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포그래피와
다양성
유지원
그래픽디자이너, 타이포그래피 연구자.
고려대학교 다양성위원회에서 매달 발행하는 〈Diversitas〉를 1권부터 매달 꼼꼼하게 읽었다. 사회학, 심리학, 경제학, 언어학, 과학기술 등 다양한 학문과 실무 분야에서 다양성을 둘러싼 의제가 어떻게 다루어지는지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어 유익했다.
   타이포그래피 분야에서 다양성을 둘러싼 논의는 다음 다섯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① 세계의 문자 다양성
② 글자 공간 배열 형식의 문화 다양성
③ 약자와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한 타이포그래피
④ 타이포그래피와 다양한 분야의 협력
⑤ 분야 내부 구성 인력의 다양성과 차별 문제


   이중 뒤의 두 가지인 ④와 ⑤는 타이포그래피뿐 아니라 다른 분야들도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내용이라 생략하기로 했다. 앞의 세 가지 ①, ②, ③ 중 어느 쪽을 집중해서 다룰까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하나하나 모두 소개하고자 한다. 그 편이 책자의 취지와 의도에 부합한다고 여겨져서다.
   우선 타이포그래피라는 다소 생소하게 들릴 이름의 분야를 소개해야 할 것 같다. 타이포그래피는 글자의 모양을 다룬다. 글자에는 의미도 있고 소리도 있고 모양도 있다. 의미와 소리와 모양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도 하지만, 타이포그래피에서 주목하는 측면은 그중 특히 모양이다.
   이어서, 글자는 크게 ‘글씨’와 ‘활자/폰트’로 나뉜다. 주로 금속활자 시대에는 ‘활자’, 디지털 시대에는 ‘폰트’라는 용어를 쓴다. 글씨는 사람이 손으로 한 번에 하나씩 쓰는 글자이고, 활자/폰트는 기계를 필요로 하는 글자다. 기계에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복제와 대량생산이 전제된다. 예를 들어 손으로 쓴 일기나 편지는 글씨의 영역이고, 활자로 인쇄된 책이 타이포그래피의 영역이다. SNS에 글을 올리려면 반드시 컴퓨터나 모바일 디바이스 등 기계가 필요하고, 자판으로 타이핑해서 입력해야 하며, 한 번만 올려도 수많은 사람이 같은 내용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 역시 타이포그래피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손으로 쓰는 글씨는 캘리그래피나 서예로 순수미술이나 공예 분야에 속하고, 기계로 쓰는 활자/폰트가 타이포그래피로 디자인 분야에 속한다. 글씨와 활자/폰트는 서로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기도 하기에, 타이포그래피는 크게 글자 전체를 다룬다고도 할 수 있다.
   의미를 ‘말’로 전달하는 것을 버벌(verbal)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한다면, ‘글자’는 눈으로 전달하는 시각적인 영역인 비주얼(visual) 커뮤니케이션이다. 말에서 말투가 달라지면 같은 내용이라도 전달되는 뉘앙스와 정서가 달라져서 의미마저 다르게 느껴지듯이, 타이포그래피는 눈을 위한 시각적인 말투라고 할 수 있어서 ‘말투’ 자체로도 기능적이면서 정서적인 역할을 한다. 비언어적인 층위에서도 많은 정보와 감정 교환이 일어난다.
   ‘세계의 문자 다양성’은 글자와 반응하는 인체의 생물학적인 측면, 해당 문화권의 환경 및 인류학적인 측면과 관계있다.
   ‘글자 공간 배열 형식의 문화 다양성’은 세계의 글자 문명을 둘러싼 서로 다른 역사와 생활 습관 · 가치관 뿐 아니라 기술 · 공학적 측면과도 관계를 가진다.
   ‘약자와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한 타이포그래피’는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양상을 띤다.
   이상 세 가지 주제에 대해서, 각각 구체적인 예를 한두 개씩 드는 것으로 본문을 구성하고자 한다.
세계의 문자 다양성
다국어 타이포그래피(multilingual typography)는 2000년대 이후 타이포그래피에서 국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로 꾸준히 부상해오고 있다. 2010년 이후에는 이 개념을 대하는 로마자 문자권과 그외 문자 문화권의 이해 역시 차츰 성숙해져 가고 있다.
   다국어 타이포그래피에서는 ‘논 라틴(non-Latin)’이라는 용어를 쓴다. ‘라틴’은 라틴 알파벳, 즉 로마자를 뜻한다. 세계의 수많은 문자 체계 중 로마자에만 특수한 지위를 부여하고, 나머지는 모두 ‘논 라틴’으로 뭉뚱그려 둔 것은 부당하다는 인상을 준다. 2010년대 초만 해도 국제 컨퍼런스에서 이 용어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면 로마자 문자권 네이티브들은 대체 뭐가 문제냐는 반응이 우세했다. 한 유럽 디자이너는 폰트 견본집에서 로마자의 기준으로 세리프체니, 산세리프체니 분류를 할 때 그 마지막 카테고리로 ‘논 라틴’의 항목이 있어서 그런 용어가 생겨났다는 말로, 마치 그 이유가 타당하다는 듯 일축했다.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한 사람이 있듯, 다문화적 인지 감수성이 부족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단어가 가진 기득권적인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완강하게 옹호하려는 태도는 타 문화에 대한 공감력 부족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런 태도로 로마자에 속하지 않은 세계의 수많은 문자 체계들을 대하면, 그 기준을 늘 로마자에 두게 되고, 서로 다름을 살피지 않은 채 자신들만의 기준을 강요하게 되며,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나름의 복잡하고 필연적인 사정들은 ‘미개’하고 ‘열등’한 것으로 치부하게 된다.
