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들의 노래:
삶과 시간을 꿰는 흑인 여성들의
음악, 신화, 시
류아정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석사과정.  

“미국에서 가장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은 흑인 여성이다. 미국에서 가장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은 흑인 여성이다. 미국에서 가장 외면당하는 사람 또한 흑인 여성이다.”(말콤 X, 1962).



“그토록 많은 혐오를 겪고 살아남았으면서도 그것을 계속 견디며 살아가는 존재가 도대체 흑인 여성 말고 또 있을까? 이토록 맹렬한 적대감을 온몸으로 흡수하면서도 여전히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는 인간 존재가 또 있을까?”(오드리 로드, 1981).



   흑인 여성들은 인종, 젠더, 계층의 위계에서 교차적으로 억압당한다. 2014년 기준 미국에서 실종된 흑인 여성은 약 64,000명으로, 해당 연도에 등록되어 있던 실종자 전체의 34%를 차지했다. 1) 2006년 진행된 연구에 의하면 흑인 여성의 76%가 만 13세 전에 성추행을 겪었고, 2) 미국 법무부의 2003년 보고서에 따르면 흑인 여성이 성폭행을 당했을 경우 15명 중에 고작 1명 꼴로 신고를 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3) 그럼에도 그들의 실종이나 폭력 피해가 제대로 된 수사나 재판으로 이어지거나 언론에 보도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이러한 상황과 더불어 흑인들이 공유하는 사회경제적 취약성은 흑인 여성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역사적 재난을 겪고 있음을 보여준다. 1950년대에 프랑스의 흑인 정신의학자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이 지적했듯,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폭력이 흑인에게는 일상으로 체화되어 그들을 “존재하지 않는(nonbeing)” 상태로까지 축소시키고 마는 현실이, 4) 그로부터 약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흑인들이 오래도록 존엄한 인간으로서 인정받지 못했기에, 그들을 중심으로 ‘인간’이라는 당연시되는 범주에 대한 존재론적인 의문과 해체 시도가 촉발되었다. 따라서 포스트휴먼 사유를 선도하고 있는 세계적인 석학 로지브라이도티(Rosi Braidotti)와 여러 퀴어 학자들은 ‘퀴어’나 ‘사이보그’의 상상이 어떻게 흑인의 신체를 둘러싼 대상화와 비인간화의 역사를 통해 가능해졌는지, 우리의 ‘인간성’에 대한 사유가 어떻게 그들의 존재에 은연 중에 의지하고 있는지를 짚어낸다. 한편, 개인이 경험하는 억압은 그를 구성하는 여러 특성과 위계의 교차적인 상호 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므로 ‘획일화된 여성 경험’을 상정할 수는 없다고 하는 ‘상호교차성 이론(intersectionality)’과 ‘제3물결 페미니즘(third-wave feminism)’ 또한 흑인 페미니스트들의 열띤 논의에 빚을 지고 있다. 이외에도, 역사와 계보를 오래도록 부인당해온 흑인 여성들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노래하며 자신의 조각난 영혼을 신화의 장으로 만들거나, 자신의 비인간화되는 몸을 미래의 주인공으로 삼아 눈부신 예술을 실험하고 있다. 그들이 행하는 시공간, 몸, 그리고 집과 자유에 대한 끝없는 사유와 실험들이 분명 우리에게도 큰 영감을 주리라 믿으면서, 이들의 신화적 세계를 소개하고자 한다.
흑인 여성들의
‘뿌리 뽑힌’ 위기
기억되는 것들의 세계, 그 기념비 사이사이의 큰 틈은 잊혀진 것들이 채우고 있다. 잊히기 싫은 자들, 해야 할 이야기를 하지 못한 이들은 지상에 남아, 자신을 발견한 누군가에게 끈적하게 달라붙는다. 물론 죽지 않아도 유령인 사람들도 있다. 태어날 때부터 유령이었거나,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사건으로 인해 갑자기 유령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숨 쉬고 있는 우리 중에는 존재와 기억을 부정당하고, 온전한 인격과 삶을 인정받지 못하는 몸들이 있다. 기억 할 만한 위인들을 적고, 기득권의 성공 서사를 읊고, 규범적인 것들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 말하는 동안 ‘보잘 것 없어서’ 잘 보이지 않던 자들과 그들의 이야기는 점차 볼 수 없는 것이 되어간다. 그렇게 누군가들은 유령이 된다. 끝없는 혐오와 폭력을 감내하는 동안 흑인 여성들은 말할 수 없고 보이지도 않는 사회적인 ‘유령’이 되어간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에 녹아들어 있는 수많은 다른 ‘유령들’을 감각한다.

