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양성, 왜 필요한가
영화는 표현의 문화예술이다. 표현의 생명은 자유와 개성이고, 예술은 자유롭고 개성적인 표현으로 다양성을 가질 수 있다. 영화는 동시에 산업이기 때문에 유통과 소비에 의해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지만 단순한 공산품이 아니라는 점에서 보다 복합적이다.
영화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가치와 현실 인식, 상상력을 제공하며 이를 통해 삶을 더 풍요롭고 즐겁게 해준다. 영화 다양성은 곧 삶의 다양성이고 문화의 다양성이다. 문화 다양성은 ‘좋다’와 ‘싫다’, ‘높다’와 ‘낮다’의 구분이 아니라 ‘익숙하지 않다’와 ‘다르다’이다. 그 경계를 단단히 하는 것도, 허무는 것도 문화적 취향이다. 다양한 영화만큼이나 다양한 소비자, 영화를 다양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소비 다양성도 필요하다.
문화를 즐기는 능력인 문화적 취향의 확대는 지식과 교양, 생각과 가치관을 넓고 깊게 만들고 인간과 세상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와 시선을 가지게 한다. 액션물만 즐겨보는 사람은 다른 장르의 영화가 가진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결코 누릴 수 없다. 스스로 취향의 벽을 깨뜨릴 때 다양한 색깔의 영화가 보이고, 영화는 내 것이 된다.
정파성에 빠져 영화까지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판단을 하는 것도 취향의 확대를 가로막은 장애물이 될 수 있다. 편견이나 편향을 허물고 가슴과 눈을 열어야, 만날 수 있는 영화도, 느낄 수 있는 영화도 다양해진다.
영화 다양성, 돈과 기술?
영화는 고비용의 예술이다. 비용에 따른 수익이 없으면 장기적으로 영화는 연속성을 갖지 못한다. 작가주의 감독이 흥행과 상관없이 오로지 자신의 예술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만들더라도 그것이 반복 확대 되려면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찾아야 한다.
영화생산의 다양성, 또 하나의 조건은 다양한 자본에 있다. 지나치게 흥행만을 좇는 자본은 모험을 꺼린다. 다행스러운 것은 영화자본이 갈수록 대기업에만 집중되지 않고 다양한 투자펀드로 분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같은 변화는 비슷한 것의 반복에서 오는 수익 다변화의 감소를 경험한 영화투자자와 생산자들의 의식이 바뀐 탓도 있지만 제작환경과 기술혁신, 유통의 혁신, 다양성을 보다 폭넓게 수용하려는 소비자
(관객)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영화가 흥행예술이란 점에서, 고비용 산업이란 점에서 생산의 다양성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수익을 염두에 둔 지나친 상업영화 제작 편중은 문화 편식을 심화시킨다. 그래서 이를 막기 위해 공공자본이 투자되기도 한다. 사회주의 국가의 선전, 선동을 위한 영화산업 간여와 지원과는 달리 정부나 지자체가 독립영화, 저예산 영화, 예술영화 등에 제작과 유통을 지원하는 것도 영화 다양성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 영화제작의 엄청난 변화와 다양성에 기폭제가 된 것은 디지털 기술혁명이다. 영화는 테크놀로지의 산물이기 때문에 끝없이 새로운 기술과의 결합은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소재와 이야기의 표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값비싼 필름 대신 디지털 영사기는 제작비용도 낮추었다. 이제는 스마트 폰이 영사기를 대신해도 손색이 없다.
소위 블록버스터는 여전히 메이저영화사들의 몫이지만, 흥행 부담이 적은 저예산 예술영화들이 수많은 프로덕션에서 제작되고 있다. 그 자본도 과거에는 영화산업에서 주로 나왔지만 지금은 경계를 허물고 시장과 사업의 다각화를 노린 다른 산업자본이 들어오면서 영화 생산의 양적 규모나 다양화를 더욱 촉진시키고 있다.
또 하나. 글로벌화와 차별화이다. 할리우드 영화는 미국의 투자사와 영화사, 한국영화는 한국의 투자사와 제작사가 만들고 특정지역에 배급, 상영한다는 상식이 깨졌다. 반대로 모든 영화가 모든 지역, 나라에서 소비되어야 한다는 강박도 사라졌다. 디지털 혁명에 의한 영화제작의 다양화는 유통
(배급과 상영)의 다양화와 맞물려 있다. 제작이 유통을, 유통이 제작을 변화시키고, 영화 형식까지 새롭게 만들어 ‘영화는 극장에서 보는 것’이란 관념을 허물어 버렸다. 영화 플랫폼인 OTT
(Over-the-top media service,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의 등장은 영화 소비를 집단에서 개인으로, 일방적에서 선택적으로, 작은 영화들까지 단발성에서 시공간을 초월한 반복성으로 바꾸어 버렸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물리적 거리두기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안전한 영화 소비의 창구가 되었다.