   여기에 대해 나는 2012년 이후로 다국어 타이포그래피 문제에 있어 서구 일변도인 ‘글로벌리티(세계화)’에 대항하는, 쌍방향적인 ‘인터로컬리티(간지역성)’의 개념을 제안해온 바 있다.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의 학회지 〈글짜씨 11〉(2005년)에는 ‘내부자의 잠재력을 일깨우는 타자의 시선: 글로벌리티에 대항하는 인터로컬리티’라는 대담을 진행해서 실었다. 이때 대담자로 초청한 인도의 타이포그래퍼이자 인도 공과대학 구와하티 캠퍼스(Indian Institute of Technology, Guwahati)의 교수 우다야 쿠마르(Udaya Kumar)는 인도의 복잡한 언어 및 문자 환경 속에서 본인의 전문 분야인 타밀 문자로 디자인하는 일에 대해 이런 답을 했다.

   “인도는 다문자 국가입니다. 어떤 문자는 서로 완전히 다르고, 또 어떤 것들은 서로 비슷합니다. (…) 제게 더 익숙한 타밀 문자에만 국한해서 볼 때, 로마자 글자체 디자인의 원칙을 적용하면 타밀문자와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가장 도전적으로 어려웠던 부분은 측정 단위와 체계가 다르다는 점이었습니다.”

   한국에 비해 영어가 깊이 침투해있고, 또 미디어 환경이 로마자 문자권의 기술력에 의해 주도되는 인도의 상황에 대해서는 이런 우려를 표했다.

   “대다수의 인도 젊은이가 모국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어요. 초등학교, 중·고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수업을 영어로 한다는 점이 주된 이유 중 하나입니다. 도시 지역에서 더 그렇습니다. 영국 제국주의의 결과입니다. 각 지역 언어를 쓰는 학교는 대개 시골 지역에만 국한되어 있어요. 전도유망한 일자리들의 영어 의존도가 심하다는 점이 또 다른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녀를 반드시 영어를 쓰는 학교에 진학시키고자 합니다.
   영어의 영향에도 인도의 모국어가 급격한 변화를 모면한 것은 자체로 풍부한 유산과 문학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수많은 인구가 시골 지역에 살면서 지역 언어를 소통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어요. 하지만 로마자에 크게 기반을 둔 기술 발전의 이유로 이런 시나리오는 달라지고 있습니다. 인도의 지역 언어들은 아직 모바일이나 스마트폰, 태블릿과 컴퓨터 같은 디지털 매체를 완전히 따라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디지털 기기에 지역 언어가 탑재되도록 하고, 지역 언어들이 주요한 기능을 수행하도록 보장하는 것이 디자이너로서 우리의 책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일이 성취되기 전까지는 우리는 세계화에 소모되고 말 것입니다. 이런 일은 결코 겪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세계화에는 좋은 점도 있습니다만, 그 때문에 토착 문화와 일상이 희생되어선 안 됩니다. 양자가 조화를 이루기를 바랍니다.”


   이역만리 인도의 문자들이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문자 체계는 인류가 보유한 지적 유산이다. 글자는 그 지역의 자연환경 및 생활 습관, 행동 양상뿐아니라, 언어를 비롯한 사고방식과 사회 규율 및 가치관도 반영한다. 해당 문화권의 종교와 사상 등 수많은 의미 체계와 포괄적으로 접목되어 있어서, 로마자와 같은 타 문자 문화권에서 이런 총체적인 양태에 대한 이해 없이 기술적으로만 접근하면 해당 문자 문화권의 사람들은 뭔가 어색하고 부조화스럽다고 느끼게 된다.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 잡지에서 한 지질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 “땅 위에 드러나는 단면을 보고 지구 내부의 모습을 유추해서 상상하고 이해한다.” 마찬가지로, 글자도 원초적으로는 흔적이고 자국이다. 138억 년 우주의 흔적이 밤 하늘의 별이고, 38억 년 지구의 흔적이 지질이라면, 인간은 글과 그림이라는 고도한 흔적을 남겨왔고 그 흔적 뒤에는 거대한 사회와 문화와 역사의 체계가 연계되어 있다. 글자는 특수한 사람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따라 쓸 수 있어야하므로 효율적인 신체 움직임을 반영하는데, 인간의 행동과 움직임은 인류보편성과 문화특수성을 동시에 가진다. 문화권마다의 자연환경과 생활방식에 따라 다양하게 달라진다. 쉽게 구할 수 있는 필기도구 역시 그에 따라 달라진다.
