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어머니와 할머니들은 아직 적힌 적 없는 음악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그들은 자신들 안에 있는 알 수 없는 것이 알 수 있는 것으로 태어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영혼에 대한 규명이 자신들의 사후에나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당장에 갈 수 있는 곳이나 향할 곳 없이 아주 느리게 서성이곤 했고, 남자들은 이러한 어머니들의 상태와 이야기로부터 아무 의미도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앨리스 워커, 1983).”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활동가이자 시인이었던 오드리 로드
(Audre Lorde)또한 일찍이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말을 통해, 억압적인 서사와 구획으로 점철된 권력의 장에 그저 흑인 여성을 더하는 것만으로 자유를 획득할 수는 없음을 피력한 바 있다. 대신, 그는 흑인들이 자유로워지기 위해 새로운 ‘시’와 ‘신화’를 구축해낼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의 출발점은 여성 개인의 풍부한 감각과 느낌을 긍정하고 재해석하는 것이다. 로드는 “시를 통해 이름도 형식도 없이, 미처 태어나지 못한 채 느낌으로만 존재하던 아이디어에” 이름과 형태를 부여할 수 있고, 이처럼 우리의 감정을 “차이가 몸담을 수 있는 아지트”나 “가능성의 공간”으로 새로이 바라봄으로써 흑인 여성의 구체적인 삶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그는 “백인 아버지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우리 안의 흑인 어머니, 시인은 우리의 꿈속에서 이렇게 속삭인다. 나는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자유롭다”라고 말한다. 즉, 로드는 인종적이고 젠더적인 이분법 구도를 그저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흑인과 여성에게 유독 결부되던, ‘과하게’ 감정적이라는 낙인을 통째로 하나의 신화로서 창조해내며, 그 감각의 계보를 긍정한다.
7)
제도화된 언어와 역사 체계로는 스스로의 가치에 관한 근거를 전혀 찾아 낼 수 없는 상황에서, 흑인 여성의 감정을 중시하고 그들을 둘러싼 새로운 가치의 계보
(‘신화’)를 만들어내면서 그것을 말하는
(‘시’) 작업을 가장 급진적으로 진행해온 곳은 음악이다. 로드가 ‘시’와 감각에 대해 말하기 이전부터, 조라 닐 허스턴
(Zora Neale Hurston)을 포함한 흑인 인류학자들, 그리고 디아스포라의 문인들은 재즈를 들으면서 자신들이 ‘느끼는’ 원초적인 즐거움과 다채로운 욕망에 대해 묘사했다. 그리고 그것이 “창백한 백인”들이 단순히 ‘듣고’ 적어내리는 합리적 분석으로는 온전히 통역할 수 없는 근원적인 지식의 장임을 표현한 바 있다. 끊임없이 쪼개지고 부인당하는 상황에서도 느낌과 감정만큼은 나의 것이며, 나의 삶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현재도 음악은 흑인 여성들이 자신의 분절된 자아와 몸을 표현하고, 유령들을 보듬는 주된 장이다.
Solange - Weary
디아스포라의 딸들은 지치고 소진되었다. “Weary”
(2016)라는 곡에서 가수 솔란지
(Solange)는 자신이 “세상에 한 줌의 흔적도 남기지 못할” 것이라고 느껴 무력해 한다. 가치있는 인간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면서 자신의 몸과 삶에 대한 주인권을 빼앗겨온 그는 노래 전체에 걸쳐 “난 내 몸을 찾으러 갈게, 곧 돌아올 거야. 나는 내 명예를 찾으러 갈게, 곧 돌아올 거야”를 끊임없이 되풀이해 부르며 잃어버린 주체성을 갈망한다. 그의 조각난 목소리는 여러 겹의 선율로 흩어지기도 뭉쳐지기도 하면서 시공간의 저편으로 떠나는 듯 하다. 노래가 끝날 즈음, 말할 수 없게 된 화자의 목소리는 웅얼거림에 가까운 소리만을 남겨둔다. 이베이
(Ibeyi) 자매 또한 “Ghost”
(2015)라는 곡에서 자신들의 세계를 메우는 유령들에 대해 노래하고, 그 유령들이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단어와 소리, 노래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음악의 비물질적이고 휘발적인 특성은 이처럼 유령이 되고 마는 흑인 여성들의 경험을 구현하는 동시에, 물질 세계의 그 어느 시공간도 점유하고 있지 못한 흑인 여성 서사를 모아 시간을 초월한 주체성과 계보를 구축할 수 있게끔 해주기도 한다.