이전에도 영화상영의 다양성에 대한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의 경우, 1990년대 작은 극장들이 예술영화와 제3세계 영화에 목마른 관객들을 위해 유럽 영화들을 가져와 상영해 작은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마케팅과 배급 등에서 기존 상업영화와의 차별화를 하지 않은 데다, 엷은 관객층으로 인해 오래 지속성을 갖지 못했다.
그 뒤를 이은 것이 1996년 부산을 시작으로 우후죽순 생겨난 국제영화제이다. 국내에서 열리고 있는 많은 영화제들이 지자체의 과시와 홍보수단, 지나친 소비성 축제라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적어도 영화 상영의 다양성에서 어느 정도는 긍정적 역할을 해온 측면은 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각국에서 제작한 수백 편의 영화가 영화제에서 한꺼번에 상영되고, 수십만 영화팬들이 몰려들지만,
4)
영화제가 영화상영의 다양성에 실질적으로 기여했느냐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영화제 기간에만 상영되는 ‘일회성’에 그치고 있으며, 영화제 이후 일부 인기 작품이 극장에서 개봉하지만 대부분 찾는 관객이 없다는 점이 그렇다.
OTT의 힘?
급성장하고 있는 OTT는 이 모든 한계를 뛰어넘어 영화 유통과 상영의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다. 경제성, 편리성, 반복성, 개별성, 탈지역성으로 어떤 영화도 원하는 때에 누구나, 값싸게 감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제 관객은 개봉작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지 않아도 되고, 파일로 작품을 소장 할 필요도 없고, 제작사는 배급사와 극장의 눈치를 보며 영화를 만들 필요도 없어졌다. 봉준호 감독의 <옥자>가 넷플릭스로 개봉하자 극장들이 보였던 반발과 OTT가 제작, 상영하는 영화에 대한 칸영화제의 거부감도 지나간 해프닝이 되었다.
계간 『대산문화』 여름호
(제80호)의 ‘대산초대석’에서 <국제시장>의 윤제균 감독은 “OTT가 다방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자연적인 흐름이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든 OTT에 의한 유통방식이 시장과 소비의 변화를 넘어 제작과 장르, 포맷에까지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단순히 극장용 2시간짜리가 아니라 숏
(short)폼의 영화들, 즉 짧게는 30분짜리 20개, 1시간짜리 10개의 영화도 가능해졌다”고 말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기생충>이 세계적으로 관심을 얻은 것이 작품의 완성도,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빈부격차의 문제란 글로벌 주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OTT의 역할도 부정할 수 없다. 넷플릭스가 들어오고, 플랫폼이 다양화되면서 한국영화 역시 글로벌 시장으로 나가는 것이 쉬워졌고, 언어의 장벽도 낮아졌으며, 한국배우에 대한 관심과 평가도 달라지고 있다. 윤여정이 <미나리>로 한국배우로는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장기화로 온라인 영화상영과 관람이 확대되면 당연히 극장의 역할과 거대 자본의 극장용 영화의 다양성은 위축될 것이란 우려도 있다. 이에 대해 17년 만에 <태극기 휘날리며>를 극장에서 재상영하는 자리에서 강제규 감독은 반대 의견을 나타냈다. 영화는 유통도 중요하지만 콘텐츠이기 때문에 코로나19가 수그러들면 극장은 다시 부활한다는 것이다. 봉준호 감독 역시 과거 <아바타>가 나왔을 때 앞으로 모든 영화가 3D로 갈 것 이라고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면서 모든 영화가 OTT로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렇다면 극장과 OTT는 제로섬 게임이 아닌 플러스 게임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윤 감독은 코로나19 펜데믹이란 상황을 떠나 OTT가 영화감상에 필요한 개인의 사적 사유 공간으로 자리 잡아 영화의 소비와 다양성을 촉진시킬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OTT가 영화의 소비패턴 이분화와 시장의 확대를 가져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세계 모든 작은 영화들이 OTT로 들어오고 있다.
극장과 VOD에서 사라진 영화를 볼 수 없는 시대는 지나갔다. 특정 장르, 소재, 나라의 영화를 찾기 위해 힘들게 이 사이트, 저 사이트를 검색하지 않아도 된다. 심지어 플랫폼의 알고리즘은 내가 좋아하고, 자주 보는 장르, 주제, 소재, 국가, 감독, 배우의 영화를 밥상처럼 차려준다. 집어 먹기만 하면 된다.
모든 영화가 홍보와 지명도를 위해 극장에 며칠이라도 상영하고 온라인으로 넘어가야 할 이유도 없다. 가상공간의 극장
(OTT)에 이미 수억 명의 관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가입자가 2억 4,000만 명이고, 시작한지 불과 1년 4개월, 그것도 겨우 59개 국가에만 서비스를 하고 있는 디즈니플러스의 스트리밍 동영상 가입자가 1억 명
(2021년 3월 현재)이다.
선택만 남았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만 볼 것인가, 아니면 알고리즘에 의존하지 않고 시선을 넓혀 다양한 다른 영화들도 볼 것인가. 그리고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영화에서 ‘무엇’을 만날 것인가.
인구유형별 관객의 일반적 특성 (영화진흥위원회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