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프라브와 다양성 (1)
박계홍
프리랜서 웹 개발자
박의제
안드로이드 앱 개발자
배휘동
개발자
이보라
대학교수
헬렌
헬렌컨설팅 대표

본 글은 임프로바이저 다섯 명이 모여서 다양성과 임프라브와 다양성의 관계, 그리고, 개발자들이 생각하는 다양성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다양성의 중요함과 필요성을 생각할 수 있도록 정리한 것입니다.
오프닝: 임프라브 소개
헬렌 안녕하세요. 오늘은 '임프라브와 다양성'에 대해서 얘기를 나눠보려고 이렇게 모였습니다. 이 글을 보실 분들은 대부분 임프라브가 무엇인지 잘 모르실 것 같아서, 우선 임프라브 및 임프로그 팀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임프라브(Improv)는 관객들에게 제시어를 받아서 즉흥적으로 보여드리는 공연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 문장으로 정의하기에는 임프라브는 훨씬 많은 것을 담고 있죠. 장르도 다양하고, 찾는 사람들도 다양해요. 일단 임프라브에서 가장 중요한 건 관객입니다. 임프라브에는 대본이 없고 즉흥적으로 관객들한테 질문을 던져서 답을 구한 뒤 그 답을 키워드로 삼아 우리가 무대를 꾸미는데요. 이런 관객들과의 인터랙션을 통한 즉흥성이 무대를 풍요롭고 재미있게 만들어 줍니다.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이 많다 보니까 여러 가지 변수들도 많고, 예측하기 어려운 일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임프라브가 순간의 예술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임프로그(Imfrog)는 제가 리딩하는 시카고 스타일의 임프라브 팀입니다. 저의 임프라브 교육 과정을 중급이상 수강한 분들로 구성되어 있어요. 매주 한 번씩 모여서 연습하고, 2~3개월에 한 번씩 공연을 엽니다. 2016년부터는 상하이, 싱가포르, 마닐라 등 해외 임프라브 페스티벌에 꾸준히 참가하고 있어요. 한국에서도 국제 임프라브 페스티벌을 개최해 보기 위해 준비하고 있기도 합니다.
   임프로그는 IM(PROV) + FROG의 합성어인데요. IM이 부정 의미의 접두사로 사용되기도 하고, 임프라브의 프라브가 FROG하고 발음이 비슷하기도 해서 '청개구리'라는 느낌으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팀 이름을 정할 때도 임프라브를 활용했어요. 당시 모였던 분들끼리 여러 이름을 제안하고, 그것들을 키워드로 임프라브를 해봤어요. 그때 가장 재미있었던 키워드가 임프로그였기 때문에 팀 이름을 임프로그로 정했습니다.
   사실 임프라브는 말이나 글로 설명을 들어도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임프라브에 정말 잘 맞아요. 백번 설명을 듣기보다는 직접 임프로그 공연을 한번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임프로그 공연은 보통 용산에 있는 펀타스틱 시어터(https://funtastictheater.com)에서 열립니다. 펀타스틱 시어터는 한국 최초의 임프라브 전용 극장이기도 해요. 임프라브 공연 영상을 유튜브(https://www.youtube.com/@dkdltm80)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럼, 오늘 이야기를 함께 나눌 사람들의 자기소개를 먼저 들어볼까요?
자기소개
헬렌 저는 임프로바이저(Improviser, 즉흥연기자)로 활동 중이고, 방금 소개해 드린 것처럼 임프라브 팀인 임프로그를 리딩하고 있어요. 그 외에도 다양한 조직에서 퍼실리테이션이나 애자일 코칭을 도와드리기도 합니다.

계홍 저는 웹 개발자입니다. 임프라브는 2014년부터 취미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임프라브를 참 못해요. (웃음) 그래서 저 같은 사람도 임프라브를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임프로그 멤버이고, 헬렌과 함께 보조 임프라브 코치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의제 저도 임프로그 멤버고요. 입사하자마자 임프라브를 시작해서 임프라브와 개발을 한지는 10년이 되어갑니다. 현재 안드로이드 앱 개발을 하고 있어요.

보라 저도 임프로그 멤버이고, 교육 쪽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휘동 저는 8년차 개발자고 현재 인공지능 스타트업의 프론트엔드 팀 리드로 일하고 있습니다. 팀 리드 역할을 맡은지는 2년 반 정도 됐습니다. 저도 의제님처럼 회사 일 시작한 그 해 처음으로 헬렌에게 수업을 들으면서 임프라브를 시작 한터라, 임프라브 한지도 8년 됐네요. 지금은 저에게 굉장히 소중한 세 가지 취미 중에 하나입니다. 임프라브를 하는 순간이 무척 행복하기 때문에, 제 삶의 행복을 위해 임프라브를 하고 있습니다.

헬렌 연습 시간에 만나다가 이런 자리로 만나니 또 새롭네요! 먼저 오늘은 크게 두 파트로 이야기를 진행할까 해요. 첫 번째는 임프라브와 다양성에 관해 이야기하고, 두 번째는 개발/개발자와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다양성
먼저 ‘다양성’이 중심 주제어니까 다양성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 볼까요? 각자가 생각하는 다양성이 무엇인지 한번 얘기 나눠봐요. 저는 한국에서 임프라브를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다양성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거의 없었어요. 돌이켜보면 2014년에 처음 미국에 임프라브를 배우러 갔을 때도, 미국에서도 그런 움직임이 크지는 않았어요. 백인으로만 이루어진 임프라브 팀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2016년에 미국에 다시 갔을 때는 다양성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얘기가 나오면서, 인종을 비롯해 다양한 사람들이 섞인 팀들이 주목받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저도 다양성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한국에서는 다양성에 대해 인식할 일이 적었는지 생각해 봤는데, 저희는 대부분 비슷한 경로를 따라 성장하고 같은 문화권에서 자라다 보니 다양성을 존중할 필요가 크게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모든 것이 글로벌화되고, 많은 사람이 섞여 살기 시작하면서 다양성이 중요하다는 걸 점차 깨닫게 되더군요. 그래서 저는 다른 인종, 다른 생각, 다른 모양, 다른 철학, 이런 여러 가지가 함께 공존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리는, 그리고 이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것을 다양성이라고 생각합니다.

