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다어장의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 읽기


김지형
고려대학교 건축사회환경공학부 교수.

어쩌다 다양성, 어쩌다 장자, 어다어장.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이야기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사람을 알아 사람과 어울리다 보면, 그 사람이 관심을 가지는 일, 하는 일에 어느새 들어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신체, 사회, 경제, 문화, 종교적 소수자에 관심을 가지고 다양성에 관심을 가진 벗을 둔 덕에 어쩌다 보니 다양성이라는 단어와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어쩌다 다양성, 어다인 셈이다.
   장자를 같이 읽어보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들어왔다. 뜻밖의 일이었으나, 오래전부터 가까이 지내온 벗이 그 안에 있다 해서 쉬이 그러자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모두 아마추어였다. 하지만, 뭐 같이 읽으며 사는 이야기를 나누자는 게지, 공부하자는 건 아니니, 아쉽기는 했지만 크게 흠 될 일은 아니었다. 어쩌다 장자, 어장이다.
   그런데 장자를 더듬더듬 읽어가다 만난 제물론에서 뜬금없이 다양성이라는 단어가 자꾸 떠올랐다. 이상한 일이었다. 역사 속의 장자가 지금 여기서 논의되고 있는 젠더, 인종, 성 정체성, 사회 경제적 지위, 종교 따위에 따른 차별 넘어서기, 그리고 다양성을 새로움이 싹트는 창의성의 근거지로 생각해봤을리도 없으니, 혼자 웃을 일이었다. 또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말하기도 하고, 아는 만큼 보인다고도 하지만, 다양성에 관해서 관심을 키우고는 있었으나, 뭐 크게 대단한 욕망을 품었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고, 아는 건 더구나 없는데도 말이다. 아마도, 어쩌다 다양성과 장자를 만난 어다어장인 나에게는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 읊는다는 말이 더 맞는 듯싶다.
   어쨌거나, 사람 장주(莊周), 책 장자, 그리고 제물론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표에 나타내고, 어다어장의 길에서 주워들은 이야기와 제물론을 스치듯 읽고 지나면서 일어나는 거친 생각을 두서없이 적어보려 한다. 저잣거리와 주막엔 삿갓 쓴 무림의 고수가 많고 많은 줄도, 또 범이 무서운 줄도 알고 있으며, 또한 목숨 앞에서는 구차함을 마다치 않는 졸장부라, 미리 납작 엎드려 강호의 고수에게 너그러움을 청해 놓는다.

장자, 사람과 책


지뢰(地籟), 장자가 들은 땅의 다양한 소리


장자의 제2장 제물론의 첫 부분인 안성자유와 남곽자기의 대화의 앞에 지뢰, 인뢰(人籟), 천뢰(天籟), 즉 땅, 사람, 하늘의 퉁소 소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가운데서 땅의 퉁소 소리, 지뢰에 대한 묘사는 놀라운 명문이라고 길게 말을 늘어놓은 곳이 많으나, 나에겐 그렇게 큰 느낌은 없으니 확실히 어다어 장임이 분명하다. 본문을 보자.

   산림의 꼭대기와 백 아름의 큰 나무 구멍은, 코도 같고, 술잔 같고, 절구 같고, 연못 같고, 웅덩이 같기도 하다. 물 부딪는 소리, 시위 소리, 꾸짖는 소리, 물 마시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 흐느끼는 소리, 동굴의 소리, 새 울음소리, 앞에서 울면 뒤에 화답하여 운다. 산들바람은 가볍게 화답하고, 회오리바람은 크게 화답하다가, 사나운 바람이 자면 모든 구멍들은 고요하게 된다. 1)