“일부러 기억에서 지우고 잊은 후, 더 이상 그녀를 잃는 것은 불가능했다. 누구도 그녀를 갖지도, 찾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해질 만한 이야기가 아니야. 이것은 물려줄 만한 이야기가 아니야. 그렇게 그녀는 정교하게 잊혔다.” 5)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의 역작 <Beloved (1987)>는 흑인 여성 세스(Sethe)와 그의 주변인들을 잠식시키는 트라우마를 그려낸다. 대농장에서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해 ‘자유민’이 된 세스는, 어린 딸이 노예상에게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의 손으로 딸을 죽이고 만다. 이후 세스에게는 덴버(Denver)라는 둘째 딸이 생기고 그를 자유민으로 키울 수 있게 되었지만, 세스는 노예제의 어떤 유산도 대물림하기 싫은 마음에 덴버에게 플랜테이션에서의 착취와 비인간적 대우, 성폭행 피해, 딸을 죽여야 했던 괴로운 경험에 대해 일절 말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죽은 첫 딸의 혼령이 ‘빌러비드(Beloved)’라는 이름의 초인간적인 존재로 돌아와 세스의 집에 함께 살게 된다. 세스는 계속해서 빌러비드로 표상되는 체화된 기억에 현재의 삶을 압도 당하고, 덴버는 빌러비드가 어떠한 존재인지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에게 어머니를 빼앗기고 만다. 결국 덴버는 빌러비드를 달래기 위해 제대로 들어보지도 못한 어머니의 삶을 조각조각 끼워 맞추고 때로는 창조해가며 어머니의 불완전한 이야기를 대리하는 유일한 화자가 되며, 그와 같은 말하기의 행위가 어머니를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지키는 데에 있어 필수적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빌러비드와 덴버는 서로에게 “나를 잊지 않을 거지? 네 얼굴은 내 거야. 너는 내 자매고 너는 내 딸이고 너는 내 얼굴이야. 너는 나고, 나는 다시 너를 찾았어. 너는 나에게 돌아왔지”라며 뒤섞인 자아와 목소리로 서로에게 말을 걸고, 세스를 살리기 위해 마을의 흑인 여성들은 혼자 감내해온 고통스러운 비밀을 하나씩 털어놓으며 일종의 집단적인 굿을 행한다. 이는 세스를 일시적으로 살려주지만, 소설의 결말은 빌러비드가 여전히 떠나지 않고 이 여성들의 삶과 집안에 영원히 도사리고 있을 것임을 암시한다. 모순적이게도, 빌러비드를 희석하고 잊기 위해서는 오로지 계속해서 그를 함께 기억하고 말하는 방법 뿐이다. 과거와 현재, 기억과 환상과 실재가 구분없이 뒤섞이는 이 혼란 속에서, 모든 기억을 지우지도 말하지도 못한 채 트라우마에 갇혀버린 세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의 삶에 영향을 주는 노예제에 맞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끈질기게 좇고 말해냄으로써 모두를 지켜야만 하는 덴버의 처지는 소설 속 은유일 뿐 아니라 흑인 여성들이 실제로 공유하는 핵심적인 고통을 집약한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끈질기게 좇으며 세스를 이해하고 자신을 둘러싼 상황들을 소화하려 하는 덴버처럼, 책 <Lose Your Mother (2007)> 6) 에서 미국의 흑인 비평학자 사이디야 하트만(Saidiya Hartman) 또한 ‘왜’라는 질문을 가지고 집요하게 아카이브를 뒤져본다. 그리고 흑인들의 흔적이 구조적으로뿐 아니라 개인의 의지로도 철저하게 삭제되어 왔음을 절감한다. 노예제를 탈출한 이들마저 자신의 과거 기록과 사진을 제거해 수치와 고통의 기억을 지우고자 했기 때문이다. 한편, 도서관을 채운 수많은 미국의 ‘공식’ 노예 아카이브들은 실제 노예제를 이해하기에 너무나도 협소했다. 두꺼운 노예 역사서들은 거래된 인원 수, 그들의 가격, 무역 경로나 판매자, 수령인 정보 등 ‘팩트’로 가득했지만 정작 거래된 사람들의 이름, 지난 삶과 가족 관계, 거래 이후의 족적 등에 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 “나는 훼손된 자들, 파괴된 사회들의 흔적을 좇았다. 목록을 채운 각 물건에서 나는 무덤을 읽었다. 노예 아카이브를 읽는 것은 공동묘지에 입장하는 것과 같은 경험이었다”고 하트만은 말한다.
   결국 하트만은 해답을 찾기 위해 노예 무역의 출발지였던 서아프리카에서 일년을 여행한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노예의 역사는 지워지고, 다른 부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해 상대를 노예로 팔아 넘겼거나, 백인들과 싸워 노예제를 빗겨간 아프리카 민족들의 ‘영광스런 역사’만이 남았음을 알게 된다. 그곳에 ‘흑인 공동의’ 유대는 없으며, 지구상 어디에서도 자신의 계보는 발굴될 수 없음을 깨달은 하트만은 마음의 열병을 앓는다. 이로부터, 흑인 디아스포라(diaspora) 인구에게는 ‘역사’라고 일컬어지는 기록을 재구성하는 것도, 다시 쓰기를 통해 현재를 규명하는 작업에도 근본적인 한계가 있음이 드러난다. 이에 저자는 자신의 계보가 공백으로 표상되는 ‘도망자들의 역사(fugitive history)’ 그 자체라고 생각하게 된다. 어느 시공간에도 설 자리가 없는, 지워진 목소리와 기록되지 않은 삶들이 만드는 공백의 역사를 상상하면서, 그는 존재하지 않는 집으로 ‘돌아가려는’ 시도가 아닌, 새로운 길과 집을 구성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딸의 목소리로
어머니와 자매들의 이야기를

