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법학으로의 산책:
개인의 공간과 국가의 역할
정인영
문화체육관광부 행정사무관, 워싱턴주립대 로스쿨 박사과정(Ph.D.).

플로리다 건물 붕괴 현장에 나타난 2명의 시장(Mayor).


며칠 전 플로리다 서프사이드(Surfside) 시에서 한 콘도미니엄 건물이 무너져서 6월 27일 현재 150명이 실종되었고, 5명이 죽은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2021년 6월 26일자 뉴욕타임스 기사 1) 를 보면, 서프사이드 시는 이미 3년 전에 40년이 소요된 건물을 대상으로 안전성을 점검했었는데, 당시 엔지니어가 건물에 금이 가고 누수가 발생하는 등의 구조적 결함이 있는 것을 발견, 건물 운영자와 시 당국에 즉각 수십억 원을 들여 정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보고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Charles W.Burkett 시장(Mayor of Surfside)은 “2018년에 보고서를 수령한 후 어떤 후속조치를 취했는지를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며 다소 부실한 답변을 하였고, 해당 지역에서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던 Daniella Levine Cava 카운티 시장(Mayor of Miami-Dade County)은 2018년 보고서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Cava 시장은 카운티 내 40년 이상된 건물에 대해 1개월 검사(30-day audit)를 통해 전면 재보수를 할 계획을 발표하면서 도시들(cities)도 각각 자신의 관할 내에서 유사한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이런 기사를 볼 때마다 저는 미국의 지방정부구조가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지역은 왜 시장이 두 명일까요? 이 사고에 대한 책임은 서프사이드 시에 있었을까요? 아니면 마이애미-데이드(Miami-Dade) 카운티에 있었을까요? 미국에서 살아온 짬을 동원해 추측건대 마이애미-데이드 카운티 내에 서프사이드 시가 소재해 있고, 건물 안전성 관리감독은 시의 고유권한이지만 소방사무는 카운티가 수행하고 있어 구조작업을 카운티가 총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18,000개의
지역 경찰조직이 있는 미국
미국의 정부조직을 접하게 되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질서정연한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제가 현재 살고 있는 워싱턴 주의 킹 카운티(King County) 안에는 시애틀(City of Seattle), 벨뷰(City of Bellvue), 그리고 빌 게이츠 등 유력 인사가 거주하는 메다이나(City of Medina) 등이 위치해있는데, 시애틀에는 72만명, 메다이나에는 3천 명이 살고 있어 규모의 격차가 매우 큽니다. 도시는 보통 1개 카운티 안에 소재하지만, 2개 카운티에 걸쳐져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킹 카운티는 주 정부기관으로서 다양한 공공서비스를 제공합니다. ‘킹 카운티 보건국’에서 마스크 착용, 집합금지, 백신 자격요건 등을 정하고, 버스와 도시철도는 ‘킹 카운티 메트로’에서 제공합니다. 부동산 거래를 할 때는 ‘킹 카운티 부동산 서비스’에서 소유주의 이름, 거래내역, 세금납부 현황 등을 확인할 수 있고, 검찰과 법원도 주 법무부와 주 대법원의 관리감독 하에 카운티 단위로 설치되어 있습니다.
   한편, 1865년 주 내에 독립법인으로 설립된(incorporated) 시애틀 시 또한 공공서비스를 제공하고 규제권한을 행사합니다. 시애틀 시는 세계적인 수준의 소장품을 지닌 미술관과 지역 예술가를 후원하기 위한 아트 펀드와 미술관을 운영하며, 킹 카운티 도서관들과 별개로 독자적인 도서관 시스템을 구축해두고 있습니다. 다운타운의 중심에서 수려한 외관을 자랑하는 시애틀 공공 도서관(Seattle Public Library)과 "SAM"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시애틀 아트 뮤지엄(Seattle Art Museum)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또한 시애틀 시는 SPD라고 불리는 경찰국(Seattle Police Department)을 운영하며, 최근에는 설탕이 든 음료 1온스당 1.75센트의 세금을 부과하는 조례를 제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진짜 설탕이 든 탄산음료를 사려는 사람들은 차를 타고 벨뷰까지 가기도 합니다.