   장주는 그가 들은 땅의 형상과 땅에서 나는 소리, 노래, 음악을 길게 묘사한다. 소리는 땅의 숨결인 바람과 땅의 여러 형상이 함께 만들어내는 소리이다. 글솜씨는 모르겠지만, 산과 들, 그리고 소리를 찬찬히 관찰하는 장주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이 이야기의 끝에는 인뢰, 사람의 퉁소 소리는 아주 가볍게 말하며 지나가고, 하늘의 퉁소 소리, 천뢰에 대해서 질문하는 안성자유에게 남곽자기는 또 다른 질문을 던질 뿐 분명하게 말하지 않고 있다. 즉, 지뢰는 있지만, 인뢰와 천뢰의 이야기는 없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과 생각들을 듣고 읽으면서 문득 그리고 계속 딴생각을 하는 나를 발견하는 건 놀랍고 재미있는 일이었다. 땅의 온갖 다른 모습에 온갖 다른 바람이 들어가, 제각각의 소리를 내고 있다고? 그럼, 이건 소리의 다양성에 관한 이야기인데! 각양각색, 형형색색, 가지각색, 천차만별의 소리와 모습, 이는 곧 다양성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다양성과 장자는 좀 뜬금없어 보이긴 하지만, 혹시, 장자의 핵심주제가 다양성이 아닐까? 그렇게 장자를 읽고 해석한 사람은 없나?
   그런데, 지금 장주는 소리를 있는 대로 들으며 사정을 살피고 있는 건가? 좋고 싫음, 맞고 그름에 대한 선입견이나 판단 없이 말이다. 그의 태도는 과학적이라는 단어와 굉장히 어울리는데? 장주라는 사람은 철학자라기보다는 과학자에 더 가까운가? 과학적인 장주, 과학자 장주? 뭐지? 어쨌거나, 이건 매우 아름답기조차 한데...
   아무거나 대중없이 질문을 던지며 재미있어하는 공학도, 영락없는 어다어장이었다. 제물론의 첫머리에 놓여 있는 지뢰에 대한 묘사는 소리의 다양성을 넘어 장주가 자연과 세상을 관찰하며 바라보며 깨달은 사실, 수많은 존재와 현상은 참으로 제각각으로 고유하고, 서로 다르다는 다양성의 진리를 표현한 건 혹시 아닐까? 더 나아가, 혹시, 그가 깨달은 건 다양한 존재로부터 나오는 다양한 소리의 어울림이 곧 음악이란 평범한 사실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주(周)나라의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던 혼란과 다툼의 전국시대에 산 장자가 귀 기울여 들은 소리가 과연 들판과 산을 오가는 바람 소리, 땅과 나무의 온갖 구멍에서 나는 땅의 소리 만이었을까? 장자의 귀는 자연의 소리에서 인뢰, 사람들의 말과 글로 옮겨갔을 수 있을 게다. 그가 온 자신이 죽어 묻힌 듯이 힘을 빼고 앉아(吾喪我) 온 힘을 기울여, 자신의 선입견을 넘어 듣고 또 들었던 소리는 어쩌면 사람의 피리나 거문고의 소리도 아닌, 온갖 다양한 삶의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코, 술잔, 절구, 연못, 웅덩이 같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울부짖고 흐느끼고, 싸우고 노래하고, 울고 웃는 사람의 소리, 사람의 노래, 인뢰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것,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 건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노래하고 춤출 수 있는 길이 아니었을까?
   들려오는 제각각의 인뢰 가락 앞에서 하늘의 노랫가락, 천뢰를 어떻게 하든 찾아내어 사람들과 함께 부르고 싶었던 이가 장주일지도 모른다. 지뢰는 인뢰와 천뢰로 향하는 시작점일 수도 있다. 자연의 다양성을 알아보는 이가, 사람의 다양성을 스쳐 지나가기는 쉽지 않을 게다.
인뢰, 사람 몸마음에 깃든 다양성
제물론은 지뢰의 이야기에서 천뢰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사람의 생각, 지혜, 언어, 마음, 감정에 대한 묘사가 이어진다. 피리 소리는 아니지만, 사실상의 인뢰인 듯싶다.

