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
성공회대학교 문화대학원 교수, 스포츠평론가.
‘선수로 크게 성장하려면 아버지를 잘 만나야 한다.’
한국 스포츠계의 오랜 속설이다. 토털 사커
(total soccer)의 창시자인 네덜란드의 명장 리누스 미셸
(Rinus Michels) 감독의 ‘승리는 어제 내린 눈일 뿐’이라든지 역시 네덜란드 출신으로 20세기 후반의 유럽 축구 미학을 대표하는 요한 크루이프
(Johan Cruyff)의 유명한 말, 즉 ‘축구를 하기는 쉽다. 그러나 쉽게 축구를 하는 것은 어렵다’와 같은, 그런 수준의 명언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선수가 되고 프로가 되고 국가대표로 뽑히려면 ‘아버지를 잘 만나야 한다’는 속설은, 어떤 본질을 순식간에 드러내는 말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아버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감독이고 지도자다. 다른 분야에도 어느 정도 통하는 말이다. 자상한 담임을 잘 만나고 꼼꼼한 지도교수를 잘 만나고 추진력과 리더십을 지닌 직장 상사를 잘 만나는 것은, 특히 한국처럼 무한경쟁 속에서 연줄과 인맥이 작동하는 사회에서는 어디서나 통용된다. 그럼에도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속설과 충언이 한국의 스포츠계에서는 그 어떤 조건에 우선하는 대헌장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아버지’ 곧 감독을 잘 만나면, 뛰어난 지도력과 자상한 인격을 지닌 그로 인하여 해당 선수
(아직 학생일 경우 이제 겨우 청소년기에 접어든 유망주)가 앞으로 운동선수로 성장하고 활동하는데 있어 큰 도움이 된다. 특히 20세기, 그러니까 시스템이나 규칙보다는 개인의 독특한 경험과 인맥, 일정한 헌신성이 압도했던 시기에는 아버지를 잘 만나야 상급학교 진학이나 직업선수로의 길이 열렸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감독들이 제자들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길러낸 역사가 틀림없이 있다. 한국 스포츠의 국제적인 성취는 이러한 헌신과 정성에 의한 것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늘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최근 여자프로배구를 시작으로 프로야구와 프로축구로까지 번진 ‘스포츠계의 학교폭력’ 사태는 21세기가 한참이나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20세기의 훈육과 통제와 폭행이 지속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특히 유명축구 선수인 K와 관련된 ‘학교 폭력’ 논란이 뜨겁게 전개되었는데, 필자가 심히 우려하는 것은, K선수를 옹호하기 위해 당시 함께 합숙했던 동료가 쓴 글이다.
요약하자면 “그때 축구부 합숙소가 군대 막사처럼 생겼다. 20명~30명이 다 같이 모여서 생활했다. 당시는 체벌이 당연하던 시대였다. 감독님, 코치님, 그리고 선배들이 후배 선수들을 거칠게 다룰 때였다.” 그런 시공간에서 K 선수가 ‘나쁜 짓’을 할 수 없었다는 증언인데, 필자는 그 행위 여부에 대한 논란을 떠나서, 바로 그와 같은 환경을 문제 삼고 싶다. 한 번 더 들어보자. “모든 스케줄은 감독님과 코치님들이 수시로 감독했고, 우리들은 딴짓을 할 수 없었다. 선수들이 일탈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없었다. 학교 앞 문방구에도 나갈 수 없을 정도로 통제를 받았다.”
이 자체가 문제 아닌가. 이 자체가 근절해야 할 과거 아닌가. 이 자체가 군림하고 통제하는 한국 스포츠의 오래된 ‘아버지’ 문화 아닌가. K 선수가 초등학교 다닐 때니까, 벌써 십수 년 전의 일 아닌가, 하고 반문하는 사람을 위하여, 다음 소식을 아울러 전한다.
2021년 2월 19일 〈한국일보〉는 수도권 15세 이하 축구클럽의 ‘아버지’가 축구화 등으로 선수를 폭행한 사건이 발생해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이 ‘아버지’는 수년간 폭언과 폭행을 일삼았고 어린 선수
(정확히 말하면 중학생)의 고막이 파열되는 일까지 있었다. 보도에 따르면, 이 ‘아버지’는 경기 내용이 맘에 들지 않는다며 “아이들 뺨을 때리고, 일부 학생들에게는 얼굴에 침을” 뱉고 선수단 버스에서 축구화로 폭행을 가했다. 2021년 2월 24일, 〈MBC 뉴스데스크〉는 어느 고등학교 아이스하키부의 ‘아버지’가 하키채로 선수들
(실은 고등학생)을 폭행한 사건을 연속 보도했다. 이 ‘아버지’ 역시 경기 부진을 이유로 “너! 안 돼. 반드시 안 돼, 이 개XX야!”라고 폭언과 폭행을 가하였다.
이런 사례만으로, 필자에게 허락된 분량을 다 메우고도 남을 정도로, 지금이 순간에도 한국 스포츠의 폭력문화는 비일비재하다. 2019년 12월, 〈국가인권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전국 중·고교에 4만7천여 학생 선수가 있고 그중 20%에 달하는 1만여 명이 합숙 생활을 하고 있다. 대체로 한 방에서 7명 이상 생활하고 있으며 어떤 경우는 한 방에 10명 이상이 생활한다. 어느 중학교 축구부 학생들은 전체 25명이 1층과 2층에서 생활하는데 각 층은 방이 따로 없고 전체가 트여 있다. 어느 축구 명문 고교도 10인실 1개, 7인실 3개, 6인실 2개에서 생활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생활의 차압, 관계의 긴장, 위계질서의 강화, 시공간의 압력 그리고 무엇보다 신체의 통제와 물리적 폭력이 가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십수 년 동안 아니 수십 년 동안 한국의 어린 선수들은 능력
(수완?) 있는 ‘아버지’를 만나야 하고, 바로 그 ‘아버지’의 지도
(통제?)를 받아야 하고 그의 경험
(인맥?)에 편승해야 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일부 ‘아버지’들의 일탈일까, 시스템의 부재 또한 허점일까, 남의 자식이야 어찌 되었든 자기 자식만큼은 성공해야 한다는 부모들의 욕망 때문일까, 아니면 스포츠 그 자체가 원래 그런 것일까.
필자는 오랫동안 스포츠 현장을 살펴보면서, 그것이 단적으로 압축하건대 ‘국가주의’와 ‘가족주의’의 이중나선에 의한 것이며 이제는 그 이중나선을 끊고, 스포츠가 사회 속으로 들어와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