   만일 인류 전체가 하나의 문자만을 쓴다면, 다른 숱한 가능성들이 박탈된 채 좁은 시각에만 매몰되며 익숙해져 가리라 예측할 수 있다. 변화만이 상수라고 하는 미래에 어떤 변화가 올지 모조리 구체적으로 예측하기란 어렵다. 그렇다면 다양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그 가운데에서 새로운 상황에 더 적절한 대처 방식을 찾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모두가 똑같이 행동하면 특정한 변화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뇌과학에서는 어린이들이 이것저것 호기심을 가지고 장난을 쳐보며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이 훗날 위기를 겪을 때 유연하게 대응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많은 시도의 경험을 보유할수록, 변화에 대처하는 힘이 커진다는 것이다. 한 가지 태도와 사고의 형식으로만 한정해서 대상에 접근하면 그 상을 왜곡하기 쉽다.
   다양한 종류의 다름을 겪으면, 다름을 반추하고 다름을 대하는 태도가 점차 성숙해지게 된다. 여러 문자들을 살피는 일은 한 언어권이나 문자 문화권에만 얽매어 있던 고정관념을 깨주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문자는 우리 문자를, 그리고 우리 자신을 다시 보게 한다. 국면들을 다양한 시야에서 보게 한다.
   로마자의 독식은 세계 문자의 다양성을 올바르게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도, 디지털 미디어 기술 속에서 소수 문자들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그리고 현상과 진실을 이해하고 그에 대해 표현하는 인간 사고의 가능성을 편향되게 좁힌다는 점에서도, 문자 사용자로서 우리가 자각하고 있어야 할 문제다. 세계의 문자들이 부르는 다름의 노래에 귀를 기울여보기를 바란다.
글자 공간 배열 형식의 문화 다양성
타이포그래피는 기존의 글자를 이해하며 새로운 글자를 디자인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이미 디자인된 글자들을 공간과 시간 속에 재배열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도출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반도에서는 고려 시대에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가 발명되었지만, 1883년 근대 인쇄기관인 박문국이 설치되고 일본을 통해 신식 납활자가 들어오면서 전통식 동활자는 서구식 인쇄로 전면 대체되어 갔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진 동아시아 전통 금속활자 인쇄와 유럽의 구텐베르크식 금속활자 인쇄는 각각의 메커니즘이 그 세부까지 다르다. 근대 이후로 우리는 구텐베르크식 메커니즘을 이어받고 로마자 문자 문화권에서 기술력을 주도해 온 기계와 소프트웨어의 토대 위에서 한글과 한국어를 쓰고 있다.
   한글이 태어난 공간은 동아시아 전통식 인쇄 공간, 생활 공간, 인식과 사유의 공간이었다. 같은 한글이라도 근대 이전과 이후는 상정된 공간의 체계와 단위, 배열과 운용방식이 달랐다. 오늘날의 디바이스나 특정한 디지털 기술환경 속에서 로마자에 비해 한글이 쓰기 불편하거나 보기 좋지 않다면, 그 이유는 한글이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지 않고 있어서이기도 하다. 한글 사용자로서 우리 모두가 이 사실을 자각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림 1〉 윗쪽의 귀문도와 직금도를 보자.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가 여동생 명온공주에게 보낸 편지가 실린 『익종간첩(翼宗簡帖)』 속 두 페이지다. 효명 세자가 한 지면 편집 디자인이자 타이포그래피라고 할 수 있는데, 직접 고안한 것은 아니고 중국 『소야란직금도(蘇惹蘭織錦圖)』 등에 전례가 있다. 암호를 푸는 게임 같은 유희적인 목적을 가진 타이포그래피이다.
   작은 글자들을 자세히 보면 뒤집힌 글자가 있다. 화살표 같은 보조 기호가 없어도 종이를 돌리며 읽는 방향을 따라갈 수 있다. 글자가 배열된 모양과 형식이 이런 비언어적인 단서를 알려준다. 만약 우리가 오늘날 컴퓨터로 이런 배치를 디자인한다면, 부지불식 간에 글자들을 모두 위에서 아래로 쓰고 화살표 등으로 방향을 표시하게 된다. 이 문서를 쓴 사람은 종이를 빙글빙글 돌려가며 글씨를 썼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으로만 흐르는 오늘날 문서의 한 방향 고정시점과는 달리, 사방팔방의 방향성을 가진 다방향 · 다시점이 생겨난다.
   우리가 문서나 책 속의 긴 텍스트를 읽을 때 우리의 몸은 고정되고 정지한 것 같지만, 눈동자도 움직이고 조용히 읽어도 소리를 시뮬레이션 한다. 문서를 작성하는 사람에게도, 그 문서를 바라보고 의미를 파악하는 독자에게도, 몸은 개입한다. 그런데 서구와 동아시아의 옛 문서는 단지 언어와 문자만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배열 방식이 다르고 몸이 개입하는 방식이 다르다.

그림 1.