   큰 꾀는 느긋하고, 작은 꾀는 좀스럽고, 큰 말은 담박하고, 잠잘 때는 꿈으로 뒤숭숭하고, 깨어 있을 때는 감각 기관이 일을 시작하고, 접촉하는 일마다 말썽을 일으키고, 마음은 날마다 싸움질에나 쓰고, 더러는 우물쭈물, 더러는 음흉, 더러는 좀생이, 작은 두려움에는 기죽어 하고, 큰 두려움에는 기절하고, 시비를 가릴 때는, 물매나 화살이 날아가듯 날쌔다. 끝내 이기겠다는 것을 보면, 하늘에 두고 한 맹세 지키듯 끈덕지다. 날로 쇠하는 걸 보면, 가을 겨울에 풀과 나무가 말라가는 것과 같고 하는 일에 빠져들면 헤어날 길이 없다. 늙어서 욕심이 지나친 것 보면 근심에 눌려 꼭 막힌 것 같다. 죽음에 가까워진 그 마음은 다시 소생시킬 수가 없다.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 염려와 후회, 변덕과 고집, 아첨과 방자, 터놓음과 꾸밈, 이것들이 모두 빈 데서 나오는 노래요, 습한 데서 나오는 버섯이다. 우리 안에 밤낮으로 번갈아 나타나지만,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가 없지 … 우리의 몸에는 뼈마디가 백, 구멍이 아홉, 여섯 가지 내장이 있는데, 그 중에서 어떤 것을 특별히 더 좋아해야 하는 걸까? 2)


   어다어장은 또다시 다양성을 가지고 계속 엮어본다. 한번 꽂히면 다른 그림을 잘 보지 못하는 건 아마추어의 특징일 게다. 어라, 이도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인데. 장주도 지금 인간이 처해 있고, 살아가는 다양한 모습, 오가는 다양한 감정을 보고 있잖아? 제물론의 주제가 진짜로 다양성 아니야? 그래, 사람의 생각도, 감정도, 판단과 행동방법도 참으로 다양하고 말고지. 시공과 상황이 다른 것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같은 상황 속에서도 생각과 느낌, 판단과 반응이 저마다 다른 건, 참 신기하고말고. 그런데, 크고 작음, 음흉과 좀생이, 변덕과 고집 따위의 단어 속엔, 선입견, 판단의 시선이 담겨 있는 것 아닌가? 뭐지? 그렇다면 과학자 장주에 대한 그림은 너무 성급했나? 세상의 판단을 그냥 가져다 쓴 것인가? 사람에 대한 언어는 본질적으로 시비와 기호, 가치판단을 피할 수 없는 건가? 아이구, 그런데 끝에서 어느 것을 특별히 더 좋아해야 하는 걸까, 는 혹시 기호와 선입견 자체에 대한 질문일까? …. 어다어장의 생각은 갈팡질팡이다.
   그런데, 인간의 모습에 대한 장주의 결론은 간단해 보인다. 이렇게 아침 저녁으로 여러 가지 마음의 변화가 나타나기에 우리가 삶을 유지하는 것. 이런 것들이 없으면 내가 있을 수 없고, 내가 없으면 이런 것들이 나타날 턱이 없지. 이야말로 진실에 가까운 것이나, 이런 변화가 나타나게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구나. 3) 어다어장은 따라서 다시 생각한다. 그래, 몸, 감정, 감정의 변화와 운동의 다양성은, 시비와 기호 이전에 삶의 단순한 사실인 게야.
인뢰-인식, 시비 판단의 다양성
그런데 장주가 듣고 있는 또 다른 차원의 인뢰가 있다. 제자백가, 백가쟁명의 세월이었다. 병마 소리와 함께 세상을 가득 채웠을 시비에 대한 인식과 판단의 오만 소리가 장주를 비켜갔을 리 없다. 장주는 말한다.

   도(道)는 어디에 숨겨져 있다가 진실과 거짓을 드러내는가? 말은 어디에 가려져 있다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가? 도는 어디에 간들 존재하지 않는 일이 있는가? 말은 어디에서 쓰인들 안 되는 일이 있는가? 도는 조그만 성취에 숨겨지게 되며, 말은 화려함에 가려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가(儒家)와 묵가(墨家)의 시비가 존재하게 되어, 상대방이 그르다고 하는 것은 이 편에서 옳다 하고, 상대방이 옳다고 하는 것은 이 편에서 그르다고 한다. 상대방이 그르다고 하는 것을 옳다고 하고, 상대방이 옳다고 하는 것은 그르다고 하려면 곧 밝은 지혜로써 해야만 할 것이다. 4)


