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야기가 논문의 형태로 학계에서 인정받는 저널에 출판된다는 것은 그 글이 과학자 공동체에서 정한 ‘과학적 합리성’의 기준을 충족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과학적 합리성은 절대적 기준이 아니어서, 과학자 공동체의 역사·문화·경험에 따라 다르다. 그런 면에서, 학술적 형태로 출판되는 경우가 드문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다는 것은 학계 내부에서도 여러 충돌을 일으킨다. 익명으로 진행되는 연구 지원서 평가와 논문 심사 과정에서 그 충돌은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Episode 1. 우리 연구는 과거의 유물처럼 비판받을 것이다
2016년에 트랜스젠더 차별과 건강에 대한 연구를 하기 위해 한국연구재단에 연구비 지원을 신청했다. 5천만 원이 안 되는 금액의 연구비였다. 그동안의 논문 출판 실적이 충분했기에, 연구비를 받을 수 있을 않을까 기대했지만, 내 연구는 선정되지 못했다. 아래는 그중 한 심사자가 적은 미선정의 이유다.
“트랜스젠더 인권을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대상자와 참여하지 않는 대상자가 골고루 분포된 샘플을 구성해야만 이 연구는 대표성을 가진 객관적 연구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상기한 샘플을 구성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연구 대상을 선정함에 있어서 다양성을 반영하지 않게 되면 연구 대상자의 욕구를 전체 트랜스젠더의 욕구라고 유추할 수 없게 됩니다.”
연구팀은 트랜스젠더를 만나 데이터를 수집하는 통로로 1차적으로 성소수자 인권 단체의 도움을 받아 설문을 진행하고, 서울 등에서 열리는 퀴어 문화 축제, 성소수자 의료 기관 등을 통한 연구 참가자 모집도 고려하려 했다. 물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연구에 참여할 것이라 예상한 통로는 트랜스젠더 인권 단체를 통한 설문 조사 응답이었다. 그러니 이 심사평은 학술적으로 타당하고 올바른 것이었다.
문제는 과연 2016년은 물론이고 2022년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한국 트랜스젠더 전체의 욕구를 반영할 수 있는 샘플을 구성하는 일이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이다. 그것은 매우 어렵다. 행정기관의 협조와 충분한 돈·시간이 있다면, 우리는 서울 시민을 대표하는 설문 참가자를 정교하게 구성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서울시민이 몇 명이고 누구인지 알 수 있으니까. 그런데 한국에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트랜스젠더 인구가 몇 명인지 추산하는 연구조차 이루어진 바가 없다. 게다가 성소수자 혐오가 심각한 한국 사회에서 트랜스젠더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살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 트랜스젠더 집단에 대한 연구를 시작할 때는 가능한 통로를 최대한 활용해 연구참여자를 모집하는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퀴어 문화축제에서 부스를 차려서 연구를 홍보했고, 트랜스젠더 친화적인 병원을 통해 연구를 소개하는 홍보물을 배포했고, 성소수자 인권 단체를 통해 온라인 설문 링크를 배포했다. 2017년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
(ESC)’가 주관한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모은 2천만 원이 안 되는 돈으로 우리가 진행한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에 참여한 이는 347명이었다. 이 347명의 응답이 연령, 소득, 성별, 거주 지역을 포함한 모든 측면에서 한국 트랜스젠더 인구 집단을 대표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이 데이터를 이용해서 쓰는 논문에 항상 그 지점을 한계점으로 언급했다.
그런데 그 데이터를 이용해 외국 저명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했을 때는 그 대표성 부족을 약점으로 우리 연구를 거절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들은 한국의 상황에서 이 데이터가 갖는 과학적 가치를 알아봤다. 한국을 대표하지 못하는 트랜스젠더 347명의 데이터를 이용해 우리는 SCI/SSCI급 국제 학술지에 4편의 논문을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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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탐구란 무엇일까? 10년, 20년 뒤 한국의 트랜스젠더를 대표하는 인구 집단을 연구할 수 있는 날이 왔을 때, 다음 세대의 연구자들이 우리의 연구를 대표성이 부족했다고 지적하며 그 부족한 점을 하나하나 비판하는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한다. 그때에는 2016년 국가로부터 연구비를 받을 수 없어 시민들의 돈을 모아 진행했던, 347명 트랜스젠더가 참여한 우리 연구는 과거의 유물처럼 서문에 인용될 것이다. 연구자로서 그날을 간절히 기다린다. 그렇게 우리의 논문을 디딤돌 삼아 더 정확하고 풍성한 연구가 세상에 나올 것이다. 과학이 절대적으로 옳은 지식의 집합체가 아니라 한 시대의 가용한 자원을 활용한 최선의 설명이라고 한다면, 자신 있게 말하건대 우리의 연구는 과학적 합리성을 갖추고 있다.
Episode 2. “그것의 효과는 한 번의 생리 기간 동안 하루, 이틀밖에 되지 않는다.”