휘동 제게 다양성은, 좁은 의미에서는 나에게 낯선 무언가(사람이든 문화든 글이든 생각이든)를 접하는 것이고, 넓은 의미에서는 완전히 나와 다른 문화에서 살아온 사람, 커뮤니티, 집단을 만나는 것입니다.
   둘 다 저에게 오는 함의는 비슷해요. 다양성은 저에게 불편함을 주면서도, 저를 성장시켜 주는 계기 또는 원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는 다양성을 의도적으로 추구하려고 노력을 많이 해왔어요. 제가 맨날 접하는 무언가에서 좀 더 벗어나서 새로운 활동을 해보려고 한다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고 한다거나 같은 시도요.

계홍 와 휘동님 멋지네요. 다양성을 그렇게까지 활용하고 있다니. 저는 그렇게까지 생각해 보지는 못했어요. 제가 다양성에 대해서 좀 더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애자일 1) 을 공부하면서, '필수 다양성의 법칙(The Law of Requisite Variety)'을 접하게 되면서부터였어요. 애자일을 하는 조직은 다양성도 생각해 봐야 하고, 그래서 '다양성은 조직을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만들어 준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다양성 관련한 에피소드가 하나 생각나네요. 저는 나름대로 남녀 차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존중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제 생각과 달리 말과 행동은 훈련이 되어있지 않았더라고요. 제가 뭐라고 물어봤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상대방에게 어떤 이야기를 했더니 그분이 "여자만 집에서 밥을 해야 하나요?"라는 뉘앙스로 반문하셨어요. 그렇게 들렸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깜짝 놀랐죠.
   정리하면, 다양성은 저에게는 뭔가 그냥 잘 안 보이는 일상인 듯하고요. 그리고 조직에는 조직을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만들어 주는 데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의제 저도 다양성에 대해서 스스로 정의를 내려봤는데요. 다양성이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다양성을 사람 간의 관계 안에서 많이 고민했어요. 예를 들면 엄마와 나의 관계, 애인이나 친구와의 관계에서 여러 가지 갈등이 발생하잖아요. 그 원인을 찾다 보면 우리가 서로 다르고, 서로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돼요.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서로 잘 지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계 안에서 다양성에 대한 생각들을 하게 되었어요.

보라 저도 의제님하고 제일 비슷한 것 같아요. 저는 생각이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 그래서 누구나 받아들여지는 것이 다양성의 의미라고 봐요. 그래서 항상 다양성(diversity)은 포용성(inclusion)과 함께 이야기되더라고요.
   제가 한국 사회에 살면서 경험했던 다양성과 관련한 이슈들은 대체로 내가 누군가와 달라서, 또는 내가 다수의 사람과 약간 다르다는 이유로 소외감을 느끼거나 눈총을 받는 경험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한테는 다양성이라는 것은, 나와 조금 달라도 좀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고, 그리고 조금 달라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PART 1. 임프라브와 다양성
헬렌 임프라브를 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다양성의 의미도 다양하네요. 임프라브와 다양성의 교차점을 이야기하기 전에 각자가 생각하는 임프라브의 매력을 이야기해 볼까요? 우선 저부터 시작할게요. 저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 호기심이 많은 편이에요. 저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라이프 스타일을 갖고 어떤 패턴으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관심이 많아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면 흥미진진한데요. 저는 그것을 관찰로 끝내지 않고 무대 위에서 그 사람이 되어보는 경험을 해요. 물론, 연기하면서 제 캐릭터를 버릴 순 없기 때문에 제가 포함된 저의 다른 버전들인 거죠. ‘만약 내가 이 직업이 아니라 다른 직업을 했다면 어떨까?’ 같은 질문으로 시작한 나의 상상을 무대 위에서 실현해 볼 수 있다는 게 임프라브의 큰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또 하나는… 이 매력을 얘기하려면 어쩔 수 없이 다양성 얘기를 할 수밖에 없겠네요. 예를 들면, 만나본 코미디언이나 임프로바이저 중에 굉장히 드라이한 사람이 있어요. 이 드라이하다는 사람이 잘 웃지 않고 감정 표현의 폭이 크지 않은데, 그게 너무 웃긴 거예요.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어색함이 그대로 보여요. 무대에서 쭈뼛쭈뼛 어색함이 보이는데 그게 또 너무 사랑스러워 보이는 거예요. 또 어떤 사람은 평소에 내가 보던 모습하고 다르게 무대에만 올라가면 그렇게 능청맞을 수가 없어요. 임프라브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롱폼은 30분에서 1시간 정도를, 적으면 6명부터 많으면 20명까지도 팀으로 공연하게 돼요. 이 안에서 굉장히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를 완성하는 느낌이 들어요.
   제가 임프라브 수업할 때 자주 하는 말이 있어요. 다들 각기 다른 '보석' 같다. 예를 들면 휘동님은 사파이어 같고, 계홍님은 루비 같고, 보라님은 토파즈 같고, 의제님은 에메랄드 같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빛을 잃는 게 아니라 더 서로를 빛나게 해 주거든요. 저는 이게 다양성이 아닌가 싶어요. 서로 다른 모양과 색깔과 특성을 가지고 모여서 함께 빛이 나는, 함께 더 반짝거릴 수 있는… 이게 저는 임프라브의 가장 큰 매력인 것 같아요.

