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다양성,
영화의 다양한 시선들
이대현
영화평론가, 국민대학교 언론정보학부 교수.
영화는 이야기다.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철학자 사르트르는 말했다. 그렇다면 영화는 세상을 이해하는 ‘창(窓)’인 셈이다. 영화는 자유로운 이야기의 재구성을 통해 과거를 불러내고,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상상한다. 모든 인간의 역사, 삶, 꿈이 그렇듯 그것을 이야기로 담는 영화 역시 다양성은 필연이다. 스스로 다양한 모습과 색깔을 가지고 인간과 세상과 시간을 비추고, 말을 걸고, 손을 내민다.
   영화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 속에서 만들어진다. 영화의 다양성 역시 삶의 변화와 충돌, 혼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때문에 영화의 다양성은 ‘누가, 무엇을 만드느냐’에서 출발한다. 만들어진 영화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유통되고, 소비되느냐’ 에도 다양성의 변수는 들어있다. 다른 문화예술도 마찬가지지만 영화도 보는 사람의 시각과 가치관과 감정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작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영화의 다양성은 이 모든 것들을 변수로 이야기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영화, 무엇인가?

영화는 ○○다.


‘영화가 무엇인가’는 영화에 따라, 사회문화적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영화는 가짜다. 영화는 활동사진으로 출발했지만 허구와 상상의 세계로 발전했다. 사실의 재현이나 기록도 있지만 그것들 역시 서사라는 양식, 선택(편집)과 과장(특수효과), 조작(연출)의 과정을 거치면서 허구와 뒤섞인다. 영화가 허구와 상상의 세계로 나아간 가장 큰 이유는 대중적 오락성 때문이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욕망을 영화는 실체가 아닌 영상언어의 환상(판타지)으로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를 대중에게 제공한다. 미경험의 세계에 대한 가상의 체험. 이 신기루 같은 자극이야말로 영화의 강력한 무기이다.
  • 영화는 현실이자 미래다. 영화의 상상과 허구는 늘 현실을 발판으로 만들어지고, 현실로 내려온다. 귀신의 세계, 먼 미래의 세계조차 영화가 인간세상의 상식과 가치 안에서 상상된다. 영화가 현실을 보는 ‘창’인 이유이다. <아바타>와 <인셉션>에서 보듯 상상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언젠가는 현실이 된다.
  • 영화는 재미다. 재미가 생명력이다. 그 재미는 단순히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쾌락만이 아니다. 영화가 그것에만 집착, 반복했다면 산업과 예술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감동의 희로애락, 발견의 즐거움, 깨달음, 보편적 가치의 확인, 경험의 대리, 추억의 현재화, 상상의 형상화 등의 다양한 재미를 추구하면서 그에 맞는 그릇(장르)들을 만들어낸다.
  • 영화는 소통(커뮤니케이션)이다. 영화의 대중성은 과거 소수의 특권이던 문화예술을 하나의 양식으로 통합하고, 확장하는 것만으로 달성된 것이 아니다. 가장 보편적인 가치의 전달과 극장이란 공간, 시공간을 초월한 동시성과 반복성, 다양한 표현요소의 구사로 ‘소통’을 극대화한다. 때문에 극장은 단순히 영화를 더 웅장하고 실감나게 보는 물리적 공간의 의미를 넘어선다. 일종의 ‘광장’이다. 영화는 그곳에서 서사와 영상, 카메라의 시선과 스타(배우)로 관객들을 은밀히 유혹하면서 메시지의 설득력과 공감을 높인다. 영화상영의 시작 전 극장의 조명이 꺼지는 순간을 하나의 ‘의식(儀式)’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같은 영화를 한 장소에서 함께 본다는 것은 영화와 끝없이 대화하는 동시에 무언의 소통과 공유의식을 갖게 한다. 그것으로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 권력이 되기도 한다.
  • 그래서 영화는 정치다. 정치와 닮았고, 정치적 속성을 함유하고 있다. 영화는 보다 광범위한 문화적 재현 체계 중의 한 부분으로서 사회현실을 특정한 방향으로 형성하게 하는 심리적인 성향이나 사회제도들을 유지시켜 주면서 이 세계가 무엇이고 또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상식적인 감각을 만들어낸다. 1) 이때 재현은 단순히 현실의 재연이 아닌 영화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재구성되며, 그것에 의해 영화는 정치적이 된다고 2) 할 수 있다. 갱 영화. 조폭 영화에서 보듯 영화 속의 갈등은 권력투쟁, 정치적 목표와 동일하다.
이처럼 영화는 진실은 허구로, 허구는 사실처럼 만들어 일정한 메시지나 정치적 이미지를 인간의 의식과 행동을 통해 재현할 수 있다. 사회주의 국가의 영화와 ‘성조기’와 ‘자유’로 상징되는 미국 할리우드 영화, 한국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정치영화가 그렇듯이 그것을 통해 정치적 가치를 합리화, 정당화할 수 있는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


