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적 삶의 피안(彼岸)
배종훈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효율적 삶은 대략 이렇게 정의된다. 남에게 줄 것은 최대한 줄이고, 나에게 넉넉하게 쓰는 삶. 효율성을 벗어난 행동은 (경제적으로) 비합리적이라고 통칭한다. 시장 경제에서 효율적 삶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경쟁에 의해 강제되기 때문이다. 이때 경쟁은 자발적 조율 혹은 가격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성공을 꿈꾸는 한, 일상의 한 켠을 붙들고 서있기 위해서는, 경쟁에서 누락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성공한 삶은 실패한 비효율을 일상의 가장자리로 밀어내기 때문이다. 성공한 삶은 따라서 합리적이고 그만큼 효율적이다.
   이 글은 효율적 삶의 비자율성(非自律性)에 관한 글이다. 그리고 삶의 비자율성은 선택의 다양성과 상충됨을 보이는 글이다. 동시에 효율적 삶의 조건을 따지는 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경쟁과 혁신과 경영에 부여된 과도한 찬사를 의심하는 글이기도 하다. 이러한 단어들이 효율적 삶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삶, 자율적 삶은 다양한 삶이다. 효율적 삶은 늙지 않는 삶이다. 변화가 부재하는 시간이다. 자, 효율적 삶으로부터 늙어가는 삶, 다양한 삶으로 들어가 보자.
   효율적 삶은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삶이다. 고용 가능성이 높은 삶이라는건데, 지식이든 뭐든 팔 것이 있다는 뜻이다. 요즘 시대에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성공은 경쟁력 있는 삶의 지표이다.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타자보다 먼저, 타자보다 효율적으로 시장에 내어놓으면, 삶은 경쟁력을 가진다. 인기 있는 스마트폰을 남보다 값싸게 출시할 수 있으면, 똑같은 스커트를 남보다 비싸게 출시할 수 있으면 삶은 경쟁력을 가진다. 재료의 낭비 없이 좋은 물건을 만들고, 깐깐한 소비자가 주머니를 넉넉히 열어 물건을 사주기 때문이다.
   성공적 삶은 부와 명예를 가져온다. 아니, 부와 명예가 있어야 성공적 삶이다. 그가 얻은 보상의 크기는 그의 경쟁력, 즉 시장 가치에 비례한다. 그만큼 그의 노력이 소비자에게 귀하게 평가받고 있다는 것이고, 그만큼 시장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을 잘 만든다는 의미이다. 그가 얻는 명예의 무게는 망각의 무게와 비례한다. 경기에서 이기면, 지나간 실수는 다 망각된다. 선거에서 이기면 과정에서 발생한 모든 소란은 다 망각된다. 오직 성공만을 축하할 뿐이다. 그것이 성공이 주는 명예의 본질이다.
   성공적 삶은 다수의 소비자가 그의 상품을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효율적 삶이 토대가 되었다면, 독점(monopoly)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니라면, 더 이상 규범적으로 다툴 내용은 없다. 그의 성공은 경쟁에서 살아남은 대가(代價)이고, 효율적이고 합리적 삶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통념이 말하는 효율적 삶이다.
효율성은 다양성과 충돌한다
다양성(diversity)은 차이(difference)의 집합이다. 생활 세계에서 다양성은 같은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고,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비 시장에서 다양성은 나만의 독특한 개성을 말하고, 생산물 시장에서 다양성은 경쟁자와 구분되는 나만의 차별화된 서비스를 의미한다.
   그것이 하나의 회사이든, 하나의 공동체이든, 다양성은 집단의 성장과 발전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한다. 적어도 복잡계 연구의 일관된 발견이다. 1) 다만 다양성의 효능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적정 수준의 다양성이 무엇인지를 따지기는 하나, 다양성의 긍정적 기능을 무시하고 연구 설계를 할 수는 없다. 그것이 현황이다. 물론 생활 세계에서 다양성은, 차이는 언제나 의심받거나 질책을 받는 처지이다. 불온한 자이거나 능력 없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것 역시 현실이다.