휘동 저는 우선 불확실성이 임프라브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관객에게 새로운 주제를 받는 것도 그렇고, 사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우리도 포맷 2) 빼고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그런데 그 모른다는 것 자체가 사실 엄청나게 재미있어요. 단순히 불확실해서가 아니라, 그 불확실한 걸 우리가 함께 짜인 구조로 만들어 나가는 그 과정이 재미있습니다. 그러려면 우리끼리 엄청난 예스앤드(Yes, and) 3) 가 있어야 하고, 그걸 통해서 새로운 제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도 하고요.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나를 크게 넓혀나가는 압축적인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특히 콜백 4) 을 통해 관객과 교감할 때의 즐거움입니다. 그때 터지는 웃음을 보면서, ‘내가 생각한 걸 이들도 생각했구나’하며 느껴지는 교감에 대한 희열이 있습니다.


보라 저도 여러 사람이 같이 뭔가를 만들어 나간다는 그 희열이 엄청난 것 같아요. 어릴 때 제가 합창부나 성가대를 많이 했는데 그때 그 느낌하고 비슷해요. 우리가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것이지만, 절대 혼자의 힘만으로는 그 작품을 만들기가 어려워요. 무조건 여러 사람의 노력이 필요한 작업이에요. 그래서 반드시 나도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같이 최선을 다하고 서로 긴밀한 관련성을 갖고 협조하면서 일을 해야 작품이 완성돼요. 그렇게 여러 사람이 다 같이 노력해서 무언가를 이루어 가는 뿌듯함은, 혼자 무언가를 열심히 해서 이루어 내는 성취감하고는 굉장히 달라요.

의제 임프라브의 매력 2가지를 말씀드리자면 웃음과 새로운 경험입니다.
   사실 일상생활에서 웃을 일이 잘 없잖아요. 그런데 임프라브를 하면서 굉장히 많이 웃어요. 임프라브는 마치 어른들의 놀이터같아요. 재미있게 놀고 함께 웃으면서 힐링되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또 다른 매력은 새로운 경험인데요. 일상에서 우리가 하는 활동들은 매우 제한적이잖아요. 매일 비슷한 일상이 반복돼요. 회사에 가고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죠. 그런데 임프라브를 하면서 새롭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어요.
   예를 들어, 공연하거나 해외 페스티벌에 참가하면 그 과정에서 다양하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게 돼요. 여행 가서 현지인 친구를 사귀는 기회가 별로 없잖아요? 이런 새로운 경험들이 제게는 삶의 활력소가 되었어요.

계홍 저도 굉장히 공감돼요. 임프라브 연습 끝나고 회고 5) 할 때 "일주일 치 웃을 걸 오늘 한두 시간 연습하면서 다 웃고 간다."라고 많이 말하는데요. 뭔가 상쾌하게 힐링 시켜주는 매력이 있어요.
   그리고, 저는 개발자로서도 임프라브가 매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임프라브를 원래 공연이 아닌 부분에 사용하는 것을 어플라이드 임프라브(Applied Improv, https://www.appliedimprovisationnetwork.org) 라고 해요. 개발자들은 항상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의사소통 능력을 소홀히 하기 쉽죠. 아직도 개발자라고 하면 혼자서 프로그래밍하는 이미지가 있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소프트웨어 개발도 여러 사람이 함께 소통하면서 협력하는 것이 아주 중요해요. 그런데 개발자들은 업무 특성상 저절로 의사소통 능력이 향상되기는 어려워요. 게다가 부족한 의사소통 능력을 향상하는 대신 열심히 소프트웨어 기술 능력만 향상하기도 하고요. 이런 개발자들에게 임프라브는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협력하고, 의사소통을 잘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임프라브는 기본적으로 재미있고, 힐링이 돼요. 이런 점은 임프라브를 잘해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초보자일 때도 그래요. 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하는 것은 더 재미있거든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에 익숙하게 만들어 줍니다. 저는 이런 임프라브의 매력도 정말 좋아해요. 일을 하고, 일상생활을 하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되거든요.

헬렌 우리가 임프라브 이야기를 하다 보면 모든 사람의 반응, 특히 관객들의 반응이 너무 재미있는데요. “와~ 정말 재미있어요. 그런데 저는 못 할 것 같아요. 너무 어려워 보여요. 즉석에서 어떻게 그걸 생각해 내세요?”라고 이야기를 해요. 제가 해석하기로는 이게 바로 컴포트 존을 벗어나지 못해서 그런 것 같아요.

보라 사실은 자신이 편안한 구역을 약간 벗어나야 새로운 경험도 하고 새로운 사람과 소통과 교류가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제 고정관념일 수 있지만, 개발자로서 하는 일과 임프라브는 활동의 성격도 다를 것 같고 일하는 방식도 약간 다를 것 같아요. 그래서 임프라브가 어찌 보면 본인들이 가장 편하거나 익숙한 환경과는 조금 다른 곳에 자신을 놓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어요. 그런 경험을 할 때 어떤 느낌인지 문득 궁금하네요.

계홍 임프라브 하다 보면 걱정되는 순간들이 있죠. 우선 갑자기 머리가 하얘진다고 많이들 이야기하는데, 아무 생각이 안 나서 말도 안 하고, 행동도 하지 않는 그런 멍한 때가 좀 있어요. 그리고 예스앤드가 안 될 때가 있는데, 예스앤드를 안 하고, 상대방에게 부정적인 연기를 하면 전체 흐름이 어려워지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예스앤드를 잘 못하면 어쩌지라는 걱정하는 것 같아요.
   이 두 가지 모두 뭔가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 나타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멈추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정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해요. 연기임에도 제대로 반응을 못 하게 되는 거죠.
   임프라브를 처음 배울 때 두 사람이 함께 장면을 만드는 연습을 해요. 그럴 때 많이 나오는 관계 중에 연인 관계도 있어요. 그래서 씬 중에서 "자기야 우리 뭐 뭐 할까?" 같은 대사가 많이 나오는데요. 처음 임프라브를 배울 때, 이 말 한마디에 깜짝 놀라서 어떻게 대응할지 모르거나, 심지어 "누구세요?" 이렇게 반응하기도 해요. 연애를 안 해본 분들은 경험이 없어서, 결혼하신 분들은 낯선 사람을 연인으로 대하는 것 자체가 어색한 경험이니까요.
   또, 임프라브는 즉흥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자신이 할 줄 모르는 춤이나 노래를 아주 잘 하는 것처럼 해야 하기도 하고,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단어를 듣고도(심지어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단어를 듣고도) 잘 아는 것처럼 연기를 해야 하기도 하죠. 처음에는 이런 순간들이 너무 어색하고 어려웠어요. 이런 게 안전지대를 벗어날 때의 느낌이 아닌가 싶어요.