“우리의 어머니와 할머니들은 아직 적힌 적 없는 음악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그들은 자신들 안에 있는 알 수 없는 것이 알 수 있는 것으로 태어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영혼에 대한 규명이 자신들의 사후에나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당장에 갈 수 있는 곳이나 향할 곳 없이 아주 느리게 서성이곤 했고, 남자들은 이러한 어머니들의 상태와 이야기로부터 아무 의미도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앨리스 워커, 1983).”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활동가이자 시인이었던 오드리 로드(Audre Lorde)또한 일찍이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말을 통해, 억압적인 서사와 구획으로 점철된 권력의 장에 그저 흑인 여성을 더하는 것만으로 자유를 획득할 수는 없음을 피력한 바 있다. 대신, 그는 흑인들이 자유로워지기 위해 새로운 ‘시’와 ‘신화’를 구축해낼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의 출발점은 여성 개인의 풍부한 감각과 느낌을 긍정하고 재해석하는 것이다. 로드는 “시를 통해 이름도 형식도 없이, 미처 태어나지 못한 채 느낌으로만 존재하던 아이디어에” 이름과 형태를 부여할 수 있고, 이처럼 우리의 감정을 “차이가 몸담을 수 있는 아지트”나 “가능성의 공간”으로 새로이 바라봄으로써 흑인 여성의 구체적인 삶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그는 “백인 아버지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우리 안의 흑인 어머니, 시인은 우리의 꿈속에서 이렇게 속삭인다. 나는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자유롭다”라고 말한다. 즉, 로드는 인종적이고 젠더적인 이분법 구도를 그저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흑인과 여성에게 유독 결부되던, ‘과하게’ 감정적이라는 낙인을 통째로 하나의 신화로서 창조해내며, 그 감각의 계보를 긍정한다. 7)
   제도화된 언어와 역사 체계로는 스스로의 가치에 관한 근거를 전혀 찾아 낼 수 없는 상황에서, 흑인 여성의 감정을 중시하고 그들을 둘러싼 새로운 가치의 계보(‘신화’)를 만들어내면서 그것을 말하는(‘시’) 작업을 가장 급진적으로 진행해온 곳은 음악이다. 로드가 ‘시’와 감각에 대해 말하기 이전부터, 조라 닐 허스턴(Zora Neale Hurston)을 포함한 흑인 인류학자들, 그리고 디아스포라의 문인들은 재즈를 들으면서 자신들이 ‘느끼는’ 원초적인 즐거움과 다채로운 욕망에 대해 묘사했다. 그리고 그것이 “창백한 백인”들이 단순히 ‘듣고’ 적어내리는 합리적 분석으로는 온전히 통역할 수 없는 근원적인 지식의 장임을 표현한 바 있다. 끊임없이 쪼개지고 부인당하는 상황에서도 느낌과 감정만큼은 나의 것이며, 나의 삶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현재도 음악은 흑인 여성들이 자신의 분절된 자아와 몸을 표현하고, 유령들을 보듬는 주된 장이다.

Solange - Weary


   디아스포라의 딸들은 지치고 소진되었다. “Weary”(2016)라는 곡에서 가수 솔란지(Solange)는 자신이 “세상에 한 줌의 흔적도 남기지 못할” 것이라고 느껴 무력해 한다. 가치있는 인간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면서 자신의 몸과 삶에 대한 주인권을 빼앗겨온 그는 노래 전체에 걸쳐 “난 내 몸을 찾으러 갈게, 곧 돌아올 거야. 나는 내 명예를 찾으러 갈게, 곧 돌아올 거야”를 끊임없이 되풀이해 부르며 잃어버린 주체성을 갈망한다. 그의 조각난 목소리는 여러 겹의 선율로 흩어지기도 뭉쳐지기도 하면서 시공간의 저편으로 떠나는 듯 하다. 노래가 끝날 즈음, 말할 수 없게 된 화자의 목소리는 웅얼거림에 가까운 소리만을 남겨둔다. 이베이(Ibeyi) 자매 또한 “Ghost”(2015)라는 곡에서 자신들의 세계를 메우는 유령들에 대해 노래하고, 그 유령들이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단어와 소리, 노래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음악의 비물질적이고 휘발적인 특성은 이처럼 유령이 되고 마는 흑인 여성들의 경험을 구현하는 동시에, 물질 세계의 그 어느 시공간도 점유하고 있지 못한 흑인 여성 서사를 모아 시간을 초월한 주체성과 계보를 구축할 수 있게끔 해주기도 한다.
   뿌리 뽑힌 딸들의 몸은 이윽고 자신과 트라우마를 공유하는 어머니나 자매들의 영혼으로 채워진다. 이 시작점은 니나 시몬(Nina Simone)으로부터 찾을 수 있을 듯하다. 그는 수많은 곡을 통해 흑인 여성의 경험과 저항 의식을 담아냈는데, 이 중 주목하고 싶은 곡은 1970년대부터 흑인 페미니스트들의 주제가가 된 “Four Women”(1966)이다. 이 곡에서 그는 1절부터 4절에 걸쳐 Aunt Sarah, Sephronia, Sweet Thing, Peaches라는 네 여성의 이야기를 1인칭으로 소개한다. 이들은 피부색과 머릿결, 세대에 따라 노예가 되거나 성매매를 하기도 하고, 백인 남성에 의한 성폭행으로 태어나기도, 어머니의 트라우마를 흡수해 감당할 수 없는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시몬은 흑인 여성들에게 대물림 되는 고통과 억압에 이들이 다르게 반응하는 방식을 그려내고, 설사 편견대로 “분노하는 비극적인 흑인 여자”라 할지라도 그들의 감정에 역사 문화적 맥락을 부여하면서 흑인 여성상에 다채로운 입체감을 준다. 한편, 해당 곡의 1절부터 3절은 클라이막스 없이 돌림 노래로 진행되며, “내 이름은 사라 이모야. 내 이름은 사라 이모야”와 같은 식으로 해당 절의 주인공 이름을 반복적으로 읊조리며 마무리되는데, 마지막 인물만은 다르다. Peaches는 앞선 여성들처럼 직접적이진 않아도 분명 노예제의 억압을 감각하고 있는 존재로, 분노와 광기를 담아 자신의 이름을 외친다. 실제로 이 Peaches의 이름을 외치는 순간이 노래의 클라이막스이자 종결이며, 다른 인물들과 달리 시몬은 그의 이름을 단 한 번 부르짖는다. 더 이상 힘없이 사그라들지 않고, “내 이름은 PEACHES야!”라고 소리치는 것은, 끊임없는 유령 생활과 몸에 켜켜이 쌓여온 트라우마를 청산하고자 하는,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기를 요구하는 주체적인 흑인 여성의 대두를 선언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Nina Simone - Four Women (Berklee BLM의 커버)