   따라서 다양성이 좋은가 나쁜가를 따지는 것은 이미 낡은 문제 제기이다.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다양성의 순기능을 말하는 연구가 많음에도 왜 현실에서는 다양성이 항상 위협받는가이다. 다양성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일상에서 다양성이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원래 다양성이라는 것이 일상에서 예외적으로 존재한다면, 연구자의 실험실과 같은 비현실적인 조건에서만 작동하는 사소한 사건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일상이 다양성의 기능을 애써 감추고 왜곡하고 있는 결과일 수 있다.
   효율적 삶에 관한 통념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모두 담겨 있다. 효율적 삶이 일상에서 넘칠수록, 다양성은 사소한 예외로 존재하거나, 경쟁력 없는 삶으로 격하된다. 효율성은 다양성과 충돌한다.
사소한 차이, 다양성
효율적 삶이 일상이 된 것은 근래의 일이다. 대략 1997년 동아시아 금융 위기 이후, 사회에 대한 개인의 기대, 심리적 계약이 무너진 이후이다. ‘부자 되세요’라는 호소가 카드 회사 광고를 가득 채운 다음의 일이다. 효율적 삶이 최근의 일이라면, 자연 상태에서 흔히 발견되기보다는 특정한 조건이 맞아야 발흥하는 것일 수 있다. 사실 삶의 형식이라는 것이 포유류의 한 일종이라는 물리적 제약만으로 일률적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제약이라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사회적 제약이, 사회적 제도가 보편성을 가지지 않는다면, 삶의 특정 형식은 본래적이기보다는 임의적이다.
   시장 경쟁은 효율적 삶을 제약한다. 남이 원하는 것을 시장에 내어놓는 범위 안에서, 경쟁은 효율적 삶에 경제적 보상을 준다. 경제적 보상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효율적 삶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일상의 대부분이 효율적 삶으로 채워져 있다면, 다른 삶의 형식이 자리 잡을 여지는 없다. 메뉴가 하나인 식당에서 선택지 밖의 선택은 굶는 것이다. 지금 식당이 우리 동네의 유일한 식당이라면. 경쟁은 효율적 삶을 강제한다.
   근대 사회에서 최선의 삶이 무엇인지는 개인의 선택에 남겨 둔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선택의 자유는 삶의 다양성을 따라서 담보한다. 2) 경쟁이 최선의 삶의 조건이 되기 위해서는, 경쟁의 결과로 선택의 폭이 넓어지거나 선택의 역량이 확대되어야 한다. 그러나 경쟁이 효율적 삶을, 최적화된 선택을 강제하는 한, 선택의 폭도, 역량도 줄어든다.
   효율적 삶은 선택의 결과를 전제한다. 결과를 알지 못하면, 소위 손익(payoff) 구조를 알지 못하면, 효율적 삶은 계산할 수 없다. 그러나 결과의 구조가 알려져 있다면, 선택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다. 최고의 결과를 낳은 선택을 모두가 따라가기 때문이다. 그러한 선택을 벗어나는 삶은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기 때문이다.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시장에 새로운 선택지가 소개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성공적 혁신은 모두가 아는 비법과 같다. 혁신이 성공이라면, 모두가 혁신을 쫓아간다. 같은 방식으로 살아간다. 경쟁이 완전할수록 이러한 경향은 강화된다. 다른 삶이 선택될 여지는 없다. 3)
   불평등의 이슈를 잠시 미뤄둔다면, 경쟁에서 성공하면 선택 역량이 확대되는 것이 아닌가 반문할 수 있다. 새로운 선택을 할 넉넉한 재산을 성공한 개인은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택의 기준이 효율적 삶이라면, 늘어난 선택 역량은 그 자체로 윤리적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무엇을 창업하는지, 어떻게 창업하는지 따지지 않고, 그저 기업가치, 아니 주주가치 1조 원의 유니콘만 따라다니는 창업 생태계와 같다. 계절 내내 모아둔 도토리가 넉넉하다 해서, 다람쥐의 선택 역량이 늘어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시장 경쟁이 효율적 삶을 선택하고 다른 선택의 여지를 줄이는 한, 늘어난 선택 역량은 그 자체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역량이다. 따로 택할 다른 삶이 남아 있지도 않고, 딱히 내가 그것을 새로 만들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효율적 삶이 준 선택 역량을 비효율적 삶을 선택하는데 쓴다고 해도, 그 새로운 선택의 순간 효율적 삶이 부정되는 만큼 다시 선택 역량이 축소되기 때문이다. 정승처럼 쓰기 위해서는 여전히 개처럼 벌어야 하는 자기모순에 빠진다.