   글을 있는 대로 읽으면서 뜻을 정확하게 잡아내기가 쉽지 않지만, <도, 말, 진실과 거짓, 옳고 그름, 유가와 묵가> 따위의 단어들이 놓여 있는 풍경을 그려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어다어장의 마음과 머리는 또 분주해진다. 좀 종류가 다른 단어가 나오네. <도, 시비 판단, 가치판단, 유묵>은 다양한 개인을 넘어 사회적인 차원인데. 그럼, 문제가 좀 복잡지고 어려워지는 것 아닌가? 잘못하면 이데올로기화되고 권력과 결합하게 되면 다름에 대한 폭력으로 작동하기 쉬운 것 아닌가? 장주가 겪은 현실이 그랬나? 싸움의 시대 속에서 권력, 전쟁과 폭력에 매우 가까이 있는 시비 논쟁을 그냥 다양한 의견이 있는 거라며 대충 넘어갈 수는 없었던 것 아닐까? 땅의 소리, 사람과 세상의 소리를 들은 장주가 할 수 있는 건, 온 몸과 마음을 기울여 하늘 소리를 듣고 그것을 세상 속에서 노래하는 일, 자신의 시공간을 넘어 미래 속으로 노래를 전할 수 있는 건 글을 쓰는 것이었을까? 그리고 장자의 제물론은 바로 그 노래의 한 곡조, 한 가락인 걸까? 그게 밝은 지혜라면 그 내용은 무엇일까? …
   천인천색, 만인만색의 사람세상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막상 같이 사는 일은 참으로 만만찮고, 나름 다 한가락 하는 사람이 내놓는 시비 판단 앞에서, 모두를 한꺼번에 잠재울 수 있는 새로운 <썰>을 펴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장주 역시 자신의 이야기가 세상의 말, 시비, 판단, 존재를 가지런하게 할 수는 없음을 물론 모르지 않았을 게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퉁소 소리를 남겨 놓았으니, 이제 그 노래를 들어보는 게 예의일 게다.
천뢰 1
조삼모사(朝三暮四), 인시(因是), 천균(天鈞) 그리고 양행(兩行)
제물론은 이제 글을 읽는 사람에게 뭔가 새로운 그림, 길을 넌지시 보여주는 듯하다. 도는 제물론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글자로, 어림잡으면 거의 매 문장마다 들어있다고 봐도 된단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작하든, 결국은 사람이 선택할 길에 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음이다. 장주가 들려주고 보여줄 길은 그가 지뢰와 인뢰를 들은 이후에 찾아낸 천뢰인지도 모른다. 아니, 장주의 노래, 장뢰(莊籟)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게다. 그럼 그의 이야기를 보자.

   신명(神明)을 괴롭혀서 억지로 일(一)이 되려고만 하고 그것이 본래 같음을 알지 못하는 것을 조삼이라 한다. 무엇을 조삼이라 하는가. 저공(狙公)이 도토리를 원숭이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냈다. 그래서 다시, “그렇다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하였다고 한다. 하루에 일곱 개라는 명(名)과 실(實)이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도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마음이 작용하였으니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면) 또한 절대의 시(是)를 따라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성인은 시비를 조화해서 천균에서 편안히 쉰다. 이것을 일컬어양행이라 한다. 5)