보라 그런 느낌을 받아도 어쨌든 무대에서는 극을 이어가야 하잖아요. 그럴 때 그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세요?

계홍 상황에 따라 다르기는 한데 보통은 시간이 좀 필요해요.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때도 많아요. 여기 있는 분들 모두 그래 보셨죠?((웃음) 숏폼 게임은 극이 빠르고 짧게 진행되는 만큼 이런 상황이 많이 나오는데, 반대로 이런 부분이 숏폼 게임의 재미이기도 해요. 그래서 체인 데스 머더(Chain Death Murder) 6) 처럼 의도적으로 의사소통을 어렵게 만들어 놓은 게임도 있죠. 숏폼에서는 이렇게 뭘 해야 할지 모를 경우에도 스스로 생각나는 대로 해석하고 판단해서 진행하라고 해요. 숏폼은 짧은 극의 특성상 어떻게 진행돼도 재미있으니까요.
   하지만 롱폼에서는 이런 부분이 극의 흐름을 방해하고, 연기자와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기도 해요. 이런 상황이 자주는 아니지만 종종 나오거든요. 전체 상황이 이해가 안 되기보다는 일부 대사를 못 알아듣거나, 모르는 단어가 나오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때는 보통 그냥 다시 물어보라고 하죠. 뭐라고 했는지, 혹은 그게 무엇인지.
   실제 즉흥연기에서는 낯설고 어려운 상황이 나오더라도 받아들일 시간이 좀 더 있습니다. 갑자기 상대방에게 모르는 상황을 강요하지 않으려고 하거든요. 씬을 만드는 것이 어려워지니까요. 그리고 처음 대사를 할 때도 가능하면 나에 대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임프라브에서는 이를 '아이 메시지(I message)' 라고 해요. 내가 지금 너무 슬퍼. 혹은 너무 좋아. 이런 대사를 말하면서 나의 캐릭터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하라는 것이죠.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보니, 임프라브에서도 이런 안전지대를 벗어나는 게임도 있고, 안전지대를 벗어나서 점점 적응할 수 있게 하는 장치들도 있네요.

의제 저는 안전지대 이야기를 할 때 저의 트라우마 혹은 제가 두려워하는 게 생각났어요. 처음에 저는 공연이 두려웠어요. 특히 공연을 시작할 때 누군가는 앞에 나와서 시작해야 하잖아요. 그 정적을 참는 게 참 어려웠고 꼭 내가 빈 공간을 채워야만 한다는 강박이 있었어요. 주변에선 공연을 통해서 성장할 수 있다는 응원이나 코멘트를 해주었고요. 근데 이 트라우마를 이겨낸 경험이 있어요.
   시카고에서 임프라브 5주 수업을 받고, 마지막 졸업공연을 앞둔 시간이었어요. 얼마나 긴장하고 있겠어요? 그때 선생님이 반 친구들을 모아놓고 서로 고마웠던 점을 얘기해 주라고 했거든요. 이 공연을 하고 다음 날이면 다 흩어지게 되니 저도 열심히 반 친구들에게 고마운 점들을 얘기했어요. 근데 제가 반 친구들에게 정말 도움을 많이 받았거든요. 고마운 점 얘기하면서 엄청 나게 울고 서로 안아주고 하다 보니까 뭔가 에너지가 마음속에서 차오르더라고요. 원래는 공연할 때 많이 긴장되고 두려운데 그때는 전혀 그런 게 없이 용기가 샘솟아서 매우 즐겁게 공연했고요. 트라우마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어요.
   돌이켜서 생각해 보니 함께 공연하는 친구들에 대한 믿음, 그리고 내가 얼마나 감사한 일이 많았고 사랑받고 있는지를 경험했을 때 트라우마를 넘어설 수 있었던 거 같아요.
   그 이후부터 컨디션에 따라 엎치락뒤치락하긴 하지만 공연할 때 그런 두려움은 없습니다.

휘동 저에게는 일상 또는 직무에서의 컴포트 존이랑 임프라브에서의 컴포트 존이 좀 다르네요.
   직무에서의 컴포트 존은 의도적으로 인지하고 경계를 넘어가려고 노력하는 편이거든요. 내가 안 써본 기술을 써보면서 부딪혀 보고 삽질하고. 이런 것들은 나의 선택에 의해 천천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만 가는 반면에 임프라브에서의 컴포트 존은 계홍님 말씀처럼 훅 들어오는 일이 좀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도 못 했던 거를 해야 한다거나. 예를 들면, 저는 특히 2016년에 임프라브 시작할 때만 해도 '여성 연기 같은 거 하기 싫다.' 이런 얘기를 했었거든요. 근데 요즘은 별생각 없어요. 그냥 하면 하는 거지.
   그래서 컴포트 존을 벗어난다는 게, 특히 임프라브에서는 내가 두려워했던 무언가를 약간 어쩔 수 없이, 하지만 안전한 공간에서 경험해 봄으로써 '해보니까 괜찮더라'를 느끼고, 경계가 점점 넓어지는 계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직은 임프라브에서 컴포트 존을 벗어난 경험이 저의 직무 경험과는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모르겠네요. 무의식 수준에서는 분명 저에게 좋은 영향을 줬을 것 같지만요.

