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살아도
괜찮은 세상을 꿈꾸며
다양성에 대한 3가지 단상
민지영
라디오 PD.


※ 이 글은 총 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장은 개별적인 이야기로 서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1장: 빨리 대학에 가고 취업을 해야 하는 시간의 압박과 다양성의 관계.
2장: 조직 내에서 다양한 의견이 존중 받지 못하는 이유.
3장: 다양성 증진을 위해 개인의 관심이 필요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구별할 줄 아는 지혜의 중요성.

내 나이가 어때서?
나는 일상에서 벗어난 경험이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장시킨다고 믿는다. 내가 이 글을 써본 경험만 해도 그렇다. 딱 열 장 짜리 원고를 쓰는 경험이었지만 이 시간을 통해 글쓰기의 고통을 진하게 체험했고, 글 쓰는 사람들을 더 존경하게 되었다. 라디오 PD로 일하는 나에게는 매일 새로운 원고를 들고 오는 같은 팀 작가가 무척 빛나 보이는 경험이기도 했다. 또한 직장의 일과는 다르게 ‘오늘 업무 다 끝냈으니 퇴근!’의 개념도 없고, 쓰긴 썼는데 잘 쓴 건지도 모르겠는 모호하고도 심오한 글쓰기라는 일을 업으로 하는 모든 분들의 어려움에 더 진실하게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어떤 일을 한 번이라도 직접 겪거나 가까이서 목격하면 그 분야 사람들의 이야기가 훨씬 가깝고 생생하게 들린다. 왜 그들이 그런 애로 사항을 토로하고 그런 요구를 하는지 더 잘 와 닿는다. 이제 이 일련의 과정을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겪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 모두가 매일 하는 일과는 색다른 경험을 하나씩 하는 것이다. 각자에게는 하나의 경험뿐일지라도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경험의 접점을 공유하는 집단이 늘어날 것이고, 그만큼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총합 역시 증가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한 사람이 겪은 새로운 경험은 그 사람의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공동체의 연대와 지지를 이끌어내는 역할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나의 생각은 “그러니 우리 포용적인 사회를 위해 먹고 사는 일과 관계없는 쓸모없는 경험을 많이 합시다!”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자신만의 완고한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딴짓을 더 많이 할 필요가 있다. 특히 평생을 살아갈 가치관과 습관을 형성하는 삶의 초기에는 그 효과와 중요성이 더욱 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귀중한 시기를 다양한 경험으로 채워 나가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 그럴까? 지금부터는 그 이유를 ‘한국의 나이 문화’와 연결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나이와 관련된 한국인의 언어 습관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가령 스물다섯은 더할 나위 없이 파릇파릇하고 젊은 나이다. 그런데 스물다섯이 된 친구들이 생일날 SNS에 올린 글을 보면 대게 이런 내용이다. “나도 벌써 반오십…” “얼른 취업해서 나잇값 해야지.” 다른 예를 보자. 몇 주 전에 40대 상사가 새로 자른 머리가 마음에 안 들어서 어쩔 수 없이 무스를 바르고 왔다며 “내가 이 나이 먹고 머리에 무스나 바르고 다닌다.”며 멋쩍어하셨다. 나이 먹고 무스좀 바르면 어떤가 싶지만 한국에서는 그렇지가 않나보다. 특정 나이가 되면 나잇값을 하기 위해 완수해야 하는 일(취업)이 있고, 또 어떤 나이가 되면 나잇값을 하기 위해 해서는 안 되는 일(무스 바르기)이 있다. 이렇게 나이마다 해야하는/해서는 안 되는 일이 정해져 있고, 그 정해진 궤도를 이탈해서는 안 된다는 압박을 느끼는 것은 더 어릴 때부터 시작된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대학에 갔다. 대학에 가니 나와 같은 학생을 현역이라고 부른다. 1년 더 공부하고 대학에 온 학생은 재수생, 2년 더 공부하고 온 학생은 3수생이라고 부른다. 드물지만 4수생, 5수생도 있다. 미국·영국 등 서양 문화권에서는 제 나이보다 늦게 대학에 간 사람들을 ‘늦게 대학 온 사람’ 정도로 통칭하는 반면, 우리는 입시 준비 기간에 따라 각기 다른 명칭을 부여함으로써 얼마나 빨리 과업을 성취했는지를 구별해낸다. 입시에 한 번 실패할 때마다 세상이 나를 부르는 명칭이 달라진다. 이번에 꼭 붙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밀려온다. 이 부담감은 대학 합격에 도움이 안 되는 일들을 삶의 우선순위에서 밀어낸다. 합격과 상관없는 많은 일들이 대학 입학 후로 미뤄진다.