(위) 『익종간첩』의 직금도와 귀문도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중간) 화상회의 소프트웨어 Zoom의 참여자 갤러리 화면
(아래) 필자가 제안하는 개선 화면


   서구 로마자는 1차원 선형적인 전개 방식으로 출발해서 일렬로 놓인다. 한편, 한자와 한글은 음절을 단위로 하는 정사각형을 기본 모듈로 삼기에, 사방으로 펼쳐지는 전방위 확장성을 가진다. 이렇게 서로 다른 문자의 공간적 속성으로 인해, 전통사회의 동아시아인들은 정보를 처리하고 사물을 인지하는 방식도 지금과 달랐다. 동아시아와 유럽에서는 공간과 시간을 인식하는 틀로서의 수학적 접근이 달랐다. 비슷한 문제를 상정하고, 비슷한 근삿값을 도출하지만, 해답에 다가가는 풀이 방식과 몸의 움직임이 전적으로 달랐다. 근대 이후에는 한국어와 한글로 배우지만 교육 방법론은 서구식을 따르고 있고, 지금의 우리에게는 동아시아 전통 수학의 지식이 오히려 낯설다. 더불어, 이 다방향 · 다시점의 움직임은 기운생동(氣韻生動)이라는 미학적 가치관과 상통하기도 한다.
   한번은 늘 하듯이 글자를 지면의 위에서 아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흘리는 대신, 동아시아 전통 지면에서처럼 방사형으로 놓는 그래픽을 컴퓨터로 만들어본 적이 있다. 이론적인 것을 몸을 써서 직접 실천해보면 새로운 차원의 통찰을 얻게 된다. 현대적인 컴퓨터와 소프트웨어를 써서 이런 방식으로 문서를 만들면 고생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뒤집어진 글자에서 오타가 나면 고치기도 번거롭다. 보는 사람에겐 어렵지도 않고 생동하는 재미도 있지만, 만드는 사람에게는 효율이 떨어진다. 그러니까 사실 인간이 컴퓨터를 컨트롤한다고 생각하지만, 컴퓨터도 인간의 몸에 제약을 가하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무슨 연유로 인쇄가 발명된 후에도 인쇄본이건 필사본이건 계속 저렇게 빙글빙글 돌려서 보는 방식의 문서를 만들었을까? 만드는 사람에게 이 방식이 번거롭다면 불편까지 무릅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깨달은 바가 있었다. 전통사회 한국인의 생활 공간은 좌식인 문화였기에 이런 방식이 편리했던 것이다. 오늘날 컴퓨터 작업을 하면 앉은 사람의 자세도 고정되어 있고, 모니터도 수직 방향으로 고정되어 있다. 하지만 좌식 공간에서 낮은 상을 바라보면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이 생겨나고 종이를 돌리기도 편해진다. 육중한 가구라기보다는 언제든 움직이고 쉽게 옮길 수 있는 작은 탁자에서 작업을 했기에, 이렇게 탁자나 종이를 빙빙 돌리거나 스스로 몸을 이리저리 조금씩 움직였고 그 결과 이런 글자 배열의 문서가 나올 수 있었다. 입식 공간에서 무거운 가구가 놓이면 그 공간의 기능이 고정되지만, 좌식 공간은 방 하나가 침실도 되고 작업실도 되고 식사 공간도 되고 응접실도 된다. 이런 유연한 공간 사용과 생활 습관이 글자의 공간과도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 유연한 대처력은 디지털 화면 공간에서 글자가 운용되는 시대에 변화에 대응하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공할 수 있다. 오래된 미디어의 공간 형식이 어느 순간 우리 곁에 돌아와 있는, 우리가 잘 아는 예들도 있다. 가령 인터넷으로 긴 글을 읽을 때 우리는 스크롤을 한다. 스크롤은 두루마리라는 옛 형식에서 왔다. 두루마리는 유럽에서는 1세기 경, 동아시아에서는 7-8세기 경에 지금과 같은 육면체 공간인 코덱스 방식의 책으로 대체되었지만, 인터넷에서 긴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 슬그머니 우리 곁에 돌아온 것이다.
   다시 〈그림 1〉 위쪽의 귀문도와 직금도를 보자. 일렬식 공간 배열 아닌 다방향에 다시점 공간 배열일 뿐 아니라 90도와 그 배수가 아닌 각도, 그러니까 사각형 아닌 ‘육각형’과 ‘45도 사선 방향으로 기울인 사각형’도 나타난다. 종이 매체에서는 직각이 아닌 각도를 운용하게 되면 비용의 낭비가 크다. 대량 생산을 위해 표준화한 공정에서는 미터법에 기반한 사각형 종이의 규격에 따라야 손실이 적다. 하지만 디지털 화면은 이런 문제로부터 다소 자유로워진다.
   가령 코로나로 인해 익숙해진 화상회의 소프트웨어인 줌(Zoom)에서 참여자들을 보여주는 갤러리 화면을 보자(〈그림 1〉 가운데). 사람들을 한눈에 보기 좋도록 인간의 인지에 최적화한 것이 아니라, 모니터 규격을 그저 가로 세로로 분할할 데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의 표준 규격에서 벗어난 이런 여러 문화권의 공간 배열 방식을 많이 접하다 보니, 이런 상황에서는 정육각형 벌집 형태가 유리하겠다는 판단이 금방 든다. 그 아래는 이런 판단에 따라 필자가 줌 갤러리 화면의 내용은 그대로 두고 배치 형식만 다르게 만들어본 것이다. 가로로 긴 직사각형 형태에 비해 불필요한 사적인 생활 공간이 덜 보이고, 정육각형은 둥근 얼굴의 형태에 더 가까워 주목도가 높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간의 배치에서 주목도의 위계가 보다 균등해지고, 한층 응집력 있게 모여서 한 눈에 잘 들어온다. 여러 문화권의 다양한 방식을 경험하고 적용해보는 것은 디지털 미디어에서의 공간 배열에 여러모로 영감을 줄 것이다.