헬렌 휘동님 말씀을 들으니 기억나네요. 휘동님께서 제 수업 들으실 때, 캐릭터 연기를 하는데 늘 비슷한 캐릭터만 하셔서 제가 다른 캐릭터를 푸시 하고 싶어서 여자 역할을 해보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러면서 제가 몇 가지 팁을 드렸죠. 전형적인 제스처로 귀를 뒤로 넘긴다거나, 목소리를 가늘게 한다거나 같은 거요. 그런데 휘동님이 되게 어렵다, 못하겠다 이렇게 얘기하셨었거든요.
   그런데 사실 여자도 터프한 여자가 있고 또 남자 중에서도 여성성 있는 남자분도 있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여성이 뭔가 남성적이면서 되게 털털한 여성이 나올 수도 있는 거고, 또는 다양한 캐릭터를 만들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옛날, 한 10년 전만 해도 전형적인 캐릭터들이 되게 많이 나왔던 것 같아요. 남자는 이래야 한다던가,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것처럼요. 하지만 요즘은 젠더리스한 캐릭터들이 많이 나와요. 이게 우리가 다양성을 추구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런듯해요.

헬렌 이미 이야기가 좀 나온 것 같긴 하지만, 임프라브를 하면서 다양성에 대해서 생각해 본 상황이 있으신지 이야기를 해보고, 임프라브와 다양성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제 마무리를 한번 해볼까 해요.
   저는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다양성에 대한 생각을 굉장히 많이 하고 있어요. 제가 임프라브 비기너 때, 그러니까 실제로 임프로그 팀을 만들기 전에 외국인 모임에서 임프라브를 했을 때인, 약 10년 전이죠. 그때만 해도 임프라브에서 추구하는 철학이 아주 달랐어요. 또 하나로 정형화하기는 어렵지만 당시 멤버 중 대다수가 중년 백인 아저씨들이었죠.
   그때 어떤 경험을 했냐면요. 제가 목소리를 굵게 하고 동작을 크게 하는데도, 그 친구들이 저한테 와서 여동생아 너 어쩌고저쩌고 막 이렇게 대하는 거예요. 제가 아무리 캐릭터를 바꾸려고 해도 자동으로 여자 엄마 또는 여동생 또는 여자 연인으로 특정되는 경험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심지어 그 친구들과 했던 어떤 공연에서는 제 성별이 모호한 캐릭터가 된 적도 있어요. 제가 남성 캐릭터로 들어갔는데, 어떤 사람이 늘 하던 대로 저를 여성 캐릭터로 만들었고, 근데 또 다른 한 명은 제 의도를 알아채고 남성 캐릭터로 만들었고, 그게 반복되면서 남성인지 여성인지 모르는… 결국은 '남잔지 여잔지 모르겠는 누구야' 이런 식으로 불리게 되었죠.
   근데 이게 차라리 젠더리스 캐릭터로 잘 진행되었으면 문제가 없었을 텐데, 다들 약간 그걸 의아해하면서 그래서 쟤는 남자였어 여자였어?라는 기조가 공연에서 두드러졌던 거예요. 그래서 공연하고 나서 저는 굉장히 기분이 좋지 않았고, 이 팀에 대한 신뢰도 많이 깨졌어요. 물론 다른 사건들도 많이 있었지만… 그래서 이 사람들과 함께할 때는 나의 캐릭터를 표현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한계를 느끼기도 했었죠.
   그런데 오히려 미국에서는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많이 했어요. 제가 미국에서 임프라브를 배우던 시절에는 이게 아주 흔치 않은 일이었는데, 최초로 한국어를 쓰는 네이티브 코리안이 와서 임프라브를 배우는 상황이었어요. 물론 아시아계 사람들이 없진 않았어요. 근데 아시아에서 진짜 토종 아시아인이 와서 배우는 게 아주 드문 일이었고 굉장히 용감한 사람이라고 봐주더라고요. 그래서 영어가 제2외국어였고, 키도 작고 피부도 색깔도 다른 이런 애가 와서 애쓰는 게 좋게 보였는지,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많이 했어요. 사실 이걸로 이득을 엄청나게 많이 봤어요.
   오히려 미국에서보다, 한국에 있는 외국인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경험을 많이 한 거죠. 심지어 제가 그 외국인 모임에서 리더였을 때도 받아들여지지 못했고요. 그러면서 다양성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이면, 사실 인종이나 언어뿐만 아니라 워낙에 성격이 다른 사람들이 많거든요. 임프라브를 하면 대부분 나서는 걸 좋아하고 표현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일 것 같지만 생각보다 그렇지도 않아요. 내향적인 분들도 많이 오세요.
   그런 사람들이 모임에 왔을 때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지 않더라도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 저 사람의 아이디어를 어떻게 받아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많이 합니다. 또 거기서 더 나아가면, 일단 저는 임프로그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큰 사람인데요. 임프로그에서 우리가 이렇게 안정적이고 다양성을 얘기할 수 있고 다양한 캐릭터를 시도해 볼 수 있고 이런 것은,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제가 그만큼 안전한 공간을 잘 만들지 않았나 싶어요. (다들 웃으며 고개 끄덕임) 서로 좀 노력하고 받아주자는 철학을 전파하려고 애를 많이 썼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체크인 7) 도 항상 하고 바운더리 체크 8) 도 하려고 애쓰고, 또 예스앤드 하면서 서로 들어주려고 애를 많이 쓰고 이런 게 서로의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데 되게 중요한 부분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휘동 저는 '임프라브와 다양성'이라고 했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난 건 바파포(VAPAPO) 9) 였습니다. 연습하면서 느낀 게 '뭐 하나만 조금 바꿔도 충분히 다양하게 느껴지는구나’였어요. 예를 들어 목소리를 의도적으로 아주 굵게 내거나, 계속 특정 행동을 반복하는 거 하나만 해도 굉장히 신선해요.