   이렇게 밀리고 미뤄진 일에는 뭐가 있을까? 우리가 고등학생 시절 선생님이나 부모님으로부터 들었던 말씀을 떠올려보자. “연애는 대학 가서 마음껏 하렴. 멋도 대학 가면 원 없이 부릴 수 있다. 좋은 대학 가서 성공하면 사람들이 알아서 따를 테니 친구 사귄다고 시간 낭비하지 말고. 좋은 대학 가면 네 목소리에 힘이 생기니까 그 때 사회에 좋은 일 많이 하면 된다. 지금은 그런 것들까지 신경 쓸 시간이 없지 않니. 공부에 끝이 어딨니?” 이 조언을 착실히 따른 학생은 연애, 취미 활동, 근로 활동, 정치 활동 및 기타 모든 사회 활동을 대학 합격 이후로 유예시킨다. 이 유예는 연쇄적으로 학생들이 낯선 타인과 만나고 익숙지 않은 환경에서 적응하며 자아와 사회에 대해 고민해볼 기회 역시 유예시킨다.
   둘째, 곧 다음 과업인 취업을 준비해야 한다. 한 두 해 자유의 몸이 된 걸 기뻐하고 또 당황하다보면 금세 취준생이 된 자신을 발견한다. 성공적인 취업의 조건은 성공적인 입시의 조건과 크게 다르지 않다. ‘좋은 곳’에 ‘최대한 빨리’ 합격하는 것이다. 공기업 등 일부 기관에서 나이를 명시하지 않는 블라인드 채용을 실시하고 있지만 취업 준비생들 사이에서 어린 나이 자체가 스펙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은 견고하다. 대학생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직접 모집한 235명의 재학생 및 졸업생에게 “취업 시장에서 같은 조건이라면 나이가 어린 게 유리하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묻자 87.7%가 “그렇다”고 답했다.
   입시 때와 마찬가지로 최대한 빨리 과업을 완수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과업 성취에 기여할 수 없는 시간의 소비는 낭비로 인식된다. 변호사가 되려고 로스쿨을 준비하던 학생이 6개월 간 휴학하고 로스쿨 입학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 예를 들면 컴퓨터 그래픽, 천문학, 러시아어를 배우겠다거나 뉴질랜드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나겠다고 선언했다고 상상해보자. 그 선언을 들은 누군가가 “잘 생각했구나! 그 경험을 통해서 네가 여지껏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느끼고, 겪어보지 못한 어려움을 겪고,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을 만날거야. 미래에 어떤 의뢰인을 변호하든 그 의뢰인을 더 잘 이해하는 경험이 될테니 한 번 해봐!”라고 말해주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그려지는가? “그런 건 일단 로스쿨 합격해서 변호사 되고 나서 취미로 하면 되지. 그런 일로 1년 버리고 같이 준비하던 친구들이 선배가 되면 좋겠니? 한 해 한 해가 얼마나 중요한지 너도 알잖니.”가 훨씬 익숙하게 들리지 않는가? ‘일단’의 마법은 당장 눈앞의 시급한 과제 외에 부차적인 일들을 효과적으로 지워낸다. 타인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그 사람의 일을 직접 경험하거나 가까운 곳에서 목격할 때 한층 더 진실해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일단’이 지워낸 것은 개인적인 경험만이 아니다.
   이 나이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가? 20대 초반에 대학을 가고, 20대 후반에 취업을 해서, 30대에는 안정적인 삶을 살지 않아도 루저가 되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은가? 늘 마감일에 쫓기는 사람처럼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순간마다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해보면서 살 수 있는 사회에서. 풍부한 경험에서 비롯된 다른 분야와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과 이해가 충만한 사회에서. 그러니 외치자. 내가 나잇값도 못하고 이래도 되나, 걱정될 때마다. 누군가 이 나이 먹고 이래도 되나, 걱정할 때마다. “내(네) 나이가 어때서?”