상상과 허구이지만 현실에 대한 거울로서 영화는 ‘정치성’을 함유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그 정치성의 예술적 표현을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현실의 문제점을 인식하게 하고, 보다 바람직한 미래를 꿈꾸게 만든다. 그러나 최근의 한국영화는 예술적 완성도나 리얼리티를 위한 요소로서 ‘정치성’이 아닌 ‘정치적 의도’를 목적으로 제작되는 경향이 강하다. 영화 스스로 문화 권력을 확장하고 우리 사회의 진영 논리와 이념적 대립을 상업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시대 분위기와 권력 교체에 영합하는 작품들이 많다.
   보수정권에서 이순신과 맥아더(명량, 인천상륙작전)가 부활하는가 하면, 문재인 정권의 출범에 맞춰 노무현 전 대통령(노무현입니다)이 스크린을 통해 살아 돌아온다. 2012년부터 최근까지 정치적 해석과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품으로는 <군함도> <인천상륙작전> <명량> <변호인> <내부자들> <암살> <군도:민란의 시대> <국제시장> <택시운전사> <연평해전> <1987> <아들의 이름으로>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런 영화들은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을 재인식하고 재평가한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시대적 분위기와 관객들의 심리와 정서에 영합해 정치성향이 강한 소재, 색깔을 담음으로써 상업적 성공과 함께 문화적, 정치적 영향력까지 얻으려는 계산도 깔려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노골적인 정치색을 가진 영화가 가진 문제점은 관객들로 하여금 오락과 문화적 경험으로서 영화에 대한 감동이나 공감보다는 영화까지도 하나의 정치적 의사표현이나 동의의 수단으로 여기게 만든다.
   물론 이같은 현상을 초래한 1차적 책임은 기득권 경쟁을 위해 노골적인 편 가르기와 정치색을 드러내면서 그것을 상업적 이익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영화생산자(기획자, 제작자, 감독)들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그들과 동조하고 협력해 영화를 정치적 선전수단과 헤게모니 확장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권력집단에게도 책임이 있다.
   <이대현 (2019). 한국신문 영화보도 담론의 정파성에 관한 연구. 박사학위논문, 국민대학교, 서울. 160.>