   그런데 그걸 실전에서 쓰기가 너무 힘들어요. 연습을 열심히 해도, 실전에서는 정말 제한적인 용도로만 사용하거나 시작할 때는 의도적으로 다양하게 하더라도 유지가 잘 안되더라고요. 목소리도 그렇고 행동도 그렇고 자꾸 나 자신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내 정체성을 깨는 게 진짜 어렵다는 걸 느끼기도 했고요.
   만약 전형적인 무언가를 모사하면 좀 쉬워요. 나도 유지하기 쉽고, 관객도 빠르게 이해하고 소통하기가 쉬운데… 이게 정말 좋은가, 그러니까 실용적 측면 말고 정의로운 측면에서도 괜찮은가 하는 의심은 좀 있어요. 임프라브가 편견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면 안 좋으니까요. 그런데 롱폼에서는 캐릭터가 천천히 구축되잖아요. 특히 작년 말에 한 공연에서 그랬고요. 그러니까 그 캐릭터를 유지하기가 쉬워지더군요. 그래서 롱폼이 다양성을 위한 연습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헬렌 사실 최근에 저희가 젠더 이슈에 대해서 조금 민감하게 생각을 해본 부분이 있었고, 캐릭터를 더 잘 표현하려고 하다 보니 전형적인 캐릭터, 예를 들면 마초 남성 또는 연약한 여성 캐릭터를 하는 게 괜찮은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어요.
   그래서 특히나 휘동님이 말씀하신 공연에서 했던 포맷인 러브미 캐치미 10) 는 우리 젠더리스적으로 한번 가보자는 제안했었어요. 기호 1번 여자분 김희애 씨 나오셨어요, 이런 게 아니라 이름조차도 젠더를 유추할 수 없는 이름으로 가자는 식으로 우리가 연습을 한두 번 정도 했었거든요. 그래서 그게 더 잘 된 것 같아요.

계홍 다양성 이야기하니 떠올랐던 것 중에 임프라브는 보통 코미디고(보통 임프라브라고 함은, Improvisational comedy의 약자로 Improv 임프라브라고 줄여 부름), 저희가 지향하는 것도 패밀리 코미디, 즉 모든 연령대가 볼 수 있는 방향으로 진행하다 보니 큰 문제는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도 최근 몇 년 동안은 여러 가지 이슈들이 나왔어요. 그중에서 기억나는 것 중의 하나가 관객이 공연을 보고서 불쾌감을 느꼈다고 피드백 받았던 적이 있었어요.
   임프라브는 원래 즉흥적으로 스토리를 만들어 가다 보니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공연에서 좀 잔인한 장면이 나왔어요. 그분은 재미있는 공연을 보러 왔는데, 그런 씬이 나온 것을 보고 엄청 기분이 나빴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 씬을 볼 때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스토리가 너무 막장이네!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엄청 기분 나빴다는 부정적인 피드백이 그때 처음이어서 기억에 좀 많이 남았어요. 최근에는 부정적인 피드백도 전보다 많이 받기도 하고, 저희끼리 회고 과정에서도 잘 찾아내서 이야기를 좀 더 하는 분위기가 되기는 했어요.
   정리하면 임프라브는 즉흥적인 특성상 다양한 방향으로 진행이 될 수 있어서 더 주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의제 임프라브와 (이야기의) 다양성에 관한 에피소드가 생각나서 얘기해볼게요.
   예전에 임프라브 게임을 하다가 제시어로 '브라질'을 받고, 각 팀이 짧은 연기를 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모든 팀이 다 축구와 관련된 상황극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이 코멘트로 주신 게, "사람들은 다양한 이야기를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이었어요. 축구 얘기만 들으면 지겹잖아요? 브라질 하면 축구도 있지만 삼바축제, 스테이크 등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보고 싶을 것이고, 실제로 그게 더 흥미롭고 재미있어 보였어요. 임프라브에서 이야기의 다양성은 흥미와도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계홍 제가 하나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어요. 임프라브의 기본 철학이 예스앤드이다 보니 기본적으로 씬을 만들 때, 다른 사람이 만든 것들을 저희가 받아들이려고 하는데요. 이때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일상생활의 내가 정말 싫어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참 어려운 것 중의 하나인 것 같아요. 다양성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런 부분에서도 임프라브를 하는 사람은 다양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을 듯 해요.
   몇 년 전에 젠더와 관련된 이슈가 한 번 있었어요. 임프라브를 하는 분 중에 퀴어를 불편해하는 분이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극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분을 퀴어로 만들어 준 거예요. 그분도 너무 당황해서 씬 중에서 정색하시고, 상황 자체를 부정해서 모두를 당황하게 만든 적이 있었어요.
   지금도 어려운 부분이에요. 이런 부분에서 생각해 보면 임프라브와 다양성이 관련이 많이 있는 듯도 하네요.

