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참으로 위대한 기적이다.’ (Giovanni Pico della Mirandola)
‘인간은 하고자 한다면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다.’ (Leon Battista Alberti)
‘인간은 자유로운 사회에서만 자신의 모든 것을 발휘할 수 있다.’ (Ottavio Rinuccini)
이상은 르네상스의 특징을 단적으로 웅변해주는 르네상스인들의 선언문들이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 개개인의 무한한 가능성은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이 실제로 증명해 보였다. 르네상스의 일반적인 배경과 과정, 성취에 대해서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극장에만 집중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르네상스 시대에 극장이 부활한 주요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상공업의 발달에 따른 도시의 번성과 중산층의 형성이다. 이러한 현상은 피렌체, 베네치아, 만토바, 파르마, 비첸차 등 이탈리아 중북부 도시들에서 일찍 나타났다. 상공업과 금융업이 발달한 피렌체와 전통적인 무역도시 베네치아는 르네상스기의 극장문화를 선도했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제해권을 장악한 영국의 런던에서도 도시 인구가 증가하고 중산층이 형성되면서 자유로운 극장문화가 꽃피기 시작했다. 상업도시 베네치아, 런던 등에서의 민간 상업극장의 발생은 극장사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둘째, 다양성의 회복과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의 형성이다. 중세 기독교 사회의 획일적인 세계관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난 시민들은 내세로 가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인생만이 아니라 현세에 충실하려는 인생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획득한 소재 선택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큰 변화를 만들었다. 이교도의 신화인 고대 그리스 로마의 신화와 일반 시민의 삶 등 다양한 소재를 자유로이 선택하고, 미술에서의 누드 표현이나 무대상에서의 자유로운 표현 등이 가능하게 되면서 미술과 연극의 발전이 가속화되었다.
셋째, 고전 문헌의 유입이다. 중세의 신본주의로부터 르네상스의 인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예술가들은 그들이 본받을 모델을 찾아 고대 로마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십자군 전쟁으로 급격히 쇠락한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이탈한 학자들이 고대의 자료와 함께 조금씩 서유럽으로 유입되다가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이후 급격히 피렌체와 베네치아로 흘러 들어왔다. 고대 그리스의 문헌들을 열광적으로 수집하던 메디치 가문이 통치한 피렌체에서부터 르네상스가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쇄술의 도입에 힘입어 고대 그리스 로마의 희곡들과 연극 이론서들이 출판되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르네상스 극장은 1584년에 완공된 이탈리아 북부 도시 비첸차의 떼아트로 올림피코
(Theatro Olimpico)이다. 이 극장은 고대 그리스 비극을 연구하기 위해 1550년에 발족된 일종의 동호회와 같은, 올림픽 아카데미
(Accademia Olimpica)의 연구 활동의 일환으로 건축되었다. 지역 유력자들과 학자들을 회원으로 둔 그 모임에서, 문헌으로만 존재하는 고전극을 연구하고 낭독하다가 실제 공연을 올려보기 위해 극장을 짓기로 결정하였다. 모임 멤버인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가 설계한 이 극장은 고대로마 극장을 실내에 구현한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개관 기념 공연으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올렸다. 4년 후 1588년에는 인근 소도시 사비오네타에 그리스 희극 공연을 위한 떼아트로 올림피코 사비오네타
(Theatro Olimpico Sabbioneta)가 건립되었으며 이 극장 역시 아직까지 남아있다.