뿌리 뽑힌 딸들의 몸은 이윽고 자신과 트라우마를 공유하는 어머니나 자매들의 영혼으로 채워진다. 이 시작점은 니나 시몬
(Nina Simone)으로부터 찾을 수 있을 듯하다. 그는 수많은 곡을 통해 흑인 여성의 경험과 저항 의식을 담아냈는데, 이 중 주목하고 싶은 곡은 1970년대부터 흑인 페미니스트들의 주제가가 된 “Four Women”
(1966)이다. 이 곡에서 그는 1절부터 4절에 걸쳐 Aunt Sarah, Sephronia, Sweet Thing, Peaches라는 네 여성의 이야기를 1인칭으로 소개한다. 이들은 피부색과 머릿결, 세대에 따라 노예가 되거나 성매매를 하기도 하고, 백인 남성에 의한 성폭행으로 태어나기도, 어머니의 트라우마를 흡수해 감당할 수 없는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시몬은 흑인 여성들에게 대물림 되는 고통과 억압에 이들이 다르게 반응하는 방식을 그려내고, 설사 편견대로 “분노하는 비극적인 흑인 여자”라 할지라도 그들의 감정에 역사 문화적 맥락을 부여하면서 흑인 여성상에 다채로운 입체감을 준다. 한편, 해당 곡의 1절부터 3절은 클라이막스 없이 돌림 노래로 진행되며, “내 이름은 사라 이모야. 내 이름은 사라 이모야”와 같은 식으로 해당 절의 주인공 이름을 반복적으로 읊조리며 마무리되는데, 마지막 인물만은 다르다. Peaches는 앞선 여성들처럼 직접적이진 않아도 분명 노예제의 억압을 감각하고 있는 존재로, 분노와 광기를 담아 자신의 이름을 외친다. 실제로 이 Peaches의 이름을 외치는 순간이 노래의 클라이막스이자 종결이며, 다른 인물들과 달리 시몬은 그의 이름을 단 한 번 부르짖는다. 더 이상 힘없이 사그라들지 않고, “내 이름은 PEACHES야!”라고 소리치는 것은, 끊임없는 유령 생활과 몸에 켜켜이 쌓여온 트라우마를 청산하고자 하는,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기를 요구하는 주체적인 흑인 여성의 대두를 선언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Nina Simone - Four Women (Berklee BLM의 커버)
니나 시몬은 어려서부터 꾸준히 피아노 천재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의 꿈은 미국 최초의 흑인 여성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었으나 왜인지 음악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 경험에 대해 니나 시몬 본인을 포함해 평론가들은 분명 그가 흑인이라는 점이 강하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후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바에서 피아노를 치다가, 흑인 여자는 노래를 해야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노래까지 하게 된다. 이러한 시몬의 개인사를 고려했을 때, “Four Women”의 수많은 리메이크 버전 중에서도 버클리 음악대학 학생들이 발표한 커버
(2016)는 유독 의미 있게 느껴진다. 해당 커버에서 니나 시몬의 피부와 목소리를 통해 부활했던 네 여성은 그 다음 세대 여성들의 목소리와 연주를 통해 다시 한 번 살아난다. 니나 시몬이 윗세대 흑인 여성들이 지니지 못했던 발화 권력을 활용해 흑인 노예와 성폭행 피해자의 트라우마를 풀어낼 예술적 공간을 창조해냈듯, 이제 이 흑인 여학생들은 니나 시몬의 목소리를 흡수하고 되살려, 그가 갈 수 없었던 음악 대학에서 그의 작품을 노래한다. 선배들의 투쟁의 결과로 더 많은 자리를 얻어냈고 각자의 자리에서 활개하는 흑인 여성들이 이처럼 계속해서 트라우마의 이야기를
(재)생산하는 것은 개개인을 짓누르던 억압을 집단적인 기억으로 재구성해냄으로써 살아있는 자들에게 언어와 계보를 줄 뿐 아니라, 이전의 여성들을 그들이 누리지 못한 특정한 자유와 권력의 서사, 새로운 담론장 속에 재배치하면서 그들의 영혼을 달래고 구원한다.