영화는 ‘뻔하다’?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 사람 사는 것은 언제나, 사는 곳은 어디나 같다는 말도 된다. 시대와 장소를 떠나 인간이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된다. 때문에 영화가 아무리 오락이고, 재미이고, 상상의 산물이라고 해도 현실에서 점프해 마음껏 재주를 부리다가도 다시 인간과 세상으로 내려와야 한다. 이런 서사와 형식의 반복 속에서 영화는 상상력과 통찰력을 제공하고, 영상언어 예술로서의 장점을 살려야 한다.
   사실 모든 영화는 뻔하다. 다만 ‘뻔하다’가 상투적이라는 의미일 때는 부정적이지만, 원형적이라는 의미일 때는 긍정적이다. ‘상투적’은 이야기가 협소하고, 특수한 문화적 경험으로 제한하면서 낡고 몰개성적인 것을 일반성으로 포장하는 표현을 말한다. 당연히 내용과 형식이 빈곤하다. 아류작, 모방작들이 그렇다.
   반면 ‘원형적’은 현실의 구체성으로부터 보편적 인간 경험을 들어 올린 후, 그 내부에 개성적이고 독특한 문화적 특성을 담고 있는 표현을 말한다. 인문학적 지식과 감성을 자극하며 우리 자신의 인간성을 발견하게 만든다.
   <왕자와 거지> <카케무샤>의 인물과 서사구도를 베낀 듯한 <광해, 왕이된 남자>가 1,200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대성공을 거둔 이유를 한번 생각해 보자.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광해군 15일간의 행적을 독특한 문화로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도 현실적 구체성을 가지고, 진심으로 백성과 소통하고 아픔을 나눌 줄 아는 눈과 마음을 가진 지도자를 확인시켜 주었다. 바람직한, 국민이 원하는 지도자 상을 그린 영화는 그전에도 많았다.
영화 다양성

영화 다양성, 왜 필요한가


영화는 표현의 문화예술이다. 표현의 생명은 자유와 개성이고, 예술은 자유롭고 개성적인 표현으로 다양성을 가질 수 있다. 영화는 동시에 산업이기 때문에 유통과 소비에 의해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지만 단순한 공산품이 아니라는 점에서 보다 복합적이다.
   영화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가치와 현실 인식, 상상력을 제공하며 이를 통해 삶을 더 풍요롭고 즐겁게 해준다. 영화 다양성은 곧 삶의 다양성이고 문화의 다양성이다. 문화 다양성은 ‘좋다’와 ‘싫다’, ‘높다’와 ‘낮다’의 구분이 아니라 ‘익숙하지 않다’와 ‘다르다’이다. 그 경계를 단단히 하는 것도, 허무는 것도 문화적 취향이다. 다양한 영화만큼이나 다양한 소비자, 영화를 다양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소비 다양성도 필요하다.
   문화를 즐기는 능력인 문화적 취향의 확대는 지식과 교양, 생각과 가치관을 넓고 깊게 만들고 인간과 세상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와 시선을 가지게 한다. 액션물만 즐겨보는 사람은 다른 장르의 영화가 가진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결코 누릴 수 없다. 스스로 취향의 벽을 깨뜨릴 때 다양한 색깔의 영화가 보이고, 영화는 내 것이 된다.
   정파성에 빠져 영화까지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판단을 하는 것도 취향의 확대를 가로막은 장애물이 될 수 있다. 편견이나 편향을 허물고 가슴과 눈을 열어야, 만날 수 있는 영화도, 느낄 수 있는 영화도 다양해진다.


영화 다양성, 돈과 기술?