약자와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한 타이포그래피
정상을 규정하는 기준은 사회마다 다양하고 시대에 따라 변한다. 어떤 특정한 속성만을 정상으로 간주해서 그에 강제로 순응하게 한다면, 우리 사회는 비정상적인 사람들로 넘치고 그로 인한 부조리와 울분, 모멸감이 쌓이게 된다.
   타이포그래피 역시 다수자와 평균 개념에만 그 기준을 둔다면, 소통을 위한 본연의 목적을 잊고 평균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좌절을 안길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신체적이고 사회적으로 특수한 조건에 따른 다양한 기준들과 보호 장치 역시 필요로 한다.
   한국에서는 주로 서울에 사는 신체 건강한 성인 남성이 기준으로 상정된다. 성별, 연령, 지역, 신체 건강 상태 등에 따른 기준이다. 그에 따라 지역적으로는 지방 거주자, 신체 상태로는 환자와 장애자, 성별로는 여성, 연령으로는 고령자와 어린이들이 표준의 범주 바깥에 위치하는 약자와 소수자가 된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 사회 구성원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기준에서 제외 될 때 기준 바깥에서는 큰 불편이 생기게 되고, 사회 속의 불편들은 서로 연결된다.
   성별이나 연령 등에 따라 달라지는 신체적 조건을 살피려면 새로운 기준을 두어야 한다. 이렇듯 기존의 규칙에 수정을 가하려면, 그 규칙이 적용되어온 기존의 기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은 평균으로 상정되어온 기준을 살펴보자.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은 불특정 다수 사용자를 전제로 한다. 적절한 폰트를 만들거나 고르는 데에는 저마다의 기준이 필요하다. 그 기본이 되는 기준으로 세 가지가 있다. 가시성, 판독성, 가독성.
   ‘가시성’은 시선을 사로잡는 힘이고, ‘판독성’은 서로 다른 글자를 빠르게 판독하게 해주는 힘이며, ‘가독성’은 긴 글을 읽을 때 피로감을 느끼지 않게 해주는 힘이다. 패션에 비유하면 가시성은 편하지는 않더라도 사람을 돋보이게 해주는 하이힐에 해당하고, 가독성은 42.195km를 지치지 않고 완주하게 해주는 마라톤화에 해당한다. 마라톤화를 신고 뛰어봐야 디자인이 잘 되었는지 판단할 수 있듯이, 가독성 높은 폰트 역시 오래 읽어봐야 기능적으로 디자인이 잘 되었는지 알 수 있다.
   가시성은 큰 글자와 제목, 짧은 단어 정도의 영역이며, 가독성은 작은 글자와 긴 글의 영역이다. 우리 눈은 작은 글자일수록 점점 디테일을 보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큰 사이즈에서 아름다운 글자와 작은 사이즈에서 일 잘하는 글자는 서로 영역이 다르다. 글자는 큰 글자에서 작은 글자로 이행할 때 ‘보기’에서 ‘읽기’로, ‘비주얼(visual)’의 영역에서 ‘옵티컬(optical)’의 영역으로 이동하며 기능성이 점점 중요해지게 된다.
   가시성이 작동하지 않으면 심미적인 쾌적함이 떨어지고, 판독성이 작동하지 않으면 정확한 정보를 읽기 어려워져 위험한 상황이 될 수 있으며, 가독성이 작동하지 않으면 눈과 신체에 큰 피로가 온다. 즉 일상의 영역에서 디자인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면, 그 사회를 구성하는 불특정 다수가 배려를 덜 받게 된다. 사회적인 피로감과 모멸감이 쌓이게 된다.
   이 불특정 다수의 기준이 지금까지는 건강한 성인 남성의 신체에 맞춰져 있었다면, 이제 타이포그래피는 고령자와 어린이, 왼손잡이나 자폐 등 소수 성향의 사람들에 대해 새로운 기준을 두고 규칙을 수정하며 배려할 필요가 있다.

고령자 국내에서는 타이포그래피 분야에 대한 인식이 낮고, 특히 가독성 영역에서의 피로가 만연해 있다. 〈그림 2〉의 오른쪽 위와 같은 제품이나 의약 설명서의 경우, 읽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기본적으로 눈을 위한 배려가 갖춰져 있지 않다. 이 의약품에서 ‘성인 1일 3회’라는 복용량과 ‘데워 마시되, 전자레인지에 넣으면 위험하다’는 내용은 일반 사용자에게는 큰 의미가 없을 ‘시트르산나트륨수화물’ 같은 내용에 비해 뚜렷이 구분되어 전달되어야 할 텐데, 앞의 두 가지 정보를 알아내려면 젊은 시력으로도 불빛이 밝은 데에 가서 시려 오는 눈을 비비며 한참을 찾아야 한다. 이런 상황이면 고령자들은 더 큰 불편을 감당 하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림 1.