헬렌 저희가 임프로그를 8년 정도 운영을 해오면서 여러 가지 경험을 했었는데요. 젠더 이슈도 있었고, 성소수자 이슈도 있었고, 그리고 취향 문제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임프라브를 할 때 늘 제가 바운더리(boundary) 얘기를 해요. 바운더리 체크를 통해서 본인이 좋아하지 않는 것, 그리고 좋아하는 것, 선호하는 것, 이런 것들을 함께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임프라브를 하다 보면 뭔가 자기 안에 있는 날것들이 정제되지 않고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을 수 있어서, 그래서 더 위험한 경우들이 있는 것 같아요. 이런 걸 바운더리 체크로 피하려고 하고요.
   그런데 요즘에 제가 고민하는 것 중의 하나는, 전 세계적으로 한동안 바운더리의 얘기를 하고 그걸 최대한 받아들이고 인정해 주고 배려를 해주자, 라는 움직임이 있었는데요. 어느새 바운더리를 약간 악용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거예요. “야 이거 내 바운더리야, 너 저리 꺼져” 혹은 “내 바운더리가 이런데, 네가 어쩔 건데?" 약간 이런 뉘앙스로 문제가 돼서 쟁점이 되는 것 같았어요.
   예를 들면, 저희 임프로그는 젠더 이슈, 성소수자 이슈, 이런 모든 것에 대해서 차별해서는 안 되고, 모든 걸 받아들여 줘야 한다는 룰이 있어요. 그런데, 지금은 임프로그에서 나가신 분이 그거에 대해서 마음에 안 든다고 얘기를 한 적도 있었고, 씬 안에서 그와 관련된 발언을 한 적도 있었어요. 어쨌든 이게 팀마다의 철학과 그에 대한 동의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만약에 리더가 리더의 철학을 정했다면 거기에 따라야 하는 거죠.
   사실 임프로그는 제가 리더고, 제가 처음에 아무나 임프로그에 받은 게 아니라 제 수업을 들은 사람들을 여기에 들어오게 한 이유도 사실은 그거예요. 제가 싫어하는 게 더러운 거, 마약, 총, 섹스... 이런 건데요. 젠더 차별, 성소수자 차별 이런 것도 되게 싫어하고요. 그래서 그런 거는 안 된다고 룰을 정하고 우리 팀을 만든 거예요.
   그리고, '패밀리 프렌들리' 철학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팀이 '우리는 자정에 어른들 성인들 대상으로만 공연할 거야'라고 한다면 섹슈얼한 내용이 나와도 되겠죠. 근데 우리는 항상 '가족들이 같이 와도 돼요'라는 패밀리 프렌들리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임프로그의 색깔은 그런 거예요.
   그래서 저는 임프로그에서 선을 넘지 않는 것을 강조하고, 각자의 바운더리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데 힘쓰는데요. 그 반대 의견도 받은 적 있어요. 누군가 저한테 "Improv should be edge." 이렇게 얘기했어요. 이게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임프라브는 선도 넘나들고, 코미디니까 좀 날것 그대로 얘기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예술이잖아~" 같은 뜻이었죠. 저는 동의할 수 없었는데, 모든 것이 오래 지속되려면 누가 상처를 받아서도 안 되고, 서로서로 배려해야 하고,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술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한테 상처를 줘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저는 아프로펌으로 머리를 하고 나서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받고 반응을 보면서 다양성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예를 들면 은행권에 강의하러 갔다가 “저희하고는 안 맞는 것 같습니다.”라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고요. 그래도 일상생활에서는 그런 생각을 많이 못 해봤는데, 임프라브에서는 나의 날것이 드러날 수 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굉장히 많이 미치기 때문에 고민을 안 할 수가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중요한 거는 함께 고민하고, 함께 찾아나가고, 배워나가는 것 같아요. 나 혼자만 잘하려고 하고 나 혼자만 다양성을 잘 받아줘야 해, 잘 인정해 줘야 해, 이게 혼자서 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휘동 저는 종교를 희화화는 연기나, 불륜이나 음모를 꾸미는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사실 좀 불편했던 기억이 있어요. 특히 의제님처럼 독실하신 분이 있거나 할 때, 이렇게 해도 되나 라고 생각한 적이 많습니다. 어찌 보면 전형적인 캐릭터 구축하고도 조금 연관이 있는 것 같고요. 캐릭터를 더 살아 있게 만들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문제인 것 같기도 해요.
   또 한편으로는 '다양성은 좋은 것이다'라는 건 다들 어느 정도 인정하는 명제일 수는 있겠지만, 그러면 '다양할수록 좋은가?'는 꼭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합니다. 개발에서도 사실 비슷해요. 잠깐 곁다리로 예를 들면, '함수가 간결할수록 좋다'는 의견이 있거든요. 그러면 간결할수록 좋은가? 예를 들면 모든 함수를 한 줄짜리로 만들어야 하나? 까지 가면 당연히 아니거든요.
   그래서 어디에나 선이라는 게 있는 거고, 그 선을 넘어가면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우리가 다양성을 포용하는 게 분명히 중요하지만 그래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인해서 '그냥 무조건 포용해야 해'가 되면 오히려 그건 독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저도 헬렌이 얘기하셨던 것처럼 선을 지키는 것이 엄청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의제 휘동님이 기독교 얘기를 하셔서요. 저는 기독교지만 기독교 관련 블랙코미디를 좋아해요. 기독교 풍자하는 내용도 재미있어한답니다. 아무튼 사람마다 수용하는 폭이 다른 것 같아요.
   이야기가 나온 김에 다양성의 아쉬운 점 혹은 불편한 점에 관해 이야기해 보고 싶어요. 모임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다양할 경우 이견을 조율하거나 취합하는 과정에서 시간 및 에너지가 많이 소비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저는 독서 모임과 임프로그 두 군데서 활동하는데요. 두 모임의 성격이 아주 달라요. 독서 모임은 구성원들이 원하는 방향이 대부분 비슷하고요. 임프로그는 원하는 방향이 비교적 다양했어요. 그래서 뭔가 의사결정을 할 때 독서 모임은 금방 끝났던 반면에 임프로그에서는 좀 더 세심하게 서로의 원하는 방향을 탐색하고, 조율하는 시간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어떨 때는 피로감이 많이 쌓이기도 했습니다.