영화는 고비용의 예술이다. 비용에 따른 수익이 없으면 장기적으로 영화는 연속성을 갖지 못한다. 작가주의 감독이 흥행과 상관없이 오로지 자신의 예술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만들더라도 그것이 반복 확대 되려면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찾아야 한다.
   영화생산의 다양성, 또 하나의 조건은 다양한 자본에 있다. 지나치게 흥행만을 좇는 자본은 모험을 꺼린다. 다행스러운 것은 영화자본이 갈수록 대기업에만 집중되지 않고 다양한 투자펀드로 분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같은 변화는 비슷한 것의 반복에서 오는 수익 다변화의 감소를 경험한 영화투자자와 생산자들의 의식이 바뀐 탓도 있지만 제작환경과 기술혁신, 유통의 혁신, 다양성을 보다 폭넓게 수용하려는 소비자(관객)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영화가 흥행예술이란 점에서, 고비용 산업이란 점에서 생산의 다양성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수익을 염두에 둔 지나친 상업영화 제작 편중은 문화 편식을 심화시킨다. 그래서 이를 막기 위해 공공자본이 투자되기도 한다. 사회주의 국가의 선전, 선동을 위한 영화산업 간여와 지원과는 달리 정부나 지자체가 독립영화, 저예산 영화, 예술영화 등에 제작과 유통을 지원하는 것도 영화 다양성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 영화제작의 엄청난 변화와 다양성에 기폭제가 된 것은 디지털 기술혁명이다. 영화는 테크놀로지의 산물이기 때문에 끝없이 새로운 기술과의 결합은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소재와 이야기의 표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값비싼 필름 대신 디지털 영사기는 제작비용도 낮추었다. 이제는 스마트 폰이 영사기를 대신해도 손색이 없다.
   소위 블록버스터는 여전히 메이저영화사들의 몫이지만, 흥행 부담이 적은 저예산 예술영화들이 수많은 프로덕션에서 제작되고 있다. 그 자본도 과거에는 영화산업에서 주로 나왔지만 지금은 경계를 허물고 시장과 사업의 다각화를 노린 다른 산업자본이 들어오면서 영화 생산의 양적 규모나 다양화를 더욱 촉진시키고 있다.
   또 하나. 글로벌화와 차별화이다. 할리우드 영화는 미국의 투자사와 영화사, 한국영화는 한국의 투자사와 제작사가 만들고 특정지역에 배급, 상영한다는 상식이 깨졌다. 반대로 모든 영화가 모든 지역, 나라에서 소비되어야 한다는 강박도 사라졌다. 디지털 혁명에 의한 영화제작의 다양화는 유통(배급과 상영)의 다양화와 맞물려 있다. 제작이 유통을, 유통이 제작을 변화시키고, 영화 형식까지 새롭게 만들어 ‘영화는 극장에서 보는 것’이란 관념을 허물어 버렸다. 영화 플랫폼인 OTT(Over-the-top media service,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의 등장은 영화 소비를 집단에서 개인으로, 일방적에서 선택적으로, 작은 영화들까지 단발성에서 시공간을 초월한 반복성으로 바꾸어 버렸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물리적 거리두기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안전한 영화 소비의 창구가 되었다.
   이전에도 영화상영의 다양성에 대한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의 경우, 1990년대 작은 극장들이 예술영화와 제3세계 영화에 목마른 관객들을 위해 유럽 영화들을 가져와 상영해 작은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마케팅과 배급 등에서 기존 상업영화와의 차별화를 하지 않은 데다, 엷은 관객층으로 인해 오래 지속성을 갖지 못했다.
   그 뒤를 이은 것이 1996년 부산을 시작으로 우후죽순 생겨난 국제영화제이다. 국내에서 열리고 있는 많은 영화제들이 지자체의 과시와 홍보수단, 지나친 소비성 축제라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적어도 영화 상영의 다양성에서 어느 정도는 긍정적 역할을 해온 측면은 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각국에서 제작한 수백 편의 영화가 영화제에서 한꺼번에 상영되고, 수십만 영화팬들이 몰려들지만, 4) 영화제가 영화상영의 다양성에 실질적으로 기여했느냐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영화제 기간에만 상영되는 ‘일회성’에 그치고 있으며, 영화제 이후 일부 인기 작품이 극장에서 개봉하지만 대부분 찾는 관객이 없다는 점이 그렇다.


OTT의 힘?