   니나 시몬은 어려서부터 꾸준히 피아노 천재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의 꿈은 미국 최초의 흑인 여성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었으나 왜인지 음악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 경험에 대해 니나 시몬 본인을 포함해 평론가들은 분명 그가 흑인이라는 점이 강하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후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바에서 피아노를 치다가, 흑인 여자는 노래를 해야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노래까지 하게 된다. 이러한 시몬의 개인사를 고려했을 때, “Four Women”의 수많은 리메이크 버전 중에서도 버클리 음악대학 학생들이 발표한 커버(2016)는 유독 의미 있게 느껴진다. 해당 커버에서 니나 시몬의 피부와 목소리를 통해 부활했던 네 여성은 그 다음 세대 여성들의 목소리와 연주를 통해 다시 한 번 살아난다. 니나 시몬이 윗세대 흑인 여성들이 지니지 못했던 발화 권력을 활용해 흑인 노예와 성폭행 피해자의 트라우마를 풀어낼 예술적 공간을 창조해냈듯, 이제 이 흑인 여학생들은 니나 시몬의 목소리를 흡수하고 되살려, 그가 갈 수 없었던 음악 대학에서 그의 작품을 노래한다. 선배들의 투쟁의 결과로 더 많은 자리를 얻어냈고 각자의 자리에서 활개하는 흑인 여성들이 이처럼 계속해서 트라우마의 이야기를 (재)생산하는 것은 개개인을 짓누르던 억압을 집단적인 기억으로 재구성해냄으로써 살아있는 자들에게 언어와 계보를 줄 뿐 아니라, 이전의 여성들을 그들이 누리지 못한 특정한 자유와 권력의 서사, 새로운 담론장 속에 재배치하면서 그들의 영혼을 달래고 구원한다.

Jamila Woods - Blk Girl Soldier


   따라서 디아스포라의 딸들은 ‘어머니’들의 기억을 잊지 않고 일종의 치유제, 선물, 혹은 의무로 계속해서 다음 세대에 전한다. “Blk Girl Soldier”(2016)에서 자밀라 우즈(Jamila Woods)는 “아무도 우리를 위해주지 않아”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아”와 같은 노래 가사를 반복하고, 이때 그의 목소리를 뒷받침하는 여러 겹의 코러스는 마치 그가 사람들과 유령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대리해서 말한다는 느낌이 들도록 한다. “지난 세기와 지난 주에 우리 자매들”이 겪은 일을 보라고 외치는 그는 자신의 몸과 시공간의 축을 뛰어넘어 흑인 여성들이 공통적으로 겪어온 고통을 체감하는 모습이며, 청자 또한 그 현실을 기억하기를 요구한다. 더욱 직접적으로, 노래 후반부에서는 1분 가량이 Rosa, Ella, Audre, Angela, Assata 등의 흑인 여성 운동가들을 호명하고 기억하는 데에 사용된다. 이처럼 선배들의 이야기를 반복하고 자신의 예술 속에 직조해가며, 디아스포라의 딸들은 자신들의 망가진 조각을 남을 위해 나누고 남의 기억을 자신의 이야기로 소유하는 법을 배운다. 아름다운 공동의 예술을 통해 그들은 생존하고, 자신을 넘어 온전하게 채워진다.
   이와 같이 공동체적 기억과 계보를 만들어내려는 시도가 가장 두드러진 작품은 비욘세(Beyonce)의 <Lemonade (2016)> 앨범이다. 장장 1시간 30분 길이의 “Visual Album”에서 그는 흑인 여성으로서 경험한 개인적이고 내밀한 상처와 고뇌에 대해 진술하고(“Hold Up”, “Sorry”), 흑인을 억압하는 구조와 차별로 인해 생겨난 죽음들을 추모하기도 한다(“Formation”). 그리고 개인적인 고통을 해소하는 작업과 흑인 억압의 구조를 해체하며 디아스포라 서사를 구축하는 작업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다. 이때 ‘레모네이드’는 회복의 핵심적인 은유가 된다. 트랙 “All Night”에서는 어린 시절 비욘세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만들어주던 레모네이드 레시피가 소개되면서 흑인 커뮤니티의 평화로운 사랑과 애정, 보살핌 등 긍정적인 모습들이 자연스럽게 재현된다. 더 나아가, “Freedom” 트랙에서는 남편 Jay Z의 할머니가 90세 생일 파티에서 “인생은 나에게 수많은 레몬을 주었지만, 나는 그걸 레모네이드로 만들어왔어”라고 말하는 장면을 통해 이 은유가 더욱 직접적인 생존과도 연결된다. 이처럼 레모네이드는 고통을 버텨내고 어떻게든 삶을 꾸려온 흑인 여성들의 능력과 의지 그 자체를 상징하며, 이 의지가 비욘세가 축복하는 디아스포라 문화의 핵심이다.