   저는 특히 시애틀, 벨뷰는 물론, 인구 3천 명의 메다이나까지 독립된 경찰국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놀라웠습니다. 이런 지역 경찰조직이 전국으로 보면 자그마치 18,000개라고 하는데요, 2) 경찰청이라는 단일 조직에 전국 경찰공무원이 소속되어 있는 우리나라와는 상황히 매우 다릅니다. 우리나라로 친다면, 사당동과 방배동에 각각 서로 다른 제복을 입은 경찰이 있고, 동주민이 선출한 대표가 경찰국장을 임명하는 상황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방배동 인구만 해도 메다이나의 40배인 12만 명이니까요. 한국에서도 미국과 유사한 자치경찰제도를 도입하였습니다만, 지역 간 법집행의 불균형, 선출직 단체장의 인사권 남용 등에 대한 우려로 인해 경찰공무원을 국가직으로 유지 하기로 하였습니다. 3) 그렇다면 왜 미국은 경찰을 이렇게 작은 단위로 운영해 온 것일까요? 용의자를 검거하기에도 불편하지 않았을까요?

< 워싱턴 주 킹 카운티의 도서관과 경찰국 >

킹 카운티 내의 도시 중 규모가 큰 시애틀만 고유한 도서관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반면, 경찰국은 거의 모든 도시가 독립적으로 운영합니다.


  
연방정부와 주 정부의 권한 배분
미국의 수정헌법 제2조(Second Amendment)4) 연방이 주의 자위권을 침범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고, 수정헌법 제10조(Tenth Amendment)는 ‘헌법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사항은 연방이 아닌 주에 전속적으로 귀속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헌법은 국방, 조약체결, 우편, 특허 등 제한된 영역만을 연방 사무로 정하고 있으며, 법원에서 대표적으로 주의 고유한 사무로 인정해온 영역이 바로 ‘경찰권’입니다. 경찰권이란, 지역 사회의 위험을 방지하고 범죄를 수사하는 권한인데요, 역대 대통령들이 총기규제 필요성을 역설했음에도 연방의회가 강력한 법률을 제정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총기규제는 원칙적으로 주의 경찰권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5)
   그리고 이 막강한 경찰권은 각 주 헌법에 따라 더 작은 기초단체에 위임되곤 합니다. 워싱턴 주 헌법 제11항 제11조(Article XI, Section 11)도 카운티, 시티, 타운 등 기초단체에게 지역 경찰권(local police)을 집행하고 관련 규정을 제정할 권한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6) 이는 ‘나 자신은 내가 지킨다’ 내지는 ‘멀리 있는 정부를 믿지 않는다’라는 미국의 헌법이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지키면서 메이플라워 호를 탔던 사람들의 후예인 미국인들은 영국의 오랜 식민지배에 대한 기억까지 겹쳐져서 국가의 권력에 대항해 개인의 삶의 영역을 보호하는 것을 중시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연방정부가 단일한 주민등록제도를 만드는 것에도, 백신접종 등의 건강정보를 하나로 모아 관리하는 것에도, 강력한 연방경찰을 설립하는 것에도 반대합니다. 체계의 효율성, 정확성, 통일성보다는 비효율적이고 혼란스럽더라도 풀뿌리 민주주의와 자위권을 실현하기를 희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인의 생명과 신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경찰사무는 나와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 지역사회에서 직접 운영해야 안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한국은 ‘경찰이 중요해서’ 국가직으로 운영하고 미국도 ‘경찰이 중요해서’ 지방직으로 운영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미국 사람들이 사법 엘리트인 판사에게 생사여탈권을 맡기기보다 지역민으로 구성된 배심원들의 판단을 받기를 원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워싱턴 주는 판사도 선거로 선출합니다.
주민 1,000명이 모이면
‘도시’를 설립할 수 있다
이러한 자치이념의 정점은 주민의 의사에 따라 ‘시 정부’를 설립할 수 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워싱턴 주 헌법에 따르면, 도시는 1,000명 이상의 주민이 모이면 설립할 수 있습니다. 원칙적으로는 주민의 50% 이상의 동의를 구하는 주민투표를 한 후 카운티가 승인하는 절차를 따라야 하지만, 실제 가장 많이 쓰이는 방법은 도시 예정지 부동산(properties) 중 10%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신청서를 접수한 후, 카운티가 이를 승인하면, 전체 토지(acreage)와 부동산의 60%에 달하는 소유주의 서명을 받아 제출하는 방식이라고 합니다. 7) 주민들이 모여 정부를 결성하는 것도 신기하지만 이 표결권을 부동산 가치에 따라 정하는 것은 정말 생경합니다.
   호기심에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광역시·도와 기초지자체를 설립하는지 찾아보았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17조는 지방자치단체의 종류를 ‘법률’로 정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즉, '세종특별자치시'의 사례처럼 새로운 지방자치단체를 설립하려면 국회에서 법률을 통과시켜야 합니다. 또한, 지방자치법에 따라 ‘면’이 ‘읍’이 되려면 2만 명 이상이 되어야 하며, ‘시’가 되려면 15만 명 이상이어야 하고, 50만 명 이상의 ‘시’는 ‘도’의 사무 중 일부를 직접 처리할 수 있습니다. 행정구역의 경계 변경은 대통령령으로 할 수 있습니다만, 자치단체가 지역주민의 의견수렴을 거친 후 중앙정부에 건의를 해야 합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단 1천 명이 모여 시 정부를 설립하고, 시장과 의회의 선출방식을 정하며, 자치경찰을 운영하고, 세금도 징수할 수 있는 미국은 참 다른 세상입니다.