위장된 차이, 다양성
효율적 삶이 일상이 되었다지만, 우리가 매체에서 매일 듣는 이야기는 결이 다르다. 개성 시대, 아니 초(超)개성(super-individuality) 시대를 모두 입에 달고 다닌다. 다들 남과 다른 자신을 뽐내고, 기업은 고객 맞춤 서비스를 개발 한다고 요란하다. 이만하면 효율적 삶은 다양한 삶의 형식을 뒷받침하는 유사 이래 최고의 방법이 아닐까?
   경영학에서 개성을 강조한 것은 역시 근래의 일이다. 유럽의 경우는 전후 경기 호황의 절정기인 1970년에 출간된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소비의 사회(La socie´ te´ de consommation)가 기준점이 될 수 있다. 4) 우리의 경우는 저유가, 저금리, 저달러의 소위 삼저 호황 이후, 가수 이승환이 <나는 나일뿐>이라는 노래를 부르던 1990년대 초반이 기준점이 될 수 있다.
   남과 구분되는 개성은 여러 가지 기호에 담겨 유통된다.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운 쿨한 선배, 등산복 패션에서 벗어난 스타일, 필라테스와 헬스로 다져진 스마트하고 군더더기 없는 몸, 화려한 직장과 와인과 힙한 음악을 즐기는 멀티태스킹, 무엇보다도 긍정 에너지가 넘치는 창의적 자기 경영자 등이 그것이다.
   개성은 성공을 담보하는 경쟁력 있는 삶이다. 대중을 세분하여 ‘타겟 커스터머’를 설정하고 해당 ‘마켓 세그먼트’ 고유의 고객 가치를 만들어내면, 경쟁자와 구분되는 차별화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지속가능한 성장을 구가하고, 시장 평균을 월등히 초과하는 이익을 창출하며, 주주가치를 극대화하는 초우량 기업이 된다. 개성과 차이는 이제 기업 경영의 최소 요구 사항이 되었다.
   미국 경영학이 경영 현상의 기준을 제공한다면, 경영의 역사는 개성과 차이를 강조하는 최근의 경향과 화합과 표준을 강조하는 고전적 경영으로 구분된다. 구글(Google)과 같은 정보기술 대기업이 전자를 대변한다면, GE와 같은 고전적 다각화 기업이 후자를 대표한다. 경영에 관한 잡다한 이견이 주말마다 교보문고를 가득 채우지만, 철학자 한병철은 미국 경영학의 계보를 개성을 기준으로 깔끔하게 양분한다. 5) 개성을 강조하는 성과사회와 표준을 중시하는 규율사회가 그것이다.
   규율사회(Disziplinargesellschaft)는 여러 면에서 효율적 삶과 닮았다. 규율사회의 경영 방식은 다음과 같다. 작업자 각자가 알음알음 습득한 방식으로 일하는 것을 금지하고, 전문가와 경영자가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개발한 작업 표준에 따라 생산 과정을 ‘과학적으로’ 규율하는 것이다. 6) 직무 분석과 근태 관리, 공정 수율, 원가 통제 등과 같은 여러 기법이 동원된다. GE의 식스 시그마(Six Sigma) 운동처럼, 불량률을 줄이기 위한 엄격한 생산 공정 관리가 대표적 예이다. 따라서 과학적 경영은 효율적 삶을 지향한다.