   조삼모사는 매우 익숙하다. 그리고 도가(道家)의 3인 가운데 하나인 열자(列子)의 책에도 나온단다. 흔히 변덕을 부리면서 남을 속이고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태도나, 어리석어 전체를 분간하지 못하는 상황과 같이 쓰인다. 그런데, 제물론 속에선 다른 분위기이다. 또한, 제물론의 매우 독특한 단어 3개가 한꺼번에 나온다. 천균, 양행과 더불어 위 본문에서 절대의 시를 따라야 할 것 이라고 번역된 인시이다.
   인시라는 단어는 제물론에서 남곽자기와 그의 제자 안성자유의 다른 대화 속에서도 나오는데, 번역하는 이에 따라서 하나의 단어로 인정하지 않고 그냥 풀어서 써는 경우도 있고, 장주의 매우 특별한 단어로 인정하며 의미를 주는 이도 있다고 한다. 인시는 대략, 자신의 선입견과 편견, 이익에서 출발하는 옳음이 아닌 다른 차원의 옳음, 즉 존재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며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어다어장은 이 익숙하지 않은 단어의 뜻을 대충 짐작하면서 뭔가 석연치 앉아서 구글링을 한다. 그러니까(因) 그런 것(是)이다!!! 6) 우와, 대박! 완전 멋진 번역, 딱 마음에 드는데! 그래, 이미 여기에 있는 데, 있기 위해서 자신의 존재를, 왜 자신이 자신인지를 누구에게 설명하고 인정받아야 한다면, 그건 쫌이 아니라 많이 아니지. 그럼 그렇고말고. 그런데, “그러니까 그런 것이다”를 ‘거시기 해서 거시기 혀’ 혹은 ‘카이까 그렇지’ 정도의 사투리로 번역해도 괜찮을 듯한데.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이미 거시기 하니까, 거시기 한 것이여. 거시기한 대로 봐주야 혀~~~. 이런 뜻의 인시는 곧 다양한 존재의 다양한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공존과 발전을 모색하는 다양성 논의의 중요한 바탕, 혹은 모토가 될 수도 있겠는데. 그리고 인시는 곧 있는 것을 일단, 있는 대로 인식하는 것, 즉 과학적인 태도에 가까운 듯하기도 한데. 그럼, 장자를 다시 과학자로 쳐주어야 하나, 어쩌나? 아니, 이건 진리를 추구하는 이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태도인가?
   그런데 천균은 또 뭐지? 글자만을 살피면, 하늘의 고루, 녹로, 물레라는 뜻인데, 하늘스러운 가지런함, 고름, 평평함이라고 하네? 평등, 하늘스러운 평등, 곧 자유가 되나? 그럼 천균은 존재의 평등성 안에서 누리는 자유? 그렇게되면 천균은 인시의 연장, 확장이 되나? 존재 대신에 사람을 대입하면 곧 사람의 평등성이 되는 건가? 다양한 존재의 평등성? 차별성과 평등성? 이건 사람들이 오랫동안 해온 고민이 아닌가? 아이구, 그런데 아무리 어다어장이라지만 너무 막 나가는 것 아닌가? 장주가 나를 보면 웃겠다.
   다양한 만물만이 아니라 세상의 시비판단 앞에서 인시와 천균을 들고 있으면, 양행이 아니라 다행(多行)으로 보는 게 맞아 보이네. 그런데 무슨 뜻이지? 모두가 가는 큰 하나의 길이 아닌 제 각자에게 맞는 길, 삶의 방법? 그럼 다양성에 대한 포용, 수용이 되는 건가? 여러 길을 걸으라는 게 아니고, 제각각의 길을 가는 걸 놓아두라는 이야기겠지? 그럼 같이 걷는 길은 없나? 길이란 게 갈라지기도 하고 다시 만나기도 하는 거겠지, 좁은 오솔길이 되기도 하고, 넓고 큰 길이 되기도 하고. 결국 천균, 양행은 다시 인시가 되네…
   다양성, 그리고 인시, 인시, 인시라, 그러니까 그렇다! 문득, 그리스도교의 영성가들이 흔히 하는 말이 생각난다. “필요할 일엔 일치를, 그렇지 않은 일일 땐 자유를, 모든 일에 사랑을 (In necessariis unitas, in dubiis libertas, in omnibus caritas).” 어다어장은 제 흥에 겹고 장주도 추렴을 넣는다. “모든 물(物)은 진실로 그러한 바가 있으며 모든 물은 가(可)한 바가 있으니 어떤 물이든 그렇지 않는 바가 없으며 어떤 물이든 가하지 않는 바가 없다. … 처음에 사물이 아직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으니 지극하고 극진하여 이보다 더 나을 수 없다. 그 다음은 사물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구별은 없다고 생각했으며, 그 다음은 사물과 사물의 구별은 있지만, 아직시(是)와 비(非)는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7)
천뢰 2
천예(天倪)와 만연(曼衍)
조삼모사의 이야기 속엔, 조삼모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시공간의 영역을 넓게 바라볼 수 없는, 인식의 본질적 한계에 대한 지적이 있어 보인다. 장주는 세상의 시비 논쟁과 판단 앞에 또 하나의 새로운 길이 아닌, 모든 논의, 인식이 가질 수밖에 없는 본질적 시공간의 한계를 일깨우는 전략을 선택 한 듯하다. 누구도 제 홀로 온전하지 않고, 온전한 판단을 내리지도 못한다. 첫 이야기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다. 이제 급히 장주의 다른 이야기로 갈 때다. 책장을 슬쩍슬쩍 넘기며 구작자(까치)와 장오자(오동나무)가 나와 세상 밖의 사람들, 삶과 죽음, 꿈과 생시, 시비 논쟁 따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들어 있는 멋진 두 개의 단어 천예(天倪)와 만연(曼衍)이 있는 곳으로 간다.

