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을 바쳐서 박애를 실천한 로제타 홀
“네가 인류를 위해 봉사하길 원한다면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곳으로 가서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일을 하라.”
- 매리 라이언(Mary M. Lyon)
로제타 홀은 1865년 9월 19일 뉴욕의 설리번 카운티 리버티(Liberty, New York)에서 태어났다. 일 년간의 초등학교 교사 생활 후, 의료 선교사에 뜻을 두어 1886년 펜실베니아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뉴욕 빈민가에서 의료 봉사를 하다가 감리교 여성 해외선교회에 자원하여, 1890년 25살의 젊은 나 이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로제타 홀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유교적 관습으 로 죽어가면서도 남성에게는 진료를 받지 못하는 여성들이었다.
이런 현실을 극복하고자 로제타 홀은 진료뿐만 아니라 초기부터 우리나라 여의사 양성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여성병원인 보구여관을 책임짐과 동시 에 이화학당 학생 5명을 조수로 쓰면서 의학을 가르쳤다. 1892년에 의료선 교사인 윌리엄 홀(William J. Hall)과 결혼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윌리엄 홀은 1894년 11월 청·일 전쟁 중에 평양에서 밤낮없이 환자를 돌보다 발진티푸스 에 걸려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당시 둘째 이디스를 임신 중이었던 로제타 홀은1894년12월남편의사망충격에따른휴양과출산을위해고향미국으 로 귀국길에 오른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보구여관에서 의학을 가르쳤던 학 생 중 박에스더를 같이 미국에 데려가서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입학시켜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되게 하였다.
로제터 홀은 3년만인 1897년 11월 다시 돌아와서 평양에 세워진 남편을 기리는 기홀병원을 운영하고 1898년에는 그 옆에 여성병원인 광혜여원을 세 웠다. 하지만 1898년 5월, 4살 난 딸 이디스가 열병으로 사망하는 비극적인 일을 겪었다. 그럼에도 로제타 홀은 1900년 평양에 맹인학교를 세웠으며 최 초의 조선어 점자 교재 개발을 하였고, 농아를 위한 특수교육을 시작하였으 며, 또한 1921년 인천에 인천부인의원(지금의 인천기독병원)을 건립하였다. 이 렇듯 로제타 홀의 박애정신은 여성으로부터 시작해서, 시각 및 청각 장애인 으로 이어졌다. 실로 시대를 앞서 성별과 장애를 뛰어넘은 다양성의 실천이라 할 만하다.
아들 셔우드 홀은 1893년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인으로도 알 려져 있다. 1911년 18세의 나이로 본국으로 건너가 캐나다 토론토(Toronto)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결핵학을 전공했다. 1926년 역시 의사인 아내 매리언 버텀리 홀(Marian Bottomley Hall)과 함께 우리나라로 귀환하여 해주에서 병 원과 결핵요양원을 세우고,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는 등 결핵 퇴치 운동에 큰 기여를 했다.
홀 가족이 행했던 많은 일들 중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숙원사업은 여의사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1933년 로제타 홀은 68세에 43년간의 한국 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1951년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쪽진 머리에 한복을 즐겨 입었다한다. 그녀의 시신은 화장한 후 소원대로 그리운 한국땅에 안장되었다.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남편, 아들, 딸, 며느리와 함께 나란히 묻혀 있다.
김탁원, 길정희 부처(夫妻), 위기의 여의학교를 지켜낸 의인
김탁원은 일생을 민족을 위해 산 애국자였다. 그는 1898년 대구에서 태어났는데 가난으로 학업을 잇기 어려웠으나 검정시험으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합격하였다. 졸업반 때 기미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이에 적극 참여한 이유로 1년 6개월여의 옥고를 치른 후 제적당했다가 다시 복교되어 동기보다 2년 늦은 1921년 졸업하였다.
졸업 후 그는 곧 정신의학 전공을 목표로 동경 국립정신병원에서 1년간 근 무하였고, 중국 북경의 협화병원에서도 근무하였다. 김탁원은 우리나라 최초 의정신과의사이다. 그는 역사, 정치 등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고 전해지며 박영효, 이인 등 정치인들과 교류하였으며 신간회에도 참여하였다. 1927년 함남 영흥에서 ‘에메친(emetine) 중독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일 제가 폐디스토마 환자 105명에게 인체시험 목적으로 에메친을 주사하여 5명 사망, 6명 중태, 93명을 마비상태에 빠뜨린 사건이다. 총독부는 이를 숨기려 했으나 중독사가 의심되는 상황이었고, 동아일보는 에메친으로 폐디스토마에 대한 효력을 인체 실험한 의혹이 있다는 것을 보도하였다. 그리하여 여론이 들끓어서 한성의사회에서 진상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위원회에서 박승목, 김탁원을 현장에 파견하였으며 조사 끝에 중독사임을 밝혀낸다. 이로써 영흥, 해남 등지에서 반일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그후 김탁원은 일제 어용 의사단체인 '경성의사회'에 대응하고자 만들어 진 '한성의사회'에 2회에 걸쳐 회장으로 당선되어 활약하기도 했다. 로제타 홀에 이어서 2대 여자의학강습소 소장을 맡아서 결국에는 1938년 여자의학전문학교가 탄생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경성여의전 설립과정에서 초대 교장인 사토 고조(佐藤剛藏)는 김탁원에게 교무주임 자리를 권하기도 하는데 그의 항일투쟁 경력으로 인한 일제의 반대로 교수로 임명될 수가 없었다. 이후 김탁원은 일제의 억압이 한창이던 1939년경 42세의 젊은 나이에 간염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그러나 그의 민족애와 여의사 양성을 위한 노력은 그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있다.
