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장에서는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를 위해 내 관심이 필요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구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누구나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살아가도 괜찮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다.
나는 대학교 3학년 때 교환학생을 다녀왔다. “어딜 가든 의미가 있겠지.” 여행 준비도 목적지만 고르면 반은 끝났다고 생각하는 나는 살아보고 싶은 도시에 있는 학교 중에 공항이 가까운 곳을 몇 개 골라 지원했다. 그 중 Agnes Scott College에 합격했는데, 최종 합격할 때까지 그 학교가 여대라는 사실을 몰랐다. 미국에도 여대가 있구나, 신기해하며 학교에 내 정보를 보내는데 대강 고른 이 학교가 참 특별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Gender Pronouns
(젠더 호칭)를 묻는 것이다. 남/여로 구분되는 성별
(Sex)이 아닌 젠더 호칭을 고르라는 곳은 처음이었다. 이 학교는 여대인데 왜 젠더를 고르라는 걸까? 한국 여대에도 남자 교환학생이 있다던데 비슷한 경우 때문일까? 여러 질문을 던지며 <보기>를 클릭했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She/He 외에도 보기가 6개나 더 있다. They 이하로는 처음 보는 대명사였다. 검색을 하고 나서야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젠더 개념이 있다는 것에 놀랐고, 학교에서 학생의 성별이 아닌 젠더를 묻고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젠더를 묻는 것은 학생 등록 절차에 그치지 않았다. 개강 전에 학교 생활에 대해 알려주는 오리엔테이션 세션에 참여하고 있었다. 여느 오리엔테이션처럼 모둠을 지어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하는데, 다들 자신을 어떤 젠더 호칭으로 불러주기를 원하는 지도 함께 소개했다. 살면서 셀 수 없이 많이 자기소개를 해봤지만 내 젠더를 소개해본 적은 없었다. 내가 여자라는 것을 소개하라는 걸까? 이런 걸 소개하라는 건 처음인데? 혼란스러웠지만 다른 친구들이 어떻게 하나 보고 “나는 한국에서 온 지영이야. 내가 선호하는 젠더 호칭은 she야.” 소개했다.
몇 주 지내고 나니 왜 젠더 호칭을 소개하는지 알게 되었다. ‘겉보기에’ 여자처럼 보이는 친구도 자신이 받아들이는 젠더는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글로만 접했던 ‘sex’와 ‘gender’의 차이를 살아 움직이는 개개인의 삶을 통해 익히게 되었다. 여자의 몸으로 태어났으나 스스로를 남자라고 생각하는 친구는 자신을 He라고 소개했다. 여성도, 남성도 아닌 중성적인 젠더 정체성을 지닌 친구는 스스로를 They라고 소개했다. 새 친구를 사귀면 그 친구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만큼 그 친구가 선호하는 젠더 호칭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 되었다. 처음 사귄 친구와 이름을 교환하면 다음 번 만났을 때 “저기”나 “너” 대신에 그 친구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처럼, 소개받은 젠더 호칭을 잘 기억하고 맞게 불러줘야 실례하지 않을 수 있다. 가령 A라는 친구가 자신을 They라고 소개하면, B라는 친구에게 “A도 오늘 점심 먹으러 오니?”라고 물을 때 “Is she coming for lunch today?”라고 물으면 안 된다. “Is they coming for lunch today?”라고 물어야한다. They는 복수대명사라고 달달 외운 나는 한 명의 사람도 they로 칭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그러나 그것이 당연한 곳에서 지내다 보니 스스로를 They라고 여기는 친구를 They라고 칭하는 것은 그 친구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스스럼없이 공개하고, 이를 아무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태도는 낯설었다. 낯선 동시에 놀라웠다. 또 놀라울 만큼 아름다웠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어 그래? 그렇구나.” 아무렇지 않게 소개하고,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젠더 이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나는 미얀마에서 온 난민이야.” “나는 어릴 때 동생이랑 같이 입양되어 미국으로 왔어.” “어릴 때는 엄마가 나를 혼자 키우셨고 지금은 엄마랑 엄마 남자친구와 살아.” “나는 엄마만 두 분 있어.” “내 남자친구는 대학 안 다녀. 지금은 건설 현장에서 일해.” 그곳의 친구들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드러내는 데 두려움이 없었다. 두려움 없이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듣는 사람들은, 그저 듣는다. 그걸로 끝이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 친구를 대하는 태도가 조심스러워 진다거나, 그럴 경우엔 이렇게 해보는 게 어떠냐고 구하지도 않은 조언을 한다거나, 네가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면 이런 점이 어려웠겠다며 속단하지 않는다. “어 그래? 그렇구나.”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의 질량만큼만 받아들인다.
