고개를 들어 당신 살던 아파트를 올려다보며 ‘아 정말 좋다’ 한마디 하시더니 다시 쓰러지셨다.
할머니를 다시 차 뒤에 태우고 병원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그날 이후 깨어나지 못했다. 가족 모두 담당의사인 나에게 언제 임종하실지 물어보았다.
“그건 환자의 생명력에 달려있는 문제죠. 그 순간이 언제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할머니는 혈압도 떨어지고 의식도 없고 통증 반응도 없는 상태에서 꽤 여러 날을 견디셨다. 그동안 가족들은 돌아가며 자리를 지켰고 모여 있는 동안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외할아버지는 이미 10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외할아버지 살아 생전 첫 중풍으로 쓰러지던 때 자식들이 깜짝 놀라 돌아가시기전에 두 분 좋은 곳으로 모시고 가족 여행을 가야 한다며 돈을 모았었다. 그렇게 시작한 여행이 20년 넘게 매년 여름 지속되었고 ‘이제 모아놓은 돈도 다 떨어졌는데, 돌아가셔도 될 것 같다’는 말을 농담처럼 할 즈음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때 돌아가셔서 다행(!)이라는 이야기, 외할아버지가 평생 사업하면서 돈 문제를 일으켰는데 억척 외할머니가 매번 그 어음을 다 막았다는 이야기, 이모들 어렸을 때 딸이랑 아들이랑 반찬이 달랐다는 둥 아들 손주에게 용돈을 더 많이 주는 거 같았다는 둥 외할머니는 남녀 차별주의자라고 할머니 흉을 보면서 며칠을 보낸 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 임종을 기다리며 가족들이 자주 모여, 힘들게 살았던 옛날 얘기, 할머니 고마웠던 이야기, 소원해진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외할머니의 유언에 따라 이혼했던 외삼촌과 숙모는 이혼을 파기하고 살림을 합쳤다. 죽어서도 우리 삶을 좌지우지한다며 지독한 할머니라고 욕하며 웃었다. 할머니의 삶과 죽음이 가족에게 사랑과 평화를 주고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데 친척들은 그때만큼 자주 모이지 않고 그때처럼 함께 여행을 가지 않는다. 말다툼이 있었던 이모부는 가족 모임에 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