급성장하고 있는 OTT는 이 모든 한계를 뛰어넘어 영화 유통과 상영의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다. 경제성, 편리성, 반복성, 개별성, 탈지역성으로 어떤 영화도 원하는 때에 누구나, 값싸게 감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제 관객은 개봉작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지 않아도 되고, 파일로 작품을 소장 할 필요도 없고, 제작사는 배급사와 극장의 눈치를 보며 영화를 만들 필요도 없어졌다. 봉준호 감독의 <옥자>가 넷플릭스로 개봉하자 극장들이 보였던 반발과 OTT가 제작, 상영하는 영화에 대한 칸영화제의 거부감도 지나간 해프닝이 되었다.
   계간 『대산문화』 여름호(제80호)의 ‘대산초대석’에서 <국제시장>의 윤제균 감독은 “OTT가 다방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자연적인 흐름이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든 OTT에 의한 유통방식이 시장과 소비의 변화를 넘어 제작과 장르, 포맷에까지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단순히 극장용 2시간짜리가 아니라 숏(short)폼의 영화들, 즉 짧게는 30분짜리 20개, 1시간짜리 10개의 영화도 가능해졌다”고 말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기생충>이 세계적으로 관심을 얻은 것이 작품의 완성도,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빈부격차의 문제란 글로벌 주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OTT의 역할도 부정할 수 없다. 넷플릭스가 들어오고, 플랫폼이 다양화되면서 한국영화 역시 글로벌 시장으로 나가는 것이 쉬워졌고, 언어의 장벽도 낮아졌으며, 한국배우에 대한 관심과 평가도 달라지고 있다. 윤여정이 <미나리>로 한국배우로는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장기화로 온라인 영화상영과 관람이 확대되면 당연히 극장의 역할과 거대 자본의 극장용 영화의 다양성은 위축될 것이란 우려도 있다. 이에 대해 17년 만에 <태극기 휘날리며>를 극장에서 재상영하는 자리에서 강제규 감독은 반대 의견을 나타냈다. 영화는 유통도 중요하지만 콘텐츠이기 때문에 코로나19가 수그러들면 극장은 다시 부활한다는 것이다. 봉준호 감독 역시 과거 <아바타>가 나왔을 때 앞으로 모든 영화가 3D로 갈 것 이라고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면서 모든 영화가 OTT로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렇다면 극장과 OTT는 제로섬 게임이 아닌 플러스 게임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윤 감독은 코로나19 펜데믹이란 상황을 떠나 OTT가 영화감상에 필요한 개인의 사적 사유 공간으로 자리 잡아 영화의 소비와 다양성을 촉진시킬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OTT가 영화의 소비패턴 이분화와 시장의 확대를 가져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세계 모든 작은 영화들이 OTT로 들어오고 있다.
   극장과 VOD에서 사라진 영화를 볼 수 없는 시대는 지나갔다. 특정 장르, 소재, 나라의 영화를 찾기 위해 힘들게 이 사이트, 저 사이트를 검색하지 않아도 된다. 심지어 플랫폼의 알고리즘은 내가 좋아하고, 자주 보는 장르, 주제, 소재, 국가, 감독, 배우의 영화를 밥상처럼 차려준다. 집어 먹기만 하면 된다.
   모든 영화가 홍보와 지명도를 위해 극장에 며칠이라도 상영하고 온라인으로 넘어가야 할 이유도 없다. 가상공간의 극장(OTT)에 이미 수억 명의 관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가입자가 2억 4,000만 명이고, 시작한지 불과 1년 4개월, 그것도 겨우 59개 국가에만 서비스를 하고 있는 디즈니플러스의 스트리밍 동영상 가입자가 1억 명(2021년 3월 현재)이다.
   선택만 남았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만 볼 것인가, 아니면 알고리즘에 의존하지 않고 시선을 넓혀 다양한 다른 영화들도 볼 것인가. 그리고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영화에서 ‘무엇’을 만날 것인가.

인구유형별 관객의 일반적 특성 (영화진흥위원회 분류)