이 지점은 굉장히 사소한 차이처럼 보이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낸다. 나, 나의 배경, 내가 겪은 일, 내 주변 환경을 대수롭지 않게 들어주고 받아들이는 곳에서는 스스로를 마음 편히 털어놓을 수 있다. 내가 어릴적 왕따를 당했다고 밝히면 나를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으로 보지 않을까? 부모님이 이혼하셨다는 것을 말하면 나를 결핍 있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먼저 고민하며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된다. 다양한 모양으로 빚어진 삶들이 지레짐작과 편견을 피해 숨지 않아도 되고 찌그러지지 않아도 된다. 편안하다. 나 자신을 감추거나 불필요한 변호를 하지 않아도 되어 편안하다.
나와 내 주변의 삶은 어땠는지 생각해보았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직장을 그만두고 귀농을 하셨다. 농사가 자리 잡기 전까지 집이 어려웠다. 나는 가난을 숨기고 싶었다. 엔진이 낡아 요란한 소리를 내던 아버지의 오래된 트럭이 나를 아는 체할까 봐 길을 걷는 게 두려웠다. 여름에는 더운 데서, 겨울에는 추운 데서 일하는 아버지의 직업을 자랑스러워하는 데까지는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학교에서 기초 설문을 위해 부모님의 학력을 제출하라고 할 때는 지옥 같았다. 어느 해엔 선생님께서 손 쉽게 통계를 내고 싶으셨는지 설문지를 제출하는 대신 질문마다 해당 항목에 손을 들라고 하셨다. 그럴 때는 모르는 척 거짓말을 하고 싶었다.
한 친구가 어릴 때 입양됐다는 소문이 났다. 그 친구가 최근 방황하는 거 같다며 자기 입양된 사실을 알아버린 거 아니냐는 추측도 함께 들렸다. 중학교 때 한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친구의 어머니는 아버지 없는 자식으로 큰 거 티 내면 안 된다며 엄해지셨고, 친구도 아버지 없이 자란 걸 티 내지 않기 위해 더 예의 바른 인간이 되고자 노력했다. 스물 한 살에 한 친구가 혼전임신을 했다. 친구는 SNS를 탈퇴하고, 한동안 어떤 친구와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동물권과 환경 이슈에 관심이 많은 한 친구가 최근 채식을 시작했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단체 생활 못하는 까다로운 사원이 될까봐 절친한 동료를 제외하고는 이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어 그래? 그렇구나.”로 끝나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한다. 가난은 죄가 아니다. 입양된 것도 죄가 아니다. 한부모 아래서 자란 것도, 사랑하는 사람과 일찍 아이를 낳은 것도 말이다. 내가 고기를 먹지 않기로 선택한 것도, 그래서 회식에서 고기를 안 먹겠다는 것도 죄가 아니다. 내가 여자로 태어났지만 스스로를 남자라고 받아들이는 것도, 여자로 태어났지만 여자를 사랑하는 것도 죄가 아니다. 그러나 ‘다수’가 ‘정상’이라고 여기는 것에서 벗어난 삶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죄가 아닌 것도 죄가 된다. 걸리지 않도록 숨겨야 하고, 혹시라도 들통이 나면 최대한 자기 변호를 해야 한다. 나는 가난하지만 게으르지 않아요. 구질구질하게 공짜나 좋아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나는 입양 되었지만 결핍감에 시달리는 자존감 낮은 인간은 아니에요. 나는 일찍 아이를 낳았지만 생각 없이 인생 막 사는 사람 아니에요. 나는 채식을 하지만 까다롭거나 예민한 사람은 아닙니다.