말변비를 앓는 사람들
직장인이 되기 전에는 회의가 멋진 시간이 될 줄 알았다. 각자의 의견을 자유롭게 밝히고, 자신 있게 상대를 설득하고, 합의를 통해 사안을 결정해가는 대화의 장. 그러나 내가 보고 들은 현실은 반대에 가까웠다. 항상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말조심을 해야 하고, 상대를 설득할 여지나 의지는 없으며, 사안은 대부분 일부 권력자의 뜻대로 결정되었다. 하고 싶은 말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꾹꾹 삼켜내야 하는 ‘고구마’ 회의에 ‘사이다’는 애초에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로는 회의는 그저 빨리 끝나는 게 최선인 일이 되었다. 회의실 밖의 대화 역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들은 속에서 쌓여가고 ‘할많하않’ 1) 이 일상화된 사람들은 말변비를 앓게 되었다. 나 역시 말변비를 앓으면서 처음에는 내 소심한 성격을 탓했다. 그러나 주변에 나 말고도 말변비 환자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는 이 문제를 좀 더 큰 틀에서 비춰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반추의 시간을 공유하고자 이번 장에서는 우리가 조직 내에서 당당하게 할 말을 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아래 등장하는 대화 상황은 내가 직접 겪었거나 친구들에게 전해들은 것이다.

1) 수직적인 문화와 권력의 불평등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탐색한다. 대화를 나눌 기회가 오면 말 한 마디 한 마디 탐색한 정보에 어긋나지 않도록 주의한다. 호감을 사기 위해 그 사람이 거슬려 할 말은 거르고, 관심 보일 만한 이야기를 던지며 자신을 어필한다.
   잘 보여야 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내 추천서, 내 성과급, 내 근무 평가 및 업무분장 권한을 손에 쥐고 있다. 그 사람이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탐색해야 한다. 보통 대화를 나눌 기회는 원치 않아도 온다. 역시 탐색한 정보에 어긋나지 않도록 한 마디 한 마디 신경 쓴다. 내가 맞는 말을 했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나의 말이, 더 중요하게는 내 발화의 태도와 방식이 그 사람의 마음에 들었는지가 더 중요하다.
   발화자들 사이의 권력 차이가 심한 수직적인 조직일수록 자유로운 의견 교환과 다양한 관점의 수용이 어려워진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두 가지만 살펴보자. 첫째, 어차피 중요한 일의 결정권은 권력자에게 있다. 회의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 지와 상관없이, 내 발언의 양과 질에 상관없이 일은 결국 윗분들 뜻대로 진행된다. 이런 상황을 여러 번 겪고 나면 굳이 입 아프게 이야기하며 기운 빼기 싫어진다. 정해진 답이 무엇인지 빠르게 파악하여 그쪽으로 의견을 모으고 회의를 빨리 끝내는 것이 어차피 같은 결과를 얻을 거라면 시간과 정신적 에너지를 모두 아낄 수 있는 방법이다.
   둘째로 내가 권력자의 입맛에 맞지 않는 주장을 하여 그와 관계가 악화될 경우, 나는 실질적인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첫번째 이유에서 살펴봤듯이 수직적인 조직에서는 업무 평가와 보상, 인사권을 포함한 중요한 결정권이 모두 상부에 있다. 자유롭게 이야기하래서 정말 자유롭게 이야기했다가 윗사람에게 잘못 찍히면 회사 생활이 힘들어진다. 단지 감정적으로 견디기 힘들어진다는 뜻이 아니다. 실제로 내 근무 평정이 나빠지고, 성과급이 낮아지며, 모두가 피하고 싶어 하는 일을 내가 맡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역의 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 나는 상사의 성과급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상사의 역할을 결정할 때 내 의견은 반영되지 않는다. 평가와 보상의 권한이 상부에 쏠려 있는 한 ‘눈치보기’와 ‘비위 맞추기’는 하급자들에겐 살아남기 위한 필요악이다. 하급자는 상사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거나, 말을 최대한 아끼며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가는’ 전략을 선택한다. 회사에 다니고 유독 말수가 적어진 친구들이 있다. 묻지 않아도 이유를 알 것 같다.