기업이 설립한 도시는
공적인 공간일까
이런 민간주도형(?) 지방자치제도 덕분에 미국에서는 ‘기업타운(company town)’도 설립할 수 있습니다. 기업이 한 지역의 부동산을 대부분 소유하고 지방행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업타운은, 다수의 공장 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제조업과 함께 부흥했다가 현재는 많이 줄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 네바다 주지사가 테크기업을 유치해 낙후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기업이 지방정부를 설립할 경우 조세를 부과하고 교육청과 법원(!)을 운영하며 공공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하는 법안을 제안했다고 하네요. 8) 언젠가 테슬라 고등학교와 애플 법원을 보게 되는 날이 올까요? 만일 기업이 모든 재산을 소유하고 정부까지 운영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지역은 공공재일까요, 아니면 사유재일까요?
   이 문제를 다룬 것이 Marsh v. Alabama 9) 사건입니다. 당시 앨러배마 주 Chickasaw라는 타운은 Gulf Shipbuilding Corporation이 소유하고, 보안관 등의 월급도 Gulf 기업이 지급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증인’ 신자인 Marsh라는 분이 사전에 허가를 받지 않고 거리에서 종교 팜플릿을 나누어주자, 보안관이 사유재산 침입으로 체포를 하였습니다. 미국은 수정헌법 제1조(First Amendment)에 따라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두텁게 보장되며, 누구나 공유지 위에서 복음전파활동을 할 수가 있습니다. 심지어 이라크전에서 죽은 군인의 장례식장 부근에서 “이라크전 전사자들은 하느님이 벌하신 것” 같은 팻말을 들고 반전운동을 하는 것도 허용될 정도이니까요. 10) 따라서 Marsh는 모두가 다니는 거리에서 종교활동을 하던 자신을 체포한 것은 수정헌법 제1조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Marsh는 결국 연방대법원에서 승소합니다. 연방대법관 5명은 아무리 기업이 소유한 지역이라 하더라도 공공에게 제공된 이상 자택과 같은 사유재산으로 볼 수는 없으며, 헌법과 법률에 의한 제한을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헌법상 종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기업의 소유권에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결론이라고 생각이 드시나요? 만약 Marsh가 백화점에서 팜플릿을 나누어주다가 제지를 당했다면 어떨까요? 또는 누구든 가입을 할 수 있는 소셜 미디어에서 특정 종교를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포스팅을 올리다가 계정이 차단되었다면 어떨까요?
   이 문제는 ‘어디까지가 공공의 공간인가’라는 어려운 문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그리고 특히 미국에서는 ‘공간의 공공성’을 논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개인이 헌법상의 기본권 침해를 당했을 때 그것이 ‘국가 행위’(state action)로 인한 것(여기에서 국가는 연방과 주, 기초단체를 모두 포함합니다)이라는 것을 입증해야 연방법원이 관여를 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다니는 백화점과 인터넷은
공적인 공간일까
앞서 드린 질문에 대한 답을 드리면, ‘백화점’의 경우는 한 때 대법원이 Marsh 판결과 유사하게 ‘공적 공간(public square)’이라는 식으로 결정을 하였으나, 11) 몇 년 후에 번복을 하였습니다. 12) 반면, ‘인터넷 웹사이트’의 경우 여전히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지만, 현 법원의 입장은 ‘기업의 사적 공간’이라는 쪽으로 기울어 있습니다.