2018년 백화점, 면세점 화장품 판매직 연구를 민주노총 서비스연맹의 활동가들과 함께 진행했다. 그들이 소개해 준 현장 노동자들을 인터뷰하고 그 심층 인터뷰 속에서 작업 환경과 건강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를 찾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한 여성 노동자가 흘리듯이, 생리할 때 더 힘들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직원들은 고객용 화장실 이용이 금지되어 있었고 직원용 화장실은 건물 지하에 하나씩 밖에 없었다. 그 화장실은 거리가 멀어 가기 어려웠고, 가더라도 칸수가 부족해 오래 기다려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혼자 일하는 시간이 많은 노동자들은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우는 게 어려워 화장실에 가지 않기 위해 골몰했다. 그들은 되도록 물을 마시지 않으면서 화장실에 가는 횟수를 줄이려 했다. 계속 말을 하며 고객을 상담해야 하는 판매직 노동자로서 그 과정을 반복하는 동안 성대결절과 방광염으로 고생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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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90%가 넘는 이들이 여성 노동자인 이 업종에서 화장실에 가지 못할 경우, 여성 노동자들이 생리대를 교체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그 여성 노동자의 말을 듣고서 연구팀에서는 기존 연구들을 살펴봤다. 여성 노동자의 직장 내 생리위생
(menstrual hygiene)을 다룬 학술 논문을 찾기가 어려웠다. ‘아니 어떻게 이 주제의 연구가 이토록 없는 걸까?’ 생각하며 설문지에 지난 6개월 동안 생리대를 교체하지 못한 적이 있는지 묻는 질문과 생리대를 교체하지 못해 피부 질환을 겪은 적이 있는지 묻는 질문을 만들어 넣었다.
연구팀이 논문에서 가졌던 질문은 혼자 일하는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생리대 미교체 경험이 증가할 것이고, 그 이유는 화장실에 가지 못하는 비율이 높기 때문이라는 판단에 근거한 것이다. 그와 함께, 연구팀이 고민했던 점은 생리대 미교체 경험이 직장에서 근무하는 여성들의 우울 증상에 영향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우울 증상과의 연관성은 가능성 있는 가설이지만 그 주제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엄밀한 데이터가 필요했기에 우리 연구에서는 다루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논문의 제1 저자였던 박사과정의 학생은 이 질문을 다룬 결과를 꼭세상과 나누고 싶어 했다. 정 그렇다면 뜻대로 투고하고 심사평을 기다리자고 했다. 국제 학술지에 투고한 이 논문을 두 명의 심사자가 평가했는데, 한 명은 내가 살면서 받아 본 심사평 중 가장 호의적인 것이었고, 또 한 명은 학술적 가치가 부족해 출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편집자는 논문 게재를 거절했다. 논문 게재 거절이야 다반사지만, 후자의 코멘트 중 한 가지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생리대 미교체로 인한 경험이 사회심리적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더라도, 그것의 효과는 한 번의 생리 기간 동안 하루, 이틀밖에 되지 않는다. (Even if the experience might work as a psychosocial stress, that impact continues only one or two days in one menstrual cycle.)”
나는 연구자로서 생리대 미교체 경험과 우울 증상의 연관성을 이 논문에서 빼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했지만, 그 근거로 쓰인 이 심사평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제1 저자인 박사과정 학생과 공저자인 하버드대의 교수, 두 여성 연구자와 상의한 끝에 항의 편지를 쓰기로 했다.
‘무엇보다 여성의 생리 기간은 평균 5일로 알려져 있고, 8일까지도 지속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생리를 시작하기 전에도, 원할 때 화장실에 갈 수 없는 노동자들에게 생리대 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중요한 스트레스로 작용할 수 있다. 우리는 심사자가 여성 노동자의 생리 건강에 대해 충분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지 여부가 의심스럽다.’
학술지의 편집자는 이 항의에 대해서 형식적이고도 짧은 답장을 했고, 그 이후 논의는 진행되지 않았다. 우리는 심사자가 이 문제를 한 번도 고민해 본 적 없는 남성일 것이라 짐작했다. 이후 논문은 생리대 미교체와 우울 증상에 대한 결과를 제외한 형태로 다른 학술지에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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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3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의 건강에 대한 논문을 학술지에 투고했을 때였다. 정책적 대안을 기술하는 부분에서 ‘복직’에 대한 언급을 했다. 그러자 한 심사자가 아래와 같은 심사평을 남겼다.
“해고자의 건강을 호전시키는 개입으로 ‘복직’을 제안하고 있는데, 복직·재고용·재취업의 의미가 다 다르므로 정확한 용어를 구분해서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복직은 원래의 일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심사자의 나머지 심사평이 통찰력 있고 사려 깊은 지적이었기에, 그 말이 더욱 무겁게 다가왔다. 아무리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이 경험한 정리 해고에 부당한 지점이 있고 그들이 복직을 목표로 투쟁을 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정책적 대안을 기술하는 면에서는 현실적 고려를 해야 한다는 말에 공감이 갔다. 맞는 말이었다.
한창 복직 투쟁이 진행 중인 상황이었는데, ‘논문이 출판되었을 때, 현실 가능성을 이유로 복직을 정책적 제언에서 아예 제외한다면 어떤 결과를 낳을까?’라는 생각에 제1 저자인 박사과정 학생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며칠 뒤 해고 노동자들을 순차적으로 복직시키겠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심사자에게 답변서를 쓰면서 그 신문 기사를 인용했고, 논문은 게재가 확정되었다.
17) 그리고 2020년 김득중 지부장을 마지막으로 그 투쟁을 하던 해고 노동자들은 모두 복직이 되었다.
나와 그 논문 심사자의 짐작이 잘못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