남들 다 하는데 너만 안 한다고?



   최근 삶의 양식이 변화하며 개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점차 조성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조직 안에만 들어오면 ‘이곳은 바깥 세상과는 시간이 괴리되는 곳인가?’하는 의문이 들만큼 여전히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 회식에 빠지면 사회 생활 못 하고 분위기를 흐리는 인간이나 개인 시간만 중시하는 이기적인 인간이 된다. 등산, 축구 등 분명 회사 일이 아닌 일인데도 단체 활동에 빠지면 내가 일을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와는 상관없이 회사에 관심 없는 사람이 된다. 다들 “네.”라고 할 때 혼자 “아니오.”라고 하는 사람은 관종 2) 이 된다. 수직적인 조직일수록 상부가 조직 전체의 분위기를 좌우하고, 한국에서는 연차가 높을수록 상급자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공동체를 위한 희생 강요와 각자 노선을 타는 사람에 대한 배격은 여전히 많은 조직에서 현재 진행형이다. 수직적인 조직 문화가 그대로 유지된다면 ‘다 같이 문화’ 역시 미래에도 계속될 것 같다. 애석하다.

2)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회 - 평판의 감옥



   좁은 사회일수록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언행을 조심하게 된다. “이 바닥이 얼마나 좁은지 알아?”라는 말은 “너 혼자 그렇게 튀면 네가 완전 제멋대로인 인간이라고 소문내주겠어.”의 뜻을 내포하고 있어, 말 한마디로 손쉽게 누군가의 순응을 이끌어낸다. 좁은 사회는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라는 속담을 현실에서 증명하듯 개인에 대한 평판과 소문을 재빠르게 실어 나른다. 내 언행이 언제든 감시되고 공유될 수 있다는 긴장감과 피로감은 구성원들이 스스로를 편하게 드러내며 고유한 방식대로 사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업계의 관습에 복종하지 않는 개성 있는 인간에 대한 낙인은 그 사람의 현재 지위뿐만 아니라 미래의 입지까지 앗아가 버린다. 비슷한 이유로 부당한 일을 당하거나 목격해도 신고할 엄두를 못 낸다. 그렇게 평판의 감옥 안은 늘 소문으로 웅성대면서도 구조 자체에 대한 비판은 침묵시키고, 그만의 견고함을 지켜낸다.
   이러한 행태를 변화시키려는 구성원 모두의 각고의 노력 없이는 이목의 판옵티콘(Panoticon)에서 개인이 질식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누가 이랬다더라.” “누가 그렇다더라.” 개인에 대한 행실과 평가를 실어 나르고, 2차 해석을 덧대며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라고 단정하는 일을 멈추자. 전해진 말들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을 뿐더러, 그렇게 입에서 입으로 날라지며 불시에 평가받는 개인에는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3) 어릴 적 경험과 배움은 평생을 간다는데



   이번엔 과거로 돌아가 원인을 짚어보자. 학창 시절 우리는 자기 생각을 잘 말하도록 배우고 이를 실천하며 살았을까? 그렇지 않다. 왜?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 생각 없이도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고 좋은 대학에도 갈 수 있다. 오히려 자기 생각이 많아질수록 정해진 답을 고르고 써내는 시험에서는 불리하다. 사고가 아니라 암기를 요하는 시험을 공부하는 것은 “이건 왜 그럴까?”와 “아, 모르겠다. 그냥 외우자.”의 반복이다.
   도의적으로도 주어진 것과 해야 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반박하지 않아야 ‘어른들 말씀 잘 듣는 착하고 바른 학생’이 될 수 있다. 머리에 피도 안마른 게 어른 말씀에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는 것은 버르장 머리를 상실한 행위로 비춰질 수 있다. 내 생각이랄 것을 갖거나 주장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지 않는 편이 낫다. 이렇게 살아온 자들이 대학에, 사회에 던져진다. “이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해보길 바랍니다.” “민대리. 자네 생각은 어떤가?”