   연방대법원은 2019년 Halleck 판결에서 케이블에서 제공되던 민영 공익채널이 단순히 ‘의견공유의 장(forum of speech)’으로서 역할을 한다는 이유만으로는, 각 개인이 헌법에 따라 자신의 표현의 자유를 보호할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공적 공간’에 해당하지는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13) 그리고 연방 제9항소법원(우리나라의 고등법원 급입니다)은 Halleck 판결을 인용하면서, 유튜브(YouTube)가 기업의 사적인 웹사이트일 뿐 ‘공적 공간’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결정하였습니다. 당시 Prager University라는 정치단체는(University라는 명칭을 썼지만 대학의 실체가 없는 비영리법인이었다고 합니다) 유튜브가 자신들의 계정에 제재조치를 한 것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나, 법원에서는 유튜브의 행위를 ‘국가행위’라고 볼 수 없으므로 헌법상 표현의 자유 침해를 다툴 여지가 없다고 본 것입니다. 14)
   반면,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인터넷의 공공성을 인정하는 듯한 판결도 최근 등장해기 시작했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에는 성범죄자 등록시스템에 등록된 사람이 소셜 미디어에 가입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이 있었습니다. 성범죄를 저지르고 형을 받았던 Packingham 씨는 자신에게 주정차 위반 티켓을 발부한 카운티 경찰을 비하하는 포스팅을 페이스북에 익명으로 올린 후 경찰당국에 의해 적발되었고 소셜 미디어를 이용한 죄로 배심원에 의해 유죄선고를 받게 됩니다. 판결에 불복한 Packingham 씨는 연방대법원까지가게 되는데, 최종적으로 법원은 Packingham 씨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15) 소셜미디어가 모든 대중이 향유하는 의사소통 채널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에 대한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법률을 제정한 것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지나친 제한이라는 취지였습니다. 16)
   더 재미있는 사례는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트위터에서 진보 인사의 댓글달기 기능을 차단한 사건입니다. 대통령이 국민과 소통하는 트위터 계정은 ‘공적 공간’일까요, 아니면 트위터의 사유재산일까요? 대통령이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만 댓글을 차단하면 그 사람은 토론의 장에서 부당하게 밀려나는 것이 아닐까요? 트럼프 대통령이 낙선하면서 이 사건은 각하되었지만 보수 성향의 Thomas 대법관은 흥미로운 동의의견(concurrence)을 남겼습니다. 그는 트위터가 트럼프 대통령 계정을 영구적으로 삭제한 것을 지적하며, 요즘 디지털 플랫폼은 사람들의 의견 교환에 ‘역사상 유례가 없이 집중화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무조건 ‘국가행위가 아니다’라고 할 것이 아니라 일정한 공적인 규제 메커니즘을 마련해야 한다는 점을 피력하였습니다. 17)
공적인 공간과
사적인 공간
이렇듯 미국 법원이 ‘공적 공간’이 어디까지인지에 대해 치열한 논의를 하는 이유는, 한편으로 ‘사적 공간’에 대한 보호가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프라이버시’는 앞서 말씀드린 ‘표현의 자유’와 함께 미국법의 핵심입니다. ‘표현의 자유’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맘대로 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이라면, 프라이버시는 ‘(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니) 나를 제발 건드리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둘 다 개인의 자율성(automy) 실현에 필수적인 요소이지요. 그런데 헌법에 새겨진지 200년이 넘은 표현의 자유와 달리 프라이버시권은 헌법상 기본권으로 인정된지 6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통상 미국은 ‘성문법’(civil law 또는 statutory law) 국가인 우리나라나 유럽과 달리, ‘보통법’(common law) 체계를 따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영국에서 유래한 보통법은 법률상의 명시적인 규정이 있는지 여부에 구애받지 않고 법원이 판례를 쌓아가며 구속적인 법리를 만들어 온 전통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미국에서 프라이버시 법제는 학자들이 먼저 제안하고 이후에 판례로 받아들여진 드문 사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시작은 보스턴 출신의 유명 변호사 워렌(Warren)과 브렌다이스(Brandeis, 브렌다이스는 후에 대법관이 됩니다)가 1895년에 쓴 “The Right to Privacy”라는 논문입니다. 여기에서 이 두 사람은 프라이버시 문제가 왜 계약법, 명예훼손, 지적재산권법 등 기존 법제로 충분히 보호되지 않고 있는지를 논증하고, ‘Right to be let alone(내버려 두어질 권리)’을 충실히 보호하기 위한 법리를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18)
   예를 들어 누군가 당신을 매우 존경해 일기를 몰래 입수한 후 당신에게 묻지 않고 이를 출판했는데,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인세 전액을 당신에게 주었다고 가정해봅시다. 당신은 명성과 금전적 이익을 얻었지만, 원치 않게 사생활이 만천하에 공개됨으로써 정신적 피해를 입었습니다. 워렌과 브렌다이스에 따르면 이 경우 지적재산권 법제로는 상황을 바로잡기 어렵다고 합니다.
   저작권 침해는 통상 저작권에 상당하는 금액만 지급함으로써 피해를 구제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경우 법원이 ‘출판금지 명령’을 하고 정신적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을 명해야 비로소 다소간 만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워렌과 브렌다이스는 관련된 계약이나 법률이나 선례가 없더라도 법원이 프라이버시 침해에 대해 적절한 구제를 제공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후 법원은 민사소송에서 프라이버시 침해(privacy torts)에 따른 손해배상의 범주를 넓혀가게 됩니다.