   이처럼 변하기 쉬운 [시비 대립의] 소리에 기대하는 것은 아예 기대하지 않는 것과 같네. 이런 것을 ‘하늘의 고름, 천애(天倪)’로 조화시키고, ‘무한의 변화(曼衍)’에 내맡기는 것이 천수(天壽)를 다하는 길이지. ‘하늘의 고름’으로 조화 시킨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사람들은 보통 ‘옳다, 옳지 않다,’ ‘그렇다, 그렇지 않다’고 하네. 그러나 옳다고 하는 것이 정말로 옳다면, 옳은 것이 옳지 않은 것과 다르다는 것은 변론할 여지가 없는 일이지. 그렇다고 하는 것이 정말로 그렇다면, 그런 것이 그렇지 않은 것과 다르다는 것 또한 논쟁할 여지가 없는 일 아닌가. 햇수가 더해 세월 가는 것을 잊고, [옳다 그르다] 의미를 따지는 일을 잊어버리게. 구경(究竟)의 경지로 나아가 거기에 머물도록 하게. 8)


   천예라는 말은 글자대로 보자면, 하늘이 알맞게 나눈 상태, 하늘스러운 알맞음 자연스러운 어울림, 자연스러운 알맞음, 있는 대로의 알맞음 따위로 번역될 수 있을 듯 하다. 그리고 만연은 전염병이 만연하다, 따위로 흔히 쓰이는 단어인데, 식물의 줄기 따위가 넓게 퍼져 나간 모습을 뜻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본문에 대한 재미있는 해석이 있다. 9) 천예는 “각 개별자의 서로 다름을 대상화하지 않고 무지개 같은 조화로운 다양성[천예(天倪)]”으로 그리고 만연은 “시비를 가리지 않으면서 시비를 인정[화(和): 화시비(和是非)]하며,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운동[만연(曼衍)]”이며 따라서, “개별자들이 서로 다른 것은 그 자체로 자연이므로, 다른 것 자체를 그대로 두고 각자의 옳은 것에 맡기는 것이 가장 실상에 가깝고 현실적 대안”이다.
   어다어장의 눈에 이 해석이 눈에 딱 들어와 박히고 제멋대로 혼자 생각이 마구 일어난다. 오호, 이것도? 대박! 천예, 무지개, 다양성! 다양성을 이야기할 때 가장 흔한 비유가 무지개가 아닌가? 어떻게 이렇게 짜 맞춘 듯하지? 그런데 대체, 어떻게 알맞음(倪)이 무지개(霓)가 되었지? 서로 다른 색깔이 나란히 서서 하늘의 길처럼 서 있는 무지개? 무지개가 하늘의 길로, 그리고 길이 곧 올바름과 알맞음의 이미지로 번져 나갔나? 아님 그냥, 비유인가? 무지개를 아름답다고 받아들인다면, 사람의 다름도 아름다움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만연하다는 말은 완전히 새롭네? 식물의 줄기가 퍼져 나가는 모습, 시비를 가리지 않고 운동하는 모습이라고? 부정적인 것이 아니네? 그런데, 넝쿨처럼 번지는 일이 곧 운동? 쫌 아닌 듯한데. 어쨌거나, 어릴 적 산에서 보던 칡넝쿨의 모습이 곧 만연인가? 그때의 나에겐 매우 풍성하고 보기 좋은 모습이었는데. 그럼, 만수산 드렁칡처럼 이렇게 저렇게 얽혀 차고 넘치게 있는 모습이 아름답고 풍성한 건가? 일편단심이 한결 같은 붉은 마음이 아니라, 시비의 경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변화를 따르지 못하는 한 색깔의 한 조각의 통좁은 마음일 수도 있나?…