   내 의견을 일목요연하게 전달하려면 무슨 이야기를 먼저 꺼내야하나? 남들과 생각이 다를 때는?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내 의견을 강하게 밀어붙이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전에 내 의견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과정을 통해 정립 되는가? 이런 질문에 답하기에 우리의 경험치는 턱없이 모자라다. 이미 던져진 사람들이야 아쉬운 대로 부딪히면서 답을 터득해야겠지만, 더 이상 아쉬운 사람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학교가 한시 빨리 풍성한 대화와 토론, 다양한 사고방식을 길러내는 곳으로 탈바꿈하기를 바란다.
관심의 낄낄빠빠 3)
시급합니다
마지막 장에서는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를 위해 내 관심이 필요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구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누구나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살아가도 괜찮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다.
   나는 대학교 3학년 때 교환학생을 다녀왔다. “어딜 가든 의미가 있겠지.” 여행 준비도 목적지만 고르면 반은 끝났다고 생각하는 나는 살아보고 싶은 도시에 있는 학교 중에 공항이 가까운 곳을 몇 개 골라 지원했다. 그 중 Agnes Scott College에 합격했는데, 최종 합격할 때까지 그 학교가 여대라는 사실을 몰랐다. 미국에도 여대가 있구나, 신기해하며 학교에 내 정보를 보내는데 대강 고른 이 학교가 참 특별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Gender Pronouns(젠더 호칭)를 묻는 것이다. 남/여로 구분되는 성별(Sex)이 아닌 젠더 호칭을 고르라는 곳은 처음이었다. 이 학교는 여대인데 왜 젠더를 고르라는 걸까? 한국 여대에도 남자 교환학생이 있다던데 비슷한 경우 때문일까? 여러 질문을 던지며 <보기>를 클릭했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She/He 외에도 보기가 6개나 더 있다. They 이하로는 처음 보는 대명사였다. 검색을 하고 나서야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젠더 개념이 있다는 것에 놀랐고, 학교에서 학생의 성별이 아닌 젠더를 묻고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젠더를 묻는 것은 학생 등록 절차에 그치지 않았다. 개강 전에 학교 생활에 대해 알려주는 오리엔테이션 세션에 참여하고 있었다. 여느 오리엔테이션처럼 모둠을 지어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하는데, 다들 자신을 어떤 젠더 호칭으로 불러주기를 원하는 지도 함께 소개했다. 살면서 셀 수 없이 많이 자기소개를 해봤지만 내 젠더를 소개해본 적은 없었다. 내가 여자라는 것을 소개하라는 걸까? 이런 걸 소개하라는 건 처음인데? 혼란스러웠지만 다른 친구들이 어떻게 하나 보고 “나는 한국에서 온 지영이야. 내가 선호하는 젠더 호칭은 she야.” 소개했다.
   몇 주 지내고 나니 왜 젠더 호칭을 소개하는지 알게 되었다. ‘겉보기에’ 여자처럼 보이는 친구도 자신이 받아들이는 젠더는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글로만 접했던 ‘sex’와 ‘gender’의 차이를 살아 움직이는 개개인의 삶을 통해 익히게 되었다. 여자의 몸으로 태어났으나 스스로를 남자라고 생각하는 친구는 자신을 He라고 소개했다. 여성도, 남성도 아닌 중성적인 젠더 정체성을 지닌 친구는 스스로를 They라고 소개했다. 새 친구를 사귀면 그 친구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만큼 그 친구가 선호하는 젠더 호칭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 되었다. 처음 사귄 친구와 이름을 교환하면 다음 번 만났을 때 “저기”나 “너” 대신에 그 친구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처럼, 소개받은 젠더 호칭을 잘 기억하고 맞게 불러줘야 실례하지 않을 수 있다. 가령 A라는 친구가 자신을 They라고 소개하면, B라는 친구에게 “A도 오늘 점심 먹으러 오니?”라고 물을 때 “Is she coming for lunch today?”라고 물으면 안 된다. “Is they coming for lunch today?”라고 물어야한다. They는 복수대명사라고 달달 외운 나는 한 명의 사람도 they로 칭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그러나 그것이 당연한 곳에서 지내다 보니 스스로를 They라고 여기는 친구를 They라고 칭하는 것은 그 친구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스스럼없이 공개하고, 이를 아무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태도는 낯설었다. 낯선 동시에 놀라웠다. 또 놀라울 만큼 아름다웠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어 그래? 그렇구나.” 아무렇지 않게 소개하고,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젠더 이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나는 미얀마에서 온 난민이야.” “나는 어릴 때 동생이랑 같이 입양되어 미국으로 왔어.” “어릴 때는 엄마가 나를 혼자 키우셨고 지금은 엄마랑 엄마 남자친구와 살아.” “나는 엄마만 두 분 있어.” “내 남자친구는 대학 안 다녀. 지금은 건설 현장에서 일해.” 그곳의 친구들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드러내는 데 두려움이 없었다. 두려움 없이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듣는 사람들은, 그저 듣는다. 그걸로 끝이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 친구를 대하는 태도가 조심스러워 진다거나, 그럴 경우엔 이렇게 해보는 게 어떠냐고 구하지도 않은 조언을 한다거나, 네가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면 이런 점이 어려웠겠다며 속단하지 않는다. “어 그래? 그렇구나.”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의 질량만큼만 받아들인다.