헌법상 프라이버시권의 탄생
워렌과 브렌다이스는 ‘개인-개인’ 간의 프라이버시 침해 문제를 다루었을 뿐 ‘국가-개인’의 관계는 예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연방대법원이 개인이 국가에 대항할 권리로서 프라이버시권을 인정하면서 그 적용 범위가 비약적으로 넓어지게 됩니다. 1965년 연방대법원은 수정헌법의 제1항, 제3항, 제4항, 제5항 등을 입체적으로 해석해 ‘개인적인 삶을 침해받지 않을 권리’가 헌법상 보호되는 기본권이며 이를 부당하게 침해하는 법률은 위헌이라는 원칙을 세우게 됩니다.
   기존에도 수정헌법 제6조(Sixth Amendment)에 따라 영장 없이 집에 들이닥치거나 몸을 수색하거나 도청을 하는 것 등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단순히 집에 들어오지 말아 달라는 수준을 넘어, 국가가 법률을 통해 개인에게 일정한 의무를 부과할 때, ‘이 영역만큼은 삶의 방식을 강요하지 말아 달라’는 철학적인 항변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법원이 개인적 삶에 대한 존중을 법 원칙으로 채택함으로써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인정하는 일련의 판결이 등장하게 됩니다.
   헌법상 프라이버시권은 피임약 판매를 금지한 코네티컷 주법에 대한 위헌 선언 판결에서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19) 1873년에 제정된 코네티컷 주법은 피임약 사용을 벌금 또는 60일 이하의 징역에 해당하는 범죄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시민단체들은 1940년대부터 이 법률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지만, 대법원은 그 법에 근거해 유죄를 선고받은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소송을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20) 이에 Planned Parenthood League라는 시민단체의 Griswold 씨는 뉴헤이븐(New Haven) 지역에 클리닉을 개설해 공개적으로 피임약을 제공하였고, 체포되어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Griswold 씨는 기다렸다는 듯 소송을 제기했고, 연방대법원은 코네티컷 주법이 “결혼생활의 프라이버시(marital privacy)”를 위반했다고 보았습니다. 결혼제도는 미국 건국 이전부터 존재해 온 인류의 전통이자 신성할 만큼의 내밀성(intimate to the degree of being sacred)이 보장되는 영역이므로, 국가가 함부로 침범해서는 안된다는 취지였습니다.
   그렇다면 결혼한 커플만이 프라이버시가 있는 걸까요? Griswold 사건이 있고 7년 후, 연방대법원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도 피임약을 살 자유가 있다고 판결합니다. 21) 시민운동가 Baird 씨는 보스톤 대학교에서 강의를 마친 후 학생들에게 피임관련 물품을 배부하였고, 결혼한 커플에게만 피임약을 팔 수 있도록 한 메사추세츠 주법 위반으로 유죄를 선고받습니다. 당시 매사추세츠 주는 비혼 상태의 남녀가 피임약에 접근할 수 있게 되면 혼외 정사가 증가해 결혼의 신성성을 해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결혼의 신성성을 보장하기 위해 원치 않는 아기를 강제로 가지게 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고, 아기를 갖는 개인적인 의사결정에 있어서 결혼한 사람과 결혼하지 않은 사람을 차별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고 판단하였습니다. 22)
낙태권도
프라이버시 영역에 속하는가
그렇다면 아기를 갖는 의사결정은 무조건 개인의 프라이버시 영역일까요? 이는 ‘낙태’에 대한 어려운 논의로 이어집니다. 이미 생긴 아기를 수술로 없애는 것은 태아의 생명권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는 부모가 아기를 낳을지 결정할 권리(reproductive rights)를 존중하는 사람들(pro-choice)과 아이의 생명을 중시하는 입장(pro-life)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미국 대법원은 1978년 Roe v. Wade 판결에서 낙태를 금지한 텍사스주법을 위헌으로 결정하였습니다. 이 판결은 당시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Roe씨(가명)를 대리한 변호인단도 예상치 못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법원은 아이를 갖는 의사결정은 여성의 프라이버시 영역에 속하고, 이는 수정헌법 제14조(Fourteenth Amendment)에 의해 보호되는 적법절차의 권리(due process rights) 중 하나라고 천명하였습니다. 적법절차의 권리란 국가가 원칙적으로 침해하지 않아야 하는 중대한 기본권으로, 국가가 이를 침해하는 행위를 하려면 압도적인 공익적 사유(compelling government interest)를 입증해야 한다는, ‘엄격 사법심사(strict scrutiny)’ 원칙이 적용되는 분야입니다. 23)
   이 판결에 따라 미국의 모든 주에 최소 한 곳은 낙태 시술을 하는 병원이 설립되어 있고, 코로나 바이러스의 유행 이후 낙태 관련 약품의 원격처방도 허용되었습니다. 24) 다만, 임신 몇 주 차부터 낙태를 할 수 있는지는 아직 다툼의 대상입니다. Roe v. Wade는 임신 23주 이후 산모는 건강상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 경우 등에만 낙태를 할 수 있다고 경계를 정하였는데, 최근 미시시피 주에서 임신 15주 이후 낙태하는 것을 금하였고, Roe v. Wade 판결의 진앙지였던 텍사스 주는 대법원 소송전을 예상(?)하면서 임신 6주 이후 낙태를 금하는 법을 제정하기도 했습니다. 현 대법원은 미시시피 주 법률을 심리 중인데, 최근 임명된 Amy Coney Barret 대법관(독실한 카톨릭 신자이면서 7명의 아이가 있습니다) 등 보수 성향 대법관이 다수인 만큼 Roe v. Wade로부터 후퇴하는 판결이 나오리라는 예상이 많습니다.