   천예가 하늘스러운 길, 여러 색깔의 무지개와 같은 길을, 그리고 만연이 하늘 아래 놓인 땅에서 식물의 줄기가 번져 나가는 풍성한 모습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천예만연은 서로 다른 여럿이 엮여 하나의 아름다운 그림을 이루고 있는 걸 보고 있는 생태적인 시선에 참 어울리는 알맞은 단어이다. 서로 다른 여러 존재가 관계 속에서 의지하며 풍성함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떠올려본다. 투쟁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는 시대에선, 충돌과 투쟁만큼이나 공생과 의존 또한 생태계의 본질임을, 기호와 시비를 넘어서 형형색색이 함께 하는 하늘 무지개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이 또 하나의 길, 아름다움이 되면 좋겠다. 혹시 장주도, 식물 넝쿨이 땅 위의 경계와 상관없이 마구 번져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하늘이 내린 형형색색의 사람이 제 스스로 만든 분리와 차별을 넘어서며 풍성해지는 그림을 그려봤던 걸까? 천예만연이라는 단어 앞에서, 생명이 사람의 시비를 넘어가는 모습을 그려보는 장주를 상상하는 건 너무 지나친가?
장뢰(莊賴)
장주의 노래, 호랑나비 꿈, 물화(物化)
이젠 장자의 이야기, 제물론의 마지막으로 가자. 매우 짧지만 너무나 널리 알려진 장주가 꾼 호랑나비 꿈 이야기다. 제물론의 시작에서부터 나름 심각하고 긴 이야기를 만만치 않은 호흡으로 끌고 왔는데, 끝에 놓여 있는 이야기가 좀 난데없다. 갑자기 목소리와 얼굴을 바꾸어서 이야기를 하나 툭 던지는 느낌이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뭘 어쩌자는 이야기인지? 일단, 본문을 한번 보자.

   간밤에 장주는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영혼이 훨훨 날아오르는 듯. 그는 한 마리 나비였고 (그는 자신이 어떤지를 보여주면서 스스로 마음에 들었던 것이 아닐까?), 장주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화들짝 깨어나 보니 틀림없는 장주였다. 그는 자신이 나비가 된 꿈을 꾸고 있는 장주인지,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 나비인지 알 수 없었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물론 구분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사물들의 변화(物化)’가 뜻하는 것이다. 10)