Beyonce - Forward


Beyonce - All Night


   실제로 해당 앨범에서 비욘세는 노예제 이전의 먼 과거로 돌아가 흑인 공통의 기원을 추적하기보다는 서양 땅에서 300년 간 적응하고 생존한 디아스포라의 유산 자체를 끌어모으는 식으로 자신이 속한 역사문화적 지형을 구성한다. 그는 뉴올리언스(New Orleans)를 포함한 미국 남서부의 자연부터 그곳의 독특한 문화와 의복, 식문화, 음악을 소환하면서, 현재도 매일같이 이어지고 있는 빛나는 적응의 역사를 만든다. 이처럼 역동적인 생존 의지와 그 흔적들 자체를 계보로 인정할 때, 노예제의 영향을 받은 흑인들의 비균질적이고 다채로운 삶의 방식들이 모두 포함될 뿐 아니라, 현재 미국에 새로이 정착하고 있는 아프리카 이민자 작가와 예술인들의 작업물까지도 같은 계보 안에 엮을 수 있게 된다. 비욘세는 자신의 시청각적 예술을 통해 디아스포라의 자녀들을 위한 새로운 ‘집’을 제시한 것이다.
   한편, 하트만은 기억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언제쯤 과거의 이야기가 끝나 미래를 기획할 수 있는 삶이 시작될지를 절박하게 질문한다. 수 많은 이들이 낡은 권력 구도를 재생산하고 있는 복잡한 담론장에서, 묵혀온 이야기를 털어내는 것만으로 세상을 재구성할 수 있을까? 그리고 흑인에게 엉겨 붙은 죽음과 폭력의 이미지에 압도당하지 않고 그 위에 급진적인 자유와 공존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 가능할까? 흑인과 관련된 어떠한 과거와 현재의 상상도 무거운 책임을 동반하는 상황 속에서, 현재나 과거를 경유하지 않고 곧장 ‘미래’부터 전유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현재의 인종적인 문제들이 필연적으로 기입되지 않은 ‘미래’를 주된 배경으로 삼아, 흑인을 중심에 둔 신화를 창조하고 탐구하는 것이다.
미래의 시를 쓰기:
아프로퓨처리즘(Afrofuturism)
흑인 여성들의 시와 신화를 이야기하면서 ‘아프로퓨처리즘(Afrofuturism)’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아프로퓨처리즘은 아프리카계 디아스포라 인구의 문화와 과학기술의 교차점을 탐구하려는 예술적, 학문적 실험 및 사회적 운동 전반을 일컫는다. 보통 버락 오바마가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된 해인 2009년을 2세대 아프로퓨처리즘(Afrofuturism 2.0)의 태동기로 구분하여 정의하는데, 이때부터는 흑인의 시선으로 21세기 과학기술 시대의 중심 의제들을 비평하면서, 과학기술에 영혼성(spirituality), 젠더 유동성(gender fluidity), 포스트휴먼적(posthuman) 상상을 가미하고 대안적 역사를 구축해보려는 실험들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행성과 우주인이 날아다니는 도자 캣(Doja Cat)의 미래도시적 뮤직비디오나, 광활한 자연 지형에 놓인 세련된 흑인 여성들의 이미지를 활용하는 솔란지(Solange)의 앨범 컨셉을 포함해 이제는 수많은 흑인 예술가들의 예술에 녹아든 아프로퓨처리즘은 급진적인 정치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아프로퓨처리즘은 흑인들을 압도하는 비인간성, 이방인성, 외계성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영어로 alien은 이방인 혹은 외계인을 의미한다. 실제로 외계 생명체들을 ‘인류’와 대비되는 적으로 가정해 전쟁을 벌이거나 정복하겠다던 SF(science fiction) 서사는, 과거에 흑인들을 정복해 노예로 삼았고 현재도 이들을 영구적인 외부자로 취급하고 있는 백인 남성의 제국주의적인 관점을 그대로 투영한다. 한편, SF 중에서 인류 멸망이나 기후 위기 등을 상정하는 ‘아포칼립스(apocalypse)’ 장르 또한 일부 약자들에게는 이미 도래한 현실이다. 예컨대, 탈식민주의 학자들은 식민 지배를 당하는 민족에게는 침략과 복속을 당하는 순간이 이미 역사의 종말이며, 자신이 알고 사랑해온 모든 세계와 삶의 방식을 손실하는 아포칼립스의 경험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흑인들의 삶은 이미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ocalypse)’의 생존 서사다. 더 나아가,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말처럼 인간과 기술이 분리불가능한 복합체로서 생존하는 사이보그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할 때, 기술과 문화가 함께 기입당하는 삶을 경험한 유색인종 여성이야말로 사이보그 주체 그 자체일지 모른다. 8)