동성애는
프라이버시 영역에 속하는가
피임과 낙태에 관한 문제 외에, 프라이버시권은 인종차별과 동성애 영역에서도 큰 역할을 해왔습니다. 만약 가정을 이루는 것이 헌법상 보호되는 ‘내밀한 의사결정’의 영역이라면 ‘누구’와 결혼을 할지도 개인이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Obergefell v. Hodges(2015) 판결은 백악관부터 소셜 미디어까지 미국 전역을 온통 무지갯빛으로 물들였던, 역사적 사건입니다. 기존에 동성 간 결혼은 각 주마다 규율이 달랐는데, 보수적 성향의 주 의회가 동성혼을 금지하면 진보 성향의 주 법원이 그 법률을 폐지하기도 하고, 반대로 주 의회가 허용하면 주 법원이 폐지하기도 하는 등 전국적으로 혼란이 일던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주 법원에 계류된 6개의 소송이 합쳐져 대법원까지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당시 대법관은 보수 성향 5명, 진보 성향 4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보수 성향의 Anthony Kennedy 대법관이 의외의 표를 던지면서 동성 간의 결혼이 적법절차 원리(Due Process Clause)와 평등원칙(Equal Protection Clause)에 의해 보호되는 기본권(fundemental rights)이므로 합리적 이유 없이 이를 금지하는 주 법률은 위헌이라는, 명확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제가 있는 워싱턴 주는 2012년에 동성혼을 합법화하였고, 2년 전에는 주민등록증에 제3의 성을 기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요즘에는 언어문화에서 he/she의 구분을 폐지하려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영어가 성의 구분을 불필요하게 강조해 성차별을 강화해왔고, 성전환자 등 제3의 성을 지닌 사람들에게 일도양단적 선택을 하게 만든다는 취지입니다. 저는 행사에 참여할 때마다 ‘자신이 원하는 대명사가 무엇인지’를 묻는 칸에 답을 했는데요, 제 외모와 관계 없이 he/him, she/her, they/them 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제가 다니는 학교에서 발간하는 법학저널인 Washington Law Review에서는 3인칭 동사와 어울리지 않는 they를 대신해 zie/zer라는 단수 대명사를 쓸 것을 권고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정도로 감수성이 발달한 요즘엔 상상하기가 어렵지만, 불과 20년 전에는 동성 간 성교가 ‘범죄’인 주도 있었습니다. 연방대법원은 2003년 Lawrence v.Texas 판결에서 동성 간 성교(intercourse)를 금하는 텍사스 주의 Sodomy law를 위헌이라고 판단했습니다. Lawrence씨는 자신의 집 안에서 동성 남자친구 Garner씨와 성행위를 하던 중, Garner씨의 전 남자친구로부터 불법 무기소지 관련 신고를 받고 출동한 보안관이 성행위 장면을 목격, Sodomy law 위반으로 체포된 후 유죄선고를 받았습니다. Lawrence 씨는 인권변호사단체인 ACLU(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의 조력을 받아 대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고, ‘합의에 의한 성관계’는 프라이버시 영역에 속하므로 국가가 개입할 수 없다는 판결을 이끌어냈습니다. 25)
또 다른 무기:
평등원칙
프라이버시권과 함께 수정헌법 제14조에 따른 ‘평등권’(equal protection)도 소수자 차별금지를 위해 종종 활용되는 논거입니다. 최근 개봉한 독립영화중 ‘Loving’이라는 영화가 있는데요. ‘다른 인종 간의 결혼’을 ‘범죄’로 규정한 버지니아 주법에 대항하여 사랑을 지키기 위해 투쟁한 Loving 씨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26) Loving 씨 부부는 워싱턴 DC에서 결혼을 하고 버지니아 주에 가정을 꾸리고 있었는데, 아닌 밤중에 경찰에게 체포를 당하고 주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습니다. 결국 버지니아 주에서는 살 수 없게 되어 다른 주에서 살고 있던 차에, 마침 인종차별 사건의 원고를 찾던 ACLU의 변호사가 이 부부를 설득하여 대법원으로 사건을 가져가는 내용입니다.