   나비 꿈 이야기에 들어 있는 가장 중요한 단어로 흔히 물화를 이야기하며 동화, 주객일체, 여물동화(與物同化), 만물제동, 물아일체, 천지자연과 하나, 생사일여(生死一如), 생사불이(生死不二), 초연, 자유, 평등 따위의 단어를 이야기한다. 모두 멋져 보이는, 그러나 다 알 듯 말 듯 하고, 뭔가 좀 단단하지 않아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보고 싶은 마음이 인다. 그런데, 물화가 무엇이건, 나비와 꿈이 상징할 수 있는 것이 또 무엇이건, 장주는 꿈을 꾸었고, 또 꿈에서 깬다. 그런데 꿈에서 깬 장주는 매우 재미난 말을 남긴다.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어다어장은 제물론의 마지막 막, 장자의 혼자 말 앞에서 또 한 번 뻗쳐본다. 다양성이라는 주제로도 이 이야기를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다름, 구분이 편 먹기와 다툼으로 가고 있는 현실, 전체가 아닌 부분일 수밖에 없는 사람의 앎에 대한 자각, 그리고 지금과 다른 세상에 대한 꿈을 꾸는 일을 어떻게 엮어볼 수 없을까? 장주의 꿈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구분, 꿈, 알 수 없음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다양성과 어떻게 엮어보면 안 될까?
   구분이란 건, 비슷함과 다름, 곧 다양성으로 이어질 수 있는 단어가 아닌가? 비슷함 안에서 편안함과 친밀함을 즐길 수도 있지만, 다름 속에서 설렘과 새로움을 즐길 수도 있다. 사실, 비슷함과 다름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는 곧 다양성 논의의 핵심이지 않은가?
   또한, 수 없음, 무지 혹은 부지에 대한 자각은 다름 앞에서 쉽게 단정적이고 최종적인 판단에 이르는 걸 유보하고, 새로운 인식과 관계의 가능성을 탐구해보는 일로 엮으면 되지 않을까?
   회피의 길이 될 수도 있고, 도전의 길을 뜻할 수도 있는 꿈을, 제 안팎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영역과 경계를 넘나드는 하나의 길에 대한 모색으로 보면 어떨까? 그렇게 되면, 물화는 곧 저 자신의 경계를 넘어 다름으로 나아가기, 포용하기, 꿈꾸며 넘나드는 운동으로 읽을 수 있을 듯도 한데. 오, 뭔가 그림이 되는 듯한데. 억지, 견강부회라고? 좀 그런가? 그래도 다시 한번 힘을 주고, 그냥 자유로운 상상이라고 해두지 뭐. 정답이 어디 있냐고 되물어주지 뭐. 이런저런 색깔과 향기를 입혀서 읽는 건 내 자유고, 나에게 새로운 이야기가 되면 그만이라고 우겨보지 뭐. …
   제물론의 마지막에서 알 수 없다는 말을 슬쩍 흘려 놓으며, 사람의 무지, 부지, 온전할 수 없음을 다시 이야기하며, 섣부른 판단에서 오는 폭력을 피하고, 제각각의 색깔과 향기를 지닌 사람이 함께 제 삶을 살아가는 길에 대한 새
   로운 꿈 꾸기에 사람들을 초대하고 있는 장주를 그려보는 일은 유쾌하다. 꿈에서든 현실에서든, 비슷함의 편안을 넘어 불편한 다름 속으로 설렘을 가지고 여행을 떠나는 사람, 구분과 경계에 새로운 문과 길을 내는 이는 참 아름다워 보인다. 자신과 현실의 경계를 넘어 다른 이의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호랑나비를 꿈꾼다면, 또 끊임없이 깨어나, 또 계속해서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다면, 꿈이 지금 여기를 넘어 새로운 현실이 싹트는 생명의 자리가 된다면 참으로 얼마나 아름다울까? 어쩌면 제물론의 첫머리에서 죽어서 묻힌 듯한 분위기에서 세상의 소리를 듣던 장주는 사실 호랑나비 꿈을 꾸고 있었던 건 아닐까?
   어다어장은 다시 생각해본다. 땅 위의 온갖 소리, 사람에게 오가는 수많은 감정, 사람 사이에 주고받는 엇갈리는 시비 판단, 이것과 저것의 구별, 차이가 만들어내는 다툼을 넘어 어떻게든 잘 살아 보는 일에 대한 장주의 제안으로 제물론을 읽어보는 것은 꽤 괜찮은 일이라고. 그리고 무지, 온전할 수 없음에 대한 자각, 제각각인 존재에 대한 인식과 수용을 바탕으로 구분과 구별을 넘나들며 사귀기와 꿈꾸기에 도전하는 일은 더 괜찮은 일이라고. 장주를 친구 삼아, 이 세상이라는 광막지야(廣漠之野)에서 실실 거닐기도 하고, 또 나무 아래 누워 나비 꿈도 꾸고, 또 깨어나서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고 하며 한번 웃을 수 있으면 그 또한 괜찮다고. 꿈이 아닌 뜬 눈앞에서 나비가 날고, 붕(鵬)이 날아오르는 일을 볼지 누가 알겠는가? 젊은 시절, 친구가 자주 부르던 존 레논(John Lennon)의 노래 구절을 장주의 입에 슬며시 얹어놓고, 나는 숨는다.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as one.
목차
영화의 다양성, 영화의 다양한 시선들
어다어장의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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