   이 지점은 굉장히 사소한 차이처럼 보이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낸다. 나, 나의 배경, 내가 겪은 일, 내 주변 환경을 대수롭지 않게 들어주고 받아들이는 곳에서는 스스로를 마음 편히 털어놓을 수 있다. 내가 어릴적 왕따를 당했다고 밝히면 나를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으로 보지 않을까? 부모님이 이혼하셨다는 것을 말하면 나를 결핍 있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먼저 고민하며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된다. 다양한 모양으로 빚어진 삶들이 지레짐작과 편견을 피해 숨지 않아도 되고 찌그러지지 않아도 된다. 편안하다. 나 자신을 감추거나 불필요한 변호를 하지 않아도 되어 편안하다.
   나와 내 주변의 삶은 어땠는지 생각해보았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직장을 그만두고 귀농을 하셨다. 농사가 자리 잡기 전까지 집이 어려웠다. 나는 가난을 숨기고 싶었다. 엔진이 낡아 요란한 소리를 내던 아버지의 오래된 트럭이 나를 아는 체할까 봐 길을 걷는 게 두려웠다. 여름에는 더운 데서, 겨울에는 추운 데서 일하는 아버지의 직업을 자랑스러워하는 데까지는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학교에서 기초 설문을 위해 부모님의 학력을 제출하라고 할 때는 지옥 같았다. 어느 해엔 선생님께서 손 쉽게 통계를 내고 싶으셨는지 설문지를 제출하는 대신 질문마다 해당 항목에 손을 들라고 하셨다. 그럴 때는 모르는 척 거짓말을 하고 싶었다.
   한 친구가 어릴 때 입양됐다는 소문이 났다. 그 친구가 최근 방황하는 거 같다며 자기 입양된 사실을 알아버린 거 아니냐는 추측도 함께 들렸다. 중학교 때 한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친구의 어머니는 아버지 없는 자식으로 큰 거 티 내면 안 된다며 엄해지셨고, 친구도 아버지 없이 자란 걸 티 내지 않기 위해 더 예의 바른 인간이 되고자 노력했다. 스물 한 살에 한 친구가 혼전임신을 했다. 친구는 SNS를 탈퇴하고, 한동안 어떤 친구와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동물권과 환경 이슈에 관심이 많은 한 친구가 최근 채식을 시작했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단체 생활 못하는 까다로운 사원이 될까봐 절친한 동료를 제외하고는 이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어 그래? 그렇구나.”로 끝나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한다. 가난은 죄가 아니다. 입양된 것도 죄가 아니다. 한부모 아래서 자란 것도, 사랑하는 사람과 일찍 아이를 낳은 것도 말이다. 내가 고기를 먹지 않기로 선택한 것도, 그래서 회식에서 고기를 안 먹겠다는 것도 죄가 아니다. 내가 여자로 태어났지만 스스로를 남자라고 받아들이는 것도, 여자로 태어났지만 여자를 사랑하는 것도 죄가 아니다. 그러나 ‘다수’가 ‘정상’이라고 여기는 것에서 벗어난 삶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죄가 아닌 것도 죄가 된다. 걸리지 않도록 숨겨야 하고, 혹시라도 들통이 나면 최대한 자기 변호를 해야 한다. 나는 가난하지만 게으르지 않아요. 구질구질하게 공짜나 좋아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나는 입양 되었지만 결핍감에 시달리는 자존감 낮은 인간은 아니에요. 나는 일찍 아이를 낳았지만 생각 없이 인생 막 사는 사람 아니에요. 나는 채식을 하지만 까다롭거나 예민한 사람은 아닙니다.