(위. 왼쪽) 고령자의 시선 추적. 인지심리학자 키스 레이너의 논문을 바탕으로 타이포그래피 연구자 소피 베이어가 만든 학술발표 자료 화면(출처: Age-related deficits and their effects on reading, Sofie Beier, ATypI 2019, Tokyo, Japan).
(위. 오른쪽) 한국어 사용자들이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읽기 힘든 타이포그래피의 예. 사용자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중요한 정보조차 위계화되어 있지 않다. 아래는 텍스트를 확대한 모습.
(아래) 글씨를 처음 익히는 어린이를 위한 독일 초등학교 교과서 글씨체. 20세기 내내 관련 연구가 진행되었다.


   고령자를 위한 타이포그래피는 흔히 생각하듯 글자를 크게 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나이가 들면 신체에 변화가 일어난다. 글자와 관련해서는 시력뿐 아니라 인지의 형식까지 달라진다. 어린이들이 움직이는 것과 새로운 것에 반응한다면, 고령자들은 고정된 것과 익숙함에 반응한다. 이것은 진화론 적으로도 설명될 것 같다. 어린이들은 앞으로 펼쳐진 미래에 계속 새롭게 적응해가야 하지만, 노인들은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과 지혜를 활용한다. 기술과 사회가 지금처럼 급변하지 않던 시대에 연령에 따라 인간이 적응해온 방편이었을 것이다. 오늘날처럼 시시각각 변화가 가속되는 사회에서는 노인들이 새로운 것에 적응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성격이 완고해지는 듯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현역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디자이너들은 주로 2~30대이고, 디자인 결정권자는 4~50대인 경우가 많다. 노인의 신체와 인지를 경험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그분들 가까이에서 과학적인 연구로 추론해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디자인이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있을지 모른다는 자각도 필요하다. 새롭고 기발한 장치는 어린이나 젊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 있지만, 고령자들은 피로감을 느끼며 새로 적응하기를 포기하기 쉽다. 익숙함으로부터 안정감을 느끼게 해야 한다.
   글자 크기는 클수록 좋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지면이나 화면에는 늘 제한이 있고 글자의 크기, 전달하려는 단어 및 메시지의 양, 공간의 면적은 함수 관계를 이루기 때문에 항상 적정한 선이 있다. 너무 커지면 감정적으로도 공격적인 인상을 줄 수 있다. 다만 시력 저하가 오기 전의 젊은 눈이 잘 적응하는 긴 글의 평균 글자 크기보다는 다소 큰 사이즈를 갖도록 주의할 필요는 있다.
   〈그림 2〉의 왼쪽 위 그림은 인지심리학자이며 시각 인식 전문가인 키스 레이너(Keith Rayner)의 시선 추적 연구를 타이포그래퍼 소피 베이어(Sofie Beier)가 도해한 것이다. 인간의 눈은 텍스트를 읽을 때, I, t,o,o,k… 이렇게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덩어리 단위로 도약을 한다. 이것을 ‘안구 도약 운동(saccade)’이라고 한다. 젊은 독자와 70세 이상 나이 든 독자는 그림에서처럼 안구 도약에 큰 차이를 보인다. 고령자들은 한 번에 시선이 오래 고정된 채 머무르고 파악하는 분량이 많아 도약 거리가 긴 대신, 시선이 도약하는 운동량은 적다. 그리고 다시 뒤로 돌아가는 역행이 자주 일어난다. 이렇게 되면 글자 크기가 너무 커져도 내용 파악에 지장을 준다. 글자가 지나치게 커져서 행갈이가 자주 일어나면 오히려 인지와 기억에 큰 방해가 된다.
   글자와 글줄, 텍스트 주위로 흰 공간을 넉넉하게 주어서 눈을 편안하게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이 흰 공간을 ‘화이트 스페이스(white space)’라고 한다. 흰 공간이 많은 것은 젊은 사람들의 독서에도 편안함을 준다. 다만 읽기에는 편해도 전체적인 텍스트의 짜임새가 느슨해 보이는 터라 디자인이 타이트하고 세련되어 보이지 못한다는 점이 단점이다. 디자인의 심미성을 추구하는 잡지, 또는 한 지면에 많은 정보를 담아서 치열한 인상을 주어야 하는 신문에서는 흰 공간을 상대적으로 적게 주는 경향이 있다.
   이런 측면들을 고려하면 〈그림 2〉 오른쪽 위의 의약품 설명서처럼 우리 일상에 흔한 가독성 타이포그래피의 사례가 어떤 불편을 주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의약품 사용법은 나이 드신 분들이 참고해야 할 경우가 많은데 신문보다도 정보가 빽빽하다. 지면 공간이 부족하면 중요한 정보만이라도 짧게 요약하여 주목하게 만들어서 위계를 차별화하는 등의 장치로 배려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 고령자와 달리, 현역으로 활동하는 젊은 성인들은 모두 한때 어린이였다. 그래서 어린이에 대해 잘 알고 잘 이해한다고 잘못 생각하기 쉽다. 어린이들은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고 의사를 관철시키는 데에 어른보다 어려움을 겪는다. 당사자로서의 어린이가 겪는 일은 어린이의 언어로 언어화하기 어렵다.