영화, 어떻게 볼 것인가?
모든 문화예술 창작품이 그렇듯, 영화도 그것을 소비하는 관객에 따라 의미와 가치는 제각각이다. 같은 영화에서 다른 것을 발견하기도 하고, 다른 영화에서 같은 것을 확인하기도 한다. ‘재미있다’와 ‘없다’ 도 마찬가지다. 영화란 각자의 시선으로 보는 것이며, 그 시선에 의해 영화는 ‘나만의 것’이 된다. 물론 영화는 형식적 관습, 이를테면 내러티브의 종결, 이미지의 연속성, 비성찰적인 카메라, 등장인물의 고정된 정체성, 중심화면 잡기, 프레임의 균형, 사실적인 명료함 등으로 자신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그것을 따라갈 이유는 없다.
   작가들이 소설 후기에 자주 쓰는 말이 있다. “이제 이 작품은 독자 여러분들의 것입니다.” 영화 감독 역시 그 말을 자주한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는 보는 사람이 마음대로 해석해도 좋다”고 했고, 정이삭 감독은 “내 영화는 언제나 열려 있는 ‘식탁’이므로 누구든 언제라도 맛있게 음식을 먹으면 좋겠다”고 했다. 내가 어떻게, 어떤 시선으로 영화를 보느냐에 좋은 영화, 재미있는 영화, 의미 있는 영화, 새로운 영화가 된다는 것이다. 영화의 의도, 가치, 이미지, 상상력에 무조건 따라가지 말고 나의 경험과 시각으로 영화 속의 다양한 코드들을 찾을 때 같은 영화라도 다양하게 읽을 수 있고, 다른 색깔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얘기다.


영화에서 3개의 시선


영화에는 3개의 눈이 있다. 하나는 카메라이고, 또 하나는 배우이며, 마지막 하나는 관객인 ‘나’이다. 영화는 세계와 유사한 시각적 경험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의 시각과 마찬가지로 영화의 시각도 항상 의도적이다. 볼 것을 선택하고, 본 것에 의미를 결정하는 일에 관심을 둔다는 점에서 그렇다. 관객 역시 영화적 시각을 자신의 시각처럼 착각하면서 영화의 이미지들을 신뢰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려 한다.
   영화의 시각인 카메라는 감독의 눈이다. 감독은 자신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에 카메라를 일치시키고, 가까이 가져가고, 다양한 워크(롱테이크, 핸드헬스, 점프컷 등)로 대상에 이미지와 정서를 부여한다. 이를 통해 감독은 특정 입장이나 시점을 강요하고, 영화적인 인위성의 기호들을 감추면서 관객을 감독과 같은 입장에 가두어 놓으려 한다.
   전쟁영화를 한번 보자. 대부분의 전쟁영화에서 카메라는 감독이 자기편으로 설정한 쪽의 눈이 되고, 그들이 가진 무기의 눈이 되어 상대편을 응시하고 공격한다. 카메라 시선을 따라가면 영화에서 적은 관객의 적이 되고, 관객은 자신도 모르게 감독과 하나가 된다. 카메라가 무시하고 흘려버리는 것을 같이 흘려버린다. 영화 <덩케르크>에서는 아예 무기가 카메라의 눈을 달고 하늘을 날아다니며 적을 공격한다. 카메라의 눈만 무작정 쫓아가다가는 영화의 다양한 기호나 요소들이 가진 의미나 감동을 놓쳐버린다. 영화적 시각을 투명한 것으로 생각해 그것을 통해 보려는 경향 때문이다.


배우의 시선은 어떨까. 절대 관객을 향하지 않는다. 카메라(감독)와도 좀처럼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 카메라나 스크린을 보고 있는 관객을 향할 때는 그 시선이 영화 속의 한 공간이나 다른 배우라는 것을 바로 다음 컷에서 재빨리 보여준다. 배우가 카메라의 눈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관객에게 시선을 두는 순간, 관객의 공간을 인지하게 되고 관객 역시 자신의 위치를 알아채 허구성이 파괴되기 때문이다.
   배우의 이같은 시선두기는 영화의 환영주의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환영주의는 영화가 사건과 인물은 물론 그것을 보는 방식이 현실과 다를 수 있다는 사실에 관객이 주목하지 않도록 유도하고, 눈에 보이는 이미지들이 진실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마음에 가장 호소력 있는 조건(허구)을 창출해 자신의 현존을 잊은 채 거기에 빠져들게 하는 지각적인 만족감을 준다. 5) 마지막으로 영화에는 ‘나’의 시선이 있다. 일반적으로 ‘나’의 시선은 다른 사람(감독)의 시각과 결합된 기계(카메라)의 시선을 따라가려 한다. 그 수동적 참여가 나로 하여금 영화에 빠져들기 쉽게 하고, 나를 편하고 즐겁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영화는 내 것이 될 수 없다. 감독의 것으로 남는다.