콜라주: © Kaylan Michel (Lost In The Island), "Pegasus", Canada, 2019


   이러한 맥락에서 아프로퓨처리스트들은 이미 사회적 외계인이며 사이보그나 다름없는 흑인의 상태를 기반으로 흑인을 미래의 주체로서 재해석해낸다. 그리고 ‘인간’의 관점에서 로봇이나 외계인 등을 ‘타자’로 삼기보다는, 오히려 로봇이나 외계인에게 이입하며, 비인간(nonhuman)으로서의 경험을 근간으로 한 다양한 연결과 유대를 상상한다. 이를테면 SF의 대가 옥타비아 버틀러(Octavia Butler)는 인간과 외계인의 상호 호혜와 기생 생물에 대한 애증, 인간이 외계인에게 식민지배를 당하지만 평화로운 삶을 유지하고 적응하는 미래 등을 다채롭게 상상하며 흑인 여성의 관점으로 SF의 세계를 넓힌 바 있다. 게다가 <Kindred (2003)> 9) 에서는 과거로 가서 자신이 몰랐던 조상들의 경험을 알게 되고 노예됨의 경험을 체화하는 현대 흑인 여성의 이야기를 그려냄으로써, 시간이 흐르는 데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트라우마의 역사에 갇혀 있는 디아스포라 인구의 경험을 구현하고 흑인 여성 예술인들이 계속 시도하던 역사와의 연결이나 계보 추적을 SF에서 도모하기도 했다.
   한편, 이러한 시도가 이미지적인 실험을 위주로 전개된다는 점 또한 유의미하다. 흑인의 신체는 언제나 열등하게 비추어지고 관음, 소비, 욕망의 대상이 되어왔다. 흑인이 경험하는 실상은 지워지면서도 그 몸은 초가시화된 것이다. 이에 하트만은 흑인 신체를 ‘대체 가능성(fungibility)’ 개념으로 정의하며, 그것이 철저히 상품화되어 타자의 가치, 관념, 욕구를 투영할 수 있는 텅빈 관념적 장소로서 기능해왔음을 비판한다. 10) 이러한 맥락에서, 흑인들이 자신의 몸과 재현 방식을 온전히 통제하는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한 저항이다. 아프로퓨처리즘에서 흑인은 미래의 모습은 물론이고 그 안에서 흑인이 취할 역할과 시각적인 모습까지도 마음대로 실험한다. 서양 백인들의 진화론적 관점에서 유색 인종은 과거의 산물이자 원시적이고 미개한 존재, ‘문화’와 대비되는 자연적인 존재로 그려졌으나, 아프로퓨처리즘적 미학에서는 세련되고 미래적인 흑인 문화와 아프리카의 고전 문화가 뒤섞여 자연 속에 공존하는 모습이 등장하곤 한다. 이를 통해 그들은 흑인 자문화의 재현 방식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고, 자유와 공존의 다양한 모습을 구현한다.
   이처럼 아프로퓨처리즘은 기술의 주인이 된 흑인, 미래의 핵심적인 주체가 된 흑인, 평화로운 흑인을 그려냄으로써 ‘표준 인간’의 계보, ‘SF와 미래물’의 계보, 그리고 ‘흑인’ 자체에 대한 이미지와 정의를 모두 전복한다. 게다가 아프로퓨처리즘은 ‘미래’를 이야기하면서도 그곳을 ‘과거’의 역사와 문화가 현현하게 살아날 수 있는 자유로운 세계로 사유하고, 이러한 재현을 통해 흑인의 모습을 상상하는 ‘현재’의 담론 지형과 방향성까지 완전히 바꾸어낸다. 이곳에서 시간은 선형적이지 않고, 미래는 과거와 현재의 관성으로 그저 닥쳐올 운명이 아니다. 오히려, 아프로퓨처리즘을 만난 시간은 디아스포라 인구가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는 총체적인 개혁과 창조의 장이 된다.
안드로이드 혁명과
퀴어 유토피아?
오늘날 아프로퓨처리즘을 통해 사회적 구획을 다양하게 넘나들고 뒤섞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가수 자넬 모네(Janelle Monae)를 꼽을 수 있다. 그는 2007년, 첫 미니 앨범 에서부터 안드로이드 자아 ‘신디 메이웨더(Cindi Mayweather)’를 내세워 활동했다. 1집 정규앨범 <ArchAndroid(2010)>에서 그는 ‘감히’ 인간을 사랑한 죄로 해체당할 위기에 놓인 후, 안드로이드의 2등 시민 지위를 전복하려는 메시아적 인물을 연기한다. 이후 2013년 앨범 가 나왔을 때, 그는 수록곡 “Q.U.E.E.N”이 모든 소외된 이들을 위한 노래이며, Q가 퀴어(queer community), U가 불가촉천민(untouchables), E가 이민자(emigrants), 두번째 E는 파문당한 자들(excommunicated), N은 흑인(‘negroid’)을 의미하는 약어라고 설명한 바 있다.