왜 그래야 하는가? 왜 서로가 서로에게 변호의 의무를 지우며 살아야 하는가? 왜 어떤 세상에서는 그러지 않아도 되는 것을 우리는 구태여 해야 하는가?
남이야 어떻게 살든지, 관심을 끄자. 우리가 열과 성을 다하여 입방아 찧고 왈가왈부해야 할 것들은 따로 있다. 다양한 모양의 삶이 존중받기 위해서는 내 관심이 필요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구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내 관심이 필요하겠는데?”와 “그래서 그게 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를 제 때 말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편견과 낙인의 형식으로 소모된 공동체적 관심이 정작 그를 요하는 곳에는 닿지 못하고 있다. 누가 세웠는지 모르는 정상의 기준에서 벗어난 개인을 동정하고, 판단하고, 비난하는데는 열정적인 사람들은 많은 반면 구조적으로 다양한 개인을 존중하고 포용할 방안을 마련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
스스로를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 3의 성으로 받아들이는 친구가 있다. 본인이 스스로를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은 온전히 그의 인생 영역이고, 그 사실로 인해 누군가 해를 입는 것도 아니다. 그 사실로 인해 내 인생이 달라지는 것도 없다. 고로 나는 그의 선택 자체에 관심을 쏟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친구가 학교에서 불편함 없이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없다는 것은 나의 관심이 필요한 문제다. “내가 다니는 학교의 시설이 어떤 곳이길 바라는가?”로 이어지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낸 등록금이 어떤 가치를 위해 쓰이길 바라는가?”라는 질문과 뗄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학생 식당이 채식주의자에게 충분한 선택권을 제공하고 있는지, 캠퍼스 공간에서 휠체어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지에 내 관심이 필요한 이유와 같은 맥락이다. 나는 성 중립 화장실이 필요 없고, 채식주의자도 아니고, 두 다리 멀쩡하다고 해도 말이다. 분명 존재하는 그들을 학교가 어떻게 대하길 바라는가? 내가 다니는 학교가 모두에게 따뜻한 곳이길 바라는가? 이 질문은 모두가 던져야 하는 질문이고, 고로 나와도 무관하지 않다. 혹여, 우연히, 아주 드물게, 지금 이 순간의 나는 주어진 모든 조건에서 다수자라고 할지라도. 나 역시 언제 어떤 계기로 소수자가 될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더더욱.
이렇게 구조적인 관점에서 모두의 권리가 잘 존중되고 있는지 묻는 적극적인 관심은 “누가 어쨌다더라, 저쨌다더라.” 평가하고 비난하는 소모적인 관심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한다. 거시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일은 긴 시간이 걸리고, 한두 명이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며, 재원이 필요한 경우 다수의 반대에 부딪힐 가능성도 높다. 오래 걸리고 어려운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그 지난한 과정을 버틸 수 있는 몸과 마음의 힘이 있어야 한다. 다들 제 것 챙기기도 바쁜 사회에서는 당연히 쉽지 않다. 타인의 고민과 어려움까지 떠맡기에 나는 너무 힘들다. 나의 피로는 너의 불편과 아픔을 외면하는 변명이 된다. 한국 사람들이 세계와 견주어 많이 일하고 많이 공부한다는 사실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다들 아는 식상한 정보가 되었다. 이런 과열·과로 사회에 제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여러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거기에 “우리 사회가 다양한 구성원들에게 어떤 곳이길 바라는지 생각해보고, 실천할 수 있는 여유를 위하여”를 추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