Jamila Woods - Blk Girl Soldier
따라서 디아스포라의 딸들은 ‘어머니’들의 기억을 잊지 않고 일종의 치유제, 선물, 혹은 의무로 계속해서 다음 세대에 전한다. “Blk Girl Soldier”
(2016)에서 자밀라 우즈
(Jamila Woods)는 “아무도 우리를 위해주지 않아”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아”와 같은 노래 가사를 반복하고, 이때 그의 목소리를 뒷받침하는 여러 겹의 코러스는 마치 그가 사람들과 유령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대리해서 말한다는 느낌이 들도록 한다. “지난 세기와 지난 주에 우리 자매들”이 겪은 일을 보라고 외치는 그는 자신의 몸과 시공간의 축을 뛰어넘어 흑인 여성들이 공통적으로 겪어온 고통을 체감하는 모습이며, 청자 또한 그 현실을 기억하기를 요구한다. 더욱 직접적으로, 노래 후반부에서는 1분 가량이 Rosa, Ella, Audre, Angela, Assata 등의 흑인 여성 운동가들을 호명하고 기억하는 데에 사용된다. 이처럼 선배들의 이야기를 반복하고 자신의 예술 속에 직조해가며, 디아스포라의 딸들은 자신들의 망가진 조각을 남을 위해 나누고 남의 기억을 자신의 이야기로 소유하는 법을 배운다. 아름다운 공동의 예술을 통해 그들은 생존하고, 자신을 넘어 온전하게 채워진다.
이와 같이 공동체적 기억과 계보를 만들어내려는 시도가 가장 두드러진 작품은 비욘세
(Beyonce)의 <Lemonade
(2016)> 앨범이다. 장장 1시간 30분 길이의 “Visual Album”에서 그는 흑인 여성으로서 경험한 개인적이고 내밀한 상처와 고뇌에 대해 진술하고
(“Hold Up”, “Sorry”), 흑인을 억압하는 구조와 차별로 인해 생겨난 죽음들을 추모하기도 한다
(“Formation”). 그리고 개인적인 고통을 해소하는 작업과 흑인 억압의 구조를 해체하며 디아스포라 서사를 구축하는 작업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다. 이때 ‘레모네이드’는 회복의 핵심적인 은유가 된다. 트랙 “All Night”에서는 어린 시절 비욘세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만들어주던 레모네이드 레시피가 소개되면서 흑인 커뮤니티의 평화로운 사랑과 애정, 보살핌 등 긍정적인 모습들이 자연스럽게 재현된다. 더 나아가, “Freedom” 트랙에서는 남편 Jay Z의 할머니가 90세 생일 파티에서 “인생은 나에게 수많은 레몬을 주었지만, 나는 그걸 레모네이드로 만들어왔어”라고 말하는 장면을 통해 이 은유가 더욱 직접적인 생존과도 연결된다. 이처럼 레모네이드는 고통을 버텨내고 어떻게든 삶을 꾸려온 흑인 여성들의 능력과 의지 그 자체를 상징하며, 이 의지가 비욘세가 축복하는 디아스포라 문화의 핵심이다.
Beyonce - Forward
Beyonce - All Night
실제로 해당 앨범에서 비욘세는 노예제 이전의 먼 과거로 돌아가 흑인 공통의 기원을 추적하기보다는 서양 땅에서 300년 간 적응하고 생존한 디아스포라의 유산 자체를 끌어모으는 식으로 자신이 속한 역사문화적 지형을 구성한다. 그는 뉴올리언스
(New Orleans)를 포함한 미국 남서부의 자연부터 그곳의 독특한 문화와 의복, 식문화, 음악을 소환하면서, 현재도 매일같이 이어지고 있는 빛나는 적응의 역사를 만든다. 이처럼 역동적인 생존 의지와 그 흔적들 자체를 계보로 인정할 때, 노예제의 영향을 받은 흑인들의 비균질적이고 다채로운 삶의 방식들이 모두 포함될 뿐 아니라, 현재 미국에 새로이 정착하고 있는 아프리카 이민자 작가와 예술인들의 작업물까지도 같은 계보 안에 엮을 수 있게 된다. 비욘세는 자신의 시청각적 예술을 통해 디아스포라의 자녀들을 위한 새로운 ‘집’을 제시한 것이다.
한편, 하트만은 기억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언제쯤 과거의 이야기가 끝나 미래를 기획할 수 있는 삶이 시작될지를 절박하게 질문한다. 수 많은 이들이 낡은 권력 구도를 재생산하고 있는 복잡한 담론장에서, 묵혀온 이야기를 털어내는 것만으로 세상을 재구성할 수 있을까? 그리고 흑인에게 엉겨 붙은 죽음과 폭력의 이미지에 압도당하지 않고 그 위에 급진적인 자유와 공존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 가능할까? 흑인과 관련된 어떠한 과거와 현재의 상상도 무거운 책임을 동반하는 상황 속에서, 현재나 과거를 경유하지 않고 곧장 ‘미래’부터 전유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현재의 인종적인 문제들이 필연적으로 기입되지 않은 ‘미래’를 주된 배경으로 삼아, 흑인을 중심에 둔 신화를 창조하고 탐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