   반면에 성과사회(Leistungsgesellschaft)는 일견 다양성을 지지하는 경영기법으로 보인다. 자율 복장, 개성 존중, 수평적 조직 문화, 분권화된 의사결정, 능력주의와 성과주의 인사관리. 이 모든 언어가 표준 혹은 베스트 프랙티스(best practice)를 강조하는 규율사회와 대조를 이룬다. 그렇다면 우리의 일상은 더 이상 효율적 삶으로 재단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개성을 추구하는 우리 일상은 그러나 다른 듯 비슷하다. 대기업 인사 담당자가 받아 보는 지원 서류는 다른 듯 비슷하다. 여러 번의 인턴 경험, 높은 영어 성적, 책임감과 팀 활동에 능하다는 자기소개, 각종 수상 경력, 꾸준한 사회봉사 활동이 각각의 지원서를 채운다. 워라밸(work-life balance)을 즐기는 사람들이 거쳐가는 공간도 그러하다. 인스타그램의 맛집을 성지 순례하고 파워 블로거가 추천하는 헬스장을 들렀다가 한때는 가로수길에서 경리단길로, 다시 서울숲에서 상수역 부근을 거닌다. 새벽 배송의 식재료로 아침을 준비하고, 결국은 부동산 가격의 부침을 따지는 하루 역시 다른 듯 비슷하다. 젊음이 가득한 캠퍼스의 모습도 다른 듯 비슷하다. 학기 초면 로스쿨, 재무, 전략 컨설팅 관련 동아리 인터뷰에 참여하기 위해, 자율 복장의 선배 직장인이 이미 벗어던진 양장을 하고 같은 모양으로 줄지어 서 있다. 좋은 수업을 한다고, 문자 그대로 “수고가 많으시다고” 글을 맺는, 보낸 이를 확인하지 않으면 오랜 거래처에서 보낸 듯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학생들의 이메일도 다른 듯 비슷하다.
   동네를 걷다 보면 가게들도 다른 듯 비슷하다. 교과서에서 그렇게 차별화 우위를 가르치지만, 소매점 창업의 문제는 유행을 따라 비슷한 가게가 줄지어 출혈 경쟁을 한다는 것이다. 대자본이 투여된 방송가도 그리 다르지 않다. 로(맨틱)(메디) 드라마와 아침 드라마가 성공의 공식을 따르고, 2020년의 방송은 트로트와 연관된 다수의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다른 듯 비슷한 차이의 양산은 사실 경쟁의 본래적 생리이다. 경쟁은 효율적 차이를 유인하고, 효율적 차이는 선택의 결과를 계산하면서 얻어지는, 그 자체로 효율적 삶이다.
   효율적 차이를 설명하는 방식은 여럿이다. 비교 가능한 상품만이 소비 가능하기 때문에 차이를 강조하기 이전에 해당 상품 카테고리의 기초적 속성을 공유해야 한다는 제도주의적 설명이나, 이웃 기업과 불필요한 경쟁을 피하고 특정 유형의 수요에 대한 독점력을 높이려는 노력의 결과라는 산업조직론적 설명을 들 수 있다. 7) 어느 경우이든 자신이 선택한 차이(개인 수준에서는 개성, 기업 수준에서는 제품 차별화 수준), 그 차이가 만들어 내는 결과에 대한 정보/지식을 전제한다. 나의 차이가 어떠한 결과를 불러올지 예상하고 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이는 차이를 선택한다는 의미이다. 바로 효율적 삶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다.
   효율적 차이는 본래적 차이의 소실을 가져온다. 선택의 결과가 알려진 차이란 결국 과거의 경쟁에서 승부를 가렸던 기준들, 개인의 이력서 특기 사항이나 제품의 특정 속성 등을 중심으로 각자의 차별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회봉사와 대기업 인턴의 비중을 어떻게 섞든, 취준생의 이력서가 두 가지 차원으로 정리되듯이, 수많은 스마트폰의 경쟁도 이제는 카메라와 충전 속도 등의 제한된 제품 속성 차원으로 요약된다. 새로 출시된 차이란 것도 이미 보았던 어떤 것을 계속 닮아 간다. 하버드(Harvard)의 마케팅 교수인 문영미의 표현대로, “결국 우리는 아우디처럼 달리는 볼보와 볼보처럼 달리는 아우디를 갖게 된다(… so it is that we end up with a Volvo that runs like an Audi and an Audi that runs like a Volvo)”. 8)
실질적 차이, 다양성
진화(evolution)는 시간을 세 가지 국면으로 나눈다. 차이를 만들어 내는 변이(variation), 개별 차이에 비대칭적 보상을 주는 선택(selection), 그리고 선택된 차이를 안정화시키는 유지(retention) 등이 그것이다. 세 가지 국면은 얽혀있다. 유지는 변이를 억제하고, 선택은 변이를 전제한다. 진화의 시간에서 변이는 본질적으로 맹목적 변이(blind variation)이다. 개체 차원에서 만들어낸 차이가 어떠한 보상을 받게 될지, 즉 환경에 의하여 선택될지 여부를 사전에 계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효율적 삶은 맹목적 변이와 충돌한다. 효율적 삶이 시장에서 만들 수 있는 변이는 유도된 변이(guided variation)일 뿐이다. 과거의 성공으로부터 결과를 계산해서 차이를 선택할 뿐이다. 효율적 삶은 선택 메커니즘이 작동할 수 있을 정도의 다양성 혹은 차이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과거에 알려진 성공 요소에 집중하여 차이를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듯 비슷한 차이만을 재생산한다. 따라서 효율적인 삶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변하지 않는 시간이다.