< Loving v. Virginia 판결의 주인공인 Loving 부부 >

‘Loving’ 영화 중 한 장면을 보고 그린 것입니다. 내용도 따뜻하거니와, 미국법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영화이므로 시간되실 때 감상하시기를 추천드립니다.


   미국도 우리나라처럼 단순히 법률이 잘못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소송을 제기할 수는 없고, 반드시 구체적으로 이익을 침해당한 누군가가 직접 소송을 제기해야 합니다. 피임약 교부 사건에서 시민단체가 유죄선고를 받기 위해 직접 클리닉을 열었던 것처럼, 미국에서는 ACLU 등 인권운동 단체들이 피해를 본 사람을 찾아 소송비용을 모두 부담할테니 원고가 되어달라고 부탁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만큼 대법원 판례를 바꾸는 일이 인권 신장에 크게 기여하는 일이자, 시민단체의 명예를 높이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흑인 대법관인 Thurgood Marshall은 ‘인종 분리 교육’이 위헌이라고 선언한 Brown v. Board of Education of Topeka 사건의 변호를 맡았던 인권운동가였습니다. 27) 1896년 연방대법원은 Plessy라는 판결에서 공공서비스의 수준이 동일하다면 인종으로 분리를 해도 무방하다는 취지의 “separate but equal” 원칙을 정했었는데요. 28) 이 판결은 공립학교에서 ‘백인 교실,’ ‘흑인 교실’을 나누는 참담한 결과를 불러오게 됩니다. 비로소 Brown 판결에서 대법원은 대법관 만장일치로 ‘인종에 기초한 차별’은 압도적인 공익적 사유가 없는 한 수정헌법 제14조에 따른 평등원칙을 위반한다는 원칙을 정립하게 됩니다. 지금은 당연해 보이지만, 당시에는 남부지역이 이 판결에 불복해 시민 간에 심각한 대치가 이어지면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군대를 파견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 대법관 >

‘Notorious RBG’는 긴스버그 대법관 평전의 제목입니다. 한 로스쿨 학생이 ‘Notorious B.I.G.’라는 랩 음악에서 따와 이름 붙인 것으로, 인권변호사이자 대법관으로서 논리정연하고 꼿꼿하게 소수자의 권리를 존중하는 의견을 관철해 온 모습을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얼마 전 돌아가신 Ruth Bader Ginsburg 대법관도 ACLU 변호사로서 백인 남성 중심의 법조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인물이었습니다. 검은 법복위에 특유의 칼라 장식을 올려 스타일 아이콘으로 등극하기도 했지요. 그는 1972년 ACLU에 ‘여권 신장 프로젝트팀’을 만들었고, 1973년 Frontiero 사건에서 여성 군인과 남성 군인에게 서로 다른 복지혜택 요건을 적용하는 것은 ‘성별에 기초한 부당한 차별’이라는 결정을 이끌어냈습니다. 29) 당시, 남성 군인은 부인에 대한 설명 없이 주거지원을 받을 수 있던 반면, 여군은 남편의 경제적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다고 합니다. 긴스버그는 같은 논리적 기초 위에서 남성의 이익을 대변하기도 했습니다. 배우자의 사망 후 아이를 단독 양육하게 되었을 때 사회보장 혜택이 남편을 잃은 ‘여성’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부당하다는 판결을 통해 부인을 잃은 남성들도 똑같이 수혜를 받도록 하였습니다. 30)
   1960~1970년대 일련의 판결을 통해 대법원은 프라이버시권 또는 평등원칙 위반 논거에 기해 다양성을 억압하는 법률을 폐지해 나갔습니다. 이제 법원은 인종, 성별, 성정체성에 기반한 차별적 대우는 일단 모두 ‘의심스러운’ 것으로 여깁니다. 따라서 정부기관이 압도적 공익적 요청에 따라 차별 대우를 하는 것이 불가피했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할 경우 헌법 위반이 됩니다.