여자의학강습소를 세운 공로자들. 왼쪽부터 길정희, 로제타 홀, 김탁원 (로제타홀 정년퇴임무렵)
길정희는 189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0대 초반에 아버지를 여의고 조부의 손에서 길러졌다. 조부는 정3품의 관직을 지낸 분이었으며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분으로 손녀의 교육에도 적극적이었다. 조부의 도움으로 길정희는 일본으로 유학하여 동경여의전에 입학하였다. 1923년 동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동경여의전 재학시절 자신을 찾아와 여의사 양성 문제를 상의한 바 있던 로제타 홀을 찾아가서 함께 여의학교 설립을 위해 노력했다. 1925년 김탁원과 결혼을 하였으며 로제타 홀을 도와 마침내 1928년 여자 의학강습소를 설립하고 부소장을 맡게 되었다. 이후 1933년 홀 여사가 미국으로 귀국한 후에는 남편 김탁원과 함께 1938년 경성여의전이 설립될 때까지 여자의학강습소를 운영하였다. 길정희는 1981년에 “나의 자서전”을 출간 하여 한동안 역사에서 묻혀 있던 여자의학강습소를 다시금 조명받도록 하였다. 1990년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전재산을 여의학교 완성을 위해 기부한 김종익의 장거(壯擧)
김종익은 1886년 순천의 부호인 김학모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20세 가 되기까지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한학에 전념하였으나 을사늑약이 체결되 자 1909년 24세의 나이로 상경하여 중동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 나라를 잘 알아야 한다며 일본으로 유학하여 1913년 명치 대학 법과에 입학하였다. 귀국 후 김종익은 아버지의 정계, 관계로의 진출 권유를 뿌리치고 재계로 진출하여 사업을 시작하였다. 당시의 정계, 관계로의 진출은 곧 일제에 동조하는 것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는 1918년 제지 사업과 미두(米豆) 사업에 전념하였다. 또한 빈민구제 사업을 위하여 적십자사에 많은 액수의 기부를 하였으며 나병협회에도 거액을 기부하였다. 보성전문학교 30주년 때는 새로운 교사 건립에 1만 2천원의 큰 돈을 희사하는 등 특히 교육사업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이를 계기로 보성전문 학교의 교장이었던 김성수는 당시 여자의학강습소를 여자의학전문학교로 키우기 위하여 백방으로 애쓰고 있는 김탁원에게 김종익을 소개했으며 1936 년 김종익이 기성회의 이사로 참여했다.
1937년 4월 김종익은 이질로 경성제국대학 부속의원에 입원하였다. 치료에도 불구하고 병세가 점점 악화되는 상황에서 김종익은 5월 6일 저녁에 거 액의 재산을 사회사업에 기부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가 유언으로 기부한 돈은 총 175만원이었다. 당시에 이 금액은 총독부 당국에서도 깜짝 놀랄 정 도의 큰 돈이었다. 그 무렵 일본인 부호 1백 명이 모여서 설립한 조선상업은행 의 설립 자본금이 477만5천 원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규모를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유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여자의학강습소를 여자의학전문학교로 승격시키는 것이었다. 여자의학전문학교의 승격과 부속결핵요양원을 세우 는 데에 65만원이라는 거금을 희사한 것은 그가 생전에 총애하던 장녀 평수가 여고 재학 중 결핵으로 사망한 데 대한 슬픔과 의학 발전의 염원이 동기가 되었다. 그의 유언에 따라 1938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가 정식 의학전문학 교로서 개교하게 되었다.
고대의대의 역사는 이렇듯 선각자들의 시대를 앞선 숭고한 정신, 인류를 위한 헌신과 기부의 결과이다. 그것은 로제타 홀 가족의 박애와 다양성 존중 의 정신, 그리고 홀과 함께 남녀, 신분, 동서양의 차이를 넘어 생명을 살리는 아름다운 행보를 함께 하였던 김탁원, 길정희 부부의 헌신, 그리고 여자의학 전문학교라는 꿈을 현실로 만들어낸 김종익의 숭고한 기부가 어우러져 시작 된 역사이다. 민족과 박애, 다양성, 그리고 나눔과 기부라는 고대의대 역사 속 에 아로새겨진 아름다운 헤리티지는 오늘 고대의료원의 눈부신 발전으로 이 어졌다. 그리고 위대한 역사는 2028년 설립 백주년을 맞는 고대의대에게 이렇게 묻는다.
“고대의대의 심장 속에 시대를 앞선 선각자들의 크고 넓고 따뜻한 마음이 고동치고 있는가?”
“위대한 전통을 만들었던 그 거인의 어깨 위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마중할 준비가 되어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