   2019년에 〈초등학교 성장 단계에 따른 국어 교과서 타이포그래피 제안: 쓰기의 행동 양상 및 읽기의 감각과 인지 양상〉이라는 교과서 연구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초등학교 1학년, 3학년, 5학년 교실의 수업을 참관한 바 있다. 타이포그래피 전문가의 시선으로 교육 현장을 직접 관찰한 결과, 현행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는 어린이의 입장에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있는 여러 요인들이 눈에 띄었다.
   어린이들의 작고 약한 신체와 아직 미숙한 인지에는 글자 크기뿐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성인과는 다른 기준들이 적용되어야 한다. 읽기의 경우, 글자에 갓 익숙해지기 시작하는 어린이들에게는 판독성의 문제가 가독성 이상으로 부각되는 식이다. 연구를 진행하며 어린이의 정서나 심리에 비해 몸과 운동을 배려하는 연구와 문헌이 국내에 무척 드물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전술한 보고서에는 몇 가지 포괄적인 제안을 담았는데, 여기서는 그중 ‘쓰기의 행동 양상’에 관해서만 예로 들고자 한다. 그중 두 가지를 들자면, ‘종이’와 ‘쓰기 교본용 글씨체’가 개선되어야 한다.
   첫째, ‘종이’의 문제에 있어서 교과서는 책인 동시에 글씨를 쓰는 공책의 성격을 가지는 특수한 매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책은 읽기의 공간이고, 공책은 쓰기의 공간이다. 그런데 책의 기능에만 치중해, 공책과 쓰기의 기능이 간과된 측면들이 보인다. 인간의 몸과 정서에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재질과 물성 등 물리적인 조건이 적절해야 한다. 글씨 쓰기에 있어 사용자 환경에 해당하는 것은 종이의 상태다. 책과 공책, 드로잉 북 등 용도에 따라 다른 성격의 종이가 선택된다. 교과서에서는 책으로서 그래픽과 그림의 발색이 선명한 것도 중요하지만, 공책으로서 힘을 덜 주고도 편안하게 글씨가 써지는 것 역시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현행 국어 교과서는 전자의 시각적인 효과만 고려하느라 후자가 갖추어야 할 어린이 인체 친화성을 크게 놓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쓰기란 종이와 필기도구와 인간 신체 간의 상호작용이다. 글씨를 쓸 때는 인간의 신체와 필기도구, 종이가 서로 힘의 줄다리기를 한다. 초등학생은 신체가 아직 발달 중이고, 쓰기 도구로는 주로 연필이 권장된다. 연필은 거친 표면에 갈려야 흔적이 잘 남겨지는 필기도구다. 그런데 지금 교과서에서는 코팅된 종이를 사용한다. 따라서 종이가 받아주어야 할 힘이 어린이에게 지나친 부담으로 전가되고 있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화려한 그래픽 모양새와 발색이 좋은 인쇄 품질에 더 가치를 둔 터라 코팅 종이를 택한 듯하다. 이렇게 되면 글씨를 쓰기 싫어질 뿐만 아니라 힘이 과도하게 든다. 보다 적절한 재질의 종이로 대체할 필요가 있다. 그 종이는 어린이들이 하루 종일 씨름하는 생활 공간이다.
   공책의 역할도 해야 하는 교과서의 종이는 눅눅하지 않고 사각사각하게 써지는 단단한 강도, 힘을 많이 들이지 않아도 연필 색을 안정감 있고 산뜻하게 재현하는 표면 텍스처, 연필 쥔 손에 부드러운 질감, 연필이 미끄러지지 않고 색이 균질하게 묻는 재질, 연필 가루가 번져 손에 묻어 지저분해지지 않고 지우개로 잘 지워지는 등의 쾌적한 쓰기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교과서는 글자를 읽는 책이기도 하니, 눈에 편한 백색도 역시 필요하다.
   둘째, ‘국내 교과서의 쓰기 교육용 글자체’의 문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아쉽다. 한 가지는, 초등학생들이 쓰는 연필과 달리 펜으로 쓴 글씨여서 필기도구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1987년 5차 교육과정부터는 연필 아닌 펜으로 쓴 글씨가 교과서에 교본으로 사용되고 있다. 다른 한 가지는, 어른의 노련한 글씨가 첫걸음부터 본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막 글씨 쓰기를 배우는 어린이들에게 이렇게 서예에서 보이는 붓의 강약과 속도까지 갖춘 어른 글씨체를 바로 목표로 해서 따라 쓰게 하면 너무 어렵고 복잡하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피아노 교육에 비유하면, 바이엘과 체르니를 거치지 않은 채 쇼팽부터 치는 격이다. 이런 글씨체를 본으로 채택한 것은 과학적 근거가 아니라 어른 시각으로 판단한 보수적인 관습에 의존한 결과라고 짐작된다.