   하지만 모든 종류의 차별에 이러한 기준이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도화된 자본주의 국가 답게 ‘부’로 인해 차별이 생기는 경우에는 엄격심사 원칙을 적용하지 않습니다. 일례로, Rodriguez 판결에서 연방대법원은 세금이 많이 걷히는 지역의 공립학교는 부유해지고, 가난한 지역의 공립학교는 더욱 열악해지도록 예산구조가 짜여져 있더라도, 주 정부가 재정여력 등 합리적 근거를 댈 수 있다면 헌법상 평등원칙 위반은 아니라고 판단하였습니다. 31) 이는 교육받을 권리를 헌법상 기본권으로 규정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풍경입니다. 32)
어떻게 하면 조화로운 질서를
찾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 플로리다의 무너진 건물에서 시작해서 미국인들은 왜 이렇게 복잡하게 정부조직을 구축해 놓았는지, 왜 먼 연방정부보다 가까운 지방정부를 더 신뢰하는지, 어떻게 타인으로부터 침범받지 않는 개인의 공간을 구축해 왔는지, 그리고 이러한 개인적 공간에 대한 관념이 유색인종과 성소수자의 권리 증진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이 글의 제목은 10년 전에 읽었던 ‘정치학으로의 산책’(21세기 정치연구회 엮음, 한울, 제2개정판)에서 따온 것입니다. 당시 여러 명의 저자들이 정치철학부터 세계정치까지 어려운 내용을 쉽고 재미있고 일관된 어조로 서술한 것에 큰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저도 미국법의 복잡하고 난해한 판례 뒤에 숨어 있는, 삶 속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가고 싶었습니다만, 의도한 만큼 편안하게 읽혔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미국에 살면서 개인의 역할과 국가관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들과 너무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매일 놀랍니다. 미국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남의 맘은 내 맘 같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올바른 결론’을 찾기를 기대하기보다는, 비교적 조화로운 결론을 찾기 위해 나아가는 ‘과정 중에 있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 실현을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반면, 미국은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는지를 먼저 걱정합니다. 이러한 ‘내 갈 길 간다’는 태도는 다양한 인격과 사유를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것이 법제화되면서 동성애를 범죄시하던 나라가 20년 만에 동성애자의 결혼권을 인정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적 공간을 넓게 인정하면 할 수록 공공 영역이 위축되는 것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일례로, 연방대법원은 개인의 종교적 자유가 정부의 의무교육제도의 공익적 목적보다 우선하므로, 부모가 종교적인 이유로 자녀를 공립학교에서 퇴학시킬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33) 이러한 부모의 극단적인 사례는 Tara Westover의 『Educated』라는 책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저자의 부모는 정부를 극도로 불신하여 자녀의 출생등록을 하지 않고, 학교는 물론 병원에도 보내지 않으며, 자동차 등록, 보험가입, 게다가 안전벨트 착용 의무까지 거부해 불안하고 위험한 환경에서 아이들을 양육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더해 연방대법원은 국가가 침범할 수 없는 개인적 권리의 범위에 성정체성이나 임신여부를 결정할 권리 뿐 아니라, ‘총기소지권’도 포함된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34) 대법원이 이러한 입장에 있는 이상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총기규제를 외쳐도 연방이든 주든 총기소지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입법을 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1920년대에는 기본권의 영역에 ‘여성과 아동이 최저임금 이하를 받을 권리’나 ‘제빵 노동자가 주 60시간을 넘어서 노동할 권리’까지 포함함으로써 국가가 아동노동과 약탈적 임금을 규제하는 것을 법원이 금지하기도 했으니 35) 이는 개인적 공간을 넓히는 것이 반드시 바람직한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편 우리나라는 미국에 비해 가지런하게 잘 조직된 사회입니다. 길고 지루한 토론을 이어가기보다는 명확한 결정권자가 올바른 답변을 내리기를 바라고, 공익적으로 필요하다면 어느 정도 프라이버시 침해를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적인 공간에 비해 공적인 공간이 크기 때문에 공공보험, 공교육, 주거지원 등 사회안전망도 촘촘한 편입니다만, 이런 가지런함 속에서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개인들은 자칫 ‘모난 돌’로 치부되기 쉽습니다. 외도한 배우자를 경찰이 체포하거나 결혼을 이성 간의 결합으로 한정하는 것은 ‘정상 가족’ 에 대한 신념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개인이 자신이 바라는 대로 인격을 실현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도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제도적 여건을 마련하는 것은 너무 지당한 과제처럼 들립니다만 이를 실현하는 것은, 미국의 복잡다단한 발전사가 보여 주듯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아주 기본적인 개념에서부터(‘인격’이 무엇인지,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 다투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우리 사회가 각 개인의 고유한 삶의 영역을 인정하고, 언뜻 화해되기 어려워 보이는 견해들을 경청해 줄 여유가 있는 공간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다양한 삶의 가치와 희로애락이 사회제도와 조응해나갈 때 ‘모든 삶이 삶으로서 존중받는 사회’에 한층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목차
딸들의 노래: 삶과 시간을 꿰는 흑인 여성들의 음악, 신화, 시
미국법학으로의 산책: 개인의 공간과 국가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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