   왜 그래야 하는가? 왜 서로가 서로에게 변호의 의무를 지우며 살아야 하는가? 왜 어떤 세상에서는 그러지 않아도 되는 것을 우리는 구태여 해야 하는가?
   남이야 어떻게 살든지, 관심을 끄자. 우리가 열과 성을 다하여 입방아 찧고 왈가왈부해야 할 것들은 따로 있다. 다양한 모양의 삶이 존중받기 위해서는 내 관심이 필요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구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내 관심이 필요하겠는데?”와 “그래서 그게 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를 제 때 말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편견과 낙인의 형식으로 소모된 공동체적 관심이 정작 그를 요하는 곳에는 닿지 못하고 있다. 누가 세웠는지 모르는 정상의 기준에서 벗어난 개인을 동정하고, 판단하고, 비난하는데는 열정적인 사람들은 많은 반면 구조적으로 다양한 개인을 존중하고 포용할 방안을 마련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
   스스로를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 3의 성으로 받아들이는 친구가 있다. 본인이 스스로를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은 온전히 그의 인생 영역이고, 그 사실로 인해 누군가 해를 입는 것도 아니다. 그 사실로 인해 내 인생이 달라지는 것도 없다. 고로 나는 그의 선택 자체에 관심을 쏟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친구가 학교에서 불편함 없이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없다는 것은 나의 관심이 필요한 문제다. “내가 다니는 학교의 시설이 어떤 곳이길 바라는가?”로 이어지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낸 등록금이 어떤 가치를 위해 쓰이길 바라는가?”라는 질문과 뗄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학생 식당이 채식주의자에게 충분한 선택권을 제공하고 있는지, 캠퍼스 공간에서 휠체어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지에 내 관심이 필요한 이유와 같은 맥락이다. 나는 성 중립 화장실이 필요 없고, 채식주의자도 아니고, 두 다리 멀쩡하다고 해도 말이다. 분명 존재하는 그들을 학교가 어떻게 대하길 바라는가? 내가 다니는 학교가 모두에게 따뜻한 곳이길 바라는가? 이 질문은 모두가 던져야 하는 질문이고, 고로 나와도 무관하지 않다. 혹여, 우연히, 아주 드물게, 지금 이 순간의 나는 주어진 모든 조건에서 다수자라고 할지라도. 나 역시 언제 어떤 계기로 소수자가 될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더더욱.
   이렇게 구조적인 관점에서 모두의 권리가 잘 존중되고 있는지 묻는 적극적인 관심은 “누가 어쨌다더라, 저쨌다더라.” 평가하고 비난하는 소모적인 관심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한다. 거시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일은 긴 시간이 걸리고, 한두 명이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며, 재원이 필요한 경우 다수의 반대에 부딪힐 가능성도 높다. 오래 걸리고 어려운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그 지난한 과정을 버틸 수 있는 몸과 마음의 힘이 있어야 한다. 다들 제 것 챙기기도 바쁜 사회에서는 당연히 쉽지 않다. 타인의 고민과 어려움까지 떠맡기에 나는 너무 힘들다. 나의 피로는 너의 불편과 아픔을 외면하는 변명이 된다. 한국 사람들이 세계와 견주어 많이 일하고 많이 공부한다는 사실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다들 아는 식상한 정보가 되었다. 이런 과열·과로 사회에 제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여러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거기에 “우리 사회가 다양한 구성원들에게 어떤 곳이길 바라는지 생각해보고, 실천할 수 있는 여유를 위하여”를 추가하고 싶다.
목차
있는 그대로 살아도 괜찮은 세상을 꿈꾸며
왜 탄탄대로에는 다양성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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