Janelle Monae - Metropolis: The Chase Suite


Janelle Monae - Dirty Computer


   이 곡의 뮤직비디오는 “시간을 여행하는 모든 역사 속 반역자들”이 산 채로 박제되어 있다가 음악을 통해 해방되어 박물관을 탈출하는 내용이다. 노래에는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뜯어고쳐야 할까?” “우리를 그저 공식에 더한다고 해서 평등해질 수는 없어. 영화를 쓰는 사람이 이 각본과 후속작을 지배해” 등의 가사가 등장해, 사회적 차별과 위계가 모두 잘못된 “프로그래밍” 때문이며, 미래를 위해서는 새로운 프로그램, 새로운 각본을 써야함을 함의한다. 이는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로드의 문제의식과도 공명한다. 한편, “나를 분류해봐, 나는 모든 구획을 거부해”라는 가사는 모네가 안드로이드 자아로 활동해온 이유를 보여주기도 한다.

Janelle Monae - Dirty Computer


   그리고 2018년, 앨범을 통해 자넬 모네의 미래적 세계관은 정점을 찍었다. 해당 앨범을 발매 하면서 자넬 모네는 범성애자(pansexual)로서 커밍아웃 했고, 모든 수록곡이 포함된 48분 가량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했다. 뮤직비디오의 오프닝 나레이션은 “그들은 우리를 컴퓨터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사라지기 시작했고, 대청소가 시작되었다. 생김새가 다른 것은 더러운 것 이었다. 그들이 지시하는 방식대로 살기를 거부하는 것은 더러운 것이었다. 그 어떤 형태의 반대 의견을 표명하는 것도 더러운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후 어딘가에 갇힌 자넬 모네가 등장하며, 그에게 의문의 목소리가 ‘제인57821’이라는 이름을 주고, 곧이어 “나는 더러운 컴퓨터다. 나는 청소될 준비가 되었다”를 따라 말하게 한다. 이에 대해 거부감과 고통을 느끼는 모네를, 익명의 관리인들은 그의 기억 데이터를 하나씩 지움으로써 교화하려 한다. 이때, ‘기억’으로서 앨범 속 곡들이 하나씩 소개된다.
   감시와 통제의 전체주의 세계는 흔한 디스토피아적 모티프지만, 누군가의 정체성을 부인하고 그의 특별한 구석을 모두 ‘버그’로 치부해 지우는 시스템은 흑인, 퀴어, 여성의 존재를 모두 납작하게 일축하는 가부장적 사회의 양상과도 닮아있다. 그러므로 자넬 모네의 흑인 페미니스트, 범성애적 퀴어, 그리고 아프로퓨처리즘적 사이보그로서의 정체성은 골고루 버무려져 억압적 통치 구조로부터 저항하는 무기가 된다. 우선 마틴 루터킹의 “I have a dream” 연설 오디오, 아프리카 북소리, 미국 내 흑인 디아스포라 인구의 문화 등이 세련된 형태로 뒤섞여 미래적인 스타일로서 등장한다. 자넬 모네와 그의 실제 애인인 테사 톰슨(Tessa Thompson), 그리고 그들의 ‘흑인 자매들’이 연기하는 사이보그들이 가장 자주 등장하는데, 극중에서도 이들은 시스템의 당사자이면서도 외부자로서, 자유를 만끽하지만 통제와 감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일상을 살아간다. 한편, 이전 앨범을 통해 쌓은 아프로퓨처리즘적 미학과 사이보그 자아가 배경으로 깔리는 동안, 흥미롭게도 서사의 중심은 ‘감정’이 된다.
   해당 영상은 영화를 의미하는 motion picture가 아닌, “감정(emotion)”picture로 이름 붙었다. 미래적인 시공간 속에 놓인 아프로펑크(Afro-punk) 사이보그 주인공은 계속해서 자신의 감각과 감정에 대해 말한다. 그는 2번트랙 “Take a Byte”에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도록 프로그래밍 되었지만, 너의 마음을 가릴 순 없어”라며 당위나 체계와는 무관하게 자신을 솔직하게 사랑해주기를 요구한다. “I Like That” 트랙에서 그는 “난 어느 때는 미스터리고, 어느 때는 자유야. 걸어 다니는 모순인데, 뭐 나는 팩트이자 픽션인가 보지”와 같이 끊임없이 자신의 모순과 복잡성에 대해 노래하고, 그 알 수 없는 상태 자체를 충실하게 긍정한다. 이처럼 “프로그램” 대신 긍정적인 마음과 사랑을 따라간 결과, 자넬 모네와 함께 파티를 하고, 경찰을 피하는 이들에는 ‘흑인 자매들’ 뿐 아니라 다양한 인종의 성소수자들도 포함되며, 이들 모두가 모여 평화와 자유를 표상하는 지형을 이룬다. 자넬 모네 개인의 교차적 정체성을 통해, 그가 오랜 시간에 걸쳐 구축한 아프로퓨처리즘적 유토피아는 저마다 “오염된 컴퓨터”인 소수자들이 모두 자연스럽고, 긍정적이고, 자유롭고, 사랑스럽게 날뛸 수 있는 해방의 세계가 된다.