   따라서 긴 안목으로 어린이의 신체 발달에 맞게 단순화한 쓰기 교육용 한글 폰트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그림 2〉 아래를 보면, 독일의 초등학교 교과서의 공식 교본용 글씨체들은 성인의 글씨체보다 훨씬 단순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단순한 글씨체는 성인의 글씨로 이행하는 중간 과정의 단계이다. 독일에서는 20세기 초부터 쓰기를 배우는 어린이용 글씨를 단순화한 폰트로 개발하는 데에 깊은 문제의식을 가졌고, 이후 전개 양상은 복잡했지만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초등학교 교육 현장에 반영되고 있다. 어린이의 작은 손과 충분치 않은 악력, 아직 정교하지 않은 단순한 움직임뿐 아니라 손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신체 움직임의 리듬까지 배려한 중간 단계 글씨체를 개발하는 데에 많은 노력을 들였다.
   초등학생의 글씨 중에 비교적 모범적이고 또박또박 쓴 글씨들을 살펴보면 초중종성의 음소들이 크고, 부리가 없으며 형태가 단순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런 형상에서 드러나는 어린이 신체의 편의를 연구하고 효과적으로 접목해서, 노련한 어른의 글씨로 단계적으로 성숙해갈 수 있도록 초심자형 글씨 형태를 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리라 보인다.
   어린이들이 쓰기와 읽기를 학습하는 글자의 타이포그래피적 공간 환경을 제공하는 것은 교과서와 교재다. 좋은 타이포그래피와 적절한 물성을 갖춘 교재를 확보하는 것은 어린이의 신체와 정서를 살피고, 학습 능력을 고양하게 할 뿐 아니라, 감수성을 회복하고 자존감을 보호한다는 점에서 교육적이고 사회적인 의의가 있다. 또 글자와 관련된 활동에 대해 어린이가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으로 가질 수 있는 부정적인 거북함을 줄이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다.
   사회역학자 김승섭은 성인 남성의 몸을 표준화된 인체로 여겨온 사고방식이 여러 문제점을 낳고 있으며, ‘표준화된 신체’를 가진 남성을 기준으로 측정된 수치가 적용되는 동안 남성 아닌 여성, 성인 아닌 다른 연령층은 피해를입고 있다고 밝혔다. 1) 몸에 맞지 않아 불편하고 아팠던 경험들은 우리가 인지하고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몸에 새겨지며, 우리 몸은 스스로 말하지도 인지하지도 못하는 상처까지 기억한다. 어린이들은 불편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인지하거나 표현하지 못할 수 있다. 이것은 사회적 고통과 아픔, 분노와 모멸로 쌓여간다.
   어린이의 몸은 사회적 약자의 몸이다. 이런 약자들을 대할 때는, 기존의 관습에서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해서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라고 여겨져온 그간 ‘상식’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글자 및 글자를 둘러싼 환경을 초등학생들의 연령별 신체 상황과 세심하게 일치시킬 필요가 있다.
맺으며
앞서 언급했듯 디자인의 영역에 속하는 타이포그래피는 공공 영역에서 복제와 대량생산을 전제로 하며 불특정 다수를 향한다. 단일 분야 자체가 처음부터 시각 예술과 경영과 공학의 속성을 동시에 안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 보니 소수 문자나 소수자를 향한 타이포그래피 대책에 대해서는 불가피하게 비용 문제가 제기되곤 한다. 여기에 대해 답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다양성’이다. 여러 가지 기준에서 평균 바깥에 위치하는 사람들도 엄연한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다. 구성원들의 불편은 서로 연결되며 우리에게 돌아오기에, 특수한 집단만의 문제로만 다루어질 것이 아니다. 세계의 문자들은 그 일원들이 공존하는 생태계를 도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본주의적인 강자의 논리에 대응하는 힘은 다양성에 있다.
   모든 개인들은 존중받아야 한다. 서로 다른 존재로서 존중받아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세계의 모든 문자 역시 존중받아야 한다. 그 문자에게 꼭 맞는 옷과 집이었던 공간 전개 방식도, 문화적이고 기술적인 환경도 존중받아야 한다. 그리고 문자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이 존중받아야 한다. 연령, 성별, 지역, 신체 조건과 관계없이 존중받아야 한다.
   싱할라 문자를 쓰는 사람도, 타밀 문자를 쓰는 사람도, 로마자를 쓰는 사람들 못지않게 편안하고 기쁘게 문자 생활을 하기를 바란다. 한글이나 한자, 티벳 문자, 아랍 문자에서 고유하게 전통적인 공간을 운용해온 방식이 새로운 시대의 미디어에 새로운 방식의 시각과 통찰, 문제 해결의 단서를 제공하기 바란다. 그 다양한 방식들이 전 세계 글자 사용자들에게 다시 확장되어 보다 많은 사람들의 글자 생활에 즐거움과 편리함을 주기 바란다. 나이가 들어 시력과 인지 양상이 변화한 어르신들도, 모국어 문자에 막 익숙해지기 시작하는 어린이들도, 왼손잡이들도, 자폐나 다양한 신체적인 증상이 있는 사람들도, 글자를 읽고 쓰고 익히기가 어려워 곤란해서 눈물 흘리는 일이 결코 없기
목차
타이포그래피와 다양성
한국어에 숨은 가장 일상적인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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