‘나’의 시선으로 영화 보기


영화를 내 것으로 만들려면 나만의 시선을 가져야 한다. 취향에 집착하고, 정서적 스키마(schema)로 익숙한 것만 받아들이고 보려 하면 나의 시선은 점점 좁아지고 단조로워진다. 시선을 다양하게 가지려면 ‘마음의 창’부터 활짝 열어야 한다. 섬세한 감성과 날카로운 눈으로 낯설고 어색한 것에서 보편성과 동질성을 발견할 때 영화는 또 다른 옷을 입는다. 누군가에게는 카타르시스가 나에게는 깨달음이 된다.
   2010년, 국내 처음으로 순수 베트남 기술과 감독, 배우로 만든 상업영화<하얀 아오자이>가 우여곡절 끝에 개봉했다. 그러나 완성도와 기술 수준이 떨어진다면서, 베트남 영화까지 봐야 하느냐며 관객들은 외면했다. 베트남에서는 당시 최다인 50만 명이 보고 눈물을 흘렸고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수상(관객상)까지 했지만, 상영 일주일도 안 돼 극장에서 사라졌고, 겨우 6,000여 명이 보는 데 그쳤다.
   1950년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가족의 비극과 희망, 어머니의 헌신적인 자식사랑을 감동적으로 그린 이 영화는 막연하게 생각했던 그들과 우리의 역사와 삶에 동질성을 발견하게 해주었다. 이 영화에서 봐야 할 것은 ‘기술’이 아니라 ‘세상’이었다. 다문화, 문화다양성이란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즐기면서 우리 문화와의 공유점을 찾아내고, 우리와 다른 정서와 정신의 장점들을 그들로 하여금 살리게 하는 것” 6) 이기 때문이다.
   편견과 선입견을 깨고 나의 시선을 다앙하게 가지면 세상에 나쁜 영화는 없다. 아무리 상투적인 영화도 그 속에 아름답거나, 선하거나, 새롭거나, 따뜻한 풍경 하나쯤은 있다. 그것을 발견해 나의 지식과 감정으로 확장한다면 나에게는 좋은 영화가 된다. 적의 눈으로도 세상을 보면 <글래디에이터>에서 전쟁영웅 막시무스를 죽이려는 코모두스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으며, 사유와 탐구로 영화는 ‘뻔한’ 복수극이 아닌 역사가 된다.
   ‘하나의 영화에는 하나의 이야기만 있고, 영화가 제시하는 길을 따라 그 이야기에 도달해야 한다’면 그 하나의 영화는 누구에게나 같은 영화이다. 그러나 그 영화를 통해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같을지라도 그 길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영화 다양성은 그 길에 있다. 이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일찍이 영화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에서 주인공인 방송PD와 시골 소년의 대화로 그것을 확인시켜 준다.

“학교는 어디로 가니?”
“이쪽이랑 저쪽이요.”
“학교가 두 군데냐?”
“아뇨, 학교 가는 길이 둘이에요,”



   어떤 곳을 가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길이 둘이면 목적지도 둘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일에는 한 개의 정답만 있지 않으며, 인생에도 영화에도 여러 가지의 길이 있다. 그래서 삶도, 영화도, 그 영화를 보는 사람의 마음도 다양한 것이다. 그러니 내가 가고 싶은 길로 가고, 내가 보고 싶은 눈으로 보자. 그것이 좀 더 고달프고,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지라도. 그 속에 나만이 만날 수 있는 것들이 있으니까.
   그렇다고 모든 영화에 나만의 시선을 고집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다른 ‘획일’이고, ‘강박’이다. 소위 ‘대박’ 영화일수록 그렇다. 관객은 바보가 아니다. 1,0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보고 공감하는 데는 분명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것이 단순한 오락일 수도 있지만 그 안에 사회적, 심리적 요인이 숨어있다. 그것을 현실과 연결시킬 때, 영화는 세상으로 걸어 나오고, 나와 눈을 맞춘다.