프로시니엄 아치의 발명은 극장의 역사를 획기적으로 바꾸었다. 무대를 정면에서 감싸고 있는 이 액자틀은 1586년 피렌체의 우피치
(Uffizi) 궁정 극장에 최초로 설치되었으며 18세기에 철거되어 지금은 자료로만 남아있다. 현존하는 최고의 프로시니엄 극장은 1618년 이탈리아 북부도시 파르마에 건축된 떼아트로 파르네제
(Theatro Farnese)이다
(그림5 참조). 이후 이탈리안 프로시니엄 극장은 오늘날까지 세계적으로 극장 건축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림 5. 떼아트로 파르네제 (Theatro Farnese, Parma, Italy)
이탈리안 르네상스의 또 하나의 발명품은 오페라이다. 1573년 피렌체에서 일군의 인문주의 학자들과 예술가들이 만든 ‘바르디의 방’
(Cameratade’Bardi)이라는 이름의 연구모임에서는 고대 그리스 연극을 재현하려는 연구 끝에 드라마에 음악을 가미한 공연을 만들고 그것을 ‘음악 속의 작품
(opera in musica)’이라고 불렀다. 오페라 <다프네>가 1598년 피렌체에서 공연된 후 1607년에는 또 다른 오페라 <오르페오>가 만토바에서 공연되었다. 이 매력적인 예술은 다른 도시들로 급속히 전파되었다. 오페라는 새로운 대중예술이 되었다. 베네치아에서는 1637년 최초의 대중 오페라극장 산 카시아노
(San Cassiano)가 건립되었으며 그로부터 60년 후 이 도시에는 17개의 페라극장들이 경쟁적으로 운영되었다. 오페라는 프로시니엄 극장과 함께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민간 상업극장의 탄생은 획기적인 공연사적 사건이었다. 오늘날 세계 공연계를 대표하는 런던 웨스트엔드와 뉴욕 브로드웨이의 거의 모든 극장들은 영리적 목적을 위해 민간자본으로 건축한 상업극장들이다.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중상주의의 결과로 런던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몇몇 극단들이 런던에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 광장, 여관마당 등에서 공연하던 유랑극단들은 투자자를 모으고 영구적인 극장을 짓기 시작했다. 대형 야외 대중극장
(public theatre)과 소형 실내 개인극장
(private theatre)들이 건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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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극장들은 마당에 임시 무대를 설치한 여관 건물을 영구극장으로 발전시킨 것으로서, 원형 혹은 사각 건물의 중앙마당에 돌출된 무대와 그를 둘러싼 다층의 객석으로 이루어진 중정극장
(courtyard theatre)들이다. 1997년 복원한 셰익스피어의 글로브
(Shakespeare’s Globe) 극장에서 옛 형태를 볼 수 있다. 1567년부터 약 60년간 13개의 대중극장들과 9개의 개인극장들이 런던에 세워졌다.
극장이 부활하면서 비극의 황금시대가 다시 열렸다. 다시 시작된 비극은 고대 그리스의 그것과 큰 차이를 보였다. 신이 부여한 운명과 인간 이성과의 갈등이 고대의 비극이었다면, 셰익스피어의 비극에는 신이 개입하지 않는다. <리어왕>에서, 파멸한 늙은 왕 리어가 폭풍우 치는 광야에서 자신의 판단을 후회하며 울부짖고, 눈이 뽑혀 장님이 된 글로스터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절벽에 데려다 달라고 행인에게 부탁한다. 그들은 신에게 용서를 빌지도 애원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비극은 자신의 판단과 행동의 결과일 뿐이며 앞으로의 운명도 그들 스스로 결정하고자 한다. 또한 서자로 태어나 차별받는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계략을 꾸미고 여인들을 유혹하는 에드몬드는 혈통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으로 신분을 결정할 수 있는 시대가 낳은 새로운 인간형이다.
이후 18, 19세기의 과학과 산업의 발전으로 엄청난 문명의 진보를 이룩한 인류는 20세기에 벌어진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인간의 이성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되었고 그 결과 다시 한 번 비극의 시대를 열었다. 또한 프로시니엄 일변도의 극장 형태로부터 벗어나 극장의 원점에서, 즉 고대 그리스 로마의 극장에서 다시 출발하여 돌출무대, 원형무대 등 다양한 형태의 극장들을 만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