   이와 같이 퀴어-페미니즘적 색채를 더한 자넬 모네의 아프로퓨처리즘 세계관은 오드리 로드가 상상한 흑인 페미니즘의 이상향에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한 ‘시’와 ‘신화’ 창조의 필요성을 피력하면서, 로드는 이를 위한 “삶의 힘과 앎의 원천”으로 ‘성애(erotic)’를 꼽는다. 여성의 억압은 곧 성애의 타락과 왜곡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로드의 설명을 통해, 그가 성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 모든 “창조적 생의 감각”을 하필 ‘성애’라는 단어로 호명하는 이유는 여성에 대한 대표적인 억압 기제가 성적인 억압과 대상화이기 때문임을 유추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자유롭게 감각하지 못하도록 하는 금욕의 가치는 그 자체로 억압을 대표하며, 진실로부터 가장 멀다. 그러므로 로드는 여성이 자신의 몸과 감각을 깊이 느끼는 것을 긍정하면서, 더 나아가 매순간 일상적인 삶과 세계 또한 깊고 풍부하게 감각하기를 제안한다. 자신의 좋고 싫은 감정과 느낌에 이름을 붙이고, 좋은 느낌을 추구하는 것, 그리고 그 기쁨을 남과 나누고자 하는 것은 억압을 수용하는 삶과는 대척점에 있는 바람직한 삶의 방식이다. 이처럼 ‘성애’적 자원을 바탕으로 한 시쓰기를 통해 흑인 여성의 삶이 비로소 통합될 수 있고, 그 통합이 타인과 연결되기 위한 조건일 때, 자넬 모네의 작업물은 흑인 여성의 해방을 위해 로드가 제기한 비전을 시청각적으로 구현해낸 것이나 다름없다.
   한편, 제인의 기억/노래를 삭제하는 관리자는 이것이 엄밀히 말해 ‘기억’인지 혼란스러워한다. 각 ‘기억’은 실제 과거의 경험, 존재한 적 없었던 미래에 대한 상상과 꿈, 그리고 예술적 창조물들이 뒤섞인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 또한 선형적인 시간 관념에 도전할 뿐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기억과 실존하는 역사, 집단적이고 문화적인 상상력 간의 경계를 허물어낸다. ‘치료’를 받은 후 제인에게 지도사 ‘메리애플53’이 배정되는데, 그는 일전에 잡혀가 이미 세뇌를 당한 제인의 애인 젠(Zen)이다. 제인은 젠을 만날 때마다 그가 잊어버린 추억을 하나씩 말해준다. 결국 뮤직비디오의 말미에 제인은 기억을 전부 삭제당하지만, 엔딩 장면에서 제인과 젠이 함께 탈출하는 모습은 젠이 다시 제인에게 기억을 나누어주었을 것임을 알게 해준다. 이때, 제인과 젠 모두 자신이 접근할 수 없는 과거와 상실이 있는 상황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통해 ‘기억’과 ‘자아’를 (되)찾는 모습이다. ‘공백’의 역사 속에서 타인의 삶을 대리해서 말하거나 서로가 서로의 가치를 기억하고 증명하는 존재가 되어주는 것은 다른 흑인 여성들의 음악 예술을 통해서도 계속해서 이어져오던 전략이다. 그 계보를 이어, 미래로 향하는 자넬 모네의 작품에서도 ‘기억’은 개인을 뛰어넘는 집단적인 창조물이고, 그것은 개인을 지킬 뿐 아니라 모두를 위한 해방의 단초가 된다.
   아프로퓨처리즘의 세계관은 사회적인 변화를 도모하기 위한 비전과 긍정적인 상상력을 제공해주면서, 현실의 위계나 정체성 구획, 그리고 사회경제적 제약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통합적 주체성 형성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급진적이다. 하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비인간성의 경험을 어떻게든 소화해내어야 하는 흑인들의 극단적인 곤경에 의존한 상상력이기도 하며, 그런 측면에서는 ‘유령’들을 끌어 모아 소실된 역사를 메우고 자신의 자아를 구축해온 흑인 여성들의 다른 창조 작업과도 끈끈하게 맞물려있다. 이처럼 흑인 여성들은 계속해서 스스로의 존재와 삶에 대해 급진적으로 사유하면서 개인을 넘어선 연대의 삶과 예술을 구축하고 있다. 오랜 디아스포라와 노예제, 비인간화의 트라우마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애도와 이해를 위해 그들이 초월적인 시공간에 구축해낸 세계는 분명 그들을 이전보다 살 만하게끔 만들어내고 있다. 놀라운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흑인 여성들의 다층적이고 열린 실험이 점차 현실이 되어가는 모습을 기대한다.
목차
딸들의 노래: 삶과 시간을 꿰는 흑인 여성들의 음악, 신화, 시
미국법학으로의 산책: 개인의 공간과 국가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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