보라 캐릭터 빌딩(character building: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할 때 아주 전형적인 행동 패턴을 가져올 때가 있거든요. 저희가 하는 게 즉흥극이라서 더 그런 것 같아요. 저희는 즉각적으로 그 자리에서 나와 상대 배우뿐 아니라 관객들에게까지 이 캐릭터가 어떤 캐릭터인지 설득을 해야 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전형성에 기대는 게 가장 빠르고 쉬운 것 같기는 해요. 예를 들면, 제가 극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중년 남성의 역할을 하겠다고 설정하는 순간 제 머릿속에 있는 중년 남성의 고정관념에 기대어서 목소리를 만들고 행동하게 돼요.
   결국 그 전형성에 기대는 것이 갖는 양면성이 있더라고요. 즉각적으로 누군가를 이해시키기는 쉽지만, 휘동님이 말씀하셨듯이 어떠한 고정관념이나 편견을 재생산하게 되는 것일 수도 있어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고민이 많아요.
   헬렌님도 말씀하셨지만 중년 남성도 사실 여러 가지 모습이 있을 수 있잖아요. 예를 들어, 중년 남성이라 해도 조심성이 많은 중년 남성이 있을 수도 있고, 성격이 거친 중년 남성도 있을 수 있고요. 집단 내에서의 다양성을 내가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생겼던 것 같아요.
   현재까지 생각한 저의 답은 제가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럼 내 생각은 어떻게 바꾸느냐? 그러려면 제가 다양한 중년 남성을 만나봐야 하는데, 저조차도 만나는 사람들이 제한적이다 보니 사고방식이나 행동이 꽤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거든요. 그래서 제 머릿속에도 계속 그런 상(image)이 생기나 봐요. 그래서 간접적으로라도 영화나 드라마나 소설을 통해서 다양한 사람을 접하는 건 중요한 것 같아요. 내가 직접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고 대화를 해보면 제일 좋고요. 그러지 않으면 나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힘들겠다고 생각해요. 그냥 상상력만으로 또는 아주 의도적인 테크닉만으로 하기에는 제가 프로 연기자가 아니어서 그런지 한계가 많다고 느껴졌던 것 같아요.

헬렌 맞아요. 그 부분에 대해서 저도 고민을 많이 해봤는데 제가 찾은 것 중의 하나 팁은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캐릭터를 관찰하는 게 좀 도움이 되더라고요.
   예를 들면 깡패들이 나오는 영화가 있어요. 그런데 깡패들도 전형적으로 우리가 아는 삼류 깡패, 그러니까 침 찍찍 뱉고 "야 이 새끼야! 너… 어쩌고저쩌고" 이러는 애가 있고, 나이스한 깡패가 있어요. 정장 딱 차려입고, 나이스하게 "그래 잘했어!" 해놓고는 뺨을 싹 갈겨버리는 그런. 그러니까 깡패도 나이스한 깡패가 있고 더티한 깡패가 있는 거죠. 그런데 우리가 사실 주변의 깡패를 실제로 만날 일은 거의 없거든요. 저는 그래도 드라마에서 관찰하면 그거를 좀 흉내를 내볼 수는 있겠더라고요. 이렇게 이 스펙트럼을 늘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휘동 저는 소설이나 영화에서 캐릭터가 전형적이기보다는 입체적일수록 재밌더라고요. 조금 다른 얘기지만, 저는 12월 말을 엄청나게 좋아하는데요. 그 이유가 SNS에 1년 회고가 많이 올라와요. 사람들의 1년 회고를 보면 그 사람에 대해서 내가 정말로 몰랐던 일면도 많이 볼 수 있게 되더군요.
   아까 보라님이, 만나는 사람들 자체를 좀 다양화해야겠다고 하셨는데 만나는 사람이 같더라도 나의 관점은 다양화할 기회가 남의 회고를 읽으면서 생기는 것 같습니다. 회고를 읽다 보면 내가 너무 편견이 얽힌 시선만으로 그 사람을 바라봤던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이 되기도 해요. 저희 팀원분이 알고 보니 이틀에 한 번씩 달리기했다거나, 책을 50권 넘게 읽었다거나 하는 걸 1년 회고 보면서 알았거든요. 그 이후로 그분이 더 존경스럽고 다르게 보이고 하는 걸 보면, 만나는 풀이 달라지지 않아도 노력하면 다양성을 만들어 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계홍 제가 임프라브와 다양성을 좀 더 생각해 보니 임프라브에서 가장 먼저 겪게 되는 것이 다양한 역할들을 연기하는 거예요.
   이 부분이 임프라브와 연극과의 차이이기도 할 것 같아요. 연극은 대본을 보면서 좀 더 준비를 많이 할 수 있는 시간이 있고, 연기의 퀄리티에도 초점을 두잖아요. 그런데 임프라브는 같은 연기를 해도, 연기 자체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즉흥적으로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가장 기본적으로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다양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임프라브 연습하면 남성, 여성, 아이, 어른, 노인 역할은 거의 매번 하게 됩니다. 아무리 연기여도 역할을 하게 되면, 그 역할처럼 생각하려고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아이 역할은 저도 어린아이였을 때가 있으니, 상대적으로 쉽지만, 여성 역할이나 노인 역할은 경험해 본 적이 없잖아요. 경험해 보지 않은 것을 연기하기는 참 어렵고요.
   결국은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잘 관찰하고, 따라 해 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임프라브에서는 다양성이 기본적으로 좀 필요한 스킬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헬렌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파트1 '임프라브와 다양성'에 대한 마무리로서, 각자가 '임프라브와 다양성은 어떤 관계가 있나요?'에 대해 한 문장으로 대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부터 말하면, 앞에서도 한번 언급했지만 "임프라브는 각각의 색깔이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완성하는, 함께하는 포맷의 플레이다라고 얘기할 수 있겠네요. 저는 다 똑같은 사람 10명이 모여서 무대에 서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요. 헬렌이 있고 의제가 있고 보라가 있고 휘동이 있고 계홍이 있기 때문에 재미있는 거죠. 다 각기 다른 모습들이 만나서, 알 수 없는 시너지를 일으키면서 더 반짝반짝하게 말이에요.

의제 저는 "임프라브는 비옥한 땅이고, 다양성은 그곳에서 자라나는 식물이다"라고 생각해요. 임프라브의 기본 철학이 예스앤드잖아요. 기본 철학 자체가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다양성이 꽃피는데 좋은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휘동 저는 "임프라브는 수많은 다양한 나와, 수많은 다양한 친구들을 안전하게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라고 하겠습니다.

보라 와 이거 엄청 어렵네요(멋쩍은 웃음). "임프라브는 약속된 원칙에 따라 아래 다양한 스토리를 구성해 나간다는 점에서 개인의 다양성과 사회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술 매체이다".

계홍 "임프라브는 이야기가 즉흥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지금 나와 우리들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목차
임프라브와 다양성 (1)
임프라브와 다양성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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