영화로 만나는, 상상하는 다양한 세상
영화는 서로 다른 시선으로 상상과 세상을, 우리는 서로 다른 눈과 가슴으로 영화를 만난다. 거기에서 다양한 민족과 역사, 삶과 사회, 문화와 정신, 믿음과 선의 같음과 다름을 발견한다. 그 느낌들이 ‘나’와 ‘너’와 ‘우리’ 의 삶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무수히 많은 영화들, 다양한 소재와 이야기들이 제각각의 모습으로 가고자 하는 곳은 ‘하나’이다. 보다 나은 인간세상을 향한 꿈. 그것을 위해 영화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들과 경험들’을 결코 버리지 않는다. 선, 사랑, 우정, 가족, 공동체, 나눔, 죽음, 영혼, 꿈을 위해 다양한 사람들과 삶을 이야기하고 시공간을 넘어 문화와 역사와 종교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나만의 가치가 아닌 타인, 인간을 넘어 동물과 자연과 미지의 생명체의 생각과 마음까지 함께 공감하기를 원한다.
   영화는 때론 <도가니> <와즈다> <암흑가의 두 사람>처럼 세상을 바꾸기도 하고, 바꾸지는 못해도 날카롭고 거침없는 눈으로 세상의 모순과 비인간성을 풍자하고 비판한다. 7) 역사를 다시 불러내 현실을 돌아보게 하고 미래의 길을 다양하게 그려보기도 한다. 8)
   인간의 모습을 벗어난 변종(스파이더 맨, 다크맨, 배트맨)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고, 아내나 여성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가치(더 와이프, 82년생 김지영)를 되찾으려 한다. 인공지능과 유전자 복제시대에 나와 똑같은 또 하나의 ‘나’(아바타, 아일랜드, 서복)의 존재가 있다면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고민하게 만들고, 로봇과 동물과 외계인의 반란과 욕망(AI, 바이센테니얼 맨, 터미네이터, 킹콩, 혹성탈출, 인베이젼)으로 인간의 조건과 인간의 우월성은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 질문을 한다.
   때론 누구도 알 수 없는 죽음의 세계를 상상하거나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선택(버킷리스트, 화장, 중천, 원더풀 라이프, 굿바이, 신과 함께)으로 삶의 가치와 겸손함을 가르치는가 하면, 가장 원시적인 인간의 욕망을 무협과 마법(소림축구, 와호장룡, 해리 포터, 마녀배달부 키키)으로 마음껏 펼쳐 보이기도 한다.
   지도자가 우리를 실망시킬 때면 역사에서 진정으로 시대가 원하는 지도자상(웰컴 투 동막골, 광해_왕이 된 남자, 역린, 명량)을 찾아보고, 언어와 종교와 인종과 지역과 세대와 정파로 막혀있는 세상에 소통의 조건(바벨, 킹스 스피치)을 제시하기도 한다. 고령화 사회에 늙고 병들고 소외된 노인들의 우울한 삶의 모습에 눈을 돌려 치유 방법(더 파더, 언노운 걸, 인턴, 그대를 사랑합니다)까지 고민하는 영화.
   어디 이뿐이랴. 영화로 만날 수 있는 세상은 영화의 숫자만큼이나 많고, 그 영화들 속에서 내가 선택하는 길만큼이나 여러 갈래이다. 그 다양성이 곧 세상과 인간의 다양성이기도 하니까.
목차
영화의 다양성, 영화의 다양한 시선들
어다어장의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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