   선택 메커니즘이 작동할 수 있을 정도의 다양성은 어느 정도의 차이를 말하는 걸까?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을 정도의 다양성은 무얼까? 생활 세계가 지속될 수 있는 정도의 다양성은 무엇인가? 차이의 양적 증가를 의미하는 것은 당연히 아닐 것이다. 효율적 삶에 관한 지금까지의 논의가 하나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맹목적 변이의 측면에서 필요한 다양성은 과거의 성공으로부터 독립적인 차이가 얼마나 많은가가 중요하다. 즉, 지금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그래서 인기 없는 차이의 규모에 달려있다. 쓸모없는 차이의 규모에 달려있다. 지금 시장에서 경쟁력이 없는 차이가 많이 시도될 때에만, 선택 메커니즘이 작동하기에 적절한 다양성을 시장에서, 생활 세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상품 혁신을 예로 들어보자. 상품의 혁신성에 비례하여 수요가 창출된다면, 즉 성공한다면, 상품 기획에서 주의해야 하는 내용은 단순하다. 혁신성을 지속적으로 증대시키는 것이다. 단, 상품의 혁신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이미 알려져 있다는 전제 아래에서 그렇다.
   혁신성의 기준을 사전적으로 알 수 있다면, 시장은 사실상 균형 상태에 도달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때 다양성은 효율적 차이를 중심으로 뭉쳐있다. 고객의 취향은 고정되어 있고, 그 취향을 생산자는 이미 알고 있고, 그에 맞게 효율적 차이를 만든 기업만이 선택되기 때문이다. 인공 지능이 최적화된다면, 경영자는 소비자 데이터를 컴퓨터에 입력하고, 출력된 혁신을 구현하기만 하면 된다. 경쟁은 차이의 계산으로 축약된다.
   만약 혁신성의 기준을 사전적으로 완전히 알지는 못해도 부분적으로 알 수 있다면, 개별 생산자의 집합, 즉 시장은 가장 효율적인 생산자만큼 성공적인 혁신을 할 수 있다. 예측시장(prediction market)과 관련된 논의가 그 예이다. 그러나 혁신성의 기준을 사전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면, 개별 생산자의 정보, 의견, 지식을 집단 수준에서 총합한다고 해도 미래를 효율적으로 예측할 수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는 미래를 사전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곳이다. 어떤 상품이 혁신적인지 사전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면, 상품 기획은 그저 암중모색이다. 내년에 어떤 상품이 인기를 끌지 도대체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생산자는 경쟁을 한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차이를 선택한다. 물론 대부분의 선택은 실패한다. 소수의 상품만이 성공을 하고 시장 수요를 창출한다. 그러나 무수히 많은 실패 시도가 집단 수준에서 상품 혁신을 가능하게 한다. 실패하는 차이의 규모만큼 실질적 다양성은 증가한다.
늙어가는 삶은 다양하다
소비 사회에서 늙어 간다는 것은 경쟁력이 없다는 뜻이다. 꽃중년이 유행하는 것도, 질병보다는 라이프 스타일 개선과 관련된 신약이 개발되는 것도, 시장에서 젊음을 늙음보다 보상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사전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기획하는 것과 같다. 시장이 보상하는 젊음은 수많은 상업 광고에서 이미 친절히 알려주는 것이지만, 나이가 드는 것은 사후적으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맹목적 변이의 시간이다. 그만큼 다양한 삶이다. 최선의 삶이 계산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고 구현하는 것이라면, 나이가 드는 것은 효율적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의 창이다. 오시이 마모루(Oshii Mamoru)의 역작 <스카이 크롤러(The Sky Crawlers)>에서 주인공의 마지막 대사는 늙어 가는 삶이 다양할 수 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항상 지나는 길이라고 해서 경치가 똑같은 건 아니다”.
목차
다양성, 차이 그리고 차별
효율적 삶의 피안(彼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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